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 강을 찾은 황어들
황어에 대한 일방적인 구애는 하천에서 황어가 사라지기 전에 필름에 모습을 담아 보자는 일념으로 시작됐습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하천을 탐사했습니다. 그러기를 몇 년. 눈썰미로 산란장을 확인하고 있던 지난 1999년 4월 3일, 황어의 소상(遡上) 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 장비를 챙겨 연곡천으로 달렸습니다.
태백산맥을 이루는 오대산 산줄기의 눈이 녹아 흐르는 강물의 수온은 8?9℃. 그 물속에 몸을 담그고 무작정 황어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레 출현한 필자를 위협 대상으로 여겼는지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황어와의 첫 만남
“탁 탁 탁.” 턱이 덜덜 떨리는 추위는 황어가 있는 물속으로부터 내 몸을 밀어냈습니다. 집요한 저의 몸부림에도 황어는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벌써 며칠째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몸속에 새 생명을 품은 그녀는 조그만 움직임에도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밀고 당기기, 그리고 지루한 기다림. 그렇게 끊임없이 만남을 시도했습니다. 황어와 인연을 맺고 싶은 욕망 하나로, 외면하는 그녀를 향해 끊임없는 짝사랑을 호소했습니다. 산란기 하천에 나타나는 황어는 제가 일방적으로 약속한 장소에 나타나기를 거부했고, 수차례 바람을 맞혔습니다.
드디어, 끈질긴 힘겨루기 끝에 팔뚝만 한 크기의 황어 무리가 떼 지어 눈앞에 나타난 순간, 숨도 쉬지 못한 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이 황어는 살며시 다가와 지느러미를 부드럽게 얼굴을 스치며 지나갔습니다. 아! 그 부드러운 느낌이란!
혼인색 옷으로 갈아입은 황어
강릉시내에서 산란장까지, 20?30분 걸리는 시간도 아끼기 위해 도시락을 준비하고 다시 도전하기를 여러 번. 4월 중순, 1시간 동안 물속에서 추위와 씨름하던 제게 드디어 황어들이 다가왔습니다. 살그머니 카메라를 손에 들고 30여 마리의 황어를 향해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습니다. 촬영을 마치고 필름을 갈아 끼우지도 못한 채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황어들의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미동도 않는 제가 위협의 대상이 아님을 확인했는지 그들은 1㎜ 차이도 두지 않은 채 눈앞으로 가깝게 헤엄쳐 다가왔습니다. 새로운 경험으로 황홀함을 준 황어들은 여유롭게 물살을 가르며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수놈은 암놈 주변을 보디가드인 양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산란하는 순간을 놓칠세라 밀착해서 움직입니다.
끝없는 대양에서 일생을 보낸 놈들이 새 생명 탄생의 꿈을 위해 수심 40㎝ 안팎의 하천에서 보여주는 산란의 몸짓은 신비하기까지 합니다. 산란으로 예민해진 황어는 접근을 더욱 기피해 겨우 시야로 확인될 정도의 거리에서만 촬영이 가능합니다.
‘한 번 더…. 한 번만 ….’ 기회를 노리는 저에게 황어들은 그 후 더 이상 모습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바다에서 은백색으로 치장한 황어는 산란기를 맞아 담수로 올라오면서 혼인색 즉, 암청갈색 내지 황갈색으로 변합니다. 3개의 적황색 세로줄은 마치 스님들이 입는 가사(袈裟)를 연상케 해 가사어라고도 불립니다.
[PAGE BREAK]
황어의 삶과 죽음산란이 집중되던 1주가 지나자 산란장 모래와 자갈 사이는 황어들이 수정시켜 놓은 알들로 가득 찼습니다. 황어의 수정란들 주변에서 꾹저구 등 다른 물고기들이 움직이지 않는 알을 손쉽게 먹어치우며 포식하는 행운을 누리고 있습니다. 거의 매일 부화 현장을 찾아 육아일기를 쓰듯 부화 과정을 기록했습니다. 부화 후 1주일 정도 지날 무렵 어린 황어가 난황을 달고 모래 사이에 나타났습니다. 산란장은 주변 논에서 농수로 이용돼 수량이 줄어들면서 물이 빠져나간 돌 틈 사이로 어린 황어들이 종말을 맞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운 좋게 물기 있는 곳으로 옮겨 앉은 놈들은 모래 사이로 헤엄치며 새 세상이 신기한 듯 쉴 새 없이 움직입니다.
영롱한 빛을 발하던 어린 황어는 2주 정도가 지나자 모래 틈에서 어느새 수면 위로 부상을 시작해 어엿한 물고기 모습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조심스럽게 작은 물 흐름이 있는 곳으로 장소를 옮겨가며 수영 실력을 쌓아가는 순간에도 꾹저구 등 다른 물고기들은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어린새끼들을 계속해서 먹어댑니다. 폭식의 기회가 거의 끝나가고 있음을 직감이라도 한 듯 먹이활동이 두드러집니다.
5월에 들어서면서 비교적 행동이 날렵해진 어린 황어를 만나기가 힘들어졌습니다. 간혹 헤엄치는 모습이 관찰되곤 했지만 물속에서 놈들을 촬영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제 놈들은 바다로 돌아가 바닷속을 헤엄치는 당당한 황어로 자랄 것입니다. 내년 벚꽃이 피는 계절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어린 황어들에게 작별을 고했습니다.
물밑 세상의 생물들
민속 명절인 팔월 한가위가 되면 고향을 찾아가는 차량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고속도로를 가득 메웁니다.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은 사람과 어류가 별반 다르지 않은가 봅니다. 태백산맥을 발원지로 하는 영동의 하천은 고향을 찾아 바다에서 무리를 지어 오르는 연어로 해마다 장관을 이룹니다.
물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다양한 생명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사는 또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영동의 하천에는 담수와 해수를 넘나들며 공간의 제한을 일시에 허물어 버리는 신비한 물고기들이 서식합니다. 수온의 1?2℃ 차이는 물고기들에게 생명선이라 할 만큼 어류에겐 넘을 수 없는 큰 벽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들은 생명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한 개체의 물고기가 다양한 생물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하며 살고 있습니다. 한 개체가 사라지면 다른 개체의 생존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다양한 생물이 인간과 함께 공존하며 생물들이 오랫동안 산란과 번식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