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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2002 교원 문학상> 소설 가작-산천어


사라졌다. 미물이 날개가 있어서 날아 간 것도 아닐 테고, 초능력을 발휘해 기어간 것도 아닐텐데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재물대와 실험대 위며, 심지어 현미경을 들어 그 바닥까지 살펴보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조금 전 분명 내가 샬레에서 핀셋으로 건져내어 유리판 위에 얹어 두지 않았던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시 한번 실험대 아래를 살펴본다. 수현이의 빈 의자만 눈에 들어온다. 몸을 일으키자 참관인의 굳은 표정이 보인다. 참관인들의 눈길은 아이들 머리통과 무릎 위에 놓인 종이 사이를 부지런히 오간다. 손은 하얀 종이 위에서 좌우로 움직이기에 바쁘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내게 눈길을 주지 않지만 굳게 다문 입과 침묵이 끈끈하게 내 행동을 간섭해 온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쥐고 있던 분필을 연방 분지른다. 창 밖 화단에 늘어선 해바라기 꽃이 눈앞으로 다가선다. 내리쬐는 햇볕에 지친 꽃은 가는 목을 꺾고 있다.

아이들의 웅성거림과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동시에 날아온다. 내 시선이 참새조인 성태를 일별하자 연필로 실험대를 두드리던 그의 손짓이 멈춘다. '성태 녀석, 이 녀석은 왜 제멋대로 실험 대열에서 벗어났을까. 입으로 배설하는 모습이 아무리 보고 싶어도 그렇지. 실험에 열중했더라면
플라나리아는 지금쯤 샬레의 물 속에 조각난 채로 가만있을 텐데.' 나는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입안으로 밀어 넣는다. 성태가 실험 대열에서 벗어났더라도 그냥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는 없다. 유리판 위에 놓아두었던 플라나리아를 찾아야 한다.

죽었을지도 모른다. 죽었더라도 흔적은 남아 있을 것이 아닌가! 교사용 지도서를 두 번이나 읽었지만 유리판 위에서 삼십 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플라나리아가 사라진다고 적힌 곳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 어디로 간 것일까? 실험대 서랍을 열고 푸른 색, 붉은 색의 리트머스 시험지를 살펴본다. 직육면체 상자에서 비어져 나온 하얀 거름종이 사이를 되작이는데 서늘한 감촉이 와 닿지만 그 흔적은 보이지는 않는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실험의 마무리 단계다.

끝내 찾지 못 하리라는 생각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만 같다. 난감해진 나는 힘없이 의자를 끌어당겨 앉아서 접안 렌즈에 얼굴을 들이댄다. 물방울 흔적만 간신히 남은 유리판은 하얗게 비어 있다. '머저리 같은 수현이 녀석.' 무심히 뱉으려다가 나는 그 욕설을 삼킨다. 어제 퇴근할 무렵 과학실 북쪽 창가에서였다. 수현이는 다슬기가 기어다니는 수조를 기울여 플라나리아가 들어 있는 어항 속에다 쏟아 부었다. 나는 그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오늘 아침에 혹시나 싶은 마음에서 어항을 살펴보았을 때 여남은 마리나 있어야 할 플라나리아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배가 불룩한 다슬기는 쉴 새 없이 분비물을 품어내며 매끈한 유리 면을 기운차게 기어다녔다. 아마 다슬기가 플라나리아를 잡아 먹었나보다.

겨우 세 마리만 남은 플라나리아가 작은 돌과 물풀 사이로 몸을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할 수 없이 비둘기조는 두 마리를, 참새조는 한 마리만 나누어주었다. 하필 한 마리만 배당 받은 참새조의 플라나리아가 유리판 위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아침의 그 조짐을 예감하고 수업 시간에 실험 진행 상황을 철저하게 점검했더라면 이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실험을 막 시작할 무렵이었다. 참새조의 성태가 현미경의 회전판을 돌리고 있었다. 반사경에 비치는 햇볕 때문에 눈이 부셨다. 허리를 펴고 접안 렌즈에 왼쪽 눈을 가까이 대고 열심히 관찰하던 성태가 외쳤다.

"선생님, 하얀 배에 있는 입이 항문 같아요."
"플라나리아는 배에 입이 있으나 항문은 없습니다. 먹은 것을 어디로 배설할까요?"
"입으로 배설할 것 같아요."

순간 와르르 자갈 쏟아지는 소리가 교실을 가득 메웠다. '입으로 배설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도 계속 유리판 위에 두지 마세요. 공기 중에 오래 있으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요.' 나는 그렇게 못을 박아야 했다. 아이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 특히 실험실에서 아이들은 더욱 믿을 게 못된다. 조그만 부주의로 위험한 일에 부닥치거나 돌발적인 상황이 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실험진행 상황을 철저하게 점검했어야 했다.

"플라나리아는 재생력이 매우 강한 하등동물입니다. 세로로 두 도막, 가로로 세 도막으로 나누어도 재생됩니다. 몸이 둘 혹은 셋으로 나누어져 무성 생식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유성 생식할 때도 있습니다."

설명이 끝난 후 비둘기조에서는 날카로운 면도날을 이용하여 유리판 위에 놓인 플라나리아의 몸을 세로로 두 조각 내고 있었다.

"선생님! 이상해요, 잘라도 피가 나지 않아요."
비둘기조는 실험에 열심이었다.
"도막 낸 플라나리아는 물이 담긴 샬레에 넣도록 하세요. 플라나리아가 담긴 샬레는 어둡고 차가운 곳에 두고 꾸준히 관찰해야 합니다. 이삼 일 간격으로 플라나리아가 재생되어 가는 과정을 관찰하고 두 주일 후에 조각나기 전의 플라나리아의 모습과 비교해 보세요."

내가 막 관찰에 대한 설명을 끝내려는 순간이었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참새조에 앉아 있던 호기심 많은 성태가 당황해서 소리를 내질렀다.

"선생님! 유리판 위에 있었던 플라나리아가 없어졌어요."
참새조에서는 플라나리아를 가로로 세 조각 내기로 되어 있었다.
섬광이 터졌다. 순간, 아찔했다. 시청각 담당 선생이 카메라 셔터를 연거푸 눌러대고 있었다. 교육용으로 찍힌 사진 속에서의 내 모습은 참교육을 실천하는,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일 것이다. 그럴듯한 명목으로 공개 수업을 하라는 지시가 있을 때마다 보이지 않는 힘에 등 떠밀려 무대에 올랐다는 석연하지 않은 마음이 어깨를 짓눌렀다. 집단장학지도를 나온 장학사들, 그들도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힘에 밀려 여기 산골까지 왔을 것이다. 아이들은 허름한 차림과는 다른, 말끔하게 차려 입은 장학사라는 이유만으로 반쯤 얼어 버렸지만, 나는 플라나리아를 잡으러 갈 때만 해도 수업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어제 오후였다. 아침에 한 차례 내린 소나기로 한낮의 갑사리의 숲은 푸르게 빛났다. 풋풋한 푸나무와 대나무의 검푸른 숲을 감돌아 온 계곡 물은 유난히 맑았다. 수정처럼 투명했다. 하얀 돌과 흰모래와 흔들리는 물풀 사이로 손을 넣었다. 찰랑거리며 부서지는 물결이 산천어 비늘처럼 반짝였다.

주먹만한 돌을 여남은 번쯤 들추었을 때 플라나리아 한 마리가 겨우 눈에 띄었다. 플라나리아는 산천어나 열목어, 빙어와 함께 일 급수 청정수역 아닌 곳에서는 잘 살지 못한다. 최근에는 계곡 물마저 오염되어 플라나리아나 산천어의 수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손바닥만한 돌에 붙어서
기어다니는 플라나리아를 붓으로 쓸어 투명한 사각 수조에 담았다. 아이들이 자두만한 돌을 수조에 집어넣기도 했다. 돌 틈에 물풀도 심었다. 음성 주광성(走光性)인 플라나리아는 돌멩이와 물풀 사이로 몸을 숨겼다. 나는 검은 천으로 사각 수조를 둘러쌌다.

복도 쪽에서 조심성 없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뒤이어 반쯤 열려 있던 교실 문이 화들짝 젖혀진다. 커다란 눈, 부릅뜬 눈, 게슴츠레한 눈들이 일시에 뒷문 쪽으로 몰린다. 비둘기조의 빈 의자 주인인 수현이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문으로 들어서고 있다. 아이들과 참관인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수현이는 놀란 듯 마룻바닥을 울리며 걷다가 장승처럼 우뚝 선다. 느닷없이 몸을 돌린 수현이가 형준의 검은 머리채를 움켜잡고 의자에서 끌어내린다.

노란색 티셔츠를 입은 형준인 머리를 바닥에 붙박은 채 가쁜 숨을 몰아 쉰다. 전부 다 모여도 열 명도 안 되는 아이들이 수현이의 주변으로 우르르 모여든다.

"제가 왜 저래……."
"젠 낯선 사람이 나타나기만 하면 아무에게나 달려들어."
"저러다가 얻어터지기나 하면서."
"무슨 일이야."

참관자의 굵직한 목소리가 아이들의 목소리에 섞여 다급하게 들린다. 나는 잽싸게 수현이의 두 손을 덮쳐 잡고 "이 손 놔! 이 손 놔!" 하고 연거푸 외치다가 얼떨결에 "반장!" 하고 소리를 질렀다. "생활지도가 엉망이군." 따위의 험악한 소리가 참관자의 입에서 터져 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급히 다가온 반장은 수현이의 손목을 잡아당긴다.

수현이는 형준이를 한껏 누른다. 반장은 주먹으로 수현이의 어깻죽지를 내리친다. 억, 수현이가 신음 소리를 낸다. 내가 그만두라는 말을 뱉어내기도 전에 반장은 수현이의 어깨를 잡아당기더니 힘껏 밀어버린다. 덩치 큰 반장의 힘에 밀린 수현이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옆으로 나동그라진다. 땅에 엎드려 있던 형준이는 씩씩거리며 얼굴이 시뻘개져서 두리번거리다가 사기 컵을 덥석 쥐고 수현이에게 다가선다. 반장이 머리 위로 높이 쳐든 형준이의 손을 붙잡는다.

"똑똑한 사람이 참는다. 넌 수현이보다 똑똑하잖아."
듬직한 면이 있던 반장은 평소 내가 아이들에게 자주 쓰던 말을 그대로 형준이에게 한다. 평소 수현이는 별 이유도 없이 힘이 약하거나 자기보다 힘 센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때문에 힘이 약한 아이들을 많이 울리기도 했고, 센 아이에겐 얻어터지기 일쑤였다. 수현이의 얼굴 상처는 아물 사이가 없었다. 난장판이 된 교실에서 코피가 터지도록 맞붙어 싸울 땐 나로서도 말릴 재간이 없었다.

오히려 두 사람의 힘에 떠밀리거나 수현에게 발길질을 당할 때도 있었다. 힘이 센 아이에게 수현이가 당하고 있을 땐 "똑똑한 사람이 참는다. 넌 수현이 보다 똑똑하잖아."라고 말하면 대부분 아이는 슬그머니 수현이를 놓아주었다. 그러나 약한 아이가 수현이에게 잡혔을 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수현이가 창가에 놓아둔 난 화분을 던지던 날 나는 반장에게 넌지시 일렀다.

"수현이가 잘못을 저지르거나 약한 아이를 괴롭힐 때마다 윽박질러 버려! 그러면 수긋해질꺼야. 기압을 주거나 주먹을 사용해서는 안 돼." 내가 거칠게 대하면 수현이는 나를 피하고 결국 학교에 나오지 않게 될 것이다. 계곡물이 오염되면 산천어나 플라나리아, 빙어를 볼 수 없게 되는 것 같이 수현이도 곧장 사라지고 말 터이다. 사람도 환경의 지배를 받는 만큼 수현이에게는 청정 일 급수 같은 터전이 필요하다.

오늘도 여전히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아이들은 민들레 홀씨처럼 사라지기도 한다. 거칠기 이를 데 없는 험한 세상에 던져진 아이들은 뒷골목을 누비기도 하고 보육원이나 소년원 문전을 제집처럼 드나들면서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다. 동생처럼. 나는 단 하나의 혈육인 동생에게 청정 일 급수 같은 환경이 되어줄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내 주변의 사람들은 하나씩 사라졌다.
예전 어느 날 동생은 집을 나갔었다. 나는 일년만에 보육원과 소년원을 드나들면서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고 간질을 앓던 동생을 겨우 찾아 데려왔다.

"형준아, 넌 똑똑 하잖아!"
반장이 다시 한 번 말한다. 반장에게 잡힌 팔을 빼내려고 애를 쓰던 형준이는 어쩔 수 없이 팔을 내린다. 반장은 형준이의 손에서 컵을 받아 쥔다. 형준이는 수현이 보다는 똑똑하단 소리를 듣고 싶었을 터이다. 더 이상 분을 드러내지 않고 팔뚝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쓱 문지르며 제자리로
돌아간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수현이도 네 자리에 가 앉아라."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혀 차는 소리가 들린다. 참관자의 얼굴이 젖은 종이처럼 구겨졌다. '도대체 생활지도가 되어 있지 않군.' 하는 말이 그들의 입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다. "가까이 하지 마세요. 그래봤자 괜한 고생이지. 정서 장애아인데다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했던 충격으로 거칠어져 전학 오기 전의 학교인 특수학교에서도 마다하는 아이랍니다. 담임인들 별수 있어요." 금년 봄. 가정 방문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최 선생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수현이를 처음 만난 그 무렵 나에겐 나름의 꿈이 있었다.

학년 초. 기대와 설렘 속에서 만난 아이들의 머릿수가 기록상의 숫자와 차이가 났다. 생활기록부를 뒤져보았다. 설수현, 남, 9세, 일 년 전 특수 학교에서 전학 왔음. 출결석란에 출석 안한 날의 숫자가 더 많았다. 새 학년이 되어도 수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록 그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가정방문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수현이의 고모 집 대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수현이는 평상에 엉덩이만 걸친 채 소반 앞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4학년에 비해 덩치가 작은 수현이가 돌아다보면서 왼손을 들어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하얀 이마가 내 눈에 들어왔다. 왠지 낯설지 않았다. 아낙이 펌프질을 하여 막 씻은 상추를 자배기에서 건져 올리고 있었다. 나와 아이들을 본 아낙은 머리에 둘러쓴 수건을 풀어 들고 일어섰다.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 사이로 시원스런 눈이 웃고 있었다.

"선생님이, 여기까지……."
쑥스러운 듯 머뭇거리던 아낙은 수건으로 평상 위를 닦으며 앉을 자리를 마련했다. 수현이는 아무 말도 없이 돌아앉은 채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수현이는 원래 저렇게 말이 없어요?"
수현이를 돌아보며 그녀가 말했다.
"매일 혼자 지내서 그렇지요. 저들끼리 놀게 해줘야 하는 건데……."
생활 지도를 하려면 알아두어야 할 사항인지라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고모님이 수현이를 데리고 있나요? 아버지가 읍내에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말없이 쳐다보는 그녀의 눈길에는 별 것 다 물어 본다는 속내가 묻어 났다.
"죄송합니다. 학생들의 신상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하겠기에."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몇 년 된 일이지요. 수현이 어머니를 잃어버리고 곧 데려 왔어요. 정붙이기 어려워요……. 수현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밤낚시 놓다가 거룻배가 뒤집혀서 그만……."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울먹이더니 다시 얘기를 이었다. 수현이 아버지가 직장을 잃은 후, 민물낚시 하러 다니다가 그만 생떼 같은 마누라마저 물귀신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아마 그녀 자신이라도 집으로 들어가기 싫었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니 어디서 뭐를 하다가 맘이 내키면 집이라고 들어와서는 "아이구 내 자슥!" 하면서 아들을 끌어안은 채 뒹굴다가 술을 마셔댔고 결국 인사불성이 되어 빈 술병처럼 방구석을 구르다 휑하니 나가 버린다고 했다.

"그러니 그 어린 게 꼴이 되겠어요. 그래서 내가 데려 왔지요."
술로 세월을 보내며 제 자식도 돌보지 않는 하나뿐인 남동생이 미웠던지 그녀는 엉두덜거렸다. 가정방문을 끝내고 돌아오는 한갓진 두렁길에는 벌써 어둑발이 내리고 있었다. "지금쯤 아마 잉어나 자라, 가물치 판돈으로 소주에 절어 있던지, 아니면 호수 바닥을 후비거나 강물에 엎드려 있을지 모르지요." 수현의 고모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아서 어둑시근한 밭둑을 걷는 다리가 자꾸만 허청거렸다.

"설수현, 서 있지만 말고 네 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했잖아!"
수현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 말이 안 들리나!"
말이 끝나자마자 쉬는 시간을 알리는 음악소리가 교실 안으로 울려 퍼진다. 나는 수현이 곁으로 다가갔다. 뒷벽에 걸린 거울에 뒤통수가 부스스한 수현이의 모습이 담겨 있다. 창 너머로 장학사의 얼굴이 잠깐 비췄다 사라진다. 청소를 대강 마치고 아이들을 돌려보냈다. 빈 교실은 아직도 어수선하다. 책상을 비추는 햇살 속으로 먼지가 떠다닌다. 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몸이 뒤로 기울어진다.

얼마 전 의자에서 넘어진 일이 있었다. 높지막이 박힌 대못에 학습자료를 걸려고 의자 위에 깨금발을 하고 서 있는데 슬몃 다가온 수현이가 의자를 빼 버렸다. 나는 뒤로 넘어지면서도 팔을 옆으로 뻗어 수현이의 바지 가랑이를 움켜잡았다. 수현이가 의자를 집어 던졌다. 순간적으로 나는 팔로 얼굴을 막았지만 나무의자의 뾰족한 발끝이 입술을 찔렀다. 입안으로 끈끈한 액체가 흘러들었다. 입가를 훔치는 손에 피가 묻어 났다. 창가에 놓인 난이 눈에 들어온다.

등교한 첫 날부터 수현은 줄곧 나를 힘겹게 했다. 가정방문을 한 그 이튿날 수현은 처음 학교에 나왔다. 나는 밝은 교실 벽에 유채꽃이 노랗게 타오르는 달력을 걸었다. 솜씨자랑 판에 그림을 붙이고 공작품으로 진열대를 꾸몄다. 교실 뒤의 빈 공간은 모빌로 장식했다. 나는 창 쪽엔 물기를
머금은 싱그러운 난 화분을 놓았다. 통풍이 잘 되는 곳에 두고 정성껏 들여다봐야 꽃을 피우는 난처럼 수현이를 성의껏 보살핀다면 밝게 자랄 것이라 믿었다.

수현이는 누구에게도 말을 하려 들지 않았다. 수현이의 자리를 교실 중간쯤의 위치에서 교탁 앞으로 옮겨준 지 사흘 뒤에야 나는 그 사실을 알았다. 벙어리도 아닌데 말을 하지 않았고 글은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 정서 장애가 그 지경이었으니 학교생활에서 지켜야할 최소한의 예절이 몸에 배어있을 리가 없었다. 수업시간에 소리를 지르거나 학용품을 빼앗든지 책을 찢거나 시비를 거는 것이 다반사였다.

쉬는 시간이면 곧잘 아이들에게 달려들었다. 학교에 오지 않았을 때 마음껏 나돌아다니던 습관이 남아서일까? 아니면 정서불안 때문이었는지 아이들과 맞붙어 싸울 적마다 체격이 크지 못한 나는 제대로 말리지도 못하면서 마음은 늘 조마조마했다. 때로는 차돌을 움켜쥔 주먹으로 반 아이들의 등을 후려치기도 하고 긴 손톱으로 할퀴어 얼굴에 상처를 내 놓기도 하였다. 나는 새파래져서 달려온 학부형과 교장 선생님 앞에서 거듭 사과를 해야만 했다.

체육 시간에 나무 위에 올라앉았던 수현이가 슬그머니 내려와 체조를 하고 있는 내 등뒤로 다가와 주먹으로 옆구리를 쥐어박고 도망쳤을 때도 나는 불쑥 웃음이 나왔었다. 나는 수현이가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아진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정서적인 장애도
여전하다. 어쩌면 처음부터 무모한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이젠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동화책을 읽어주는 일도 앞으로는 없을 것이다. 수현이에게 읽어주었던 동화. 풀안경, 춤추는 눈사람, 치르치르와 미치르. 수현이가 동화 듣기를 좋아한다는 것도 알았다.

지능이 낮은 정서장애아를 출석하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하던 나한테는 동화 듣기에 흥미를 보인 수현이의 태도는 나를 설레게 했다. 오전 수업뿐인 수요일의 방과후나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나는 수현이에게 동화 읽어주는 일을 4월부터 넉 달째 계속하고 있었다. 구연동화를 처음 시작한 며칠 동안은 반복해서 들려 주다보니 목이 부어 올랐고, 말을 할 때마다 아팠다. 생각 끝에 나는 시내 서점 몇 군데를 뒤져서 동화책 한 권에 테이프가 두 개씩 달린 책을 구입했다.

그 후부터는 연필로 글씨를 짚어가면서 녹음 테이프로 동화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자주 새로운 책을 사러 읍내에 드나들었다. 동화를 듣는 수현이는 여느 아이보다 얌전했다. 그러나 녹음기로 동화를 들려주면서 내가 학습 업무나 쉴새 없이 밀려드는 잡무를 보려고 하면 수현이는 잠시도 못 참고 다급하게 소리를 내질렀다. 그럭저럭 2, 3주가 지나니까 수현이는 그제야 제 먼저 녹음기의 전원 플러그를 꽂고 동화책을 펼쳐놓은 다음 나를 기다리기도 했다.

점심시간이지만 입맛이 간 곳 없다. 성큼성큼 교실 안으로 걸어 들어온 수현이는 교사용 책상 뒤의 캐비닛에서 녹음기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나는 얼른 눈길을 창 밖으로 돌린다. 녹음기의 플러그를 꽂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녹음기에서 들려오는 높은 대화 소리가 오늘따라 귀에 거슬린다. 나는 일어서면서 정지 버튼을 누르고 플러그를 뽑아 버린다. 의아해 하는 수현이를 일으켜 세우고 손을 잡아당겨 문으로 끌고 간다.

문밖으로 밀어내고 문을 닫는다. 문이 덜컹거린다. 나는 두 손으로 문을 꼭 잡는다. 문을 열려는 완력이 느껴진다. 나는 한참이나 버틴 후에 발자국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갑자기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텅 빈 교실은 적요하다. 의자에 기대앉아서 열 맞춰 놓인 책걸상을 본다.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들리는 듯하다. 눈을 감는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되살아난다.

"얼레리 꼴레리, 또 쌌어요."
화단 앞에 예닐곱 개의 고만고만한 머리 가운데에 솟은 수현이의 머리가 보였다. 그 둘레로 몸집이 큰 아이들이 코를 막고 지나갔다.
"왜, 무슨 일이야?"
"얼레리 꼴레리, 반편이 보세요."
일이 학년 꼬마들에게 둘러싸인 수현이는 다리를 엉성하게 벌리고 천치가 되어 버린 듯 서 있었다. 엉거주춤 선 수현이의 바짓가랑이가 노랗게 젖어들었다. 산천아, 나는 그때 처음으로 그의 별명을 불렀다.

형언하기 어려운 막막함이 밀려온다. 나는 의자의 등받이를 꽉 잡는다. 눈을 반쯤 감은 상태에서도 뒷벽 솜씨자랑 판에 매달린 종이 반죽으로 만든 탈이 눈에 들어온다. 주홍색 입술에 퍼머넌트 웨이브를 한 탈, 검은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얼굴에 가느스름한 눈. 동생을 닮은 탈이 나를 보고
있다. 다섯 살 터울의 동생이 떠오르자 갑자기 머릿속이 부예진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어머니의 꽃상여가 떠나려는 참이었다. 하얀 눈이 마당을 덮고 있었다. 문 앞에서 한참이나 울던 동생의 얼굴이 하얘졌다. 나는 동생의 손을 이끌고 대문 밖으로 나왔다. 뒷산은 소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서 숲을 이루었다.

"집에 갈테야."
동생이 흐느꼈다.
"울지 마!"
나는 마른 울음을 삼켰다. 검은 숲이 웅크리고 있었다. 우리는 사잇길로 들어섰다.
"언니, 추워. 가자."
"저기 빈집이 보이지, 거기 가면 따뜻할 거야."
나는 보퉁이와 주머니 속의 성냥을 만져보았다. 눈발은 굵었다. 소나무 잔가지 위에 눈이 무겁게 얹혔다. 가지가 흔들리며 풀썩 눈뭉치를 떨구었다. 동생의 머리 위로 눈가루가 떨어졌다. 나는 동생의 눈을 보며 입을 뗐다.

"조금만 참아!"
언덕바지에 자리잡은 빈집까지 가기에는 이미 늦었다. 동생의 발작 기미를 알아챈 나는 서둘러 눈 위에 외투를 벗어 넓게 펼쳤다. 검은 외투를 펼치자마자 동생은 외투자락에 머리만 반쯤 걸친 채 힘없이 쓰러졌다. 백태 낀 눈동자가 뒤집어진 채 허공을 응시했다. 웅크린 채 몸을 떨었다.
아래로 뻗은 다리의 근육이 심하게 요동쳤다. 발부리로 흰 눈과 언 땅을 문대며 신음과 함께 이를 갈아붙였다. 손수건을 말아 동생의 입에 물렸다. 노란 수건 사이로 허연 거품이 묻어 났다.

"채련아!"
나는 동생의 가슴을 흔들었다. 회색구름이 밀려나고 숲이 환히 드러났다. 나는 눈꽃 가지 사이로 뚫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부셔 얼굴을 돌렸다. 햇살이 채련의 몸과 팔, 얼굴에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씰룩이는 동생의 볼과 입을 닦은 수건을 눈 위에 내던졌다.

"채련아! 얼른 집에 가자."
'어머니가 꽃상여를 타고 떠나갔을지도 모른다. 차마 이런 네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없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창백한 동생의 얼굴은 얼어 있었다. 동생은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수업 참관 협의가 열릴 시간이 임박해서야 나는 텅 빈 교실을 둘러보며 일어선다. 수업의 뒤끝은 언제나 어수선하다. 그 허탈감은 내 몸과 마음을 휘청거리게 한다. 나는 의자를 정리하고 교실을 빠져 나온다. 협의 장소인 이 학년 교실에 들어가려다 말고 주춤 멈춰 선다. 발길을 가로막은 것은 바로 옆 교무실에서 쏟아져 나온 언성이었다.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겠어요?"
작은 체구지만 당차게 생긴, 목소리가 굵직한 장학사였다.
"교육과학 연구원에서 실시하는 자연과 사전 실험 연수회도 참석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장학사의 목소리는 좀더 커졌다.
"최 선생이 참석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본교에서 온 교감의 낮은 목소리다.
"사전 연수도 없이 단 위에 올라서서 어쩌겠다는 건지!"
"박 선생은 발령 받은 지 몇 해되지 않습니다. 교직 경력이 겨우 삼 년입니다. 수업발표 지시가 내려 올 때마다 그에게 수업이 맡겨졌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장학사의 질책에 답변을 하고 있는 젊은 분교 부장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뒤돌아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리고 싶었다.
슬몃 다가온 최 선생이 말했다.
"박 선생, 안 들어가고 뭐해요?"

나는 제일 먼저 협의회 장소를 빠져 나왔다. '수업자'라고 궁체로 쓰인 장방형의 손바닥만한 하얀 종이가 가장자리에 붙여진 책상 앞에 앉았었다. 공개 수업을 한 사람으로서 학습지도와 인성지도, 생활지도는 평소 어떻게 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나는 무슨 말로 어떻게 설명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장학사들과 본교 교장, 교감 교사들의 쏟아지는 그 외의 질문 공세에도 무슨 답변을 했는지도 떠오르지 않는다.

떠오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심 떠올리기 싫을 터이다. 말문이 막힌다. 공개 수업이 끝날 때마다 자질과 능력 문제, 성과 여부로 번번이 저울질을 당한 것 같다. 아, 자꾸 허방을 짚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들, 실적이나 성과 위주의 제도 앞에서 겉옷이 들추어져서 속옷이 들어 난 채 서 있는 것 같았다. 자신과 세상에 대해서 늘 할 말이 많았는데. 수많은 말들이 꽉 다문 이빨 안에 갇혀서 우우 거릴 뿐 한 마디 변명도 하지 못했다. 온 몸에 기운이 빠져나갔다. 매미 울음소리가 들려 온다.

"박 선생님, 어디 가십니까?"
매미소리를 들으며 화단에 줄지어 핀 해바라기 꽃 곁을 걷는 등뒤로 최 선생의 말이 날아온다.
"늦으면 안 됩니다. 저녁때 천 씨 집으로 오세요. 회식에 참석해야 합니다."

부친상을 당하여 특별휴가로 일주일만에 출근한 최 선생에게 인사도 못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지만, 나는 못들은 채 그대로 걷는다. 게양대 끝을 올려다본다. 까마득하다. 국기가 바람에 조금씩 흔들린다. 게양대 아래 수현이의 모습이 보인다. 한 줄기 더운 바람이 운동장에서 서성이다가 후끈 얼굴에 끼쳐온다. 텅 빈 운동장에는 이따금씩 바람에 흔들리는 그네와 철봉이 햇살에 반짝인다. 나는 내처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는다. 회색 돌기둥의 교문에 그림자를 드리운 소나무의 우듬지가 하늘에 맞닿아 있다. 우듬지 아래 낮달처럼 부연 수은등(燈)이 창백하다. 어디로 발을 옮겨 디뎌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 교문을 나선 나는 둑길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강둑을 걷는다. 시원한 바람이 마구 불어온다. 누군가가 소리를 죽이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돌아보지 않아도 발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안다. 발을 빠르게 옮겨 놓는다. 따라오는 발걸음이 빨라진다. 나는 멈춰 선다. 발자국 소리가 멈추더니 슬그머니 다가와 내 손을 잡는다. 나는
손을 뿌리치며 발걸음을 더 바삐 옮긴다.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사람은 남에게 베풀어 줄 사랑도 없는가 보다. 수현이가 오늘따라 이토록 지겹게 느껴질 수가 없다. 녀석은 나를 좀처럼 혼자 두지 않는다. 교무실이나 사택으로, 마을 거리로 그림자처럼 따라 붙는다. 등으로 진땀이 흐른다.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무거운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이 되풀이되는 게 견딜 수 없다.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 놓는다. 되돌아 간 것일까?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돌려본다. 저녁놀을 받으며 가방을 멘 수현이가 저만치에서 이를 드러낸 채 웃고 있다. 숲을 이루며
푸르게 타오르는 과수원 길을 지난다. 긴 강물 위로 새들이 하늘을 가르며 어지럽게 날고 있다. 빈 나룻배 한 척이 눈에 들어온다. 수현이가 나룻배를 향해 달음질친다. 알 수 없는 불길함에 사로 잡혀 엉겁결에 수현이의 뒤를 쫓는다.

수현이가 먼저 나룻배에 올라앉더니 노를 잡는다. 빙긋이 웃는 웃음에 자신감이 들어 있는 듯 하다. 수현이 아버지가 민물고기 낚시꾼이었다니까 어쩌면 자식인 그도 노를 잘 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나는 나룻배에 올라탄다. 뱃머리를 등지고 앉은 수현이와 마주 보며 앉는다.
나룻배가 천천히 나아간다. 노을이 길게 누운 강물 위로 내려앉는다. 수현이의 얼굴이 노을 빛으로 물든다. 빠르게 노를 젓는다. 숲을 이룬 넓은 옥수수 밭이 점점 멀어진다.

어느덧 노을은 잦아든다. 철썩철썩 솨아, 뱃머리에서 갈라지는 두 물줄기가 흰 물거품이 되어 부서지며 소리를 낸다. 구름을 헤치고 나온 은색 달빛이 강물 위로 산천어의 은비늘처럼 부서져 내린다. 수현이의 하얀 옷에 그윽한 달빛이 배어든다. 수현이의 어깨가 일렁이는 물결을 따라 뱃전과 나란히 오르내린다. 노 젓는 소리가 들려온다. 물방울이 날아와 콧등을 적신다. 물 냄새, 모래 냄새가 비릿하게 난다. 수현이는 느리게 머리를 앞으로 숙인다. 배가 일렁일 때마다 코가 무릎에 닿으려 한다. 순간 불에 댄 듯 화들짝 고개를 든다.

"설수현"
나는 가만히 한 정서장애아의 이름을 불러본다. 그러나 눈을 감은 채 여전히 느린 고갯짓을 반복한다.
"산천아"
산천이가 고개를 들고 웃는다. 산천이의 하얀 이마 위로 동생의 얼굴이, 얼어붙은 땅과 흰 눈을 발부리로 후비며 간질을 앓던 동생의 얼굴이 겹쳐진다. 그리운 얼굴이다. 구름이 달을 가린다. 강물에 어둠이 내려앉는다. 철썩철썩, 뱃전을 두드리는 물결 소리가 가슴을 친다. 차고 습한 어둠이 전신을 휘감는다.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사택이 어둠 속에 낮게 엎드려 있다. 빛이라고는 반딧불을 닮은 담뱃불 하나다. 두 개의 계단을 밟고 올라서며 수현이의 손을 잡아끈다. 수현이는 말없이 올려다본다. 문 앞에 섰다. 문 옆에 매달려 있는 스위치를 누른다. 먼지투성이 모노륨 방바닥이 갑자기 밝아진다. 덩그렇게 놓여 있는 조립식 미니 옷장 문을 열고 고개를 디밀고 들여다본다. 깊은 어둠이 고여 있다. 꿰어 신었던 양말을 벗어 구석으로 던진다. 갑자기 배가 고파진다. 그때서야 하루 종일 먹은 게 없었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라면이라도 끓일까. 번거롭다는 생각이 든다. 맞은편에 산천이가 힘없이 앉아 있다.

하나 남아 있던 라면을 끓여 내놓는다. 산천이는 볼이 미어지게 라면을 입안으로 밀어 넣는다. 국물마저 달게 훅 들이킨다. 입가로 국물이 흘러내린다. 손등으로 입을 문지르고 빈 냄비 바닥을 들여다보며 입맛을 다신다. 티슈를 뽑아 산천이의 입술과 손등을 닦아준다.

"산천아, 나도 배고프다."
미안한 듯 산천이가 냄비 바닥에 남아 있던 김치조각을 들고 내 입에 갖다댄다. 입을 벌리고 받아먹으며 산천이를 바라본다. 가는 눈과 넓은 이마는 동생을 닮았다. 그리운 동생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아슴아슴하다. 꽃 그늘이 지는 계곡 물에 손을 담그고 헤엄쳐 다니는 산천어를 바라보았을 때처럼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해진다. 정신도 맑아지는 것 같다. 지금까지 나는 산천이를 보호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 순진무구한 자폐증에 시달리는 아이로부터 적잖은 위안을 받은 건지도 모른다. 나는 김치 조각을 집어 산천이의 입에 넣어 준다.

"산천아, 너는 물고기를 닮았어, 정말. 맑고 깨끗한 곳에서만 사는 산천어를."
김치를 삼키다가 웃는 산천이를 따라 나도 웃는다.
갓 떠오르는 태양이 맑고 투명한 빛을 운동장 가득 뿌리고 있다. 나는 교문 안 소나무 그늘로 들어선다. 재잘거리며 등교하는 아이들과 함께 뚜벅뚜벅 뒤따라오던 푸른 남방을 입은 최 선생이 내게 살며시 다가서며 아침인사를 건넨 후 말을 잇는다.

"박 선생님, 사라졌어요. 정말 신기했어요. 샬레의 물 속에 있던 플라나리아는 그대로 있는데 유리판 위에 둔 플라나리아는 삼십 분도 되기 전에 사라졌어요. 실험하기 직전에 먹은 노란 계란 한 점과 물방울 자국을 유리판 위에 남긴 채 간데 없이 사라졌어요. 박 선생님이 그걸 보셔야 했는데……."

최 선생은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다시 말을 한다.
"시간이 지나면 나프탈렌은 형체도 부피도 없이 사라지듯이, 연체 동물인 플라나리아가 고체 상태에서 기체로 변하여 없어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삼십 분도 채 되지 않는답니다. 그런 내용은 왜 교사용 지도서에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그는 안타까운 듯 나를 보다가 흥분해서 입을 연다.
"몇 십 분전까지만 해도 먹고 기어다니던 생명체가 환경이 맞지 않아서 죽은 뒤 눈앞에서 분해되는 것은 충격이었어요. 그 짧은 시간 내에 생명체가 눈앞에서 공중 분해된 사실이 믿어지지 않더군요."

나는 벙어리 마냥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듣고만 있었다.
"사람도 환경이 맞지 않으면 결국 사라지겠지요. 유리판 위에 둔 플라나리아처럼. 물론 플라나리아보다는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사람은 죽으면 흙, 물, 불, 바람이 되어 흩어진다는 말을 들었는데, 왠지 믿고 싶어지는군요. 박 선생님, 정말 미안합니다. 나 때문에. 진작 선생님들께 사전(事前) 실험 연수회에 다녀온 결과를 전달했어야 하는 건데. 진작 전달 연수를 했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최 선생은 모친상으로 특별휴가를 마치고 어제 출근했다. 두 주전에 다녀온 자연과 사전 실험 연수 결과를 동료 직원에게 미처 전달하지 못했다. 최 선생은 큰 실례를 저지른 사람처럼 안타까움이 진득하니 배어 있는 말을 남기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간다. 맑은 햇살이 그의 어깨로 내려앉는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계곡의 푸른 숲이 문득 시선을 끈다. 그 위로 새 한 마리가 눈부신 날개를 펴고 소리 없이 날아오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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