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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천년 도읍지, 경주의 밤을 걷다

 

[박광일 여행작가·㈜여행이야기] <처용가>는 신라 역사의 생각지 못한 부분을 제공해준다. 처용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논란이 있지만 ‘동해 용왕의 아들’이란 점에서 외국인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 그가 밤새도록 서라벌에서 놀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처용이 아내를 범한 역신(疫神)을 용서하는 대범함을 보여 전염병을 막는 상징이 된 것이 중요한 의미로 전해지긴 하지만 서라벌, 경주의 밤이 화려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주는 우리나라 도읍지를 대표하는 도시다. <삼국사기> 기준으로 무려 8년 모자라는 천년 동안 신라의 도읍지 역할을 했다. 서라벌의 지위를 보여주는 것 중 하나로 서울과 경주가 이름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서울’이란 이름이 경주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이다. 서라벌 발음이 변해 ‘셔블’로, 그리고 다시 서울로 변했다는 얘기다. 서울은 처음에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도읍지를 가리키는 보통명사였다. 그러던 중 한양과 경성이던 곳이 서울이 됐으니 사람들이 여기를 서울로 불렀기 때문이다. 도시 이름으로 지금의 서울이 공식 채택된 것은 1946년이다.
 

경주는 역사유적이 가득하다. 답사는 낮이 정석이지만 요즘 경주는 저녁, 밤도 화려하다. 곳곳에 만들어 놓은 형형색색의 조명이 낮에 보는 것과는 다른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무엇보다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 즐겼을 서라벌의 분위기를 상상할 수 있다. 조명은 옛 서라벌의 중심지를 기준으로 설치돼 있다. 대릉원 옆 공원처럼 꾸며진 고분에서 시작하면 좋다.

 

 

유물 특징으로 지은 고분 이름들

 

첫 답사 장소인 노동동, 노서동 고분군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노동동 고분군은 단일 무덤으로 경주에서 가장 큰 봉황대를 중심으로 네 개의 무덤이 있다. 금령총, 식리총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길 건너에 있는 노서동 고분군은 14기의 무덤이 있는데 유명한 금관총, 서봉총, 호우총 등이 있다. 이 동네 무덤의 특징은 이름을 가진 무덤이 많다는 것이다. 봉황대처럼 전설 때문에 이름이 생긴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발굴 과정이나 유물의 특징을 참고했다. 배경에는 일제강점기에 발굴이 이뤄진 것과 관련이 있다. 
 

1921년 금관총 이래 조선총독부는 여러 고분을 발굴했다. 금관총은 최초로 금관이 발견된 무덤이며 식리총은 화려한 장식을 한 금동 신발, 금령총은 금동 방울, 호우총은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 그릇이 나왔다. 서봉총은 조금 더 복잡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서봉총의 ‘서’는 스웨덴을 뜻하는 ‘서전’의 앞글자다. 이 무덤을 발굴한 사람이 당시 스웨덴 왕자였던 구스타프였다. 그리고 이 무덤에서 봉황 장식이 있는 금관이 발굴된 것이다. 그래서 봉황의 ‘봉’자를 붙여 서봉총이란 이름이 붙었다. 
 

최근 서봉총을 재발굴하며 새로운 유물을 추가로 발굴했으며, 음식이 담긴 항아리 등 전혀 보고된 적이 없는 유물도 발견했다. 규모도 원래 알려진 것보다 더 큰 것으로 확인됐다. 재발굴 배경은 조선총독부가 경주의 고분을 발굴했지만 보고서가 없거나 너무 간략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발굴은 제대로 된 것이라 보기 어렵고 발굴 이후 원래 모습을 복원하기가 쉽지 않은 무덤의 특성 때문에 발굴한 고분의 경우 봉분이 없는 상태로 남아있다.
 

이와 달리 대릉원 영역에 있는 천마총과 황남대총은 우리 손으로 발굴한 신라 고분이다. 여기에도 사연이 있다. 공주의 무령왕릉 발굴 과정에서 문제가 많았던 것을 거울삼아 고고학자들은 신라 고분은 신중한 발굴 계획을 세웠다. 당시 정치권에서 경주 고분 중 가장 큰 황남대총 발굴을 원했지만 이를 위한 사전 작업으로 천마총을 발굴한 것이다. 두 고분에서 모두 엄청난 양의 유물이 출토됐다. 천마총은 말 다래에 그린 천마도가 나와서 그 이름을 갖게 됐고 돌무지덧널무덤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도록 정비해서 신라 고분 내부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됐다.
 

신라 고분에서 이처럼 많은 유물이 나오는 이유는 무덤의 구조와 관련이 있다. 고구려나 백제의 고분이 ‘굴식돌방무덤’이라 입구만 찾으면 관을 놓아두는 현실까지 그대로 이어져 도굴되기 쉬운 반면, 신라 고분은 돌덩어리를 쌓아 만든 돌무지덧널무덤이라 도굴이 불가능에 가깝다. 지금도 발굴을 할 때면 무덤의 돌을 모두 들어낸 뒤에야 시신이 안치된 곳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가 부장품을 넉넉하게 두는 편인 것도 관련이 있다. 

 

 

신라인 세계관 담겨 있는 첨성대

 

대릉원 정문 쪽으로 나가면 첨성대를 만나게 된다. 워낙 유명해 익숙할 수 있지만 가능하면 가까이서 보면 좋다. 선덕여왕 때 만들었다 하니 1400여 년이 지난 유적이다. 시간의 무게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첨성대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관측대라 알려져 있지만 당시 맨눈으로 천문을 관측했다는 점도 생각하면 좋겠다. 신라인들은 10m 정도의 높이에 주목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천문관, 세계관이 담겨 있는 건축물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첨성대를 이루는 28단은 한 달의 날짜 수이며 동시에 하늘의 별자리를 세는 수이기도 하다. 또 360개의 돌은 1년의 날과 그 수가 같다. 창문 기준으로 위와 아래로 12단은 12달과 12시간, 24절기를 생각나게 한다. 무엇보다 첨성대는 둥근 단면 구조로 이런 건축물은 우리나라에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다. 어쩌면 그들이 생각하던 하늘의 모습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첨성대에서 안쪽으로 걸어가면 월성이다. 높게 솟은 땅의 모양이 하늘에서 보면 반달을 닮았는데 나중에 흙과 돌을 쌓아서 성을 만들어 월성이란 이름이 붙었다. 처음 신라의 궁궐은 지금의 오릉 근처, 남산 쪽에 있었는데 탈해왕이 월성으로 거주지를 옮긴 뒤 나중에 궁궐이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지금도 월성 근처는 발굴 중이다. 신라 궁궐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아서 현재로서는 통일 전 월성 외 금성에 대한 기록, 그리고 통일 이후 안압지로 알려진 곳에 임해전을 주요 전각으로 하는 동궁을 세웠다는 기록 정도가 있다.
 

월성 일대가 중요한 영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계림이다. 원래 시림이라 부르던 숲이었는데 탈해왕 때 여기에서 김알지를 발견했다. 갑자기 숲에 빛이 들어오며 흰 닭이 울고, 황금 궤가 발견됐는데 그 안에서 아이가 나왔다. 금빛 궤짝에서 나왔으니 성을 김으로 하고 신라 말로 아기를 알지라고 하니 이 아이가 김알지로 경주 김씨의 시조가 된다. 이후 6대손인 미추가 왕위에 올랐고, 내물왕 이후 김씨만 왕위를 이어가게 됐으니 신라를 상징하는 공간이 됐다. 김알지를 발견한 이후 닭이 울었다고 해서 계림으로 바꿔 불렀는데 이 이름은 경주의 별칭이 되기도 했다. 지금도 숲이 우거진 모습이 약간의 신성함이 느껴진다. 
 

 

신비한 조명 사이로 계림을 빠져나가기 직전 아담한 고분 하나를 만나게 된다. 전(傳) 내물왕릉, 곧 내물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그러나 다른 주장도 있으니 현재로서는 전 내물왕릉으로 부르고 있다. 그래도 내물왕, 곧 ‘내물마립간’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까지 왕을 가리키던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이름을 바꿨으니 그만큼 왕의 권력이 강해지고 화백회의도 주도했다고 하니 같은 맥락일 것이다. 또 이때부터 김씨만 왕위 계승을 하게 돼 이것도 강화된 왕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대외적으로는 어려움이 많았다. 백제, 가야, 왜의 신라 침범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우호 관계에 있던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광개토대왕의 대군이 신라 지역에 침범한 이들을 물리쳤다. 서기 400년, 경자년 일이다. ‘경자대원정’이라 쓰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영향력이 강화됐다. 앞에서 살펴본 호우총의 호우 역시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숲을 빠져나오면 한옥으로 이뤄진 마을이 나온다. 약간 시간 여행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바로 교동(校洞)이다. 교는 학교를 뜻하니 조선시대 지방 교육기관인 향교(鄕校)가 있는 마을이다. 고려 시대에는 향학(鄕學)이, 신라 때는 국학(國學)이 여기에 있었다. 우리나라 유교 교육의 역사가 담긴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밤이라 입장이 어렵다면 골목에서 분위기만이라도 느껴보면 좋겠다. 하나 더 살펴봐야 할 것은 최부자집이다. 12대, 400여 년에 걸쳐 부자를 이어온 비결을 보면 흥미로운 것이 여럿 있다.

 

가장 눈길을 주는 것은 흉년이 들었을 때 주변 사람들이 굶어 죽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전통은 부자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런 집안이었기에 나중에 전 재산을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에 썼던 것 같다. 교동 마을 앞에 갑자기 화려한 조명에 빛나는 건축물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새로 복원한 다리로 여기를 답사의 종점으로 삼으면 좋다.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월정교로, 월성과 남산을 연결하는 문천 위에 놓인 다리다. 이 다리에서 물에 빠진 원효대사가 근처에 있던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고 설총을 낳았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이렇게 ‘서라벌 밝은 달밤에 밤새도록 놀다’ 보면 신라 때로 돌아간 것 같은 상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코로나 19로 어려운 시절, 처용이 역신을 노래와 춤으로 몰아낸 것처럼 전염병이 사라질 날을 기원하며 우리는 답사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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