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찾고 뒤돌아보는 것은 오랫동안 가꾸어온 전통이나 형식, 체제, 형태 의미를 익혀 미래에 나아갈 방향과 의지를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100년의 우리 학교의 모습을 뒤돌아보는 것도 여기에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학교가 건축형태를 갖춘 것은 유학과 유현을 받들고 교육하던 시기(약 15세기)부터라 할 수 있다. 학교건축을 시초에서 지금까지 분류하면, 첫째 문묘(文廟)·사묘( 廟) 공간 중시시대, 둘째 신교육의 西歐건축양식을 띤 학교건축 시기, 셋째 日人의 우민화·皇國臣民化 교육정책과 학교건축 시기, 넷째 다량의 교육인구의 팽창에 몰린 학교건축의 경직된 획일화 ·표준화 시기, 다섯째 학교건축의 현대화 노력 시기, 여섯째 열린교육·복합화·교과교실형 추구시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문묘와 사묘의 형성은 15세기 학교건축으로 100년내 범주 밖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최초의 학교 모습으로 의미가 크므로 이를 한국 학교건축의 시발점으로 얘기하려고 한다. 제향기능인 유현(儒賢)을 기리는 문묘와 사묘공간이 교육공간(성균관, 향교, 서원, 대성전, 동묘, 서묘)의 전면에 위치한다. 성현숭배와 교화를 교육의 근본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를 학교건축의 배치와 구성에서 중요하게 다루었다.
교학기능으로 전체가 모일 수 있는 큰 공간으로 講學所가 있고 이곳에서 문자와 글월의 암송과 민풍, 도덕 규범교육의 교화를 할 수 있도록 중앙에 큰 공간을 두었고, 文理의 문답식·능력별 토의식 교학기능을 다할 수 있는 소규모의 학습공간도 두었다. (서제, 동제는 교육 과 기숙의 역할도 가능한 공간으로) 이러한 교육공간을 4개 내지 6개의 건물군으로 둠으로써 기능적이고 정연한 위엄있는 구형의 배치 방법을 택했다. 중심축에서 좌우, 상하 대칭적으로 직교되게 함으로써 어느 건축보다 형식과 규례에 맞게 지었으며 건물의 위치도 그 지역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두었고 장엄한 한국전통건축의 위용을 나타냄으로써 그 지방을 대표하는 건축으로 자리잡게 했다. 더욱이 서원의 강학소는 세계최초의 Pilotti구조(건물의 일층이 몇 개의 기둥만으로 땅에서 들어올려진 구조)를 적용해 기능성과 심미성, 예술성의 우수함을 학교건축에서 보여주고 있다.
조선말 1894년의 갑오경장과 더불어 근대화 교육에 따른 신교육을 담을 수 있는 학교건축이 필요하게 되었다. 1883년에 한국인 최초의 元山學舍와 1895년 한성사범과 소학교가 세워져 유학과 실용학문을 가르칠 수 있는 새로운 학교건축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후 개신교 선교사들의 내한으로 신교육이 본격화됨에 따라 서구 건축양식이 한국 학교건축의 새로운 모델로 등장한다. 1885년의 아펜셀러에 의한 배재학당, 1886년의 스케른톤에 의한 이화학당, 1895년의 정신학교 등이 그것이다.
서양식 붉은 벽돌조와 석조로 이루어진 이 근대건축물들이 전국 곳곳에 세워짐으로써 일반인들도 새로운 건축물에 접하게 됐다. 이 때가 1890년대에서 1910년 경으로 초기에는 벽돌의 수요가 많아 일본과 청나라에서 재료와 기술자들이 들어와 건설되었으나, 1910년 이후부터는 상당부분 한국인들이 참여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이 발달돼 신학교건축이 한국의 건축기술을 발전시 키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들 주구조체(기둥, 지붕)는 목조로 구성하고 외벽만을 벽돌로 외장함으로써 한국의 전통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고 급속한 변화를 주지 않는 한국과 서구의 절충식 형태를 구축함으로 충격을 주지 않고 조용하게 발전을 시도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교정내 기숙사도 한옥이나 초가집을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학생들에게 친근미와 생활의 편이성을 줄 수 있게 배려했다.
1910년경부터 새로 신축되는 학교건축은 서양식의 벽돌구조와 모임경사지붕으로 근대건축양식을 전적으로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학교건축의 형태와 평면구성, 배치는 서양식 교육제도의 도입에 따른 교수-학습형태에 어울릴 뿐더러 유교적 사고방식을 세계적 사고방식으로 바꿔갔다.
서양 선교사들은 한국학교교육과 건축에 이렇게 조심스럽게 접근하였으나, 1905년 일본과의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학정참여관인 '시데하라'의 출두는 교육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특히 그들의 독특한 지역적 건축양식을 그대로 여과 없이 한국에 '왜식'건축을 함으로써 건축 교육환경에 대한 충격은 컸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다음에 연재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