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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교원문학상 당선작> 동화

조각가와 소녀상


대밭골의 폐교에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멈춘지 오래다. 가끔 스쳐 가는 바람이 심심풀이로 종을 뎅뎅 치거나 산새들이 놀러와 재잘거리며 마을의 소식을 이야기할 뿐이다.

그런 폐교에도 봄은 찾아오고, 새싹들이 돋아나 봄을 수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폐교의 한 쪽에 아직도 산뜻한 봄을 맞이하지 못 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화단 한 구석에 버려지듯 놓여 있는 독서하는 소녀상이다.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얼룩과 먼지를 가득 뒤집어 쓴 소녀상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예전처럼 아름답고 새하얀 모습이 아니다. 소녀상이 들여다보고 있는 책갈피에도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다. 그런데다가 며칠 전 까치들이 들려주던 이야기는 소녀상을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여기에 도시의 유명한 조각가가 이사온대요. 이 곳을 깨끗이 정리하고, 아름다운 조각 전시장으로 만든다는데요."

마을의 소식을 누구보다도 빨리 알려주는 까치들이 느티나무에게 날아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요란스럽게 떠들어댔다.

"뭐라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조각 작품 못지 않은 멋진 몸매를 보란 듯이 자랑하는 향나무가 호들갑스럽게 몸을 떨었다.
"향나무님이 무엇 때문에 걱정이셔요.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분을 누가 미워하겠어요? 없어진다면 지저분한 저 소녀상이나 없어지겠지요."

까치들은 마치 소녀상이 없어지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소녀상을 흘낏흘낏 쳐다보며 까각까각 깍깍 떠들어댔다. 소녀상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가슴이 내려앉는 소리가 '쿵'하고 들리는 것 같았다. 그 날 이후로, 소녀상은 책을 보려 하여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던 즐거운 추억들만이 하나씩 떠오를 뿐이었다.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소녀상의 마음에 가장 또렷이 남아 있는 추억을 든다면 기원이와의 추억일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기원이를 떠올릴 때면 가슴이 뻐근해지곤 했다. 조용히 눈을 감은 소녀상의 머리 속에서 기원이와 처음 만난 날의 모습이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기원이와 만나 우정을 나누기 시작한 그 때도 지금처럼 연둣빛 새싹들이 파릇파릇 피어나던 봄이었어.'

소녀상이 이 학교에 온 다음 날 체육시간이었다. 공차기에 끼지 못한 한 아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소녀상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의 걸음은 조금 절룩거렸다. 소녀상에게 다가온 아이는 조용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소녀상아, 반갑구나. 내 이름은 기원이고 사학년이야. 우리 부모님이 저 매봉에 기원을 많이 해서 나를 낳으셨다는구나. 그래서 내 이름도 기원이라고 지었대. 참 좋은 이름이지? 그런데…."
자신을 소개하던 기원이가 망설였다.
'그런데?'
소녀상은 그런 기원이의 다음 말이 궁금해졌다. 그러나 소녀상은 기원이의 말을 재촉하기보다는 예쁘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기다려줬다.머루알처럼 새까만 눈망울을 반짝이며, 한참 동안이나 소녀상을 바라보던 기원이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너의 친구가 되고 싶은데......."
소녀상은 기원이의 말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뭐, 친구? 너뿐만이 아니라 이 대밭골 아이들이 이미 내 친구들이잖아.'
"아니, 아니. 그런 친구 말고!"
기원이는 소녀상의 마음을 훤히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도리질을 했다.
'그러면 어떤 친구란 말이니?'
소녀상은 기원이의 말에 점점 흥미가 느껴졌다.
"네가 보는 것처럼, 애들은 축구나 달리기 시합을 할 때면 나를 편에 끼워주질 않거든. 혼자 나무 그늘에 앉아 애들 노는 모습이나 구경하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면 조금은 슬퍼지는 거 있지? 이런 내 마음을 너는 잘 알아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 너는 책을 많이 읽으니까, 생각도 깊을
테고 친구를 위한 마음도 넓을 거야. 그래서 오늘부터 너와 속마음을 털어놓는 친구가 되고 싶어."

기원이는 자못 진지했다.
'그랬구나. 그런 네 마음도 모르고 재미있어만 해서 미안해. 내가 이 곳에 온 것도 이 곳 아이들이 모두 너처럼 책을 좋아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것이란다. 우리 멋진 친구가 되어 보자.'

소녀상은 자신을 찾아와 준 기원이가 고마워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선뜻 대답을 했다.
"소녀상아, 정말 고마워!"
기원이는 파릇파릇한 새싹만큼이나 싱그러운 웃음을 날리며 책을 펼쳤다.
"너와 함께 있으니까 마음이 무척 편한 걸. 우리 내일 또 만나자."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에야 책을 덮은 기원이는 기지개를 한 번 크게 한 후 소녀상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고 있는 기원이가 절룩거리며 걸을 때마다 길게 누워 있는 그림자도 크게 흔들거렸다. 멀어져 가는 기원이를 바라보는 소녀상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도 네가 정말 맘에 들어. 모든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야하지만, 나에게도 깊은 속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 할 친구가 필요하다구. 우리 좋은 친구가 되어보자.'

그 날 이후, 기원이와 소녀상은 돌탑을 쌓듯이 우정을 차곡차곡 쌓아가기 시작했다. 기원이는 틈만 나면 소녀상 곁으로 와서 책을 읽으며 놀았고, 다른 아이들에게는 비밀로 했던 이야기도 소녀상한테는 허물없이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

기원이는 다리가 불편한 대신 다른 애들이 갖지 못한 재주가 많았다. 만들기 대회나 글짓기 대회에 나가면 꼭 상을 타오곤 한다. 언젠가는 어린이 신문에 보낸 글이 특선으로 뽑혀서 상으로 배달된 여러 권의 동화책을 전교 어린이들이 보는 앞에서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전달받기도 했다. 그런 기쁜 일이 있을 때마다 소녀상이 기원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예쁜 미소를 지어주는 일이었지만, 기원이는 늘 즐거워했다.

소녀상은 그런 기원이가 곁에 있어 늘 행복했다. 소녀상과 깊은 우정을 쌓아가던 기원이가 육학년이 되던 해 봄이었다. 어느 날, 풀이 죽은 모습으로 소녀상에게 다가왔다.

'기원아. 친구랑 싸웠니? 부모님한테 야단이라도 맞았니? 말 좀 해 봐. 응?'
소녀상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원이는 아무 대답이 없이 소녀상을 우두커니 바라보기만 했다.

소녀상은 그런 기원이가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그리고 궁금증이 더해 갔다. 그러나 기원이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여러 날이 지나도록 입을 떼지 않고 지내던 기원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소녀상의 발목을 잡고 속삭였다.

"소녀상아, 오늘은 너한테 작별 인사를 하러왔어."
'뭐? 작별 인사라고?'
소녀상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래,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됐어."
농사를 짓던 기원이 아버지가 도시에 가게를 차려 이사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소녀상아, 그 동안 정말 고마웠어. 다시 돌아올게. 소녀상아, 그 때까지 나를 잊지 말고 기다려 줘."
소녀상에게 기댄 기원이의 볼에서는 맑은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소녀상도 가눌 수 없을 만큼 슬픔이 컸다. 눈물을 참느라고 손가락을 내밀어 약속은 못했어도 마음속으로는 몇 번이나,
'그래, 그래. 우리 다시 만나자. 그 때를 꼭 기다릴게.' 하고 대답을 했다.
그러나 그 후로는 기원이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벌써 삼 십여년 전의 이야기로구나. 이젠 기원이를 만난다 해도 알아볼 수가 없겠지만 기원이와의 우정도 아이들과의 아름다운 추억도 이제 끝나고 만거야. 이 곳이 조각 공원으로 바뀌는 날이면 나는 없어지고 말테니.'

소녀상은 기원이와 맺었던 우정을 떠올리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까치의 말대로 조각가가 이사오는 날이 되었다. 대밭골로 들어오는 산모퉁이에서 요란한 엔진 소리와 함께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트럭 몇 대가 보이더니, 이내 운동장으로 들어섰다.

소녀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잠시 후,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와 짐을 내리는 소리, 아직도 힘이 드는지 부릉부릉대며 트럭이 가쁜 숨을 토해내는 소리로 폐교는 모처럼 떠들썩했다. 소녀상은 이 모든 소리들이 자신을 비웃는 소리로 들려와, 더욱 초라해지고, 부끄러워져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까치들 말대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소녀상은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잠시 후, 소녀상은 자신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자신을 어루만지고 있는 이는 턱수염을 기르고 빵모자를 쓴 중년 남자였다. 한 동안 아무 말 없이 소녀상을 어루만지던 그의 볼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그렇게 말없이 있던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소녀상아! 내가 왔다. 내가 바로 기원이란다, 나를 잊은 건 아니겠지?"
'기원이?'
기원이. 얼마 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던가. 소녀상은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늘 마음속에 그려보던 기원이가 이런 모습의 어른이 되었던가?'
예전의 앳된 기원이 모습은 아니었지만, 아직도 머루알처럼 새까맣고 맑은 눈망울과 한쪽으로 기우뚱한 불안정한 자세가 삼십여 년 전에 소녀상과 함께 독서하고 우정을 쌓았던 기원이가 틀림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 삼십여 년 전에 너와 우정을 나누었던 기원이야."
어려서부터 생각이 깊고, 손재주가 뛰어났던 기원이는 조각을 공부하여 유명한 조각가가 되었다. 자신의 조각 전시회가 열리고 있던 어느 날, 신문을 통해 소식을 들었다는 어릴 적 친구의 반가운 편지를 받고 그는 대밭골 학교가 문을 닫고 새 주인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 아름다운 학교가 문을 닫다니! 소녀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조각 공부에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고향을 너무 오래 잊고 살았어. 어릴 적 대화를 나누며 미래를 꿈꾸던 소녀상, 그 소녀상과의 약속대로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된 거야.'

눈을 감자, 대밭골의 학교 모습과 소녀상의 모습이 훤하게 떠올랐다. 그는 어린 시절에 자신의 꿈을 키워주었던 폐교를 구입하여 조각 공원을 꾸미고 그곳에 작업실을 마련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편지를 보내준 고향 친구에게 서둘러 연락하여 교육청과 의논하여 그 일을 성사시키도록 부탁한 끝에 드디어 그의 뜻을 이루었던 것이다.

"소녀상아,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생활을 하며 살아왔단다. 너는 알겠지?"
그가 그러한 말을 하지 않더라도 소녀상은 알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윽한 그의 눈과 마디마다 굵게 불거져 나온 손을 보면서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그가 대밭골에 내려와 제일 먼저 한 일은 소녀상을 뒤덮고 있던 때를 말끔히 닦아내고 정성스럽게 페인트를 칠한 것이었다. 그러자 소녀상은 예전처럼 아름답고 새하얀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의 작업실이 된 교실에서 밤낮을 모르고 작업에 몰두한 끝에 첫 번째로 완성한 작품이 소녀상 옆에 세워졌다. 어린 소년이 독서하는 소녀상을 향해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는 대리석 조각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이었다.

소녀상은 다시 행복해졌다. 비록 지금은 아이들이 떠나고 없지만, 훌륭한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기원이가 유명한 조각가가 되어 훌륭한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땀 흘리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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