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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신형식 / 상명대 사학과 초빙교수 동북공정이란 무엇인가 중국은 근자 동북공정이라는 국책 연구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고구려사를 중국의 소수 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라는 역사왜곡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서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한국의 고대국가에서 고구려를 아예 없애고 백제와 신라만 두고 있다. 이러한 역사 패권주의적 사고방식은 중국이 갖고 있는 고대적인 중화사상을 현대사회에까지 적용하여 조선족을 포함한 중국의 소수민족을 소위 그들의 ‘통일적 다국가론’에 편입함으로써 번영과 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는 쇼비니즘(Chauvinism)의 발상이다. 이번의 고구려사 왜곡은 자기 나라의 성격 해석을 외국의 문헌내용으로 설명할 때 왜곡과 오류가 있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에 신라가 왜에 조공을 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신라는 왜의 속국이 아니었다. 따라서 중국 문헌에 소개된 우리 역사를 기록대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와 당위성이 있다. 중국은 1980년대 이후 고구려사 중국 편입을 위한 계획을 세워 왔다. 그 결과 (張博泉, 1981)와 (孫進己, 1985) 등을 통해 이를 적극화하면서 1990년대에 들어와 (손진기, 1994)와 (장박천, 魏存成, 1998) 등을 내놓았다. 이어 2000년에 들어와서 (馬大正, 楊保隆 등)와 그 속편 그리고 (耿鐵華, 2002)를 통해 고구려사의 중국사 편입을 공식화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이 이러한 역사왜곡을 시도한 이유는 중국의 모든 소수 민족 중에 번듯한 모국을 가진 조선족에게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한편, 통일 후 간도에 대한 영토권 요구를 사전에 봉쇄하려는 정치적 계산이다. 따라서 동북공정의 시작은 고구려사 편입이며, 그 마지막 단계는 간도문제에 대한 영토분쟁의 사전 저지인 것이다. 중국이 추진하는 동북공정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①고구려는 출발부터 멸망까지 중국영토 안에 존재한 소수 민족이 세운 나라였음으로 중국의 지방정권이다. ②고구려는 중국에게 항상 칭신납공(稱臣納貢)의 신속(臣屬)관계를 가진 조공(朝貢)을 한 중국에 예속된 나라이다. ③수·당 전쟁은 고구려가 도전하였음으로 불가피하게 토벌한 국내 전쟁이다. ④고구려의 멸망 당시 인구가 70~80만 정도였는데, 이 중에서 포로, 전사, 납치, 도망자(신라·발해)를 제하면 10여만 명만 남았음으로 고구려인은 대부분 중국에 동화되었다. ⑤고구려는 고씨(高氏)왕조이고, 고려는 왕씨(王氏)왕조이므로 그 주인공이 달랐고 양왕조의 존속 기간과 지배지역이 다르므으로 서로 관계가 없다. 이러한 중국측 주장은 그들이 갖고 있는 중화사상을 자기식으로 우리나라에 적용한 것이다. 중국 최초의 정사인 와 에는 별도로 을 두었으며, 를 비롯한 중국의 문헌에도 동방의 이웃 나라(東夷傳)에 고구려, 신라, 백제, 일본 등을 함께 설명하고 있다. 고구려만 지방정권이라고 따로 기록하지 않았다.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면 백제, 신라, 일본도 같은 지위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문헌에도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기록이 없다. 중국 기록(, , )에 음식, 의복, 예절, 풍속이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같다고 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정복하였다는 사실은 고구려가 그들의 지방정권이 아님을 보여준 반증이 된다. 한 국가의 성격 파악에는 민족의 기원, 언어와 습관, 특히 생활풍습 등을 고려해야 한다. 고구려와 중국은 언어체계가 달랐으며, 3국은 다같이 이두문을 쓰고 있었다. 고구려인들은 중국인들과 달리 치마, 저고리를 입었고, 결혼시에 지참금(婚納金)이 없었으며, 윗사람을 공경하는 예의범절이 있었다. 고구려는 끝까지 중국의 정치제도를 채용하지 않았으며, 중국정부에 세금납부나 징병을 당한 일이 없다. 어디까지나 고구려는 중국의 세계질서에 도전하면서 그들의 동진(東進)을 막고 한반도를 지켜준 당당한 독립국이었다. 고구려는 고구려중심의 세계관을 갖고 있었으니, 그것은 스스로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웠으며(광개토왕비), 신라를 동이(東夷:중원고구려비)로 격하시킨 천하의 대국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중국의 주장은 중국은 만국의 중심, 천하의 중앙으로서 주변 지방(四方)은 중국의 정치적 신속(臣屬)관계를 갖고 있다는 논리에서 중국황제는 천하의 공주(共主)라는 데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근대사회의 영토(Territory)와 고대사회의 영역(Frontier)을 구분하지 못한 무지의 소치이며, 중국 중심의 전근대적인 사고를 현대사회에 적용시킨 것으로 마르크스주의가 20세기 말에 무너져버린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중국의 주장인 ‘고구려의 기원이 되는 고양씨(高陽氏) 후손의 거주지가 내몽고지역(노합하, 대릉하유역)이므로 중국의 소수민족’이라는 것은 그 성립 시기나 지역이 사실과 다르다. 즉, 고구려족의 계보가 고양씨라는 유사성이 문제가 아니다. 고구려가 출발한 곳은 내몽고지역이 아니라 만주의 장춘, 길림 지역이었고, 중국이 주장하는 그 문화는 고구려건국과 3000년의 차이가 있다. 즉, 중국의 홍산문화는 청동기문화이고, 고구려의 적석총문화는 철기문화이다. 둘째로 ‘고구려가 중국에 조공하였으므로 자신들에게 예속된 나라라는 것’은 조공의 의미를 잘못 해석한 것이다. 조공은 원래 주(周)나라에서 황제와 제후(諸侯)간에 있었던 주종관계였으나, 그것이 주변 나라로 확대된 고대의 외교방식이었다. 중국이 주변 나라의 왕을 책봉(冊封)하면서 정치적 우위를 나타낸 것이지만, 조공국의 국가적 정통성과 독립성이 저해된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의례적인 고대 외교의 한 형식이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분열기에 한 국가와 외교를 맺는 것이 아니라 중복된 관계를 가졌으며, 가장 극성기를 구가하던 장수왕(고구려)과 성덕왕(신라)이 가장 많은 외교사절(조공사)를 파견했다는 사실이 조공의 의미를 보여준다. 셋째로 ‘수·당전쟁은 중국에 도전한 것을 응징한 국내 전쟁이며 토벌이다’라는 견해는 당시 상황이나 전쟁의 내용을 외면한 허구적 표현이다. 고구려가 당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16년간이나 천리장성을 쌓았다. 그렇다면 자신의 속국이 본국에 맞선 방어책(천리장성)을 세울 때 보고만 있었겠는가 하는 반문이 있다. 더구나 고구려를 정복하기 위해 100만 대군을 동원했다면, 그것도 황제가 친히 앞장섰다면 그 전쟁이 국내 전쟁이 될 것인가? 정복전쟁을 일으키고는 그것이 국내 전쟁[討伐]이라는 궤변을 하고 있다. 당나라는 전쟁 직전에 고구려에 보낸 국서에서 ‘두 나라의 평화(二國通和)’라고 하여 고구려를 상대국으로 분명히 인정하고 있었다. 이미 233년 (동천왕7년)에 중국[吳]의 손권(孫權)은 고구려왕(동천왕)을 흉노의 왕인 선우(單于)로 봉하였다. 중국이 가장 두려워했던 흉노의 추장으로 임봉했으며 진귀한 물건을 보냈던 것이다. 넷째로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민이 대부분 중국인[漢族]으로 동화되었다’는 주장은 그 인원 파악에 근본적인 오류가 있다. 중국문헌에는 고구려 멸망시의 인구를 70만 호라 하였다. 당시 1호당 인구가 5명(전후)으로 파악하면 인구수가 350만이 되니까 이 수치는 잘못된 것으로 보았다. 그 대신 의 기록인 21만호에서 1/3(한족)을 제한 15만 호(70~80만 인)로 파악하였으며, 이 중에서 50~60만이 감소(30만 사천, 발해·신라 귀화 각각 10만, 사망자 다수)되었으므로 본토에 살던 고구려인은 거의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70년 전쟁(수·당전쟁: 598~668)기간에 고구려는 많은 인구의 감소를 가져 중국측 기록에도 유녀(遊女), 유인(遊人)이라는 남편 잃은 여인의 존재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 멸망 당시의 고구려 인구는 호당 3인으로 210만 인(70만 호)이라고 추정된다. 이 중에서 강제이주 42만, 피살 10만, 포로 8만5천, 고구려·해로의 귀화 각각 10만 등 80여만 명이 감소되었으므로 130~140만 명이 된다. 그러므로 이들은 고구려 옛땅에 남아 때로는 신라와 함께, 또는 자기들 스스로 대당항쟁을 주도한 것이다. 에 고구려 멸망 후 당에 항복하지 않은 성(城)이 목저성과 남소성 등 11개가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 멸망 후 계속된 대당항쟁은 곧 고토에 남아있던 유민들의 활동의 결과였으며,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북쪽으로 쫓아버릴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고구려와 고려왕조와는 관계가 없다’는 주장은 우선 국호에서부터 문제가 있다. 중국문헌에는 고구려를 고려로 불렀으며 발해나 고려의 왕들은 한결같이 고구려의 후신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송나라 때 고려에 온 서긍(徐兢)도 고려는 고구려의 후손이라고 하고 있었으며, 고려 태조(왕건)는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자 고구려의 서울인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하였다. 993년(성종12) 거란과의 전쟁 때 서희(徐熙)는 적장(소손녕)과의 대담에서 ‘고려는 고구려의 후손이므으로 나라이름을 고려라 하였다’고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중국인이 현대를 고대로 착각해서 나온 공상의 산물이다. 이러한 폐쇄적인 중국인의 낡은 의식은 20세기 말에 이르러 무너진 마르크시즘과 같은 한계와 과오를 범하고 있다. 세계화를 지향하는 21세기에 있어서 중국의 ‘쇼비니즘’은 시대역행의 회고적 망상과 국제적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우리는 중국의 주장이 모순과 오류라는 사실을 학술적으로 확인하고, 우리 고대사나 고구려사를 여러 외국어로 번역하여 제3국에 알려줄 필요가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중국이 국제적 고아가 될 수 있다는 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송상헌 / 공주교대 교수 동북공정이라는 중국의 역사 수정 시도를 계기로 역사교육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 내용은 7차 교육과정에서 근현대사가 선택과목이 되었다는 것, 역사 과목이 교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교과의 한 과목으로 통합되어 있다는 것, 절대 수업 시수가 축소되었다는 것, 역사교육의 강화 주장이 과목이기주의로 간주되고 있다는 것, 교과서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 세계사 교육이 황폐화되어 있다는 것 등 다양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대체로 역사교육이 홀대받고 있으며, 부실하다는 지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글에서는 활발하게 진행 중인 역사교육 논의에서 제기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세세하게 거론할 여유는 없지만, 현행 역사교육이 가지는 여러 가지 문제의 배경에 깔린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해 보고자 한다. 주로 역사교육의 질적 측면을 위주로 논의하면서 바람직한 역사교육의 방향을 가늠해 보려 한다. 최근 논의의 문제점 최근에 문제가 된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추진하고 있는 중국의 역사 수정 시도와 관련하여 역사교육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지만 제시되는 방안은 주로 수업시수를 늘리거나 교육내용을 확충하자는 등의 주로 양적인 문제에 치중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다양하게 제시된 양적인 확충 방안과 함께 논의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역사교육의 질적인 개선 방안이다. 중국의 역사 수정 시도를 보면서 당황스러운 것은 지금까지 학생들에게 자기의 관점을 가지고 이번 사태를 바라볼 수 있고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역사교육이 이루어져 왔는가 하는 점이다. 현실적으로 중국과 관련하여 역사전쟁의 사례를 소개한 내용도 없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사의 전개에서 고구려사가 중국사로 편입되는 것과 유사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그것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역사교육 내용을 찾기 어렵다. 더구나 역사라는 것이 본디 끊임없이 수정되는 것이고 수정된 역사의 객관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역사 담론의 적연성(plausibility)의 정도(degree)라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내용도 없다. 동아시아사를 시야에 넣고 역사적으로 접근하여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역사교육도 실행할 여지가 없다. 한 마디로 지금까지의 역사교육이 중국의 역사 수정 움직임과 같은 사태에 대응할 만한 능력을 키우는 것과 거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앞으로 이와 유사한 사태에 직면하더라도 그들의 이런 주장을 하나의 역사 담론으로 보고 역사적 맥락에 그 주장을 위치시켜 그것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고 그것이 가지는 적연성의 정도를 판단할 능력을 키워주는 역사교육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역사교육 논의 패러다임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문제의 소재 현행 역사교육이 가진 문제를 살펴보면 교육과정이나 제도와 같은 외부적인 조건에서 오는 것과 교과 내용이나 수업과 같은 내부적인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역사교육의 외부적인 조건은 현실적으로 정책을 결정짓는 의사결정 체계를 통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역사교육 담당자들이 간여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하지만 역사교육의 틀을 결정짓는 외부적 조건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소재를 분명히 할 필요는 있고 아울러 내부적 조건과 유기적 관련 하에서 문제를 부각시킬 필요도 있다. 역사교육 내부·외부를 막론하고 가장 근원적인 문제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역사교육의 본질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교육의 직접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과의 합의가 어려운 것도 문제이지만 관련당사자들 사이에도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도 큰 걸림돌이다. 이 문제에 대한 진단은 여러 가지로 내릴 수 있지만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근본 이유는 역사교과에 대한 관점의 불일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역사교육에 접근하는 시각은 다양할 수 있지만 본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역사교과관을 중심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 자국사 교육의 문제 우선 지적할 수 있는 문제는 역사교육 내부·외부를 막론하고 자국사 교육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정서가 광범하게 퍼져 있다는 점이다. 자국사를 포함한 역사교과를 여러 교과 가운데 하나로서만 생각할 뿐, 국민의 정체성이나 공동체 의식과 관련하여 역사교과가 가지는 특성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나 , 와 같은 예에서 보듯이 자국사 서술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고, 이나 와 같은 세계적인 기록유산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다. 이런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역사를 하나의 종교처럼 신봉해왔기 때문이고, 항상 자신의 전통과 시각에서 자국사를 포함한 역사를 정리해온 전통이 유달리 강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런 전통은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강대국이면서 신기할 정도로 오랫동안 통일국가를 유지해온 중국이라는 거대국가의 위협과 지정학적인 영향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외침 속에 생존을 위한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특히 우리는 유사 이래 인접국의 역사왜곡을 수도 없이 겪어왔기 때문에 자국사의 전통이 강할 수밖에 없었고 역사에 대한 애정 또한 남다를 수 있었다. 예컨대 중국은 기자 동래설에서부터 역대 사서의 을 통해 그들의 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기록한 사실이 있고, 와 같이 노골적으로 한국사를 왜곡한 전례를 가지고 있다. 일본은 로부터 일제 강점기나 최근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끊임없이 왜곡해 왔다. 이처럼 한국사는 중·일 양국과의 ‘역사전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험한 역사 경로를 거쳐 왔던 것이다. 이런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 선조들은 항상 자신의 전통과 시각에서 역사를 정리하려는 노력을 해왔고, 역사를 소중히 생각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강한 자국사 서술의 전통은 사라지고, 자국사 교육을 실용적인 목적에서 가르치는 교과와 다름없는 교과로서 취급하는 정서가 만연되어 있다. 고등학교 근현대사가 선택 교과로 결정되는 과정이 그런 정서의 대표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 정책 입안자들조차 우리의 역사 속에서 자국사를 중시하는 전통이 어떤 것이며 왜 그런 전통이 있었는지 고민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대로 간다면 고등학교에서의 자국사 교육은 유명무실하게 되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현행 교육과정에서 사회과 심화선택과목 가운데 하나인 근현대사의 경우 과목으로는 들어가 있지만 무시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자연계열 학생의 경우 수능에서 사회탐구 시험을 보지 않기 때문에 공부할 필요가 없고, 인문계열 학생은 비교적 쉽게 점수를 딸 수 있는 교과에 몰리게 되기 때문에 국사나 근현대사를 외면하게 되어 공부할 필요가 없게 되어 있다. 앞으로 자국사 교육은 비중이 점차 줄어들어 초라한 과목으로 전락할 것이 분명하다. 역사교과가 어떤 교과인지를 오해한 결과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런 배경에는 설익은 세계화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 자국사의 강조는 자칫 국수주의로 흐르게 되어 세계 시민의식을 함양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우려이다. 그러나 세계화는 후쿠야마가 말하는 세계가 하나의 모습으로 귀결되는 ‘역사의 종말’ 단계의 모습이 아니라 개별 국가의 문화가 보편으로 승화하는 ‘구체성의 보편화’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세계 시민의식은 진정한 자국사의 교육에서 함양된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다만 바람직한 자국사를 어떻게 서술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남는다. 세계사 교육의 실종 현행 교육과정 하에서 문제되는 것은 고등학교에서 세계사 교육이 실종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국사의 경우는 그나마 따로 편찬된 교과서를 가지고 있고, 비교적 상당한 수업시수를 배정받고 있지만, 세계사의 경우는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 6차 교육과정에서 고등학교 ‘공통사회’를 일반사회와 지리만으로 구성하여 세계사를 제외시킨 바 있었다. 교육과정 입안자들이 세계사는 필요 없는 과목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점에서 이런 일은 교육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7차 교육과정에서는 ‘공통사회’가 ‘사회’로 교과명이 바뀌었지만 전체 10개 대단원 가운데 세계사 내용은 한 단원에서 다루고 있고 그것도 시민혁명, 산업혁명에 대한 내용만 들어가 있는 형편이다. 사회 교과에 세계사를 끼워주는 형국이다. 심화 선택과목으로서의 세계사도 ‘한국근현대사’와 선택을 다투게 되어 있어 거의 선택될 여지가 없게 만들었다. 이런 결과로 자연스럽게 세계화 시대에 세계사는 전혀 가르치지 않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아주 어색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지 못하는 교육정책 당국자들의 정서에 있다. 세계사 교육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문제는 세계사 내용 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중국의 역사 수정 시도와 관련해서도 세계사를 교육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하지만 내부로 들어가 보면 세계사의 내용을 현행처럼 모든 나라의 역사를 관광 안내문처럼 나열할 것인지, 아니면 세계사의 흐름을 위주로 서술할 것인지는 상당한 논의가 필요한 주제이다. 이 경우 의제는 대개 서구 중심의 서술을 벗어나는 문제나 혹은 중국 중심의 동양사 서술을 벗어나는 문제로 설정된다. 하지만 세계사가 어차피 몇 줄기의 흐름으로 정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획기적으로 교과서 서술을 바꾸는 시도도 필요할 것이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세계사 교육이 개별 국가사의 단순한 종합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사회과 통합의 문제점 현행 역사교육이 가지는 본질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는 사회과 통합의 문제이다. 사회과 통합은 해방 이후 끊임없이 추진되어 왔다. 그간 많은 사람들이 사회과 통합을 반대해 왔지만 철회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 원인 중의 하나는 정책 당국자들의 통합 의지에 비해 비판의 논리가 빈약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간 사회과 통합에 대한 비판은 많았어도 심도 있는 비판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흔히 역사과가 사회과에 통합되어 있어서 문제라고 하는 동어반복적인 비판은 많지만 왜 그런지 논리적으로 따지는 일은 드물었다. 사회과에 통합됨으로써 공통사회 교사나 지리 혹은 일반사회 전공 교사가 역사를 가르치게 된다는 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견해도 설득력있는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고 판단된다. 사회과 통합이 미국식 발상이기 때문에 문제라는 지적도 타당성이 떨어진다. 정작 필요한 것은 이런 피상적인 문제의 지적이 아니라 왜 역사가 사회과에 통합되면 문제가 되는지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리있는 비판은 부족하고 통합 사회과가 문제라는 목소리만 높였기 때문에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과 통합의 진정한 문제는 역사교육을 보는 교과관이 잘못되어 있다는 데 있다. 지금의 교육과정 입안자들은 역사교과를 ‘사회과 역사’로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과 역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진 오해의 대표적인 예는 과거 사실을 가르치는 것이 역사교육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과거 사실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과거 사실은 시디롬이나 백과사전에 모두 실려 있다. 엄밀하게 말하여 교사가 역사 시간에 시디롬에 들어있는 역사적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수업할 필요는 없다. 역사교육은 과거 사실 이상의 그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고구려사에 나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사가 중국사로 편입되었을 때의 문제도 다루어야 하는 교과가 역사교과인 것이다. 사회과 역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진 역사교과관은 사회과 교과관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들은 사회과는 개념이나 일반화를 가르치는 교과이고, 이런 개념이나 일반화를 가르치는데 역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J. A. Banks가 주장하는 바, ‘혁명’이나 ‘변화’의 개념을 가르치기 위해 역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역사는 사회과에 통합되어야만 효과적으로 학습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이것은 역사교과에 대한 심각한 오해이다. 오히려 역사교과는 ‘혁명’이나 ‘변화’라는 개념을 활용하여 구체적인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등의 과정을 가르치는 교과이다. ‘혁명’ 개념을 가르치기 위해서 프랑스 혁명을 가르치는 것은 역사 수업이 아니고 사회 수업이다. 만약 혁명 개념을 이용하여 프랑스 혁명을 가르치려 한다면 사회과 역사로는 곤란하다는 의미이다. 역사교과는 과거 사실이라는 자료 더미에서 사실을 알고 그것에 관한 이야기(담론)까지 다루어야 하는 교과이다. 이런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사회과 통합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거나 푸념성 비판에 그쳐버리게 된다. 요컨대 역사교과가 사회과에 통합되면 안 되는 이유는 사회과의 교과 성격과 역사과의 교과 성격이 판이하기 때문이다. 만약 통합되어 서술된다면 역사를 이해하는 사고와 사회과 내용을 이해하는 사고가 다르고, 추구하는 교육목표도 달라서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게 된다. 교사 양성의 문제 사회과 통합과 교사양성제도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회과 역사라고 믿는 정책 입안자들의 고안물로 대표적인 것은 대학이나 대학원에 공통사회과를 설치하여 공통사회 교사를 양성하게 한 것이다. 사회과 역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과거 사실을 가르치는 것이 역사교과라고 한다면 공통사회 교사의 양성은 아주 효율적인 방안이다. 역사를 다른 전공자가 가르쳐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고 가르치기도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역사교과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의 경우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가 사학과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만족스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풍부해도 가르칠 궁리를 거친 ‘교사 지식’을 가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교사가 가르칠 궁리를 포함한 ‘역사교사 지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현행 교사양성기관의 커리큘럼도 손질해야 할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공통사회 교사의 양성이라는 발상을 한 것은 잘못된 교과관과 교사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통사회 교사를 양성할 수 있다는 발상이 논리적으로 취약하다는 것은 전문 교사양성기관 무용론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예컨대 적당한 역사지식을 갖춘 사람이면 역사적 사실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사범대학이라는 교사양성기관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경우 같은 강좌명이라도 사범대학에 개설된 강좌는 사학과 학생들의 강좌와 달라야 한다. 그것은 교과교육에 관련된 과목을 끼어 넣어 사범대학의 특성을 살리려는 정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범대학에서 개설되는 강좌는 사학사적 흐름을 강조해야 하기 때문에 사학과의 강좌와 다를 수밖에 없다. 어떤 역사적 사실을 배우는 경우 교사가 될 사람은 그 사실이 역사적 맥락에서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가 하는 점을 강조하여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문 교사양성대학의 존재는 역사에 관한 한 필수적이라고 본다. 역사학의 메타 담론으로서의 역사교육 기왕의 역사교육 담론은 획기적인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 한 시대적인 환경의 변화와 사회적 요구를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일찍이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정보 소통 환경의 변화는 일방적 소통을 전제로 한 전통적인 역사교육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적 제약도 크게 완화되어 대중들은 역사에 대해 더 이상 염증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공급자와 수요자의 상호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이 조성된 것이다. 이런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역사교육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 부응하는 역사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역사학의 메타 담론으로서의 역사교육’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은 역사학의 논의에 메타적으로 접근하여 논의 자체를 교육대상으로 삼고 역사 담론(discourse)을 통하여 교육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학 논의 자체를 문제화하는 역사화(historicization)가 필요하고, 전체 역사의 흐름을 설명하는데 특정한 사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밝혀내기 위해 맥락화(contextualization)가 필요하다. 이는 역사학과 역사교육이 구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중국의 동북공정의 경우를 수업할 때를 예로 들어보자. 교사는 학생으로 하여금 동북공정 움직임 자체를 역사적 맥락에 위치시켜 동아시아 역사 담론을 통하여 동북공정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말하자면 19세기 후반에서 오늘날에 이르는 전체 흐름을 역사적 맥락으로 잡았을 때 전반적인 흐름은 20세기의 뒤틀린 역사 구도를 바로잡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맥락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즉 냉전 해소 이후 나타난 흐름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까지 잘못된 것들이 점차 원상으로 회복되는 방향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 맥락의 흐름 속에서 당연히 중국이나 일본이 저지른 과오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되는 과정이 있게 된다. 1980년대 일본의 전후 반성이나 위안부 문제, 전후 보상 문제 등이 대두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아울러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나 우경화 경향은 이런 움직임에 대한 반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갑작스런 중국의 역사 수정 시도는 일본의 우경화나 수정주의 역사관이 대두한 배경과 마찬가지로 한반도를 둘러싼 20세기 역사의 질곡을 만들어낸 책임을 회피하는 전략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중국은 한반도가 뒤틀리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기 싫은 것이고, 그렇게 뒤튼 책임을 회피하려는 전략의 하나가 역사 수정 움직임으로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중국의 수정 시도는 한반도 통일 이후를 대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한반도의 통일 시도에 대비하는 정책이라고 볼 수 있게 된다. 같은 역사적 맥락에 간도 문제를 위치시킨다면 중국은 지금 상태로 고착시키거나 아니면 그 이상을 추구할 가능성이 크며 최소한 19세기 말 경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막으려 한다는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이런 해석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전근대 시기 중국의 대한 반도 정책은 한사군(漢四郡) 이후 분열 정책의 연속이었고 그런 사실을 바탕으로 추론할 때 중국이 한반도의 통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심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으로서는 현재 남북한 체제의 대립 구조가 거대 한국(Great Korea)의 출현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믿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역사담론은 현재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는 또 하나의 담론과 대비된다. 그것은 바로 한반도가 한국에 의해 통일된다는 예상 하에 통일 이후의 동북 지방의 영토 분쟁을 차단하기 위하여 동북공정을 하고 있다고 보는 역사 담론이다. 학생들은 이런 종류의 대비되거나 다양한 역사 담론을 경합시키는 가운데 역사 이해를 풍부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화, 맥락화, 담론 경합의 요구는 자체의 시점을 가진 관찰자의 입장에 서야만 총족될 수 있기 때문에 역사의 수요자(학생)와 공급자(교사, 역사학자)의 상호 소통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과정에서 학생은 역사 담론의 적연성(plausibility)의 정도를 판단하게 되고 나름대로 역사 이해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는 그 본성이 구성적이어서 현실적으로 특정 담론에 대한 비판의 기준을 정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따라서 역사 분쟁의 본질은 이런 역사 담론의 다툼이지만 그것이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기는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일본과 중국의 역사 수정 시도를 보면서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을 마련하여 상대를 설득하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지만 한계가 있다는 점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현안으로 부각된 문제를 긴 흐름의 역사적 맥락에 위치시켜 역사 담론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설득력 있는 담론으로 다투게 하여 대응하는 것이다. 동아시아에 속하는 한국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중국과 일본의 역사 수정 시도에 시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 역사적 진실을 무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만으로 대응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또 다른 강력한 무기는 우리가 처한 역사적 입장을 성찰하여 적연성의 정도가 아주 높은 동아시아 역사 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피해의 기억만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중국·일본에 비해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는 동아시아 역사 담론을 구성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앞으로 역사 교육은 역사 담론들을 비교, 판단하고 역사적 맥락 속에서 역사적 의미를 추구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역사 담론 교육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기순(서울 오산고 교사 / 시인) 그녀의 무덤 위치는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경수마을. 지금은 중부고속도 로가 바로 묘 앞을 널찍하게 내달리고 있지만, 20여 년 전 처음 찾았을 때는 지금 의 자리로 이장하기 전으로 봄이 한창일 무렵이었다. 논둑을 지나고 조팝나무 꽃 이 하얗게 피어있는 개울을 따라 봄기운을 실컷 느끼면서 걸어 들어갔다, 물기 오 른 버들가지로 호드기를 만들어 불기도 하면서 두어 시간은 걸린 듯하다. 나지막 한 능선이 동북향으로 뻗은 산자락 중턱쯤의 반응 달에, 후처와 합장한 남편과는 등을 지고 외따로 동떨어져 있었다. 사후까지도 시댁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영원의 세월을 고독과 한에 묻혀 지내고 있었다. 조선 시대에 자기 이름을 지녔던 여성, 허초희 난설헌은 1563년, 강릉 초당(草堂)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양천 허씨, 이름은 초 희(楚姬)이며, 당대의 문장가로 소문난 초당 허엽(許曄)의 셋째 딸이다. 난설헌( 蘭雪軒)은 당호(堂號)로서, 난초의 청초한 이미지와 눈빛처럼 맑게 살아가라는 의 미로 해석된다. 부친은 첫 부인 한 씨에게서 1남 1녀, 후처 김 씨에게서 봉(封)과 난설헌, 균(均) 등, 2남1녀를 두었다. 김 씨 소생 세 남매들은 서로 간에 정이 자 별하고 우의가 두터웠다, 아버지를 닮아 3남매 모두가 총명하고 세사에 밝으며 특히 문장에 뛰어났다. 부 친 엽(曄)과 난설헌, 《홍길동》의 저자인 균(均)을 가리켜 ‘동방의 3소(三蘇)’ 로 부를 정도로 일가족이 문장에서 대가의 경지를 이룬 것이다. 부모의 사랑과 정 성은 언제나 지극했다. 여자도 글공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부모의 배려로, 그 녀는 오빠인 하곡(河谷) 허봉의 친구 손곡(蓀谷) 이달(李達)을 집으로 모셔놓고 아우 균과 함께 글을 배웠다. 이달은 당대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꼽힐 정도로 당시(唐詩)에 능통한 이물이 었지만, 서자 출신으로서 벼슬에 나가지 못하고 초야에 묻혀 지내며 학문에만 몰 두하였다. 인륜에 반하는 적서차별의 부당성과 신분제도의 모순을 통렬히 비판하 고 천하를 유랑하며 자연에 묻혀 살던 인물이다. 난설헌과 균의 글 중에 자유분방 함이 나타나는 것은 스승인 이달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탓이기도 하다. 실의와 비통에 빠졌던 불행한 결혼 생활 난설헌이 결혼한 것은 14,5세로, 남편 김성립은 난설헌보다 한 살 위였다. 김성 립은 안동 김 씨 명문의 후예이나, 학문엔 관심이 없고 방탕을 일삼으며 술과 친 구로 젊은 나이를 허송하여 28세에 겨우 병과에 급제할 정도로 지극히 평범한 인 물이었다. 아예 홍 씨(洪氏)라는 여자를 첩으로 집안에 들여놓기도 했다. 남편의 외도와 방탕에 애원과 훈계도 하고, 부부간?금실을 유지하려 애써보기도 했으나, 애당초 학문이 높은 아내와 보통의 남편이 조화를 이루는 것은 불가한 일이었다. 재주나 능력을 무시하고 집안끼리 물건을 주고받듯 자녀의 혼사를 결정한 탓에 그 녀는 결국 불운한 끝을 맺고 말았다. 어울리는 부부로서의 만남이었다면, 내조와 외조가 상승의 힘을 얻어 남편도 더 성장할 수 있었고, 아내도 요절의 횡사는 없 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다. 비단치마 눈물 흔적 쌓여있음은 임 그린 일 년 방초 원한의 자국 거문고 옆에 끼고 강남곡 읊으니 배꽃은 비에 지고?문은 굳게 닫혔구나 달뜬 다락 가을 깊고 옥병풍 허전한데 서리 친 갈밭 저녁에 기러기 않네 거문고 아무리 타도 임은 안 오고 들못 위에 연꽃만 맥없이 지네 閨怨(규원) 규중의 한을 달래며 외로움을 풀어낸 시편이다. 고추 당초보다 맵다는 것이 시 집살이라고 하더라만, 시부모는 남편의 외도를 아내의 보필 부족 탓이라고 다그치 고 몰아쳤다. 이 같이 혹독한 냉대는 난설헌을 견디기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넣었 다. 더욱이 어린 남매를 의지하며 모정을 쏟았는데, 딸이 먼저 가고 이듬해에는 아들마저 잃는 비운을 당하고 말았다. 남편의 외도, 시가의 독선, 자식의 죽음, 이 세 가지 일을 모두 겪고 버티어 나가기는 어느 여자에게나 감당하기 힘든 일이 아니었던가 싶다. 난설헌 무덤 왼쪽 아래 두 자녀의 쌍분을 남겨두었으니, 자식을 잃고 실의에 잠긴 난설헌의 비통함을 가히 짐작할 만도 하다.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슬프고 슬픈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 마주보고 나란히 서 있구나 아! 너희 남매 가엾은 외로운 혼은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니 이제 또다시 아기를 낳는다 해도 어찌 능히 무사히 기를 수 있으랴 하염없이 황대의 노래 부르며 통곡과 피눈물을 울며 삼키리 哭子(곡자) 난설헌의 친정은 부친이 경상감사로 내려갔다 병에 걸려 상주 객관에서 죽고, 자신을 끔찍이도 아껴주던 오빠 허봉이 율곡을 탄핵하다가 함경도 갑산(甲山) 유 배 3년 만에 돌아오는 길에 금강산에서 객사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갔다. 아무리 안으로 삭이고 아픔을 시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하지만, 설상가상으로 겹쳐오는 불 행에 삶의 의욕이 꺾여갈 수밖에 없었다. 걷잡을 시간도 없이 밀려오는 현실의 복 잡다단한 일련의 사건들은 차츰 그의 건강을 해치게 되고, 쇠잔해지는 의지는 이 미 자신의 힘으로 지탱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난설헌은 에서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푸른 바다가 요지에 잠겨들고 푸른 난새 채색 난새에 어울리누나 스물이라 일곱 송이 부용꽃 떨어지니 서리 내린 달빛 속에 차기만 하네 夢遊廣桑山(몽유광상산) '한'으로 얼룩진 인생과 도교적 작품세계 그녀는 생전에 세 가지를 후회하고 탄식하였다. 여자로 태어난 것이 첫째요, 제 대로 된 남편을 만나지 못한 것이 다음이고, 조선 땅에서 낳아진 것이 셋째였다. 유복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가 결혼 후로는 여자의 길에서 한 치도 벗 어날 수가 없었다. 사내대장부로 세상에 나왔으면 그 형제들에서 보듯이, 자신의 재주와 이상을 마음껏 펼쳐보고 실현도 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남녀를 마음대 로 선택할 수는 없더라도, 이왕 결혼할 바에야 능력있고 재주있는 남편을 만났더 라면 수준에 걸맞은 대화도 가능할 뿐더러, 금실 좋은 부부로 해로하기를 바라는 것이 세상 여자들의 바람이 아니겠는가. 조선시대의 유교적 사회는 삼종지도(三從之道), 여필종부(女必從夫), 칠거지악( 七去之惡) 등의 보이지 않는 제도로 여자들을 사슬로 묶고, 질곡 속에서 숨통을 조이며 인간이 아닌 사회적 부속물로 만들어 버렸다. 난설헌의 세 가지 탄식은 남 자 중심의 봉건 사회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었다. 그녀는 동생 허균과 함께 서얼제 도의 모순을 지적하고, 전통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신분제의 개혁을 부르짖고, 여 성의 인간다운 권익 보호를 위해 몸부림치다가 쓰러져 간, 폐쇄 사회의 상징적 희 생물이다. 에서는 자신이 만든 베가, 제도의 특혜 속에 영화를 누리는 어느 권력층의 딸이 시집갈 때 쓰일 것을 미리 알면서도, 밤새워 베틀 위 에 앉아 있어야만 하는 미천한 신분과 가난한 민중의 한탄이 배어 나온다. 시대를 앞서간 천재 여류시인 한으로 얼룩진 짧은 인생인데 이 세상에 무슨 미련이 있어 어느 것인들 남겨둘 필요가 있겠는가. 그 동안 자신이 짓고 써두었던 모든 작품들을 광주리에 담아 불 살라 버리고는 1589년, 난설헌은 27세의 짧은 일생을 마감해 버렸다. 난설헌의 묘는 고속도로 공사로 이장하는 바람에, 정부 지원을 일부 받아 가족 묘지로 잘 정돈되어 있다. 경사진 비탈면을 3단으로 층을 이루어, 시조부로부터 시부모, 남편까지 그녀 덕분에 한 자리에 모여 있다. 난설헌 묘 오른켠으로는 이 장시 새로 건립한 그녀의 시비가 있다. 비의 앞면엔 앞서 인용한 〈哭子(곡자)〉 가 적혀있고, 뒷면엔 〈夢遊廣桑山(몽유광상산)〉이 기록되어 있다. 전자는 어려 서 죽은 자식에 대한 애끓는 모정을 울음으로 통곡한 작품이요, 후자는 숨 막히는 현실의 벽을 뛰어넘어 죽어서나 갈 수 있는 이상 세계에서의 삶을 동경하는 작품 이다. 그녀의 작품 밑바닥에 깔려 있는 도교적 신선사상은 그녀가 한결같이 추구하고 갈망하는 기본 정서이며 바탕사상이다. 몰락해 가는 집안의 안타까움에다가, 고부 간의 갈등, 남편으로부터의 버림, 어린 자식의 죽음까지 고통의 현실로부터 탈피 하기 위한 한탄과 절규가 맺혀있고, 이상향을 동경하는 그녀의 정신세계가 곳곳에 잘 드러나 있다. 그녀의 원혼은 강릉 생가에서의 행복했던 낭만을 회상하며, 환상 으로 그리던 선계(仙界)에서의 신비로운 생활을 마음껏 즐기고 있으리라.
박찬용 / 대전 보성초 교사 1. 들어가며 제7차 교육과정에서는 ‘자율과 창의에 바탕을 둔 학생 중심 교육과정’을 표방하고 있으며, 각급 학교마다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교육과정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학교 교육과정을 편성·운영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학교 교육과정을 편성·운영함에 있어 자율과 창의를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 재량활동이다. 재량활동은 교과나 특별활동처럼 국가 수준에서 교육목표를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단위학교가 자율적이고 창의적으로 교육목표 및 내용을 정하여 교육활동을 전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량활동은 교원들이 전문성을 발휘하고, 지역 및 학교의 특수성과 학생·교원·학부모의 요구를 반영하여 학교마다 ‘만들어 가는 교육과정’을 특색 있게 실현할 수 있는 학교 교육과정의 중추적인 핵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재량활동은 규격화, 획일화된 학교의 모습에서 탈바꿈하여 학교마다 개성을 살려 다양화된 학교로 변모하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학교 교육과정을 편성·운영하기 위해 교육내용을 정하고자 할 때, 교과적인 것(교과)과 교과 외적인 것(특별활동)으로 범주를 정할 수 있기 때문에 재량활동 교육과정 또한 그러한 내용으로 편성할 수밖에 없다. 재량활동은 편성·운영의 주체가 국가나 시·도 교육청이 아닌 학교가 된다는 것이 특징적일 뿐, 교육내용의 범주는 같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량활동 속에 교과와 특별활동이 포함되며, 전자를 교과 재량활동, 후자를 창의적 재량활동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제7차 교육과정에서는 교육과정 편성·운영 지침에 ‘초등학교의 재량활동은 창의적 재량활동에 중점을 두어 운영한다’라고 명시하고 있으며, 이는 개성과 창의가 존중되는 다양화 시대에 매우 적절한 조치라고 생각된다. 이에 본교에서는 재량활동의 취지를 살려 창의적 재량활동 교육과정을 편성·운영하고 있어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자 한다. 2. 재량활동 교육과정 편성·운영 재량활동 교육과정은 지역 및 학교의 특성과 교육 여건 및 학생·교원·학부모의 희망과 요구를 최대한 반영하는 방향으로 편성·운영하였다. 따라서 기초 조사에 의한 각종 실태를 철저히 분석하였으며, 요구가 상충될 때는 교육적 당위성과 필요를 고려하여 조정하고, 본교만의 특색 있는 재량활동 교육과정이 되도록 하였다. 가. 재량활동 교육과정 편성 교육과정은 교육내용의 범위와 계열을 정하여 학년간에 일관성 있게 편성해야 하며, 학년 특성에 적합해야 한다. 재량활동 교육과정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기 위해 본교에서는 학교교육과정위원회에 ‘재량활동분과’를 두어 전담하게 하였다. 1) 실태 분석 설문 조사, 현장 답사 등을 통한 기초 조사 및 실태 분석 내용은 과 같다. 2) 재량활동 교육과정 편성 절차 ⑴ 상위 교육과정 관련 지침 분석 ①교육인적자원부 고시 교육과정과 재량활동 지침 분석 ②대전광역시교육청 제7차 교육과정 재량활동 운영 지침 분석 ③학교교육 목표와 교육 추진 중점 분석 ⑵ 재량활동 교육과정 편성계획 수립을 위한 기초 조사 ①학교 및 지역 사회 특성 조사 ②학교교육 여건 및 실태 조사 ③학생·교원·학부모의 실태 및 요구 조사 ⑶ 재량활동 교육과정(시안) 작성 ①재량활동 목표 설정(학교, 학년) ②재량활동 교육과정 편성의 기본 방향 설정 ③재량활동 학년별 학습내용 선정 및 시간 배정 ④교육과정 분석 ⑤재량활동 학습내용의 학습주제 선정 ⑥재량활동 연간 지도계획 수립 ⑦재량활동 시간 운영계획 수립 ⑧재량활동 평가계획 수립 ⑷ 시안의 검토, 수정, 보완 및 확정(교육과정위원회) ⑸ 재량활동 교육과정 운영 ⑹ 재량활동 교육과정 평가와 개선(차기 연도 재량활동 교육과정 편성에 반영) 3) 재량활동의 목표 재량활동의 목표는 학교-학년-학습 내용의 목표가 일관성을 유지하도록 아래와 같이 정하였다. ⑴ 학교 재량활동 목표 다양한 학생활동 중심의 체험학습을 통해 21세기의 지식 정보화 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창의력 및 자기주도적 학습능력을 신장하고, 바른 인성을 함양하며, ‘들꽃 학습’을 통해 자연 친화적인 정서를 함양한다. ⑵ 학년 재량활동 목표(5학년) ①정보통신기술교육을 통해 일상 생활에서 정보활용능력을 높인다. ②주제 탐구학습을 통해 창의력과 자기 주도적 학습능력을 신장시킨다. ③다양한 전통 문화 체험학습을 통해 바른 인성을 함양한다. ④들꽃 학습을 통해 자연 친화적인 심성을 함양한다. ⑶ 학습 내용의 재량활동 목표(5학년 인성교육) ①한복을 바르게 입는 방법을 알고, 한복의 멋을 느낄 수 있다. ②전통 절의 종류를 알고, 바르게 실천할 수 있다. ③명절의 종류, 하는 일, 놀이를 알 수 있다. ④전통 문화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4) 재량활동 학습내용 선정 및 시간 배정 재량활동 학습내용 선정은 재량활동 교육과정 편성·운영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사항이라고 볼 수 있다. 학습내용은 재량활동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본교에서는 기초 조사 및 실태 분석, 교육적 당위성 및 필요를 고려하여 아래와 같이 학습내용을 정하고, 학습목표 달성에 적당한 시간을 차등적으로 배정하였다.( 참조) 5) 재량활동 학습내용에 따른 학습주제( 참조) 나. 재량활동 교육과정 운영 1) 재량활동 교육과정 운영의 방향 ⑴ 시간 운영은 정일·정시제를 원칙으로 하고, 학습내용에 따라 다양하게 운영한다. ⑵ 학습방법은 토의, 실험, 실습, 노작 등의 체험학습 중심으로 운영하며,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여 창의력 및 자기주도적 학습능력을 기르는 데 중점을 둔다. ⑶ 학습집단은 학년 단위, 학급 단위, 학급군 단위, 소집단, 개인 등으로 다양하게 편성·운영한다. ⑷ 학습장소는 교내, 교외 등 학습내용에 따라 다양한 장소로 정한다. ⑸ 재량활동 교재는 참고자료를 활용하여 자체적으로 재구성한다. ⑹ 학습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학습자료를 개발하여 활용한다. ⑺ 재량활동 학습지도는 담임 교사제, 영역별 담당 교사제, 자원 강사 등으로 다양하게 한다. ⑻ 교육과정의 편성·운영·평가에 따른 학생의 학습 부담이 가중되지 않도록 유의한다. 2) 재량활동 연간 지도계획 수립·운영 재량활동 교육과정을 체계 있게 운영하기 위해 학습주제에 따른 계절과 특성을 고려하여 학기별, 월별, 주별로 연간 지도계획을 수립하여 운영하였다.( 참조) 3) 재량활동 교재 및 학습자료 제작·활용 재량활동의 효율적인 학습활동을 위해 재량활동 교재 및 학습자료를 제작하여 활용하였다. 교육인적자원부, 대전교육과학연구원, 연구학교 운영자료 등의 참고 자료를 본교의 실정에 맞게 재구성하거나 자체적으로 제작하여 활용함으로써 학습의 효과를 높일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예산을 학생 1인당 7000원씩 책정하여 운영하였다. 4) 재량활동 평가 재량활동 교육과정 편성·운영에 관한 평가와 학생들의 재량활동 학습상황을 평가하여 차기 연도에 개선 자료로 삼았다. ⑴ 재량활동 교육과정 편성·운영 평가 편성·운영 계획 수립을 위한 기초 조사, 학교의 특수성, 학습집단 조직, 교수 조직, 법정 시간의 확보, 시간 운영의 융통성, 학교 실정에 맞는 프로그램 개발, 학습자료 제작, 지역의 인적·물적 자원 활용, 교육과정위원회의 심의 등을 평가하였다. ⑵ 재량활동 학습 상황 평가 평가의 기본 원리와 관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재량활동이 추구하고 있는 기본 취지를 살리기 위한 평가도구와 방법을 사용하여 평가하였으며, 학생들이 자신의 성취 수준을 가늠해보고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보충하도록 하는데 주안점을 두어 평가하였다. 3. 맺으며 재량활동이 교과나 특별활동과 그 성격이 명확히 구분되는 독자적인 특성이 있어서 설정되었다기보다는 학교마다 지역적 특성, 교육 여건, 교원 조직의 특수성, 학생·교원·학부모의 요구, 지역 사회의 인적·물적 자원 등을 고려하여 자율적으로 교육과정을 편성하고 운영함으로써 획일적 교육활동에서 벗어나 다양하고 특색 있는 교육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 의의를 두고 재량활동 교육과정을 편성·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본교만의 특색 있는 교육활동을 전개하고자 학교특색교육으로 들꽃 학습을 실시하고 있으며, 시대 상황이나 교육여건 변화 및 교육 주체의 요구에 따라 매년 부분적으로 개정하여 운영하고 있다. 초기에는 기초 조사, 교육과정 분석, 학습내용 및 학습주제 선정, 프로그램 개발, 교재 및 학습자료 제작, 평가에 이르기까지 재량활동 교육과정 편성·운영으로 인한 업무가 과중하였으나, 정착되어 있는 지금은 그렇지 않다. 또한, 재량활동 교재 및 학습자료 제작으로 인한 업무를 경감하기 위해 타 기관의 공개 자료를 참고하였으나, 본교의 상황에 맞게 재구성함으로써 재량활동의 획일화가 초래되지 않도록 유의하였다. 본교 교원들은 재량활동 교육과정 편성·운영권이 학교에 주어짐에 따라 교육과정 편성·운영권의 일부라도 교원들의 본래의 권한에 귀속되었다는 데에 인식을 같이하고, 교육전문가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만들어 가는 교육과정’을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정 진 환 / 동국대 교수 최근 정부가 마련하고 있는 지방교육자치법 개선방안은 일반자치와 교육자치와의 연계 강화에 초점을 두어, 교육에 대한 지방자치단체장의 책임감 부여, 시·도지사의 러닝메이트로 하는 교육감 주민 직선제, 시·도교육위원회의 시·도의회 분과위원회로의 소속 이동 등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개선방안은 그 동안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보장과 교육위원회의 독립형 의결기구화를 요구해 온 교육계의 주장과는 역행되는 것으로 논란의 여지가 크다. 더욱이 교육자치제를 기초단위까지 확대하여 지역교육장을 구청장과 함께 선출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어 교육청의 수적 증가에 따른 예산 문제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시점에 비추어 매우 적절치 않은 개선안이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특히 개정안은 일반행정에의 교육행정의 예속을 예고하고 있어 교육자치의 기본정신인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전문성을 저해하는 탁상행정의 표본이며 시대적 조류에도 역행하는 방안이라 생각된다. 기본적으로 교육의 본질이 가치 창조적 활동이기 때문에 교육행정은 외부의 간섭이나 통제로부터 벗어나야 하며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활동이다. 따라서 교육자치 확립에 있어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보장은 기초이념이며, 교육행정의 특수성과 전문성 인정을 기반으로 한 일반행정으로부터의 교육행정의 분리·독립은 교육자치 확립을 위한 주요 관건이 된다. 그러기에 헌법이나 지방교육자치에관한법률 등에서도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명시하고 있으며, 이를 보장하게 위해 교육·학예사무를 지방자치단체의 의결기관인 지방의회와 집행기관인 자치단체장과 별도로 특별기관으로서 교육위원회와 교육감의 설치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1991년 지방교육자체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이후에도 교육자치제도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행·재정상의 비효율성의 문제를 내세워 교육행정의 전문성 인정과 일반행정으로부터 분리·독립은 미결의 상태로 시행착오만을 거듭해 오고 있다. 현 정부가 마련한 교육자치개정안에 기초해 보면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과 함께 교육행정에 대한 외적인 세력의 부당한 간섭이나 영향력 배제의 실현은 어려울 것으로 보여 우리의 교육자치는 또 다시 시련을 겪을 것이 명약관화하다. 정부주도의 이번 교육자치법 개정안은 주민참여를 유도한다는 취지 하의 교육감 주민직선제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정당 소속인 시·도지사 후보와 러닝메이트로의 연계는 ‘지방교육의 특정 정당에 의해 좌지우지될 가능성’과 ‘시·도마다의 들쭉날쭉 교육정책 혼란’으로 인한 교육의 혼란을 초래하고 진정한 교육자치 확립에 저해되는 착상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하는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당리당락적 상황에 따라 수시로 이루어지는 교육개혁 안건들은 학생들과 학부모는 물론 온 국민들을 혼란의 늪 속에서 수없이 허우적대게 하고, 희망과 신뢰보다는 ‘이번 개정안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하는 회의만을 느끼게 한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풀뿌리 민주주의를내세운 참여정부의 교육혁신을 위한 과정과 정책이 그동안의 다른 정권들의 과오(위로부터의 개혁)를 답습하고 있다는 인상이 든다. 특히 교육의 정치적 중립의 훼손은 급진적 사회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교육행정의 전문성 향상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우리의 미래 사회는 지식이 모든 부와 경쟁력의 원천이 되는 지식기반사회로 교육자치의 중요성이 더욱 확대될 것으로 예측된다. 특히 정보화와 세계화를 동반하고 있는 새로운 시대적 조류는동안의 사회를 지배해온 중앙집권적 통제에 기초한 교육에서 개방과 경쟁을 향한 현장 중시의 다양성, 자주성, 자율성을 중시하는 교육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교육 패러다임으로 전환될 경우 교육행정은 고도의 전문성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영역이다. 그러나 이번 교육자치법 개정안은 일반자치와 교육자치와의 연계 강화를 통해서 시·도교육위원회를 시·도의회의 한 분과위원회로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어 교육현장을 중시하는 다양성, 자주성, 자율성 등은 물론 교육행정의 전문성 보장이 무시되고 있다. 교육행정의 특수성과 전문성 무시는 큰 정부에서의 중앙집권적 통제의 틀이 환생하는 과오의 반복과, 미래사회 변화에 대한 교육의 적응력 약화를 내포하고 있다. 더욱이 지방자치단체 자체의 행정의 다양성, 전문성을 저해하고 이로 인해 교육의 문제가 더욱 과장되고 교육시장의 개방화와 세계화의 흐름에서 경쟁력과 적응력 상실을 초래할 것이 명백하다.
강석우 | 전북 정읍 인상고 교사 빌헬름텔의 화살 앞에 선 아들은 무엇을 믿었을까? 아버지를 믿었을까? 아버지의 ‘실력’을 믿었을까? 합스부르그 왕가의 게슬러 제독의 강압 때문만이 아니라 아버지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던 아들은 아버지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자신 있게 아버지의 화살 앞에 설 수 있었을 것이다. 제대로 된 전문가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준다.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믿음 말이다. 그래서 이 사회는 전문가를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닐까.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은 물론 ‘자본’이다. 즉 ‘돈’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미국 메이저리그 선수와 마이너리고 선수의 대우는 극과 극이다. 이것은 바로 실력의 차이 곧 돈의 차이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런 돈의 차이가 우리 사회생활에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전문가, 즉 ‘최고’가 되라고 강조하는 것은 아닐까? 최고에는 최고의 대가 따른다 그는 뉴스를 잘하고 싶어 선배들의 뉴스 원고를 죄다 모아 집에서 밤마다, 새벽마다 큰 소리로 연습했다. 3시간 정도 연습하다보면 머리가 어찔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1년만에 아나운서실 차장 정도 되어야 맡는 오후 1시 뉴스를 맡기더군요.’(조선일보 2003년 9월 8일). 아나운서 김동건의 인터뷰 기사이다. ‘석봉 토스트, 연봉 1억 신화’를 펴낸 김석봉은 ‘로드 비즈니스’의 생명은 청결이라는 점에 착안해 흰 가운을 입기 시작했고, 토스트 만드는 손으로 돈을 건네받는 방식 대신 손님들이 직접 돈을 내고 거스름돈을 받아갈 수 있도록 했다. 또 철제 그릴 판을 스테인레스로 바꿨으며 두루마리 휴지 대신 최고급 티슈 화장지로 손님이 손을 닦을 수 있게 했다.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웃는 얼굴로 먼저 인사를 건넸으며, 재료는 저칼로리 위주의 최고급으로만 선택했고 조미료와 설탕은 전혀 쓰지 않았다.(경향신문 2004년 7월 19일). 이렇게 해서 연봉 1억, 15개 체인점의 창업주가 된 것이다. 그냥 최고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남다른 노력이 있는 법이다. 최고에는 최고의 대가가 따르는 법. 그 기쁨을 맛보기 위해 최선의 노력들이 이어지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논리인 것 같다. 그런데 교사들은 어떤가? 다른 직종에서는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면 정신적·물질적 보상이 뒤따르지만, 교사들에게는 그런 기회가 거의 없어 아쉽기는 하다. ‘교직’은 ‘성직’이라고 한다. 성직자가 주어지는 보수와 상관 없이 신앙에 헌신해야 하는 것처럼 교사도 보수와 상관 없이 교육에 매진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교계에서 목회자를 비판할 때 ‘삯군 목자’라는 말을 쓰는데 어떤 목사는 ‘삯군목자라도 되자’고 주장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공감이 되는 이야기이다. 교사도 월급이 적다고 하지만 가끔 내가 받은 월급만큼 일을 하고 있는가를 반성해 본다. 가령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 자신의 책임보다는 학생들의 수업 의욕이 없음만을 탓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는지. 기업체 연수를 맡고 있는 강사는 연수생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강의 기법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내용을 충실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난 학생들이 졸아도 월급은 나오니까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아닐까 반성해보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최고의 교사가 되어야 한다. 나중에 졸업생들로부터 ‘우리 선생님은 최고의 선생님이셨어’라는 소리를 최고의 보상으로 생각하고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존경받는 교사가 되는 길 학생들은 어떤 교사를 존경하는 교사로 생각할까? 수업 잘하는 교사, 상담 많이 해주는 교사를 꼽을 수 있다. 당연히 우리는 수업준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그리고 학생들과의 대화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최소한 이것만으로도 출근 때부터 퇴근 때까지 잠시라도 한눈 팔 시간이 없을 테지만 수업과 상담 외에 하나 또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전공 외에 특기 이상의 취미를 하나 가질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이다. 근무 시간만으로는 당연히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 어려움을 수행해야 하기에 교사는 퇴근 후에도 ‘선생님!’으로 불리는가 보다. 잠시 자본주의 논리에 맞추어 교사의 길을 생각해 보았다. 즉 최소한 월급값이라도 하자는 논리로 축소시켰지만 한번 반성해 볼 일이다. 보상이 꼭 돈으로만 주어지는 것인가? 앞에서 예로 들었던 김동건 아나운서나 김석봉 사장에게 주어진 돈 외에 보상받은 것이 없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그들은 주어진 돈 이상의 정신적 보상과 만족감을 충분히 누리며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교사도 마찬가지다. 이번 아테네 올림픽 탁구에서 금메달을 딴 유승민의 경기를 보면서 점수를 올릴 때마다 선수보다 더 좋아하는 김택수 코치의 모습을 보았다. 제자가 잘 되는 것 이상 큰 보상이 있을까?
안미숙 / 미 콜럼비아 대 교원연구소 연구원·교육철학박사 지난 2003년에는 청소년교육연구부(The Ministry of Youth, National Education and Research)에서 이공계 전문 인력 300명을 특별히 채용하기도 했다. 일련의 개정 시도를 통해 현재에는 세계시장경제 상황을 파악하고, 유럽연합에 공헌할 수 있는 방향의 고등교육의 개혁을 통해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I. 현황 10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프랑스 고등교육 체제가 매우 복잡한 주 요인은 유럽의 교육제도에 근간하고 있는 독특한 대학체제와 엘리트교육의 산실인 ‘그랑데 에꼴(Grandes coles)’이라는 이원 체제의 공존에 있다. 세계 최초의 대학인 소르본 대학(La Sorbonne)이 13세기 파리에 설립된 이래로 대학에 대한 교회의 간섭과 권한이 점차적으로 강화되었고, 이에 대한 경계로, 즉 정치적인 목적에서 국가의 권력을 주도할 엘리트 계층인 공무원 기술인력을 훈련시킬 목적으로 18세기경 그랑데 에꼴이 설립되었다. 그 동안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대학 또는 그랑데 에꼴에 대한 가치와 선호도가 변해 왔다. 하지만 20세기로 접어들면서 과학공업 기술의 중요성이 증가함에 따라 점차적으로, 그러나 확실하게 프랑스 정부의 주요 지위에 오르기 위한 필수적인 엘리트 교육과정으로 그랑데 에꼴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그랑데 에꼴이라는 명칭으로 총괄되지만, 그 수가 증가하면서 경영과 공학학교는 ‘에꼴’로, 정치학교는 ‘그랑데 에꼴’로 구분되고 있다. 일반대학 교육에는 자격증학위(Licence), 학사 및 석사학위(Diploma/Master), 박사학위(Doctorat) 과정이 있다. 최근 일부 대학에서는 일반 자격증학위 외에 직업현장의 직접적인 요구에 부응하는 교육과정을 제공하는 전문자격증학위(Licences Professionelles) 과정도 개설하고 있다. 자격증학위를 취득한 후 1년 과정을 마치면 받게 되는 일반학사학위와 전문기술학위 과정이 있다. 또한 4학기 과정을 통해 석사학위를 받게 된다. 이외에도 전공에 근거한 다양한 명칭의 같은 수준의 여러 학위들이 있다. 석사학위 이후에 지원할 수 있는 최고 전문학위 (DESS / DEA)의 1년 과정과 최소 3년 기간의 마지막 과정인 박사학위 과정 등이 있다. 그랑데 에꼴 정치학교(보편적으로 Sciences Po 라고 불린다)는 일반적으로는 4년 과정이지만 파리에 소재하고 있는 가장 유명한 정치학교는 5년 과정으로 국제 경제, 재정, 대외관계 등 다양한 세부 전공 과정을 개설하고 있다. 에꼴 공학학교는 5년 과정으로 대학에 부설된 학교와 더불어 25여 개의 학교가 있으며, 이 과정을 수료하면 석사 과정으로 인정받게 된다. 경영학교는 전공에 따라 4년 또는 5년 과정을 두고 있다. 그랑데 에꼴은 엄격한 입학사정에 의해 학생을 선발하기 때문에 2년 과정의 에꼴 준비반의 학생이 주로 선발되며, 대부분의 학생이 전국 상위 10위권에 드는 최우수 고등학교 출신이다. 그랑데 에꼴의 명성은 높은 입학 경쟁률 외에도 양질의 교육환경에 근간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전체 학생 수 1000명 미만의 소규모 운영으로 보다 작은 학급당 학생 수, 보다 나은 교육시설(컴퓨터, 실험실, 연구실 등)을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부에서 1년간 학생당 1만2500달러를 지원 받고 있어 5900달러를 받는 대학에 비해 교육환경이 훨씬 좋은 편이다. 또한 그랑데 에꼴 졸업생들은 일반 대학 졸업생보다 직업 구하기가 훨씬 용이하다. 재학시 일반 기업에서 이미 계약을 맺어 그에 적합한 교육을 받은 졸업생을 미리 채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졸업생들의 막강한 네트워크 덕분에 일반 대학 졸업생보다 훨씬 유리하게 사회에서 자리를 잡게 된다. 일반 대학의 경영학교를 제외한 모든 대학과 그랑데 에꼴은 국립체제로 모든 학생 교육은 무상으로 제공된다. 이공계 인력의 경우 대학, 에꼴, 그리고 2년 과정의 과학기술 전문학교를 통해서 양성되는데, 에꼴 9.5%, 일반 대학 62%, 과학기술 전문학교에서 16% 정도가 배출되고 있으며, 그 외에 준 의료인력 12.5%가 기타 특수 고등교육기관에서 양성되고 있다. II. 진단 일반 대학의 경우 대체적으로 1년 과정 후에 34%의 학생이 낙제를 하고 2년 과정 후 28% 학생만이 졸업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2년 과정을 수료한 후 받게 되는 자격증 학위만으로는 직업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국가 공무원직뿐만 아니라 일반 기업에서도 자격증학위에는 별로 가치를 주지 않고 있다. 이는 대학 수업의 질에 대한 불신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현재 연구 실적과 출판에만 근간하는 교수평가 체제 때문에 교수들이 수업 내용이나 지도에 충실하지 못해 그 질이 떨어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더욱이 연구 현실은 일반 기업과의 협력 연계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현 대학의 교육과정은 경영과 경제 현실에서의 최첨단 과학기술의 필요성을 이해하거나 반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프랑스 고등교육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는 대학의 자율성에 상당한 제한을 가하고 있기 때문에 대학 행정은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필요한 전문 과학기술 인력을 자율적으로 채용할 수도 없으며, 같은 대학 내 단과대학별 시설조차도 상호간에 자유로이 공유하지 못하고 자치권을 내세워 경쟁만 할 뿐이다. 그랑데 에꼴과는 달리 대학은 지원자를 모두 받아들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공식, 비공식적 수단으로 선발이 통제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의과 대학의 경우는 제한된 공간을 이유로 학생 수를 제한하고 있다. 프랑스의 대학은 표면적으로는 모든 주의 대학이 모두 동일한 수준과 질인 것으로 간주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각 주별 또는 대학별 졸업생의 상위 수준의 진학이나 취업 정도에 따라 암암리에 서열이 매겨지고 있는 상황이다. 고등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의 수가 지난 50년 동안 6.5배 정도 늘었고, 그랑데 에꼴의 경우에도 기존의 엄격한 입학 사정을 유지하면서도 점차적으로 학생 수를 늘려 나가고는 있지만, 에꼴 공학학교 학생 수의 경우 전체 고등교육기관 학생 수의 14%를 차지하던 것에서 현재는 3.7%로 줄었다. 소위 귀족 교육과정이라고 불리는 그랑데 에꼴의 입학 선발 기준이 더 엄격해지면서 대부분의 학생이 정부 고위간부의 자녀와 일반 기업의 행정간부의 자녀들일 정도로 그 구성에 있어서 편협성이 두드러지고 있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소수의 유학생을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러한 불균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랑데 에꼴의 학위에 대해서는 외부의 감사도 없어 실제적인 교육 내용이나 질보다는 기존의 명성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학습 내용의 경우 대부분이 이론에 치중하고 있어 실제적이거나 현실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할 시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직업현장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비판적인 아이디어, 지적 소유권, 독창적인 과학적 연구와 그 방법에 대해서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또한 최근에는 그랑데 에꼴과 대학 간의 교육과정 내용과 질에 있어 차별적인 특성이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어 소수의 엘리트 전통만 부추기면서 기업화되고 있는 에꼴에 대한 감사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있다.
이정희 | 서울 삼선초 교사 “야, 비켜 봐” “어머, 죽었어! 아이 불쌍해라.” “정말! 나도 보여 주라.” 겨울 방학이 끝나고 처음 등교하던 날, 무슨 일인지 복도 창가 쪽으로 아이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또래 중에서 키가 큰 아이는 창가에 매달려 창 밖의 상황을 알려주느라 정신이 없었고, 다른 아이들은 발꿈치를 들고 창 밖을 보려고 안달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분명히 큰 사고가 난 것이라 짐작하고 황급히 그 곳으로 달려갔다. 아이들은 일제히 나를 쳐다보면서 새끼 비둘기가 죽었다고 말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비둘기가 죽다니……. 비둘기와의 만남은 꽃샘추위가 계속 되던 지난 신학기였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복도 창가에 비둘기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신기하게도 비둘기들은 창 틀 난간 위로 연결된 좁은 공간에 나뭇가지를 하나, 둘씩 물고 와 얼기설기 둥지를 만들고 있었다. 며칠 동안 열심히 들락거린 결과 비둘기들은 멋진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 곳에 두 개의 알을 낳았다. 나는 바짝 조바심이 났다. 비둘기가 알을 낳은 것도 처음 보는 일이지만 그 알 속에서 과연 어떤 비둘기가 태어날지도 궁금했다. 혹시라도 나의 관찰이 방해라도 되면 어쩌나 하는 맘으로 비둘기가 눈치 채지 못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어미처럼 보이는 비둘기가 둥지를 틀고 앉은 것으로 보아 알을 품은 것이 틀림없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보다 비둘기 보는 재미에 푹 빠져들 즈음, 새끼 비둘기들이 태어났다. 갓 태어난 새끼 비둘기들은 빨간 살갗에 노란 털이 듬성듬성 나 있었는데 눈은 꼭 감은 채 서로 붙어 있었다. 몹시 추운데 새끼 비둘기의 온 몸에 물기가 돌고 있어 더 추워 보였다. 물기를 닦아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혹시라도 잘못될까 싶어 지켜만 보기로 했다. 새끼 비둘기들이 조금씩 움직여 줄 때는 신비스럽기까지 하여 가슴이 떨렸다. 내가 마치 비둘기 보호자라도 되는 양, 출·퇴근 때마다 들여다보고 잘 자라기를 진심으로 빌고 또 빌었다. 어미 비둘기는 새끼들에게 먹이도 갖다 주고, 틈틈이 깃털로 감싸 추위에 떠는 새끼들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엄마가 아이를 포근하게 안아 주는 것 같아 옆에서 지켜보는 내 마음까지도 훈훈해졌다. 비둘기 둥지는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둥지를 들여다보며 신기해하는 선생님들을 보고, 아이들은 자기들에게도 비둘기 둥지를 보여 달라고 조르는가 하면, 때로는 호기심에 몰래 의자를 놓고 둥지 쪽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어느 날은 어린 새끼를 함부로 만지기도 하고 서로 먼저 보겠다고 야단법석을 피울 때도 있었다. 비둘기 때문에 아이들이 다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가 불쑥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둥지를 없애 버릴까도 생각했으나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 대신 비둘기의 성장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아이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기로 했다. 비둘기 둥지 이야기는 삽시간에 전교에 퍼져나갔다. 그 동안 찍어 두었던 비둘기 사진 중에서 새끼 비둘기 사진 몇 개를 골라 ‘위대한 탄생’ 이라는 제목을 붙여 교내 사진대회에 출품했다. 사진으로 아이들의 호기심을 잠재우려던 나의 계획은 오히려 역효과만 불렀다. 사진을 본 아이들이 실제 모습의 비둘기 둥지와 새끼 비둘기를 보려고 복도 창가 쪽이 한층 더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얘들아, 이리 와 봐. 여기다 여기” “어머나, 신기하다!” “아, 예쁘다!” 아이들은 창틀에 매달려 목을 쭉 빼고 새끼 비둘기를 보면서 저마다 한마디씩 소리쳤다. 비둘기만큼이나 아이들의 모습이 귀여웠다. 아이들은 비둘기를 구경하고, 비둘기들은 아이들을 구경하느라 서로의 눈들이 반짝거렸다. 마음 한 편이 흐뭇해졌다. 한 해 동안 둥지에서는 대여섯 차례 새 생명이 태어났고, 그들은 나름대로 적응력을 발휘해 생활해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여름이 가고, 겨울 방학을 맞이했다. 그런데 겨울 방학이 끝나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새끼 한 마리만 감싸주고 있는 어미 비둘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 마리는 얼어붙어 주검으로 변해있었다. 가까이 가자 어미 비둘기는 모성 보호본능을 강하게 발동하며 짧은 부리를 더욱 꼭 다물고 새끼 비둘기를 더욱 세차게 껴안았다. 죽은 새끼를 꺼내려는 나의 손놀림에 눈동자만 움직일 뿐, 내가 하는 일에 공격하지는 않았다. 죽은 새끼를 아이들과 함께 화단에 묻어 주었다. 보살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이들 역시 숙연한 마음으로 비둘기를 묻으며 서운해 했다. 종업식이 끝나고 정들었던 교실과 비둘기 둥지와도 이별을 해야 했다. 한 해 동안 사용했던 교실에서 다른 교실로 짐을 옮기는데 비둘기 둥지가 눈에 띄었다. 어미 비둘기는 먹이를 구하러 나갔는지 새끼 비둘기 혼자 있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의 슬픔이 있지만 이번에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비둘기와도 이별을 하게 되어 섭섭함이 한층 더했다. 또다른 아이들과의 만남이 없다면 큰 슬픔이었으리라.
곽해선 | 경제교육연구소 소장(www.haeseon.net) 최근 물가 동향과 경제 상황 부총리가 지난 6월 말 하반기 나라 경제 운용 방향을 밝히면서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작년 대비 3.5% 이내로 억제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하반기 들어 국내 물가는 장마와 폭염에 따른 채소류의 작황 부진, 교통요금 인상, 중동 지역 정세 불안에 따른 국제 원유가 폭등과 맞물려 상승세가 가파르다. 6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전달 대비 3.6%였는데 7월에는 전달보다 0.8%포인트가 오른 4.4%를 기록했다. 8월에도 전달 대비 4%를 넘을 가능성이 높다. 정부가 나서서 도시가스 요금과 휴대전화 기본료를 내렸지만 물가 불안은 좀처럼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물가는 오르는데 임금은 그만큼 오르지 못하고 금리는 떨어지는 추세라서 가뜩이나 어려운 서민 경기를 한층 어렵게 하고 있다. 8월 12일 한국개발연구원(KDI)과 노동부가 밝힌 바로는 올해 1월에서 5월까지 명목임금 상승률이 4.6%에 그쳤다. 임금소득의 크기는 물가가 오르면 오르는 만큼 뒷걸음질친다. 올해 1월에서 5월까지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3%였던 점을 감안하면, 명목 임금상승률(4.6%)에서 소비자물가 상승률(3.3%)을 뺀 실질임금 상승률은 1.3%에 불과하다. 실질임금 상승률은 지난해 같은 기간 7.1% 수준이었다. 그러나 올해는 작년의 1/5도 안 되는 수준으로 급격히 위축되어, 물가 상승폭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이런 현상은 봉급생활자와 서민들의 소비 능력, 의욕을 위축시켜 소비가 매우 침체한 지금 우리 경제에 한층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은퇴해서 직장 없이 연금이나 이자소득에 의지해 사는 서민층은 더 어렵다. 한국은행이 8월 12일 국내 금리의 기준 역할을 하는 콜 금리를 연 3.75%에서 연 3.5%로 내림으로써 시중금리가 한층 낮아지면서 이자소득도 줄어들게 됐기 때문이다. 물가는 어떻게 정해지나 물가란 여러 개별 상품의 가격을 한데 묶어 평균 낸 값, 가격은 상거래를 위해 개별 상품에 붙이는 값이다. 가격이나 물가는 기본적으로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일반적으로 상품 수급에 따라 시장에서 일단 가격이 형성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거꾸로 시장가격이 상품의 수급을 조절한다. 즉 상품의 수요-공급이 시장가격을 형성하고 나면 시장가격이 거꾸로 상품의 수요-공급을 좌우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움직이는 여러 원리 중에서도 기본이다. 그런데 가격과 물가가 시장에서 상품 수급에 따라 정해진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본이 그렇다는 얘기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상품 수급 외에도 여러 가지 다른 이유가 끼어들어 가격과 물가를 움직일 때가 많다. 중요한 변수 두 가지만 들어보자. 첫째, 시장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가 그 하나다. 시장에 따라서는 상품을 공급하는 기업이 한 개 혹은 몇 개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이른바 ‘독과점 시장’이다. 독과점 시장에서는 당연히 상품의 시장가격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공급자가 수요자보다 유리하다. 소비자가 상품을 살 곳이 달리 없으니 기업이 가격을 제멋대로 매기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독과점 기업이 시장에 내놓는 상품, 서비스에 자기 좋을 대로만 가격을 매기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막무가내로 가격을 올린다면 소비자로부터 외면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아무리 그래도 소비자가 외면할 수 없는 상품, 서비스라면 기업의 횡포를 막기 위해 정부가 나선다. 전형적으로, 공정거래법과 공정거래위원회를 두고 독과점 기업의 횡포를 법률로 견제해 시장에서 거래가 공정하게 이루어지도록 유도한다. 둘째, 환율도 수급 관계 외에 물가에 영향을 자주 미치는 변수다. 수입 상품 대금이 달러 당 1000원 하다가 1050원이 된다고 하자. 외화 표시 상품 판매가가 변함없다 해도 상품 구입에 드는 원화 액수는 오른다. 이 여파가 다른 상품 가격들에까지 미치면 물가가 오른다. 만약 환율이 반대 방향으로 바뀌면 정반대 결과가 생긴다. 환율이 물가를 뛰게 하는 예로는 우리나라가 지난 1997년 후반 외환위기 때 당한 이른바 ‘IMF 한파’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우리나라는 단기외채를 못 갚을 정도로 외화가 바닥 나 있었다. 그런 사실이 알려지자 국내외 투자자들이 원화 가치 폭락을 예견하고 일제히 원화를 팔아치웠고, 이 바람에 원화는 기록적으로 폭락했다. 달러 당 900원 정도였던 환율이 삽시간에 달러 당 1800원을 넘어섰다. 그러자 수입 상품 판매가도 일제히 급등해, 전과 같은 양을 사더라도 원화 대금을 배 이상 내줘야 했다. 완제품뿐 아니라 완제품을 만드는 재료로 쓰는 수입 원자재도 가격이 올랐고, 수입 원자재로 만들어내는 국산 완제품도 가격이 뛰었다. 이렇게 수입 완제품과 원자재의 가격 인상이 국산 완제품 가격을 올리고 상품 전반으로 파급되면서 물가가 폭등했다. 환율이 뛰면 수입 원유도 마찬가지로 가격이 뛴다. 원유(crude oil)는 자동차 운행 등 각종 산업에 광범위하게 쓰이는 필수 에너지원이다. 제품 생산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원유를 쓰는 산업도 아주 많다. 때문에 원유 값 변동이 물가에 미치는 효과는 특히 크다. 원유 관련 제품 가격이 오르면 원유와 직접 상관 없는 수많은 다른 상품들도 꼬리를 물고 값이 뛴다. 물가는 경기와 무슨 관계가 있나 보통 경기가 좋아지면 물가가 오른다. 왜 그럴까. 수요가 높아지고, 생산비가 오르기 때문이다. 생산활동이 활발해지면 기업이나 가계나 소비가 늘어난다. 그 결과 원재료와 에너지, 노동력 등 생산요소와 상품에 대한 수요가 공급에 비해 전체적으로 높아진다. 수요가 공급에 비해 많아지면 상품 가격은 오른다. 원재료나 에너지 값, 인건비가 오르는 만큼 기업은 생산비 부담이 늘어 완성품 판매가를 올리게 마련이다. 이런 과정이 전 산업에 걸쳐 확산되면서 물가가 오른다. 경기가 좋을 때는 소비자들이 비싼 상품도 기꺼이 사들일 만큼 소비의욕이 높다. 그러므로 기업도 적극적으로 나서, 생산비가 더 들더라도 생산량을 늘린다. 기업이 생산을 늘릴 때는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노동력 공급은 한정되어 있는데 수요가 늘면 노동의 대가 곧 임금이 오른다. 임금이 오르면 봉급생활자들은 두둑해진 호주머니를 믿고 물가가 비싸도 소비를 줄이지 않는다. 물건 값이 비싸도 잘 팔리니 상품 판매가는 자꾸만 오른다. 결국 경기가 좋아지는 동안에는 기업이나 가계나 생산과 소비가 함께 활발해지기 때문에 물가가 오른다. 반면 경기가 나빠지면 물가는 어떻게 될까. 경기가 나빠져 기업의 생산 활동이 침체하면 직장인들의 임금 수입도 늘지 못하거나 줄어든다. 그 결과 가계의 소비 의욕이 떨어지므로 소비가 줄고, 그러면 물가는 떨어지거나 상승률이 둔해진다. 다만 예외적으로 경기가 나쁠 때 물가가 오르는 수도 있다. 지난 1997년 말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맞은 직후에는 경기가 나쁜데도 물가가 치솟았다. 당시 원화가치가 형편없이 떨어지는 바람에 수입 상품 가격이 폭등하면서 물가를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 경제는 경기가 나쁜데 물가가 오르고 있다. 지금은 기업의 경쟁력이 외국에 비해 떨어지는 데다 정부의 정책실패 같은 국내 요인과 해외 요인이 겹쳤다. 국내적으로는 부동산 투기와 신용카드 남발이 조장됨으로써 가계 부채와 신용불량자가 대거 양산된 끝에 빚에 짓눌린 가계가 소비를 못해 소비 침체 → 판매 침체 → 생산 위축 → 고용 위축의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밖으로는 고유가와 중국의 경기 긴축 등이 원유를 비롯해 수입원자재 가격을 올리고 있다. 인플레이션이란 무엇인가 경기가 좋아지면 상품 수요가 공급을 웃돌아 물가가 오른다. 수요가 공급을 많이 웃돌면 물가 상승세도 심해진다. 그러다가 물가가 지나치다 싶을 만큼 빠른 속도로 계속 오르는 현상이 생길 수 있다. 이처럼 단기에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물가 상승 현상을 ‘인플레이션(inflation)’이라고 부른다. 흔히 줄여서 ‘인플레’라고도 부른다. 다만 물가가 얼마나 빨리 오르면 인플레이션인지 정확하게 정의할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어느 정도 기간 동안 몇 % 이상 물가가 오르면 인플레이션이라고 본다’는 식의 규정이 없다. 그러므로 현실에서는 여느 때에 비해 물가 상승이 심한지 여부로 인플레이션을 판별할 수밖에 없다. 자연히 인플레이션은 발생 여부를 놓고 전문가들 사이에도 의견이 엇갈릴 때가 많다. 물론 이론의 여지가 없는 인플레이션 사례도 있다. 브라질이나 멕시코, 터키 같은 나라들은 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은 예다. 브라질에서는 지난 1990년 물가가 한 해 전에 비해 무려 30배나 뛰었다. 1991년 물가는 전년에 비해 4.4배를 넘었다. 이후에도 계속 인플레이션이 진행되어 1993~1994년 사이에는 물가가 20배나 올랐다. 1995년이 지나고서야 겨우 물가상승률이 20% 밑으로 떨어졌다. 물가가 뛰면 뛰는 만큼 화폐 현찰은 값어치가 떨어진다. 어제 한 봉지에 1000원 하던 콩나물이 오늘 2000원 하면 1000원이라는 돈 가치는 어제의 반절밖에 안 된다. 물가가 웬만큼 오르면 몰라도 이 정도로 물가가 심하게 뛰는 인플레이션이 생기면 돈 가치도 큰 폭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봉급이나 연금, 이자 등 정기적으로 일정액씩 얻는 현찰 수입에 의지해 사는 사람들은 당장 살림살이가 빡빡해진다. 물가가 뛰면 전·월세 등 집세와 가게 세, 자녀 학비, 교통비 등 생활비가 일제히 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업들이 때맞춰 직장인 봉급을 올려주는 것도 아니고, 금융기관 등이 연금이나 이자를 더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플레이션은 서민 대중의 생활수준을 끌어내린다. 인플레이션이 극단적으로 심한 경우는, 아침에 1000원 하던 상품이 저녁에 2000원 하는 식으로 뛰는 수도 있다. 이럴 때는 사람들이 경제의 앞날을 자신하거나 예측하기 어렵게 되므로 돈 융통을 포함해 기업 활동, 경제 활동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한다. 디플레이션은 왜 문제인가 인플레이션과 반대 되는 현상도 있다. 디플레이션(deflation)이다. 수요가 공급에 훨씬 미치지 못해 물가가 계속 떨어지는 경제 상태를 말하는데, 흔히 줄여서 ‘디플레’라고 부른다. 물가가 떨어지면 소비자에겐 좋을 것 같지만 디플레이션 때의 물가 하락은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수요, 소비가 공급을 크게 밑돈다는 것은 국민경제의 공급력에 비해 구매력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국민경제의 생산과 투자 규모를 줄여 성장능력을 약화시킨다. 디플레이션 때는 제품이 팔리지 않아 기업들이 제품 가격을 잇달아 내린다. 그런데도 소비자들은 물가가 계속 떨어질 것이며 나중에 살수록 이익이라고 생각해 소비를 미룬다. 그럴수록 기업은 판매 부진이 심해져 제품 값을 더 내려야 한다. 결국 제품 값 하락과 소비 부진이 되풀이된다. 그런 가운데 경쟁을 치러내야 한다. 수익성 하락과 경쟁을 견디다 못해 상품 가격을 올리거나 상품 품질을 떨어뜨리는 기업은 소비자에게서 외면당한다. 디플레이션 때는 상품이 싸도 팔리지 않으니 기업들은 불가피하게 공장 설비와 인원을 줄일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실업자가 늘어 가계의 구매력은 한층 떨어진다. 가계의 소비는 더 줄어들고 제품 가격은 더 떨어지면서 실업이 늘어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주식이나 부동산 같은 실물자산 가격도 수요가 적어 거래가 부진하므로 시세가 하락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소비 침체는 한층 심해진다. 이처럼 디플레이션 때는 소비자가 돈을 절약할수록 제품 값이 더 떨어지고 투자와 생산이 부진해져 국민경제 형편이 나빠지는 ‘절약의 역설’이 나타난다. 소비 부진 → 판매·거래 부진→투자, 생산 침체→고용 감소, 실업 증가→소비 부진으로 악순환이 이어진다. 이 악순환의 고리가 어디선가 끊어지지 않는 한 경기는 불황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만약 어떤 이유로든 가계가 소비를 늘린다면, 경기가 되살아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소비가 늘어나면 설사 그로 인해 제품 가격과 물가가 오르더라도 생산과 투자를 자극하고 고용을 자극해 경기가 좋은 사이클을 탈 수 있기 때문이다. 소비가 늘어나지 않는다면 소비 절약이 생산·투자를 한층 부진하게 하고 그 결과 기업의 어려움이 소비자에게 전가된다. 경기가 나빠지는 악순환이 가속될 수밖에 없다. 디플레이션이 불황을 부른 심한 예가 유명한 1929년 세계 대공황이다. 당시 미국에서는 주가 대폭락을 시작으로 물가가 이후 3년여에 걸쳐 약 27% 하락했다. 실업자도 1천만 명 이상 늘었다. 경제 규모는 3년 사이 2/3로 줄어들었다. 경제가 불황에 빠지면 돈 수요가 줄어 금리가 떨어지고 각종 상거래에서 거래자 상호간 신용이 흔들려 사회가 불안해진다. 디플레이션으로 빚어지는 경제 거래의 불안이 사회, 정치 불안까지 빚는다.
신천호 / 한의사 허리는 인체의 상반부를 받쳐줌으로써 신체 각 부분이 운동을 하는데 협조 작용을 한다. 그런데 과도한 뒤로 젖힘과 앞으로 굽힘, 비틀림, 삠, 구부러짐 등이 허리에 가해지거나, 무거운 물건을 운반할 때 과도하게 힘을 쓴 것 등이 원인이 되어 허리가 감당할 수 있는 활동범위를 넘어서게 되면 근지점(筋止點), 인대, 관절낭, 연골, 근막 등과 같은 조직에 무균성(無菌性) 염증이 일어나 아프게 된다. 이와 같은 급성 손상을 당한 후에 충분한 치료를 받지 못하거나, 장기간 허리를 구부려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일을 하거나, 골격에 기형이 발생하면, 인대, 근육, 관절면 등에 만성 손상이 일어나게 되고 그 결과 국부 병변처에 압통이 나타나며(압통 부위는 주로 골반 장골 후상극의 내측과 제4,5요추 옆에 있다)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고 운동에 제한을 받게 된다. 요통에는 3가지 유형이 있다. 허리 통증은 조기에 치료하자 첫째, 신허요통(腎虛腰痛)이다. 한의학에서는 허리가 신(腎)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허리가 꺾이거나 부딪혀서 기혈이 잘 운행되지 않고 어혈이 머물러 쌓이며, 이러한 상태가 오래 되면 신기(腎氣)가 허해지는데다가 한습사(寒濕邪: 차고 습한 나쁜 기운)가 이 틈을 타고 침입하기가 쉬워져서 요통이 장기화하게 된다. 엑스선 검사로는 관절이나 골 조직이 손상된 증거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외과적으로는 마땅한 치료법이 없다. 신허요통은 완만하게 발생하고, 점차 가중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때 허리, 무릎, 종아리부위가 쑤시고 힘이 없어진다. 또 피로하면 통증이 더 심해지고, 휴식을 취하면 통증이 줄어든다. 늘 반복적으로 발병하며 평소에는 정신적으로 권태롭고 기억력이 감퇴된다. 그러다보니 치료를 소홀히 하거나 임시변통식으로 대처하기가 쉬워서 만성이 되기 쉽다. 치료할 때는 두충, 파고지 등의 한약재를 써서 신기를 보양하고 경맥을 조리해야 한다. 통증은 그리 심하지 않지만 수개월 내지 수년간 지속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특징 자체가 요통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어, 이러다 말겠지 하는 식으로 치료시기를 늦추게 된다. 하지만 허리는 인체의 중심에 해당하기 때문에 반드시 조기에 적극적으로 치료해야 한다. 둘째, 풍한습요통(風寒濕腰痛)이다. 찬바람이나 차가운 습기가 허리에 침입하여 허리가 아픈 것이다. 갑자기 통증이 느껴지며 허리, 엉덩이 부위에서 다리까지 이르며, 옆으로 움직일 수도 없다. 허리에는 간혹 한랭한 느낌이 있고, 오래 되면 때로는 심하며, 날씨가 흐릴 때에는 통증이 더욱 심해진다. 특히 임신과 출산으로 몸이 약해진 여성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며 일반적으로는 산후풍이라고 하는 증상이 이 범주에 속한다. 치료가 잘 되지 않으면 류마티스로 변하기도 하며 장기화하여 반복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치료의 대원칙은 따뜻하게 해서 풀어주고 혈액순환을 촉진시켜야 한다. 한의학에서는 오적산(五積散)과 홍화, 부자 등을 많이 쓴다. 셋째, 좌섬요통(挫閃腰痛)이다. ‘삐끗허리’라고도 한다. 동작 중 자세불량으로 허리가 삐끗하면서 아파지는 것이다. 허리를 돌리거나 수그리거나 젖히는 게 모두 곤란하며, 간혹 국부가 붓고 뻐근하며 어혈이 있기도 하다. 치료할 때는 기혈을 조리하여 근육이 펴지고 혈액이 잘 흐르도록 해야 한다. 황백, 도인 등의 한약재를 주로 쓴다. 허리뼈에 이상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으므로 바로 한의원으로 가서 침, 뜸, 부항 치료를 받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다.평소의 꾸준한 운동은 좌섬요통을 예방하는 데 필수적이다. 허리비틀기 운동으로 건강한 허리를 허리비틀기 운동은 특히 효과가 있다. ①두 다리를 어깨 넓이로 벌린다. 상반신을 느슨하게 하고, 자연스런 마음을 유지한다. ②허리를 힘껏 오른쪽으로, 뒤로 돌리며 흔든다. 두 발은 그대로 있어야 하며, 이동해서는 안 된다. ③머리도 뒤를 향해서 돌린다. 머리를 돌릴 때 힘껏 돌리되 최대의 폭으로 한다. 그런 다음 정면으로 돌아온다. ④다시 왼쪽, 뒤쪽으로 흔들며 돌린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규칙적으로 반복해서 흔들며 돌린다. 동시에 ‘하나, 둘’하며 구령을 붙인다. 초기 목표로 가장 좋은 것은 규칙적으로 30번 한도에서 정해야 한다. 그런 다음 날이 갈수록 횟수를 늘여간다. 자연스럽게 습관이 된 다음 아침, 정오, 저녁에 100번째 허리 비트는 운동을 한다. 매일 세 번, 합계 300번, 어떤 때는 두 번에 나누어 해도 된다. 아침 기상 후에 혹은 잠들기 전에 각각 150번씩 한다. 만일 자기 체질과 체력이 약해진 원인이 위장, 간장, 췌장 등 소화기관의 기능이 좋지 않거나, 혹은 변비가 있거나, 불면증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면 꼭 이 운동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이상의 각종 병증 외에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여성도 늘 자기의 허리에 신경을 써야 한다. 가는 허리를 만들고 싶거나 뱃살을 제거하고 유방의 발육을 자극하고 싶으면 이처럼 허리 비틀기 운동이 가장 적합하다.
허원행 | 경기 안양 관악정보산업고 교사 모두들 여름방학 즐겁고 유익하게 보냈겠지. 선생님은 취미인 달리기를 하면서 여름을 즐기며 보냈단다. 내가 이번 여름방학에 한 일 중에 가장 의미 있는 일은 너희들에게 유적 발굴 현장체험을 시킨 것이다. 선생님은 학창 시절부터 발굴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였고, 교사가 된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발굴 현장으로 가서 땅을 파곤 했지. 그런 관계로 중·고등학생들이 발굴 현장체험을 한다면 역사에 대한 관심이 커질 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창 중에 연구원 또는 학예연구사로 있는 친구에게 협조를 얻어 2000년 여름방학 때 의왕부곡중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회암사지 발굴 현장 체험학습을 실시한 적이 있었지. 그 이후로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학생들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 실업계 고등학교인 관악정보산업고등학교에 부임해서도 학생들의 성향을 보아 발굴에 관심 있는 학생이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아예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2학년생인 너희들은 내가 우리 학교에 온 이래로 학습에 대한 열의가 가장 높은 학생들이었어. 본능적으로 너희들을 발굴 현장에 데려가 봐야겠다는 의욕이 발동하더구나. 그래서 기말고사를 마친 직후 수업시간에 발굴 현장체험학습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던 거야. 국사 시간에 배운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의 유적, 유물을 상기시키면서 비록 힘들고 고달픈 일이지만 보람 있을 것이고, 우리들의 인생에 있어서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임을 확신하면서 너희들의 반응을 유심히 살펴보았단다. 예상대로 한 반에 몇 명씩 관심 있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쁨을 느끼며 쾌재를 불렀지. 방학중에 시간이 맞는 학생을 2박 3일 일정으로 2개조로 나누어 1차로 화성시 동탄면 소재 유적지 발굴 현장과, 2차로 양주시 회암리 화암사지 발굴 현장체험학습을 하기로 하였다. 기흥 인터체인지까지 마중 나온 김재연 연구원의 안내로 삼성전자가 계획중인 화성 지방 산업단지 내 발굴 현장에 도착했지. 김 연구원의 발굴 현장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듣고 유물 수장고에 가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청동기 시대의 토기와 석기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고, 코로 냄새도 맡아 보았다. 여기까지는 ‘뭔가 즐거운 일이 많겠지.’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날씨는 너무 뜨거웠고 가만히 있어도 등줄기에는 땀이 줄줄 흘러내렸지.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너희들이 잘 견뎌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내일 아침 집에 가면 안 됩니까?” “이런 정도를 못 참는 놈들이 사회에 나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 “내일 가버리면 여기 계신 분들이 얼마나 실망을 하시겠으며, 너희들 마음도 찜찜할 것이다.” 1시간 정도 작업후 포기하려는 너희들을 나무라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지. 너희들 무더위 속에서 에어컨도 가동 안 되는 구형 차량을 타고 이동하면서 괴로웠을 것이고, 컨테이너 박스 속에서 생활하느라 불편했겠고, 뙤약볕 속에서 땅을 파고, 긁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여하튼 힘들었지만 무사히 일정을 마쳤다. 나는 단언한다. 이번 체험이 너희들에게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시간이었고,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는데 성장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너희들은 아마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번의 체험학습과 같이 힘든 과정을 겪지 못했을 것이다. 너희들은 힘든 과정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우고 인내력을 길렀을 것이다. 그리고 멀리 공주에서부터 2시간 동안 이동하여 하루 종일 일하고 3만 원 벌어 가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을 보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을 것이며, 우리 부모님께서 나를 키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을 고생을 하시고 계신가를 느꼈을 것이다. 선생님은 늘 너희들에게 땀 흘리는 가운데 즐거움이 있음을 강조한다. 최선을 다한 뒤에 찾아오는 노동의 대가, 땀 흘리며 운동한 뒤에 오는 상쾌함, 열심히 공부한 뒤에 얻는 결과에 대한 보람 등이 그것이다. 힘들여 얻지 않은 즐거움은 인간을 타락시키고 파멸시킨다. 나는 이번 발굴 현장체험학습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힘들었지만 일정을 끝까지 마친 너희들을 대견스럽게 생각한다. 고맙다. 사랑하는 제자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