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는 학력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때문에 우리 부모님들은 못 먹고 못 입으면서도 논 밭 팔아가며 자식들 교육에 최선을 다하였다. 외지에 유학하고 있는 아들이게 아버지가 다짐을 한다. "이놈아, 다음에도 꼴등 하면 부자지간을 끊자." 그러곤 한달 후에 아들은 시험을 쳤다. "요번엔 잘 봤냐?" 아버지의 물음이었다.
자식을 잘 키워보겠다는 아버지의 애틋한 심정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아이들은 많지 않다. 반대로 자기도 똑같은 시절을 겪었을 텐데 도무지 아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도 많다. 대문에 적의가 생기고 충돌이 벌어진다. 둘의 진정한 화해는 아들이 아버지가 된 뒤에야 이뤄질 것이다.
한 세대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세상 어려운 줄 모르고 흥청망청 돈을 써대던 서울의 대학생 아들에게 사람 만들어 보겠다며 시골 아버지가 꼬박꼬박 부치던 용돈을 끊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바로 전보를 쳤다. "당신 아들, 굶어 죽음." 아버지의 답신은 "그래, 굶어 죽어라." 그래서 분노한 아들은 아버지와 인연을 끊기로 작정하고 연락도 끊었다.
그후 복수심에 불탄 아들은 이를 악물고 일을 열심히 했다. 세월이 흘러 결혼하고 자식을 낳은 아들은 그해 추석 고향 집을 찾았더니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
남은 유서에는 "아들아, 너를 기다리다 먼저 간다. 너를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 네가 소식을 끊은 뒤 하루도 고통스럽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내가 보낸 전보는 네 인생의 분발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너를 사랑했다." 는 이야기였다.
아버지와 아들은 주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선택 상대가 아니다. 그들의 운명을 대체할 관계는 없다. 요즈음에 반드시 아이들이 먼저 아버지에게 안부를 전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시대가 변하여도 변치 않아야 할 것들이 변한 게 요즈음 세태이다. 공부보다도 더 소중한 가치가 매몰되어 가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에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을 변하지 않게 가르치는 가정 교육력의 회복이 절실한 시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