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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2004 교원문학상> 동화 당선작

다시 피는 꽃


1.
'일철이 너 월요 일날 만나기만 해 봐라.'
씩씩대면서 현관문을 빠져 나오고 있는데 인숙이가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오더니 말을 건넸다.
"햇빛아, 선생님께서 얼른 와서 교실 청소하고 가래."
"야, 내가 지금 청소 같은 거 하게 생겼어. 너나 해. 그리고 올라가서 오늘 집에 일이 있어 그냥 간다고 말해. 알았어?"
"알았어."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뒷걸음을 치는 인숙이의 뒤에 대고 주먹을 쥐어 보였다.
'다들 나만 보면 꼼짝 못하는데 날 놀렸단 말이지.'
교문을 지나면서도 일철이가 반 아이들이 있는데서 놀린 것이 생각나 화가 치밀었다. 길가에 뒹구는 빈 캔을 발로 냅다 찼다.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굴러간 캔은 학교 앞 문방구에서 멈추었다. 가게 출입문에 부딪히면서 서버린 것이었다.

"누구야? 어떤 녀석이 캔을 버리고 가는 거야?"
문방구 집 아저씨가 두리번거리며 소리쳤지만 모른 체 했다.
'별일도 아닌 것 가지고 큰소리치고 야단이야.'
입을 삐죽 내밀면서 찍찍 끌고 가던 실내화 한 짝을 앞으로 픽 벗어 던졌다. 10미터 정도 앞에 있던 전봇대를 정확히 맞춘 실내화는 '짝' 소리를 경쾌하게 내고는 아래로 떨어졌다.
'역시 내 실력은 변함이 없어.'
쉬는 시간이면 복도에서 가끔 실내화를 벗어 아이들을 맞추던 솜씨가 여전함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대체 일철이에게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을 알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선생님은 왜 나만 그렇게 미워하는 거야? 내가 미운 오리 새끼라도 된다는 건가?'

집으로 갈까 생각하다가 당구장으로 가기로 했다. 술에 취해 있을 아빠가 있는 집에 가보아야 뻔한 일이고, 우선 허기진 배를 달래야 했다. 당구장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열심히 왁스를 묻힌 천으로 공을 닦고 있던 엄마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햇빛이 왔니. 얼굴은 왜 그 모양이니?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니?"
"아니. 그냥…. 별일 없었어."
"너 또 누구하고 싸웠구나?"
"싸우긴? 내가 뭐 싸움꾼인줄 알아!"
엄마의 말을 팽하니 쏘아붙였다. 가방을 카운터 뒤쪽으로 던져 놓고는 냉장고 손잡이를 당겼다. 손에 닿는 음료수를 꺼내 마개를 돌렸다.
"햇빛아, 문짝 쪽으로 따놓은 음료수 있으니 그거 먹어라. 새 것은 손님들 드려야지."
"음료수도 마음대로 못 먹나!"
마개를 다시 돌려 냉장고에 넣고는 문을 꽝 닫았다.
"아니, 얘가? 너 오늘 왜 그러니?"
"내가 뭘 어쩐다구요?"
"왜 그렇게 고장난 장난감처럼 툴툴대는 거야?"
"아무 것도 아니에요."
다시 엄마의 말에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당구장 문을 밀고 나와 버렸다. 배가 고팠지만,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지만 그냥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어딜 가서 민생고를 해결하지?'

2.
"인숙이 있니?"
"햇빛이로구나. 어서 와."
현관의 비디오폰으로 나를 확인한 인숙이가 문을 열며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마침 점심을 먹으려고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점심 먹었니?"
"아니. 뭐 먹을 것 좀 있니? 배고파 미치겠다."
"너 당구장에 들러오지 않았니?"
대답 대신 식탁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인숙이가 끓여 온 라면을 허겁지겁 먹고 난 뒤 찬밥을 국물에 말아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배가 부르자, 비로소 학교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인숙아,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냐? 월요 일날 너만 청소시키겠다고 하시던데."
"하여튼 이상한 선생님이야! 왜 나만 괴롭히는지 모르겠어."
"햇빛이 너 작년보다 많이 이상해진 것 같아. 작년만 해도 착실했잖아. 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하긴 내가 생각해도 내 자신이 많이 변했다. 아이들로부터 반장 추천을 받아 대부분의 표를 얻어 반장이 되었던 5학년초만 해도 우리 집은 평화로운 집이었다. 작년 가을 어느 날, 아빠는 10여 년 간 다니시던 직장에서 물러나셔야 했다. 구조 조정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떠나야했던 그 때, 아빠 역시 지금의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퇴직금으로 지금의 당구장을 차린 뒤 우리 가족을 위해 아빠는 회사에 다닐 때보다 늦게까지 일을 하셨다. 그래도 좋았다. 학교를 마치고 당구장에만 가면 아빠를 볼 수 있었으니까……. 회사에 다니는 것보다 당구장을 하게 된 것이 잘 된 일이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아빠에겐 직장을 떠난 일이 너무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술을 자주 드시거나 엄마와 종종 싸우는 일이 생겼다. 물론 눈치채지 못하게 내가 잠든 뒤에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 아침 식탁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은 날이 점점 많아졌다.

3.
"당신 그렇게 매일 술에 젖어 살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아니, 누군 술 마시고 싶어 마시는 줄 알아?"
"헌신짝처럼 직원들을 내쫓는 그까짓 직장에 무슨 미련이 남아 그 모양이냐고요?"
"그만 두지 못하겠어!"
아빠의 화난 목소리에 이어 '쨍그랑'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엄마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고, 아빠의 실내화 끄는 소리가 열린 문틈으로 흘러 들어왔다. 아파트의 현관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히고, 엄마의 울음소리만 주방에서 흘러 나왔다. 더 이상 잠든 체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방 바닥에는 우리 가족의 행복한 모습이 담긴 사진이 가을에 떨어진 낙엽처럼 누워있었다, 깨진 유리 조각에 잔뜩 덮인 채.

엄마와 나는 서로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침 햇살의 따가움을 느끼며 잠에서 깨었을 때 어젯밤의 일이 마치 꿈속인 것처럼 느껴졌다. 주방으로 달려갔다. 엄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침을 준비하고 계셨다.
"엄마, 아빠는?"
"안 들어오셨다."
"그럼 당구장에 계신가?"
엄마는 더 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아빠는 그 날도, 그 다음날도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다. 1주일이 지난 뒤에야 아빠는 덥수룩해진 수염에 눈이 쑥 들어가신 모습으로 돌아 오셨다. 그 때부터 나의 불행이 시작된 셈이었다.

아이들은 감히 나를 건드릴 생각조차 못했다. 학교 대표 육상 선수인데다 가 일철이만 빼면 우리 반에서는 키가 제일 큰 나를 어쩌지 못했다. 나를 놀린다거나 내 비위를 건드리면 당장 쫓아가 혼을 내곤 했기 때문이다. 오직 일철이 녀석만 나를 놀리거나 흉을 보곤 했다.

"야, 신햇빛. 넌 여자애가 왜 그 모양이냐? 괜히 심술을 부려 아이들을 괴롭히고, 청소도 안하고 도망가고, 툭하면 선생님 말씀에 대들고……."
이상하게도 일철이에게는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물론 내가 5학년 때부터 좋아한 아이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 애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왠지 그 애에게만은 고분고분한 내가 때론 싫기도 했다.
"신햇빛. 지금 책상 위에 올려놓고 쓰고 있는 것 갖고 나와."
선생님의 목소리에 얼른 교환일기를 옆에 앉은 인숙이에게 건네었다.
"저 아무 것도 안 했는데요."
"얼른 나오지 못해!"
선생님이 막대기로 교탁을 내리치자 아이들은 숨소리를 죽이고 눈만 깜빡이고 있었지만 난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리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발걸음을 어슬렁어슬렁 옮겼다.

"빨리 나오지 못해."
교탁 앞에 섰다.
"왜 그러시는데요?"
선생님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화를 참는 듯 잠시 머뭇하시더니, "네가 한 짓을 몰라서 그러냐?"
하시며 코앞에 몽둥이를 들이대셨다.
"전 열심히 듣고 있었던 일밖에는 다른 짓 안 했는데요."
"너 말하는 태도가 그게 뭐야!"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제가 뭘 어떻게 했는데요?"
나보다 키가 작은 선생님을 내려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아니? 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만 들어가라고 하셨다. 자리로 돌아오면서 나는 승리한 사람의 얼굴 표정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런 식으로 난 나의 불행을 삭이고 있었다. 아빠가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오는 날이 많아질수록, 엄마와 아빠가 내 앞에서 심하게 싸우는 날이 늘어갈수록, 또한 아빠의 병이 깊어 가면 갈수록 나는 우리 반의 폭군이 되어갔다. 선생님조차 어쩌지 못하는…….

4.
"이젠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구나."
"엄마, 그럼 이제 아빠는 어떻게 되는 거야?"
"……"
"엄마, 아빠가 불구자가 되는 거야?"
"그래. 할 수 없이……."
모든 것이 미웠다. 자포자기한 채 살고 있는 아빠도, 어쩌지도 못한 채 묵묵히 살고 있는 엄마도, 나를 미워하는 선생님도, 내 눈치나 보고 있는 반 아이들도……. 집을 나왔다. 그리고는 정신 없이 걸었다. 길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등뒤에 꽂혔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흐르는 눈물이 앞을 가렸다. 발에 무엇인가 걸려 넘어지면서도, 지나가는 사람과 어깨가 부딪혀도 그냥 걸음을 계속 옮겼다. 눈물을 멈추려고 하면 할수록 눈물이 솟아 나왔다. 머릿속에는 다정했던 아빠의 웃는 모습만이 가득했다.

아빠의 입원으로 문을 닫은 당구장 소파에서 잠이 깼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길 쪽으로 난 창에서 아련하게 울려 퍼졌다. 밤하늘의 별들과 밤새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까만 밤하늘에 밝은 빛을 태우며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며 빌던 소원을 생각하며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굳게 잠긴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거실 바닥에 놓인 하얀 편지 봉투 위로 오후의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사랑하는 딸 햇빛 이에게
햇빛아, 울지 말고 끝까지 아빠의 이 편지를 읽어주기 바란다. 햇빛이가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면 아빠는 이미 한 쪽 발목이 없는 불구자가 되어 있을 거야. 너희들이 괜히 피하려고 하는 장애인이 된다는 말이지.

아빠도 나 자신이 불구자가 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어. 하지만 이제 아빠는 불구자가 된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단다. 아빠의 마음은 더 이상 불구자가 아니기 때문이지.

돌이켜 보면 구조 조정으로 직장에서 물러 나와 지낸 날들이 너무 후회스럽기만 하구나. 나의 젊은 날의 꿈이 여기서 끝난다는 생각에 세상이 모두 무너진 것 같았거든. 한 때는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었고, 결국 소중한 우리 가족에게 몹쓸 짓만 하다가 당뇨병이 심해져 발목을 잃게 되었지만
아빠는 이제 용기를 되찾았단다. 사랑하는 딸 햇빛이가 있기 때문이란다.

아들이든 딸이든 관계없이 밝은 태양처럼 온 세상에 빛을 주는 커다란 사람이 되라는 소망을 담은 네 이름을 지어놓고 엄마와 아빠는 새 생명의 탄생을 기다렸지. 지금도 12년 전 네가 태어나던 날을 생각하면 더할 수 없이 가슴이 벅차 오르는구나.

햇빛아! 부디 엄마와 아빠의 소망을 져버리지 않는 자랑스런 딸로 자라려무나. 그런 네 모습을 언제까지고 지켜보고 싶구나. 이제 아빠도 용기를 갖고 수술대에 오르기로 하마. 사랑하는 딸을 기다리는 아빠가

편지 위로 뜨거운 눈물이 떨어졌다. 그리고는 이내 냇물이 되어 흘렀다. 눈물을 먹은 편지의 글씨들은 추상화가의 알 수 없는 그림처럼 변해 갔다. 그 자리에 쓰러져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빠를 미워하고, 엄마를 미워하고, 모든 사람들을 미워했던 자신이 더욱 미웠다.

5.
어둠이 긴 그림자를 만들어갈 무렵 아빠의 병실 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그런데 그 곳엔 나를 그렇게 미워하던, 내가 그렇게도 미워하던 선생님이 찾아와 계셨다. 노란 프리지어를 한 쪽 손에 들고, 잔잔한 미소와 함께 나를 부르셨다.

"햇빛아, 어서 오렴. 우리 모두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아빠와 눈이 마주친 순간 눈앞이 다시 흐려졌다. 침대로 달려가 아빠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빠,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네?"

아빠의 커다란 손이 머리를 어루만졌다. 등뒤에서 선생님의 잔잔한 말씀이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울려오고 있었다.

"보세요. 돌아올 거라고 했지요? 햇빛 아버님, 햇빛 이를 생각해서라도 용기를 잃지 말고 살아가세요. 이렇게 마음이 고운 아이잖아요."

어둡고 긴 터널을 벗어나는 순간처럼 밝은 빛이 가슴속에서 솟아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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