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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계미년 새해가 밝았다. 학생, 교사는 물론 모두가 새 희망에 두손 모으는 시간이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 교육에 있어 희망을 논한다면 그것은 단연코 우리 교사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떨어진 사기를 핑계 삼아 교육에, 아이들에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지 반성과 함께 어쩌면 '전혀 새롭지 않은' 교사로서의 각오를 다지고 또 다져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교사라면 학생들이 희망을 갖고 학교 생활을 하도록 이끌고 보다 발전적인 사고를 갖도록 세밀한 마음과 정성스런 손길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 가운데 우리 교사는 학생들을 보다 교육적 직관으로 진단하고 처방하는 전문가여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학생들의 표정과 눈빛, 손짓, 태도 하나 하나에서 학생들의 적성과 특기(천재성)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또한 학습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학생의 동기를 유발시키는 수업방법 개발에 노력하고 무엇보다 학생들과의 친밀감 다지기에 힘 써야 한다. 교사가 아무리 훌륭한 수업기법으로 수업을 진행시켜도 학생들이 학습활동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학습효과를 기대하기는커녕 그 수업은 죽은 수업일 뿐이다. 따라서 교사는 활동과정에서 학습동기를 유발하고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수업 진행방식을 연구하고 수시로 개선해야 한다. 그러나 학습에 대한 흥미가 항상 학습활동에 절대 요건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학습 활동과정에서 학생들이 스스로 만족감과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교사는 지적활동을 자극하고 촉진하는 교수기법을 강구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교사는 학생을 믿고 학생의 요구와 흥미를 존중하고 학습환경을 풍부히 함과 동시에 학습자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또한 학생의 잘못된 행동이나 실수도 성장을 추구하는 과정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보고, 관용하고 용납해 학생들의 의견이 최대한 반영되도록 격려하고 도와야 한다. 그것은 학생 자신을 가치롭게 생각하고 스스로 자기의 적극적인 성장을 주도하게 도와주는 것이다. 새해를 맞는 교사에게 특별하고 새로운 소망이 있을 리 없다. 학생들에게 최선을 다하려는 교사들의 소망이 꼭 이루어지는 한해가 되길 바란다.
새해에는 교사와 학부모, 학생이 한마음으로 행복한 교육풍토를 만들고 누렸으면 한다. 교사는 학생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학부모는 학교와 교사를 신뢰하며 학생은 학업에 노력하는, 그런 의욕이 넘치고 생동하는 교육현장을 그려본다. 교사가 신명난 교육을 할 수 있도록 잡무 부담을 없애고 쾌적한 교육환경 속에서 오직 교육에만 전념할 수 있는 연구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교사는 풍부한 지식과 식견을 갖추고 투철한 사명감과 새로운 것에 대한 지적호기심을 지녀 학생들의 무한한 잠재능력을 개발시켰으면 한다. 그런 능력을 갖추고 변화하는 세상에서 앞장서 지도하려면 정보화, 세계화 교육 등 새로운 지식으로 무장하려는 각오가 더 없이 절실하다. 따라서 교사들이 자기연수에 적극적으로 앞장서는 한해가 됐으면 한다. 학부형은 자녀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과 일등주의, 이기주의를 버리고 내 자식보다는 모든 이웃의 자녀들을 배려하고 도와주는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스승을 존경하고 학교를 신뢰해 자녀들이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협조를 아끼지 않음과 동시에 무엇보다 가정교육에 소홀함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정교육이 바로 되어야 학교 교육이 바로 됨을 인식하고 사회에서 필요한 훌륭한 일꾼이 되도록 학교와 하나가 돼 노력하는 새해를 꿈꾼다. 학생의 본분은 배우고 익히는 데 있다. 스승을 존경하고 따르며 성실한 자세로 공부하고 익히되 자기 주도적이고 창의적이며 탐구적인 자세로 학업에 열중했으면 한다. 학생시절 커다란 꿈을 갖고 그 꿈을 키우기 위해 소질을 계발하고 노력한다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고 탈선 없이 열심히 공부하고 건강한 신체를 만들었으면 한다. 새해에는 교사와 학부모 학생이 하나가 되어 행복한 교육세상을 열어 가는 원년이 되기를 기원한다. 행복한 교사. 행복한 학부모, 행복한 학생이 되어 행복한 나라를 만드는 꿈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공교육이 내실화 되어 사교육비로 국민들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학부모와 학생들은, 특히 서민들은 과중한 사교육 부담에 괴로워하고 있다. 수입이 넉넉지 못한데도 대부분의 아이들이 학원에 다니거나 과외 공부를 하는 현실을 외면만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 때문에 부족한 생활비를 쪼개 사교육비에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돈을 쓰고 있는 형편이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입시에만 매달려야 하는 무미건조한 삶에 회의를 느껴 가출, 음주, 흡연 등 일탈 행위를 일삼으며 방황하고 심지어 자살에까지 이르러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정말 올해는 교육을 진정 보살피는 대통령, 교육부로 말미암아 모든 학교가 즐겁고 신나는 기쁨의 장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니 위해서는 우선 학교시설부터 완벽히 갖추는데 힘을 썼으면 한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학생들이 더위와 추위에 몸서리칠 정도로 시달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 학교에서 실시하는 취미·특기적성교육에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다. 기본적인 생활조건도 갖추지 못한 학교에서 개혁을 논한다는 것은 무리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교육이 내실화 되고 사교육비를 없애려면 내신만 가지고 진학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제도화돼야 한다고 본다. 별의별 희한한 외국의 입시제도만 모방하다보니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부작용만 낳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면접을 강화한다고 하니 면접을 위해 학원에 수강하느라 학교는 신경도 안 쓰고 공교육은 질식사 직전에 놓이게 됐다. 학원에 가지 않는 학생보다 가는 학생이 휠씬 더 많은 현실은 분명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면접은 학교 공교육을 제대로 받은 학생이 답변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진학하기 위해서 앵무새나 기계처럼 단기간에 학원에서 완성되는 논술능력은 진정한 논술이 아니다. 오히려 학생들의 자유로운 사고능력만을 감퇴시키는 꼴이다. 요령주의와 기회주의만을 배우게 하고 돈 있는 자만이 명문대에 가고 돈 없는 자들은 3류 지방대를 간신히 가거나 아예 진학을 못하는 현 세태는 국민의 정부가 종말을 고함과 동시에 함께 사라졌으면 한다.
교육대통령이 되겠다고 천명한 새 대통령께서 차근차근 공약을 준수하는 한 해가 되기를 우선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단의 안정을 소망한다. 교육이 백년지대계인 이상 정치 논리와 정책 때문에 교단이 더 이상 흔들려서는 안 된다. 일관성 있는 교육정책으로 학교는 교사들이 아주 편안하게 가르치고, 학생들이 아무 불편 없이 배우는 요람으로서 거듭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 국민이 교육에 관심을 갖고 더욱 교원과 학생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교원의 사기도 한층 진작됐으면 한다. 몇 년 전, 소위 교육개혁의 여파로 말미암아 현재 일선 교원들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의욕과 사기가 충천해 있을 때 효과가 배가되기 마련이다. 아무런 욕심 없이 그저 2세 양성의 일념으로 매진하고 있는 교원들이 신바람 나게 가르치고 근무할 수 있도록 사기를 북돋워 주어야 한다. 아울러 이 땅의 참 스승들이 제대로 평가받고 우대 받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교육은 미래의 새싹인 학생들을 바르게 기르는 일이 근본이다. 따라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열심히 학생을 가르치는 교원들이 우대 받아야 한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 교직 사회에 더러는 임기응변, 요령주의, 적당주의가 팽배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새해에는 말없이 학생들을 사랑으로 가르치고, 자신의 직분에 충실한 참 스승들이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는 한 해가 됐으면 한다. 제7차 교육과정의 안정적 정착도 빠뜨릴 수 없다. 현재 어려움 속에서도 초등교에서 고교 1학년에 이르기까지 10학년에 걸쳐 제7차 교육과정이 전면 적용되고 있다. 올해는 이 제7차 교육과정이 보다 내실을 기하고 안정적으로 현장에 뿌리 내리기를 기대한다. 밝아 온 새해의 태양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싱그럽다. 계미년인 올 한 해가 끈기와 여유의 상징인 양(羊)처럼 서둘지 말고 차근차근 교육 개혁을 이루고, 교원과 교단이 제자리를 잡는 새로운 한 해가 되기를 바라며 두 손을 모아 본다.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과 함께 새해가 밝았다. 이제 대통령직을 걸고 많은 공약들을 실천하는 일이 남았지만 정작 강조하고 싶은 것은 공교육 내실화다. 이를 위해 노 당선자는 방과후 교육 활성화와 학급당 학생수 감소를 들었다. 하지만 이것들은 국민의 정부에서 실패한 정책들이다. 특히 방과후 교육활성화에 대해 노 당선자는 유능한 강사를 학교로 초빙해 싼값에 질 높은 과외를 받게 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지금과 같은 보충수업과 심야자습의 입시지옥을 계속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공교육 내실화의 키워드는 크게 두 가지다. 수능시험 폐지와 획기적인 교사처우개선이다. 아예 폐지하는 게 상책이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수능시험은 대학 공부를 할 수 있는지 체크하는 자격교사로 전환돼야 한다. 방과후 특기·적성교육이 사실상 보충수업으로 변질되고 학생들이 많은 돈을 퍼들여 학원에 다니는 것은 수능시험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강제적·획일적 입시위주 교육으로는 국가경쟁력의 견인차가 될 인재를 길러낼 수 없다. 아울러 강제적인 보충수업과 야간자율학습 등을 없애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도 뒷받침돼야 한다. 교사의 처우개선은 공교육 내실화와 관련해 동전의 양면과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단순히 돈 문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교사는 '공부하는 기계'를 조립·생산해내는 기능공이 결코 아니다. 교사를 학원강사보다 무능한 족집게로 보는 학생 및 학부모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공교육 내실화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교사의 법정정원 확보도 시급하다. 초등교는 말할 나위도 없지만 중·고교 역시 기간제 교사가 수두룩하다. 고령고사 1명이 나가면 2∼3명의 신규교사를 채용할 수 있다며 교원정년을 3년씩이나 단축해놓고 임용고시 대기자가 줄을 선 중등에서조차 툭하면 기간제 교사로 땜질하는 교원수급은 일종의 사기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명심해야 할 것은 또 있다. '이 서방' 소리를 들으며 물러났던 이해찬 전 교육부장관이 대선에서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교육분야에 중용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계미년 새 태양을 바라보면서 올 교육계의 변화, 아니 교육정상화를 고대한다. 특히, 새 대통령 당선자의 공약들은 교육계에 희망의 불씨를 살릴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일선학교에 대폭적인 권한 이양이 이루어질 것이고, 우리가 바라는 수석교사제도 도입될 날이 머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꼭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그것은 교육정책을 입안하는 과정에서 교육을 있는 그대로, 교육논리에서 봐 달라는 것이다. 불과 몇 년 전 우리의 교육은 철저하게 경제논리에 휘말려 있었다. 나이든 교사 1명 퇴직에 신규교사 2.5명을 임용한다는 그럴듯한 논리를 다시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경제논리는 그 무엇보다도 우위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은 교원의 증원도 아니었고 수업경감과 업무경감도 아니었다. 학급당 학생수가 OECD 수준으로 줄어든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로부터 2년 후, 교사들은 또 한번의 이상한 논리에 휩싸였다. 다름 아닌 정치논리다. 교원정년 63세 연장안을 놓고 여·야가 벌인 논리는 분명히 정치논리였다. 그 바람에 이미 곤두박질 친 교원의 사기는 바닥을 쳤고, 학교교육은 혼미에 빠져들었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뛰어 넘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아도 교원의 사기와 의욕이 저하된 교육현장은 정상을 찾을 수가 없다. 초등학교 교사의 부족사태는 작년에 이어 올해는 최악의 상황이라 한다. 지난해 실시된 신규교사 임용시험에서 일부 지역을 빼고는 정원도 채우지 못했다. 정원이 채워진 지역도 50대 이상이 상당수 신규임용시험에 합격한 상태다. 정부에서 선택한 경제논리가 정부에 의해 철저하게 무너지는 현실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정책은 경제논리는 물론이거니와, 정치 논리로도 해결할 수 없다. 오로지 교육은 교육논리로 풀어나가야 한다. 발전적인 교육을 위해서는 교육이 교육자 즉, 현장교원들의 손에 달려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교육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의욕이 있다면 경제논리도 정치논리도 설자리가 없는 것이다. 이제는 2003년이다. 양모의 포근함과 따스함을 교육계에서도 느낄 수 있는 새로운 한해가 되었으면 한다.
기간제 교사와 교과전담 교원을 포함해도 내년도 초등 교원은 5385명이 부족할 것으로 추정된다. 초등 교원 부족은 서울을 제외한 전국적인 현상으로 ▲경기 1715명 ▲충남 1289명 ▲경남 715명 ▲전남 275명 ▲인천 230명 ▲광주 202명 ▲경북 192명 ▲울산 186명 ▲부산 149명 ▲충북 113명 ▲전북 83명 ▲대구·강원 79명씩 ▲대전 68명 ▲제주 10명 순이다. 도농 지역 중 유독 충남 지역의 교사가 많이 부족한 것은 7·20교육여건 개선 사업에 따른 급당 학생수를 35명으로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며, 전남도의 경우 시지역 급당 학생수를 올해와 같은 39명으로, 경남도의 경우 44명에서 42명으로 약간 줄일 계획이다. 교원 부족이 심각한 상태지만 도교육청은 추가 모집을 고려치 않고 있다. 250명 이상 부족한 4개 지역(경기, 충남, 경남, 전남)에서는 추가 모집을 고려했으나, "다른 지역에서 낙방한 교사를 뽑을 경우 교육의 질 저하가 우려되고 교원의 사기가 저하된다"는 이유로 추가 모집을 하지 않을 전망이며, 경남도교육청은 아직 미정이다. 교원수급 부족으로 학급당 학생수를 35명으로 낮춘다는 7·20교육여건 개선사업도 어렵게 됐다.
교육용 기자재 평양 학교 지원을 위한 시교육청(교육감 유인종)의 성금 모금 운동이 급박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시교육위원들이 24일 '교육용 기자재 평양 학교 지원 기금 모금 활동을 즉각 중단하라'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교육위원들은 "교사와 학생뿐만 아니라 학교장들까지도 강행되는 모금 행사에 반발하고 있다"며 이번 모금운동을 "전시 효과를 노리는 관료주의적 행정의 전형"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향후 북한의 학교나 학생들을 지원하는 사업은 단위 학교가 스스로 발의하고 결의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내의 한 초등교장도 "취지는 좋지만 대부분의 학교가 불우 이웃 돕기 모금이 끝난 상태라 난감하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시교육청은 “모금은 자율적이며 불우 이웃 돕기 성금을 이미 집행한 학교는 돈을 입금할 필요가 없다”는 업무 연락을 24일 학교에 내려보냈다. 이에 앞선 21일 시교육청은 서부교육청 강당에서 초·중·고 지구별 간사학교장 138명과 지역교육청 학무국장 11명이 참석한 가운데 교육용 기자재 평양학교 지원사업 추진 배경과 기금조성방안을 협의한 후, 지역교육청을 통해 학교에 협조를 요청했다. 이 계획에는 ▲20일 교육용 기자재 구매 계약 체결 ▲23일∼28일 학교별 모금 실시 ▲31일 학교에서 지역교육청에 입금 완료 ▲2003년 1월 3일 지역교육청에서 본청으로 입금완료 ▲1월 13일 교육용 기자재 납품 ▲1월 20∼25일 교육감 평양 방문 및 기증 스케줄이 잡혀있다. 기금 모금은 직원회의 및 학생회를 통해 자발적으로 유도하고, 학교별로 1대의 교육기자재를 기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규모가 큰 학교는 2대 기증방안도 적극 검토한다는 계획이다. 서울시교육청의 평양학교 지원 계획은 지난 6일부터 12일까지의 유인종 교육감의 방북에 따른 결과이다.(본지 23일자 보도). 유 교육감은 1995년부터 꾸준히 북한에 구모물자등을 보내온 사회복지법인 굿네이버스(회장 이일하 목사)의 북한돕기운동을 참관하기 위해 교육감으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굿네이버스는 난치병 학생 돕기 사업을 시교육청과 함께 펼치고 있다.
전회원 직선으로 칠곡군 관호초 김동극(55) 교장이 제41대 경북교총회장으로 선출돼, 2005년 12월까지 경북교총을 이끌게 됐다. 22일 개표한 우편투표 결과에 의하면 김회장은 4445표(43.47%)를 얻어 3623표(35.43%)의 박지구(의성교육청 장학사) 후보, 2156표의 황영수(북삼중 교장) 후보를 제쳤다. 당선 직후 김 회장은 "회원들이 교총의 존재를 체감할 수 있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강력한 교총을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신임회장은 "초등교사 부족에서 오는 임시정책에서 벗어나 하루 빨리 우수교사 확보"를 경북교육의 선결과제로 꼽았다. 김회장은 또 "인근도시로의 위장 전입으로 농촌의 학교가 공동화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며 "행·재정적 지원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김동극 회장은 안동교대 초대학생회장을 역임했고, 경북인터넷홈페이지 경연대회에 입상하는 등 다양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경기도교육청(교육감 윤옥기)는 시흥 광주 이천 용인 안성 등 5개 지역 22개 초·중고교를 근무평점가산점을 주는 농어촌학교로 추가 지정했다. 이번에 추가 지정된 학교를 지역별로 보면 ▲시흥= 진말, 연성, 하중, 장곡초교와 장곡중·고, 연성중 ▲이천=한매, 안흥, 이천, 이천남, 설봉초교와 설봉중, 이천중, 이천송정중, 이천고, 이천실고 ▲광주=광주초교, 광주중 ▲용인=나곡중, 상갈중 ▲안성=안성여고 등이다. 이들 학교 근무교사들은 내년 1월부터 기존 농어촌지역 학교 교사보다 0.005 점이 적은 월 0.01점의 근무평점가산점을 받게된다. 도 교육청의 정홍만 교육정책과장은 "군이 시로 승격하는 등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가산점이 폐지되자 나타난 교사들의 근무기피현상을 해소하기 위한 것"으로 "더 열악한 농어촌학교와의 형평성을 고려해 가산을 낮춘 것"이라고 말했다. 도내에서 근무평점가산점을 부여받는 경우는 농어촌 학교와 공단지역학교로 월 0.015점의 가산점을 받는 농어촌학교는 474개교(초등 347), 0.01의 가산점을 받는 학교는 42개교(추가된 22개 교 포함)이다. 환경문제로 0.015의 근무평점가산점을 받는 공단지역학교(시화, 반월)는 37개교(초등 20교)이다.
한국교총과 교육부는 지난달 21일 교육부회의실에서 2002년 상하반기 제2차 교섭소위원회를 열고 교섭 안건 41개 조항 가운데 양측이 여전히 이견을 보이고 있는 10여 개 쟁점사항을 중점 협의했다. 쟁점 사항은 산업체 근무경력 인정률 상향조정, 연수연구학점 호봉 인정 방법, 실과담당교원수당 인상, 교원 여비지급기준 개선, 보건교육 시간 배정, 국공립병설유치원 교원의 학교운영위 참여, 교원의 석·박사과정 수학경비 지원, 교원병원 건립 등이다. 양측은 1월초 3차 교섭소위에서 쟁점 부분을 다시 협의해 1월 중순이전에 2002년 교섭을 마무리짓기로 잠정 합의했다. 이날 교섭 대표로 교총에서는 임영길 강원홍천 남산초 교사, 신민오 대구 청구중 교사, 박정희 인천 만수초 교감, 우재구 교권정책본부장이 교육부에서는 이영만 교원정책심의관, 이중흔 교원양성연수과장, 이근우 교원정책과장, 이재민 교원복지담당관이 참석했다.
교총 원격교육연수원(education.or.kr)이 지난 달 23일 9개 교원직무연수 과정 첫 수업을 시작했다. 이번 교총 원격교육 첫 직무연수에 신청한 교원 수는 1900여 명으로 참가 규모에서 볼 때 교원을 대상으로 한 유사한 원격연수 중 최고 수준이다. 이처럼 교총 원격교육 연수가 성공적으로 개막된 이유는 운영 프로그램이 우수하고 교원들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교육과정을 개설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특히 9개 연수과정 중 PC 기초 강좌와 성교육 상담 과정에 신청자가 비교적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당초 16일부터 수업을 시작할 예정이었으나 행정 절차상의 문제로 일주일 늦어졌다. 출석수업은 오는 25일 각 시·도별로 지정된 고사장에서 실시된다. 교육부는 지난달 18일 한국교총에 원격교육연수원 인가증을 교부했다. 교총 원격교육연수원은 1년에 6회 직무연수 실시를 계획하고 있으며 제2기 연수생 모집은 3월 중 이루어질 예정이다. 이번 제1기 9개 직무연수과정은 △ICT 초보를 위한 PC 기초에서 인터넷 활용까지 △수업활용을 위한 학습자료 제작과정 △수업자료 및 웹디자인을 위한 포토샵 7.0 따라잡기 △학교에서 엑셀/ 파워포인트 활용하기 △수업활용을 위한 멀티미디어 홈페이지 제작 △즐거운 수업을 위한 ICT 활용 교육 △역동적 홈페이지 제작을 위한 플래시 기초에서 활용까지 △학생지도를 위한 성교육 상담 과정 △학생지도를 위한 인터넷중독 상담과정 등이었다. 교총 원격교육연수원 관계자는 "예상했던 대로 원격교육에 대한 교원들의 참여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앞으로 현장교육연구와 교과별 연수 프로그램 등 차별화 된 프로그램을 추가 개발하고 이미 개설한 연수과정도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교총의 교육정보화 사업은 크게 원격교육연수원과 학교교육지원센터 사업으로 구분돼 추진된다. 학교교육지원센터는 학교교육과 관련된 종합서비스 제공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교총은 사제동행(education.or.kr) 사이트를 통해 교사, 학생, 학부모를 대상으로 교육에 관한 각종 정보 제공은 물론 각종 연수·수련 활동, 커뮤니티, 교과연구회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교총 교육정보화 사업에는 (주)드림교육을 주간사로 해 메디오피아 테크놀로지, 다울 소프트 등 국내 최고의 기술력을 지닌 벤처기업들이 컨소시엄 형태로 참여하고 있다.
예년에 비해 작품 수가 많이 늘었다. 그러나 증가된 작품 수에 비하여 작품의 수준은 크게 향상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애상적인 정서를 노래한 시라든지, 상투적인 추억을 담은 시들이 많았다. 또 지나치게 교직의 애환을 안이한 표현으로 나타낸 시들도 있었다. 그 동안 교직사회를 휩싸고 있던 모종의 이슈 같은 것도 많이 가신 것도 쉽게 눈에 띄었다. 대체로 교단생활에서 얻어낸 시상을 일단 시의 형태로 승화시키는 작업이 부족하다는 점이 심사위원 간의 일치된 견해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몇 작품을 얻은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고 기쁜 일이다. 우선 당선작으로 뽑힌 '꽃 사과나무 아래서'외 1편(윤형돈)은 시적 구도 면에서 만만치 않았고 교단 현장을 어둡지 않게 그리면서 적절한 비유법으로 시적 실감을 더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또한 어린 생명세계를 바라보면서 끝까지 아름다운 시선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한 점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가작으로 뽑힌 세 사람 역시 상당한 형상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작문시간'(이승은)은 요설적이긴 하지만 평이한 어법으로 우회적으로 문장을 이끈 점이 좋았고 '티눈'(이인주)은 쉽지 않은 소재를 가지고 혈육간의 애정을 잔잔한 어법으로 표현해낸 솜씨가 눈에 띄었으며 '노랑나비가 나는 교실'(김찬일)은 현실세계를 환상적으로 바라보면서 치환법으로 표현해낸 점이 무척 산뜻하다는 평이었다. 언제고 하는 말이지만 뽑힌 분들에게는 축하를 보내고 그렇지 못한 분들에게는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겨울나기를 위하여 나무들의 수액이 서서히 뿌리 밑으로 내려가는 계절, 진실로 반가운 소식 들었다. 우선 내 시상의 원천이 되어준 애 사과와 호박덩굴의 학교에게 감사한다.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 하나가 메마른 골짜기에 사는 내 심령의 뼈를 부드럽게 위로해 주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수취인 불명'이 되어 마땅한 영혼의 주소를 찾지 못한 채 이질의 거리를 떠돌아 다녔을까? 떠듦이 곧 삶이요, 호흡인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지내온 지 얼추 이십 년이 넘어버렸다. 교실에서 두더지 잡기 놀음에 지쳐버린 나의 호주머니에 그래도 해바라기 씨앗을 슬그머니 넣어주는 악동들의 순수가 있기에 그 많은 시간들을 용케도 버텨왔나 보다. '영감은 부차적인 것, 일차적인 것은 즉흥적인 구성'이란 말에 두고두고 공감한다. 학교현장에서 건져 올린 정서와 심상들이 울타리 안에서만 통하는 온실 재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보다 넓게 입을 벌려 긍정하며 전 우주를 온 마음으로 껴안으리라! 호흡하는 것들과의 끊임없는 교감과 연민의 정을 몸소 느끼면서 규칙적인 삶의 시계보다 느림의 미학과 게으름에 대한 찬양도 아끼지 않으리라. 또한 글쓰기는 외상(trauma) 경험에 대한 애도과정이라 하였다. 감히, 시 치료를 통해 상심한 아이들과 소외된 사람들의 심령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겠다. 끝으로, 미흡한 작품을 골라주신 심사위원과 늘 곁에서 관심 있게 지켜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진심 어린 고마움을 전한다.
입상 대상 작품은 '해송이와 꼽추'(이인제), '조각가와 소녀상'(이상욱), '사탕 한 봉지'(최상일), '꿀밤과 찐밤'(고춘희) 등 4편이었다. 네 편중에서 우수작 한 편을 고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수작으로 먼저 거론된 작품은 '해송이와 꼽추'였다. 바닷가 절벽 틈새에서 자라 등이 굽고 비틀어진 해송과 등이 굽은 꼽추 아이, 해송은 예술작품으로까지 칭송되는 분재가 되어 교장실로 팔려가 귀여움을 받지만,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소외된 꼽추는 그 귀한 분재가 보고싶어 교장실 밖에서 추운 겨울밤을 지샌다는 특이한 소재의 현실 고발적인 동화여서 심사위원들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두 주인공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 별개의 이야기로 전개한 구성상의 허점과 절벽 틈새에서 자란 해송을 분재로 살려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점, 참신성이 떨어지는 설명적인 문장 등이 지적되어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논의된 작품이 '조각가와 소녀상'이었다. 폐교된 대밭골 학교에 남아 퇴락해 가는 소녀상과 지체 장애아의 아름다운 만남과 아쉬운 이별이 종내 조각가가 된 주인공이 폐교를 사서 조각공원으로 꾸미게 되어 감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스토리의 이 동화는 가장 동화적이기는 하지만 소재가 평범하고 문학적 감동을 이끌어내는 힘이 약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러나 앞에 논의된 작품에 비해 두드러진 약점이 없어 무난하고 구성이 비교적 치밀하면서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것에 두 심사위원의 의견이 합치되어 이 작품을 우수작으로 결정하는데 합의했다. 나머지 두 작품도 문장이나 구성면에서 수준이 결코 떨어지는 작품은 아니었다. 다만 두 작품이 모두 학교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제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생활 동화여서 참신성이 떨어진다는 약점 때문에 심사위원의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음을 밝혀 둔다. 입상자는 물론이고 모든 응모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동화 창작에 임하는 태도다. 소재의 선택, 문장 구사, 작품 구성과 인물의 성격 묘사, 스토리 전개 등 작품 창작에 있어서 지녀야 할 치열한 작가의식이 부족하다는 공통적인 불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 평가 준비 업무로 바쁘던 어느 날, 당선이라는 뜻하지 않은 기쁜 소식은 청량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작은 일이지만 하나의 목표를 성취했다는 기쁨이 컸다. 그러나 걱정이 되기도 한다. 내가 쓰는 글이 과연 주독자인 어린이들이 읽을 때 공감하는 이야기일까, 앞으로도 깊이 있고 아름다운 동화를 꾸준하게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이 일을 계기로 어린이를 더 깊이 이해하고 꿈을 키워주는 진솔한 글을 쓰는 동화작가가 되고자 다짐해본다. 어린이를 사랑으로 가르치는 교사가 되련다. 이 기쁜 일에 감사할 분이 많다. 내 쓴 글을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주고 교정해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던 동료 선생님, 부족함이 많은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나에게 글을 쓰도록 항상 소재를 제공해주는 우리 반 장난꾸러기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교육신문사에도 감사한다. 이 겨울에는 좀더 편안 마음으로 동화를 찾아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응모작품들은 그 수준이 거의 비슷했다. 소설 쓰기의 기본을 알고 쓴 작품들이었다. 그런데 대부분 너무 소재에 집착했기 때문에, 그것을 해석하여 새로운 허구작품으로 만들어내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같다. 교사로서 교직 현장에서 일어난 일을 소재로 했기 때문에, 그 소재에 너무 애착을 가진 때문일 것이다. 문제를 고발하거나, 성장기에 있는 학생들에 대해 교육자적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데 치우쳐 인간적인 통찰에 이르지 못한 감이 없지 않았다. 작품은 교단수기가 아니라, 인간의 진실을 찾아낸 이야기의 때문이다. 작품 짜임에 대한 관심도 더 가졌으면 했다. 대부분 작품들이 사건이나 이야기를 전하는 데 그친 감이 없지 않았다. 한 작품을 이루어내는 다양한 요소들, 예를 들면, 인물 플롯 갈등 배경 등등의 잘 어울려야 좋은 글이 될 수 있다. 당선작으로 뽑힌 '내가 그린 동물 그림'은 위에서 지적한 그러한 문제들을 어느 정도 극복하였기에 심사위원들의 점수를 더 얻었다. 특히 그 작품에서 호감이 가는 것은 글쓰기에 대한 어떤 자유스러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파격적인 면모는 소설의 매우 중요한 몫이다. 더구나 교사들의 글쓰기에서는 그러한 요소가 더욱 값날 것이다. 우리는 너무 보수적이고, 모르는 사이에 의식이나 안목이 굳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보다는 영악한 점이 있긴 해도 학생들은 그래도 순수하다. 그들의 의식과 행동에 숨어 있는 인간의 진실을 통해서 사람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면, 정말 교단 소설이 큰 문학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업은 오직 교사들만이 할 수 있다. 교직은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는 좋은 환경이다. 더구나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질 때에 우리는 우울한 교직생활을 아름답게 만들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선생님들과 생활하는 학생들도 행복할 것이다.
휴대폰 덮개를 열었다. 당선이란다. 일이 벌어졌구나 싶었다. 물어볼까 말까 망설였다. 당선을 취소할 수도 있냐고. 미숙아를 세상에 내어놓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기쁘지 않으세요?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 역시 낌새가 이상하다 싶은지 그렇게 물었다. 내 머리 속의 작품과 내 손이 쓴 소설은 너무 달랐다. 이번 작품은 더 그랬다. 경솔한 투고를 반성한다. 미숙아를 인큐베이터에 다시 넣어서 제대로 키우겠다. 그렇게 해서 독자들이 마음놓고 만날 수 있도록 하겠다. 다시 기회를 주신다면…. 피가 뜨거웠을 때 나는 빛 사냥꾼으로 살았었다. 방에는 사진첩들이 쌓여갔다. 그러다 어둠에 발목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시(詩)를 기웃거렸다. 그러다 동화라는 것을 쓰게 되었다. 세상이 무지개로 이루어져 있다고 웃으면서 말할 자신이 없었다. 소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는 동안에 세월이 흘러갔고 나는 함양, 부산, 진주, 밀양, 울산, 포항, 서울로 전전하게 되었다. 꿈 때문이었다. 성취한 꿈은 꿈이 아니다. 나는 이루지 못한 꿈이 너무 많다. 요즘에 나는 인간 동물들 관찰하는 재미로 산다. 그 속에 내 소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젠체하는 인간들을 동물 울타리 안으로 불러들일 생각이다. 무모해 보이는 도전이 애처롭게 보여서 심사위원님께서 어깨를 토닥거려 주신 것으로 안다. 달라진 작품으로 보답할 생각이다.
나는 열 셋 사내아이다. 동물 그림 그리기에 빠져 있다. 때로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그것만 생각한다. 조금 전에 내가 동물 그림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정확한 말이 아니다. 에소그램이라고 해야 한다. 우리말로 하자면 동물 생태화(動物生態 )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동물 습성을 기록한 그림이니까. 하지만 나는 동물 생태화란 말을 쓰지 않는다. 영어나 어려운 말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그들이 쓰도록 남겨 두었다. 그래서 내가 쓰는 말은 동물 그림이다. 나는 어린아이여서 쉬운 말이 좋다. 동물 그림 그리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책상 위가 지저분한 지우개 가루로 뒤덮이곤 했었다. 그런데도 완성된 그림은 엉성했다. 들여다보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곤히 잠들어 있는 식구들을 깨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막은 손가락 사이로 입 바람이 새어 나갔다. 그러다 웃음이 잦아들면 눈가에 눈물 몇 방울이 맺히곤 했었다. 한다고 해보았지만 그림으로 동물의 습성을 다 그려낼 수가 없었다. 기세 형이 동물 그림 작업할 때 사진기를 이용하는 까닭을 알 것 같았다. 나도 사진기를 쓰고 싶었다. 그렇게 할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내가 만드는 동물 그림은 드러내 놓고 하는 일이 아니었다. 우리 집 안의 소리들이 모두 잠이 들면 그때서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자정이 가까워질수록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은 신경질을 냈다. 엄마가 텔레비전 원격 조정기를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이 바쁜 아버지의 귀가는 들쭉날쭉했다. 엄마가 밤마다 텔레비전하고 놀도록 놔두시는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었다. 밤이 깊어지면 텔레비전도 지치게 된다. 텔레비전 소리가 죽고 나면 나는 발자국 소리가 안방으로 사라질 때를 기다려야 했다. 발자국 소리는 심통이 나 있을 때가 많았다. 안방으로 들어간 발자국 소리가 더 이상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그때서야 나는 책상 앞에 앉아 공책을 펼쳤다. 공책 종이 긁히는 소리가 생쥐 쏠아대는 소리처럼 들렸다. 내 귀가 긴장해 있는 까닭이다. 그림을 그린 후에 글을 써야 했다. 그러는 중에도 내 귀는 안방에 가 있었다. 안방은 거실 건너편에 있어서 웬만한 소리는 그곳까지 날아갈 수가 없었다. 더구나 글씨 쓰는 소리는 더 그랬다. 그런데도 나는 마음을 놓지 못했다. 이렇게 나는 동물 그림을 그릴 때마다 긴장했다. 그런데도 내가 왜 그 일을 그만두지 못했을까. 시험에 처한 내 혀를 지켜내고 싶다는 그 생각뿐이었을까. 나는 비밀스러운 무엇인가를 캐어내고 있다고 느꼈었다. 같은 일을 계속해서 되풀이하다보면 원래 목적한 것 외에 다른 것을 얻기도 하는 법이다. 이런 날이 석 달 열흘이었다. 내가 동물 그림을 그리는 첫째 목적은 내 몸의 살 한 점 때문이었다. 혀 말이다. 그 살점을 지키기 위해 나는 있는 힘을 다 쏟아 부었다. 그리고 일을 은밀하게 진행했었다. 운이 따랐는지 석 달 열흘 동안 나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었다. 같은 방을 쓰는 사촌 형에게 비밀로 하기는 어려웠다. 기세 형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기세 형의 혀가 조금이라도 가벼웠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아마 칼 맛을 보고 말았을 것이다. 소독 냄새나는 칼, 생각만 해도 온몸의 털이 곤두선다. 내 작업을 엄마 아빠에게 비밀로 해두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의 동물 그림 속에 두 사람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두 분은 주인공 동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나는 우리 부모를 동물로 보고 관찰했던 것이다. 자식이 부모를 짐승으로 본다면 그냥 웃어넘길 부모가 있을까. 없을 것이다. 내가 짐승이라고, 입히고 먹여서 공부시켰더니 이게 보답이냐, 네가 날 짐승 취급한다면 나도 널 짐승 취급 해주마, 이제부텀 네가 벌어서 공부하고 먹고살거라. 이렇게 한바탕 소동이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아무 탈없이 동물 그림을 그려왔으니 재수가 좋은 사람이다. 그렇지 않아도 엄마가 내 서랍을 뒤지기도 했었다. 내가 하는 일에 아주 깜깜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동물 그림 공책을 책가방 속에 넣어서 학교에 갔었다. 엄마 코를 따돌려야 했으니까. 그럴 때 나는 사냥개 코를 따돌려야 살아남을 수 있는 한 마리의 여우였다. 내 공책은 그 동안에 재가 될 고비도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내 동물 그림이다. 그 공책을 공개하려 한다.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여기에 있는 동물 그림은 공책 중의 일부이다. 그리고 어제 만든 것이니 가장 최근의 그림이다. 전량을 공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눈밝은 분들은 자료가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현명하게 판단할 것 같아 일부만 내어놓는다. 동물 그림을 공개한다는 것은 우리 부모님 특히 엄마를 많은 사람들에게 고발하는 짓이다. 우리 엄마는 자식 사랑이 지극하다. 지극하다못해 지나치다. 이런 엄마를 세상 사람들의 입에 들이밀어야 하는 나 역시 가슴이 아프다. 우리 엄마가 짐승인지 아닌지는 이제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다. 내 두 다리는 책상 위에 있었다. 다리가 책상 위로 올라가니까 엉덩이는 의자에 올려지고 윗몸은 등받이에 파묻히게 된다. 나는 이상하게도 다리가 책상에 올라가면 피로가 쉽게 풀린다. 하지만 어른들 중에 이런 나를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는 사람이 있었다. 엄마였다. 하이구, 잘 씻지도 않는 그 놈의 족발을 또 올려놨냐! 그런 정신 자세로 무슨 공부를 하니. 하지만 지금은 안심이다. 내 휴식을 훼방 놓을 사람은 집안에 없다. 다행이다. 노래에 맞춰 까딱까딱 발 박자를 맞췄다. 가라앉은 기분을 끌어올리는 데는 역시 노래가 최고다. 그래서 내 친구들은 댄스곡을 켜 놓고 머리통에 김이 나도록 춤을 춘다. 멍울이 맺힌 기분을 푸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2년 전에 이미 그런 시기를 보냈다. 지금 내 말상대는 대학 2학년 기세 형 정도다. 나는 친구들보다 최소한 십 년쯤은 앞서 가고 있는 셈이다. 사람을 보는 눈이 그렇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니까 친구들은 친구들대로 나를 멀리하고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나를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다. 일찍 철 드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지오디(god)의 '투나잇(Tonight)'은 랩 부분으로 넘어가 있다. 영어 랩이다. 수십 번도 더 들었던 부분이다. 같은 곡인데도 영어로 들으면 노래 맛이 다르다. 우리말처럼 딱딱하지도 않았고 촌스럽지도 않다. 머리까지 끄덕거린다. 따라 부른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다. 혀가 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입에 익은 노랫말들인데도 혀가 부드럽게 꼬부라지지 않는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때문일까. 잉글리시 온리 존(English only jone)에서 나에게 우리말을 내뱉도록 만든 아이가 있었다. 그 일 때문에 나는 감점을 받았다. 감점이 많으면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불리해진다. 학교에서 그렇게 정해 놓았다. 그 찜찜한 기분이 혀를 뻣뻣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래서 박자까지 놓친다. 3시 5분이다. 아파트 정문 앞에서 4시 26분에 학원 승합차를 타야 한다. 1 시간 21분 동안은 내 시간이다. 녹음기 볼륨을 높였다. 노래 소리가 시원하다. "너 뭘 하는 거니. 몇 번이나 불렀는지 알어?" 머리를 돌려 소리나는 쪽을 보았다.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는 아줌마는 우리 엄마였다. 길다란 동물을 물커덩 밟아버린 느낌이었다. 엄마 눈은 책상 위의 내 다리에 머뭇거린다. 그 눈이 나에게로 건너온다. 독기 품은 뱀 눈이다. "넌 엄마도 눈에 안 뵈냐? 다리 못 내려!" "헤헤헤. 나는 이렇게 하면 영어가 잘 들려요." 엄마의 입술이 씰룩거린다. 기가 차다는 표정이다. 녹음기에서는 영어 랩이 끝나고 이런 노랫말이 이어졌다. '넌 왜 나한테 짐승처럼 구는 거니, 우액우액… .' 뒷머리를 긁으며 정지단추를 눌렀다. 한 번 일이 꼬이기 시작하면 계속 꼬인다는 걸 뭐라고 하지, 그런 날이다. "이젠 잔꾀도 부리냐? 사내답지 않게 쪼잔하기는 …." 영어 학원을 가기 전에 가져보려던 내 시간이 비실비실 도망가고 있었다. "넌 엄마 때문에 공부하는 거니, 응?" 엄마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빈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 소리다. 엄마는 내 영어 공부만은 사생결단으로 간섭하려든다. 하나에서 열까지. 그러다 내가 영어 공부를 좀 게을리 한다 싶으면 저렇게 땅이 꺼지게 한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오죽하면 내가 이렇게 물었던 적이 있었을까. 엄만 나에게 영어 공부시키려고 태어났어? 나는 그렇게 극성맞은 엄마가 싫었다. 이제는 엄마의 한숨 뒤에 어떤 말이 이어질 지 훤히 꿰고 있다. 영어듣기 못하는 사람이 걸리는 병이 있다. 무엇인지 아느냐. 귀머거리다. 아주 무서운 병이다. 그리고 영어 병신이 하나 더 있다. 영어 벙어리로 살아야 할 사람들이다. 요즘은 이런 세상이다. 영어를 못하면 인간 취급을 못 받는다. 너 이 따위로 공부해서 누구처럼 그렇게 살고 싶냐. 이런 엄마의 애원과 협박을 들을 때 나는 정말 곤혹스러웠다. 이럴 때에 엄마의 잔소리를 멈추게 하는 확실한 방법이 있었다. 엄마에게 내 영어 실력이 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었다. "암, 암, 나 생각 있어요. 암, 열 세 살, 적은 나이 아니에요." 어깨를 으쓱한 연후에 두 팔을 양쪽으로 벌렸다. 서양인들의 몸짓이었다. 메이저리거가 된 박찬호가 인터뷰할 때였다. 그가 갑자기 미국인으로 보였다. 그 까닭을 생각해보았다. 할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 그는 '암'이라는 군소리를 쓰고 있었다. 나는 바로 이거구나 싶었다. 엄마에게 그 방법을 종종 써먹었다. 그런데 이때도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말 발음하듯이 '암, 암'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혀를 잔뜩 말아서 입안에서 두어 바퀴 굴린 뒤에 내뱉는 '암'이어야 한다. 그러면 영어권에서 살다온 동양인으로 보이게 된다. 그렇게 하면 엄마의 얼굴이 좀 펴지곤 했었다. 그러니까 엄마의 잔소리에서 벗어나려면 나는 혀짜래기가 되어야 했다. 멀쩡한 정상인이 혀짜래기가 되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혀를 꼬부리고 돌돌 말아서 '암, 암' 했었다. 엄마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내가 영어공부에 목을 매고 있다는 사실, 그것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나의 영어 공부에 얼마나 집착이 심한지 한 가지만 더 흉을 보겠다. 지난해 봄이었다. 엄마가 나를 지하철역으로 데리고 갔었다. 나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였다. 그곳에서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 지르라는 것이었다. I can do it. 나는 할 수 있다고. 나는 엄마가 원하는 대로 쉽게 미치지 못했다. 머리를 숙인 채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엄마가 사람들 앞에 나서서 외쳤다. 여러분, 여기 용감한 어린이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영어 연설을 들려드리겠답니다. 자, 박수를 주세요. 그 순간부터 나는 사람들의 시선에 붙들린 한 마리 원숭이가 되고 말았다. 내 얼굴은 원숭이 엉덩이만큼이나 시뻘갰다. 죽을 맛이었다. 엄마는 나를 노려보았다. 썩 나서지 못해! 배고픈 암사자 아가리가 떠올랐다. 조금만 더 지체하면 잡아먹을 것 같은 눈이었다. 나는 엄마가 나를 그렇게 몰아세운 까닭을 한참 뒤에 알게 되었다. 우연히 엄마의 수첩을 보게 되었다. 그 속에 신문 광고 쪼가리들이 끼워져 있었다. 형광 펜으로 그어진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수치심만 털면 영어의 입이 열린다'. 그랬다. 엄마는 나에게 그 광고처럼 부끄러움을 모르는 번대로 만들려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영어 잘 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랬던 것처럼 엄마는 특히 신문 광고에 민감했다. 광고는 또 어찌그리 많은지, 자고 일어나면 영어관련 전면 광고였다. 무슨무슨 영어전문학습지, 영어동화학습, 영어전문학원, 연극으로 배우는 영어, 운동경기와 함께 배우는 영어회화, 벼라 별 것들이 많았다. 그에 따라 엄마가 나에게 요구하는 것도 달라졌다. 지하철역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새로운 광고가 나오면 새로운 영어 터득 법을 나에게 소개했다. 그리고 내 의사와 상관없이 그 방법대로 공부하라고 다그쳤다. 그 때문에 나는 새 광고가 나올 때마다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내 생각에는 내 영어 공부보다 엄마부터 이성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영어 때문에 수난을 당하는 나도 나지만 엄마가 불쌍했다. "너, 아빠가 돈을 어떻게 벌어오는지 알기나 하니?" 엄마의 말에 나는 단번에 수컷 늑대를 떠올렸다. 나는 사람 행동에서 동물의 행동을 즉각 떠올린다. 동물 그림에 빠져있는 기간이 길었던 탓이다. 사냥한 먹이를 물고 집으로 돌아오는 수컷 늑대. 먹이 경쟁이 심해서 그런지 요즘에는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씩 집에 들른다. 점점 살기 힘든 세상이라고 하면서. "너 나하고 약속한 거 잊은 건 아니겠지?" 어떻게 잊는단 말인가. 대회 성적이 좋지 않으면 내 혀를 자른다는데 ….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났다. "혀가 토막 날 지 모르는 일인데 어떻게 잊어요." 내 대답은 삐딱했다. 엄마가 나를 흘겨보았다. 아파트 정문 앞에서 노랑 버스를 기다리다 나는 장지 하나를 펴서 하늘로 날렸다. 퍼큐(Fuckyou)였다. 그건 서양 사람들의 욕이었다. 내가 한길 가에서 펴큐를 하다니 ….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이런 내 모습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영어를 배우려는 자세가 좋다고 흐뭇해 하실까. 가기는 가야 할 것 같다. 학교와 집에서 기분을 망쳤다고 영어 수업을 빼 먹을 수는 없었다. 9월 29일은 영어 말하기 대회가 열리는 날이다. 이 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죽었다 깨어나도 내 실력으로 일 등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한다. 멍하게 입만 벌리고 있다가 칼 맛을 볼 수는 없지 않은가. 혀를 수술해보라고 권유한 사람은 매직이었다. 그는 내가 다니는 영어 전문 학원 원장이었다. 그곳에서는 청소 아줌마부터 원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영어 이름으로 불렀다. "조지 어머님, 조지가 구강 구조 때문에 영어 발음에 장애를 받고 있다는 것 모르셨지요. 우리나라 사람 중에 우랄 알타이계 인종의 혀의 특성을 고스란히 지닌 이가 있어요. 우리 학원 전문 강사들이 진단한 보고서에 따르면 조지가 그래요. 그걸 해결하지 않고는 유학을 간다해도 완벽한 발음이 어렵다는 군요." 학원에서 나는 기치가 아니라 조지였다. 엄마는 조지 엄마가 되었다. 내가 다니는 학원은 새로운 교수법을 개발했다고 떠버렸다. 수강료는 다른 학원의 두 배였다. 엄마는 내리 이 년 동안 나를 그 학원에 다니게 했다. 그런데 내 영어 회화 실력은 거기서 거기였다. 엄마는 꾐에 빠졌는지 모른다고 의심을 품었다. 그러던 차에 쏟아져 나오는 영어 광고들이 엄마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광고 내용들은 이랬다. 솜털 보송보송한 아이가 일 년 만에 미국인처럼 말하게 되었다. 우리 학습지로 공부를 한 뒤에 해외 여행가서 외국인에게 말을 걸었더니 외국인이 깜짝 놀라더라. 지금은 영어에 자신을 얻어 유학 준비중이다. 이런 식이었다. 엄마 역시 광고들이 허풍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도 피 같은 돈이 공중으로 사라졌다는 것 때문에 속을 끓였다. 엄마는 학원 광고지를 움켜쥐고 학원 사무실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대형할인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아들 공부를 감독하는 주부에게 호락호락 당할 그들이 아니었다. 혀가 너무 길어서 영어 발음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사실은 조지가 다닌 기간만 공부해도 미국인처럼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조지는 r과 l을 구별해서 발음할 구강구조를 가지고 있지 못해요. 제가 잘 아는 전문의가 있긴 한데 수술비가 만만치 않아서요." 매직은 자기가 그렇게 말하면 엄마는 닭 쫓던 개가되어 체념할 것으로 알았을 것이다. 매직은 우리 형편이 그리 넉넉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매직의 말이 엄마의 귀에는 이렇게 들렸던 모양이다. 영어 때문에 안정된 직장을 마련한다는 것은 이제 물 건너갔네요. 이렇게 되니 물러설 엄마가 아니었다. 며칠 간 드러누워 있던 엄마가 벌떡 일어났다. 뜻밖의 방문객을 맞은 원장은 이렇게 말하더란다. 의사가 미국에 체류중이래요. 당분간 기다리셔야 하겠어요. "엄마, 원장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드세요?" 냉정하고 치밀한 머리로 사태를 파악해버린 내가 엄마에게 정색을 하고 말했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의사가 귀국하는 대로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말할 뿐이었다. "전, 영어 못 해도 상관없어요. 도마뱀처럼 긴 혀로 그냥 살래요. " "이 철딱서니 없는 것아. 영어 못하면 사람 구실 못한다고 내가 몇 번을 말하든. 너 혹시 수술이 두려워서 그러니? 걱정 마. 매직 원장이 그러는데 혓바닥 아래 부분을 절개해서 혀를 살짝 구부러지게 할뿐이래. 배도 가르고 머리까지 짜개는 사람도 많은데 사내 녀석이 떨긴 뭘 떠니." 엄마의 의지는 확고부동했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기회를 달라고 했다. 학교에서는 해마다 영어 말하기 대회를 열었다. 내가 그 대회에 참여해서 결과를 본 뒤에 결정을 하면 어떻겠냐고 졸랐다. 엄마가 말했다. "시시한 대회니까 그럼 일 등을 해라. 할 수 있겠냐?" 나는 피그르 웃고 말았다. 엄마의 말은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회에 한 번도 나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상이라고는 구경도 못했었다. 우리 학교에는 외국에 살다 귀국한 아이들이 꽤 있었다. 내가 일 등을 하려면 그 애들을 모두 물리쳐야 했다. "상만 받으면 되는 걸루 해줘요. 네에 엄마. " 그래서 삼 등 안에 들면 수술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그 영어 말하기 대회가 이 주 앞으로 다가와 있다. 초조하고 불안하다. 그래서 나는 한길에 서서 세상을 향해 퍼큐를 날렸던 것이다. 이쯤에서 내가 동물 그림을 그린 이유를 좀 더 분명히 해야 하겠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에소그램(ethogram)은 동물을 관찰할 때 동물의 행동 양태를 상세한 그림으로 조사한 기록이다. 동물의 생김새는 물론이고 먹이 습성이나 짝짓기, 영역 다툼과 사냥 기술 그리고 무리와 개인간의 친밀도 같은 것까지 나타낸 그림이다. 그런데 그림만으로는 완전할 수가 없었다. 미진한 내용은 글로 설명을 덧붙이게 된다. 그래서 에소그램이라고 하면 그것에 덧붙이는 설명까지 포함시키는 일도 많았다. 그런데 동물들의 습성을 기록할 때 쓰는 도구를 왜 인간에게 적용했느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것도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를…. 나 역시 엄마의 젖가슴에서 체온을 물려받은 인간이다. 고민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끙끙 앓는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나와 같은 방을 쓰던 기세 형이었다. 사촌 기세 형은 집이 시골이었다. 내 방에 빌붙는 형식으로 우리 집에 들었다. 올 봄의 일이었다. 나는 내킬 리가 없었다. 그러던 내가 순식간에 달라지고 말았다. 형이 다롱이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 때문이었다. 관심을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다롱이에게 눈을 대어놓고 있었다. 돈 버는 일에만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았던 어른 남자가 애완용 개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하기는 내가 형의 입주를 막고 싶어도 이미 결정되어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기세 형의 좋은 점을 찾아내려고 내 쪽에서 전전긍긍했었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구실일지 몰랐다. 이렇게 해서 형과 나는 한 이불 속에서 지내게 되었다. 서로의 사타구니에 손을 집어넣기도 하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형이 다롱이에게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전공과목 과제를 해결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한 학기 동안 동물을 관찰하면서 동물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형의 작업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바로 저거구나 싶었다. 어쩌면 저것으로 내 혀를 구할 수도 있겠다. 나는 동물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난 당할 내 혀의 모습을 그림과 글로 기록해서 사람들에게 하소연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엄마의 비인간적인 행동에 대한 내 나름의 방어법이었다.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그렇듯이 나는 그렇게 좀 엉뚱했다. 나의 동물 그림은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발상에서 싹이 자랐다. 그 당시 내 생각은 이러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식의 몸에 칼을 들이대는 비인간적인 어미의 행실을 세상에 고발해야 한다. 엄마는 짐승이나 다름없다. 아니 짐승보다 더 모질었으면 모질었지 덜 하지 않다. "엄마, 나 수술 잘못돼서 아이스크림 못 핥으면 어떡해?" "엄마, 나 반벙어리 되는 거 아냐?" 혀에 칼을 대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애걸복걸했건만 엄마는 내 애원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인정이라곤 손톱만큼도 없었다. 짐승이었다. 엄마의 짐승과 같은 행위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야 했다. 내 혀가 수술을 면할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보였다. 사람들에게 알리려면 그럴듯한 자료가 필요했다. 나는 자료를 확보하려고 이를 악물고 동물 그림을 그렸다. 내 동물 그림은 엄마의 비인간적인 행위를 폭로하는데 필요한 증거 수집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동물 그림은 하나 둘 늘어났다. 그런데 신기했다. 그것들을 가만 들여다보면 새로운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인간들은 자기 스스로 위대한 종족이라고 생각한다. 짐승들과 비교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많다. 그렇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사람도 어쩔 수 없이 짐승이다. 내가 사랑했던 우리 엄마를 보아라. 얼마나 잔인한 짐승인가. 엄마가 집을 비우는 날이면 나는 팔을 걷어붙이고 동물 그림을 그렸다. 실패를 거듭한 끝에 내 공책에는 제법 그럴듯한 그림들이 채곡채곡 쌓여갔다. 동물로서 엄마의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세상 물정도 좀 알게 되었다. 혀짜래기가 존경받는 세상이었다. 나는 클래식보다 가요를 좋아한다. 그래서 가수들이 좋다. 특히 나와 같은 세대인 십대 가수들은 신 같은 존재로 보였다. 그런데 그들 중에 혀짜래기가 더러 있었다. 교포 2세들이었다. 그들은 우리말이 서툴러도 너무 서툴렀다. 그런데 그들이 방송을 타면 인기가 더 치솟았다. 이상한 일이지 않는가. 그 이유를 곰곰이 따져보았다. 우리말이 서툴다는 것을 뒤집어 말하면 영어는 잘한다는 말이 된다.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영어 열등감에 젖어 있는 아이들이 우리말이 서툰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이었다. 쟤들은 영어 잘하니까 미래가 보장되어 있을 거야. 이렇게 뒤틀려진 세상도 내 동물 그림에 담고 싶었다. "형, 이거 내가 세상에서 처음으로 시도하는 거지?" 형에게 동물 그림 공책을 들킨 날 나는 그렇게 물었었다. "아니, 영국 동물학자 중에 너보다 한발 먼저 시작한 사람이 있어. 그렇다고 해도 기치 너는 대단한 놈이야. 인간이 숨겨두고 싶은 것들이 네 그림에서 언젠가는 옷을 벗을 것 같애. 넌 기질을 타고났어, 혁명가 기질. 네 작은 혁명이 성공하길 빌어." 영국 사람 중에 앞서 간 사람이 있다고 했다. 나는 은근히 실망을 했었다. 하지만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나와 뜻을 같이하는 동지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힘이 되었다. 나는 용기를 얻어서 동물 그림을 열심히 그렸다. 영어 학원 숙제 때문에 잠자리에 들 수가 없었다. 12시, 졸리는 눈으로 영어 일기를 쓰고 있었다. 재미없고 어려우니까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왔다. "기치야, 아빠 왔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버지의 커다란 목소리였다. 집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귀가 번쩍했다. 요즘 아버지는 이삼 일에 한 번쯤 집에 들르신다. 도둑 고양이였다. 밤에 들렀다가 날이 밝기 전에 집을 나갔다. 하는 일이 무척 바쁘다고 하시면서. 언젠가 물을 마시려 주방으로 들어서다 나는 뒷걸음질을 쳐야했다. 식탁에 시커먼 등으로 앉아있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런데 오랜만에 가솔들을 호령하는 수사자의 포효를 들을 것 같다. 반갑다. 비록 술에 기댄 용기라 해도 아버지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남자 대 남자로서 고민을 털어놓고 싶었다. 나는 부리나케 거실로 달려나갔다. 아버지의 몸에서 단내가 확 풍겼다. 내가 인사를 하는 사이에 안방에서도 문이 열렸다. "저녁은 드셨겠지요?" 굴 바깥이 궁금해서 머리를 내미는 암컷 늑대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한 마디 내뱉고 굴속으로 되돌아 들어가 버렸다. 도둑고양이 정도는 얼마든지 코방귀로 잠재울 수 있다는 태도였다. 처음 보는 광경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출퇴근이 일정하지 않게 된 뒤부터 우리 집은 그렇게 변하고 말았다. 당당하게 소파에 앉아서 여보, 나 배고파, 이렇게 말하는 아버지를 볼 수가 없었다.나는 닫혀지는 안방 문을 바라보다 목소리를 낮춰 아버지에게 말했다. "인생 상담 좀 하고 싶은데요." 아버지의 눈이 잠시 일렁거리더니 껄껄 웃었다. "인생? 그 조오치. 네 방으로 가자." 아버지의 혀는 꼬부라져 있었다. 요즘에는 술을 입에 댔다하면 정신을 놓아버릴 정도로 과음하셨다. 그 때문에 엄마는 아버지를 더 미워했다. 그런데도 왜 술을 드시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가 내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큼지막한 손이었다. 따뜻했다. 아버지가 벽에 등을 대고 먼저 앉으셨다. 왠지 모르게 엉거주춤한 자세였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바로 앉아, 임마. 오밤중에 니 애비 제사 지낼 참이냐?" 시간은 자정이 넘어 있었다. 바로 앉으라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무언인가 서늘한 것이 가슴 한복판을 쓰윽 지나갔다. "아버지는 술 마시고 영어하면 잘 하시겠네요." 약주 많이 드셨네요, 이런 뜻의 농담이었다. 내 딴에는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서 한 말이었다. "영어? 그래. 잘해야지. 그것으로 사람의 능력을 재는 시대니까." 영어 얘기가 나오자 아버지의 말은 또렷했고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잔뜩 꼬부라졌던 혀가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수술하고 우리말까지 버벅거리게 되면 어떡하지요?" 영어는 영어대로 망치고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는 혀짜래기가 되면 어쩌나 싶은 게 내 걱정이었다. 그것은 내 인생을 망치게 할 일이었다. 아버지는 엄마보다 세상을 보는 눈이 넓으니까 나에게 도움을 줄지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한 말이었다. "얘기 들었다. 그런다고 영어 발음이 잘 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어쩌자는 건지, 원." "그렇지요?" 이번에는 내가 아버지 앞으로 다가가 아버지 한 손을 덥석 잡았다. 원군을 만난 셈이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내 혀 수술에 더 적극적이라고 했다. 그런데 엄마가 지어낸 말이지 않는가.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 아버지는 나머지 손으로 내 등을 토닥거렸다. "도와주신다는 말이지요? 그렇죠?" "못난 애비 탓이다. 너희 엄마가 네 혀를 어쩌겠다고 한 것도…. 너희 엄마,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모진 사람 아니다. 수술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간여하지 않아도." "고맙습니다. 아버지는 역시 아버지시네요. 감사 드려요." 나는 방바닥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어리둥절해 있는 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방문을 나서면서 물기 젖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런 게 아니라도 먹고살려면 허리띠를 졸라매게 될 텐데…." "무슨 말씀이세요?" "날 밝으면 엄마한테 물어보거라."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버릇이 되어서 그런지 영어 테이프를 켜 두지 않으니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을 자면서도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말이 광고에 실린 적이 있었다. 엄마는 그것이야말로 효율적인 학습법이라고 하면서 매일 밤 내 머리맡에 영어 테이프를 켜놓았다. 인간의 의식에는 의식과 무의식이 있는데 그 무의식에 영어를 심어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 꿈자리는 언제나 뒤숭숭했다. 밤사이에 미국까지 날아갈 때도 있었다. "영어 회화 잘 하면 디즈니랜드 데려갈 게." 엄마는 그 말을 수도 없이 했었다. 회화만 된다면 미국 여행을 하자는 것이었다. 드디어 그 꿈이 이뤄졌다. 말로만 듣던 아메리카였다. 지하철역에 홈리스라 불리기도 하는 거지들이 모여 있었다. 거지인데도 그들은 영어를 잘했다. 나는 그것이 억울했다. 미국 사람들은 거지들도 영어를 잘 하는데 왜 우리는 대학까지 마쳐도 입도 뻥긋 못하지 않는가. 영어 공부에 목을 매지 않아도 되는 미국 거지가 되고 싶었다. 꿈속에서 나는 머리가 노랗고 곱슬곱슬했다. 나는 조지였다. 머리가 띵했다. 내가 조지로 깨어난 것인지 기치로 깨어난 것인지 헷갈렸다. 오늘도 여전하다. 거실은 혀가 꼬부라진 말들이 점령하고 있다. 언제나 그렇다. 영어가 둥둥 떠 있는 아침 공기를 마시고 영어 소리가 득실거리는 방에서 잠자야 했다. 그것이 열 세 살 내 삶이었다. 나는 영어 소리 정글을 헤치고 씩씩한 발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조지가 아니라 기치라는 생각에서. 간밤에 아버지에게 들은 말을 서둘러 확인하고 싶었다. "아버지 출근하셨어요?" 궁금한 걸 물어보기 위해 알면서 해보는 말이었다. "새벽에 일어나니 계시지 않더라." "엄마, 혀 수술 안 해도 되지요? 아버지가 엄마한테 물어보라던데요." "한잔 걸치고 와서 어린것한테 할 소리 안 할 다 했나 보네. 너희 아버지 영어 귀머거리에다 벙어리여서 회사에서 밀려났다는 말은 안 하디?" "네에?" 엄마가 씁쓸한 웃음을 웃었다. 혀 꼬부라진 말들이 우리 거실을 점령한 아침이었다. 처음 동물 그림을 시작할 무렵에는 나는 교육부 대신이나 황제를 떠올렸었다. 영어 때문에 생기는 문제니까 그들에게 내 동물 그림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데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임명받은 뒤 한 해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는 대신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리고 황제는 영어를 공용어로 정했으면 하고 생각을 비쳤던 적이 있었다. 그들에게 내 귀중한 동물 그림을 보낼 수 없었다. 그래봐야 내 그림을 쓰레기로 취급할 테니까. 그렇다면 사회 문제에 적극 참여하는 대학생들에게 보내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기세 형은 반미 시위에도 참여한다. 하지만 기세 형도 영어 얘기로 접어들면 꼬리를 내리고 만다. 토익인지 토플인지 점수를 따야 한다고. 점수를 따지 못하면 대학 졸업도 못하게 해놨다고. 동물 그림을 내어놓을 곳이 없어졌다. 그렇지만 나는 동물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었다. 동물 그림을 통해서 나는 새로운 것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엉뚱한 생각에서 시작된 그 일이 엉뚱한 결과를 낳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인가 하면 인간을 동물로 생각하고 관찰해 보니까 한동안 가려져 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존엄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서로 많이 먹으려고 싸우고, 먹이를 먹었으니 똥 싸고, 위협을 느끼면 꽥꽥 소리 지르고, 새끼를 낳아 튼튼하게 길러내는 짐승의 모습, 그것이었다. 어린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려 했다. 그래서 우리는 동물의 울타리 바깥으로 뛰쳐나와 있었다. 내 동물 그림은 인간을 그 울타리 안으로 다시 밀어 넣는 작업이었다. 내가 처음 동물 그림을 그린 목적은 이루기 어려웠지만 나는 인간의 비밀스러운 뒷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동물 그림 작업을 그만두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변화 중의 변화는 내가 엄마를 다시 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내 영어 공부에 목숨을 거는 듯한 행동 그리고 그것을 위해 내 혀에 칼을 대려는 엄마는 분명히 비인간적인 모습이었다. 비인간이니까 동물이었다는 말이다. 아버지의 실직을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는 엄마의 몸부림은 어미로서 새끼를 사랑하는 동물적인 모성 그것이었다.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내 혀에 소독한 칼날이 들어오고 말 것 같다. 나는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이다. 그 눈물이 내 살 속으로 파고 들어와 살이 되기를 바라면서 나는 어금니를 깨물려 한다. 동물 그림들이 당당한 수컷으로 수술대 위에 누울 수 있도록 나에게 용기를 준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두려움이 앞선다. 나는 아직 열 세 살 짜리 어린 수컷인가 보다.
대밭골의 폐교에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멈춘지 오래다. 가끔 스쳐 가는 바람이 심심풀이로 종을 뎅뎅 치거나 산새들이 놀러와 재잘거리며 마을의 소식을 이야기할 뿐이다. 그런 폐교에도 봄은 찾아오고, 새싹들이 돋아나 봄을 수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폐교의 한 쪽에 아직도 산뜻한 봄을 맞이하지 못 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화단 한 구석에 버려지듯 놓여 있는 독서하는 소녀상이다.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얼룩과 먼지를 가득 뒤집어 쓴 소녀상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예전처럼 아름답고 새하얀 모습이 아니다. 소녀상이 들여다보고 있는 책갈피에도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다. 그런데다가 며칠 전 까치들이 들려주던 이야기는 소녀상을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여기에 도시의 유명한 조각가가 이사온대요. 이 곳을 깨끗이 정리하고, 아름다운 조각 전시장으로 만든다는데요." 마을의 소식을 누구보다도 빨리 알려주는 까치들이 느티나무에게 날아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요란스럽게 떠들어댔다. "뭐라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조각 작품 못지 않은 멋진 몸매를 보란 듯이 자랑하는 향나무가 호들갑스럽게 몸을 떨었다. "향나무님이 무엇 때문에 걱정이셔요.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분을 누가 미워하겠어요? 없어진다면 지저분한 저 소녀상이나 없어지겠지요." 까치들은 마치 소녀상이 없어지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소녀상을 흘낏흘낏 쳐다보며 까각까각 깍깍 떠들어댔다. 소녀상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가슴이 내려앉는 소리가 '쿵'하고 들리는 것 같았다. 그 날 이후로, 소녀상은 책을 보려 하여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던 즐거운 추억들만이 하나씩 떠오를 뿐이었다.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소녀상의 마음에 가장 또렷이 남아 있는 추억을 든다면 기원이와의 추억일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기원이를 떠올릴 때면 가슴이 뻐근해지곤 했다. 조용히 눈을 감은 소녀상의 머리 속에서 기원이와 처음 만난 날의 모습이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기원이와 만나 우정을 나누기 시작한 그 때도 지금처럼 연둣빛 새싹들이 파릇파릇 피어나던 봄이었어.' 소녀상이 이 학교에 온 다음 날 체육시간이었다. 공차기에 끼지 못한 한 아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소녀상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의 걸음은 조금 절룩거렸다. 소녀상에게 다가온 아이는 조용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소녀상아, 반갑구나. 내 이름은 기원이고 사학년이야. 우리 부모님이 저 매봉에 기원을 많이 해서 나를 낳으셨다는구나. 그래서 내 이름도 기원이라고 지었대. 참 좋은 이름이지? 그런데…." 자신을 소개하던 기원이가 망설였다. '그런데?' 소녀상은 그런 기원이의 다음 말이 궁금해졌다. 그러나 소녀상은 기원이의 말을 재촉하기보다는 예쁘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기다려줬다.머루알처럼 새까만 눈망울을 반짝이며, 한참 동안이나 소녀상을 바라보던 기원이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너의 친구가 되고 싶은데......." 소녀상은 기원이의 말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뭐, 친구? 너뿐만이 아니라 이 대밭골 아이들이 이미 내 친구들이잖아.' "아니, 아니. 그런 친구 말고!" 기원이는 소녀상의 마음을 훤히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도리질을 했다. '그러면 어떤 친구란 말이니?' 소녀상은 기원이의 말에 점점 흥미가 느껴졌다. "네가 보는 것처럼, 애들은 축구나 달리기 시합을 할 때면 나를 편에 끼워주질 않거든. 혼자 나무 그늘에 앉아 애들 노는 모습이나 구경하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면 조금은 슬퍼지는 거 있지? 이런 내 마음을 너는 잘 알아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 너는 책을 많이 읽으니까, 생각도 깊을 테고 친구를 위한 마음도 넓을 거야. 그래서 오늘부터 너와 속마음을 털어놓는 친구가 되고 싶어." 기원이는 자못 진지했다. '그랬구나. 그런 네 마음도 모르고 재미있어만 해서 미안해. 내가 이 곳에 온 것도 이 곳 아이들이 모두 너처럼 책을 좋아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것이란다. 우리 멋진 친구가 되어 보자.' 소녀상은 자신을 찾아와 준 기원이가 고마워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선뜻 대답을 했다. "소녀상아, 정말 고마워!" 기원이는 파릇파릇한 새싹만큼이나 싱그러운 웃음을 날리며 책을 펼쳤다. "너와 함께 있으니까 마음이 무척 편한 걸. 우리 내일 또 만나자."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에야 책을 덮은 기원이는 기지개를 한 번 크게 한 후 소녀상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고 있는 기원이가 절룩거리며 걸을 때마다 길게 누워 있는 그림자도 크게 흔들거렸다. 멀어져 가는 기원이를 바라보는 소녀상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도 네가 정말 맘에 들어. 모든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야하지만, 나에게도 깊은 속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 할 친구가 필요하다구. 우리 좋은 친구가 되어보자.' 그 날 이후, 기원이와 소녀상은 돌탑을 쌓듯이 우정을 차곡차곡 쌓아가기 시작했다. 기원이는 틈만 나면 소녀상 곁으로 와서 책을 읽으며 놀았고, 다른 아이들에게는 비밀로 했던 이야기도 소녀상한테는 허물없이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 기원이는 다리가 불편한 대신 다른 애들이 갖지 못한 재주가 많았다. 만들기 대회나 글짓기 대회에 나가면 꼭 상을 타오곤 한다. 언젠가는 어린이 신문에 보낸 글이 특선으로 뽑혀서 상으로 배달된 여러 권의 동화책을 전교 어린이들이 보는 앞에서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전달받기도 했다. 그런 기쁜 일이 있을 때마다 소녀상이 기원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예쁜 미소를 지어주는 일이었지만, 기원이는 늘 즐거워했다. 소녀상은 그런 기원이가 곁에 있어 늘 행복했다. 소녀상과 깊은 우정을 쌓아가던 기원이가 육학년이 되던 해 봄이었다. 어느 날, 풀이 죽은 모습으로 소녀상에게 다가왔다. '기원아. 친구랑 싸웠니? 부모님한테 야단이라도 맞았니? 말 좀 해 봐. 응?' 소녀상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원이는 아무 대답이 없이 소녀상을 우두커니 바라보기만 했다. 소녀상은 그런 기원이가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그리고 궁금증이 더해 갔다. 그러나 기원이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여러 날이 지나도록 입을 떼지 않고 지내던 기원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소녀상의 발목을 잡고 속삭였다. "소녀상아, 오늘은 너한테 작별 인사를 하러왔어." '뭐? 작별 인사라고?' 소녀상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래,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됐어." 농사를 짓던 기원이 아버지가 도시에 가게를 차려 이사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소녀상아, 그 동안 정말 고마웠어. 다시 돌아올게. 소녀상아, 그 때까지 나를 잊지 말고 기다려 줘." 소녀상에게 기댄 기원이의 볼에서는 맑은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소녀상도 가눌 수 없을 만큼 슬픔이 컸다. 눈물을 참느라고 손가락을 내밀어 약속은 못했어도 마음속으로는 몇 번이나, '그래, 그래. 우리 다시 만나자. 그 때를 꼭 기다릴게.' 하고 대답을 했다. 그러나 그 후로는 기원이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벌써 삼 십여년 전의 이야기로구나. 이젠 기원이를 만난다 해도 알아볼 수가 없겠지만 기원이와의 우정도 아이들과의 아름다운 추억도 이제 끝나고 만거야. 이 곳이 조각 공원으로 바뀌는 날이면 나는 없어지고 말테니.' 소녀상은 기원이와 맺었던 우정을 떠올리다가 이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까치의 말대로 조각가가 이사오는 날이 되었다. 대밭골로 들어오는 산모퉁이에서 요란한 엔진 소리와 함께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트럭 몇 대가 보이더니, 이내 운동장으로 들어섰다. 소녀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잠시 후,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와 짐을 내리는 소리, 아직도 힘이 드는지 부릉부릉대며 트럭이 가쁜 숨을 토해내는 소리로 폐교는 모처럼 떠들썩했다. 소녀상은 이 모든 소리들이 자신을 비웃는 소리로 들려와, 더욱 초라해지고, 부끄러워져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까치들 말대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소녀상은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잠시 후, 소녀상은 자신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자신을 어루만지고 있는 이는 턱수염을 기르고 빵모자를 쓴 중년 남자였다. 한 동안 아무 말 없이 소녀상을 어루만지던 그의 볼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그렇게 말없이 있던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소녀상아! 내가 왔다. 내가 바로 기원이란다, 나를 잊은 건 아니겠지?" '기원이?' 기원이. 얼마 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던가. 소녀상은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늘 마음속에 그려보던 기원이가 이런 모습의 어른이 되었던가?' 예전의 앳된 기원이 모습은 아니었지만, 아직도 머루알처럼 새까맣고 맑은 눈망울과 한쪽으로 기우뚱한 불안정한 자세가 삼십여 년 전에 소녀상과 함께 독서하고 우정을 쌓았던 기원이가 틀림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 삼십여 년 전에 너와 우정을 나누었던 기원이야." 어려서부터 생각이 깊고, 손재주가 뛰어났던 기원이는 조각을 공부하여 유명한 조각가가 되었다. 자신의 조각 전시회가 열리고 있던 어느 날, 신문을 통해 소식을 들었다는 어릴 적 친구의 반가운 편지를 받고 그는 대밭골 학교가 문을 닫고 새 주인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 아름다운 학교가 문을 닫다니! 소녀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조각 공부에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고향을 너무 오래 잊고 살았어. 어릴 적 대화를 나누며 미래를 꿈꾸던 소녀상, 그 소녀상과의 약속대로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된 거야.' 눈을 감자, 대밭골의 학교 모습과 소녀상의 모습이 훤하게 떠올랐다. 그는 어린 시절에 자신의 꿈을 키워주었던 폐교를 구입하여 조각 공원을 꾸미고 그곳에 작업실을 마련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편지를 보내준 고향 친구에게 서둘러 연락하여 교육청과 의논하여 그 일을 성사시키도록 부탁한 끝에 드디어 그의 뜻을 이루었던 것이다. "소녀상아,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생활을 하며 살아왔단다. 너는 알겠지?" 그가 그러한 말을 하지 않더라도 소녀상은 알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윽한 그의 눈과 마디마다 굵게 불거져 나온 손을 보면서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그가 대밭골에 내려와 제일 먼저 한 일은 소녀상을 뒤덮고 있던 때를 말끔히 닦아내고 정성스럽게 페인트를 칠한 것이었다. 그러자 소녀상은 예전처럼 아름답고 새하얀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의 작업실이 된 교실에서 밤낮을 모르고 작업에 몰두한 끝에 첫 번째로 완성한 작품이 소녀상 옆에 세워졌다. 어린 소년이 독서하는 소녀상을 향해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는 대리석 조각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이었다. 소녀상은 다시 행복해졌다. 비록 지금은 아이들이 떠나고 없지만, 훌륭한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기원이가 유명한 조각가가 되어 훌륭한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땀 흘리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