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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단편소설- 가작> 안개꽃 동산

나는 어젯밤 또 '그짓'을 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나 외엔 어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첨부터 누구에게 배운 게 아니고, 또 누구에게 자랑한 일도 없기 때문에 이건 어디까지나 내 비밀스런 취미인 것이다. 그런데 그 횟수가 빈번해 지면서 나는 이러다가 혹시 내가 장가를 못 가는 병에 걸리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기도 했다. 그건 비극이다.

장가는 들어야 한다. 그래야 어른 대접받고 남한테도 떳떳해 질 수 있으니까. 외할머니는 내가 장가드는걸 봐야 죽는다고 노랠 부른다. 그러면 외할아버진 청승 그만 떨라며 꿱 소릴 지르지만 어느 샌가 소주를 꺼내와 홀짝거린다.

우리 아버지는 결혼에 실패했다. 내가 백일도 안 돼 어디론가 사라졌다니까-외할아버진 이민을 갔다고 하지만-확실히 어떤 고장이 있었을 것이다. 그게 혹 내가 염려하는 '그짓' 때문이 아닌지, 어떤 날은 그짓을 하고 나면 사타구니가 뻐근하고 괜히 기분이 사나워 지면서 옆에 있는 무슨 물건이라도 확 둘러 메치고 싶은 충동이 일곤 하니까. 사실 나는 두렵다.

이런 두려움이 생긴 건 곰곰 따져보면 옹주가 우리 학교에 나타나고부터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이웃집에 다녀가고부터다. 그애는 청주에서 전학을 올 예정이라고 했다. 이런 촌구석으로, 무슨 사연이 있기에 전학을 다 오나 싶었지만 이유야 어떻든 제발 그애가 우리 학교로 전학만 온다면 얼마나 좋으랴 싶었었다. 한 사나흘, 우리 동네 둑길을 맴돌기도 하고 학교 울타리 밖 솔밭에 가 앉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교실에 들어와 보기까지 했던 그애가 그 뒤 문득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시골 구석에선 정말이지 때려죽인대도 못 살겠다며 갔다는 것이다.

그애가 와서 머물던 집 할머니는 우리 외할머니와 동갑내기여서 우리는 남달리 정있게 지냈는데 그애가 떠나간 뒤 나는 그 집을 쳐다보기도 싫어졌다. 하지만 그애 생각은 부지불식 중에 내 머릿속을 찔러오곤 했다. 도시 아이들은 다 그렇게 멋있는지 나보다 반뼘은 더 컸고 얼굴도 흰종이처럼 뽀얬다. 게다가 처음 나타날 때 입었던 교복-우리 학교는 교복이 없다- 속의 그애는 꼭 은행이나 큰 회사에서 일하는 어떤 누나로 착각할 정도였다. 나는 한번도 옹주를 내 친구가 되겠거니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가슴은 마구 뛰고, 밥 먹고 잠자고 학교가는 일이 갑자기 즐거워지는 걸 어쩔 순 없었다.

이 학교엔 교복이 없구나, 하고 그애가 둘째날부터 우리처럼 사복을 입고 돌아다녔는데 청바지가 미어지도록 빵글빵글한 엉덩이며 팽팽한 장딴지, 티셔츠 속의 불룩한 가슴이며 무쓰를 살짝 발라 빗어 붙인 머릿결 등이 이번에는 꼭 잡지에 나오는 모델이나 탤런트 같았다. 그런 옹주가 나같이 까무잡잡하고 촌스러운 애와 어울려 학교생활을 한다는 건 사실 온당치 않았다. 그렇지만 나에게 나타난 이 변화를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었다.

한 녀석이 있긴 했다. 우리 반에서 키가 제일 큰 지웅이 녀석인데 녀석이 가끔 불쑥 그런 말을 하곤 했던 걸 나는 잊지 않고 있다. 며칠 전인가, 영어를 지독히 싫어해서 꼬불꼬불한 글자만 봐도 신물이 난다는 녀석이 영어 성적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꾸중을 들은 일이 있었다. 얼굴이 좀 검어서 유난히 화장을 짙게 하지만 꼭 미국사람처럼 혀를 잘 굴리는 영어선생님이 '이 녀석 점수가 또 줄었어, 또?' 하고 혼을 내도 신둥신둥하던 녀석이 화장실에 가서는 그걸 자랑삼아 꺼내 보이며 '나 이거 크지?' 하던 것이다. 사실 녀석 것은 무섭도록 컸다. 내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그래서 녀석은 나보다 훨씬 전에, 내가 품고 있는 이 고민을 겪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지웅이를 찾아가고야 말았다. 녀석의 집은 학교 뒤 솔밭을 지나 한참 가야 했다. 동네 입구 도랑에서 족대질을 하는 아이들 뒤에 지웅이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어이 먹물, 여길 다 웬일이여?"
그는 고기 잡는 애들을 놔두고 나를 도랑가 나무그늘로 데려갔다.
"웬일이냐?"
녀석이 다시 물었다. 내가 온 목적은 분명했다. 그러나 녀석을 앞에 놓고 보니 막상 말 꺼내기가 쑥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쑤컷, 하고 나즈막이 그를 불렀다.
"말해 임마, 뭘 망설여?"
"너 그거 크다고 자랑했지?"
"그거라니?"
"이거 말여"
나는 녀석의 아랫도리를 가리켰다. 녀석이 너무나 난데없는 질문이어선지, 이거? 그런데 왜? 하며 나를 도로 쳐다봤다.
"너도 이게 막 땡기고 아프고 한 적 있어?"
나는 녀석의 어처구니없어 하는 표정에 용기를 얻어 물었다.
"아니."
녀석은 의외로 멀쩡하게 대답했다.
"그래?"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지만, 녀석의 표정을 끝까지 보고 싶은 생각마저 거두진 않았다.
"왜? 너 여기 아퍼?"
이번에는 녀석이 바짝 얼굴을 들여대고 제법 진지하게 물었다.
"아니."
나는 부정했지만 내심으로는 녀석에게 더 자세히 구체적으로 그 증상을 얘기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 순간 녀석이 문득 엉뚱한 걸 물었다.
"옹주 안 왔디?"
나는 깜짝 놀랬다.
"옹주가 오다니?"
"짜식, 먹물 넌 붓글씨만 쓸 줄 알지 걔에 대해선 모르는구나?"
녀석이 내 별명 '먹물'을 저렇게 풀이한다는 건 지금 나한테 호의적이란 뜻이다. 얼굴이 하 새까마서 그렇게 부른다는 적도 있으니까.
"옹주가 다시 온댔어?"
나는 사뭇 진지해졌다.
"올 거여. 여기 아니면 갈 데가 없거든."
녀석은 뒷주머니에 들었던 편지를 꺼내 보였다. 옹주와 녀석이 편지를 나누는 사이라니? 나는 순간 녀석이 부럽기도 하고 내 자신이 초라하기도 하여 한숨을 후 내쉬었다.
"너도 옹주를 좋아하는구나?"

나 같으면 도저히 입밖에 낼 수 없을 그런 소리를 녀석은 힘들이지 않고 뱉었다. 나는 다시 아니, 하고 부인했지만 지웅이 녀석, 쑤컷에게는 훨씬 어리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고보니 옹주와 쑤컷은 키도 비슷하고 말하는 투나 걷는 폼도 매우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쑤컷, 옹주가 언제 온대?"
나는 편지를 읽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그렇게 되물었다. 녀석이 편지를 도로 빼앗아가면서 곧 오게 될 거라고 써 있잖어,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옹주가 다시 온다는 말에도 나는 흥이 나지 않았다. 그애가 오면 또 이웃집 할머니댁에 나와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그 집에, 살게 될 거지만 그래서 밤낮 마주치게 될 테지만 왠지 지웅이네집보다도 더 멀리 사는 사람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나는 괜히 쑤컷을 찾아왔다고 후회하며 집으로 향했다. 솔밭에 이르러 방향을 바꾸자, 제법 넓은 도로 위로 군내버스가 다니는 길가에 '따닥'네 집이 나왔다. 따닥네 집은 배와 사과가 밤톨만하게 열려 있는 과수원 속이었다. 따닥은 방안에 앉아 컴퓨터를 대하고 있었다. 마우스를 워낙 잘 다뤄 얻은 별명답게 녀석은 온 종일 컴퓨터를 치는 게 일이었다.

"쑤컷한테 옹주가 편지를 보냈더라."
나는 그 얘길 다짜고짜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쑤컷 그 놈한텐 여자애들이 잘 따르지."
"왜?"
"싸내다운 게 짱처럼 생겼잖어."
"쑤컷이란 별명은, 이름의 '웅'자 뜻을 몰라서 한문선생님한테 꾸중을 듣다 얻은 별명이잖어. '네 이름에 있는 쑤컷 웅자, 그거 낼까지 못 쓰면 종아리 맞을 줄 알어', 했던 거 아냐? 그런데도 다음 날 그걸 못 썼지. 아니 지금도 못 쓸 걸. 그게 어째 녀석이 쑤컷답다는 뜻으로 쓰이는지 난 모르겠어."
"너 질투하고 있구나. 넌 아직 싸이버 세계를 모르니까 그런 소릴 하는 거여."
"싸이버?"
"그 속엔 옹주보다 훨씬 이쁜 여자들이 많어. 걔들하고 대화하고 편지하고 연애도 하는 거여."
따닥은 정말 평온해 보였다.
"나도 만날 수 있어?"
"그럼. 자 날 따라와 봐."
녀석은 방문을 딸각 잠그고, 잠시 동안 분주하게 이리저리 마우스를 눌렀다. 힉교 컴퓨터실에서 보았던 것과는 색다른 솜씨였다. 그런데, 녀석의 클릭 동작이 어느 순간 멎는가 싶더니, 과연 경이로운 화면이 떠올랐다. 나는 잠시 내 눈을 의심하면서도, 옆에 있는 녀석의 얼굴을 흘겨볼 겨를없이 침을 꿀꺽 삼켰다. 금발의 맨몸뚱이 여자가 파란 눈에 애교를 담아 뚫어지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화면은 점점 그녀의 하반신으로 옮겨가고….

나는 현기증이 일면서 아랫도리가 빳빳해 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컴퓨터로 저렇게 자유로이 미녀들을 만날 수 있
는 따닥이 한없이 부러웠다. 집에 와서 컴퓨터를 사달라고 졸랐지만 나 자신 그게 얼마나 가당찮은 일인가를 잘 알기 때문에 곧 그만 두었다. 대신 책가방을 싸들고 따닥을 자주 찾아가게 됐는데, 그것도 주의를 태만히 한 녀석이 제 엄마한테 들키는 바람에 컴퓨터를 빼앗기고는 그만 두게 되었다.

모내기를 마악 끝내고 무논에서 처절하게 개구리가 울던 밤, 과연 옹주가 나타났다. 오기 싫은 곳을 억지로 오는지, 머릿결도 푸스스한 채 어찌보면 눈두덩도 좀 부은 듯한 모습으로 막버스에서 그애가 내린 것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던 그 외할머니가 가방을 받아들고, 어여 가자, 배고프겠다, 할 때까지 그애는 꼿꼿이 서 있기만 했다.인심도 좋고, 공기도 좋고, 시골서도 정 붙이면 살 만하단다, 하고 할머니가 앞장을 서자 그제서야 그애는 느릿느릿 뒤를 따랐다.

옹주가 정식으로 전학절차를 밟고 우리 학교 학생이 되었다. 워낙 작은 학교라-전교생이 60명밖에 안 되었다- 옹주의 출현은 지금까지 일어났던 크고 작은 교내 화제를 모두 잠재우고 말았다. 더욱이 지금껏 대처로 전학을 가는 애들은 종종 있었지만 이렇게 오는 경우란 그들로서는 처음이었다. 선생님들도 옹주에 대한 배려가 각별해서, 교과서가 다르지 않으냐,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느냐, 무슨 과목에 소질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들을 물어보곤 그 대책을 세세히 일러주곤 했다. 그때마다 옹주는 송구스러워 하는 미소와 함께 그 하얀 얼굴에 약간의 홍조를 띠며 예, 아니오를 자그마한 목소리로 간략하게 답했는데 그게 여간 우아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선지 스물 두 명 학급 아이들은 지웅이와 나 그리고 몇몇 여자애들을 제외하곤 휴식시간이면 쪼르르 그애 곁으로 모여들어 깔깔거리거나 고개를 끄덕이는게 낙이었다.

지웅이가 그애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게 이상했지만 그들의 속마음을 나로서는 알 수 없었고, 문제는 내 속마음이었는데, 그것은 옹주가 다시 오던 날 -그 외할머니한테 그런말을 사전에 들었었다- 막버스가 도착하는 동구밖에 나갔으면서도 길가 나무그늘 속에 시종 내가 숨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 후로도 대낮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체하다가 밤이 되면 그 방을 하염없이 바라본다거나, 어제 같은 경우엔 그 방문 앞까지 몰래 다가가기도 했던 것이다. 그 집에서 개를 키우곤 있으나 강아지 적부터 나하고 친한 관계로 되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 뿐인데다 옹주 외할머니는 온종일 들일로 파김치처럼 지쳐 돌아온 뒤라 저녁 숟갈 놓기 무섭게 잠자리에 쓰러지기 때문에 맘만 먹으면 언제나 옹주에게로의 접근은 가능했다.

하지만 그애의 방에 환한 불이라도 켜져 있으면 더 이상의 접근 엄두를 못 내고 패잔병처럼 돌아서게 되는 게 이상했다. 오직 어둠 속에서만 나는 살아 움직이는 셈이었다. 누군가 내 별명을 '먹물'로 부른 것도 이렇게 보면 참 일리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까만 밤 같은 먹물. 그런가하면 지웅이는 무슨 꿍꿍이 속을 가졌는지 옹주가 나타나고서는 눈에 띄게 점잖을 떨었다. 수업 시간에 혹 선생님께 모욕감을 받았다든가 무시당하는 투라도 엿보일라치면 얼굴이 금새 험악해지며 애들 귀에 들릴 정도로 씩씩대는 소릴 냈다. 어머 얘가 갑자기 이상해졌네, 하고는 얼굴이 빨개진 영어선생님이 다신 지웅이한테 눈길 한번 안 주게 되었어도 녀석은 그게 속 편하다고 했다. 섣부른 조롱하는 듯한 관심은 차라리 싫다는 것이었다. 녀석의 이런 점잖떪이 옹주의 관심을 사기 위한 연극인진 몰라도 우리 반에서 옹주에게 걸 맞는 적어도 그애와 맞서 상대할 수 있는 일거수 일투족은 나의 대단한 관심사였는데, 하룬 학교 화장실 뒤에서 녀석이 내게 문득 옹주에 관해 말을 걸어온 것이다.

"먹물, 짜사 너 옹주 때매 고민하고 있지?"
내 속을 환히 들여다보고 하는 말 같았다.
"내 눈은 못 속여."
"그럼 넌 고민 안 해?"
"안하지."
"거짓말."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넌 밤에 옹주나 잘 감시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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