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전체기사 중 98,722건의 기사가 검색되었습니다.
상세검색방학을 맞아 그동안 미뤄 두고 읽지 못했던 책을 읽으며 다소 여유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며칠 전에는 같은 시골 학교에 근무하다가 재임용고사를 치르고 도시로 입성한 후배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그 후배 왈, "선생님 저는 괜히 도시로 왔나 봐요. 제 체질이 아니예요. 자그마한 시골학교에서 동료교사들과 아이들과 가족처럼 친하게 지내던 때가 행복했어요."하면서 한숨을 쉬는게 아닌가. 누구는 도시로 들어가지 못해서 안달인데 염장 지르냐? 하며 웃었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방학식날 이런저런 시상을 한꺼번에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후배의 담임반 아이들 몇 명도 상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들이 친구가 상을 받을 때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더란다. "얘들아 친구가 상을 받으면 축하의 박수를 쳐줘야지."하면서 선생님이 열심히 박수치면서 박수치기를 종용했지만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더란다. "왜 박수를 치지 않는 거야?" 하고 물었더니 "내가 상을 받지도 않는데 왜 박수를 쳐야 되요?"하며 오히려 반문을 하더란다. 후배는 친구가 상을 받을때 뿐만 아니라 매사 아이들이 모두 이기적이고 남에 대한 배려나 이해심이 없다고 푸념을 했다. "물론 도시 아이들이 시골 아이들보다 대부분 더 똑똑해요. 학기중은 물론 방학중에는 학급의 20% 이상이 해외연수를 가고, 나는 켤 줄도 모르는 바이올린도 켜고 영어 발음도 교사인 나보다 나아요. 그렇지만 누가 아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요?"하고 후배는 한숨을 계속해서 내 쉬었다. 아직 도시의 학교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는 후배의 사소한 교단 부적응현상 일수도 있지만 절대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 아이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을까? 아이들은 어느새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아이들고 길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대도시 아이들이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을 저 지경에 이르게 한 학부형과 학교와 교사는 무언가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요즘의 아이들은 대부분 한 자녀 가정이나 두 자녀 가정의 아이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나치게 소중하게 관리 되어지고 길러지고 있다. 부모의 아낌없는 투자를 받으며 '귀한자식 매 한대 더 치라'는 말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아이들은 남에 대한 배려를 배우지 못했고, 남에 대한 이해나 양보를 배우지도 못했다. 남보다 앞서야 하고 남보다 잘나야 하고 친구가 아니라 내가 1등을 해야 하고 내가 상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이 험한 경쟁사회에서 낙오되지 않고 남보다 더 많이 누리며 행복하게 살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보다 잘하는 친구가 예쁘기는커녕 오로지 질투의 대상이거나 경쟁의 대상이거나 혹은 무관심의 대상인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나 혼자만 잘 살면 되는 세상이 아니다. 이웃이 모두 굶으며 고통 받고 있을 때 저나 제 식구만 배부르게 먹는다고해서 행복하다면 그것은 참다운 인간적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옛날 이야기 중에 흉년에 부자가 곳간을 헐어 이웃을 먹여 살렸다는 이야기도 심심잖게 나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6,70년대를 거치면서 보릿고개를 넘으며 굶주림에서 허덕이던 시대를 건너 왔다. 이제는 우리 아이들에게 타인에 대한 배려나 이해와 사랑을 가르치고 우리사회는 나 혼자만 잘 살면 되는게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임을 가르쳐야 할 때다. 그것이 우리를 인간적인 삶으로 이끌고 삶의 질을 향상시킬 것이다. 친구가 무언가 잘해서 상을 받을 때는 축하의 박수 정도는 아낌없이 쳐주는 예쁜 아이들로 길러 보자.
교원의 정기 인사철인 2월. 각급 학교와 교육기관에서 헤어지는 사람들과의 작별을 아쉬워하는 송별연이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짧게는 1년 길게는 4-5년 동안 한 학교에서 근무하다가 제자들과 헤어지는 선생님들의 마음은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개구쟁이들과 생활하면서 고운 정 미운정이 들었는데 막상 헤어지려고하니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어찌하랴 ! 선생님의 속을 무던히도 썩이던 아이도 있었고 가끔씩 깜짝이벤트로 선생님과 반 아이들을 웃겼던 아이도 있고 친구들과 자주 싸워서 학부모로부터 항의전화에 속상해 했던 일들도 이제는 하나의 추억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들이다. 선생님과 헤어지기 싫어서 매달리는 아이들의 천진함에 먼 산을 바라보며 속으로 우는 선생님들도 있을 것이다. 지금보다 못살았던 오래 전의 송별연은 지금보다는 더 순수하였고 헤어지면 다시는 못 만나는 줄 알고 2차 3차를 하면서 밤을 새워가며 아쉬운 작별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식사 한 끼 나누고 너무 가볍게 작별인사를 나누며 헤어지는 형식적인 송별회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사회가 변할 탓일까 인정이 메말라가는 것일까? 물론 2차로 노래방까지는 가지만…. 금년 2월에 정년을 하시는 어느 교장선생님은 송별연이 있을 때면 가시는 분에 대한 아쉬움을 담은 송별시를 지어서 직접 낭송해주신다. 송별연은 의미 있는 자리가 되고, 가시는 분에게는 오래도록 추억에 남게 해주는 아름다운 이벤트를 만들어 주셨던 분이 생각난다. 우리학교 송별연은 시골읍내 바다횟집에서 가졌는데 인사말이 있고 술잔이 오고가며 이야기 꽃이 피었는데 그동안 대화의 기회가 부족했었는지 평소에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작별을 앞두고 모두 털어 놓는다. 즉 본심이 나오는 것이었다. 진작 이렇게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지 못한 아쉬움도 남았지만 이래서 송별연과 함께 인과 관계를 정리하는 기회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자리가 없이 마음속에 묻고 작별을 하면 풀지 못하는 마음의 응어리가 오랜 세월 쌓여 몸과 마음의 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나이 어린 유치원 선생님이 전근 가는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눈물을 펑펑 쏟는 것이 아닌가? 사립유치원에서 근무하다가 임용고시를 거쳐 1년 전에 병설유치원에 와서 열정을 다해 원아들과 항상 밝게 생활하던 선생님이 우는 바람에 몇몇 선생님의 눈가에도 작은 이슬이 비치는 것을 보고 선생님들의 순수한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송별회를 마치고서 느낀 점은 술잔을 주고받으며 평소에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눈 것은 매우 뜻 깊고 의미 있는 자리였다는 것과 그래도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해서 하지 못한 이야기는 편지글이나 메일 등으로 주고받으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전임지의 가족을 생각하며 아름다운 추억을 가슴에 간직하고 학교생활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올해 신학기부터 전국의 모든 초·중·고등학교에서 월2회의 토요휴업을 실시하게 된다. 형제자매가 서로 다른 학교에 다닐 때의 사정을 감안하여 작년(2005학년도)과 마찬가지로 전국의 시·도 교육청이 매월 2,4주 토요일을 휴업일로 하기로 했다. 타당성있는 결정으로 본다. 교육부는 올해 월 2회의 주5일 수업제 실시결과를 토대로 내년 이후의 실시방안을 결정하기로 했다고 한다. 즉 올해와 같이 월 2회를 1년 더 실시할 것인지, 아니면 2007학년도 부터 전면 시행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올해 7월 부터는 종업원 100인 이상 300인 미만의 사업장이 주5일 근무제에 들어가게 된다. 또 2007년 7월 부터는 50인 이상 100인 미만의 사업장이 주5일 근무제에 들어가게 된다. 이는 2007년 7월이 되면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주5일 근무제를 실시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학교도 당연히 내년부터는 주5일 수업제를 전면시행해야 옳다. 부모가 쉬는 경우가 대부분인 상태에서 학생들만 학교에 간다는 것은 부모와 학생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일부의 경우는 사정에 따라서 주5일 근무제 실시가 어려운 사업장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사정에서 교육부는 아직도 주5일 수업제의 결과를 토대로 다음해의 실시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한다. 운영 결과라는 것이 결국은 학생들의 학력저하가 있었느냐는 것과 토요휴업일에 나홀로 학생들에 대한 결과일 것이다. 그것은 이미 시범운영할 때부터 대두되었던 문제이다. 그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5일 수업제의 전면시행을 미룬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올해 전면시행을 하거나 내년에 전면시행을 하거나 그 결과는 대동소이하다는 판단이다. 어차피 수업시수가 줄면 학생들의 학력저하현상은 어느 정도 나타날 것이고, 나홀로 학생도 일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주5일 수업제 전면시행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그런 문제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기에, 학교의 주5일 수업제 도입을 늦추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다른 방안을 찾아야 옳다고 보는 것이다. 수없이 지적되어온 문제를 문제삼아 자꾸 시행시기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이미 문제점은 모두 드러났기 때문에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 해결책이 주5일 수업제 실시를 뒤로 미루는 것이 될 수 없다. 지금이라도 다른 방안을 찾도록 해야 하며, 주5일 수업제의 전면시행은 내년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매년 새학기가 되면 각급학교에서 학교교육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 계획은 책자로 제작되어 년간 교육활동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1년 교육의 성·패를 결정지을 수도 있는 교육계획서 작성에 구성원 모두가 매달리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각 부서별업무 및 각교과별 활동, 학교의 특색사업과 역점사업 등을 구상하여 실천가능하게 설정하기 때문이다. 이 교육계획서 작성은 학교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거의 같은 틀에서 작성하게 되는데, 여러가지 항목을 포함하게 되며 학년말에 가서는 이를 토대로 평가를 거쳐 다음학년도의 새로운 계획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교육계획서에는 각 시·도 교육청의 년간 계획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항목이 많고, 특히 각 교육청의 특색을 잘 살리는 방향으로 작성되게 된다. 이들 중에서 꼭 포함되는 것이 바로 특색사업과 역점사업이다. 이 특색사업과 역점사업은 시·도교육청의 그것을 기본으로 지역교육청 나름대로 가공하여 세우게 된다. 교육청의 사업을 일선학교에서는 교육계획에 포함하여 교육계획서를 작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특색사업과 역점사업이 매년 같은 사업을 하면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학년도마다 약간은 변화가 생기게 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다소 무리한 사업이나 현실성이 떨어지는 사업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대부분은 학교에서 꼭 필요한 사업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간혹 있다는 것이다. 특색사업과 역점사업의 설정과정에서 학교현실이 고려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모든 학생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사업을 집중적으로 실시할 필요성이 있다. 현재의 사업들이 대부분 현실적이긴 하지만 좀더 현실적이고 실효를 거둘수 있는 사업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청등의 교육행정기관은 물론, 일선학교의 교원들 역시 좀더 연구하여 깊이 생각하여 사업을 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새학기를 앞둔 시점에서 이를 정할 것이 아니고 좀더 시간여유를 두고 검토한 후 결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탈북 청소년이 모여 공부하는 대안학교의 대학 진학률이 80%를 기록해 눈길을 끌고 있다. 올해 서울 당산동에 있는 탈북 청소년 학교인 '셋넷학교'를 졸업하는 10명 중 8명은 어엿한 대학생이 된다. 2004년 9월 개교한 셋넷학교는 정규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한 스무살 안팎의 탈북 청소년 23명이 모여 공부하고 있다. 올 졸업생의 합격자 분포를 보면 중앙대와 숙명여대가 각각 3명이고 한국외국어대와 명지전문대가 한 명씩이다. 탈북 학생 대부분이 중국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전공은 단연 중어중문과. 이 때문에 8명 중 5명이 인문학부에 진학했고 나머지는 건축학과와 신문방송학과, 사회복지학과를 지망했다. 중앙대 신방과에 진학하는 이혜란(19)양의 장래 목표는 방송기자가 돼 베이징 특파원으로 일하는 것이다. 이양은 22일 "늘 꿈꿔온 목표에 한 걸음 다가가게 돼 기쁘다"며 "베이징 특파원이 되서 탈북자 모습을 편견 없이 알리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진학이 결정된 이광진(21)씨는 국제 시민단체(NGO)에서 일하는 게 목표다. 이씨는 "재작년 지진해일(쓰나미)이 동남아시아를 덮쳤을 때 TV를 통해 신음하는 현지 주민을 본 뒤 해외 구호활동을 인생의 최대 목표로 정했다"고 말했다. 외대에서 중국어를 공부한 뒤 무역회사를 경영하고 싶다는 최혁철(25)씨는 "중국과 교류가 늘어날 것에 대비해 중국어를 공부하기로 했다"며 "대학에서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고 했다. 높은 대학 진학률은 입시 위주 교육이 아닌 전인교육 속에서 얻어낸 성과이기에 의미가 더욱 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셋넷학교의 교훈은 당당하면서도 유연하게 살자는 뜻의 '뚜벅뚜벅, 사뿐사뿐'. 박상영 교장은 "커리큘럼 마련 단계부터 적극 참여토록 하는 등 동기 부여에 힘을 쏟으면 학생들이 배우는 재미를 느낀다"며 "학생들이 탈북자 출신이라는 정체성을 잊지 말고 사회에 안착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북도교육청이 산하 법인인 학교운영공제회의 수익사업을 돕기위해 교육감 명의의 공문을 발송하는 등 특혜성 지원이라는 논란이 일면서 민간업체들이 반발하고 있다. 22일 전북도교육청과 전북도 학교운영공제회, 도내 소방방재 업체 등에 따르면 학교운영공제회는 지난 16일 소방안전 점검업으로 사업자 등록을 마치고 도내 초.중.고교를 대상으로 소방 점검을 대행해주는 수익사업에 나섰다. 공제회 관계자는 "학생 1인당 회비를 받아 운용되는 학교 안전사고 보상금이 3년 전부터 적자로 돌아서 기금 잠식이 우려되고 있다"며 "자립재정 확보차원에서 자체 수익사업에 뛰어들게 됐다"고 말했다. 도교육청은 공제회측의 요청에 따라 지난 17일 도내 학교에 교육감 직인이 찍힌 5장 분량의 협조요청 공문을 일괄 발송했다. 이 공문은 각 학교장을 대상으로 공제회가 진행중인 소방안전 점검 사업에 적극 협조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학교의 소방안전 점검 업무를 대행해주는 민간 소방방재 업체들이 "도교육청이 사단법인에 지나지 않는 학교운영공제회를 위해 협조요청 공문을 보내 특혜성 지원을 했다"며 반발하고 있다. 전주 J소방방재업체 김모(48)씨는 "도교육청이 공제회가 추진하는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교육감 명의로 협조 요청 공문을 보낸 것은 권한 남용"이라며 "교육청이 보낸 협조 공문을 무시할 수 있는 학교장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씨는 "도교육청이 산하 법인 형태로 운영되는 공제회를 위해 민간사업 영역을 침해했다"며 "실제 올해 재계약 건수가 전년 대비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소방방재 업체 관계자도 "공제회는 민간 업체와 공정한 경쟁을 통해 계약을 수주하는 것이 아니라 도교육청을 통해 일선 학교장에 간접적으로 압박을 행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대해 도교육청 관계자는 "공제회 정관에 따라 이사회 의결을 거친 합법적인 수익사업"이라며 "공문발송은 공제회 이사장이 현 부교육감인 만큼 산하 기관에 대한 지원 차원으로 이뤄졌다"고 해명했다. 사단법인 형태로 지난 91년 설립된 전북도 학교안전공제회의 기금 규모는 지난 2000년 35억7천만원에 달했으나 교내 안전사고 급증, 이자수익 감소 등에 따라 지난해 34억6천700만원으로 줄어들었다.
2월 교무실 칠판은 희비가 교차한다. 또 이별의 아쉬움과 만남의 설렘이 섞여 있다. 바로 발령 때문이다. 내신을 하여 원하는 곳에 발령이 난 선생님과 미발령 또는 원하지 않는 곳에 난 선생님. 그 학교를 떠나는 선생님과 새로 부임한 선생님. 누가 그랬던가 인생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라고. 또,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모두 다 소중한 인연이다. 얼마 전 정년 퇴임식을 앞둔 교장선생님의 편지를 받았다. 교육청에 근무할 때 장학관으로서 지도를 하여 주신 분이다. 그 분은 우리가 인생에서 한 번 만나는 인연을 이렇게 말한다. "지구의 어느 한 곳에 바늘을 꽂아놓고, 달에서 좁쌀을 떨어뜨려 그 바늘에 좁쌀이 맞는 확률이다."라고. 그렇다면 우리 선생님들이 한 학교에서 2년 내지 3년간 동고동락하며 근무하는 인연은 도대체 어떤 인연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하찮은 일 갖고 얼굴을 붉힌 내가 부끄럽기만 하다. "좀 더 큰 그릇이 되자." "선생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선생님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사람이 되자." "새학년도엔 물심 양면으로 베풀어 보자." 교무실 칠판에 붙은 '부임 환영' 챠트를 보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저녁을 먹고 난 뒤, 아내가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며 나를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런데 아내의 표정은 평소와는 달리 진지해 보였다. "무슨 이야기인데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그래요?" 아내는 내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누군가를 의식하기라도 하듯 조금 열린 안방 문틈으로 거실의 동향을 살피는 것이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누군가가 엿듣기라도 할까봐 안방 문을 꼭 잠그기까지 했다. 아내의 그런 행동이 내 궁금증을 더 자아내기 시작하였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여보, 이제부터 제 이야기 잘 들어야 해요." "아니, 무슨 이야기인데?" "OO이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어요." "초등학교 5학년이면 당연한 일 아니겠소?" "그런데 이것 좀 보세요?" 아내는 서랍에서 수첩 하나를 꺼내들더니 내게 보여주었다. 수첩을 펼쳐보니 막내 녀석과 여자 친구가 주고받은 편지 내용이 깨알 같은 글씨 크기로 날짜별로 적혀져 있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서로 우정을 확인이라도 하듯 편지의 각 장마다 "OO ♡ OO"와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하물며 어떤 페이지에는 유명한 시인의 '연애시'까지 적혀져 있어 두 사람의 우정이 얼마나 돈독한지를 엿볼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교환 일기를 다 읽고 난 뒤 내 입가에는 왠지 모를 미소가 지어졌다. 내 반응이 시큰둥하자 아내는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내는 내가 그 내용에 무척 놀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여보, 아이들 심각하죠? 그렇죠?" "이 녀석들, 멋있지 않소? 요즘 대부분의 아이가 이메일이나 채팅으로 서로 생각을 주고받는데 말이요." "그리고 당신 OO이 방에 들어갈 때 꼭 노크하고 들어가세요." "왜? 무슨 일이 있었소?" 내 말이 끝나자 아내는 노크도 하지 않고 막내 녀석의 방에 들어갔다가 호된 소리를 들었다는 며칠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최근 들어 무척 짜증을 많이 낸다는 이야기와 몇 시간을 방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이야기로 보아 사춘기에 접어든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녀석에게 사춘기가 왔나 보오." "사춘기요? 설마?" "내 짐작이 맞을 거요. 그러니 당신도 녀석에게 지나친 간섭을 하지 말아요. 특히 사생활 침입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네. 알았어요." 아내는 막내 녀석의 수첩을 몰래 가지고 온 것이 미안하다는 듯이 계속해서 수첩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아내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내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무엇보다 늘 철부지로만 알았던 녀석이 이성에 눈을 떠 정신적, 육체적으로 성숙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그 날밤. 아내와 나는 잠이 든 녀석을 바라보면서 누구나 한번쯤 겪어야 할 이 시기를 현명하게 잘 대처해 나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학업에 짓눌려 ‘분재’처럼 살고 있는 우리 아이들 분재를 보며 아는 집에 갔더니, 분재 자랑에 침을 튀긴다. 이렇게 잘 가꾼 솔 분재는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부르는 것이 값이라며…… 분명 생화인데 생화 같지 않은, 정일품 소나무를 백분의 일로 줄여놓은 듯한 참으로 훌륭한 작품! 이 정도면 키웠다기보다는 만든 것 “왼쪽으로, 아니 약간 오른쪽으로 구부려---” “가운데 가지는 조금 뒤틀리게 하고---” 철사에 의해 움직이고 고정되는 나뭇가지 도무지 자연스럽게 숨쉬도록 놔두지를 않는다. 나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하라는 대로 하는 것 먹으라는 대로 먹고, 크라는 대로 크고, 뻗으라는 대로 뻗고, 보라는 대로 보고…… 한 발짝 다가가 분재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우리에 갇힌 야수의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본다. 그 숨 막히는 눈빛 속에서 나는 들었다. 좀 내버려 달라는 우리 아이들의 하늘빛 아우성을! 무조건 뛰어나야 대접받는 세상 옷에다 사람을 끼워 넣는 교육…… 장자와 루소가 흘리는 눈물 때문인지 창밖에는 때 아닌 비가 내리고 있었다. --- 시 : 김형태 분재(盆栽)의 사전적 의미는 ‘수목(樹木)을 분(盆)에 심어 아름답게 가꾸어가며 생활 속에서 보고 즐기기 위한 원예기술의 한 분야’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이 분재를 예술의 경지로까지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전에 분재에 조예가 깊다는 분의 댁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으로부터 ‘분재학 강의’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분에 따르면 “분재는 자연의 초목을 분중(盆中)에 재배하여 아름다운 자연의 일부를 표현하는 예술의 한 장르요, 자연적이 아니면서도 자연의 미를 추구하여 자연을 잃지 않고 인고로 극히 자연스럽게 자연경관을 창작하는 조형예술, 아니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어 이루어지는 생명예술”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난히 ‘자연’을 강조하더군요. 정말 문외한인 제가 보기에도 탐스럽고 기품 있고 아름답고 신기한 자태의 분재들이었습니다. 견물생심이라고 저도 집에다 이런 분재 하나 키워봤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분재는 나무와 화분과 공간의 조화가 이루는 종합예술”이라는 그분의 말씀에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이놈처럼 줄기가 곧게 자란 것은 직간(直幹)이라고 하고, 저놈처럼 나무줄기가 휘어져 있는 것은 곡간(曲幹)이라고 합니다.” “그럼 이것도 곡간이겠네요?” 제가 나무줄기가 마치 용트림하듯 구불구불 구부러져 올라간 분재를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아, 그렇게 심하게 구부러진 것은 반간(蟠幹)이라고 합니다. 반간형의 나무는 고색창연한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강한 생명력까지 느끼게 하지요. “어떻게 하면 이렇게 할 수 있나요?” “아, 그거야 철사걸기를 하면 되지요.” 그러고 보니, 그 솔 분재는 온몸에 칭칭 철사를 감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갑자기 그 나무가 불쌍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보는 사람 즐겁자고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이 분재들은 과연 행복할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더군요. 아무리 좋은 시설을 갖추어 주어도 동물원의 동물이 행복하지 못하듯, 아마 이 분재들도 행복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과연 이 분재들이 행복할까요?” 저의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했는지 잠깐 머뭇거리던 그분은 “그럼요. 때 맞춰 물주고, 영양제 주고, 소독하고, 분갈이하고… 행복에 겨운 나무지요. 세상에 어떤 나무가 이런 후한 대접을 받을 수 있겠어요. 그러나… 그래도… 어디 자연에서만 하겠어요? 하면서 말끝을 흐리더군요. 그 분도 모르지는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분재들을 보면서 우리나라 아이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뜨겁다 못해, 지나친 부모들의 교육열로 인해, 오늘도 꼭두각시처럼 오로지 공부에 올인해야만 하는 우리 아이들, 방학 중임에도 무거운 책가방을 짊어진 채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이 학원 저 학원을 전전해야하는 우리나라 학생들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얼마 전, 과도한 학원수강에 힘들어하던 초등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성적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중·고생들이 매년 크게 늘고 있어 안타까운 마당에, 초등학생까지 학업 부담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니 소식은 참으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지난해 ‘건강사회를 위한 보건교육연구회’와 전교조 보건위원회가 공동으로 실시한 ‘전국 초중고 학생 건강상태와 의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42.9%가 ‘자살을 생각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자살의 동기를 묻는 질문에는 전체 응답자 가운데 19.4%가 ‘성적’을 꼽아, 지나친 학업 부담이 초·중·고 학생들을 극단으로 몰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실제로 지난 2004년 한해 동안 자살한 초·중·고생은 모두 101명으로 지난 98년 이후 매년 80~20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지난해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10대 청소년 사망 원인 가운데 자살은 세 번째로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행복하지 못한 원인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하나가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치솟는 집값이요, 또 하나가 부모와 아이들을 멍들게 하는 교육문제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교육열이 높은 나라입니다. 부모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아이들은 그것을 욕심이라고 말합니다. 어쨌든 그 뜨거운 교육열 덕분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만들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과도한 교육열은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까지 불행하게 하고 있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집집마다 교육비 부담으로 등이 휠 정도입니다. 과외나 학원 수강을 하지 않는 초·중·고생이 거의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는 이미 과외공화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입시를 위한 과외는 말할 것도 없고, 예체능까지 과외하는 풍조가 만연되어 갈수록 전국이 학원의 숲으로 뒤덮여가고 있는 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분명 우리나라는 잘 살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경쟁이 치열한데, 못살래야 못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과연 행복한 나라가 될까? 라는 질문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살맛나는 나라, 웃음이 넘치는 나라, 곧 행복한 나라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 오마이뉴스와 서울방송(SBS)에도 송고합니다.
대통령자문 교육혁신위원회(위원장 설동근)는 21일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교원정책 개선 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를 가졌다. 이날 발제자로 나선 백복순 한국교총 정책본부장이 교장임용 및 교원승진제도 개선 방안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연초라 각급 학교에서 인사 문제로, 교무 분장으로 방학이지만 담당 업무를 맡고 있는 부서와 부서장 그리고 관리자는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다. 특히 담임을 배정 받고자 하는 교사와 배정 받지 않으려는 교사를 놓고 관리자들은 갈등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보편적인 입장에서 생각할 때 교사라면 담임이라는 직책이 있어야 그래도 교사다운 면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더 많아 보이는데. 담임을 맡지 않으면 특히 작은 학교에서는 소수의 교사만을 제외하고는 다 담임을 맡고 있기에 소외감을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거대 학교에서는 담임을 맡고 있지 않은 교사도 상당하기에 크게 소외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문제는 왜 교사가 담임을 맡지 않으려고 하느냐에 있다. 교사는 진급을 하려고 하면 담임의 경력은 진급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담임을 맡아 문제를 야기하는 것 보다는 편안하게 교직 생활을 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는 것 같다. 담임을 하면 담임으로서의 자부심과 교사로서의 떳떳함은 졸업 후 찾아오는 제자들을 대할 때 느끼게 되는 보람이 바로 담임으로서의 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것은 개개인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담임을 하면 늦게까지 남아 자율 학습 감독도 해야 하고 학급에 대한 자잘한 업무도 수행해야 하는 등등의 구차스런 일을 하기 싫어하는 교사들이 늘어난다는 것도 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담임으로서의 수당이 교사들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도 한 요인이지만, 아파트 건설 현장의 일용노동자 3일 정도의 임금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교사의 위상을 바로 세우는 것은 담임의 위상을 바로 세우는 길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담임의 경력도 교감으로 승진하는 데 경력 점수를 과감하게 부여하는 새로운 멜티 영상으로 교사들의 내면에 비춰지도록 해야 한다. 담임의 경력을 10년으로 하되 반드시 그 기간에 80% 이상은 “우” 이상의 평점을 받는 자에게 승진에 유효권을 주는 방안이 고려된다면 담임에 대한 기피 현상이 여전히 일어날까? 또 담임으로서의 바른 자세도 필요하지만 담임의 업무를 탁월하게 수행한 교사에게 주는 담임 표창 제도도 고려되어야 한다. 담임이 학생들에게 다정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상담에 임하는 모습이 보일 때 각 학급에서는 언제나 웃음 띤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 나이가 들고 직업에 대한 무사안일주의로 빠지는 사례를 막기 위해서라도 담임에 대한 새로운 대안이 고려된 것도 교장초빙제에서 교사 끌어가기가 나온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수한 교사를 선발하는 취지도 있지만 현재 우려하는 것은 정실주의에 빠질 우려가 더 강하게 나타날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담임은 가정에서 어머니와 같은 역할이요, 아버지와 같은 입장이다. 교사에게 보람을, 학생에게 꿈을, 학부모에게 만족 줄 수 있는 학교가 되자고 백 번 구호로만 외칠 것이 아니라 교사로서 떳떳하게 살아가는 길을 터 주어야 한다. 물질적으로 보상이 어려우면 교사를 뽑는 데도 교사 고시제를 도입하여 교사의 위상이 사회 어느 계층보다 존경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보람을 만들어 내는 새로운 조치를 취해야만 교실에 들어가 학생들과 즐거운 생활을 하고자 하는 교사가 늘어날 것이다. 갈수록 살벌해져 가는 학교의 현장은 이제는 교사를 존경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학부모의 감시의 대상에서 학생들의 따가운 눈초리에서 시달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해도 부정할 자는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부터 학교 교사들의 돈봉투 문제를 들고 나오면서부터 이제는 교사들의 능력 문제를 들고 나와 학교 교사 칭호를 “선생님”에서 “교사”로 다운시켜 명명하고 있음을 느낀다. 학원의 교사를 교사로 여겼던 과거가 이제는 학교의 선생님도 “교사”라는 언어적 위축으로 싸늘하게 받는 것도 점점 피부로 다가오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교사 개개인은 자기의 전문적인 소양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연 학교 현장이 언제까지 파고에 흔들리고 있을 것인지 그것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EBS가 논술교육을 대폭 강화한다. EBS 권영만 사장은 21일 봄편성 및 정책 설명회를 갖고 “양질의 논술교육을 제공함으로써 사교육비를 절감하고 지역간, 계층간 격차 해소에도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EBS는 향후 3년간 총 68억을 투자해 ‘통합교과형 논술 커리큘럼’을 개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은 사고력을 키우기 위한 다양하고 흥미 있는 콘텐츠를, 고등학생은 적응력 위주의 강의형 콘텐츠를 활용하게 된다. 특히 대학입시를 앞둔 고등학생들은 단기 처방책으로 방과 후 학교를 통해 EBS 논술 강의를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할 방침이다. 배경지식 등은 온라인을 통해 제공하고 교실수업은 교사의 첨삭지도, 토론 위주로 운영하게 하는 것. 박사급 강사를 지역순회교사로 운영하고 교과별로 ‘논술 접목수업 핸드북’을 개발하는 것도 고려 중이다. EBS는 우선 3월에 고등학생용 및 교사용 논술교재를 각각 내놓는다. EBS 관계자는 “사교육 시장에 난립한 논술교재와는 차별화된, 사고력을 함양할 수 있는 논술교육을 펼 것”이라면서 “현장 교사들이 학생을 일대일로 지도할 수 있는 교재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9월에는 초등학교 1~6학년별 논술교재를 제작하고 내년 3월에는 중학생용 논술교재가 제작될 예정이다. EBS는 현재 인터넷 수능사이트(www.ebsi.co.kr)를 통해 운영중인 논술방 자료를 대폭 강화해 3월 중순에는 고1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새로운 콘텐츠도 탑재한다는 계획이다. 한편 EBS는 봄편성을 통해 ‘방과 후 학교’를 겨냥한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선보인다. ‘방과 후 반가운 시간’(월~금 오후 2:00~2:20)은 초등학교 때부터 기승을 부리는 사교육비 절감을 위해 탄생한 프로그램이다. 월요일은 요리와 과학을 주제로 한 ‘요리쿡! 사이쿡!’을, 화요일은 ‘상상공상 미술방’, 수·목요일은 ‘뻔뻔한 영어’, 금요일은 ‘한자지존 도로롱’ 등 요일별로 주제를 다르게 배치했다. EBS측은 “학교 현장에서 방과 후에 활용이 가능하도록 제작했다”면서 “앞으로 논술이나 외국어 분야 콘텐츠도 개발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외에도 옛날부터 현재까지 교과서 속에 담긴 지식을 다시 살펴보고 재미있게 검증한 ‘지식 다락방’(월 오후 8:05~8:55), 40여명의 고교생 앞에서 도올 김용옥이 강의를 펼치는 ‘논술세대를 위한 철학교실’(월·화 오후 10:05~10:55) 등도 새롭게 선보인다.
늘그막까지 고우시던 친구엄마 치매 7년째 혼잣말 길게 이어진다. 풍골만큼 인자하던 약국집아저씨 자식 친구 못 알아보고 천정만 바라본다. 우스갯소리 잘하던 부산아저씨 정신 놓느라 말끝마다 웃음만 짓는다. 명절이라고 고향 찾은 우리엄마 뜨럭 오르내리며 한숨 길게 내쉰다. 고향 더 그리운 나이 되었는데 반겨주던 사람들 하나, 둘 세상을 떠난다. 어린시절 새록새록 떠오르는데 빛바랜 추억 자꾸 망각의 강을 건넌다. 작년 구정 때 친구 몇이 어울려 마을 어른들께 세배를 다녔다. 그날 가는 세월을 거역하지 못한 채 병으로 고생하시는 어른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내 기억 속에는 아직도 어른들의 건강했던 젊은 시절 모습이 많이 남아 있기에 더 안타까웠다. ‘고향유감 2’라는 짧은 글로 아쉬움을 달랬다. 풍골만큼이나 인자하시던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올 구정 때는 병환이 더 심하다고 해 인사를 못 드린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공직에 오래 근무하셨고, 자식을 의사로 키운 덕망 있는 분이지만 5년여를 병환으로 고생하셨으니 이제 좋은 곳으로 편안하게 영면하셨으리라 믿는다. 장지가 마침 어린시절 우리들의 놀이터였던 고향 뒷산이라 오랜만에 고향냄새에 흠뻑 젖었다. 무더운 여름에는 풀 뜯기던 소를 말뚝에 매어 놓은 채 나무사이를 뛰어다니며 총싸움을 하고, 눈이 많이 오는 겨울이면 어지럽게 널려있던 동물들의 발자국을 쫓아 토끼몰이를 하던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뛰놀던 때가 벌써 40여 년 전의 일이다. 장지 옆에 차려진 술상에서 옛 추억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고우시던 친구엄마가 병환으로 고생하신 게 벌써 15년째라는 것도 알았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간병하는 자식들은 지치기 마련이다. 병 수발을 하느라 고생이 많으면서도 내색을 하지 않는 친구의 형에게 소주잔을 건넸다. 장지와 가까운 산길에서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마을의 구석구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추억 찾기를 했다. 통장 일을 보며 고향을 지키고 있는 친구가 자기네 집에서 소주 한잔하고 가라며 손을 잡아끈다. 자리만 옮겼을 뿐 몸 아픈 고향 어른들 걱정, 살포시 숨어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고향의 옛 이야기가 또 이어졌다. 닭 한 마리 잡아달라는 농담을 던졌더니 친구는 집에서 키우고 있는 토종닭을 한 마리 자루에 담아 내차에 실어준다. 술에 잔뜩 취한 것이 고향냄새와 고향의 정 때문이었다고 핑계를 대도 될 만큼 고향을 가슴으로 느낀 날이다. 한편 ‘요즘 아이들은 고향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까?’가 궁금했다. 고향을 알게 하는, 고향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교육이 바로 나라사랑교육의 밑받침이 아닐까?
충남 태안의 한 어촌 주민들이 소규모 학교 통폐합에서 마을 초등학교를 지키기 위해 기존 어촌 주민들의 관행적 권리인 입어권(入漁權.공동어업권자의 어장에서 공동어업을 할 수 있는 권리)까지 포기하는 노력을 펼치고 있다. 태안군 소원면 파도리 주민들은 최근 회의를 열고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가 전입해올 경우 곧바로 입어권을 부여하고 입어금도 받지 않기로 했다. 이 마을의 경우 어촌계원으로 가입한 뒤 5년이 지나고 300만원을 내야 어업권을 부여받을 수 있으나 이를 과감히 포기한 것이다. 이는 마을에 위치한 파도초등학교 학생수를 늘리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파도초등학교는 학생수가 총 30명에서 지난 17일 6명이 졸업함으로써 도교육청이 제시한 통폐합 마지노선인 30명 미만으로 줄었다. 이대로 간다면 마을 주민 대부분의 모교인 파도초등학교는 조만간 인근 학교로 통폐합될 상황이다. 파도초등학교는 지난해 3월 통폐합 대상으로 꼽혔다가 4월에 한명이 전학와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난 바 있으나 이번에 6명이 졸업하면서 다시 통폐합 위기에 직면했다. 김필문 어촌계장은 "주민 대부분의 모교를 살리고 우리 자녀들이 불편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득권을 모두 포기하기로 했다"며 "이러한 사실이 널리 알려져 초등생 자녀가 있는 가족들이 많이 우리 마을로 전입, 초등학교를 지켜내기를 간절히 기원한다"고 말했다. 파도리 마을 전입을 희망하는 초등생 학부모는 파도초등학교 지키기 총무를 맡고 있는 박병철(☎ 017-421-9254)씨에게 문의하면 된다.
유치원을 유아학교로 변경하고 교육 대상 연령을 만 3세~5세로 명확히 하는 유아교육법 개정안이 제출될 예정이다. 한나라당 이군현(교육위원) 의원은 “유아교육법이 제정됐지만 여전히 영유아보육법이 적용 대상과 중복돼 혼란이 있고 유아교육의 공교육화를 앞당기기 위해 법안을 마련했다”고 취지를 밝혔다. 이에 따르면 유아교육법 제정 취지를 살리기 위해 현행 유치원을 유아학교로 변경하고, 원장은 교장, 원감은 교감, 원아는 유아, 원무는 교무로 각각 수정하도록 했다. 아울러 유아의 범위를 만 3세부터 초등교 취학 전까지가 아닌 만 5세까지로 규정하고, 유아학교 만5세에 대해서는 무상교육을 분명히 했다. 또 유아학교 종일반에 대해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도 의무화했다. 이 의원의 이번 법안은 유아교육을 학교의 틀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어린이집 등 보육시설의 반발을 살 전망이다. 같은 연령대의 아이를 놓고 유치원과 경쟁을 벌이는 구조 속에서 보육시설 측은 유치원이 ‘학교’가 될 경우 타격을 입게 될 것으로 보고 이를 반대하고 있다. 또 유아교육 대상을 만 5세까지로 못 박은 것은 초등 취학연령을 만 5세로 낮추려는 최근의 학제개편 논의를 겨냥한 것이어서 이를 둘러싼 논란도 치열할 것으로 보인다.
초등 교사와 학부모라면 ‘교과서 만화’를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만화 교과서는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현행 교과서를 만화로 옮긴 ‘만화교과서’는 ‘교과서’란 이름 때문에 만화책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 교사나 학부모도 꺼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시장에 ‘초등학교 교사’가 저자로 참여하는 경우도 늘고 있어 그 인기와 높은 관심을 짐작케 한다. ‘똑똑한 만화 교과서’의 저자인 서울 금양초 최미연 교사는 만화 교과서가 인기를 끄는 이유를 우선 “교과서를 재미있는 만화로 풀어 학습동기를 유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100% 만화로만 구성된 것들은 흥미위주로 흐르는 경향이 있어 오히려 학습의욕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다루는 영역도 교과목 뿐 아니라 속담·고사 성어 등 다양해
'올바른 우리 말글살이'를 시작하며 "'어제'라는 말도 한글이고, '오늘'도 한글인데 '내일'만 한자(來日)로 되어 있는 거 알아?" "그렇지. 근데?" "그래서 우리는 내일이 없는 민족이래." 어렸을 때 들었던 우스개 소리 아닌 우스개 소리를 또 들었다. 예전에는 이 말을 심각하게 받아 들여 무척 우울했었는데, 나이 먹고 들으니 아무렇지도 않다. 그래서 그랬는지 나 역시 무척 여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 대신 '모레'가 있잖아."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우스개 소리입니다. "아니, 그러는 일본 지네들은 오로지 '내일'(아시따/아스)만 있다면서? 그래서 '내일' 가지고 그렇게 따졌나? '어제'와 '오늘'도 자국어로 못 가진 우리보다 더 한심한 민족 주제에 당최 주제 파악을 못해요~." 이것은 한 누리꾼의 감정 섞인 댓글입니다. 어제와 오늘을 가리키는 우리말은 존재하지만 내일이란 우리말은 없어서 오늘까지도 우리는 한자어 '내일(來日)'을 빌려서 쓰고 있습니다. '점심'(點心)을 뜻하는 우리말도 없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내일과 점심이란 고유의 말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기막힌 사연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전통적으로 하루에 두 끼 먹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할 정도로 가난했으며 오늘 하루 허덕이며 살기도 벅찼기에 내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직 눈물겹게 헤쳐 나온 어제와 또 다시 뚫고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가난한 오늘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런 세월을 오래 보내다 보니 그간 형편이 많이 나아져서 하루 세끼에 참까지 먹으면서 점심과 내일이란 남의 말을 쓰게 된지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우리 민족은 여전히 과거지향적인 것입니다. 내일을 향한 시선이 결여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 사이에도 한 번 틀어지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구원(舊怨)으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이 땅의 정치지도자들이 미래지향적이지 못한 것도 역시 같은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목사님의 글입니다. 일제의 식민사관이 무섭긴 무서운 모양입니다. 일본이 우리 민족을 비하시키려고 한 말을 아직까지 신주단지 모시듯 앵무새처럼 따라하지를 않나, 일부 많이 배웠다는 분들 중에서는 한술 더 뜨니 말입니다. 역시 이름난 대면 알만한, 대학교수와 장관까지 지낸 분께서도 이것을 부정적으로 해석하여 '우리 민족은 내일은 생각하지 않고, 당장 지금만을 즐기는 민족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정말 이분들 말마따나 우리는 정말 '내일'이 없는(었던) 민족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엄지, 집게, 가운데, ( ? ), 새끼손가락' 등 손가락을 가리키는 우리말 중에, 네 번째 손가락을 가리키는 고유어가 없습니다. 그럼 처음부터 없었을까요? 분명히 예전에는 네 번째 손가락에 대한 명칭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네 번째 손가락을 가리키는 '고유어'보다 '한자어'를 더 선호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사라지고, 지금은 약지(藥指)라는 한자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내일에 해당하는 우리 고유어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것을 가볍게 여기고 한자를 더 귀하게 여기는 사이 없어진 것이지요. '토박이말 사전'에서 '내일'에 해당하는 낱말로 '올제', '하제', '후제' 등의 순우리말을 찾을 수 있습니다. * 올제 : 오늘의 바로 다음 날. 즉 `내일`을 뜻하는 토박이 말. 최초의 기록은 고려 때의 문헌인 에 '명일왈할재(明日曰轄載)'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내일에 대응되는 '할재(轄載)'의 소리값을 '하제, 올제, 후제' 등 사람마다 다르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백기완 님은 '올제'로, 진태하 님은 '하제'로, 천소영 님은 '후제'로 추정합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가볼 수도 없고, 고려 사람들은'할제(轄載)'을 과연 뭐라고 발음했을까요? 조선광문회의 광문회사전 원고본에는'내일'을 설명하며 '명일, 밝는 날, 낼, 흘제' 등의 명칭도 보이고, 송강 정철의 '가사와 태산집요 언해' 등에는 '후제'라는 명칭이 보입니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내일에 해당하는 순우리말이 있었음이 확실해졌습니다. 또한 외국인 로스는 1877년 우리말의 어휘를 모으며 '후체'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이로 보아 조선후기 사람들은 '흐제', '후제'라고 발음했을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본디 우리말로는 '내일'이 아니고 '낼'이었다고 합니다. 그 근거로 '낼'의 본디 모습이 사투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는 것이지요. "사돈, 언제가 장날여?" "낼이 장날여" "응, 그려어. 그라문 낼 장에서 만나." 위의 대화에서 보듯이 '낼'이 본디 우리말이라는 것입니다. 이 '낼'은 쓰임에 따라 '낼이', '낼은', '낼이여' 따위로 바뀐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쓰이던 '낼'이 한자의 영향 때문에, 한자말인 명일과는 달리 소리 값이 비슷한 '내일(來日)'로 굳어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마치 '새·하늬·마·높'이라는 본디 우리말이 지배 집단의 오랜 한문 숭상 때문에 '동·서·남·북'으로 바뀐 거와 같다는 것이지요. 이미 있어 온 우리말을 밀어내고 한자말을 주로 쓰게 한 그릇된 말글살이 정책 때문에 '낼'이 '내일'로 바뀌게 된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사랑은 움직인다'는 말처럼 "언어도 생물"입니다. 우리는 외래종 황소개구리로 인해 토종 참개구리의 숫자가 적어지자, 한동안 황소개구리를 잡자며 법석을 떨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다 참개구리를 다 잃고 나면 '황새 복원 작업'처럼 또 난리를 치를까요? 우리의 말글은 우리 겨레의 얼이자 원형질입니다. 우리가 우리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누가 소중히 여겨주겠습니까? 요즘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일부에서는 영어공용화 주장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문화의 중심은 "우리 말과 글"입니다. 만주족은 중원을 차지했으나 그 속에 묻혀 버렸습니다. 그들의 말과 글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바야흐로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영어 등 외국어를 배우느라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애를 먹고 있습니다. 물론 영어든 한자든 부지런히 배우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다만 그것을 배우는 열정 이상으로 우리말, 우리글에 대한 애정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요즘 영향력 있는 매체마다 '우리말 바로 알고 바로 쓰기'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저도 앞으로 이곳을 통해 을 연재를 하고자 합니다. 물론 저는 국어를 전공했지만, 그럼에도 다시 배우는 자세로 우리말글의 우수성을 소개하고 틀린 표현을 고쳐 드리는 등 한글학회와 국립국어원(구 국립국어연구원)의 도움을 받아 우리 겨레의 얼을 지켜나가는데 조그만 힘이나마 보태고자 합니다. 내일에 해당하는 낱말 하나를 잃어버려 '내일이 없는 민족'이라고 조롱은 조롱대로 당하고, 뒤늦게야 부랴부랴 사라진 순우리말을 찾겠다고 야단법석을 떠는 어리석음을 다시는 저지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우리는 결코 내일이 없는 민족이 아닙니다. 어제도 있고 오늘도 있고, 한자어, 일본어, 영어에는 없는 '그저께', '그그저께', '모레', '글피', '그글피'까지 있는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저력 있는 민족이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도 '우리말글 바로 알고 바로 쓰기 운동'에 함께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누가 소중히 여겨주겠습니까? "
이 맘 때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지 못했다 하여 크게 낙심하는 학생들을 봅니다. 또한 소망하는 직장에 취업이 되지 않았다 하여 고개를 떨구고 있는 젊은이들도 보게 됩니다. 그들의 모습이 마치 거센 눈보라 속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한 그루 겨울나무 같아 안쓰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한두 번 실패했다고 해서, 원하는 것을 이번에 얻지 못했다고 해서 마치 인생을 다 산 것처럼 털썩 주저앉아 눈물을 훔치고 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허탈하고 자존심 상하고 아프고 쓰라린 마음을 어디에 견주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눈물을 딛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안으로 웅크리고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 엄동설한과 소리없이 맞서 싸우고 있는 저 겨울나무들의 속내를 한번 마음의 눈으로 읽어보기 바랍니다. 동시에 마음의 귀로 그들의 목소리도 들어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마 여러분의 생각이, 아니 인생이 달라질 것입니다. 자연은 늘 우리의 위대한 스승입니다. 달려가면 언제나 반겨주는 고향집 어머니와 같은 존재입니다. 저도 오늘 밖에 나가 겨울나무를 한참동안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그에게서 한 수 배웠습니다. 핏기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남루하고 지친 표정의 거무튀튀한 나뭇가지, 말라붙을 대로 말라붙어 꼭 죽어 있는 것만 같은 겨울나무, 마치 저승길을 며칠 앞둔 병자의 얼굴 같았습니다. 겉보기엔 분명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낙오자, 실패자의 모습이었습니다. 하기야, 지난 가을 그토록 아끼던 잎새들과 열매들을 다 잃어버린 빈털터리에게 무슨 소망이 남아 있으리오? 그냥 콱 죽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만 그럴 뿐이었습니다. 얼음장 밑 물고기처럼 이 북풍한설 속에서도 얼어 죽지 않고 숨을 내쉬는 것은 그나마 겨울나무에게도 희망이라는 피가 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겨우내 쿨쿨 잠만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러나 나무는 결코 겨울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겉눈을 감았으나 속눈은 뜨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센 눈보라 속에서 호흡이 멈춘 줄 알았는데, 적어도 그렇게 보였는데,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무는 춥고 긴 겨울 동안 고행하는 수도승처럼 묵언정진하고 있었습니다. 가부좌를 튼 채 장기 금식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나무는 추위 속에서도 새봄을 잉태하여 몸 안에 키우고 있었습니다. 나무를 한번 자세히 보기 바랍니다. 어디에서 움이 트나요? 가장 여리고 약한 가지 끝에서 새순이 돋습니다. 그럼 어디에서 꽃이 피나요? 역시 가지의 가장 연약한 부분에서 꽃이 핍니다. 그리고 열매는 어디에서 맺히나요? 꽃잎이 떨어져나간 바로 그 아프고 쓰라린 자리,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그곳에서 열매가 맺힙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는 성경말씀처럼, '부드러움의 미학', '위대한 연약함의 역설'이 바로 이런 것일까요? 결코 튼튼해 보이는 둥치, 단단해 보이는 줄기에서 움이 돋고 잎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게 아닙니다. 항상 가장 힘없고 나약하고 연약한, 그래서 한없이 낮아지고 겸손하고 온유하여 남을 섬기는 자세가 된 가지에게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기꺼이 희생하며 생명을 키워낼 수 있는, 선택된 여린 가지에서 움이 돋고 잎에 피고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아픔만큼 성숙해진다'는 노랫말처럼, 우리네 삶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어쩌면 가장 약할 때가 가장 강한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겨울나무처럼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 가장 빛나는 희망을 만들어내는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저는 지금 다듬어지고 있는 중이랍니다. 어떤 모양으로 다듬어지게 될지 그건 주님께서 아실 겁니다. 지금은 아프고 힘들지만, 모난 부분을 깎고 다듬고 나면 난 훌륭한 하나님의 작품이 되어 있을 겁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어 있겠죠? 그래서 참기로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이겨내기로 했습니다."(리포터가 다니고 있는 교회의 주보에서 옮긴 글) 이 글처럼 여러분도 단련 중이라고 생각하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이 글을 보고 있으니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성구(욥기 23장 10절)가 떠오릅니다. 다시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봅니다. 나무는 알몸으로 새 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린 나뭇가지마다 용솟는 꽃망울이 마치 여인의 젖가슴 같습니다. 지난해 가을….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무성한 잎새와 탐스러운 열매들을 모두 떨어버리고 하얀 된바람에 속절없이 눈물 흘렸을 겨울나무…. 그러나 나무에게는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자유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겨울이 시작되면서 이미 몸 안에는 새로운 희망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알몸으로 혹독한 겨울을 넉넉히 이겨낸 것도 어쩌면 몸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희망이라는 끈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새 봄을 준비하고 있는 겨울나무를 보면서 큰 깨달음을 얻음과 동시에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나는 얼마나 나무와 닮은꼴일까? 겨우내 나무는 뼛속 깊이 밀려드는 추위를 알몸으로 맞서며 목숨 건 한판 싸움을 힘겹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릎을 꿇었으나 아주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멋진 한판 승부, 곧 무혈혁명, 명예혁명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멀지 않아 겨울을 밟고 일어선 나무들의 환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랜 고행 끝에 터지는 파안대소요? 백일기도를 끝내고 나오는 수도자의 얼굴이 아닐까요? 나무는 겨우내 와신상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박박 이를 갈지는 않았습니다. 성급하게 서둘지도 않았습니다. 조용히 때를 기다렸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기회를 놓치지도 않을 것입니다. 때가 되면, 보란 듯이 봄 햇살과 함께 터져 오르는 봄꽃의 함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졸업식이라는 것은 일정한 과업을 끝내었다는 것을 기념하여 가지는 의식이다. 우리가 일생을 사는 동안에 유치원, 초, 중, 고, 대학교, 그리고 남자들은 군 훈련소, 직장에서의 연수원 등 등 수많은 졸업식(일부는 수료식이긴 하지만)을 거치게 된다. 그 중에서 초등학교 졸업식이 일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있는 유일한 졸업식이던 시절이 있었다. 1960년 말까지 만 하여도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이 70%에 육박하였으니까, 그 전이야 물을 것도 없었다. 1969년 서울에서 처음으로 평준화 정책이 시작되어서 1971년 전국에서 중학교 입학시험이 사라질 때까지는 전국에서 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학생이 50%를 훨씬 넘는 정도이었다. 그럴 즈음에는 국민학교 졸업식장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졸업식 노래를 부르다가 모두들 목이 매어서 울음이 시작되고 졸업식 노래를 끝맺지 못한 채 훌쩍이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그것은 이제 이것으로 학교라는 곳을 더 이상 다니지도 못할 형편이니 마지막 교문을 떠나는 슬픔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중학교 평준화 정책이 생겨서 누구나 중학교에 가는 시대가 되자 점점 졸업식장에서 우는 사람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이제는 졸업이 학교 생활을 끝내는 의식이 아닌 중학교로 가는 일종의 통과 의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즈음에는 유난히 정이 많은 어린이들이 선생님과의 헤어짐이 슬퍼서 울음을 보이기는 하였지만, 울음을 우는 것이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한 때 졸업식이 끝나면 시원하다고 생각한 일부 학교생활에는 취미가 없던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을 하던 밀가루 뒤집어씌우기, 교복이나 교모 찢기 등의 야릇한 풍습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어른들의 탓으로 이런 풍습도 차차로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는 요즘이다. 2006년 2월 16일 ! 내가 교직 생활을 하면서 마지막 졸업식을 끝냈다. 아직도 초임 발령을 받고 학교를 찾아가면서 가슴 두근거리던 기억이 생생한데 벌써 42년이란 세월이 흘러서 정년을 맞아 학교에서 물러나야 한다니 참으로 세월은 빠르고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늘 졸업식장에서 우리 졸업생 56명 하나하나에게 각각 따로 만든 그들의 꿈을 꼭 이루어 훌륭한 사람이 되어 달라는 시를 지어 바쳤다. 과학자, 의사, 연예인이 6명씩, 법조인 5명, 교사, 디자이너, 프로게이머, 예술인, 운동선수가 각각 4명씩이었고, 그 외에 요리사, 사업가, 파티쉐, 경찰을 희망하는 사람도 2명씩이었으며, 동물 조련사, 스튜어디스, 군 장교를 희망하는 어린이도 있었다. 이 모든 어린이들에게 각자의 꿈을 이루어서 장차 이 나라 제일의 일꾼이 되어 달라는 당부와 희망을 실어 주는 시를 만들어 준 것이다. 올해로 5년째 이렇게 잘 되어 달라는 꿈을 이루기를 빌어주는 시를 만들어 주었지만, 이것도 금년으로 마지막이 된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 든다.
누구나 만나면 헤어지게 되어 있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게 인생살이다. 임명권자의 발령장에 의해 근무지가 결정되는 공무원들에게는 그런 일이 더 자주 있다. 3월 1일자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었다. 아침 조회시간에 아이들에게 이임인사를 했다. 담임의 전근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우리 반 아이들이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조회대 위까지 들려온다. 하교 시간이었다. 평소 같으면 인사를 마치자마자 쏜살같이 밖으로 내달았을 아이들이 쭈뼛쭈뼛 내 주위를 맴돈다. 자기들끼리 답을 주고받느라 갑자기 교실이 소란스럽다. “왜 가요?” “아마, 우리들이 싫어서겠지요?” “아냐. 집이 멀어서야.” 여자 아이들 몇이 눈물을 감추느라 연필을 꾹꾹 눌러 사랑이 가득담긴 편지를 쓰고 있는데 개구쟁이 남자 아이들은 다시는 나를 안볼 것마냥 불만을 털어놓는다. “선생님, 빨리 가요.” “가는 마당이라고 선생님에게 그렇게 심한 말을...” "이제 다른 학교 선생님이잖아요." “야, 너희들이나 빨리 가” 남자들은 가라는데도 내 주변을 맴돌며 괜히 농담을 건넨다. 남자들의 속마음을 담임인 나는 안다. 태연한 척 애써 웃음 짓는 담임의 마음도 아이들이 안다. 창 밖에서 한참을 서 있다 ‘선생님’을 힘차게 부르고는 손을 흔들며 담임의 전근을 아쉬워 하는 아이도 있다. 남자보다 여자의 감정이 더 예민하다. 짐 정리를 하는데 옆 반의 여자 아이들 몇 명이 교실로 찾아왔다. “선생님, 고마웠어요.” “건강하세요.” 1년 동안 사회수업을 했지만 쪽지까지 받을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 반이 아니라고 그동안 정을 많이 주지 못한 게 이내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가르치는 내가 오히려 아이들에게 인생살이를 배운다. ‘떠날 때는 말 없이’라지만 1년 동안 진짜 우리 반(5학년 2반) 아이들을 무척 사랑했다. 아이들과 생활하며 배운 게 무척 많아서 더 행복한 나날이었다. 강외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배운 사랑을 부임하는 문의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듬뿍 주겠다는 다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