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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극', 과거를 통해 동시대 정서를 이야기하다

현재를 살아내기 힘들거나 미래를 전망하기 어려울 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지나온 삶의 궤적을 돌아보면서 지금 겪고 있는 문제 해결 방안은 물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곤 한다. 극예술 장르에서 지나온 삶의 궤적을 극적으로 형상화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갈라진다.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작가의 상상력으로 역사적 상황을 재구성하는 ‘역사극(歷史劇 historical dramas)’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와 맞닿아 있는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지나간 과거를 현재화시키는 ‘시대극(時代劇 period dramas)’이 바로 그것이다.
역사극과 시대극은 ‘과거’라는 시간의 퇴적층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나, 한 세기 정도의 물리적 시간에 따라 ‘시대감각’이 갈라진다는 점에서 변별되는 극 양식이다. 현재를 중심으로 물리적 시간에 대한 정서의 분절과 연속이 역사극과 시대극을 가름하는 기준이라는 것이다. 역사극이 현재와 분절된 과거에 대한 객관적 거리 확보를 전제로 극적 상황을 현재에 투사시키는 방식이라면, 시대극은 현재와의 연속선에서 몰입 또는 공감의 방식으로 지나간 과거를 재현한 극적 상황을 현재화시킨다.
누군가에게는 ‘추억’으로 회상될 수 있어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이미 오래 전에 완결된 ‘역사’일 수밖에 없는 시대를 현재로 호출하는 것은 지난 과거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모색하는 과정이다. 지금 현재의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역사극이나 시대극이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당대의 바람직한 시대정신을 고민하게 만들었던 것도 이러한 역사의 속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국가적 외환위기 사태에 직면했던 1990년대 말, 힘들고 어려웠던 절대 빈곤의 1960년대를 어떻게 극복했는지에 초점을 맞췄던 시대극 <육남매>가 시청자의 뜨거운 반응 속에 방영되었던 경우가 대표적이다.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로 인해 빈부의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상대적 빈곤감이 팽배했던 2010년대에 ‘성장’과 ‘개발’에 무게중심을 두었던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 <제빵왕 김탁구>와 <자이언트>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시대극’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극적 상황에서 물리적 시간 개념을 초월한 동시대 정서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방영 당시 높은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제빵왕 김탁구>와 <자이언트>가 개발독재시대를 미화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은 ‘성장’과 ‘개발’의 시대였던 1970년대에 대한 성찰의 시선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거의 다뤄지지 않았던, ‘대중문화’의 관점에서 1970년대를 호출한 시대극 <빛과 그림자>의 경우는 어떠할까? 1970년대는 ‘산업화’로 상징되는 ‘개발’과 ‘성장’의 담론이 우세했던 시대였지만, 그만큼 ‘민주화’를 향한 사회적 열망 또한 강렬했던 시대였다.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을 강요당했던 ‘인권’을 회복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열기가 혼재되었던 시대가 바로 1970년대였던 것이다. <빛과 그림자>는 ‘문화산업’이라는 표현조차 생소했을 1970년대의 쇼 비즈니스 세계를 당시의 부패한 정치권력과 접목시킴으로써 현대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풀어낸 시대극이다. 50대 이상 중장년층의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을 극장가를 주요 공간적 배경으로 설정함으로써 아직 역사적 평가가 끝나지 않아 논란의 여지가 많은 1970년대에 대한 대중문화사적 접근을 시도한 점이 돋보인다는 것이다.
<빛과 그림자>는 전쟁 통에 고향을 버리고 월남하여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소도시 ‘순양’에서 극장과 양조장 등을 운영하며 지역 유지로 자수성가한 ‘강만식(전국환 분)’의 아들 ‘강기태(안재욱 분)’가 한량 기질이 농후한 부잣집 아들에서 쇼 비즈니스 세계의 실력자로 성공하는 과정을 다룬 작품이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거나 가수들의 리사이틀을 즐기는 ‘극장 구경’조차 호사스러웠던 시절, 추석 특선 영화에 선투자했다가 사기 당한 강기태의 허술함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1970년대를 발랄하고 경쾌하게 재현한다. 당대 최고의 흥행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이나 <용팔이>의 포스터, 그리고 ‘반공방첩’이나 ‘개척과 전진’이라는 표어가 난무하는 거리로 펄시스터즈의 노래 <커피 한 잔>이 흐르는 시대극 <빛과 그림자>의 풍경은 50대 이상 중장년층의 추억을 자극하는 동시에 30대 이하의 청년층에게는 낯설면서도 신기한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구경거리가 된다.
주지하다시피 1970년대는 ‘빨갱이’라는 한 마디에 아무 죄 없는 사람을 송장으로 만들던 제3공화국의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빛과 그림자>는 강기태를 중심축으로 당시의 쇼 비즈니스 세계를 재현하면서 서울대 출신의 권력 지향적인 인물 ‘이수혁(이필모 분)’을 통해 유신 정권의 부패한 정치 현실을 적절하게 결합시켰다. 이른바 반공 이데올로기가 우리 사회를 어떻게 억압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스타 가수로 성공하는 고아 출신의 ‘이정혜(남상미 분)’가 예능 지향의 강기태와 권력 지향의 이수혁 사이에서 갈등하는 비극적 운명의 여인으로 등장하면서 전형적인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좋은 연예계와 서슬 퍼런 정치권력의 이면이 결합되는 과정 속에 이루어지지 못할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현대사의 흐름 속에 배치한 <빛과 그림자>의 서사 전략은 시청자의 향수와 호기심을 동시에 자극할 정도로 대중적이다.
세련된 콘서트 무대에 밀려 지금은 오래되어 낡은 필름 속에서나 확인할 수 있는 1970년대 리사이틀 무대를 재현한 <빛과 그림자>에는 엄혹한 정치 환경에서 꿈과 희망을 잃지 않는 당시 대중의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것이 전부이다. 게다가 부패 정치인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장철환(전광렬 분)’이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연예 산업의 이익을 취하는 과정은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에서 이미 충분히 다뤘을 만큼 상투적이다. 장철환과 이수혁을 중심으로 한 당시 부패한 정치 풍토의 상투적인 재현 방식이 대중예술사적인 접근이라는 <빛과 그림자>의 참신함을 식상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과 그림자>는 세대 간의 단절 극복, 싸구려 오락으로 치부되었던 당대 쇼 비즈니스 세계를 통해 대중예술사와 1970년대 생활사를 복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 많은 시대극이다. 미시사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역사적으로 배제되거나 소외되었던 대중의 생활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나, 이른바 ‘딴따라’로 치부되었던 대중예술에 대한 편견이 여전한 상황에서 <빛과 그림자>가 대중예술에 대한 우리 사회의 그릇된 고정관념에 균열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1970년대의 ‘성장’과 ‘개발’ 담론이 이후 어떤 과정을 거쳐 2010년대 지금 우리의 삶에 드리워져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면, <빛과 그림자>는 분명 ‘그림자’보다 ‘빛’이 더 강한 시대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1994년 방영 당시 수많은 화제를 모았던 김운경 작가 특유의 서민 감각이 돋보였던 <서울의 달>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종영된 지 20여 년의 세월이 지나가고 있지만, <서울 뚝배기>에 이은 김운경 작가의 대표작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서울의 달>은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한 청춘남녀의 시선을 통해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의 한국 사회를 여실히 재현한 드라마였다. 종영된 지 2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현재의 시선으로만 본다면, <서울의 달>은 1990년대의 시대정신이 살아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시대극’으로 부를만하다. 1970년대에서 시작하여 2010년대에 이르는 50여 년의 세월을 관통할 <빛과 그림자>에서 <서울의 달>이 방영되었던 1990년대가 어떻게 형상화될지 상상해보는 것은 ‘시대극’ 시청의 또 다른 즐거움 아닐까? 윤석진(尹錫辰)
2000년 8월 한양대 대학원에서 「1960년대 멜로드라마 연구 - 연극 · 방송극 · 영화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한양대 국문과, 동국대 문예창작과, 인천대 국문과,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등에서 강의를 하다 2004년 가을학기에 충남대 국문과 교수로 부임하여 현대희곡과 영상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2005년부터 다양한 매체를 통해 드라마 평론을 연재하고 있으며, 2010년 8월부터 트위터(@kdramahub)에서 새로운 방식의 드라마 단평을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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