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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2004 교원문학상> 소설 당선작


외출에서 돌아오던 주 여사는 엘리베이터에서 아이의 친구인 태식을 만났다.
"정수는 안 오니?"
"벌서고 있어요."
"아니 왜?"
"저도 잘 몰라요. 애들한테 들었어요."
녀석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주 여사는 기분이 언짢았다. 하필이면 아랫집 902호 여자가 함께 타고 있어서 기분이 더 엉망이 되어 버렸다. 여자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이었다. 이사온 지 두 달도 안 된 여자가 소음을 문제삼아 관리실에 신고하는 바람에 벌써 몇 번이나 주의전화를
받았는지 모른다. 아이들이 뛰는 소리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다는 거였다.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여자 집에는 아이가 없는 눈치였다.
자식 키우는 사람이면 응당 웬만한 불편쯤은 참고 넘어가련만 도무지 이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여자 같았다. 정수가 친구들을 데려와 난리를 친 적이 몇 번 있긴 했지만 한창 자라는 아이들을 묶어두고 기를 수는 없잖은 가. 주 여사는 이해심 부족한 여자가 한 아파트에 사는 것이 마뜩찮았다.

집으로 들어온 주 여사는 외출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무너지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제 누이들을 키울 때는 교문이 어디에 붙었는지 몰라도 아무 탈이 없었는데 녀석은 온갖 뒷바라지를 다하건만 보람도 없이 날이 갈수록 엄마의 체면을 구겨놓고 있었다. 이 녀석 오기만 해 봐라. 그러나 기다리는 아이는 오지 않고 시각은 어느새 다섯 시를 넘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미술선생이 올 시간이었다. 지난 겨울방학 때부터 우리나라 일류 미대에 다닌다는 대학생한테 일주일에 한 번 그림 지도를 받게 하고 있었다. 4학년이 되면 사생화를 시작하기 때문에 특별히 지도를 받지 않으면 따라가기 힘들다고 해서 시작한 그림 과외는 돈도 돈이지만 한 번 빠지면 그만큼 진도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에 특히 신경이 쓰였다. 영어학원 시간은 이미 놓쳤지만 미술 수업은 받아야 하는데 시계바늘만 쳐다보고 있자니 속이 탔다.

정수는 주 여사가 딸 셋을 낳고 십 년만인 나이 마흔에 얻은 늦둥이다. 몸이 달라진 줄도 모르고 지내다가 어느 날 이상한 느낌이 들어 병원에 갔더니 임신이라고 했다. 나이도 나이지만 이미 딸이 셋이나 있고 새삼스레 아이 키울 일을 생각하니 낳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웬만한 갈등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주 여사는 태어나려고 생긴 생명, 그냥 낳기로 했다. 혹시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어려운 쪽으로 선택하는 용기를 갖게 했는지도 모른다.

태어난 아이는 아들이었다. 간절히 원해서 낳은 아들이었다 해도 그렇게 기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들 낳은 여자가 자기밖에 없는 듯싶었고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왜 기를 쓰고 아들을 낳으려고 하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정수는 어릴 때부터 귀한 아들에 복덩이라는 별명이 하나 더 얹어져 사랑을 독차지했다. 아이가 태어나자 때맞추어 사업이 잘 풀리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고향에 묻어둔 땅이 도시계획에 편입되면서 돈이 되었고 이것으로 몇 군데 새로 사 둔 땅이 또 몇 해가 지나면서 큰돈으로 불어나 벼락부자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정수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주 여사는 사느라고 바빠서 딸들에게는 제대로 하지 못한 엄마 노릇을 정수한테만은 남부러울 것 없이 해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머니회 회원으로 활동도 하고 담임선생 대접도 남 못지 않게 하면서 엄마로서 할 수 있는 뒷바라지는 다 하리라 다짐했다. 모든 일은 주 여사 뜻대로 되어갔다. 그 중 하나가 입학식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린 어머니회 총회에서 학급을 대표하는 임원이 된 일이었다. 어머니회 총회가 있을 거라는 안내장을 받고 부터 작정은 하고 있었지만 제 발로 나서서 하겠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태식 엄마가 속내를 뻔히 들여다본 것처럼 추천해 주었던 것이다.

학급 대표가 된 주 여사는 학년 임원을 겸하게 되었다. 게다가 한 학년에 하나뿐인 운영위원으로 뽑히고 나니 이번에는 이왕 나선 김에 운영위원장을 맡아주면 고맙겠다는 청이 들어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주는 자리를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이던 주 여사도 이것만은 한사코 사양했다. 대신 부위원장이 되어 뒤에서 돕겠다고 했다. 재력이나 열성으로야 위원장이 되고도 남을 일이었지만 젊은 사람들을 제쳐놓고 나이든 사람이 나서서 자리에 욕심부린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이렇게 한 발 물러남으로써 주위로부터 겸사의 미덕을 갖춘 사려 깊은 사람이라는 치사까지 듣게 되자 주 여사는 새삼스럽게 늦둥이 아들이 고마웠다. 그 애가 아니었으면 어찌 그런 감투나마 써볼 수 있었겠는가.

주 여사는 신바람이 나서 학교를 드나들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그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말도 품위 있게 하고 의상에도 특별히 신경을 썼다. 주 여사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곱게 차려입고 학교에 오던 미애 엄마를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이제 주 여사는 바로 그
미애 엄마가 되어 있었다. 앞장서서 학교에 기부도 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는 말이 있듯이 비록 부동산으로 번 돈이지만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2세 교육을 위해 쓴다면 보람찬 일이 아니겠느냐고 뿌듯하고 자랑스런 마음마저 갖게 되었다.

자식이 귀하면 자식을 가르치는 선생도 좋아 보이는 법이다. 명분이 없어서 대접을 못하면 만들어서라도 담임은 물론 같은 학년 선생들까지 챙겼다. 환경미화와 교실청소는 말할 것도 없고 현장학습 도우미나 운동회 날 음식바자회 같은 궂은 일에도 발벗고 나서서 협조하는 모범을 보였다. 2월에 태어나 다른 아이들보다 한 살이 어린 정수가 학교생활을 무난히 잘해 나가는 것도 선생님의 훌륭한 지도 덕분이라며 공을 담임선생에게 돌렸다. 주 여사는 협조 잘하고 겸손하기까지 한 일등 엄마라는 칭찬에 조금도 손색이 없도록 행동했다.

정수가 4학년이 되었다. 이제 주 여사도 좀 쉬고 싶었다. 3년이나 정신 없이 쫓아다니다 보니 체력에 한계가 느껴졌다. 얼굴 주름이야 수술로 펼 수 있다지만 나이는 속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간혹 학부모들 사이에 지나치게 극성스럽다는 입방아가 돈다는 이야기가 귀에 들리곤 했다. 그거야 저희들 못나서 시샘하는 소리라고 코방귀를 뀌어버리면 그만이지만 근력이 달리는 데는 어쩔 수가 없었다.

주 여사는 가정사정을 핑계로 맡은 자리를 내어놓고 집에서 조용히 아이 뒷바라지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학교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후임자가 나서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붙든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주 여사는 내심 싫지 않았다. 그래서 한 해만 더 맡겠다는 단서를 달고 못이기는 척 주저앉았다.

미술 선생이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정수는 태연했다. 오후네 걱정했던 일이 무색할 만큼 아이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주 여사는 궁금했지만 우선 수업부터 받게 했다. 더군다나 미술 선생 앞에서는 언성을 높이고 싶지 않았다.

미술 선생이 돌아가고 난 뒤 주 여사는 정수를 다그쳤다.
"왜 늦었어?"
"……"
"말 안해?"
"선생님께 벌섰어요."
"오늘은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여자 애들을 놀렸어요."
"어떻게 놀렸는지 자세히 말해 봐."
"못난이 돼지라고……."
"너, 지난번에도 그래서 선생님께 혼났다고 했잖아. 그런데 또? 벌써 몇 번째야!"
"……"
녀석이 고개를 푹 꺾었다. 주 여사는 마음을 다잡았다.
"안 되겠다. 꿇어앉아. 내가 선생님이라도 너 용서 못해. "
녀석은 무릎을 꿇으며 울상을 지었다. 그러나 어리광을 받아 줄 때가 아니었다.
"팔도 들고 있어."
주 여사는 눈을 맞추지 않으려고 녀석을 벽 쪽으로 돌아앉게 했다. 등을 보이고 벌을 서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으니 지나간 몇 년이 어떻게 흘러갔나 싶게 순간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4학년이 아닌가. 주 여사는 학년이 바뀔 때마다 기대 속에서 맞이하던 새 학년 첫날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해마다 아이가 새 학년을 맞는 날은 주 여사도 덩달아 긴장했다. 반 배정이야 학년말에 받는 통지표를 통해 알게 되지만, 담임선생은 개학을 해야 알 수 있기 때문에 주 여사는 마치 자신이 학생이라도 된 것처럼 설레기까지 했다. 그래서 아이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학교로 달려가
담임선생한테 인사를 하고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다음날은 꽃바구니를 선물하여 만나게 되어 반갑다는 뜻을 전했다. 주 여사는 그 일을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담임선생이 아이를 빨리 기억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올해는 젊은 초임교사가 담임이었다. 나이가 큰딸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너무 어리니 오히려 대하기가 어려워 다른 해와는 달리 운영위원회 일로 종종 학교에 가도 담임선생을 찾아보지 않는 날이 많았다. 담임선생을 대접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요즘 젊은 선생들은 촌지는 말할 것도 없고 상품권 같은 것도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주 여사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취향도 모르면서 물건을 선물하는 일은 또 쉬운가. 이런저런 이유로 담임선생 찾아보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사이 두 달이 훌쩍 지나버렸다. 일등 엄마로 소문난 주 여사로서는 마음 편할 리 없었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게 된 주 여사는 스승의 날을 며칠 앞두고 학교로 갔다. 4학년 담임들이 나누어 먹을 과일은 오전에 이미 배달시켜놓았고, 상품권은 선물로 준비한 머플러와 함께 상자 속에 넣어 주고받을 때 민망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혹시 출장을 가거나 바쁘지는 않은지 전화로 미리 알아보고 시간 약속도 했다. 갑자기 교실로 찾아가 담임선생이 계획하고 있는 일에 지장을 주는 무례한 학부모가 되지 않으려면 당연히 기울여야 하는 주의였건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하지 않던 일을 굳이 하려니 은근히 부아가 났다. 그러나 주 여사는 최선을 다해 담임선생에 대한 예의를 갖추려고 노력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정수 엄마예요."
"네, 어서 오세요."
주 여사는 교실을 한 바퀴 둘러 본 다음 담임선생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선생님, 정수가 말썽을 많이 부려서 힘드시죠?"
이런 말은 보통, 학부모가 담임선생을 대면하면 으레 하는 말이다. 실제로 자기 아이가 그렇다고 생각해서라기보다 아이를 맡겨놓은 부모로서 하는 인사치레인 셈이다. 그런데 담임선생은 망설이지도 않고,
"네, 좀 그런 편이에요."
하고 대답했다. 주 여사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예상치 못한 대답은 마음에 두고 하는 말임에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로 보나 학교를 출입한 경력으로 보나 앞에 앉은 초임교사보다는 주 여사가 한 수 위일 거였다. 주 여사는 곧 마음을 추슬렀다.
"특히 어떤 점을 고쳐야 할지 말씀해 주시면 주의시키겠어요."
주 여사는 아이 교육에 관심이 많고 교양 있는 학부모가 주로 하는 말을 골라 하면서 가슴을 폈다.
"그럼 솔직히 말해도 되나요?"
이 말을 할 때도 담임선생은 동의를 구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마치 이런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하고 싶은 말을 해야겠다는 태세였다. 주 여사는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다시 움츠러들었다.

정수에 대한 담임선생의 평가는 가혹했다. 말하자면 장난이 심한 개구쟁이 정도가 아니라 지도하기 어려운 골치 아픈 아이라는 것이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일에서부터 담임의 반 운영에 간섭하고 나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수업 태도가 나빠서 하루에도 몇 번씩 주의를 받는다고 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고 자기밖에 모르며 지나치게 솔직하여 말을 참지 못하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그나마 긍정적인 표현이 있다면 행동이 과격하거나 천성이 나쁘지는 않다는 정도였다.

담임선생의 말을 듣는 동안 주 여사는 낯이 뜨거웠다. 솔직히 믿을 수가 없었다. 담임선생 말이 사실이라면 그런 못된 버릇이 하루아침에 생긴 것도 아닐 텐데 전 담임들은 왜 한번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단 말인가. 만약 담임이 다르기 때문에 아이에 대한 평가가 차이 난다면 그것은 담임선생의 주관적인 판단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정수에게만 문제가 있다고 볼 수도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사람의 감정이란 미련한 데가 있어서 한 번 밉게 보면 바꾸기가 쉽지 않은데 어쩌다가 그렇게 담임선생 눈밖에 나 버렸는지 엄마로서 무척 속이 상했다.

"선생님, 정수는 제가 단단히 야단치겠습니다. 정말 죄송해요. 그리고 약소합니다만 스승의 날도 오고 해서 작은 선물을 하나 준비했어요."
주 여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련해간 선물꾸러미를 담임선생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담임선생은 눈이 똥그래져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머플러예요. 선생님 취향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그럼 지금 풀어봐도 되겠군요."
"쑥스러우니까 제가 가고 난 뒤에 보세요. 혹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꾸셔도 되고요."
안에 들어있는 상품권이 켕겨 이렇게 말했으나 담임선생은 기어이 그 자리에서 포장을 뜯었다. 상품권을 넣은 봉투가 책상 위로 떨어졌다.
"이건 뭐죠?"
알고 묻는지 정말 몰라서 묻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가지고 간 선물을 그냥 놓아두고 당장 교실에서 나와 버리고 싶었다. 얼굴이 화끈거려 그 자리에 서 있기가 거북했다.
"혹시 머플러가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선생님 원하시는 물건을 하나 구입하시라고 조금 넣었어요."
"성의는 고맙지만 받을 수 없습니다."
담임선생은 상품권을 되밀었다. 조금 전 정수 이야기를 할 때보다 더 단호한 태도였다. 혹시나 하고 있었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몹시 당혹스러웠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주 여사는 발걸음이 어디에 놓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가 고쳐야 할 점을 지적해 준 것도 고맙다기보다는 불쾌했다. 이제 겨우 발령 받은 햇병아리 선생이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렇게 당돌하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두 사람이 담임과 학부모 관계라지만 몇 살
되지도 않은 어린것이 선물을 가지고 간 사람 면전에서 상대방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소신만 고집하다니, 이것도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로 보여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날 이후 주 여사는 담임선생이 불편했다. 그러나 아이를 맡겨놓았으니 그런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도 없었다. 겉으로 좋은 척하려니 성질에 맞지 않아 어떤 때는 울뚝 밸이 뒤틀렸다. 그런데 이런 어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수는 하루같이 담임선생한테 꾸중을 듣는다고 했다. 주 여사는 이제 학교에 가기가 싫었다. 할 수만 있다면 운영위원도 그만두고 싶었다. 지난 3월에 그만두지 못한 것이 그렇게 후회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 여사 얼굴을 들 수 없게 했던 일은 급식 차 사건이었다. 그 날도 주 여사는 아침에 집을 나서는 정수에게 당부를 잊지 않았다.

"정수야, 제발 말썽 피우지 말고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 약속하지?"
주 여사의 기도와도 같은 당부도 소용없이 그 날 정수가 저지른 일은 하마터면 다른 아이까지 크게 다칠 뻔한 대형사고였다. 그때 일만 생각하면 주 여사는 등골에서 식은땀이 났다.
집으로 돌아올 시각이 훨씬 지났는데도 정수가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태식이 집에 전화를 했다.

"태식 엄마, 정수가 아직 안 와서 전화했어요. 무슨 일인지 혹시 태식이 알고 있나 해서……."
"어머, 정수 아직 안 왔어요? 태식이 말로는 오늘 학교에서 급식 차를 망가뜨렸다고 하던데."
"급식 차를 망가뜨리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태식이가 없어서 물어볼 수도 없고. 누가 다쳤다고도 한 것 같은데……."
"정수가 다쳐요?"
주 여사가 놀라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정수였다.
"얘, 너 괜찮니?"
느닷없는 질문에 정수가 놀란 눈으로 주 여사를 쳐다보았다. 아이가 다치지 않았음을 확인하자 주 여사는 울화가 치밀었다.
"어찌된 일인지 말해 봐.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응?"
"반성문 썼어요."
녀석은 가방에서 반성문을 꺼내어 내밀었다. 반성문에는 사고 경위가 자세히 적혀 있었다. 글은 몇 번이나 고쳐 쓴 흔적이 있었고 한 장으로 부족하여 뒷면에까지 이어져 있었다. 담임 확인 도장이 찍혀 있었으니 거짓은 아닐 거였다.

'우리 교실에서 덤웨이터가 있는 곳까지는 교실 다섯 개를 지나야 한다. 긴 복도에서 급식 차를 밀고 갈 때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달리게 된다. 평소에 선생님이 뛰면 안 된다고 주의를 많이 주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어떤 때는 급식 차에 매달리거나 한 쪽 발만
올려놓고 타고 가기도 했다. 이럴 때는 아슬아슬한 스릴까지 느낄 수 있어서 아이들이 서로 급식 차를 밀고 가려고 다투는 일도 있었다. 오늘은 당번인 현종이가 혼자 운반하는 것을 보고 도와주려고 했다. 급식 차를 밀다 보니 또 달리고 싶었다. 교실 몇 개를 지나면서 급식 차는 속력을
내어 빨리 달리기 시작했고 갑자기 멈추려고 하니 잘 되지 않았다. 그 바람에 덤웨이터 앞에 있던 다른 반 급식 차에 부딪쳤는데 그것이 그만 계단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지나가던 아이가 다쳤다. 떨어지는 식판에 긁혀 다리에 피가 났다. 정말 미안했다. 현종이 혼자 밀고 가게 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도와준다고 한 것이 잘못이다. 현종이한테도 미안하다. 현종이는 잘못이 없다.'

다친 아이는 다행스럽게도 찰과상 정도인 것 같았다. 아이가 크게 다치지 않고 그 정도에 그친 것이 천운이었다. 식판에 긁혔기 망정이지 만약 차에 바로 부딪히기라도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담임선생은 반성문에다 정수에게 '급식 차 운반하기'를 벌로 내려놓고 있었다. 밥을 먹기 전에 가져왔다가 밥을 먹고 나면 갖다놓는 일이라고 했다.
주 여사는 담임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급식 차를 운반하다가 사고를 낸 녀석한테 다시 그 일을 시키는 것은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다고 자기가 나서서 그런 벌은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 이제는 하루도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정수는 이제 자식이 아니라 시한폭탄이었다. 이런 애물단지는 다시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한폭탄이라도 안고 있어야 하고 애물단지라도 버릴 수 없는 것이 자식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정수의 급식 차 운전은 삼 주일만에 끝이 났다고 했다. 하지만 주 여사의 자존심은 더 이상 지키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추락하고 말았다.

벌을 서고 있는 정수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조금 후에는 머리를 벽에다 기댔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모로 쓰러져 잠이 들지 않을까 싶었다. 하라는 반성은 하지 않고 벌을 서면서 졸다니, 주 여사는 기가 막혔다. 학교에서도 저 꼴이라면 담임 눈에 오죽할까. 주 여사는 혀를 차면서 녀석 쪽으로 다가갔다.

딩 당 댕 도옹

방송을 예고하는 차임벨 소리가 거실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주 여사는 정수를 부르려다 말고 귀를 기울였다.

"주민 여러분께 알리겠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일은 우리 아파트 물탱크 청소가 있는 날입니다.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단수될 예정이오니 각 가정에서는 이에 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민생활에 불편을 주는 여러 가지 민원이 계속 신고되고 있습니다. 잘 들으시고 꼭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방송에서 말하는 민원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애완견 배설물 처리 문제였다. 아파트 마당에 배설물을 그대로 두고 치우지 않는 세대가 있다고 했다. 다른 하나는 수목보호를 위해 반드시 전면주차 규칙을 지켜달라는 거였다. 마지막은 소음문제였다. 늦은 시각 피아노를 치거나 못질하기,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 따위였다. 방송을 듣자 주 여사는 아랫집 여자가 생각났다. 지난주 토요일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정수가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놀았다고 했는데 그게 또 문제가 된 건 아닌가 싶었다. 여자가 이사오기 전에는 몇 년 동안이나 아무 탈 없이 잘 지냈다. 그런데 이제는 소음이야기만 나오면 혹시나 하고 신경이 쓰이니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골치가 아팠다. 좌우지간 이웃을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이 하나도 그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수와 올해 담임선생과는 좋은 인연이 아닌 모양이었다. 담임선생과 학생이 맞지 않으면 일년 내내 서로 힘들게 지내게 된다는 말이 그르지 않은 듯 3학년 때까지 별탈 없이 학교생활을 잘하던 정수가 4학년이 되고 부터 갑자기 문제 많은 아이가 되어 버린 것이 그 증거였다.

이제는 아파트 아이들이 주 여사를 만나면 정수가 학교에서 꾸중들은 일을 일러바치는 게 인사처럼 되어 버렸다. 품안의 자식도 아닌데 일일이 따라다니며 간섭할 수도 없고, 공부야 어찌되었든 이런 말만 듣지 않아도 고맙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귀엽다고 제 뜻을 다 받아주며
키운 결과인가 싶어 자책감이 들면 이런 걸 자업자득이라 하지 않겠느냐며 체념도 했다. 그러다가 생각이 담임한테 이르면 서운했다. 아무리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아이는 아이일 뿐인 것을, 조금만 너그럽게 보아주면 될 텐데 왜 정수한테만 유독 엄격하게 대하는 것일까. 경험이 없고 너무 젊기 때문은 아닌가. 자식을 키워본 지긋한 담임이었다면 정수가 지금처럼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담임 복(福) 없는 정수가 불쌍했다. 그러나 이런 마음 한쪽에는 담임에 대한 미안함도 없지 않았다. 매일 혼나는 아이도 아이지만 담임은 담임대로 또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러나 이런 생각도 그때였을 뿐 다음날 밤 주 여사는 그만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잠자리를 살피러 정수 방에 들어갔던 주 여사가 시퍼렇게 멍든 아이 엉덩이를 보았던 것이다. 놀란 주 여사가 엎드려 자고 있는 아이를 흔들어 깨우며 목소리를 높였다.

"얘, 너 엉덩이가 왜 이래?"
"아이 엄마는, 졸린단 말이야."
"엉덩이가 왜 이러냐니깐?"
"어제 선생님께 벌섰다고 했잖아요."

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잠이 들었으나 거실로 나온 주 여사는 안절부절못했다. 그 동안 정수가 야단을 맞고 벌을 섰다고 해도 녀석이 워낙 별나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이해하며 담임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있는가. 여태껏 불면 날아갈까
놓으면 깨어질까 애지중지 키운 어린것한테 매를 대다니, 그것도 얼마나 심하게 다루었기에 피멍이 다 든단 말인가. 여린 살갗을 뚫고 금방이라도 피가 배어 나올 것만 같았다.

주 여사는 연우네 집에 전화를 했다. 연우 엄마는 아이들이 1학년 때 같은 반을 한 후 친하게 지내는 학부모 중 한 사람이었다.

"정수 어머니, 그냥 있어서는 안 돼요. 그런 선생이 바로 폭력교사 아닙니까. 아무리 교육부에서 정한 체벌규정이라는 것이 있다지만 아이 몸에 상처가 나도록 허용한 것은 아닐 거예요."
참교육연댄가 뭔가에 가입해 있다는 연우 엄마의 말은 위로는커녕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 되고 말았다. 정말 그냥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학교에 드나들며 한 일들이 후회스러웠다. 해마다 빠지지 않고 낸 기부금이며 학교 일로 보낸 그 많은 시간들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밤새 속을 끓이며 잠까지 설친 주 여사는 이튿날 아침이 되어도 분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정수는 아무렇지 않은 듯 학교에 갔지만 주 여사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고 아직도 붉은 맷자국이 남아 있는 푸르뎅뎅한 아이 엉덩이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린것이 얼마나 아팠으며 마음의 상처는 또 어땠겠는가. 주 여사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연우 엄마 말대로 교육청 홈페이지에라도 올려야 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 동안 학교를 위한답시고 활동해온 체면도 있고 또 정수 일은 담임선생과의 문제지 학교 전체를 걸고 들 문제는 아니니 그렇게 막나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냥 속을 끓이고 있을 수도 없었다. 생각다 못한 주 여사는 교장실로 전화를 하여 찾아뵙겠다고 했다. 그 동안 학교운영위원을 하면서 친분이 두터워진 터라 답답한 마음을 하소연하면 교장선생이 적절한 조치를 취해줄 것 같았다.

주 여사의 말을 듣고 난 교장선생이 입을 열었다.
"정수 어머니, 이유야 어찌 되었건 먼저 책임자로서 사과 드립니다. 학교를 믿고 맡긴 귀한 아드님이 매를 맞고 왔으니 얼마나 속이 상했습니까. 하지만 많은 아이를 다루다 보면 매를 들어야 하는 때가 없잖아 생깁니다. 물론 체벌이 좋은 건 아니지만 그것도 아이에 대한 애정과 잘해보려는
의욕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니 이해하세요. 그리고 그 동안 정수 어머니께서 학교를 위해 애를 많이 쓰셨는데 정말 유감입니다."

교장선생은 주 여사의 평소 생각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역시 존경할 만했다. 점잖은 어투와 분위기를 압도하는 위엄, 그리고 경륜 깊은 교장답게 담임선생의 입장을 대변하면서도 자신의 심정을 헤아려주고 그 동안의 수고까지 챙겨주니 주 여사는 어느새 마음이 풀렸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하고 끝났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말을 마친 교장선생이 교감선생한테 인터폰을 하더니 담임선생을 교장실로 부르는 게 아닌가.

잠시 후 담임선생이 왔다. 교장실로 들어오던 담임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주 여사는 비로소 자신의 행동이 경솔했음을 깨달았다. 발령 받은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어린 담임선생이 영문도 모른 채 교장실로 불려온 것만으로도 부담스런 일이었을 텐데 게다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짐작케 하는 장본인이 와 있었으니 얼마나 당황했겠는가. 태연한 척 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맞닥뜨린 사태를 감당하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주 여사 자신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이 일을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 막막하기만 했다.

"한 선생님, 정수 어머니예요. 운영위원회 부위원장님이신 거 알고 있지요?"
"네, 알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
담임선생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주 여사는 교장선생의 다음 말이 어떻게 이어질지 알 수 없어서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눈길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교장실에 왜 왔는지를 그 자리에서 말한다면 담임선생 얼굴을 어떻게 쳐다볼 수 있겠는가. 두 사람 사이에서 여유 있는 사람은 오직 교장선생뿐인 것 같았다. 등받이에 등을 깊이 기댄 채 팔걸이에 올려놓았던 두 팔을 가볍게 들었다 다시 내려놓으며 교장선생이 말했다.

"학교 일로 의논할 게 있어서 오시게 했는데 모처럼 혼자 계시는 자리라 인사나 하라고 불렀어요. 아이들 가르치기 힘들지 않아요?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정수 어머니한테 부탁하세요. 학교 일에 협조를 아끼지 않는 분이니까."

이번에는 담임 칭찬이 이어졌다. 발령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임답지 않게 다방면에 재주가 많으며 아이들 지도에도 열성적인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했다.

주 여사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노련한 교장은 확실히 달랐다. 집으로 돌아가는 주 여사의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일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주 여사가 하루아침에 고자질 쟁이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정수 어머니, 태식 엄마예요. 다른 엄마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요. 아세요?"
"무슨 소문요?"
"정수 어머니가 교장실에 찾아갔다면서요?"
주 여사는 순간 뜨끔했으나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교장실에야 어디 한두 번 갔나요?"
"아니, 학교 일로 갔다면 소문이 이상할 것도 없죠. 정수 매맞은 일을 교장선생님께 고해바쳤다고 하니까 그렇지. 정말이세요?"
"누가 그런 말을……?"
"전화로 이럴 게 아니라 내가 그리 갈게요."

마침 늦은 점심을 먹고 있던 주 여사는 그만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학교를 다녀온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소문이 돌아 주 여사 귀에까지 들어왔다는 사실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도대체 누가 그것을 퍼뜨렸단 말인가. 소식통이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태식 엄마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굳이 그 자리에 담임을 불러서 새삼스럽게 인사를 하게 한 것부터 이상하네요. 부러 그래야 할 이유가 꼭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두 사람 있는 자리에서 번갈아 가며 칭찬을 한 것이 바로 교장선생님의 술책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리고 정수 어머니 앞에서는 그렇게 했지만 정말 담임한테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겠어요? 더군다나 우리 교장선생님은 아이들한테 손대는 것을 가장 싫어하신다고 하던데……. 교감선생님을 시켜서라도 무슨 말이 있었겠지요."

주 여사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저 교장선생에 대한 고마움에 겨워 다른 저의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조차 해보지 않은 자신의 단순함이 비웃음 당한 듯하여 모멸감을 느꼈다. 노련하다못해 교활하기까지 한 교장이 아닌가. 주 여사는 갑자기 사람이 무서워졌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담임선생이 모든 사실을 알아버렸을 테니 앞으로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걱정거리였다.

"정수 어머니,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아요. 정수 일을 교장선생님한테 일러바쳤다는 사실을 담임이 알았다면 기분 나쁠 건 뻔한 일, 사람들이 웬만하면 참고 그냥 넘어가는 이유가 다 그 때문이에요. 담임이 기분 나빠서 좋을 거 없잖아요. 학년 끝날 때도 다 돼 가는데 조금만 참을 걸 그랬어요."

태식 엄마의 말은 주 여사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정수 어머니, 솔직히 말해 보세요. 혹시 교장선생님을 믿고 담임을 우습게 본 거 아니에요? 하긴 아이들도 요새는 갓 발령 받은 젊은 담임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니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지. 특히 정수 큰누나 또래밖에 안되니 원……."

주 여사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태식 엄마가 이번에는 눈치가 좀 없는 것 같았다. 자기가 하는 말이 주 여사에게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지 그녀는 말을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가 학교에 자주 가는 것도 아이한테는 좋지 않대요. 엄마들이 자식 기를 죽이지 않겠다는 욕심에서 학교 행사에 빠지지 않고 얼굴을 내미는데 이것도 아이들 모르게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기는 살릴지 모르지만 선생님을 어려워하지 않게 된대요."

"태식 엄마, 미안해. 지금 머리가 너무 아파 좀 누워야겠어."
태식 엄마 말이 맞는지도 몰랐다. 의도적으로 담임을 무시하려 한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어버렸으니까. 주 여사는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기로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생각할수록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았다. 아이의 엉덩이에 피멍이 든 것을 보고 잠깐 분별력을 잃고 교장을 찾아가긴 했지만 그것이 담임을 난처하게 만들 줄은 정말 몰랐다. 제 자식 귀한 줄만 알고 물불을 가리지 못하는 사람으로 한번 인심이 나 버리자 그 동안 학교에 쌓아놓은 신뢰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만 것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주 여사는 학교와 학부모는 결코 입장이 같을 수 없는 상대적인 관계이며 학교만큼 정상이 참작되지 않는 비정한 사회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제 자식 별난 줄은 모르고 고자질이나 하는 철없는 늙은이라는 소리를 듣다니 그보다 심한 말은 다시없을 것이다. 주 여사는 비로소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밤새 뒤척인 탓인지 아침에 일어나자 주 여사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신경을 많이 쓰면 찾아오는 편두통이었다. 한 번 시작하면 적어도 이틀은 계속되는 이 고질병은 진통제를 먹으면 약효가 있는 동안만 가라앉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머리가 쑤시고 아파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루종일 편두통에 시달리던 주 여사가 견디다 못해 오후에 병원에 다녀오려고 학원 가는 정수와 함께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가 9층에서 멈추자 아랫집 여자가 탔다. 주 여사는 일부러 모른 척했다.

"얘, 네가 정수니? 아주 씩씩하게 생겼네."
여자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아줌마가 제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주 여사는 애써 외면하느라 고개를 돌렸다.
"다 아는 수가 있지……. 너네 선생님이 가르쳐주었거든."
주 여사는 깜짝 놀라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여자가 주 여사의 눈길을 외면한 채 아이와 말을 주고받았다.
"우리 선생님도 아세요?"
"그럼. 자알 알지. 아줌마 동생이니까."
"……"
"너 이제 집에서 뛰면 안 된다. 그러면 내가 너네 선생님한테 일러줄 거야."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멈추어 섰다.
"안녕히 다녀오세요."
"응, 너도."

주 여사는 아이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아파트 마당을 나오며 정수가 말했다.
"엄마, 우리 선생님이 아래층 아줌마 동생이래."
"이 녀석아, 나도 다 들었다. 그러니 제발 이 엄마 체면 좀 그만 구기란 말이다."
주 여사는 녀석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았다. 이번에는 편두통이 한 사흘은 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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