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새 학기가 시작되면 바른말을 위해 작은 실천을 시작하려고 한다. 각 반마다 ‘우리말지킴이’도 선정해 보고, 교실게시판에는 예쁘고 좋은 우리말을 붙여 알리고 싶다. 국어 시간에는 한글의 위대함을 가르치고, 우리말 소양 교육을 즐겁게 실시해 보겠다. 그래서 난 오늘도 바른말의 아름다운 선율이 퍼지는 교실을 꿈꿔 본다.
한 국어교사가 한글날을 맞이해 중학교 학생들에게 한글을 주제로 특별한 수업을 실시했다. 선생님은 한글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 만약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지 않으셨다면, 이 교실에서 보이는 칠판, 게시판, 책의 모든 글자가 아마도 한문이었겠죠?” 그러자 몇 명의 학생이 동시에 감탄사를 외쳤다. “정말 황당해요. 헐~” 이 이야기는 단순히 웃고 넘기는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학생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이다. 최근 학생들이 쓰는 말을 가만히 살펴보면 비속어, 욕설, 은어가 넘쳐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말들은 소수의 학생이 사용하는 장난 섞인 애교가 아니라, 많은 초 · 중 · 고 학생들이 사용하는 ‘언어 현상’이 되고 있다.
청소년 언어가 비속어, 욕설로 얼룩진 원인은 무엇일까? 첫째, 인터넷의 사용과 매스컴의 영향을 들 수 있다. 학생들은 온라인 게임을 하며 상대방을 욕하거나 화를 분출하기 위해 욕설을 하고 있으며, 채팅을 하거나 게시판에 글을 남기며 나쁜 말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둘째, 단순한 재미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습관적으로 나쁜 말을 쓰는 청소년의 태도에 원인이 있다. 학생들은 상대방이 밉고 화를 내기 위해 욕설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재미를 느끼고 마음속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자주 나쁜 말을 사용하면서 언어 습관이 되기도 했다. 특히 청소년 또래 집단의 성격상 친한 친구의 욕설을 따라하며 동질감을 느끼며, 나쁜 말을 하지 않으면 소외감을 느끼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셋째, 어른들의 잘못된 언어 사용에도 그 책임이 있다. 학생들에게 비속어나 욕설을 쓰지 말라고 이야기하면 어른들도 그런 말을 사용하면서 청소년만 탓한다는 볼멘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다. 바르지 못한 언어를 사용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청소년에게 부정적 영향을 준 면이 있다. 넷째, 결과론적인 원인이지만, 잘못된 청소년 언어를 제어해 주고 교정해 주는 효과적인 프로그램이 부족했다. 청소년이 비속어, 욕설을 사용하는 현상을 일시적으로 보고 어른들은 크게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큰 소용돌이가 생겼다고 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학생들이 사용하는 나쁜 언어가 습관화된 말투가 되어 가며, 비판 없는 사용으로 인해 빠르게 전파가 된다는 점이다. 단순한 재미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욕설이라 하더라도 상처받는 사람들이 생기고, 그들 또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욕설을 사용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또한 학생과 어른들은 소통이 단절되고 있어서, 얼마 전 미국에 청소년 언어 해독 사이트가 생긴 것처럼 통역과 번역이 필요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의 동량인 청소년 언어가 훼손되고 변질된다는 점은 거시적 차원에서 우리나라의 언어문화가 점점 수준이 낮아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 문제는 청소년이라는 특정 연령층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 학교, 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되었다. 함께 손을 맞잡고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 먼저 언어 순화를 위해 학생들의 동기를 유발할 수 있는 효과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하며, 교육과정 속에 언어 순화 내용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어야 한다. 이것은 국어교사만의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되며 전 교사가 바른 언어 교육에 동참하는 시스템으로 정착되어야 한다. 학교에서는 학생들과 교사가 함께 아름다운 우리말, 바르고 고운 말을 쓰는 운동을 전개하며 올바른 언어 사용을 약속하는 다짐을 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청소년들이 나쁜 언어에 대해 반성과 책임을 느끼고 스스로 정화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친구의 나쁜 말을 당당히 교정해 주고, 좋은 말을 쓰도록 마음속으로 다지며, 자치활동이나 학급회의를 통해 자율적인 학생 문화 개선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 타율적인 통제와 교육보다는 마음에서 울려나오는 진정한 성찰이 더 큰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