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깨나 읽은 사람치고 소설가 조정래를 모르는 이도 있을까? 이미 ‘태백산맥’·‘아리랑’·‘한강’ 등 조정래 대하소설을 다 읽어본 나로선 ‘허수아비춤’(문학의문학) 독서는 정해진 순서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저자는 그의 또 다른 장편소설 ‘인간연습’에서 윤혁의 생각을 통해 “사회를 병들고 망치게 하는 가장 큰 두 집단이 정치권이고 경제권이”라 진단한 바 있다. 이미 ‘허수아비춤’에 대한 예고편을 내보냈던 셈이다.
‘허수아비춤’은 특히 경제 문제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경제’ 하면 금세 떠오르는 것 중 하나인 재벌의 그 살벌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일단은 조정래 소설의 지평확대라 할만하여 ‘왕팬’인 나로선 더없이 반갑다.
재벌은 일반대중에게 부러움과 질시라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 존재다. 서민인 내가 누리지 못하는 것들을 너무 많이 갖고 있어서 부럽고, 비자금·정리해고·불법상속 등 잊어버릴만하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기에 질시하는 것이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인물은 박재우·강기준·윤성훈이다. 그 대척점에 전인욱과 허민이 있다. 박재우 등은 재계서열 2위 일광그룹 남 회장의 친위조직 ‘문화개척센터’ 핵심 3인방이다. 출세욕으로 뚤뚤 뭉친 그들이 근무하는 일광그룹의 문화개척센터는 한 마디로 비자금 관리소다. 스카우트와 로비 등이 주요 업무다. 그것은 풍자를 통해 드러난다. 그래서 비판적이다.
그런 만큼 비판은 광범위하게 펼쳐진다. "문화진흥을 위한 연극 후원금 같은 것은 천만 원도 벌벌 떨며 결재를 미루는"(41쪽)는 기부문화에 대한 재벌의 '개념없음'에서부터 “외국말 쓰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한국 지식인들의 오랜 습성”(24쪽)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다채롭다.
남회장의 집기(의자), 소지품(안경), 비정한 인사 따윈 기본이고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판, 대기업 로비에 맥 못추는 국회의원과 광고압박에 이내 굴복하는 언론사, 아내가 모르는 돈 50만 원을 챙기기 위해 기탄없이 내사(來社)도 마다하지 않는 기자, 검찰의 상명하복과 검사동일체의식 고취를 위한 폭탄주문화, 이 땅에 만연한 사대주의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다.
비판의 압권은 “정치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건 하품을 빼고는 다 거짓말이라는 옛말”(302쪽)이다. 또 있다. 94쪽에 나오는 남 회장, 그러니까 재벌이 휘두르는 ‘인사의 칼’이다. 나는 이런 지독한 정치불신을 무릇 소설에서 만나본 적이 거의 없다. “계열사 사장을 너 내려! 한마디와 함께 고속도로에 내려놓는”(94쪽) 재벌그룹 회장의 ‘만행’을 들어본 적도 없다.
물론 그것이 실제상황인지 따질 필요는 없다. 애써 알아볼 이유도 없다. 그것은 ‘문학적 진실’만으로 족하다. 마른 눈물이 솟을 만큼 통쾌, 후련하거나 뒤통수를 얻어 맞은 것 같은 쇼킹함이 팍팍 전해져 오니까! 전신이 찌릿하게 우루루 몰려오는 허탈감도 마찬가지다.
그런 느낌은 풍자로부터 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채만식의 ‘태평천하’에서 만나던 풍자 말이다. 아다시피 풍자의 목적은 잘못되거나 뒤틀린 현실에 대한 도덕적 비판을 통해 사회악을 제거시키려는데 있다. 설사 성공하지 못할지라도 그 과정에서 이미 통쾌, 후련함을 맛볼 수 있다. 거의 모든 인물의 외면화 묘사도 그 때문이지 싶다.
거기에 더해 “돈만 있으면 처녀 불알도 산다”(70쪽), “요런 씁새애끼들, 좆대가리로 밤송이 까라면 깠지”(158쪽), “노름판 돈 따먹는 맛은 숫처녀 따먹는 맛과 안 바꾼다고 하지 않던가”(166쪽), “공씹하고 비녀 빼갈 놈이더라고”(283쪽) 같은 속담이나 육두문자들이 재미를 더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미 저자는 ‘태백산맥’ 등에서 욕설을 이 땅의 대다수 민중들 삶의 애오라지 원천적 힘으로 승화시킨 바 있다. 그런 욕설이 풍자와 만날 때 시너지 효과라 할까, 그 파괴력은 막강해진다. 이를테면 욕설을 가미한 그의 언어가 읽는 재미와 함께 카타르시스를 진하게 안겨주고 있는 셈이다.
디테일 묘사 혹은 ‘물고 늘어지기’ 전개도 한몫한다. 예컨대 홍콩 술집에서 ‘도도하게’ 풀어내는 ‘수컷들 본능’ 이야기가 그렇다. 이제 여자들과 술 마시며 놀 일만 남았는데, 아연 ‘씨 뿌리기 본능론’이 펼쳐진다. 자신도 모르게 그 구체적 내용에 빠져들게 되는 이유이다.
많은 대목이 그렇지만, 그러나 그것은 독서 흐름을 일시 끊는 등 방해요인으로 작용하여 아쉬움을 주기도 한다. 이런 아쉬움은 어디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빈번하게 사용된 너무 긴 문단, 지문과 함께 섞어 쓴 대화, 어쩌다 발견되는 오타 등과 함께 불만으로 남는다.
그러나 그것은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풍자라는 칼을 휘둘러댄 분명한 메시지가 온몸을 휘감아오기 때문이다. ‘쫄짜검사’ 전인욱은 “80년대 그때에 큰 자극을 받았던 어떤 작가의 글”(235쪽)을 생각해낸다. 80년대라고? 그렇다. 그들의 투쟁과 희생으로 이만큼이라도 ‘정치의 민주화’를 이루었는데, 우리 모두가 같이 잘 사는 ‘경제의 민주화’는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재벌을 비판한 허민 교수의 재임용심사 탈락이 그렇다. 또한재벌의 비자금 사건을 엄정하게 수사해야 한다는 소신발언을 한 전인욱 검사의 변호사로 ‘내려 앉기’가 그렇다. 나아가 ‘경제’ 하면 그만 오금을 저려대는 국민이 그렇다.
경제가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정치의 민주화가 이루어지면 경제도 자연 풀리게 되어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확고한 시각이다. 물론 그것은 저자만의 독특한 시각이 아니다. 엄연한 일반 현실이다. ‘쫄짜 검사’에서 ‘경제민주화실천연대’ 고문변호사, 다시 공동대표가 되는 전인욱과 허민 교수는, 그래서 희망이요 빛이다.
저자는 희망의 구체적 대안으로 시민단체의 활성화를 제시한다. “시민단체들의 활성화만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열리는 유일한 길이요, 희망이”(376쪽)라는 것이다. 사실 시민단체의 힘은 막강하다. 어느 경우 정부나 정당의 위세를 누르기도 한다. 총을 든 것도, 탱크를 앞세운 것도 아닌데 시민단체의 그런 힘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그들이 국민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분노와 증오를 가감없이 확대재생산해낼 수 있는 바로 그 힘이다. 거기엔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깔려 있다. 그 점에서 전인욱과 허민의 문학적 위상은 결코 가볍지 않다. 참 통쾌, 후련한 조정래 소설의 어떤 희망을 안겨주는 힘은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