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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보고싶구나, 가슴속 너희들이…


교사들에게 제자란 어떤 의미의 존재일까. 아마도 그건 '생명'일 듯 싶다. 교사로서 살아 왔음을, 살아 있음을, 그리고 살아야 함을 머리칼 곤두서게 문득문득 일깨우는 '얼굴'일 듯 싶다. 교육주간 교총 수기공모에 보내온 교사들의 사연에는 그들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주인공이 온통 뭉클한 제자들이었다.

#교사들이 보내온 '잊지 못할 제자'

▲교사의 의미를 알려준 M(이규동 강원 주천중 교사)
단발머리 80명 중 M은 유난히 단정하고 도회적인 모습이었다. 미화부장으로 꽤 성실한 모습이 무척 호감 가는 아이였다. 그런데 5월초 중간고사 날 유독 M만 결석을 했다. 중학교 첫 시험이라 부담도 있었겠지만, 난 이해할 수 없었다.

다음날 M은 아팠다고 했다. 난 이유가 안 된다며 아이들 앞에서 M을 눈물나도록 혼냈었다. 그후 난 M을 특별한 아이로 여기지 않았다. 기말고사 때 M은 360명 중에 50등을 했다. 기대한 정도였다. 그런데 우리 반 아이들은 M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부정행위를 한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M은 초등교 6학년 때까지 구구단도 못 외워 나머지 공부까지 했었단다.

2학기 중간고사 때, M은 35등을 했다. 이번에도 아이들은 같은 말을 했다. 아이들을 나무랐지만 조금은 의심스럽기도 해서 갑작스레 M의 집을 방문했다. 막내 동생을 업고 있다 얼굴이 빨개져 뛰쳐들어가던 M의 모습…. 정말 게 딱지 같은 집에 여섯 식구가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한쪽 손을 못 쓰셨고, 아버지는 벌목 일을 하다 다친 상태였다.

아이들은 M의 옷이 형편에 비해 좋은 것은 어머니가 품팔이를 해서라도 맏이인 M에게 예쁜 옷을 사 입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M은 인천의 한 산업체 부설고에 시험 보러 가는 날에도 차비가 없어 포기할 정도로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부리나케 2만원을 손에 들고 갔을 때, M은 방에서, M의 어머니는 부엌에서 울고 계셨다. 어머니는 동생들 뒷바라지를 위해 M을 버스 안내양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우여곡절 끝의 졸업식 날. M은 며칠 뒤 산업체 학교로 간다며 내게 찾아와 평생 잊을 수 없는 선생님이라며 감사한다고 글썽였다. 그러고는 살며시 지난 얘기를 털어놓았다. '전 초등교 6학년 때까지 한글도 잘 모르고 구구단도 잘 외우지 못해 매일 나머지 공부와 청소를 했어요. 근데 중학교에서 선생님이 저를 굉장히 공부 잘하는 모범생으로 보셨어요.

실망시킬 수가 없어 며칠을 밤새워 공부했지만, 자신이 없어 처음 시험 보는 날엔 일부러 결석을 했습니다. 그 다음 기말고사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공부했더니, 50등을 했고 나중에는 우등상도 탈 수 있었어요….' M의 손을 잡고 정말…정말…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초임 교사 시절, 내게 교사의 말 한마디, 동작 하나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힘을 미치는가를 가르쳐준 아이였다.

▲창백한 종규의 얼굴(조이섭 경북 대신초 교사)
2학년 종규는 학년초부터 친구들에게 '오줌싸개'로 늘 놀림을 받았다. 한날 국어시간에는 종규가 일어나 책을 읽는데 옆자리 아이가 코를 막고 "선생님, 종규가 바지에 또 오줌 쌌어요"라고 말해 반 전체가 깔깔거린 적도 있었다. 무척 화가 난 나는 종규를 불러 이런저런 얘기를 했지만 표정은 굳어 있었고 뭔가 숨기는 듯한 인상이었다.

아이들은 점점 종규를 따돌리고 어떻게든 고쳐보려는 내 노력도 허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난 1학년 때 담임이셨던 박 선생님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바로 종규가 신체 장애로 정상소변이 아닌 항문소변을 보는 희귀한 아이라는 사실이었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의 아이였다. '그랬구나. 그래서 흐르는 소변을 알지 못했구나.' 그런 종규에게 편견적인 태도로 정신적인 매질을 가했다니 정말 당황스러웠다.

2학기 초, 종규는 사흘째 결석을 했다. "갑자기 심한 병으로 서울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는데요, 당분간 못 나갑니다." 종규 아버지의 말에 난 올게 왔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무정한 시간은 흘러 10월 어느 날. 땅거미가 질 무렵 나는 통근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바삐 페달을 밟고 있는데 언덕 위 느티나무 아래 앉아 있던 한 아이가 벌떡 일어서 내게 인사를 해왔다. 어찌나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하고 야위었던지…. "근데 너 이름이 뭐니?"

잠시 더듬거리던 아이는 "선생님…저 종규예요…."
그랬다. 너무도 뜻밖의 만남이었다.
"그랬구나…건강은 어떠니?" "네, 이제 괜찮아요." "그래, 다행이구나. 내일부터 학교에 나올 수 있겠지?" "아뇨, 또 수술 받아야 해요."
"그래…." 그렇게 난 종규와 몇 마디만을 하고 헤어졌다. 그때 그 종규의 창백한 얼굴이 평생 내 가슴에 남을 줄은 몰랐다.

이후 종규 소식은 없었다. 다만 종규가 장기간에 걸쳐 여러 차례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긴 세월이 지난 지금도 장애를 가진 아이를 보면 문득 종규의 창백한 얼굴이 시리게 떠오른다.

▲약속을 지킨 제자(김세종 충남 금산중앙초 교사)
교사라면 아마 다 알 거다. 힘들 때마다, 절망 할 때마다 내 가슴 한복판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그런 잊혀지지 않는 제자 하나가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1984년 금산 부리초등교에 근무할 때다. 당시 6학년 우리 반에도 끼니 걱정을 해야할 만큼 궁핍한 학생이 있었다. 이혼한 부모는 떠나고 위로 언니 셋, 남동생 하나, 다섯 식구가 함께 생활하던 그 아이는 도시락을 싸올 형편이 아니었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열린 학급회의에서 아이들은 돌아가며 도시락 하나씩을 더 싸오는 안에 의견을 모았다. 나머지 아이들의 생활도 어렵다는 것을 잘 아는 나로서는 그저 고마웠다. 그리고 매일 그 약속은 지켜졌다. 그래서 우리 반은 점심시간이 다른 반 보다 훨씬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월 땡볕이 유난히 뜨겁던 그날은 지은이가 도시락 당번이었다. 그런데 그 지은이가 감기로 결석을 하게 됐다. 우리 반은 금세 침울해졌다.

반장은 자기 도시락을 대신 주겠다고 했고 반 아이들은 밥을 조금씩 나눠 먹자고 했다. 밖에 나가서 우동이라도 한 그릇 사 먹일까 궁리하며 넷째 시간 수업을 하고 있는데 '드르륵' 교실 문이 열렸다. 지은이였다. 초췌한 얼굴의 지은이는 한 손에 도시락을 들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점심을 굶게 될 친구를 위해 아픈 몸을 마다 않고, 사랑의 약속을 지킨 그 아이. 아이들을 사랑하겠다는 약속을 지금껏 지키게 한 지은아! 꼭 한번 보고싶구나.

▲빛 바랜 손수건(문원희 경남 노산초 교사)
꽃샘추위가 매섭던 어느 날, 뜻하지 않는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안녕하세요. 저…문원희 선생님 댁인가요? 하이초등교 4학년 성욱이 기억하실는지…."

중반을 훨씬 넘긴 듯한 아주머니의 낯선 목소리에 난 32년의 교직생활을 더듬어야 했다. 그러고는 항상 기관지가 좋지 않아 기침을 콜록거리던 작고 약한 성욱이를 기억해 냈다.

"아! 성욱이. 그런데 어떻게…." "꼭 전해드릴 게 있어서…."
아주머니는 내게 빛바랜 손수건 한 장을 돌려주고 싶어했다. 그때도 이렇게 추웠던가? 고성 바다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던 날, 기관지가 좋지 않아 늘 목에 수건을 매고 다녔던 성욱이는 그 날도 기침을 콜록이며 콧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 아침에는 늦어 서두르는 바람에 수건을 깜빡한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수업 시간 내내 콧물을 흘리고 기침을 콜록였다. 작고 약한 어깨가 기침에 들썩이는 것을 보던 나는 안쓰러운 마음에 손수건을 꺼내 성욱이의 목에 걸어주었다. "성욱아, 다음부터는 지각해도 좋으니까 목에 매는 수건은 꼭 챙기거라." 성욱이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내가 매어준 그 손수건을 돌려주고 싶었단다.

13년 전의 그 손수건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다니! 다음날, 웬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군인 한 명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항상 감기를 앓던 작고 여위기만 해서 품속에 소중히 안아주어야만 했던 그 아이가 건장한 대한 남아가 되어 서 있었다. 빛 바랜 손수건을 들고서.얼마나 가슴 벅차던지…. 손수건을 매어준 내 작은 마음을 잊지 않고 장롱처럼 깊이 마음속에 보관하고 있다가 나를 찾아준 어머니와 성욱이. 교사이기에 나는 진정 행복했다.

▲하늘나라에서 뽀뽀해다오(정성곤 이천여고 교사)
1986년 청암고에서 만난 순철이는 재수생이라는 훈장을 달고 패거리를 지어 학생들을 괴롭혔다. 담임이 없으면 학생들은 제 도시락의 절반도 채 못 먹고 갈 때가 많았고 고2때는 좋지 않은 일로 교도소 신세를 질 뻔 하는 등 사고뭉치였다.

그런데 녀석에게는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장난이 있었다. 바로 학생들과 심지어 선생님들에게까지 볼에 뽀뽀를 하고 도망치는 일이었다. 참 어처구니없지만 담임인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의 뽀뽀 세례를 받느라 늘 볼에서 공중전화 수화기 냄새가 났다. 그런 녀석과 난 자주 이야기를 나누고 다독여 주면서 소임을 다했다.

순철이는 군대에서도 내게 자주 연락했다. 중대장에게 장난으로 뽀뽀했다가 군기교육대에 갔다 왔다는 전화는 아직도 내 귓전에 생생하다. 휴가 때마다, 제대 후에도 여러 번 학교에 찾아왔던 그 녀석. 하지만 그는 지금 하늘나라에 있다. 제대하면 마을문고에서 일하며 학생 때 잘못한 만큼 봉사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교통사고로 떠났다.

끝까지 나쁜 녀석…. 나는 지금 여학교에서 근무하지만 남학생들을 볼 때마다 순철이가 생각난다. 그리고 엉뚱한 상상을 한다. 먼 훗날 내가 하늘나라에서 그를 만나면 아마도 제일 먼저 받을 것이 큰절보다는 뽀뽀가 아닐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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