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나라의 수능시험에 해당하는 것이 프랑스에서는 바깔로레아(Baccalaur at)이다. 바깔로레아는 1808년 나폴레옹에 의해 처음 도입된 이래 200년의 전통을 가지며 프랑스 사회에서 바깔로레아에 부여하는 의미는 상당히 독특하다.
바깔로레아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진학하건 또는 직업계에 진출하건 어떤 진로로 나가던지 시민으로서의 기본적인 자질과 능력을 갖추었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증표가 된다. 즉 바깔로레아는 중등교육을 충실히 이수하고 시민으로서 기본적인 자질과 능력을 갖추었는지 평가하는 중등학교 졸업시험이자 고등교육을 받을 능력과 자격을 갖추었는지 평가하는 수능시험이라는 이중의 성격을 갖고 있다.
바깔로레아는 출제와 시행면에서 우리 나라의 수능과 차이가 많다. 바깔로레아는 매년 6월 일주일에 걸쳐 프랑스 전역에서 실시된다. 6월에 실시되는 것은 우리와 달리 학년도가 9월에 시작하여 6월에 끝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수능은 단 하루에 모든 과목을 다 보는데 비해 바깔로레아는 일주일에 걸쳐 필수, 선택과목별로 하루 1∼2과목씩 본다.
공통 필수 과목은 철학과 국어(프랑스어), 역사, 지리, 수학, 외국어(전 세계 언어) 등이며 철학과 국어(프랑스어)의 비중이 높다. 이것은 논리적 사고력과 표현력을 바탕으로 폭넓은 인문학적 교양과 인류 보편 문화에 대한 이해를 강조하는 프랑스의 전통과 관계가 깊다. 바깔로레아는 크게 일반, 기술, 직업 바깔로레아로 나뉘며 진로와 적성에 따라 다시 여러 갈래의 계열로 세분화된다.
우리의 수능은 5지선다형인데 비해 바깔로레아는 논술형과 서술형으로만 문항이 구성되어 있다. 문항수가 우리의 경우 언어 영역 60문항 등 상당히 많은데 비해, 바깔로레아는 논술형인 만큼 과목당 2∼4 문항으로 매우 적으며 시험 시간도 과목당 2시간에서 많게는 8시간까지 된다. 문제 제시 방식은 과목당 2∼4 문제가 주어지면 수험생이 그 중 1∼2 문제를 선택해 논술하도록 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논술 주제는 오늘날 세계 속에서 생각해 볼만한 중요 문제들과 관계되며 시험이 끝나고 나면 수험생 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큰 관심거리가 되며 이 주제를 놓고 곳곳에서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시험의 종류도 수능은 필기 시험으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비해 바깔로레아는 필기 시험과 구두 시험, 실기 시험(기술 등의 과목)으로 구성된다. 바깔로레아의 점수 체제는 모든 과목이 20점 만점이며, 선발 시험이 아닌 자격 시험이므로 전과목 평균 10점 이상이면 합격이다.
근소한 차이로 불합격한 수험생에게는 재시험의 기회를, 질병이나 사고 등 정당한 사유로 시험에 응시하지 못한 수험생에게는 보충시험의 기회를 부여한다. 논술형 문제들이지만 채점의 공정성으로 채점 시비는 별로 발생하지 않는다. 대학교수 및 중등학교 교사로 구성된 과목별 채점위원회가 조직되어 채점을 담당하는데 동일답안지가 채점자간 점수 차이가 큰 경우 내신성적을 참조하여 별도로 점수 조정 절차를 밟는다.
일단 바깔로레아에 합격하면 고등교육기관에 진학할 자격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종류의 고등교육기관에 입학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어떤 학교에 진학할 것인가에 따라 추가로 선발고사를 봐야 하는 경우도 있다. 프랑스에서는 각 개인의 적성과 진로, 능력에 따라 고등교육기관이 상당히 세분화, 다양화돼 있으며 입학 조건, 선발 방법, 수학 연한이 제각기 다르다.
프랑스 고등교육의 구조는 크게 만민 평등의 노선과 엘리트 노선이라는 이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평등을 지향하는 개방적 성격의 고등교육기관으로는 바깔로레아 취득만으로 갈 수 있는 교양 습득과 학문 연구의 대학(universit s)과 바깔로레아 없이도 갈 수 있는 각종 직업 전문학교( coles)가 있다. 폐쇄적 엘리트 노선의 고등교육기관으로는 프랑스 사회를 이끌어갈 각 분야 전문 엘리트 관료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그랑제꼴(Grandes Ecoles)이 있다.
그랑제꼴은 바깔로레아를 취득한 후 명문 고등학교에 설치된 그랑제꼴 준비반에서 2년 이상의 교육을 받은 후 치열한 경쟁의 선발고사를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인문계, 이공계 각 분야의 그랑제꼴이 있는데 이공계로는 에꼴 뽈리테크닉(Ecole Polytechnique), 광업학교(Ecole des Mines), 인문계로는 고등사범학교(Ecole Normale Sup rieure), 국립행정학교(E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 등이 있다.
그랑제꼴은 학교당 학생수가 500명 미만이며 소수의 해당 분야 수재만이 들어갈 수 있다. 그랑제꼴 선발고사에 불합격하였더라도 그랑제꼴 준비반에서의 2년 이수기간을 인정하여 일반 대학 3학년에 진학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 이것은 제도적으로 재수 문제를 해결하는 장치 역할을 한다.
프랑스 입시제도의 특징은 국가 시험으로서의 공정성, 고등교육기관의 다양성과 선택의 다양성을 들 수 있다. 어떤 길로 갈 것인가는 하루 아침에 결정되거나 시험 당일 하루의 시험운에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 오랜 기간의 진로 탐색, 공부와 노력의 결과이며 이러한 노력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주는 다양한 장치들을 갖고 있다.
프랑스인들에게 있어 바깔로레아에 합격한다는 것은 자격과 교양을 갖춘 건강한 프랑스 시민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일단 합격하면 언제라도 원하는 때 대학에서 학업을 할 수 있는 보증서가 되고 있기 때문에 프랑스 국민에게 그만큼 공신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