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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김진희 | 경남대 가정교육과 교수 Ⅰ. 들어가는 말 가족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사회 제도이며 우리나라의 가족제도도 그 구조와 기능에 있어서 많은 변화를 보였다. 외형적으로는 전통적 확대가족이 감소되고 다양한 가족형태가 나타났으며 내부적으로는 성역할이나 가족관계, 가족주의 가치관 등이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들은 가족에 대해 우리가 지니고 있는 전통적 개념들을 수정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가족에 대한 정의는 비전통적인 가족을 포함하기 위해 확대되고 있다. 따라서 가족에 대한 정의는 '가족(the family)'이라는 획일적 형태보다는 가족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가족들(families)'이라는 것에 기초한 사회적 단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개념화해야 할 것이다. 올슨과 드프레인(Olson & DeFrain)은 '가족이란 둘 또는 그 이상의 가족원들이 서로 돕고 몰입되어 있으며, 애정과 친밀감, 가치관과 의사결정 그리고 자원을 서로 나누는 집단'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미국 Heritage 사전(1982)에서는 '한 지붕 밑에 가구를 형성하고 있는 집단'으로 정의하여 혈연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다(유영주 외, 2005). 좀 더 포괄적인 정의(Chilman et al., 1988)에 따르면 '현대 가족은 친밀, 헌신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의 집단에 속해있다는 정체성을 의식하고, 그 집단의 고유한 정체성을 수립하며 성적으로 표현적이나 부모자녀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았다. 가족에 대한 정의가 확장되고, 다양한 가족 유형이 공존하는 현실에서 '바람직한 가정 확립'이라는 논의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우리는 바람직한 가정을 연상할 때 남편-아버지, 부인-어머니, 자녀-형제자매라는 세 가지 지위로 구성된 완전한 구조 속에서 가족구성원들이 정서적 친밀감을 유지하여 응집성 수준이 높은, 기능적으로 완전한 가족을 기대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구조와 기능이 모두 완전한 가족은 점점 감소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파생된 다양한 가족 유형들이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바람직한 가정 확립'을 위해 먼저 고려할 것은 사회변화를 이해하고 그 사회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가족들을 인정함으로써 각자가 선택한 생활 유형 속에서 '바람직한' 방식을 찾아갈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Ⅱ. 바람직한 가정이란? 이를 위해서는 전통적이고 완전한 가족에 대한 신화를 벗어나 다양한 가족 유형에 대한 편견을 버리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특히, 사회에서 리더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교육의 장에 있는 교사들은 가족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양한 가족 유형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학생들을 지원함으로써 '바람직한 가정 확립'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가족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것과 교사의 역할을 살펴보는 것을 통해 교사들이 바람직한 가정 확립을 위해 어떠한 역할을 할 것인가를 논의해 볼 것이다. 다양한 가족의 출현과 유형들을 살펴보는 기회를 통해 전형적인 가족에서 벗어나는 가족들을 동등하게 대할 수 있는 가치관을 확립하고, 교사의 역할을 재인식하는 기회를 가짐으로써 다양한 가족들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교사의 역할을 찾고자 한다. 후기산업사회, 정보사회 또는 탈현대사회로 지칭되는 최근 한국사회는 가족, 결혼, 자녀 등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으며, 보편화된 개인주의적 가치관과 함께 가족환경의 변화로 구조, 구성원 특성, 생활양식 등의 많은 측면에서 다양한 가족형태가 출현하고 있다. 다양한 가족은 가족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변화의 결과물이면서 사회의 기본단위로서 가족제도가 갖는 유기체적 특성을 반영한 것으로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자 그 방향성에 대하여 긍정적 또는 부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무의미한 하나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따라서 바람직한 가정은 전형적인 하나의 모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율성과 선택권 및 다양성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한 다양성의 관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본고에서는 특정 가족형태가 갖는 배타성을 극복하여, 개별 가족이 당면한 문제와 위기상황을 해결하고 적응하는 가족이 바람직한 가정이라는 관점에서 가족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다양한 가족의 출현 과정과 유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는 2005년 "가정은 개인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사회통합을 위하여 기능할 수 있도록 유지·발전 되어야 한다"는 이념으로 제정된 건강가정기본법 시행에 즈음하여 발표한 다양한 가족에 관한 기획물(김승권, 김유경, 조애저, 박세경, 2005)의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하였다. 1. 다양한 가족의 출현 과정 (1) 사회적 요인 산업화 과정을 먼저 경험한 서구 선진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산업화는 도시화, 핵가족화를 촉진시키며, 아울러, 집단주의적 또는 가족주의적 가치관을 왜곡시키고 서구적인 개인주의적 가치관을 확산시킨다. 한국사회에 급진전된 젊은 연령층 인구, 특히 젊은 남자들의 도시로의 이동은 한편으로는 농촌지역에 남겨져 있는 가족에게 사회적 긴장을 야기 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거와 근무 장소 간 원거리에 의한 분거가족의 증가를 가져와 도시생활에서 과다한 경쟁과 함께 가족원간의 긴장과 갈등을 초래할 가능성을 증대시킬 뿐만 아니라 주말부부가족이 발생하게 되는 배경이기도 하다. (2) 가치관적 요인 다양한 가족의 출현배경으로서 가치관적 요인으로 혼인가치관, 자녀가치관, 부부관계 가치관, 가족부양 가치관, 여성의 자아욕구 등을 들 수 있다. 혼인가치관에는 결혼가치관, 이혼가치관, 재혼가치관 등이 있다. 과거 우리 사회는 보편혼으로 거의 모든 사람이 혼인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이제는 결혼이라는 사회제도에 대하여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의견이 감소하고 '일종의 선택(option)'으로 생각하는 의견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3) 인구학적 요인 인구학적 요인에는 초혼연령 상승, 혼인 감소, 소자녀 선호, 중년세대의 조기사망, 평균수명 연장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먼저 여성의 초혼연령 상승은 교육에 대한 열망 및 미혼여성의 취업기회 확대 그리고 자아성취 욕구의 증대 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초혼연령의 상승에 더해 혼자 살기를 원하는 독신자의 증가로 미혼인구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는 특히 남성보다 결혼에 대한 반대 입장이 강한 여성에게서 매우 현저하다. 또한 평균수명의 연장은 노인가족원이 많아짐을 의미하는 것으로 핵가족화를 감안한다면 노인단독가구가 증가하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여자의 평균수명이 남자보다 통계적으로 약 6~7세 높다는 것은 남녀의 결혼연령 차이 약 3세를 감안할 경우 남편이 사망하고 여자노인 혼자서 사는 시간이 약 9~10년이나 될 것임을 말해준다. (4) 개인 및 가족 요인 다양한 가족의 출현 배경으로서 개인적 및 가족 요인에는 여성교육수준 향상, 여성경제활동참가 증대, 이혼가족 증대, 국제결혼 증가 등을 들 수 있다. 한국의 경제사회발전은 전반적으로 국민의 교육수준을 향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특히 그 상승효과는 남성보다는 여성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여성의 양성평등의 의식 증대, 경제활동 증대, 경제적 독립의 가능성 증대 등으로 모든 가족원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교육수준의 상승 및 여성의 자아성취욕구 증대와 함께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된다.[PAGE BREAK]2. 다양한 가족의 유형 (1) 구조적 측면의 다양한 가족 구조적 측면의 다양한 가족은 전통적으로 가족의 구조적 특성을 결정하는 주요 가족관계로서 부모-자녀관계와 부부관계가 변화하여 나타나는 것으로 한부모 가족, 미혼모 가족, 노인 가족, 무자녀 가족 등이다. 구조적 측면의 다양한 가족은 성역할 구분이 모호하거나 또는 불안정하게 이루어지면서 결국 가족기능을 수행하는 데 있어 문제를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 가족이 구조적 특성으로 갖게 되는 가정생활 상의 특성이 반드시 가족원 개개인이나 사회전체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는 문제적 시각은 그릇된 편견을 갖게 할 수 있다. 가족구조의 다양성 자체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구조의 다양성에 대하여 적응하는 과정에서 일부의 가족이 역기능적으로 기능하게 될 때가 문제인 것이다. (2) 가족원 특성에 의한 다양한 가족 가족원의 특성에 따른 다양한 가족 유형에는 전형적인 동질적 특성을 가진 가족원의 특성을 벗어나 재혼, 입양 등을 통하여 이질적인 가족원으로 구성된 새로운 가족관계가 형성되거나 이질적인 국적과 문화를 가진 남녀가 결혼을 통하여 가족을 형성하면서 나타나는 재혼가족, 입양가족 그리고 국제결혼 가족 등이 있다. 이는 기존의 혈연이나 부계중심의 가부장적 가치관을 비롯하여 동일 언어 및 문화 등을 벗어나서 혈연이나 성씨, 다른 국적의 이질적 특성을 갖는 집단들과 새롭게 가족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보편적인 가족형태와는 전혀 다른 가족원의 특성 및 결합원리 등의 특성을 갖는다. 가족구성원의 특성상 전형적인 혈연중심, 동일 성씨 중심, 동일 국적 중심, 출산 중심의 개념을 벗어나는 비전형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3) 생활양식에 따른 다양한 가족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른 다양한 가족은 기혼여성의 취업, 주요 가족원이 국내의 다른 지역에서 살거나 또는 외국에 거주함으로써 발생되는 가족유형이며 맞벌이 가족, 주말부부 가족, 기러기 가족 등이 포함된다. 맞벌이 가족의 증가 현상은 맞벌이 주말부부라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부부가 같은 지역에서 직장을 찾을 수 없을 때 과거에는 한 배우자가 직장을 포기하고 다른 배우자와 함께 동거하는 것을 당연시하였으나 최근에는 부부 각자가 원하는 직장을 위해서 비동거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짐으로써 맞벌이 주말 부부 가족이 발생되고 있다. 이외 1990년대부터 시작된 조기유학 열풍이 만들어 낸 부산물로서 새로운 형태의 가족인 기러기 가족이 생겨나고 있다. Ⅲ. 가정을 위한 교사의 역할 오늘날 교사의 역할은 과거의 그것보다 훨씬 복잡해졌으며, 어떠한 역할이 주된 역할인지를 구분 못 할 정도로 교사의 여러 역할들이 동시에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은 시대나 사회에 따라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시대, 같은 사회에 살고 있더라도 사람에 따라서 역할을 달리 규정하고 있다. 학급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학급담임 교사의 역할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지만 어떤 자질과 능력이 바람직한 교사의 조건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합의된 의견은 없다. 위에서 바람직한 가정 확립을 위한 교사의 역할을 이야기하기 위해 가족의 다양성과 교사의 역할들을 살펴보았다. 이는 최근 가족에서 나타나고 있는 구조와 기능상의 변화를 볼 때 '바람직한 가정'의 모델이 하나가 아님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위함이었다. 사회변화와 개인적 선택을 고려하지 않는 '바람직한 가정'은 그 바람직함에 포함될 수 없는 가족들을 발생시키고, 이들은 곧 문제로 인식되는 오해와 편견을 낳게 된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가정은 유형이 아니라 유형에 따른 적극적인 대처와 적응이라는 가치를 인정하게 된다면 많은 가족들이 비정상적이라는 낙인에서 벗어나 건강하고 바람직한 가정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양한 가족 유형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학생과 학부모들이 바람직한 가정을 확립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교사의 역할을 몇 가지 제안해 보고자 한다. 첫 번째, 교사는 바람직한 가정 확립을 위해 다양한 가족 유형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동일시 대상이며 학생들의 행동 모델이므로 교사가 가족에 대해 보여주는 가치와 태도는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교사가 담당하는 학생들은 개인마다 다양한 가족 유형 속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교사가 보여주는 비전통적인 가족에 대한 배타성과 편견은 학생들이 자신의 가족 유형을 부정하거나 친구들의 가족 유형에 대한 낙인을 가져올 수 있다. 따라서 교사는 수업과 학생 지도에서 다양한 가족 유형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나 비난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하며 다양한 가족 유형 모두 개인적 선택으로 인정하는 개방적 가치를 가져야 한다. 교사 개인의 가치나 기준으로 학생들을 대하기보다 평가와 판단을 배제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비전통적인 가족 유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적응과 대처가 중요하다는 가치를 갖도록 하여 다양한 가족 유형이 각 상황에 적합한 바람직한 가정을 유지하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두 번째, 교사는 바람직한 가정 확립을 위해 교사와 학부모에게 상담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전통적인 가족 유형에서 벗어난 가족 유형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은 가족문제와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심리적·정서적 고통을 경험하거나 교우관계가 원만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어려움은 학교생활의 부적응을 초래하고, 청소년 범죄와 탈선으로 연결되는 개인적 문제뿐만 아니라 자녀문제로 인해 가족관계가 악화되는 가족문제로 까지 이어져 질 수 있다. 따라서 교사는 학생들이 자신이 처한 가족 상황 속에서 건전하고 성숙한 성인으로 성장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조력자가 되어 고민을 들어주고 문제해결 방안을 함께 모색하는 상담자가 되어야 한다. 또한 학부모 상담을 통해 비전통적인 가족 유형에서 필요한 자녀 교육과 지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여 부모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가족 유형이 자녀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고 바람직한 가정이 유지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 세 번째, 교사는 교과 지도와 특별 활동 등을 통해 학생들이 다양한 가족을 이해하도록 교육하여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가족 유형은 정상범주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사회변화에 따라 야기되는 적응적 변화임을 제시하여 자신의 가족 유형과 친구들의 가족 유형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교육은 다양한 가족 유형을 문제로 인식하지 않도록 하는 가치를 갖는데 도움을 주어 학생들이 각자의 가족 유형에 잘 적응하도록 도움을 주며, 가족유형에 따라 친구들을 판단하여 또래 집단에서 배제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학교생활 적응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네 번째, 교사는 바람직한 가정 확립을 위한 가정생활교육자가 되어야 한다. 가정생활교육은 가족구성원으로서 개인과 가족 전체가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함으로써 변화하는 사회에서 겪을 수 있는 가족문제를 예방하기 위한 모든 교육적 활동으로 정의된다. 교사가 교과지도와 학급운영을 통해 가정생활교육을 실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므로 학교 단위 혹은 지역사회 내에서 가정생활교육 역할을 담당하고, 교사는 이러한 교육에 참여하는 인적 자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가정생활교육은 가족문제에 대한 예방적 기능을 하므로 바람직한 가정 확립을 위해 우선 되어야 할 영역이다. 따라서 가족해체와 결손이 발생하기 전에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가정생활교육을 통해 원만한 가족관계를 유지하고, 가족 기능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제공해 주는 일이 필요하다. 또한 이미 전통적인 가족 유형에서 벗어난 한부모가족, 재혼가족, 이혼가족 등을 대상으로 하는 가정생활교육을 함으로써 추가적인 문제 발생을 예방하여 바람직한 가정은 유형이 아니라 기능과 생활임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람직한 가정 확립을 위해 교사 개인의 가정생활을 원만히 유지해야 한다. 가족은 사회의 하위 체계이므로 개인의 가족 체계가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교사 개인의 바람직한 가정생활은 사회 전체의 바람직한 가정 확립에 기여하는 힘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교사들도 자신의 가정생활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여, 가족의 역기능적인 문제 발생을 예방하는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사도 독신, 이혼, 재혼 등의 가족 형태를 유지할 수 있으므로 교사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가족 유형 모두가 바람직한 가정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역할 모델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김상희 | 공주대 유아교육과 교수 다양한 가족을 경험해야 하는 교사 처음 원고청탁을 받았을 때 이런저런 일로 많이 바쁨에도 불구하고 수락을 한 이유는 두 자녀의 엄마로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현직교사들을 가르치는 교수로서의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 경험하고 느껴온 생각들을 정리하여 학생과 학부모 및 교사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에서였다. 지금은 유아교육과로 소속을 옮겨서 재직하고 있지만 근 18년간을 가정교육과에 근무하면서 교육대학원 수업에서 교사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장의 실태 및 어려운 점 등을 함께 고민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면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열심히 노력하는 좋은 교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의 체험 중 성공적인 사례들을 이 자리를 빌려서 소개하고자 한다. 아울러 유치원 원장 및 유아교사들과의 토의에서 얻은 사실들을 바탕으로 현 사회가 안고 있는 가족의 문제점과 이에 따라 현장교사들에게 요구되는 점들이 무엇이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가정을 떠나 새롭게 소속하게 되는 첫 번째 사회기관인 유치원에서 나타나는 요즘 아이들의 여러 문제점들은 교사들의 역할이 연령층이 어릴수록 더 중요하며, 때문에 참된 교사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자질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계기를 제시하고 싶다. 우리나라의 초·중·고 학교들이 평준화가 되었다고는 하나 학교 간의 차이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도시와 농촌 간에는 물론이거니와 같은 도시 내에 있는 학교 간에도 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한 차이는 단지 생활수준의 차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모들의 교육수준과 직업 및 삶의 가치관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에 따라 학생들이 경험하는 가정생활에 많은 차이가 존재할 수 있음을 추축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사에게는 이런 다양한 상황에 대한 폭넓은 사고가 요구된다. 애정과 사회화 기능이 강화된 가족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정생활은 급속한 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급속한 출산율 감소와 고령화 사회의 초고속 진입에 따른 사회적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가족의 개념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과거 농업경제에서는 자녀를 많이 낳으면 일할 수 있는 노동력이 많아져서 집안을 번창시킬 수 있으므로 다산을 원하였고 특히 장남이 결혼 후에도 부모를 모시며 함께 살아가는 직계가족을 이상적인 가족으로 생각하였다. 아들은 노후에 부모들이 의존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아들에게 부모들은 헌신적이었고 그들 간의 유대감은 매우 견고하였다. 반면 열심히 양육했다 해도 성장하면 출가하여 남의 식구가 될 딸에게는 애정이 있어도 아들만큼 투자할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하여 딸에게는 많은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산업화를 거쳐 정보화 시대에 들어서게 되고 교육과 직업을 위한 자녀들의 지리적 이동이 잦아지면서 가족이 한울타리에 사는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고, '품안의 자식'이라는 옛말처럼 부모·자녀관계의 유대감도 점차 약화되었다. 이에 따라 최근 젊은 세대들은 자녀는 낳고 기르는데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드는 반면, 투자한 노력에 비해 되돌아오는 것은 별로 없는 소비의 개념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더욱이 자녀를 적게 낳게 되면서 남아선호사상이 줄어들고, 아들과 딸 모두에게 교육의 기회를 동일하게 부여하게 됐으며, 고정된 성역할 개념이 감소하고 상황에 따른 융통성 있는 성역할을 강조하는 양성성이 강조되면서 여성의 사회진출의 증가는 가정의 기능을 급속하게 변화시키게 되었다. 가정의 기능에서 생산과 보호, 교육 등의 기능은 감소하고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는 기능은 정서적 유대감을 공유하는 애정의 기능과 사회에 잘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인간으로 교육시키는 사회화의 기능이다. 가족의 기능 약화 및 가족구조의 변화 등은 많은 가족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즉 핵가족화와 함께 소자녀 및 외동아만 갖는 가족이 많아지면서 부모의 과보호에 따른 자신만을 아는 이기적인 존재로 성장하는 아이들의 사회적응문제, 부부가 모두 직업을 가지면서 아이를 적절하게 양육해줄 사람이나 기관의 부재로 인한 보육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특히 가족의 형성이 부부의 애정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부부관계가 가족의 가장 중요한 관계가 되어 부부간의 애정에 문제가 생기게 되면 이혼을 또 하나의 선택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이 같은 사회가치관의 변화와 여성의 경제능력의 상승 등은 가족문제 발생 시 예전처럼 참고 살기 보다는 쉽게 이혼을 선택하는 비율이 늘어나면서 가족해체가 급속하게 증가하여 그 결과 부모이혼 후 자녀들이 겪게 되는 어려움이 상당히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내 가족에 대한 이해가 선행 되야 이처럼 가정의 위기라고도 인식되는 오늘날 교사의 올바른 역할은 무엇일까? 우선 '바람직한 가정'이 무엇임을 교사들이 올바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사들은 자신이 소속된 가정의 모습을 분석하고 반성해 보아야 한다. 교사 자신이 소속된 가정이 바람직한 모습을 형성하느냐의 여부가 학생들에게 일차적 가정의 모델로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미혼인 교사들은 자신의 부모와 형제로 구성된 원가족을, 기혼인 교사들은 자신의 배우자와 자녀로 구성된 생식가족을 남들이 바람직한 모습으로 인정해 줄 수 있는가를 한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것은 '나'에게서 시작된다. '나'의 모습이 건강하고 내 가족의 모습이 건강할 때 교사는 아이들에게 건강한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선생이 되려고 하는 우리 학생들에게 "나란 누구인가?"를 알아가는 과정으로서 자신의 성장과정을 분석시키고, 조부모를 포함한 3대에 걸친 가계도를 그려오는 숙제를 내주곤 한다. 학생들은 가계도를 그리기 위해 부모 및 친척과의 대화를 통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가족의 일원으로 어떠한 배경을 가진 환경에서 태어나서 자라왔음을 알게 된다. 또한 부모의 양육태도에 영향을 미쳤을 조부모 및 부모의 형제관계 등을 분석함으로써 인간관계의 첫 단계인 가족관계의 다양한 측면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부모관계 및 형제관계에서 쌓였던 오해와 분노를 풀어가게 되면서 '나'와 '우리'를 이해하고 사랑을 재확인하는 경험을 갖게 한다. 현직 교사들에게도 이러한 가계도의 분석경험은 자신의 가족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가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실력과 함께 따뜻한 사랑 나눠줘야 교사는 '나'를 이해하면서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성숙한 존재로서 존경받을 수 있는 모델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는 과정은 인간관계의 첫 관문이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과정이며,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성숙한 모습을 보일 수 있고,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교사는 단순한 지식을 전달해 주는 것이 아닌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쳐줄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결코 사랑을 공유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사는 끊임없이 자신을 연마해 나가면서 성숙한 모습으로 학생들에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사의 권위가 떨어지고 그래서 학생과 학부모의 교사에 대한 무례한 행동들이 매스컴에 대두될 때마다 많은 교사들이 자신의 직업에 회의를 갖게 된다고들 말한다. 실제 모든 선생들이 다 비난의 대상은 아니지만 유명한 학원 강사에게 많은 학생들이 서로 배우겠다고 줄을 서고 학원 강사들이 고액의 수입을 올리고 있는 현실에서 교사들이 교단을 지킬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인가. 학생들이 가까이 다가설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그래서 사랑으로 감싸줄 수 있는 따뜻하고 성숙한 선생님이 되도록 노력하자. 이때 교사가 자신의 역할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며 아울러 자신의 전문영역에서 실력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실력을 갖추고 따뜻한 사랑까지 나눠줄 수 있는 교사에게 누군들 가까이 가지 않으려 할까? 제자가 졸업 후 보내온 한 장의 카드와 편지만으로도 교사의 보람을 느끼면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며 자신의 길을 가는 교사에게 우리는 희망의 끈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닐까?[PAGE BREAK]학생과 학부모를 잇는 역할 필요해 교사는 학생과 학부모를 잇는 가교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학생들은 가정을 떠나 학교생활을 하게 되면 대부분이 사회관계 속에서 자신을 적응시키는데 어려움을 경험하게 된다. 가족은 이해를 초월하여 사랑으로 모든 것을 감싸 안고 이해해 주지만 학교는 함께 잘 지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규칙과 규범을 정해서 이를 위해 개개인의 요구상황은 참아줄 것을 요구하는 단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정에서 형제가 적거나 없어서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경험이 부족한 아동의 경우 학교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는 곳이다. 학부모의 입장에서는 이제 학교생활을 이끌어주는 교사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부모 품을 떠난 자녀에 대해 대부분의 부모들이 어떻게 대해야 적절한지를 모르기 때문에 교사에게만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 교사의 입장에서 한반에 30명이 넘는 학생들을 일일이 파악하고 개별적으로 그들의 요구에 맞추어 대해준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정에서 내 자녀만을 보는 부모의 입장보다 교사는 반 전체 학생을 비교해 보면서 특별히 신경써줄 학생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부모들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점들을 부모에게 알려서 문제를 예방하거나 도와주는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교사는 일일통신문, 알림장, 교사와 학부모간 일기, 간단한 편지 등을 교환함으로써 학부모와의 의사소통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가정에서 겪고 있는 여러 어려움(부모의 이혼, 사별, 별거, 학대 등)이나 부모와의 갈등(편애, 부적절한 양육행동, 학대 등) 등을 겪고 있는 아동들은 정서적으로 유난히 불안해하거나, 지나치게 산만하고 수동적, 폭력적이거나 영양상태 및 복장상태가 극히 부실한 경우가 많다. 이들은 제대로 가정에서 보호받고 사랑받지 못하는 경우이므로 관심을 갖고 살펴보면서 이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보호받으면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교사가 관심을 갖고 적절한 지지자 및 보호자 역할을 담당해줄 때 무한한 성장의 가능성을 가진 아이들이 어려운 가정상황 때문에 불행하게 되는 일을 방지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문제에 맞서는 전문가가 되자 교사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교사는 전문직이다. 이것은 자신이 전공한 영역의 지식을 갖고 이를 잘 전달하는 능력 뿐 아니라 다양한 측면에서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이를 학생들이 실생활에 접목하여 행복한 삶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량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먼저 교사는 자신이 맡은 역할에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가르치는 분야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서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흥미를 갖고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실력 있는 교사에게 배울 수 있다면 부모는 비싼 과외비를 들여가며 학생들을 밖으로 내몰지 않아도 되고, 비싼 과외비 마련을 위해 생기는 가족 간에 불화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교사는 자신이 맺고 있는 다양한 인간관계에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즉 교사는 직장 동료관계, 가족관계, 제자 및 학부모와의 관계 등을 잘 유지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학생들 앞에 서서 늘 주목을 받게 되는 위치에 있는 교사는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방법으로 체험한 다양한 인간관계의 예를 들게 된다. 이때 그들과의 긍정적인 관계가 자연스럽게 표출될 때 학생들은 긍정적인 인간관계를 배우게 되고 자연스럽게 가족관계를 포함한 다양한 인간관계로 일반화될 수 있을 것이다. 교사가 자신만의 경험이 아닌 열린 시각을 가지고 학생들이 폭넓은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인간의 발달단계에 따라 각 단계에서 인간이 갖고 있는 발달적 특성과 발달과업을 파악하여 각 단계에 해당되는 인간의 특성을 충분히 이해하여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교사는 문제에 직면하여 이를 슬기롭게 풀어나갈 수 있는 문제해결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특히 교사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과 학부모의 문제까지도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개입하고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 학생들이 학교라는 기관에서 또래와 교사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더 연장되어가는 추세이다. 학교라는 틀에 포함되는 시기가 빨라지고 '전생애 교육'의 의미가 강조되면서 연령범위가 점차 확대되어 다양한 연령층의 학생들을 대해야 하는 교사는 다양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고 이를 해결할 능력을 요구받게 된다. 물론 교사가 모든 문제의 완벽한 해결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역량을 벗어난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될 때 이를 전문가를 찾아서 적절한 시점에서 넘겨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모습을 갖춰라 이처럼 점점 교사들의 능력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증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모든 이들에게 '전생애 교육'이 강조되고 있는 만큼 교사들은 부단한 노력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교사의 전문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다양한 학생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들이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접하게 되고 이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할 교사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교사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연마하고 노력해야 한다. 특히 과거의 관점과 다르게 다양성의 수용이 요구되는 요즘이기에 교사는 열린 시각을 가지고 다양성을 인정하고 융통성 있게 이를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기존과 새로움의 장단점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이를 적절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현명함을 갖추어야 한다. 즉 성역할고정관념, 동성애, 다양한 가정(이혼가족, 재혼가족, 한부모가족, 미혼모 가족 등)에 대한 편향된 사고를 벗어버리고 객관적인 시각을 갖고 이들에게 도움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정보화 사회에서 우리는 무한정으로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정보와 지식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사가 지식을 넘어서 지혜를 나눌 수 있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연수 및 연구 활동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학생과 고등학생의 자녀를 두고 있는 필자는 아이들의 학교에서 운영위원과 학부모위원을 하면서 '학부모의 입장'에서, 자식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학생의 입장'에서, 교단에서 교사들을 가르치면서 '교사의 입장'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 오면서 많은 생각을 해왔다. 그 결과 '나', '가족', '부모', '교사'가 각각의 위치에서 자신만의 길을 홀로 갈 수는 없으며, 서로가 긴밀한 끝으로 이어져 상호협조와 보완을 통해서만이 발전적이 될 수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학부모들이 신학기가 되면 어떤 사람이 자녀의 담임교사로 정해지느냐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고 한다. 안심하고 내 자녀를 맡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정 내의 어려움과 자녀문제를 상의하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교사를 원하고 있는 이들 학부모에게 "나는 어떤 교사로 비춰지고 있는가?"를 자문해 보자.
글·사진 | 박하선 사진작가, 여행칼럼니스트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찬란한 문화 이슬람 공화국 '이란' 역사는 자그로스(Zagros) 산맥을 중심으로 구석기 시대부터 시작되지만, 문명이라고 부를만한 형태가 등장한 것은 기원전 3000년경으로 추정된다. 신바빌로니아와 협력하여 앗시리아를 멸망시킨 메디아(Media)왕국, 그리고 최초의 페르시아 제국을 세웠던 아케메네스 시대에 들어서면서 역사 속에 굵은 획을 긋게 되고, 그 찬란했던 문화는 오늘날까지도 의연하게 당시의 위용을 말해주고 있다. 그 문화의 향기를 찾아 남부에 있는 고도 '시라즈(Shiraz)'를 찾는다. "5월에 시라즈를 방문하는 사람은 고향이 어디인지조차 잊을 것이다" 라고 극찬했던 유명한 시인 '사디(Sadi)'의 말이 전해지는 곳, 시라즈. 이곳은 잔드(Zand) 왕조가 페르시아를 다스리던 1753년부터 1794년까지 이 나라의 수도였다. 그러나 시라즈를 이란에서도 손꼽히는 문화도시로 만든 것은 진정 잔드 시대의 유물이 아니다. 기원 전에 벌써 한 시대를 주름잡고 페르시아 제국의 위용을 드높였던 곳 '페르세폴리스(Persepolis)'라는 엄청난 유적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르세폴리스. '페르시아의 수도'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다. 현지에서는 '다그테잠시드(Takht-e Jamshid)'라 불리는 이곳은 시라즈 시내에서도 50여㎞ 더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과거 페르시아 제국 최고의 영광이 서려있는 현장으로 가는데 있어서 이 정도 거리쯤이 무슨 걸림돌이 되겠는가. 새벽길을 달렸다. 이왕이면 유적지 안에서 동이 터 오고, 불덩이 같은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도착해서였다. 정문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이 들여 보내주지를 않는 것이다. 물론 아직 개장 시각이 되지 않았다. 시라즈에 있는 문화재 관리국에서 특별 발급해 준 허가서를 내밀고도 통사정을 해서야 겨우 입장할 수 있었다. 돌멩이 나도 고고학적 가치 지녀 기원전 700년부터 330년까지 고대 페르시아를 다스렸던 아케메네스 왕조의 봄 궁전으로 건축된 이 페르세폴리스는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문화재관리국의 보호 아래 놓인 다른 유적지들과는 달리 현재 이곳은 군인들이 관리하고 있는데, 이는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도난 사고를 방지하려는 의도라고 한다. 이 페르세폴리스에서는 작은 돌멩이 하나도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고고학적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성벽처럼 둘러싸인 벽면을 따라 나있는 넓은 돌계단을 오르니 그 옛날 페르시아 제국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기원전 518년 페르세폴리스의 건축을 처음 명령한 왕은 '다리우스(Darius) 1세'였다. 당시 아르메니아인들은 여름 궁전을 하그마탄(지금의 하마단)에, 겨울 궁전을 수사(Susa)에 두고 있었다. 페르세폴리스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봄 궁전이자 새해 첫 날인 3월 21일에 벌어지는 '노르즈(Now Rouz)' 축제를 치르기 위한 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총면적이 12만5000㎡에 달하는 페르세폴리스를 짓는 대공사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공격했던 기원전 330년까지도 끝이 나지 않았었다. 강한 지진이나 홍수 등 어떠한 천재지변도 견딜 수 있을 만큼 튼튼하게 지어진 이곳은 인간이 의도적으로 파괴하지만 않았다면 오늘날까지도 원형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을 것이다. 알렉산더 광풍에 사라진 세계의 문 아르메니아인들은 페르세폴리스를 짓기 위해 이집트, 그리스, 앗시리아 등 여러 나라의 문화를 복합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민족의 문화를 그대로 베끼지는 않고 자신들의 고유문화와 적절히 조화시켜 완전히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냈기 때문에 페르세폴리스에서 특정 문화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인반수의 모습을 한 그리스 신화 속의 괴물 켄타우로스의 모습이 거대하게 새겨진 출입구를 비롯해 대기실, 접견실, 100개의 기둥이 있는 방, 1.5㎞에 달하는 지하수로 등으로 엄청난 규모와 시설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도처에서 만나게 되는 조각상들마다 섬세하기 그지없어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만 같다. 특히 노루즈 축제 때 다리우스 왕에게 선물을 바치러 온 23개국 사신들의 조각은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관심사다. 계단 양쪽에 새겨진 조각들이 사신들의 출신 지역에 따라 다섯 부분으로 크게 구분되는 있는데, 그들의 복장과 공물로 가져온 선물들이 아주 다양하다. 당시 이 페르세폴리스는 지구상에 전성하던 모든 문화의 집결지였다. 외국사신이 빈번히 내왕하고, 동서양의 상인들이 북적거렸다. 중앙아시아에서 연결되는 실크로드와 인도에서 건너오는 해로의 요지에 위치하여 풍부한 물자와 다양한 외국의 문물이 화려한 조각과 거대한 기둥들로 떠 받혀 있는 '전 세계의 문'을 통하여 유입되면서 이 페르세폴리스를 살찌웠다. 그러다 보니 사치와 향락, 호화로운 파티가 연일 계속되었다. 그러나 페리세폴리스의 운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페르세폴리스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마케도니아의 20대 청년 알렉산더의 광풍에 견뎌낸 세력은 없었다. 페르세폴리스에 도착한 알렉산더는 이 놀라운 아시아의 번성을 감당할 없었기에 철저히 파괴하고 불태웠다. 그리고 전군을 풀어 다리우스 3세를 추격했다. 카스피해 연안까지 쫓긴 다리우스 3세는 결국 죽음 직전 포로가 된다. 부하의 배반으로 온몸이 칼에 찔린 아시아의 대왕이 마케도니아의 한 병사의 눈에 발견된 것이다. 포로로 잡힌 다리우스 3세는 그 병사로부터 한 모금의 물을 받아 마신 후, 조용히 눈을 감는다. 기원 전 330년 7월, 막 해가 지는 시각이었다. 대 페르시아의 제국도, 그 수도였던 화려한 페르세폴리스도 이렇게 하여 기나긴 망각의 역사 속으로 묻혀 갔다. 되살아나는 고대 아시아의 자존심 1931년부터 시카고 대학의 동양연구소 고고학팀이 본격적인 발굴과 복원을 시작하면서 서서히 페르세폴리스의 역사적 의미는 되살아났다. 근처에 있는 왕들의 무덤군 '나그쉐로스탐'을 찾아가면서 이곳 대학에서 고고학을 가르쳐 온 '후세인 카시프'는 말한다. "원래 이 페르세폴리스의 건물들에는 500여 개의 기둥이 있었습니다. 17세기 사파비드 왕조 때 만 해도 약 40개 정도가 남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죠. 그러나 현재는 그 수가 더 줄어서 남아있는 것은 13개 뿐 입니다." 긴 세월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했던가. 그나마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다음부터 발굴과 복원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다행이란다. 고도 1500m의 황량한 평원에 쏟아지는 불볕아래 펼쳐지는 폐허의 잔해에 묻히고, 잊혀버린 페르시아 제국의 위용을 떠올려 보면서 고대 아시아의 마지막 자존심. 그 숨결을 느껴보다 보니 어느 덧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과거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 '페르세폴리스.' 새교육 5월호에서 만나보세요.
김연수 | 생태사진가 구슬픈 노래로 어민들의 시름 달래 고기잡이 나갔던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백일기도하던 아내가 너무도 슬퍼서 자신도 바닷물에 빠져 자살했다. 그러나 남편은 배가 표류해 몇 개월 뒤에 살아 돌아왔고, 아내가 자신을 그리워하다가 죽은 것을 알고 그 남편도 바닷물에 빠져 아내 곁으로 갔다. 이 한 많은 부부가 환생한 것이 바로 '검은머리물떼새(천연기념물 326호)' 라고 영흥도의 한 할머니는 말한다. 아마 갯벌에서 바지락을 캐던 섬사람들이 주위를 맴돌며 구슬픈 노랫소리를 내는 이들을 보고 만들어낸 전설이 구전되어 오는 것 같다. 사실 번식기에 들어선 검은머리물떼새들이 사랑을 구하는 소리가 사람들에게는 구슬프게 들렸을 지도 모른다. 육중한 타이어에 희생된 어린 영혼 검은머리물떼새는 5~6월에 서해의 섬 주변에서 번식한다. 특별히 둥지는 만들지 않으며 옴폭 들어간 마른 풀숲이나 자갈밭에 2~3개의 알을 낳는다. 2005년 6월 영종도 신공항입구의 제방길에 둥지를 튼 녀석이 있다. 공사용 덤프차량들이 지나는 길인데 놀랍게도 차바퀴 길의 중앙에 둥지를 터, 보는 이들을 가슴 조이게 만들었다. 암컷이 약 22여 일 포란하면 새끼는 알에서 깨어나다. 부화된 새끼는 어미를 따라 바로 갯벌로 이동, 지렁이나 연체동물들을 잡아먹으며 성장한다. 그러나 이곳의 검은머리물떼새는 결국 부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포란 후 13일째 되던 어느 날 2개의 알이 모두 차량바퀴에 희생되고 말았다. 알 속에서 어미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세상 밖으로 부화되려던 검은머리물떼새의 어린 영혼이 개발이라는 인간의 욕심에 희생된 것이다. 16일째 되던 날 필자가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 육중한 타이어에 짓밟힌 둥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단지 알껍질 사이에 붙은 어린 새의 사체를 분해하려는 개미와 파리떼들만이 극성을 부렸다. 필자는 차마 그 광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탄생의 기쁨을 기록하려던 아쉬움과 자식을 잃은 검은머리물떼새 어미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귓전을 교차하면서 인간으로 태어난 나 자신이 부끄럽고 한탄스러웠다. 인간에 의해 파괴되는 소중한 둥지 검은머리물떼새 중 소수의 무리는 초여름에 금강, 만경강, 남양만, 강화도 등지의 바닷가와 무인도에서 번식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러시아 캄차카반도에서 월동을 위해 찾아온 개체들이다. 특히 유부도 앞 갯벌은 우리나라에서 검은머리물떼새 무리가 가장 많이 월동하는 곳이다. 금강하구의 풍부한 먹이와 만조 때도 완전히 잠기지 않은 갯벌이 이들에게는 천혜의 보금자리가 된다. 그러나 유부도 갯벌은 이들의 영원한 보금자리가 아니다. 새만금 간척공사가 완공되면 이곳은 조류의 흐름이 바뀌어 죽음의 바다로 변할 것이라고 해양학자들은 예견하고 있다. 그 재앙은 이미 오고 있다. 유부도 갯벌에서 어패류들이 사라지고 있다. 주 생계수단인 조개잡이를 빼앗긴 상태에서 이곳에서는 생활이 어렵다며 주민들도 하나, 둘씩 고향을 떠나고 있다. 철새가 살 수 없는 곳은 결국 인간도 살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서남해안 갯벌은 세계 4대 갯벌 중의 하나인데 환경에 무지한 위정자들은 우리의 소중한 갯벌들을 마구 짓밟고 있다. 우리 후손들도 공유해야 할 천혜의 자원인 갯벌을 당대의 왜곡된 경제논리로 무차별 훼손하고 있다. 후대의 역사가들이 어떻게 평가할 지 그 해답은 이미 다 나와 있다. 시간을 잊게 하는 갯벌의 신사들 필자가 검은머리물떼새를 두 번째로 즐겨보는 곳은 전남 신안 앞바다의 압해도 갯벌이다. 밀려오는 파도와 바닷물과 더불어 위장한 카메라 앞으로 날아 들어오는 갯벌의 신사들을 보다 보면 뭍으로 나갈 마지막 배편도 잊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곳도 위기가 오고 있다. 전남도청이 신안으로 옮겨짐에 따라 이곳 압해도가 행정배후도시로 뒤바뀐다는 정책이 입안됐고 그 사전공사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다. 낙후된 섬이 도시로 뒤바뀌는 대역사를 지역에서는 환영하겠지만 왠지 씁쓸한 마음은 감출 수 없다. '삐빅~ 삐빅~ 삐희이요' 천성적으로 구슬픈 이들의 울음소리는 인간에게 또 다른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슬픈 전설 속 주인공 검은머리물떼새의 모습을 새교육 5월호에서 만나보세요.
허종렬 | 서울교대 교수, 대한교육법학회 회장 지방교육자치제도를 고치고자 하는 시도가 작년에 이어서 올해에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 논의의 큰 흐름은 선거제도를 직선제화하고 교육위원회를 시도의회와 통합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작년에도 국회교육위원회에 이 쟁점들과 관련하여 제기된 개정법안만 5건에 이른다. 그런데 아직 법안으로까지 확정된 단계는 아니지만 최근에 제기된 개선방안에 현직 국․공․사립의 유․초․중등학교 교사에게 교육위원 겸직을 허용하자고 하는 내용이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교육자치법은 교육위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학식과 덕망이 높은 자와 정당의 당원이 아닌 자 등으로 제한을 가하는 동시에, 교육위원이 되는 자들의 직무 전념 등을 위하여 국․공립학교 교사를 포함한 국가공무원 및 지방공무원과 사립학교의 교사 등은 이 직을 겸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특히 한국교총에서 마련한 개정법안을 보면 이것을 고쳐서 고교 이하 각급학교 교사들도 대학교수와 마찬가지로 교육위원을 겸직할 수 있도록 하자는 안을 담고 있다. 다만 교사들의 경우 그 직을 유지하면서, 교육위원 선거 및 당선 후 교육위원으로서 활동을 하는 것은 직무의 특성상 어려움이 있으므로, 겸직 금지는 풀어주되 교육위원 재임기간 중에는 교직을 휴직하도록 하는 단서를 달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이러한 교총 안에 대해서 이미 열린우리당은 교육위 간사인 정봉주 의원으로 하여금 교사들의 교육위원 겸직 허용조항을 담은 지방교육자치법 개정안을 내도록 하고 현재 내부 조율 중이라고 한다. 정 의원 측은 교총에서 성안해서 보내준 지방교육자치법 개정안을 원안 그대로 발의하여 빠르면 6월 국회까지는 처리되도록 할 방침이라고 한다. 한나라당 등 야당들도 긍정적인 입장을 밝히고 있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교사들의 교육위원 겸직 허용 주장은 이미 1991년 지방교육자치법이 발효된 직후부터 바로 제기되어 왔다. 교사들은 대학교수들에게는 이것을 허용하면서 자신들에게는 이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처음부터 납득을 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겸직 금지가 자신들을 합리적인 이유 없이 교수와 차별하는 것이며, 공무담임권을 과도하게 침해하는 것으로 보아, 결국 같은 해에 헌법소원을 제기하기까지 하였다(헌재 1993.07.29. 91헌마69). 그러나 당시 헌법재판소는 이 소원을 기각하였다. 헌법재판소가 제시한 이유는 모두 세 가지이다. 교육위원 겸직을 대학교수에게만 허용하고 초․중등학교 교사에게는 금지한 것은 첫째, 공무원의 신분을 가지는 국․공립학교 교사는 물론 이에 준하는 신분보장을 받는 사립학교 교사가 당연히 감수하여야할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보장이라고 하는 기본권 제한의 사유에 해당하여 합헌이며 둘째, 교육위원들은 연간 최대 40일에 이르는 정기회·임시회 외에도 각종 소위원회에 참석해야 하는데, 이러한 사정에 있는 사람들이 매일 매일 수업과 학생지도를 수행해야 하는 교사의 직을 겸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직무전념의 원칙에서 볼 때 당연한 조치이고 셋째, 교사는 법령에 따라서 학생을 교육하는 자로서 항상 학생들과 사제동행을 하여야 하는 자리인 반면에, 교수는 상대적으로 많은 학문연구와 사회활동의 자유가 인정되는 바, 위와 같은 차별은 직무의 본질과 태양의 관점에서 볼 때 합리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교육자치법이 교사들에게 겸직금지 이외에 입후보(入候補) 금지까지 포함한 것은 아니므로 그 공무담임권을 침해한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헌재의 이러한 판단이 다음과 같은 이유로 타당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본다. 첫째, 헌법재판소의 정치적 중립성 관점에서의 판단은 교육위원회의 활동이 정당활동이 아닌 것은 물론 오히려 일반행정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과 교육의 자주성을 보장하기 위한 활동임에도, 이것을 단지 선거라고 하는 정치과정을 거치는 것이라 하여 교사들의 피선거권을 제한하는 것은 부당하며 둘째, 직무 전념의 원칙에 입각한 판단 역시 이를 교사에게만 요구할 것은 아니고 교수들에게도 요구하여야 하는 것이며, 그 상대적 차이도 보는 사람의 관점에서 따라서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타당성이 떨어지고 셋째, 직무의 본질과 태양의 차이에 따른 판단도 설사 교사와 교수 사이의 그러한 점을 인정하더라도 가령 교사의 경우 교육위원으로 활동하는 기간동안 휴직을 하게 한다든지 하는 대안이 있음을 간과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제는 교육계와 국회 차원에서 겸직을 허용하자는 주장에 대해서 여야 정당들의 공감대가 널리 형성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모처럼 이 주장이 법률을 실제 개정하는 단계에까지 가지 않겠는가 하는 전망을 해보게 된다. 교사의 교육위원 겸직 허용이 시․도교육위원회 활동의 현장적합성 등을 제고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도 있도록 여야가 마무리 입법을 잘 추진해주기를 바란다.
이승원 | 인천대 강사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들은 연일 위생개혁의 시급함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그들에게 위생을 통한 인민의 건강은 문명개화의 척도이자 서구 문명국과 같은 부강한 국가가 되기 위한 지름길이었다. 급진개화파들은 서구 여러 나라가 문명국이 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을 ‘건강한 인구’에서 찾았다. 건강한 인구 육성은 국력이었고, 그 힘을 기반으로 문명제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문명의 적은 ‘똥’이다 글자에서도 냄새가 난다? 확실히 요 글자만은 기호 그 자체가 냄새를 풍긴다. 똥! 옛 글자로 쓰면 ‘똥’이다.(인터넷 상에는 옛글자 표기가 안됩니다) 좀 유식하게 한자로 쓰면 ‘屎’(똥 시)다. 한자로 쓰면 냄새가 풍기지 않는 것도 같다. 그런데 똥이 왜 문명개화의 적일까. 또한 똥과 신체검사와 위생과 단발은 어떤 관계를 맺을까. 알쏭달쏭하다. 유길준은 에서 ‘전염병이 전쟁보다 더 무섭다’고 말하며 위생사업의 중요성을 목울대에 힘을 주어 외쳤다. 유길준뿐만이 아니었다.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들은 연일 위생개혁의 시급함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그들에게 위생을 통한 인민의 건강은 문명개화의 척도이자 서구 문명국과 같은 부강한 국가가 되기 위한 지름길이었다. 급진개화파들은 서구 여러 나라가 문명국이 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을 ‘건강한 인구’에서 찾았다. 건강한 인구의 육성은 국력이었고, 그 힘을 기반으로 문명제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건강한 인구의 육성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적은 바로 전염병이었다. 1821~2년에는 13만 명이, 1859~60년에는 40만 명이, 1895년에는 30만 명이 죽었다. 전염병으로 인한 죽음에 대한 공포는 좀벌레처럼 일상의 즐거움을 갉아먹었다. 우연하게, 그것도 갑작스럽게 닥치는 죽음의 공포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두렵게 마련이다. 정부는 개화파들의 위생개혁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정부는 ‘도로와 위생에 관한 규칙’을 만들었다. 마치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도로를 깨끗이 쓸고, 상하수도 시설을 정비하고, 변소와 주방을 개량하고, 정기적으로 길거리를 소독했다. 그러나 오랜 삶의 습관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았다. 급기야 정부는 공권력인 경찰을 투입했고 경찰들은 민중들의 삶을 감시했다. 노상방뇨 하는 사람이 있는지, 우물이 더럽지 않은지, 하수도에 더러운 오물을 버리는지, 뒷간의 분뇨를 잘 치우는지 등등. 위생감찰을 주된 업무로 하는 ‘위생순검’이라는 특별 직책도 등장한다. 이들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거리를 활보하며 길가에 대·소변을 보는 사람들을 적발하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 시장을 돌아다니며 상점의 위생상태도 점검했으며, 만약 불결한 상점이나 상한 음식을 파는 가게가 적발되면 태형(笞刑)이나 벌금형을 내렸다. 정부가 경찰력을 동원하여 위생개혁에 팔을 걷어붙이며 끝까지 박멸하려고 했던 물질은 바로 똥과 오줌이었다. 똥오줌과의 대 전쟁이 선포된 것이다. 특히 노상방뇨는 크나큰 범죄행위였다. 정부와 계몽가들에게 똥은 단순히 생리적 현상에 의한 배설물이 아니었다. 똥은 만병의 근원이자 공기를 오염시키는 악독한 물질이었다. 똥에서 나오는 냄새를 사람들이 맡으면 질병에 걸린다고 믿었다. 똥은 각종 세균이 서식하고 번식하는 숙주라고 판단되었고, 길가에 널려 있는 똥의 척결만이 살길이요, 문명개화의 길이었다. 이렇게 우리에게 친숙한 ‘똥’은 어느 날 갑자기 만병의 근원, 비위생의 표본으로 새롭게 ‘발견’되었다. 대로에 똥을 누는 자 그 누구도 용서할 수 없었다. 사실 똥이 무슨 죄가 있는가. 느닷없이 바뀐 세상, 근대의 시선, 문명의 시선이 똥을 적으로 삼았을 뿐이다. 그런데 만약 무심코 길가에 노상방뇨를 하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건 팁(Tip)이다. 일전에 용동 등지에서 어떤 의관한 사람이 오줌을 누다가 일순사에게 붙잡혀 뺨을 맞고 의관을 다 찢겼을 뿐 아니라, 땅에 눈 오줌을 도로 먹게 하며 무수한 곤욕을 당했다.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분하게 여겼다.(‘오줌 누다 봉변’, 1909. 2. 12. 잡보(雜報)) 일본 통감부가 한국을 다스릴 무렵인 1909년, ‘일순사’가 뺨을 때렸다고 하니, 일제의 만행이라고 치부하고 싶지만 그렇지 않다. 문제는 일본순사의 행위가 아니다. 위생에 대한 강박증이 만들어낸 제도의 폭력이다. 의료가 병을 치료하는 행위라면, 위생은 병을 예방하는 일이다. 치료는 일차적으로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전제로 하지만, 위생은 도래할 질병, 미래의 환자에 대한 지속적인 감시의 시스템이다. 이는 일상의 습속(習俗)을 개량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몇백 년 동안 지속되었던 삶의 방식을 갑자기 바꾸는 일은 녹록지 않다. 위생은 질병과의 전쟁이기도 하지만 민중의 삶의 습속과 싸우는 일이다. 근대는 낡은 삶을 용납하지 않는다. 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규칙들을 만들고, 또한 사람들을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 내야 한다. 낡은 외투를 벗고 허허벌판으로 떠밀려 나간 사람들은 철저하게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야만 하는 것이다. 위생이 고생이라! 공권력을 동원한 정부는 위생개혁을 위한 박차를 가했다. 분명 인민들의 삶을 보다 좋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행한 일이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에게 위생은 ‘고생’의 다른 말이었다. 경찰들은 길거리에 퇴비 쌓는 행위를 금지했다. 변소는 똥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함부로 똥을 풀 수도 없었다. 똥간을 푸는 일에도 돈이 들었다. 지금처럼 탱크로리가 딸린 차가 온 게 아니라 똥통을 짊어진 사람들이 방문했다. 그들이 공짜로 뒷간을 청소해줄 리 없었다. 똥을 치워주는 대금을 지불해야만 했다. 백성들에게 이 ‘분뇨처리부대’는 안 그래도 어려운 살림에 반갑지 않은 손님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일명 1900년대 식 새마을 운동의 명목으로 신설된 ‘청결법’과 그에 따른 ‘위생비’는 사람 잡을 세금이었다. 순검과 헌병들은 아무 집이나 무단으로 들어가 위생비를 내지 않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가했고, 세금징수를 빌미로 부녀자에 대한 성폭행을 서슴지 않았다. 민중들에게 부과된 위생비는 약 1원 정도였다. 지금으로 보면 대단한 액수가 아니지만, 당시 쌀 한 가마니가 약 5~6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금액이 아닐 수 없었다. 신학문을 공부하는 학생들이니 만큼 어찌 위생에 둔감할 수 있겠는가. 미래의 동량인 학생들이 비위생적 환경으로 질병이라도 걸리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황제가 단발하는 것도 위생에 관계되는 일이라며, ‘위생’에 방점을 콕 찍지 않았던가. 물론 아관파천에서 돌아온 고종은 황제로 등극하면서 단발령을 철회하기는 했다.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짐이 그때 단발령을 내린 것은 본의가 아니었다. 친일세력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짐은 다시 명하노니, 이후로는 편할 대로 하라.” 그렇지만 한번 트인 물꼬를 쉽게 막을 수는 없었다. 수백 년 간 지속되어 온 장발 ‘관습’ 또한 만만치 않았지만, 단발이 ‘위생’과 연관되었고,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문명개화한 사람의 상징이 된 이상, 계몽의 선두에 서야할 학생들 역시 단발의 유행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학생들은 황제가 편할 대로 하라고 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알아서 해라’라는 말을 완곡법으로 받아들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단발이 편해서였는지, 여하튼 그동안 고이 길러왔던 댕기를 싹둑 자르기 시작했다. 댕기 동자의 시대는 서서히 그 막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학생계의 새로운 패션, 단발 1930년대 활약한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인 김기림은 근대 초기 한국의 역사를 ‘단발의 시대’라고 선언한다. 남들은 스포츠니, 스피드니, 센스니 떠들 때, 김기림은 과감하게 단발이야말로 근대 초기 한국 사회를 주름잡았던 중요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단발은 하나의 사건을 떠나 조선반도를 들썩이게 했던 대단한 유행이었다. 100년 전 단발과 복장개량은 구시대의 관습에 도전하는 일이었다. 머리카락을 자르고 서양식 복장을 입은 것은 단지 서구의 유행을 추종해서가 아니다. 물론 그런 부류들도 있긴 했다. 그러나 몸의 외피를 바꾸는 일이자 끈질기게 내 몸을 구속했던 제도적 관습을 벗어나는 적극적인 행동이 바로 단발이었다. 단발은 머리 모양을 바꾸는 행위가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바꾸는 행동이었다. 그것은 혁명과도 같은 폭발력을 지닌 의식이었으며, 전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처음부터 신학문을 배우는 학생들이 단발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자신들의 모습을 바꿨다. 단발을 하고 도포를 벗어 던지는 것이 문명개화된 학생의 상징이었고 또한 그것이 문명의 대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행동이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지만,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장발의 전통이 쉽게 무너질 리 없었다. 국가와 학교 그리고 계몽가들은 학생들에게 단발을 하라고 연일 목소리를 높였으나 아버지로 대표되는 가정은 자식들의 단발을 곱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이로 인해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상황까지 연출되었다. 행여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먼저 단발을 한 친구의 독려로 머리카락을 잘랐지만, 쉽게 집으로 들어갈 수 없는 학생들도 많았다. 날이 저물어서야, 부모 몰래, 그것도 벙거지를 쓰고 집으로 들어가는 일일 비일비재했다. 앞에서도 잠시 얘기했듯이 단발은 일종의 의식(儀式)이었다. 그것은 양반과 상놈의 구별을 없애주는 상징적 행위이기도 했고, 야만인에서 문명인이 되는 계기이기도 했으며, 변화된 신체를 통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설렘, 매혹, 공포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행동이었다. 단발은 그저 머리카락을 짧게 깎았던 것이 아니라 아예 ‘삭발’에 가까웠다. 상고머리에 포마드 기름을 바르는 단발은 고급에 속했고, 대부분의 학생은 머리를 빡빡 밀었다. 듬성듬성 이가 빠진 바리캉이 청년들의 머리털을 쥐어뜯는 동안 주위의 친구들은 그들의 단발을 독려하며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무쇠골격 돌 근육 소년 남자야. 문명의 정신을 잊지 마라. 우리는 덕을 닦고 지혜 길러서, 문명의 선도자가 되어 봅시다.’ 신체검사, 신체를 도표 속에 감금하다 단발도 복장개량도 크게 보아서는 위생의 문제였다. 위생의 문제는 겉모습만 문제 삼지 않았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잠자는 것, 머리 감는 것, 목욕하는 것, 운동하는 것 등등. 해야 할 일이 산처럼 쌓였다. 더구나 미래를 이끌어갈 새 시대의 주인인 학생들의 건강은 곧 국력과 비례한다고 생각했기에 더욱 세심하게 관리되었다. 학생들은 정기적으로 신체검사를 받았다. 요즘 학생들에게 음란사이트와 인터넷 게임이 크나큰 문제였다면, 당시 학생들에게는 호환과 마마 같은 질병이 문제되었다. 질병, 특히 전염병을 예측하기란 아직 쉽지 않았던 시대였다. 1907년과 1909년 콜레라 기승을 부릴 무렵 정부에서는 각 학교에 의사들을 보내 학생들의 신체검사를 일제히 한다. 지금처럼 몸무게, 키, 시력 등을 측정하여 수량화하는 게 아니라 질병의 유무를 판단하기 위함이었다. 그렇지만 1910년 일본에 의해 한국이 강제병합 되면서 신체검사의 모습도 크게 바뀌었다. 현재의 신체검사와 비슷한 모습이 당시에 연출된다. 1913년 4월 조선총독부 훈령 제24호로 공포된 법이 있다. 일명 ‘관·공립학교 생도 신체검사 규정’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이 법령을 근거로 매년 4월에 학생들의 신체를 검사했는데 항목은 모두 11개였다. 키, 몸무게, 가슴둘레, 척주(脊柱), 체격, 시력, 눈병, 청력, 귓병, 치아, 질병이었다. 질병 검사의 항목은 영양불량, 빈혈, 선병(腺病), 각기(脚氣), 폐결핵, 두통, 신경쇠약, 비질(鼻疾), 인후병, 전염성 피부병, 기타 만성질환이었다. 근대 초기 각 학교에서 학생들이 신체를 조사한 건, 문명국가 건설과 부국강병책을 위해서는 자라나는 학생들의 건강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때에도 ‘체력은 곧 국력’이라는 모토가 작동했다. 그렇지만 일제강점기 때 실시된 신체검사는 황국의 건강한 ‘신민’을 육성하려는 방책이었다. 의미는 서로 다르지만 결국 학생들의 몸은 국가에 의해 표준화되고 검사되고 관리되었으며, 그렇게 한 국가의 국민으로 길들여져 갔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체력장’을 실시한다. 그 무시무시한, 입학시험보다 더 공포스러운 체력장이 드디어 등장한 것이다. 입학시험에 합격이 되어도 체력장을 통과해야만 상급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체력장의 종목은 질주력(疾走力), 도약력(跳躍力), 투척력(投擲力), 운반력(運搬力), 현승력(懸乘力) 이었다. 일명 100미터 달리기와 3000미터 달리기 그리고 멀리 뛰기와 멀리 던지기가 등장한 것이다. 이렇게 식민지시기에 만들어진 체력장이라는 제도는 시대를 뛰어넘어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 들어서면 다시 화려하게 부활하기에 이른다.
(녹우당 전경) 최효찬 | 경향신문 기자 주도적인 사람으로 살아라 구약성서에 노예로 팔려가 이집트 총리가 된 요셉(창세기 37:2)의 이야기가 있다. 요셉이 노예가 된 경위는 이렇다. 그는 어려서부터 꿈을 잘 꾸었다. 그는 11명의 형들이 자신에게 절을 하는 꿈을 자주 꾸었다. 그는 이것을 형제들에게 이야기 했다. 평소에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요셉을 시기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그의 형제들은 결국 요셉을 이집트 노예로 팔아버렸다. 하지만 요셉은 자신의 꿈이 언젠가는 현실이 될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시련은 계속됐다. 그는 여인의 유혹을 뿌리친 죄로 감옥에 갔다. 그곳에서도 미래를 준비했다. 감옥 관리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에게 기회가 왔다. 파라오의 관리인 두 명이 자신의 꿈을 해몽해 달라고 요셉에게 요청한 것이다. 요셉은 그들의 꿈을 해몽해 주고, 감옥에서 나가거든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다. 어느 날 파라오가 꿈을 꾸었다. 그 꿈이 하도 불길해서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해몽가들을 불러내었다. 아무도 파라오의 꿈을 해몽한 사람이 없었다. 그의 꿈을 해몽한 관리가 요셉을 기억해내고 파라오한테 소개해 주었다.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해몽해 주었다. 그것은 이집트에 7년의 풍년과 그 이후 7년의 흉년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파라오는 요셉의 지혜를 높이 사 그를 이집트 총리로 발탁했다.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서도 항상 잊지 않고 지낸 것이 있다. 그를 버린 그의 가족들이었다. 형들은 그를 버렸지만, 요셉은 가족들을 항상 마음에 품고 지내왔다. 흉년기간 요셉의 형들도 식량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로 오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요셉은 형제들을 만났고, 그들을 용서했고, 도움을 주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주도적인 사람은 남을 탓하지 않고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지닌다. 스티븐 코비는 에서 '주도적이 되라'는 명제를 던지면서 요셉의 에피소드로 주도적인 삶을 강조한다.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에 대해 다른 사람들 혹은 주위 여건이나 제약조건들을 원망하기 쉽다. 하지만 요셉과 같이 주도적인 사람은 자신의 생활을 통제하고, 자기 자신과 '될 수 있다'는 결의에 노력을 집중한다. 이를 통해 주위 상황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리한 상황을 만든다는 것이다. 요셉의 이야기는 고난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으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삶을 그리고 있다. 이에 대해 코비는 성공하기 위해서는 요셉과 같이 자기 삶을 주도하는 습관을 들이라고 당부한다. 15년을 유배를 당한 고산 윤선도(1587~1671)는 삶을 주도적으로 살다간 선비였다. 유배기간의 '강요된 은둔'은 주옥같은 시를 쓸 수 있게 했고, 나아가 세상을 더 밝히는 수많은 저서들을 낼 수 있었다. 고산과 같이 세상은 개인의 불행과는 별개로 '은둔의 미학'으로 다른 삶들을 밝히기도 한다.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의 복귀와 함께 장관직에서 해임된 이후 죽는 날까지 15년 동안 은둔하면서 과 등 역작을 남겼다. 물론 그 와중에 현실정치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등을 헌정하면서 끊임없이 메디치가에 구애를 보냈지만, 메디치가는 끝내 그를 불러주지 않았다. 이게 오히려 마키아벨리에게는 사후에 더 명예로운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소신을 가진 선비형 정치가 고산은 조선이 풍전등화의 시대였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와중에서 살았다. 17세기는 당파싸움이 극에 달했던 때였다. 이전투구의 세상에서 벼슬길에 갓 오른 고산은 30세에 광해군 당대의 권력자 이이첨의 죄상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당한다. 당시 고산이 상소문을 짓고서 그 피해가 관찰사였던 부친(윤유기)에게도 미칠 것을 알고 먼저 보여주니 아버지는 울면서 만류하다가 결국 자식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예측한 대로 부친도 자식의 귀양과 함께 삭직 당하여 불운한 여생을 보내야 했다. 고산은 37세 때(1623년) 인조반정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의금부도사에 취임했다. 봉림대군(효종)의 사부를 하기도 했다. 병자호란 중인 51세 때 임금이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보길도에서 은거를 시작했다. 52세 때에는 대동찰방과 사도시정이라는 벼슬을 받았으나 벼슬길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당시 집권세력(서인)이 대궐로 돌아온 임금을 문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고해 고산은 경북 영덕으로 2차 유배를 당했다. 74세 때 효종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복제문제로 상소를 올렸다가 다시 함경도 삼수로 유배되었다. 그의 생애 세 번째 유배였다. 고산은 81세에 이르러서야 왕의 특명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해남을 거쳐 보길도에 들어 은자 생활을 하다가 85세 때 부용동에서 세상을 떴다. 고산의 유배기간은 총 14년 7개월이나 됐다. 요즘에는 고산 윤선도와 같은 소신 있는 선비형 정치가를 만나볼 수 없는 현실에 비춰보면 고산이 살벌한 당시 정치풍토 속에서 얼마나 주도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자녀를 문화의 바다에 빠뜨려라 고산은 유배 등 정치적 고난을 이겨내고 자신만의 학문세계를 구축했다. 그게 바로 고산가의 박학다식의 가풍이다. 고산은 당시의 사대부로서는 감히 다루기 어려운 의학, 천문, 지리, 점성술, 음악, 미술 등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는 이러한 학문을 연구하였을 뿐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이를 직접 응용하였다. 고산은 한의학에 정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약을 처방해 주기도 했다. 또 당대의 뛰어난 풍수가이기도 하다. 그만큼 당시 양반들이 천시하던 분야에도 남달리 열정을 가지고 공부를 한 실용적인 학자였다. 당대에 이름을 날린 학자들은 대부분 유년시절이나 청소년시절에 큰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게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부모들의 각별한 자녀교육의 지침 속에서 '훈육'되는 게 조선시대 양반가의 가풍이었다. 그러나 고산은 11살 때 산사에 들어가 책을 읽었으며 특별히 어느 스승으로부터 배운 바가 없이 독학하였다. 이는 다른 명문가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다. 그래서인지 고산은 주자학뿐만 아니라 실용학문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는 후손들에게 그대로 이어져 해남 윤씨가의 독특한 가학으로 전승된다. 고산의 학문세계는 그의 후손들에게 삶의 지침과 등불이 되었다. 바로 그의 주도적인 삶이 교훈이 되고 가르침이 되었던 것이다. 정치적으로 불우한 생을 산 고산은 후손들에게는 가능하면 정치에 발을 들여놓지 말고 대신 실용적인 학문에 힘쓸 것을 당부했다. 그래서 고산이 살던 녹우당은 풍수지리학, 의학, 천문학, 병가학,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접할 수 있는 국내의 유일의 '잡학 도서관' 역할을 했다. 녹우당에는 공재 윤두서가 그림 공부하는데 교본으로 이용한 를 비롯해 중국 고천문서인 등 외서들이 즐비했다. 후손들은 녹우당에 있는 수많은 서적을 보면서 자신의 갈 길을 찾았다. 또 소치 허련 등 해남 주변 사람들도 찾아와 인생의 길을 열어나가는데 등불이 되어주었다. 고산의 가르침대로 후손들은 당시 엄격한 양반질서에서 잡학이라고 천시하는 의학, 천문학, 점성학, 기술학, 미술 등을 대대로 공부했다. 고산과 같은 대학자이자 시인을 배출한 집안에서 윤두서-윤덕희-윤용 등 3대에 걸쳐 화가가 나왔던 것이다. 고산가 자녀교육의 핵심은 시대에 앞서 실용적인 학문에 힘쓰고 자녀들에게는 '문화적 충격'을 줄 정도로 다양한 학문의 세계에 접하게 하면서 '문화의 바다'에서 뛰놀게 한 데 있다고 하겠다. 시·서·화에 독보적인 재능을 발휘해온 고산가의 가풍은 400년을 뛰어넘어 그 후손들에게도 드러나고 있다. 고산의 14대손인 윤형식의 딸은 대학을 마치고 화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의 손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시집을 내기도 했다. 고산에서 시작된 박학다식의 유별난 가풍은 그 후손들을 문화의 바다에 빠지게 했고, 그러한 가풍은 대대로 그 향취를 더하며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재물이 쌓인 후엔 명예 추구 명문가의 생성과정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명문가는 변증법적이고 진화론적인 과정을 거친다는 점이다. 지속적으로 명가의 지위를 재생산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상당한 재산가의 반열에 오르고, 이어 이러한 '물질적 부'를 바탕으로 지역주민들에게 나눔과 베품을 실천하면서 신망을 얻게 된다(先財後名). 이후 자녀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큰 인물이 나오면서 한 가문의 '정신적 부'를 이룬다. 그리고 물질과 정신이 합쳐져 지속적으로 자긍심 높은 가문과 인물을 배출하면서 명문가를 대대로 재생산하는 것이다. 일종의 정(물질)-반(정신)-합(물질과 정신의 총합으로서의 명가)의 변증법적인 과정을 거친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고산가의 경우도 이러한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해남 윤씨가의 가문을 초석을 쌓은 가문의 기획자가 윤호정(1476∼1543)이라면 그의 고손인 고산 윤선도는 명문가로 위상을 드높인 인물이다. 해남 윤씨는 상속재산으로 갑자기 거부가 된 윤효정 이후로 인재들을 배출하게 된다. 13세에 해남의 갑부 해남 정씨 집으로 장가든 윤효정은 처갓집의 재산을 상속받아 갑작스럽게 부자가 되었고, 윤효정의 세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면서부터 해남 윤씨는 명문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거부가 된 윤효정은 먼저 어려운 지경에 이른 백성들을 3번이나 구제해 주면서 지역민들로부터 신망을 얻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윤효정을 비롯해 해남 윤씨가는 '삼개옥문 적선지가(三開獄門 積善之家)'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근검과 함께 적선은 녹우당에서 지금도 후손들이 집안의 제1 덕목으로 내세우고 있는 가훈이다. 해남 윤씨가는 윤효정의 3형제가 과거에 급제하고 이어 고산 윤선도까지 5대에 걸쳐 연속 과거급제자를 배출하면서 호남의 명문가이자 최고의 재력가로 부상했던 것이다. 이어 고산에 이르러 학문에 제한을 두지 않고 미술과 천문학, 의학, 점성학 등에까지 다양하게 연구하는 가풍을 세우는 등 자녀교육의 원칙과 가학의 전통이 세워지게 된다. 즉 명문가는 한대에 걸쳐 이루어지지 않고 최소한 3대에 걸친 노력의 결과물인 것이다. 고산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한 집안의 학문적인 취향이 오랜 세대에 걸쳐 지속되면 가학의 전통으로 훌륭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대로 수집된 수많은 서적들은 후손들에게 '지성의 바다'에 빠져들게 하는 향기로 작용한다. 이 향기는 가문 구성원들에게 절제심과 자긍심을 높여주는 촉매제가 된다. 한편 재력이 넉넉한 부자가문에 태어난 경우 그 자손은 유유자적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펼쳐나갈 수 있다. 더욱이 재능을 타고났다면 가문을 빛낼 인물로 성장하기도 한다. 를 쓴 분석철학의 대가 비트겐슈타인(1889~1951)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그는 평생 경제적인 문제에 고민하지 않고 대학교수도 싫다며 시골에 은거하면서 학문적 성공을 일궈낸 인물이다. 188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가장 부유한 철강 재벌의 여덟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케임브리지대 교수직도 버리고 노르웨이의 조용하고 경치 좋은 곳에 오두막을 짓고 은둔하며 철학적인 사유에 집중하며 살았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천재적 재능이 있었겠지만, 부모의 재력이 없었다면 과연 교수직을 내던지면서까지 생활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는 부모가 물려준 재산을 역시 거액을 상속받은 형제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부모가 물려준 재산은 그에게 오히려 짐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명문가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경제력을 꼽을 수 있다.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훌륭한 인물이 탄생하기까지 눈물겨운 후원 스토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천하제일가문으로 꼽히는 공자의 경우 후원자로 72제자의 한사람인 자공이 있었다. 만약 자공의 지원이 없었다면 평생 관직에 오르지 못했던 공자가 생업을 돌보지 않고도 위대한 사상가로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칼 마르크스 역시 엥겔스라는 평생 후원자가 없었다면 과 같은 책이 햇볕을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명가의 지속을 위한 3가지 조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은 자전적인 소설 을 통해 한가문의 흥망사를 다뤘다. 여기서 토마스 만은 변증법적이고 진화론적인 가문의 성장과정을 체험적으로 들려준다. 소설에서처럼 한 가문의 흥망성쇠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토마스 만은 1875년 독일 뤼벡에서 부유한 상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시의원을 지내는 등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토마스 만은 1901년에 을 발표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세계적인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의 형 하인리히 만도 작가로 명성을 날렸다. 여기까지는 한 가문이 진화론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명가의 재생산 단계에 접어드는 듯하다. 경제력에 이어 큰 인물을 배출한 것. 그러나 토마스 만의 가문은 이후 그의 아들 클라우스와 미카엘의 잇단 자살로 위기에 처하게 된다. 장남 클라우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소설가가 되었지만 문학적으로 아버지만큼 성공하지 못해 고통을 겪었다. 작가로서의 명성은 얻었지만 끝내 그는 자살했다. 이와 같이 명가로의 도약과 지속적인 확대 재생산은 결코 쉽지 않다. 잘 나가던 가문도 몇 세대를 넘기지 못하고 쇠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문호인 괴테가도 괴테가 귀족의 반열에 올랐지만 손자대에 이르러 가문이 끊겼다. 지속적인 명가의 재생산은 가문 구성원들의 절제심과 함께 가문에 대한 자긍심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인류 역사에서 명멸한 수많은 명가들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특히 최소한 3대 이상에 걸친 노력 없이 명가로 도약하기 힘들다. 경제력을 지닌 것만으로도 안 된다. 나눔과 베품의 실천을 통해 이웃들로부터 신망을 얻어야 한다. 자녀교육을 통해 절제심을 지닌 인물을 배출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적어도 이러한 3가지의 기본조건을 충족시킬 때 명가의 탄생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핵심적인 요소가 자녀교육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cafe.daum.net/parque) 삼국시대의 주요 키워드는 〈삼국지〉일 것이다. 중국의 4대 기서(奇書) 가운데 첫 순위를 차지하는 대하 '전쟁역사소설(戰爭歷史小說)'인데, 시대적 무대는 농민들이 중심이 된 민중봉기(황건의 난)가 일어난 서기 184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백성들의 반 정권 투쟁 황건의 난 현대 중국에서는 황건의 난, 즉 머리에 누런 천을 쓴 비적 떼가 난리를 쳤다는 뜻이 아니라 '황건기의(黃巾起義)'라는 표현을 쓴다. 단순히 그들을 도적이 아니라 사회적 모순을 개혁하기 위한 혁명세력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원래 광무제 유수로부터 시작되는 후한(後漢)은 처음부터 중앙집권적 정부가 아니라 호족 연합정권의 성격이 강했다. 그래서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할 정도로 커져버린 지방의 호족들은 본격적인 권력집단으로 성장함으로써 문벌귀족으로 발전해갔다. 후한 말도 역시 전한(前漢)과 마찬가지로 연이은 어린 황제의 즉위로 태후를 비롯한 외척과 환관들이 세상물정을 모르는 황제를 둘러싸고 정치를 농락했다. 결국 국가의 기간산업인 농업을 비롯한 산업 전반에 걸친 침체를 가져왔으며 백성들은 수입격감에 조정의 중과세라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배고픔과 탐관오리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인심은 흉흉해지고 도적 떼가 들끓어 비적화(匪賊化)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은 백성들로 하여금 '몽땅 다 바꿔버리자'는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충분하였으며 이때에 '태평도(太平道)'가 등장한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많은 반란 중에 특히 농민 반란군은 국가의 체제 자체를 전복시키려는 세력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조선말에 동학혁명군이 봉기하자 조정은 청나라와 일본의 세력까지 끌어들여 결사적으로 진압코자 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삼국으로 다시 분열된 중국 대륙 후한 중기부터 마그마처럼 끓고 있었던 백성들의 반 정권 투쟁에 대해 심정적으로 동조한 장각(張角)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당시 다수의 유민(流民)들을 끌어 모으는데 성공하여 불과 10여 년 사이에 수십만의 신도를 끌어 모아 종교집단의 차원을 넘어서 정치집단으로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를 대현양사(大賢良師)라 칭하고 거사에 즈음해서는 자신은 천공장군(天公將軍), 동생인 장보와 장량을 각각 지공장군(地公將軍)과 인공장군(人公將軍)으로 삼고 총 병력 36만에 달하는 황건군(黃巾軍)을 조직하였다. 중국민중의 눈에 황제라는 존재는 하늘의 위임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존재가 아니라, 오직 타도의 대상일 뿐이며 이를 대신하여 새로이 덕이 있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有道伐無道, 無德讓有德)는 상황논리가 크게 작용하여, 진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갔던 '진승·오광의 난'처럼 이번에는 후한 멸망의 도화선, 황건의 난이 터진 것이다. 의외로 강적을 만난 후한의 외척들은 모든 힘을 동원하여 반란군 진압에 나섰으며 자체적인 방어능력이 없었던 중앙정부는 각 지역에 황제의 이름으로 황건적 토벌을 위한 격문을 보내니 호족들은 황명에 따른다는 구실로 군비를 강화하고 자기의 사병조직을 총동원하여 영지방어에 나섰다. 이 때 유비(劉備)도 관우, 장비와 도원의 결의를 맺고 의병을 조직하여 황건적 토벌에 나섰다. 자칭 대현양사(大賢良師) 장각이 죽자 황건의 난을 주도했던 지도자급들은 어느 정도 진압되었으나 혁명적 불길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가 지방의 호족들이 엉뚱한 생각을 품게 되어 '대업(大業)'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게 되었다. 제후들은 십상시의 난과 동탁의 집권을 계기로 천자를 능멸하는 역적을 친다는 구실로 중원의 패권다툼을 하다가 최후의 승자인 조조(曹操)가 위왕(魏王)에 오르고, 서기 220년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계속 헌제를 협박하여 선양을 받는 형식으로 황제 위에 오름으로써 기원전 202년부터 시작된 한나라는 문을 닫게 되었다. 한편 유비는 한조(漢朝)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손권과 연합하여 적벽대전에서 조조군을 대파한 여세를 몰아 서천지방을 중심으로 촉(蜀)을 세우고 후한이 망한 후에 제위에 올랐으며(서기 221년), 손권(孫權)은 강남을 중심으로 그 지역의 호족들을 규합하여 유비와 함께 조조의 남진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여 오(吳)를 세우고 한조가 망하자 위와 촉한에 비해 뒤늦게 황제에 올랐다(서기 229년). 이로써 중국대륙은 삼국분립시대(AD 220~280)로 들어가게 되었다. 과장과 왜곡의 역사서술 〈삼국지〉 원래 삼국지(三國志)는 삼국시대의 촉(蜀)과 그리고 그 이후 서진(西晋) 조정에서 봉직한 진수(陳壽)가 삼국시대를 정리한 정사(正史)로서 위지(魏志)·촉지(蜀志)·오지(吳志)를 총 65권으로 정리하였는데, 그는 삼국 가운데 유일하게 위지에 본기(本紀)를 넣어 역사서술을 했다. 다시 말해서 조조의 위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승자의 기록이었던 것이다. 이후 사마염이 조 씨의 위를 멸하고 오나라까지 병합하여 삼국을 통일하지만 중국은 다시 대혼란에 빠져드는데, 이를 남북조 시대라 한다. 남북조 가운데 송나라(조광윤의 송나라가 아님)의 문제는 배송지에게 역사서로서 진수의 에 해설을 달라는 황명을 내려 본문보다 엄청나게 방대한 소설체 주석이 달렸으며, 한족의 남조(南朝) 국가들은 〈삼국지〉의 주인공들 이야기 가운데 재미있고 과장되며 엽기적 내용들을 모아 라는 야담집을 펴냈다. 는 배송지의 해설(삼국지주, 三國志注)과 더불어 나관중의 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수많은 이야기꾼, 즉 설화인들이 원나라 말기에서 명나라 초기에 적극적인 활동을 하게 되는데, 그중 나관중으로 일컬어지는 집단이 세간에 떠도는 를 모아 를 편찬하였다. 이 말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개인적 문학작품이 아니라 삼국지 관련 설화들을 진수의 를 바탕으로 집대성한 것으로 보면 무리가 없다. 그런데 사관이 바뀌고 말았다. 유비의 촉한을 정통 중화로 보는 공정(工程)이 진행된 것이다. 날이 가면 갈수록 엄청난 과장과 왜곡이 쌓여만 갔다. 제갈량이 화살 십만 개를 만들고 동남풍을 불게 하였고, 관운장의 혼령 때문에 여몽이 죽고 조조 역시 충격을 받아 죽게 된다. 1400년대 후반에는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가 간행되었고 이외에도 명나라 때는 수십 종의 '삼국지'가 쏟아져 나왔다. 진수의 는 어디까지나 국가에서 편찬한 것이다. 따라서 중원을 통일한 위나라의 계승자인 진나라를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사마(司馬) 씨가 조조가 세운 위(魏)를 멸하고 제위를 찬탈하거나 유비의 촉(蜀)이나 손권의 오(吳)나라에 대해서 역사적 왜곡들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승자의 기록임에는 분명하다. 승자의 기록이 올바르다는 것이 아니라, 역사기술이 그렇게 이루어져 왔다. 여기에 앞서 배송지의 가 나온 배경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북조시대 송나라의 문제가 어째서 배송지에게 진수의 에 주석(해설)을 달도록 황명을 내렸는가 하는 배경 말이다. 배송지에게 삼국지에 주석을 달라 황명을 내린 송나라 문제의 정치적 의도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비록 그의 아버지(유유)가 중원을 북방민족으로부터 지켜내고 자신은 정변을 극복하고 나라를 편안케 했지만, 문제는 아버지가 황제를 시해했다는 원죄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문제는 황실의 권위를 회복시키고 민심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국지〉를 유효적절하게 이용하여 그의 아버지가 창업하고 자신의 통치하는 송나라가 중국대륙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천명하였다. 아무리 북위를 비롯한 북조국가들이 힘이 있어도 그들은 단지 무도한 오랑캐 무리라며 스스로 자위하면서 말이다. 왜곡된 중화주의에 놀아난 조선 남북조시대에서 600~700년이 지난 후 절도사 출신 조광윤(趙匡胤)이 송나라를 세우고 문치주의(文治主義)를 표방하는 바람에 국방력이 약화되어 요나라와는 '전연의 맹약'을 맺고 재물을 바치며 평화를 구걸하였다. 또한 금나라에게 '정강의 변'을 당하여 나라가 잠시 단절되기도 하였고, 남송으로 거의 명맥을 유지하다가 결국 몽골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엄청난 절망감에 빠진 한족들에게 남아도는 것은 시간뿐이었다. 그들은 모이기만 하면 각종 사서와 경전, 그리고 부풀려진 삼국지에서 민족적 우월성을 찾기에 급급했다. 특히 주자(朱子)는 자신의 학문적 바탕을 골수 중화주의에 두고 에 대한 철저한 재평가 작업을 통해 유비가 건국한 촉한을 중국에 있어서 유일한 정통 왕조로 보았다. 그런데 문제는 주자학이 성리학으로 이어지면서 조선왕조의 정치 이데올로기가 되어 중국인은 더욱 골수 중화주의자, 조선은 골수 사대주의자가 되고 말았다. 소위 한족 왕조 명나라의 '촉한공정'에 한방 먹은 것이다.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1328~1398)은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를 전면에 기치를 내걸면서 다시 한 번 삼국지의 역사왜곡을 감행하였다. 왜냐하면 지긋지긋한 이민족의 통치에 주눅이 든 한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것 가운데 가 가장 좋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원장의 아들 영락제는 중화주의를 확산시키는 도구로서 삼국지를 널리 활용하였다. 관우를 관제(關帝)로 추존하는가 하면, 환관 정화를 남방원정에 보내어 삼국지를 동아시아 전체에 퍼지게 하였다. 여기에 조선 조정은 물론 민중들까지도 에 흠뻑 빠지고 말았다. 소위 한류열풍(漢流熱風)이 조선사회에 불어 사대사상이 모화사상(慕華思想)으로 발전하여 중국인의 '관우 신격화 농간'에 빠지고 말았다. 관우 사당이 전국 팔도에 들어서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국가차원의 제사까지 바쳤다. 임진·정유의 국난극복이 관우의 영험 덕분이니 국가차원의 사당을 세우라는 명나라 황제의 명에 따라 서울 한복판에 동묘도 세웠다. 전후복구도 바쁜데 쓸데없이 예산과 국력을 낭비한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국난극복에, 그리고 전후복구에 여념이 없는 광해군을 마구 흔들었다. 명나라 황제의 세자 책봉이 없었으니 폐세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현실외교를 하고 있는 광해임금을 끌어내리고 환란을 불렀다(인조반정과 정묘·병자호란). 부모의 나라인 명나라를 돕지 않고 후금(청)과 양다리 외교를 한다는 죄목을 씌워서 말이다. 뿌리 깊은 사대주의는 서민음악에도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이며 2003년 11월 7일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우리의 자랑스러운 판소리 다섯 바탕에 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소중화주의적 사설로 말이다. 우리의 잣대로 평가한 새로운 가 나오면 좋겠다. 아무튼 우리나라는 나관중 〈삼국지〉의 최대 피해국인데, 현대 중국은 또다시 역사왜곡을 획책하고 있다. 이른바 '동북공정'이다. 그들의 억지가 통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전적으로 우리 역사의식의 몫이다. 중국을 탓할 바가 아니다. 정말이지 고구려사와 발해사가 문제가 아니다. 이러다간 전체 민족사가 중국사로 넘어갈 판이다. 이제는 역사를 바라보는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신아연 | 호주 칼럼니스트 “아무개야, 어서 일어나 봐라. 해바라기가 폈다. 드디어 해바라기가 폈다니까.” 이른 아침, 화단에 해바라기 꽃이 핀 걸 보자마자 아직 자고 있는 아들을 흔들어 깨웠다. 해바라기가 폈다는 소리에 아니나 다를까 아들은 “정말?”하면서 튕기듯 벌떡 일어났다. 제 방 창문 앞으로 다가가 팔랑개비 날개처럼 여린 노랑 꽃잎이 막 벌어지기 시작하는 해바라기를 탄성 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아들의 얼굴에 뿌듯함이 번졌다. “너한테는 자식 같은 존재다. 씨앗 뿌리기부터 꽃을 피워낼 때까지 네 정성이 보통이었니?” 좀 과장을 섞어 호들갑스레 아들을 추켜 준 뒤 등교를 시키고 나서 해바라기를 키우기 위해 녀석이 공을 들인 지난 두 달 반의 시간을 흐뭇한 마음으로 돌이켜 보았다. 중학교 2학년을 마친 후 두 달간의 긴 여름방학을 보내던 아들애가 어느 날 갑자기 꽃씨를 사러가자고 했다. 식물을 제대로 키울만한 인내심이나 화초 가꾸기에 대한 기초 지식부터 의심스러웠지만 ‘밑져야 꽃씨 값’이란 생각에 그러자며 화원으로 데리고 나섰다. 기왕이면 키 큰 꽃이 자라는 속도가 빠르고 보기도 든든할 테니 그만큼 성취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해바라기를 고르라고 권했다. 돌아오는 길에 아들이 지역 도서관에 들러 화초 기르기에 대한 책도 한 권 빌리자고 하는 것을 보고 내심 ‘제법이다’ 싶었는데, 집에 돌아와서는 다시 인터넷 검색을 통해 ‘해바라기’에 대해 몇 시간을 연구하는 ‘용의주도함’까지 보였다. 저 정도 진지한 자세라면 올여름이 가기 전에 해바라기 한 포기는 구경할 수 있을 것도 같아 본전 아까운 생각도 잠시 떨친 채 아들애가 이론을 마스터하는 동안 옆에서 꽃씨 뿌릴 채비를 도왔다. 잠시 후 컴퓨터 화면에서 눈을 뗀 아들은 밀짚모자까지 챙겨 쓰고 드디어 화단 앞에 섰다. 손에는 꽃삽 말고도 수업시간에 쓰는 플라스틱 자까지 든 채. “자는 왜?” “50센티미터 간격으로 씨를 뿌리고 구덩이는 2. 5인치로 파야 한다고 쓰여 있어요.” “그렇게 자로 재가면서까지 할 필요는 없어. 눈대중으로 대충하면 돼.” “아니라니까요. 정확히 해야 해요.” 책 속에 쓰인 것을 곧이곧대로 실행하는 자세가 귀여워서 잠자코 있는 사이, 땅속에 자를 대고 금을 그어가며 딱 알맞은 깊이와 간격으로 씨앗을 뿌리고 난 그날 이후, 아들애의 일상은 달라졌다. 늦잠을 자다가도 “아무개야, 해바라기 물 안주냐?”하면 벌떡 일어났다. 싹이 언제 돋아나오나 날마다 꽃밭을 살피고, 방과 후 어쩌다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는 해바라기 물을 엄마가 대신 좀 주십사 부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침내 싹이 돋아나고 키가 자라기 시작한 여린 줄기가 바람에 휘청대며 못 견뎌 하자 지지대를 박고 실로 조심조심 줄기를 거기에 묶어 주었다. 그러다 난데없이 옆의 큰 나뭇가지가 떨어져 한창 싱그럽게 돋아나는 줄기를 꺾어 버렸을 땐 실망과 상실감에 안타까워 어쩔 줄 몰라 하기도 했다. 한번 꺾이면 그냥 시들어 버린다는 걸 잘 알면서도 1미터 남짓 자란 줄기의 중간 부분에 하얀 붕대를 처매놓고 마치 금간 뼈가 붙듯 꺾어진 줄기에 물이 다시 오르기를 하릴없이 염원하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면 하찮은 식물임에도 내 마음까지 덩달아 안쓰럽고 울적해지곤 했다. ‘아들의 해바라기’는 그렇게 피어난 것이다. 이제 저 꽃잎이 활짝 피고 지면 씨앗이 여물어 이듬해 다시 새싹을 틔울 것이다. 씨만 뿌려놓고 며칠 만에 팽개쳐 버릴 줄 알았던 예상과는 달리 두 달 반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정성스레 돌봐 온 녀석의 끈기가 피워 올린 꽃이니 어찌 대견하지 않으랴. 아들은 까만 해바라기 씨에서 하얀 싹이 돋아오를 때부터 탄성을 지르기 시작하여, 쑥쑥 키가 자라고 해사한 얼굴의 꽃이 피어나는 순간순간을 관찰하며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다른 경이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식물도감을 펼쳐놓고 세상의 모든 꽃과 나무에 대해 줄줄 읽고 외운다 한들 제 손으로 키워 본 소중한 한 송이 꽃의 경험과 어찌 견줄 수 있으랴. 최근 호주의 한 공립 초·중등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방과 후 과제물이나 숙제를 내주는 대신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정원 일이나 재봉, 요리 등을 해보도록 권장키로 했다고 한다. ‘숙제 금지 조치’를 내린 이 학교의 교장선생님은 구시대적 교육관습으로 인해 ‘방과 후 학부모들의 위안거리를 주기 위해 학생들에게 숙제를 내주고 있다’고 전하며, ‘집에서 숙제를 많이 한다고 해서 학업성적이 향상되는 것은 아니며, 그 시간을 가족들과 보내면서 생활의 지혜와 실질적인 정보와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보다 교육적’이라고 강조한다. 아울러 숙제를 내더라도 책상 앞에서 머리만 쓰게 하는 그런 내용이 아닌, 다양한 방식의 사고와 복합적 행동을 요하는 입체적이고 창조적인 능력을 자극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동심리학자들과 자녀교육 전문가들도 ‘무숙제 교육’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저녁 시간이면 으레 ‘너 숙제는 다 했니?’, ‘숙제부터 하고 노는 거야?’하는 말로 자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결국에는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 단절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숙제를 내주지 않으면 방과 후에 할 일이 없어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앞에 더 붙어있게 되고 자칫 청소년 범죄나 마약 등에 접할 기회도 더 많아질 것이라는 일부 사회단체의 우려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방과 후의 과제 유무와 나태와 방종, 청소년 비행과는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 교육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이 같은 보도가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숙제 없는 방과 후 생활’에 대한 모범답안을 우리 아들이 이미 제시한 것은 아닐까 돌이켜 보게 된다. 한 송이 해바라기 꽃을 피우기 위해 노심초사, 지극정성을 쏟아온 아들의 머릿속에는 비록 일부분이라 할지라도 식물의 성장원리에 대한 산지식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루하루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생명에 대한 신비와 경이로움으로 가슴 한 켠을 가득 채웠을 것이다. 한 송이 꽃을 피우며 아이큐와 이큐를 동시에 개발시켰으니 이게 바로 숙제 없는 방과 후에 대한 소기의 목적달성이 아니고 무엇이랴.
신동호 | 코리아 뉴스와이어 편집장 인간은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까? 역사상 가장 장수를 누린 사람은 122살까지 살다가 1997년에 세상을 떠난 프랑스의 잔느 칼멩 할머니이다. 이 할머니는 자신의 유일한 손자보다도 무려 34년이나 오래 살았고, 100살에 자전거를 타기도 했다. 인간의 최대 수명은 늘어날 것인가 노화학자들 가운데는 인간의 한계 수명이 더 이상 늘기 어렵다는 비관론자와 훨씬 더 늘어날 수 있다는 낙관론자 두 부류가 있다. 얼마 전에는 두 진영을 대표하는 미국의 노화학자들이 인간의 최대 수명을 놓고 내기를 걸었다. 아이다호 대학의 동물학자인 스티븐 오스태드 교수는 2150년이 되면 150살까지 사는 사람이 나올 것이라는 데 돈을 걸었다. 그는 그때가 되면 약이나 유전자 치료로 노화의 주범인 유해 산소에 의한 세포의 손상을 막을 수 있게 돼 150살까지 사는 사람이 나온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카고 대학의 전염병학자인 제이 올쉔스키 교수는 그때가 되도 130살 이상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공 장기가 나와 망가진 기관을 교체해도 다른 곳이 노화되거나 부작용이 생겨 130살까지 살기가 어렵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최대 수명을 획기적으로 늘리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두 과학자가 판돈으로 신탁회사에 맡긴 돈은 150달러이지만 150년 뒤 내기에서 이긴 사람은 5억 달러 다시 말해 6000억 원의 돈을 받게 된다. 누가 이길까? 필자는 유전자 치료나 약으로 사람의 수명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다는 주장에는 상당한 허구가 있다고 본다. 실제로 대부분 포유류의 수명은 신체가 성장하는 성장기의 5∼6배이다. 이런 점을 감안해 본다면 인간의 수명은 대체로 120세 정도로 한계가 그어져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평균 수명의 증가 속도 계속 둔화돼 중요한 사실은 근대화와 의학 발전으로 인간의 평균 수명은 획기적으로 늘어났지만 최대 수명은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대 로마 시대의 인간의 평균 수명은 22세에 불과했다. 1900년경 미국인의 평균 수명은 47세 정도였다. 오늘날 미국인의 평균 수명은 80세에 육박한다. 요즘에도 80세가 되기 전에 절반이 사망하고 100살이 되기 전에 99%가 사망하고 115살까지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국인의 평균 수명도 70여 년 전에 비해 무려 41년이나 늘어났다. 일제 시대 당시 경성대 의학부 예방의학교실 미즈시마 하루오 교수는 조선총독부의 인구 및 사망 신고 자료를 분석해 한국 최초의 주민 생명표를 만들었다. 이 생명표에 따르면 1926∼1930년의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남자 32.4세, 여자 35.1세(평균 33.8세)였다. 1999년의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남자 71.1세, 여자 79.2세(평균 75.2세)이다. 이는 1999년에 태어난 한국인이 기대할 수 있는 수명이 75.6세라는 뜻이다. 70여 년 만에 한국인의 수명이 41년 늘어난 셈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평균 수명의 증가 속도는 크게 둔화됐다. 평균 수명이 이렇게 늘어난 것은 영양 상태가 개선되고 상수도와 주거 환경의 개선으로 전염병이 줄어든 것이 근본 이유다. 특히 유아 사망률이 낮아진 것이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1925∼1930년 사이의 유아 사망률은 출생한 유아 1000명당 남아 252명, 여아 230명이나 됐다. 네 명 중 한 명꼴로 태어나다가 사망한 것이다. 생활습관, 환경이 노화의 속도 결정 노화를 극복하려면 노화의 원인을 먼저 알아야 한다. 하지만 노화는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렵고 그 이론 또한 무수히 많다. 대표적인 이론으로 텔로미어 이론, 유해 산소 이론, 내분비계의 노화 등을 꼽을 수 있다. '텔로미어'는 인간의 세포 염색체 끝에 있으면서 염색체를 보호하는 단백질로 세포가 분열할 때마다 짧아진다. 마치 카세트 테이프가 돌다가 언젠가 멈추는 것처럼 세포가 분열하면서 텔로미어가 조금씩 짧아져 결국 세포분열이 중단돼 죽는다는 것이 텔로미어 이론이다. 실제로 사람의 세포를 떼어내 시험관에서 배양하면 40∼60회 정도 분열을 하고 더 이상 분열을 하지 않는다. 세포는 계속해서 죽는 반면 더 이상 세포가 생기지 않으니 사람이 수명이 다하면 죽는 것은 당연하다. 두 번째는 유해 산소 이론이다. 우리는 몸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산소를 들이마셔 필수적인 에너지를 만든다. 이 산화 과정의 부산물로 생성되는 것이 유해 산소다. 인간은 누구나 유해 산소로 인한 손상을 피할 수 없다. 말하자면 숨 쉬는 데 유해 산소라는 비용을 지불하는 셈이다. 유해 산소는 산소보다도 훨씬 반응성이 강하다. 이 때문에 우리 몸의 중요한 세포막이나 염색체, 단백질 등이 변형되고 결국은 손상돼 작동하지 않게 된다. 유해 산소에 의한 손상은 암, 심근경색, 뇌졸중, 동맥경화, 치매, 백내장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질병의 원인이다. 특히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유해 산소가 많이 생긴다. 또 과격한 운동을 할 때, 담배를 피울 때, 과식이나 영양 결핍 때에도 유해 산소가 많이 나온다. 세 번째는 내분비계의 노화다. 여성은 나이가 들면 난소의 기능이 떨어져서 폐경이 오고 남성도 남성 호르몬이 조금씩 감소하면서 갱년기가 찾아온다. 성 호르몬의 감소는 조물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제 생식 기능을 완수했으니 죽어도 좋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성 호르몬이나 성장 호르몬의 감소는 젊은 시절 활발했던 인체의 대사 활동을 둔화시킴으로써 결국 노화를 촉진하게 된다. 예를 들어 성장 호르몬의 결핍은 노인에게 뇌경색의 위험을 2배 정도 증가시킨다. 탄생부터 대략 30세가 될 때까지 인간의 생물학적 발전은 대체로 시간 순서로 정확히 프로그램 되어 있다. 여기에는 개인적인 차가 별로 없다. 하지만 노화 과정은 유전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마다 노화의 차이가 크다. 때문에 생활 습관이나 환경이 노화의 속도를 좌우한다. 중요한 것은 생명의 길이 연장이 아니라 건강하고 활동적으로 노년을 보낼 수 있도록 잘 늙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좋은 생활 습관을 가지고 스트레스를 피해 편안한 마음을 갖고 흡연과 과음을 멀리하면서 규칙적인 운동을 해야 한다. 그래야 노인이 되어서도 청년처럼 살 수 있다. 지금까지 많은 과학자들이 인간의 노화를 연구했지만 노화를 근본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어떤 실마리도 아직은 찾아내지 못했다.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2000년 현재 전체 인구의 6.8%이지만 2020년에는 12.5%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정년 퇴직 뒤 20년 동안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노령화 사회는 사회 문제이기도 하지만 결국 노인이 될 세대들이 실제로 겪어야 할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다. 젊었을 때 건강을 돌보는 것이 노인이 되어 얼마나 행복하고 질 높은 삶을 누릴 수 있을지를 결정한다. 꾸준한 운동과 좋은 생활 습관은 미래에 대한 투자인 셈이다.
지난 3월 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문화재단은 2006년 과학문화지원사업 대상 기관을 선정, 발표했다. 과학문화지원사업은 민간 주도의 자율적인 과학문화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과학문화 창달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나 기관으로부터 사업계획서를 받아 지원한다. 올해는 5개 분야에서 100개 기관을 선정하였다. 그중 '대중을 위한 과학문화 행사' 분야에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충남과학발명놀이연구회(회장 인정남·충남 당진초 교사, 이하 충남과발연)'가 주목을 받고 있다. '충남지역 청소년 및 지역 주민을 위한 과학문화진흥 프로그램 운영' 사업으로 선정된 충남과발연은 설립된 지 불과 2년이 채 안된 동호회로 회원들의 열정과 노력으로 큰 결실을 맺은 것이다. 충남과발연에서는 과학문화지원사업을 계기로 과학체험활동과 무료 공연 등을 실시하여 충남지역의 과학대중화에 앞장설 계획이다. 충남과발연은 (사)한국과학발명놀이회(회장 강성기·서울 봉천초 교사)의 14개 지역 연구회 중 하나로 충남 전 지역의 초등 교사를 중심으로 결성되어 현재 회원 수는 60여명이다. 타 지역에 비하면 회원 수가 많이 부족하고 동호회 결성도 늦었지만 소속 회원들의 과학에 대한 열의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어느 지역 못지않다. 충남과발연의 주요활동은 과학 영재반 활동 운영 프로그램 개발, 충남 별축제 지원, 청소년 과학 꿈나무 축제 참여, 충남해변과학 캠프 주관, 과학 교육 세미나 개최 등이다.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충남과발연은 과학마술팀, 홍보팀, 기획팀, 과학정보팀, 로켓팀, 연수팀으로 세분화하여 활동한다. 각 팀별로 학생들의 과학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해 다양한 탐구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데 힘쓰고 있다. 지난 1월에는 전국창의력올림피아드 대회에서 10개의 부스를 운영하여 지역 연구회로서 전국규모의 행사에 참여하였다는 회원들의 자부심이 매우 크다. 충남과발연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올해 처음으로 시도한 'fun & fun science 과학마술공연'이다. 지난 3월 처음 시작한 'fun & fun science 과학마술공연'이 학생들에게 큰 호응을 받고 있어 힘이 절로 난다. 공연은 무료로 진행되며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는 마술을 보여주고 마술 속에 숨겨진 과학 원리를 설명하여, 과학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데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외에도 교사들을 대상으로 과학실험연수와 학급앨범 만들기 연수도 계획하고 있다. 인 회장은 "무엇보다 보람 있고 기쁜 일은 행사장에서 웃음이 가득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 이라며 "아이들이 학원, 공부에 시간을 뺏기고 웃음을 잃어가고 있는데 우리가 하는 활동이 기쁨과 즐거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즐겁다"고 말했다. 과학 교육의 위상과 교육적 의미에 발맞춰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는 충남과발연에 가입을 원하는 충남지역 교사는 홈페이지(www.cnroket.com)를 참고하면 된다. | 엄성용 esy@kfta.or.kr
박준용 | 한양대 강사, 문화평론가 상처투성이 교사와의 '만남' 고아로 나서 학교 문턱에도 제대로 가보지 못한 윌 헌팅(맷 데이먼)은 잦은 폭력 사건에 연루되기 일쑤인 문제아다. 하지만 그는 청소부로 일하고 있는 대학의 수학과 교수도 어려워하는 수학문제를 장난치듯 풀어버리는 천재이기도 하다. 외견상 불량스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윌의 탁월한 재능을 알아본 하버드 대학의 램보 교수는 또다시 폭행사고로 수감되기 직전의 그를 두 가지 조건으로 석방시킨다. 하나는 자신과 함께 수학을 연구하는 것, 다른 하나는 정신치료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후 다양한 방식의 심리 치료사들이 치료를 감행하지만 그 누구도 윌의 지능적인 조롱과 모욕을 참아내지 못한다. 결국 램보는 마지막으로 대학 동창이자 과거 라이벌이었던 숀 맥과이어(로빈 윌리엄스)에게 윌을 보내기로 결심한다. 숀과의 첫 만남에서도 윌은 의도적으로 그의 아내와 관련된 아픈 상처를 건든다. 하지만 숀은 불쾌감을 애써 숨기던 앞서의 위선적인 상담자들과 달리 윌 앞에서 그것이 비록 부정적인 감정일망정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맞부딪히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짧지만 강렬한 인상의 첫 만남을 통해 윌은 그 이전 누구와도 느끼지 못했던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만남'을 경험한다. 가정이나 교육 현장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기본인 까닭에 그 중요성이 흔히 망각되기 일쑤인 게, 바로 진실한 '만남'의 중요성이다. 흔히 뛰어난 의술을 지닌 명의나 탁월한 교사로 추앙받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병을 치료하거나 무언가를 가르치기 전에 우선 상대방과 마음을 열고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아 강조한다. 윌이 다른 정신치료사들을 거부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문치료사들은 자신의 모습은 감춘 채 단지 그를 교정과 치료의 대상으로만 대하려 했고, 자존심 강한 윌은 이러한 비인간적인 접근을 참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반면 숀은 무엇보다 윌의 진심과 만나기 위해 먼저 자신의 아픈 과거의 기억들을 나누며 오랜 기다림 속에 윌의 마음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실패자의 삶도 가치를 지닌다 진정한 가르침과 배움은 어떻게 시작되는 것일까?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가 다르겠지만 영화는 숀을 통해 그것이 곧 치료자이자 스승으로서 자신을 내어주는 것, 자신을 나누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선생님, 또 우리 자신들의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있는 존경하는 스승의 모습은 완전무결한 행실의 이상적인 존재들이 아니다. 도리어 대개 그런 선생님은 인간적인 약점과 단점들을 솔직히 인정하며 늘 최선을 다해 이를 극복하려고 애쓰는, 또한 그런 애씀으로 학생들을 격려하고 응원할 줄 아는 열린 마음을 지닌 분들이었다. 윌 역시 유년기의 고통과 사랑했던 아내와의 사별의 아픔 등 자신 못지않은 인생의 상처를 먼저 담담히 고백하는 숀의 진솔함과 그의 강요하지 않는 끈질긴 기다림 앞에서 차츰 굳게 닫힌 마음의 빗장을 풀어놓기 시작한다. 반항아의 영혼을 해방시키다 선택도 거부도 오직 본인의 자발적이면서 진실한 결정이 되기를 끈기 있게 기다리는 숀의 방식은 하루속히 윌의 탁월한 능력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 하는 램보 교수의 눈에는 너무나 더디고 심지어 위험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학생이 누가 봐도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유도해야 하는 것이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마땅히 해야 할 바인데, 숀은 윌이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지 않고 있기에 무책임한 태도라는 것이다. 실패자의 삶도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는 말은 성공한 램보 교수에게는 숀과 같은 패배자들의 궤변일 따름이다. 하지만 숀은 윌이 자신이 지닌 재능을 부정하고 건달 같은 친구들과 자신의 세계 속에 안주하려는 것이 바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강요된 삶에의 거부에서 말미암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버림받는 삶, 그리하여 원치 않는 강요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윌은 성인이 된 지금 심지어 자신에게 유익한 선택일지언정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강요'된 것이라면 이를 본능적으로 거절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반항의 이면에는 살아오면서 그런 요구에 응답하는 삶을 살수록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끊임없이 버림받아 왔던 쓰라린 기억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게 윌은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알 수 없는 잘못으로 인해 그가 새롭게 시도하는 모든 일들, 사랑하게 될 사람들로부터 또다시 버림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윌에게 숀은 말한다. "윌, 내가 많은 것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만은 말해 줄 수 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이에 윌은 건성으로 대답한다. "알아요." 그러자 숀이 정색을 하고 다시 말한다. "내 눈을 똑바로 쳐다 봐, 네 잘못이 아니야." 윌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한다. "알아요." 숀은 거듭 반복해서 말한다. "네 잘못이 아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진심을 다해 상처 입은 영혼을 보듬어 안으려 애쓰는 숀을 윌은 어떻게든 외면하려 애써 보지만 그의 따뜻한 위로의 말은 윌의 마음 깊은 곳에 맺혀져 있던 자책감의 굳은 자물쇠를 산산조각내고, 결국 그의 영혼을 진정한 해방에 이르게 한다. 윌은 숀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 통곡하면서 말한다. "젠장, 정말 죄송해요. 죄송해요." 스스로의 선택으로 시작하다 불량 청소년들을 선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밤 순찰을 도는 것으로 유명한 일본의 마츠다니 선생은 문제 학생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바른 길의 제시나 일방적인 훈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얘들아, 너희가 나쁜 게 아니야"라는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로부터 시작한다고 강조한다. 생각과 달리 아이들은 이미 자신들이 선택하고 행하는 일들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간절히 필요로 하는 것은 잘못된 사실에 대한 가르침에 앞서 그런 삶,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자신들에 대한 이해와 용서, 위로의 마음이다. 혹자는 램보 교수처럼 이러한 가르침이 아이들을 잘못에 대한 면죄부를 주어 더 큰 잘못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마츠다니 선생은 사랑에 의해 신뢰가 쌓이게 되면 아이들에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단호한 어조로 요구하는 모습을 보인다. 숀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윌과의 만남이 점차 깊어지면서 그는 매사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윌의 태도가 지닌 문제를 분명히 지적하고 전향적인 변화를 촉구한다. 결국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관계 안에서는 매서운 질책과 충고도 서로를 위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관계라면 아무리 그 요구가 옳은 길을 위한 바른 충고라 할지라도 그것은 무의미한 잔소리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자신의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진 윌은 램보 교수의 추천으로 새로운 회사에 입사를 결심한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는 회사를 포기하고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했지만 두려움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여자친구 스카일라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떠난다. 누구의 권유나 강요가 아닌, 그의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하는 혼자만의 소중한 선택이다. 미래가 보장된 선택을 거절하고 기약 없는 사랑을 향해 떠나는 윌의 선택은 옳은 것이었을까? 영화 은 이른 아침 허름한 자동차를 끌고 거침없이 끝없이 펼쳐진 도로를 달려가는 윌의 홀가분한 모습으로 그에 대한 답을 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