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회색 양복에 장밋빛 나비 넥타이를 맨 아버지는 아까부터 예식장 홀 안을 서성거립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둘러싼 예식장의 흰색 의자들은 텅 비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누군가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사람처럼 문 쪽을 자꾸만 흘낏거렸습니다. 그 때마다 성문처럼 커다란 유리문은 금빛 햇살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도록 환합니다. 얼마나 그런 장면이 반복되었을까요? 병수가 부신 눈을 비비고 있는 사이 투명한 유리문이 스르르 열렸습니다.
'누굴까?' 침을 꼴깍 삼킨 병수가 막 들어서는 하얀 구두코에 둔 눈빛을 천천히 위로 올렸습니다. 역시 눈같이 하얀 드레스였습니다. 투명한 꽃술이 보석처럼 박힌 드레스에 초점을 모으자, 이번에는 낯익은 얼굴이 보였습니다. '아!' 놀랍게도 그 얼굴은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는 미스 김 누나였습니다. 붉은 카펫 위로 성큼성큼 걷는 아버지는 텔레비전 만화에 나오는 프랑스의 왕자 같았습니다. 병수는 그만 비상구 쪽 둥근 기둥을 껴안으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냐, 아냐. 내가……잘못 보았을 거야.' 다시 눈을 비비며 바라보자, 수많은 사람들이 누나와 아버지의 뒤를 행진하듯 따라오는데 더더욱 놀란 것은 하얀 드레스 앞에서 분홍빛 꽃잎을 뿌리는 연지 때문이었습니다.
'야, 연지야!' 연지를 말릴 새도 없이 박수 소리가 터졌습니다. 그런데 또 이상한 것은 박수가 터질 때마다 바닥에 떨어진 꽃잎들이 나비가 되는 것입니다. 금세 예식장 안은 온통 색색의 나비가 날고 아버지의 장갑 낀 손은 누나를 향해 가볍게 들려졌습니다.
"안 돼, 안 돼!" 병수가 손을 저으며 아버지를 향해 달렸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팔을 마구 쳤습니다. 그러나 손에 닿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앙!" 약이 오른 병수가 소리내어 울고 말았습니다. 얼마를 그렇게 훌쩍이다가 이상한 예감에 눈을 번쩍 떴습니다. 제일 먼저 병수의 눈에 들어온 것은 뽀얀 문살이었습니다. 그리고 문 쪽 선반에는 외할머니가 아끼는 도자기 꿀단지랑 시집 올 때 가져왔다는 왕골 바구니 모양의 반짓고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병수는 그제야 자신이 꿈을 꾸다가 일어난 것을 알았습니다. 볼을 문지르자, 꿈속에서 흘린 눈물이 묻어났습니다.
"쯧쯧, 웬 안개여? 마당 끝도 보이지 않는구나." 문밖에서 외할머니가 혀를 찼습니다. 여전히 못 마땅한 듯한 말투입니다.
"오늘은 날씨가 아주 맑으려나 봐요. 저는 안개가 좋아요. 저 안개가 천천히 걷히면 산봉우리랑 나무들이 공중에 둥둥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여서 아주 재미있어요. 세상이 온통 마술에 걸린 것 같잖아요? 그러면 저는 옛날 이야기 나라의 마녀가 되어서 무슨 일이든 주문만 외우면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 같아요."
어머니 목소리가 오늘따라 아주 맑게 들려왔습니다. 병수는 반가운 마음에 연두색 차렵이불을 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 좋을 게 따로 있지……쯧쯧……." "어머니, 집배원이 지나가면 이 편지 좀 부쳐 주세요. 병수랑 연지 이야기를 전화로 전하는 것보다 편지로 쓰는 것이 나아서요." "또 그 미스 김한테 말이냐?" "……." "세상 오래 살다보니까 별일 다 있구나? 네가 당장 죽냐? 멀쩡하게 눈뜨고 살아서 병수 애비 새장가 못 들여 안달이게?" "제발, 제가 준비를 잘하고 여행을 떠나야 애들 장래가 조금이라도 편하지 않겠어요? 누가 당장 결혼을 하래요?" "글쎄, 여러 가지로 부탁할 것 많고 미리 정 들여놓자는 에미 심정을 나도 아는데……." "미스 김 만한 여자 없어요. 어머니도 잘 아시면서 그래요. 제 대신 어머니의 좋은 딸 노릇도 할 거구요. 우리 연지가 얼마나 잘 따르는데요."
어머니가 이 곳 외갓집으로 옮겨온 것은 겨울이 막 지나가던 이른봄부터입니다. 병원에서도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는 말기 암이라는 사실을 알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졸라서 어릴 적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외갓집으로 온 어머니는 한동안 병이 나아지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고향 친구들을 만나고 오리를 걸어서 다녔다던 학교 길도 산책 삼아 걸을 정도였습니다. 일요일이면 달려오는 병수에게 어머니의 어린 시절은 끝이 없는 동화 세계였습니다.
"병수야, 난 네 나이 적이 제일 즐거웠던 것 같단다. 열두 살 초등학교 때가 정말 예쁜 그림 엽서처럼 남았어. 지금도 저수지 둑을 걸으면 그 시절의 마음으로 동시도 동화도 지을 것 같단다. 저수지에서 건져다 까먹던 말가시랑 귀여운 방게랑 둑방의 보라색 제비꽃이랑 나눈 이야기가 내 마음 속의 노래가 되었지."
명랑한 목소리로 자랑하는 어머니였지만 병수는 안방에 걸린 달력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아버지가 달라졌습니다. 서울에서 전자제품 대리점을 운영하는 아버지가 안방에 걸린 달력을 하염없이 보고 있을 때가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병수는 궁금한 나머지 검은 숫자가 빽빽한 달력을 혼자서 넘겨보았습니다.
'유월, 칠월, 팔월, 구월…….' 그리고 10월 달력에서 그만 뻣뻣하게 굳어버렸습니다. "아!"
달력 한 장이 빨간 색연필로 커다란 ×표를 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1일 마지막 칸에 까만 글씨가 씌어 있었습니다. "모두 안녕! 사랑하는 병수랑 연지랑 안녕! 미안해요 여보. 미스 김 부탁해요! 모두모두 사랑해요!"
병수는 그제야 어머니의 죽음을 실감하고 엉엉 울었습니다. 그 후부터 병수는 개그맨 흉내내기를 딱 멈추었습니다. 어두운 집안 분위기를 바꾸려고 노력한 자신이 미워졌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웃으면서 고향으로 왔던 것입니다. 병수는 막 일어난 척 눈을 비비며 방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외할머니가 마루와 이어진 주방에서 콩나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네 에미 감나무골로 갔나 봐라. 그 감나무가 네 에미 놀이터였거든……. 왜 그리 어린 시절이 생생할까. 휴!" 외할머니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병수는 초록빛 벼가 자라는 논둑을 지나 과수원 옆 오솔길로 달렸습니다. 안개가 하얀 그물처럼 사방에 걸쳐 있었습니다.
"엄마아!" 속눈썹에 맺힌 이슬이 눈물처럼 흘렀습니다. "엄마아!" "소쩍소쩍" 불안한 생각에 연이어 어머니를 부르자, 어디선가 소쩍새가 대답을 대신하였습니다. 새 이름을 알려 준 것도 어머니입니다. 오월 이 때쯤이면 소쩍새, 뻐꾸기가 운다고 하였습니다. 논에서 우는 뜸부기 소리도 압니다. 날카롭게 자란 풀잎들이 병수의 바지에 부딪히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었습니다.
"엄마아!" 하얀 안개를 고깔처럼 뒤집어 쓴 감나무 밑에서 하늘색 스웨터를 입은 어머니가 허리를 펴며 일어서는 게 보였습니다. 어머니는 대답대신 한 손을 흔들었습니다. 반가움에 야생 말처럼 펄쩍거리며 뛰어가던 병수가 콩밭을 질러갔습니다.
"엄마, 뭐 하셔요?" "응, 감꽃 줍는다." "감꽃도 있어요?" "똑똑한 내 아들이 감꽃도 몰라? 이 감꽃으로 나는 화려한 공주가 될 수도 있는데……." 어머니는 스웨터 주머니에 수북히 모은 감꽃을 내보이며 웃었습니다. 감나무 아래 풀밭 새로 초롱꽃 같은 앙징스러운 꽃들이 하얗게 흩어져 있었습니다. 병수도 앉아서 그 꽃들을 손바닥에 주워 담았습니다.
"열매가 있으면 꽃도 있겠지만 감꽃은 생각도 못 했어요." "잎사귀에 가려서 피니까 그래. 사과나 배처럼 꽃부터 화려하게 피지 않아서 대부분 감꽃을 몰라. 그렇지만 시골이 외갓집인 내 아들 자연 공부가 소홀한 것 같아서 실망스러운데?" "에이, 지금이라도 알았잖아요." "그래, 어릴 적 우리들은 이 꽃을 주워 먹고, 실에 꿰어서 목걸이랑 팔찌, 심지어 머리띠까지 만들어 꽂고 화려한 공주 흉내를 내었단다. 물론 남자애들에겐 시시했지만 먹을 게 귀한 시절이라서 그 애들도 감꽃을 너희가 먹는 팝콘처럼 먹어댔어." "그래서 여기가 엄마 놀이터라고 하셨구나!" "할머니가? 아냐. 놀이터는 아냐. 가슴을 두근대며 몰래몰래 숨어서 줍다가 꽃재집 할아버지가 나타나면 도망치느라 난리였는데? 감나무 밑에 심은 농작물을 버릴까봐 그러셨나봐." "꽃재집요?" "응, 우리 동네 한가운데에 있는 빨간 기와집 말이야. 이 감나무밭 주인이었지. 난 지금도 그 할아버지가 살아서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린단다. 저 소쩍새 소리 들리니? 꼭 그 할아버지 같잖아? 얼른 나오라고 재촉하는 것 같잖아?"
어머니는 숨이 차는지 허리를 펴며 짙은 안개 속을 뚫어져라 바라보았습니다. "오래 전에 그 할아버지도 가고, 그 분의 아들도 돌아가셨지. 늙으면 그렇게 다 가는 게 자연의 법칙인데……" "……." "휴!" 어머니가 콩밭을 벗어나며 감꽃을 한 줌이나 흘렸지만 전혀 알지 못 하는 것 같았습니다. 병수가 대충 주우며 어머니를 따라왔습니다. 쓸쓸한 어머니의 등뒤에서 여전히 소쩍새가 울고 뻐꾸기도 울었습니다. 어머니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소쩍새가 무서운 할아버지로 뻐꾸기는 그 아들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아까부터 감꽃을 줍는 어머니와 병수를 향해 목놓아 소리를 지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날 늦은 아침을 먹은 어머니랑 병수는 외할머니의 반짓고리에서 제일 굵은 실을 골라 바늘에 꿰고 감꽃을 둥글게 이었습니다. 외할머니도 소복히 모아진 감꽃을 쓰다듬었습니다.
"이쁘다. 내가 어릴 때도 이 감꽃을 튀밥처럼 먹었지. 익지도 않은 땡감도 왜 그리 달게 먹었는지 몰라. 땡감 먹고 체하면 약도 없다고 하면서 김칫국만 연신 들이마셨어."
감꽃 하나를 입에 넣은 할머니가 합죽한 입을 연신 오물거렸습니다. 어머니도 병수도 감꽃을 입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마주보며 웃었습니다. 동화 속 같은 이 행복이 오래오래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길게 이은 감꽃은 어머니가 외출하실 때 즐겨 걸던 진주 목걸이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제일 먼저 어머니가 걸었습니다. 그러자 외할머니가 안방에서 거울을 가져왔습니다.
"어머니도 걸어보세요." "에이 늙은이가 망칙스럽게……." 외할머니가 팔을 홰홰 내젓자, 어머니가 거울 앞에서 뱅그르르 돌았습니다. 그리고 거울 속에서 하얀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외할머니도 입을 헤 벌리고 그런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그 순간 어머니는 시골 소녀였습니다.
"우리 병수나 걸어 보라 해라." 외할머니 말씀에 어머니가 눈을 반짝였습니다. "그래, 열두 살 우리 병수가 잘 어울릴 거야." 어머니가 목걸이를 벗어 병수의 목에 걸었습니다. 쑥스러운 일이지만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 드리기 위해 병수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와! 감꽃 왕자님이 되었어요. 어머니, 왜 옛날 저수지 옆에 살던 초등학교 동창 귀남이 같지 않아요? 귀남이가 저한테 감꽃 목걸이를 자주 주었거든요. 그 애 때문에 놀림도 많이 받았어요. 목걸이는 결혼 할 때만 받는 예물이라며 방앗간 집 옥화가 얼마나 놀려댔게요?"
흥분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병수는 거울 속에서 커다란 감나무를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초록색 조끼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거울 가득 아침의 그 안개가 뽀얗게 피어났습니다. 그 속에서 어머니는 열두 살 소녀가 되어서 팔짝거렸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상상도 잠깐입니다. 헛구역질을 시작한 어머니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한 쪽 손으로 병수 어깨를 꽉 움켜잡았습니다.
"엄마아, 왜 그래?" "그래, 네 에미가 너무 무리한다 싶었어." 가슴과 가슴을 맞대어 안은 어머니와 병수가 마루에 나뒹굴었습니다 "엄마, 가지마. 엄마, 가지마. 우리 두고 가지마 응?" "그……럼, 우리 왕자님을 두고 어……떻게…… 가?"
외할머니가 서둘러 하얀 약을 먹이자, 어머니는 병수를 움켜잡은 손에서 스르르 힘을 뺐습니다. 그리고 빙그레 웃기까지 하며 눈을 감았습니다. "놀랬냐? 그 놈의 감꽃 때문에 약 먹을 시간을 놓친 거야." 고개를 숙인 병수의 등을 토닥이는 외할머니가 한숨을 쉬었습니다. 아마 병수 모르게 눈물을 닦을 것이 분명합니다. 어머니는 병수가 서울로 가야 할 시간에도 잠에서 깨어나지를 못 했습니다.
"네 아버지가 데릴러 온다는데 내가 말렸어. 그 사람도 온종일 일하고 달려오려면 힘들어. 그리고 밤 운전도 위험하구. 후딱 가거라. 버스 올 시간이 다 되었어." "다음 일요일엔 연지도 꼭 온다고 전해 주세요 할머니, 안녕히 계세요." "그래 걱정마. 내가 눈 훤히 뜨고 지키고 있을게. 걱정마. 에미 없는 집구석이 얼매나 썰렁할꼬! 쯧쯧……." 병수는 찻길로 이어진 시골길을 달렸습니다. 오후 햇살이 그런 병수를 뒤따라왔습니다. 그 때마다 목을 간지럽히는 감꽃 목걸이 때문에 병수는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마치 자신이 엄마의 옛날 남자 친구인 귀남이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열두 살 어머니의 옛 모습이 되어 벌판을 뛰어다니는 기분이었습니다.
'아! 맞아. 서울에 가면 아빠께 감나무를 심자고 할거야. 우리 집 정원에 감나무를 심으면 아까 그 소쩍새가 된 할아버지처럼 우리 엄마도 감나무가 되어서 우리랑 함께 살게 될 거야. 오케이!'
버스 유리창에 기대여 졸고 있는 병수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습니다. 병수는 눈을 감고 햇볕에 반짝이는 초록빛 감나무 숲 속을 한없이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 감꽃이 눈처럼 쏟아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