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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이달부터 내년 2월까지 전국 초ㆍ중ㆍ고교 66곳에서 능력개발 중심의 교원평가제가 시범 운용되고 이르면 2007년부터 전면 실시된다. 교육인적자원부는 이같은 내용을 주요 골자로 한 교원평가제도 개선안을 기본방향으로 잡았다고 2일 밝혔다. 이 개선안에 따르면 평가대상에 교장을 추가, 모든 교원이 평가를 받도록 했으며 교장과 교감 등 관리자외에 동료교사와 학생, 학부모까지 평가에 참여하는 다면평가제를 도입키로 했다. 또한 평가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 각 시ㆍ도 교육청과 단위학교에 각각 교원평가위원회를 설치, 전반적인 사항을 심의하고 관리토록 했다. 이 위원회는 감독당국이 제시한 평가모델을 참고로 단위 학교의 교원평가를 위한 구체적인 평가방법ㆍ절차ㆍ기준을 자율적으로 결정한다. 교사에 대해서는 학기당 1회 이상 수업공개 등 을 통해 관리자와 동료 교사, 학생, 학부모가 평가에 참여토록 했다. 교감의 경우에는 동료 교원 및 학부모로부터 학교 교육활동 지원능력에 대한 평가를 받게 되고 교장은 교원과 학부모, 교육청이 지정하는 평가자에게서 학교경영능력여부를 평가받는다. 평가위원회는 매년 11월 평가결과를 종합, 평가 대상자에게 통보한다. 이 결과는 각 교원의 능력개발 자료로만 활용된다. 능력개발을 희망하는 교원에 대해서는 연수 등 지원방안을 강구키로 했다. 교육부는 부적격 교원문제와 관련, 교원평가제와는 별도로 올해 하반기중 교원단체 등 각계 각층의 의견을 수렴해 적절한 대책을 마련, 확정한 뒤 발표할 방침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일부 외국에서는 교원평가 결과를 구조조정과 급여, 승진 등 에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외국과 우리나라간 문화차이가 있는 만큼 우리나라의 교원평가제는 교원의 능력개발을 위한 자료로만 활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교 국어와 문학교과서에 등장하는 한자표기에 오류가 많다는 지적이 제기 됐다. 한문학자 장호성(45)씨는 최근 논문 `고교 국어ㆍ문학교과서 한문자료 오류의 문제'를 통해 “2002년부터 고교에서 사용되고 있는 국어, 문학교과서 19종 38권을 분석한 결과 모두 100여 군데에서 잘못 표기된 한자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논문에 따르면 한 문학교과서에 실린 고려시대 문신 정지상의 시 `송인(送人)'에는 `大同江'으로 표기돼야 할 한자가 `大洞江'으로 잘못 적혀 있다. 다른 문학교과서에도 정약용 시 `타맥행(打麥行)'에서 `안부를 묻다'라는 뜻의 문후(問候)가 문후(問後)로, `잘못 죽다'인 오사(誤死)가 오사(惡死)로 표기되는 등 5군데의 오류가 발견됐다. 또 국어교과서에 실린 정지상의 시 송인 중 송군남포동비가(送君南浦動悲歌)라는 싯구를 `남포에서'가 아닌 `남포로'로 잘못 풀이해 학생들이 정확한 뜻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장 씨는 “교과서를 제작할 때 원전을 활용하지 않고 잘못 인용된 문구를 교육과정이 바뀔 때마다 그대로 인용하다 보니 잘못 표기된 한자가 많은 것”이라며 “교과서 집필자들의 한자와 한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장 씨의 논문은 6월 발간될 `한문교육연구' 24호에 실릴 예정이다.
초등학생 10명중 2명 이상이 친구를 왕따시킨 경험이 있으며 왕따 피해학생가운데 40.3%가 '학교에 가고 싶지 않거나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2일 한국교육개발원에 따르면 초등학생의 생활 및 문화실태를 분석하기 위해 지난해 전국 초등학교 4∼6학년 3천50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한 결과 21.3%의 초등학생이 '가끔' 혹은 '자주' 친구를 따돌렸거나 괴롭힌 경험이 있다고 대답했다. 친구를 괴롭혔거나 따돌린 적이 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그 이유를 물은 결과 '잘난 척 해서'라는 응답이 29.4%로 가장 많았으며 '친구가 하니까 그냥 따라했다'( 11.7%), '냄새가 나거나 더러워서'(10.6%) 등이 그 뒤를 따랐다. 이런 경험을 갖고 있는 학생은 읍ㆍ면지역(31.12%)이 도시에 거주하는 학생(서울 18.4%, 대도시 21.7%, 중소도시 19.3%)보다 많았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편인 학생(22.8%)이 보통 이상인 학생(보통 20.5%, 잘 사는 편 20.6%, 매우 잘 사는 편 16.7%)보다 친구를 괴롭혀 본 경험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학교나 학교 주변에서 여러 학생으로부터 집단 괴롭힘ㆍ따돌림을 당했던 경험이 있는지'를 조사한 결과 13.39%의 초등학생이 피해를 본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집단 괴롭힘ㆍ따돌림을 당한 유형을 보면 '재수없다는 등의 욕을 했다'는 응답이 56.5%로 가장 많았고 '자기들끼리만 놀고 나를 끼워주지 않았다' 54.7%,'전혀 말을 걸지 않거나 상대해 주지 않았다' 41.1%, '외모를 이유로 놀렸다' 26.2% 등의 순이었다. 주로 몇명에게 집단 괴롭힘ㆍ따돌림을 당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2∼3명'의 응답비율이 57.8%로 가장 높았고 '4∼5명' 21.8%, '6명 이상' 20.4% 등 인 것으로 집계됐다. 왕따 피해학생에게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조사한 결과 40.3%의 학생이 '학교에 가고 싶지 않거나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과외에 대한 설문에서는 76.0%의 초등학생이 학교 공부 이외에 개인ㆍ그룹 과외, 학원 수강, 학습지 등의 과외를 받고 있다고 응답했다. 지역별로 보면 서울 강남이 89.8%로 가장 많았고 서울 기타지역 82.6%, 광역시 78.8%, 중소도시 75.3%, 읍면지역 59.9% 등 의 순이었다. 공부를 매우 잘하는 학생 가운데 과외학습자 비율은 88.3%였는데 비해 공부를 매우 못하는 학생 중 과외를 받는 학생의 비율은 52.6%로 집계돼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과외를 많이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외학습 유형은 학원 수강이 79.7%로 압도적이었고 학습지(54.5%), 개인과외(39.6%), 그룹과외(35.9%), 통신 및 인터넷 과외(13.3%) 등 이었다. 이밖에 29.5%의 초등학생이 이성 친구와 사귀어 본 경험이 있으며 이성 친구를 사귈 때 '성격'(58.7%)을 가장 중시하고 다음이 '외모'(15.8%), '학교 성적'(8.3%) 순으로 보는 것으로 응답했다. 또한 33.2%의 초등학생이 폭력적인 만화나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으며 가출을 해본 경험이 있는 학생도 1.2%에 이르렀다. 가출 경험은 여학생(0.7%)보다 남학생(1.7%)이 많았다. 전체 조사대상 중 7.6%의 학생이 '가끔'(7.3%) 혹은 '자주'(0.3%) 패싸움을 해본 적이 있다고 응답했으며 '부모와 대화를 거의 하지 않는다'는 대답은 각각 40.6%(아버지)와 18.3%(어머니)였다.
학교폭력 예방 및 선도.단속을 위한 스쿨폴리스(학교경찰)가 전국적 관심속에 2일부터 시범운영에 돌입했다. 지난달 29일 발대식을 가진 퇴직경찰 7명, 퇴직교원 7명 등 14명의 스쿨폴리스는 2일 개금고등학교 등 고 3개교, 중 3개교, 초등 1개교 등 7개교에 배치돼 활동에 들어갔다. 2인 1개조(퇴직경찰 1명, 퇴직교원 1명)로 배치된 스쿨폴리스는 앞으로 교내에 상주하면서 학교폭력 예방 및 학생비행 예방교육, 상담, 교외지도 등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부산지방경찰청과 부산시 교육청은 7월31일까지 3개월 시범운영한 뒤 문제점 등을 파악, 개선한 뒤 하반기부터 본격 확대시행할 계획이다.
EBS는 방송위원회가 DMB 사업자 선정 1개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심사위 회의록 등 심사자료의 전면 공개, 보정지시에 대한 공개적인 해명을 하지 않고 있는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하고 '방송위원회의 지상파이동멀티미디어방송사업 허가 추천 거부 처분 취소소송'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김성진 부사장은 이날 “EBS는 △콘텐츠의 공공성과 공익성 보장 △정보격차(Digital Divide) 해소를 통한 교육복지 실현 △교육목적에 부합한 채널편성권 및 사업권 담보를 전제로 뉴미디어 사업에 적극 참여할 것”이라고 말하고 “그러나 방송위가 사업자 선정 1개월이 지나도록 심사내용 공개 등 EBS의 요구를 외면하고 있어 행정소송 절차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김 부사장은 “EBS가 위성 DMB 및 지상파 DMB에 콘텐츠를 제공하는 문제는 독자적인 채널편성권 보장 및 EBS 제휴사업자들의 공동 참여 등이 전제되어야한다”고 말했다. EBS는 소송준비가 끝나는대로 사업자탈락통보를 받은 시점인 4월8일부터 90일 이전인 6월25일전까지 행정소송을 접수시킬 계획이다. EBS는 또 방송위가 EBS 콘텐츠의 이동수신 대책 등 보완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있는데 대해서도 강력한 유감을 표명했다. EBS는 ‘지상파 디지털 방송의 이동수신’을 전제로 지상파 DMB가 탄생했는데도 불구하고(D-TV 4자 합의) 방송위가 을 훼손했고 사업신청서 마감후 모든 사업자에게 요구한 보정명령이 심사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불공정한 조치였다고 지적하고 방송위에 공개적인 해명을 촉구해왔다. 한편, EBS는 지상파 멀티미디어 방송(이하 DMB) 사업 탈락에도 불구하고 방송 통신 융합시대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IP TV, wibro, HSDPA 사업 등 차세대 콘텐츠사업에 대한 직간접 투자를 통해 대국민 교육서비스를 확대키로 했다.
유정(충남 보령 옥계초 1학년)이는 오늘 반장입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학교에 왔습니다. 제일 먼저 우유를 가져왔습니다. 오늘은 선생님 심부름을 맡아서 다 해드릴겁니다. 친구들 공책도 걷어다 드리고, 점수 받은 공책을 친구들 한테 나눠주기도 할 것입니다. 교실안의 물건 정리정돈도 할것입니다. 아이들은 자기차례인 것은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경기도 군포시 도장초등학교(교장 김동우)가 외국인과 함께하는 문화체험교실을 실시해 학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 체험교실은 세계화시대에 알맞은 인재 육성을 위해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이해 증진과 국적과 문화가 다양한 세계 문화에 대한 상호존중과 관용의 정신을 함양하고 문화다양성에 대한 인식을 증진시키기 위한 창의적재량활동 국제이해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마련됐다. 4월 29일에는 뉴질랜드에서 오신 Gregory Corss 선생님과 통역사 김유리 선생님과 함께 뉴질랜드의 다양한 문화에 대해서 공부했다. Gregory Corss 선생님과 함께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의 역사와 기원, 생활, 사회 종교, 마오리 인사법(홍이 : Hong), 마오리족의 숫자, 화폐, 마오리 전통음식(항이 : Hang), 마오리 전통춤(HAKA), 마오리 민속쇼의 HAKA,마오리 언어와 노래와 춤을 게임을 통해 함께 배우고 직접 노래도 하고 춤도 추는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학생들은 뉴질랜드에 대해 이웃나라 먼나라 책만 보다가 직접 뉴질랜드 선생님과 국제이해교육을 체험하게 되어 너무 신나했다 5학년 1반 박보람 학생은 소감문에서 "오늘 뉴질랜드 수업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뉴질랜드를 직접 여행하고 싶다"고 했다. 도장초는 1학기 3회 , 2학기 3회의 외국인과 함께하는 문화체험교실을 교육과정 재량활동과 연계하여 운영하게 된다 문화체험교실은 유네스코에서 주관하는 세계문화이해교육(CCAP)이다. 수업 진행은 유네스코에서 파견된 원어민 자원봉사자(이하 CEV)와 통역자원봉사자(이하 KIV)가 중심이 되어 체험위주로 실시되며 수업실시 학년의 교육과정, 수업실시 학급의 관련교과, 참가학생의 관심, 학교의 특색사업 등을 고려하여 실시 학급의 담임과 담당교사가 협의하여 선택하게 되는 프로그램이다. 수업시간은 하루 2시간이며 좀더 효과적인 수업이 될 수 있도록 CCAP 수업에 참가할 학생들에게 CCAP의 성격과 내용, UNESCO의 기본적인 이념 등에 대해 사전교육을 실시하였으며 CAP 수업을 실시할 국가에 대해 학생들이 개별적으로 탐구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 이번 문화체험교실 국제이해교육은 경인교육대학교 커뮤니티 특성화사업연구와 겸해서 1년동안 5학년 학생들과 권은진, 이혜영, 조수옥 선생님이 커뮤니티 도우미 역할을 하게 된다.
스승의 날이 속해 있는 가정의 달 5월이다. 매년 이맘때면 한번쯤 우리 기억 속에 묻어있는 선생님의 모습을 그려보게 된다. 그 추억이 좋은 모습이든 나쁜 모습이든 교사의 권위가 인정된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지식정보화와 직업의 다양성으로 인해 교직은 수많은 직업군 중 하나일 뿐이며, 가르치는 업무를 담당하는 교사의 권위와 사회·경제적 지위는 점차 하락하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 시점에서 스승존경의 전통사상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교원예우에관한규정의 제정은 1966년 UNESCO와 ILO가 채택한 ‘교원의지위에관한권고’에서 그 필요성이 언급된 이래 교육법이나 교육공무원법 등을 통해 ‘교원지위와 예우’의 선언적 조항이 반영되어 왔다. 한국교총에서도 1991년 교원지위향상을위한특별법 제정 시 교원에 관한 예우조항(제2조)의 반영을 계기로 수차례 공정회와 전문가 회의, 관련 보고서의 발간과정을 거쳐 1997년 교원예우에관한규정안을 성안한 바 있고, 마침내 2000년 4월 국무회의를 통과시켜 대통령령으로 제정시킨 바 있다. 하지만 이런 스승존경에 대한 법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여 지는 분위기이다. 최근 교원평가와 관련하여 학생과 학부모가 교사를 평가하는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명분은 교육수요자의 입장을 반영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가진 교육환경 속에서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고 순기능적인 역할을 할 것인가는 회의적이다.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한다면 법으로 정한 ‘교원의 법정정원 확보’와 최소한의 연구시간 확보를 위한 ‘수업시수 법제화’부터 해결해야 하는 것이 우선순위이다. 사회와 국민이 교직의 중요성과 그들의 노고에 대한 인정을 해주지 않으면 긍지와 자존심을 갖기 어렵다. 정부는 스승의 날이 속해있는 5월에 다시 한번 현장의 목소리가 어디에 가 있는지 면밀히 들어보고, 스승존경 풍토 조성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최근 교육부가 대학교육의 질 향상과 국가경쟁력 강화를 기치로 대학 구조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시점에서 교육대학교발전연구위원회가 시안이지만 교육대학교구조개혁방안을 발표한 것은 현실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시의 적절하다. 그동안 교육대학교가 우수한 초등 교사를 길러내는데 많은 기여를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문제가 지적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즉, 교육대학 규모의 영세성으로 인한 행·재정적 효율성의 저하, 안정적인 초등교원 수급을 위한 탄력성 부족, 교육과정의 다양성과 전문성 미흡, 중등교육과의 연계성 미흡 등이 교육대학 체제의 취약점으로 거론되어 왔다. 이번에 교육대학교발전연구위원회는 이러한 교육대학체제의 취약점을 보완하고 기존의 장점을 살려나가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11개 교육대학을 하나의 대학교로 통합네트워크화하여 교육과 연구역량을 제고하고 행정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다(多)캠퍼스형 대학형태인 한국교원종합대학교(시안)를 제안하고 있다. 즉, 1단계는 11개 캠퍼스의 한국교육종합대학교 형태로 출발하여 2단계 지역간 캠퍼스 통합의 단계를 거쳐 3단계 한국교원종합대학교체제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안은 통합의 시너지효과로 기존 교육대학 체제의 취약점을 보완하고 장점은 더욱 살려나간다는 것이나, 앞으로 대학 구성원의 합의와 사회 일반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단계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육대학교의 구조개혁은 무엇보다도 교육대학 교육의 질 제고를 통한 우수한 초등교사의 양성이라는 교육대학 설립의 본질적 목적에 터하여 추진되어야 하며, 만에 하나 지나치게 경제적 효율성에만 집착한다거나 교육논리가 아닌 정치논리에 의해 무리하게 통합을 추진한다면 통합에서 얻는 이점은 고사하고 이제까지 교육대학체제가 갖고 있던 장점마저도 잃게 되는 우를 범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금년 3월 중순 북경시의 초․중․고에 대한 전면적인 보충수업 금지조치에 따라 현재 북경시의 초․중․고등학교에서는 그동안 전 학생들을 대상으로 의무적으로 시행해오던 휴일 보충수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북경시 교육위원회가 각 급 학교의 보충수업을 금지시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학생들의 학습에 대한 부담 경감을 위해서다. 그동안 학생들에게 공부만을 강조해 오던 관행에서 탈피하여 이제부터라도 휴일만큼은 학생들에게 쉴 수 있는 시간을 주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교육위원회의 갑작스런 조치로 학교는 물론이고 학부모들이 혼란이 가중되고 있으며 이는 북경시 교육의 새로운 논쟁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우선 학부모들은 주5일제 수업이 일찍부터 정착된 중국에서 그동안 보충수업으로 진행되어 오던 토요일의 수업이 갑작스레 없어지게 됨에 따라 학생들을 통제할 수 없음에 고민을 하고 있다. 그동안 휴일이지만 토요일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학교로 등교하던 아이들이 3월말 이후 토요일 보충수업에 참여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면서 학부모들의 고민이 늘어가고 있다. 특히 보충수업이 일시에 사라짐에 따라 얻게 된 토요일의 시간을 학생들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나고 있는데 학생들은 토요일에 학교 가는 대신 집에서 늦잠과 TV시청으로 오전시간을 보내고 있어 학부모들은 걱정하고 있다. 둘째, 학부모들은 학생들의 학력저하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식교육열이 남다른 중국 학부모들에게 학교에서의 보충수업 폐지는 곧 학생들의 학습시간의 부족으로 인식하게 된다. 휴일보충수업 금지조치로 인하여 학생들은 휴일날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기쁨을 얻는 대신 그동안 타율적으로 진행되어 온 학교 내에서의 집단적인 보충학습에 익숙한 학부모들은 자신들의 자녀가 학교에서 보충수업을 받지 못하게 됨에 따라 학습능력이 저하되고 이는 더 나아가 대학입시에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셋째, 학부모들에게는 사교육비에 대한 부담이 새로 추가되었다. 학교 보충수업이 폐지됨에 따라 학부모들은 학교 밖에서 대안을 찾게 되는데 그 유형으로는 학원에서 보충수업을 하거나 가정교사를 들어 보충수업을 하는 두 가지 방법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러한 학교 밖에서의 보충수업은 그동안 학교에서 진해하던 보충수업에 비해 학부모들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우선 수업료를 보면 학교에서 할 경우 1시간에 4위엔(한화 약 600원) 하던 학비가 일반 학원에서 보충수업을 들을 경우 1시간에 20위엔(한화 약 3000원)으로 약 5배가량이 비싸다. 또한 가정교사의 경우 대학생들을 가정교사로 불러 과외를 받을 경우 시간당 30-40위엔, 재직교사를 가정교사로 불러 과외를 받을 경우 한시간당 150-200위엔을 주어야 하니 학교에서의 보충수업이 없어진 후 가정에서 부담해야할 과외비용이 만만치 않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공휴일 보충수업 금지조치로 인한 북경시 중․고등학교 학부모의 혼란은 예상외로 크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해 많은 학부모들은 학교에서 이전처럼 보충수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학교나 시교육위원회 측에서는 학생들의 학습부담을 경감시켜주기 위해서 과거처럼 학교에서 일방적으로 모든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보충수업을 부활시킬 계획은 없다고 거듭 천명하고 있다. 앞으로 중국 북경시의 중․고등학교에서 보충수업이 부활할 수 있을까 아니면 학부모들은 막대한 사비를 들여 사설 학원이나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자기 자식들에게 교외 보충수업을 시키게 될 것인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아직 이렇다할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현재 시교육위원회 및 각 교육관련 담당자들의 일관된 입장이 학생들을 수업의 부담으로부터 해방시키자는데 일치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년 3월말 갑작스럽게 북경의 모든 학생들에 대한 보충수업 금지를 내세우다가 학부모들의 반발에 부딪혀 고3학생들의 보충수업을 변칙적으로 허용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앞으로 학부모들의 반발이 거셀 경우 북경시의 교육담당자들도 어쩔 수 없이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을 가능성도 있다. 학생들의 수업경감을 위한 휴일보충수업폐지와 관련된 중국 내의 학부모들과 교육당국과의 논쟁을 지켜보면서 일제시험을 통해 대학의 신입생들을 선발하는 대학입학시험이 존재하고, 대학의 문턱이 높은 중국교육의 현실에서 보충수업이 과연 중․고등학생들의 성적을 향상시켜줄 수 있을 것인가와 학교 내 보충수업이 폐지된다고 해서 과연 학생들의 학습에의 부담이 줄어들 것인가 하는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학교 내 보충수업의 폐지는 오히려 학교 밖의 사교육시장을 더욱 활성화 시킬 것이며 이로 인한 사교육비의 증가 및 기타 문제들은 향후 중국 교육에 있어 또 다른 골칫거리로 작용하게 될 것임은 한국의 예에서 충분히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4월 29일 경기도교육청 소속 교육(행정)기관의 교감(교육정보부장)과 교육전문직 종사자를 대상으로 경기도교육정보연구원 대강당에서 교육(행정)기관 정보보호 설명회가 열렸다. 교육인적자원부 교육정보화지원과 담당 사무관은 '교육(행정)기관 개인정보 보호 방안'에 대한 강연에서 "개인정보의 개념이 소극적 프라이버시권(사생활 보호)을 강조하였다면 앞으로는 자기 정보의 통제 이용권 확보 등 적극적 권리로 변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개인정보 보호의 의의는 개인정보는 가능한 수집하지 않으며, 부득히 수집할 경우 최소한 수집하여 목적 범위 내에서 이용하고 수집한 정보는 정확성을 유지하고 외부 유출을 하지 않으며, 수집한 정보에 대한 투명성을 보장하고 가능한 빨리 파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교육계의 개인정보 유출 사례로 대학학격자 발표시스템의 비밀번호를 학생에게 알려줌으로써 비밀번호 노출이 급속히 확산되며, 수시모집시 일부 대학이 학교생활기록부 자료를 민간업체의 프로그램을 통해 접수하는 과정에서 학생정보의 외부 민간업체 서버에 축적 및 외부 유출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일부 교육청에서 비정규직 구직과 기간제 구직 그리고 특기적성교육 강사 인력풀을 운영하면서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사람의 범위를 일반 모두에게 개방함에 따라 개인정보 유출 논란이 일고 있으며, 앨범 제작 완료 후 관련 학생정보 자료파기 여부 확인 등의 후속 조치가 소홀하다고 지적했다. PC 등 각종 정보처리기기 교체시에 내부에 저장되어 있는 개인정보를 방기하는 사례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교육(행정)기관의 개인정보보호책임관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개인정보 유출 사태 발생시 개인정보보호책임관은 즉시 상급 교육행정기관에 보고하고 정보통신윤리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준비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20분 동안의 휴식 시간을 갖고 나서 15:20분 부터 교육인적자원부 교육정보화지원과 담당 직원이 '정보통신보안의 현황 및 대처방안'에 대한 연수를 실시하였다. 최신의 웜 바이러스 동향을 소개하면서 주요 특징으로는 유입경로의 다양화, 지능화 및 분산화, 피해의 대형화, 빠른 확산속도, 보안 취약점 이용이 증가, spam 기법과 결합, 해킹기술의 대중화 등을 들었다. 교육기관의 침해사고 현황을 분석하면서 교육기관은 2004년 공공기관 전체 해킹사고의 76.6%를 차지하여 "해커의 놀이터"라는 불명예를 얻고 있으며, 전체 해킹의 60%가 웜 바이러스 감염 사고로 인하여 발생한다고 하였다. 국가기술보안연구소에서 56개 초중고를 대상으로 2004. 3-11월 사이에 9개월간 사이버테러 대응 시스템을 시범운영한 결과 교당 1일 평균 91건의 침입시도가 탐지되었다고 말했다. 시도교육청과 학교 PC는 강제적 보안패치, 백신엔진의 자동 업데이트는 필수 사항이며 시도교육청의 서버 서버보안은 필수사항이고 학교의 서버보안은 권장사항이지만, 서버의 최신 패치 적용은 필수사항이라고 하였다. 휴식시간없이 계속 이어진 'NEIS 새로운 시스템 추진 현황 및 관리 운영 요령'은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심명호 팀장이 발표하였다. 교무/학사, 입(진)학, 보건 3개 영역 새로운 시스템 구축 방향은 초중고 학교급별 특성을 반영한 이용체제 개발, 1년가 시험 운영을 통한 시스템의 안정성 극대화, 개인정보보호를 위한 강력한 보안체계 운영, 학부모 서비스와 민원서비스 확대를 통한 국민 편익 증진을 들었다. 새로운 시스템의 개발전략에서 전략 1은 '핵심업무 도출 및 기능 재정비에 따른 사용자 편의성 극대화'이며, 이를 구현하기 위해 메뉴 영역 집약화 및 조회기능 강화를 하고 기존의 5단 메뉴를 3단 메뉴 구조로 개편하여 시스템 접근성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 전략 2는 '학사일정을 준수한 안정적인 시스템 개발 및 단계별 오픈'이며, 이를 구현하기 위해 학기초와 학기중에 관련된 우선 추진 사업과 학기말과 입학 그리고 보건에 관련된 후속 추진사업으로 나눠 통합 안정화를 이루어 2006년 3월에 전국적으로 실시될 수 있도록 차근하게 준비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다. 전략 3은 '확실한 개인정보보호 체계 적용'인데 네트워크 불법침입 차단, 네트워크 침입 탐지 및 대응, 시스템 불법 침입 차단 및 접근 통제, 로그인과 네트워크 구간 암호화에 역점을 두겠다고 하였다. 이번 정보보호설명회를 통하여 개인정보의 보호와 개인정보의 이용 및 제공에 대한 식견을 가질 수 있었으며, 아울러 교육(행정)기관의 정보를 지킬 수 있는 법적 기술적 대응 방안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현재의 NEIS시스템을 대신하는 새로운 시스템에 대한 윤곽을 알 수 있어 그 동안 지녔던 궁금증을 다소나마 풀 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
전문대 이공계 여학생의 평균 성적은 남학생보다 높지만 자신감은 상당히 떨어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여학생의 자신감이 위축된 것은 실제 여학생의 능력이 저하돼 있다기보다 사회적, 환경적 영향에 의해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낮게 평가하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한국여성개발원 신선미, 오은진 연구위원은 '전문대 여성인적자원 개발현황과 정책과제' 연구보고서에서 지난해 전국 56개 전문대 이공계 2학년 1천321명(남자 327명ㆍ여자 99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1일 밝혔다. 보고서는 전공분야 지식, 기능과 기술, 흥미와 애정, 직업인으로서의 의식과 태도, 사회적 인간관계 기술과 태도 등 5개 영역으로 나눠 전문대 교육으로 얻은 자신감을 조사한 결과,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낮았다고 밝혔다. 주요 영역별로 자신감을 갖고 있는 비율을 살펴보면 전공분야 지식의 경우 32.1%(여학생)와 39.8%(남학생), 전공분야 흥미와 애정은 35.3%와 44.3%, 직업인으로서의 의식과 태도 영역에서도 32%와 41.9% 등으로 남학생이 높게 나타났다. 보고서는 "전문대 교육 결과 얻은 자신감이 여학생에게 낮게 나타나는 것은 여학생이 진취적으로 직업의식을 갖고 취업준비와 구직활동을 하는데 심각한 장애요인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학점이 평균 3.0 이상인 여학생은 84.4%인 반면 남학생은 78.3%로 나타나 성적은 여학생이 더 높았다. 이와함께 남학생 37.3%가 희망하는 직업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여학생은 23.9%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월평균 희망 급여도 남학생은 153만원이었지만 여학생은 133만원이었다. 특이한 것은 용모관리와 관련 '다소 노력한다'거나 '많이 노력한다'는 남학생(45.9%)이 여학생(39.4%)보다 많아 취업과 관련한 남학생들의 용모에 관한 의식 정도를 알 수 있었다. 취업 추천과 실습 기회에 대한 남녀간 불이익 여부를 묻는 질문에 '여학생이 불리하다'에 동의한 여학생(32.1%)이 남학생(24.2%)보다 많았다. 보고서는 "여학생이 각종 현장실습 교육에 남학생보다 적게 참여하고 있었다"며 "전문대 이공계 여학생들이 입학 당시 진학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돼 고등학교에서의 진로교육이 좀더 강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시던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 거의 한달 정도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우리 집과 멀지 않은 큰댁에서 사시다시피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4명의 딸들이 잠든 방문을 여시며 어머니께서는 “할머니 돌아가셨다”라는 짧은 말을 남기고 미리 준비해 두셨던 흰 상복을 안고 큰댁으로 가셨다. 나의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40대 중반에 들어선 나에게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그립고 아름다운 이름으로 새겨져 있다.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삶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소중한 보석이다. 나에게 이렇게 소중한 보석을 갖게 해 주신 나의 할머니에게 새삼 감사를 드린다. 나의 할머니께서는 반촌에서 자라 마음만 좋으신 할아버지에게로 시집을 오셔서 평생 길쌈으로 집안을 꾸리시고 밭떼기를 늘리셨다. 한 동네 200여 미터 안에 할머니가 사시던 큰댁과 우리 집이 있었고,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언니보다 활동적이었던 나는 학교를 파하면 집에는 가방만 던져놓고 큰댁으로 갔다. 큰집과 우리 집의 개념조차 없이 큰집을 내 집처럼 지낼 수 있었던 것은 후덕하고 순종적이시던 큰어머니와 할머니의 따뜻한 그늘이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안다. 대지가 300평이 넘는 큰댁에는 살구나무, 감나무, 고욤나무와 함께 안 마당에는 3그루의 앵두나무가 있었다. 할머니께서는 4촌 오빠들이 앵두를 모두 따 먹어 버릴까봐 “토란 밭 위의 앵두나무는 작은집 애들 몫으로 나 두어야한다”고 큰 오빠에게 엄명을 하셨다. 6월초 학교를 파하고 큰댁엘 가면 토란 밭 위의 앵두나무만 살이 오른 앵두가 발갛게 붙어있고, 두개의 앵두나무는 파란 잎만 무성하였다. 누에를 치시던 모습, 할머니가 주신 술 막지 먹고 취한 일, 고추장에 비벼주시던 비듬나물 밥, 그리고 배탈이 나면 배를 쓸어주시며 불러주시던 노랫말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남아를 선호하던 시절에도 할머니께서는 큰댁과 달리 딸만 넷 이였던 우리자매들에게 사촌오빠들과 차별둔적도 없었고, 한번도 할머니에게 여자애들에게 하는 일상적인 욕도 들어본 기억이 없다. 나에게 할머니를 기억하게 하는 물건은 너무 많지만 지금 그것들 중 하나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너무도 안타깝다. 통나무로 만든 두레박, 나막신, 그 많던 길쌈용구들, 큰 통나무 함지박, 대나무 독, 큰 물고기 모양의 청동 자물쇠와 반닫이, 각종 옹기들, 비올 때 머리에 쓰고 다니던 한지로 만들고 기름을 먹인 갓, 겨울 안방을 따듯하게 하던 화로 등 수없이 많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것보다도 내 할머니의 라디오를 잊을 수 없다. 할머니가 기거하시던 큰댁 안방에는 눈을 뜨시면서 켜시던 커다란 라디오가 있었다. 왕관모양의 별(금성)이 선명하게 찍힌 아주 큰 라디오였다. 이 라디오 등에는 자기 몸만큼 큰 배터리를 메고 항상 안방 할머니 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안방에 라디오와 함께 할머니 손을 떠나지 않던 물건은 담뱃대와 안경집 그리고 할머니의 화투이다. 그 화투는 요즈음 화투와는 만든 방법이 달랐다. 뒷면 종이위에 석회를 바르고 다시 한지를 발라 만들었으며, 그 오랜 세월 한 장도 잃어버리시지도 않았다. 돌아가실 때까지 할머니의 손에서 할머니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낸 이 화투는 모퉁이가 달아 둥글어지고 반질거렸다. 생활력이 강하시지 못하셨던 할아버지를 대신해 18세부터 온 집안 살림을 사셨던 큰 아버지를 할머니는 남편처럼 의지하셨다. 하늘이 내리신 효자시기도 하셨던 큰아버님께서는 공무원이셨고, 매달 월급을 받으면 큰 어머님께 드리지 않고 할머니에게 드렸다. 할머니께서는 안방 실겅대 위에 얹힌 작은 반닫이에 그 돈을 받아 넣으셨다. 그리고 큰어머님께서는 항상 할머니에게 생활비를 그때그때 받으셨고, 그에 대한 불만도 평생 없으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큰아버님께서는 1년의 탈상기간을 정하시고 삭(보름)과 망(그믐) 한달에 두 번씩 제사를 지내셨다. 어느 날 나는 사랑채에 마련된 할머니의 제사상을 보게 되었다. 그 상위에는 제사음식과 함께 커다란 할머니의 라디오와 화투가 올려져 있었다. 그렇게 1년의 제사를 끝으로 나는 그 물건들을 보지 못했다. 물론 그것은 큰 아버님께서 태워 하늘로 올려 보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나는 할머니의 라디오와 같은 형의 라디오는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아마 지금은 그 라디오를 만든 회사의 박물관에서나 그 모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할머니께서 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은 지금 중요하지 않다. 눈을 뜨시면 습관적으로 라디오 소리를 들으셨고 그것은 할머니 삶의 큰 위안이었음을 이제 할 수가 있다. 할머니의 라디오는 마음만 좋고 생활력이 강하지 않으셨던 나의 할아버지에게 시집 오셔서 평생을 자식과 집안을 위해 살면서 많은 것을 속으로 삭히며 사셔야 했던 할머니에게는 벗 이상의 것이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탈상을 한 후 큰댁은 집을 수리하였다. 그 때 큰댁 다락에서 할머니의 꽃신이 발견되었다. 그 꽃신은 반가의 새색시가 시집을 오면서 신고 온 가죽 꽃신이었다. 아마 시집 온 후 한번도 신어보시지 못하고 계속 다락에만 두셨을 것이다. 그 애틋한 할머니 꽃신조차 지금 내겐 없다. 지금 큰댁에는 지병으로 큰아버님마저 지난해 돌아가시고 후덕하신 나의 큰어머님만 덩그러니 그 집을 지키고 계신다. 명절이 되면 어린 조카들이 강아지와 놀면서 마당을 뛰어다닐 때 난 나막신 신고 뒤뚱거리며 이 마당에서 뛰어놀았던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지금 그 마당은 그대로 인데 그 주인공들은 바뀌었고 허리 굽은 내 큰어머니께서는 내 할머니처럼 인자하신 모습으로 우리를 반긴다. 나는 지금도 주말이면 가끔 남편과 아이들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할머니에게 배운 몇 가지의 화투 점을 치면서 나의 할머니를 회상하곤 한다.
이상태 | 국사편찬위원회 연구관 1. 독도는 어디에 위치한 섬인가? 경위도상으로는 북위 37도14분18초, 동경 131도52분22초 지점에 있는 대한민국의 가장 동쪽에 있는 영토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산 42-76번지에 속했으나 2000년 4월 8일부터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1-17번지로 바뀌었다. 독도는 울릉도로부터 동남쪽으로 약 92km(약49해리: 최근 물이 빠졌을 때를 기준하면 87km임.) 지점에 있고 일본의 가장 가까운 섬인 시마네현 오키도(隱岐島)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160km(약86해리)떨어진 지점에 있다. 본토에서 볼 때는 동해안 울진군 죽변항으로부터 215km 지점에, 일본의 시마네현 사카이고(境港)로부터 220km 지점에 있다. 독도는 동도와 서도라는 두 개의 섬과 그 주위에 흩어져 있는 36개의 암초로 독도의 총면적은 18만6121㎡(5만 6301평)이고 서도의 산 높이는 174m, 동도가 99.4m이다. 2. 독도는 언제부터 한국의 영토였는가? 신라 지증왕 13년에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을 병합한 AD 512년부터이며, 1500년전부터 우리의 영토이다. 거기에 비해 일본측 문헌에 독도가 처음 나오는 것은 1667년에 편찬한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이다. 이 책은 출운(出雲:시마네현의 옛이름)의 관리[蕃士]인 사이토(齊藤豊仙)가 번주(藩主)의 명을 받고 1667년에 은기도를 순시하면서 보고들은 바를 기록하여 보고서로 작성하여 바친 것이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독도를 ‘송도’로 ‘울릉도’를 ‘죽도’로 호칭하였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은주(隱州:은기도)는 북해(北海)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은기도라고 한다. 술해간(戌亥間: 서북방향)에 2일 1야를 가면 송도(松島)가 있다. 또 1일 거리에 죽도(竹島)가 있다. 속언에는 기죽도(磯竹島: 이소다케시마)라고 하는데 대나무와 물고기와 물개가 많다. 이 두 섬(송도와 죽도)은 무인도인데 고려(高麗)를 보는 것이 마치 운주[出雲國]에서 은기(은기도)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일본의 서북 경계지는 이 주(은주: 은기도)로 그 한계를 삼는다” 위의 기록이 독도를 일본에서 처음으로 언급한 책인데 독도와 울릉도를 모두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고 있다. 3.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우산(于山)과 무릉(武陵)의 두 섬이 현(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이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아니해서 날씨가 청명하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우산국이라고 불렀다.” 512년에 신라가 점령한 우산국은 울릉도와 우산도이며 우산도는 독도이다. 4. 동국여지승람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강원도 울진현 조에 “우산도·울릉도: 무릉이라고도 하고 우릉이라고도 한다. 두 섬은 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라고 기록돼 있다. 우산도(독도)와 울릉도 두 섬이 행정구역상으로 강원도 울진현에 속한 조선왕조의 영토임을 밝혀 놓았다. 5. 조선왕조실록에는 독도에 관한 기사가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태종 때에 김인우를 시켜 울릉도를 조사시키고 세종 때에는 그곳의 주민들을 육지로 쇄환시키고 피역자와 범법자가 섬에 들어가 살지 못하도록 공도정책(空島政策)를 썼다. 성종 때에는 삼봉도(독도임)의 존재가 조정에 보고되어 관리를 파견하여 조사시켰고 삼봉도는 울릉도와 다른 섬인 삼봉도가 독도임을 확인하였다. 숙종 때에는 안용복의 활동으로 일본인들의 불법적인 행동을 막고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하는 문서도 받았다. 정조 때에는 독도에 물개가 많이 서식함을 확인하고 ‘가지도’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6. 그 밖에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증명하는 고문헌 자료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1808년에 편찬된 ≪만기요람 군정편(軍政編)≫이 있다. 이 문헌에는 “여지지(輿地志)에 이르기를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 영토이다.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松島: 마쓰시다)다.”라고 기록했다. 첫째 ≪여지지≫는 17세기에 유형원이 쓴 지리지이다. 둘째, “울릉도와 우산도가 모두 우산국 땅”이라고 밝혀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명백히 하였다. 셋째,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松島: 마쓰시다)다”라고 하여 우산도가 독도임을 거듭 밝히고 있다. 7. 일본 정부가 독도를 역사적으로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도쿠가와 막부가 1618년에 내준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와 1661년에 내준 송도도해면허(松島渡海免許)이다. 죽도도해면허는 일본의 백기주(白耆州)의 미자(米子)에 거주하던 오오다니(大谷甚吉)가 태풍을 만나 울릉도에 피신한 일이 있었는데, 그는 우리나라가 임진왜란 이후에 공도정책으로 울릉도를 비워둘 때이므로 이 섬이 무인도인 줄 알고 도쿠가와 막부의 관리들과 친분이 두터운 무라가와(村川市兵衛)와 함께 1616년에 죽도도해면허를 신청하고 허가를 받으려고 운동하였다. 그 결과 도쿠가와 막부의 관리로 백기주 태수직을 맡고 있던 송평신태랑광정(松平新太郞光政)이 1618년에 오오다니와 무라가와 두 가문에 죽도도해면허를 내주었다. 이들은 1661년에는 ‘죽도근변송도도해건(竹島近邊松島渡海件)’을 청원하여 송도(松島 : 독도) 도해면허도 받았다. 위의 사실은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한 증거다. 만약에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면 자국민이 자국의 영토를 출입하는데 무슨 면허가 필요하겠는가? 8. 안용복이 독도를 지키기 위하여 한 일은? 숙종19년(1693)에 동래와 울산의 어부 약 40명이 울릉도에 고기잡이 갔다가 일본의 오오다니 가문에서 보낸 일단의 일본 어부들과 충돌하였다. 일본 어부들은 조선 어부 대표를 보내면 협상하겠다고 하였으나,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이 대표로 나서자 이 두 사람을 납치하여 일본 은기도로 가버렸다. 안용복은 은기도 도주에게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지적하면서 “조선 사람이 조선 땅에 들어가는데 왜 납치하여 구속하는가?”하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이에 은기도 도주는 그의 상관인 백기주 태수에게 안용복 등을 이송하였다. 안용복은 백기주 태수의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강조하고 조선 영토인 울릉도에 조선 사람이 들어간 것은 일본인이 관여할 사항이 아니며, 앞으로는 울릉도에 일본 어부의 출입을 금지시켜 달라고 요구하였다. 백기주 태수는 자기가 결정하기에는 어려운 사항이었으므로 안용복 등을 에도(동경)의 막부 관백(최고통치자)에게 이송하였다. 안용복은 막부 관백의 심문에도 당당하게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강조하고 자기를 납치하여 구속하는 것은 부당하며, 도리어 일본 어부들이 조선의 영토인 울릉도에 들어간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하였다. 도쿠가와 막부의 관백은 안용복을 심문한 후 백기주 태수를 시켜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鬱陵島非日本界).”라는 문서를 써주고 안용복을 후대하여 돌려보냈다. 석방된 안용복이 귀국길에 장기(長崎: 나가사키)에 이르니 장기주 태수는 대마도주와 결탁하여 안용복을 다시 구속하여 대마도에 이송하였다. 안용복이 대마도에 이르니 대마도 도주는 백기주 태수가 막부 관백의 지시를 받고 써준 문서를 빼앗고 도리어 안용복을 일본 영토인 죽도(竹島)를 침범한 월경 죄인으로 취급하여 안용복을 묶어서 조선 동래부에 인계하고, 앞으로는 조선의 어부들이 일본 영토인 죽도에서 고기잡이하는 것을 엄중히 금지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당시 조정에서는 안용복을 가둔 채 온건론자들의 주장대로 ‘귀국의 경지인 죽도’에 조선 어부들이 출어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국서를 보냈다. 사관(史官)들이 먼저 들고 일어났다. “왜인들이 말하는 소위 죽도(竹島)는 곧 우리나라의 울릉도로 울릉도와 죽도는 1도2명(1島 2名)이므로 저들의 주장을 봉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숙종20년(1694)에 국서를 보내기를 “우리나라 백성들이 고기잡이한 땅은 본시 울릉도로서 대나무가 많이 나기 때문에 혹 ‘죽도’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하나의 섬에 두 가지의 이름이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귀국 해변 사람들에게 특별히 당부하여 울릉도에 왕래하지 말도록 할 것이며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여 상호간의 우의를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엄중히 항의하였다. 숙종21년(1696) 1월에 대마도주가 바뀌어 막부 장군에게 인사차 들렀을 때 막부 장군은 대마도 신주 종의진(宗義眞)과의 질의 응답을 통하여 사태를 파악하고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①죽도(울릉도)는 일본 백기로부터 거리가 약160리이고 조선으로부터는 40리 정도로 조선에 가까워 조선의 영토로 보아야 하며 ②앞으로는 그 섬에 일본인의 항해를 금지하며 ③이 뜻을 대마도 태수는 관리를 파견하여 조선측에 통고하도록 하였다. 9. 안용복의 제2차 독도 수호운동 안용복은 숙종 22년(1696)에 울산에 가서 울릉도에 가면 해산물이 많다고 하면서 순천 송광사의 장사꾼 노헌(雷憲)과 이인성(李仁成) 등 16명을 모아 울릉도로 갔다. 울릉도에는 이미 일본 배들이 건너와 정박하고 있으므로 안용복은 “울릉도는 본래 우리 영토인데 어찌 감히 국경을 넘어 침범하는가? 너희들을 체포함이 마땅하다.”고 큰소리로 꾸짖었다. 이에 일본인들은 “우리는 본래 송도(松島: 우산도,독도)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를 잡으러 나왔다가 이렇게 되었으나 마땅히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거짓말하였다. 안용복은 “송도는 곧 우산도인데 이 역시 우리 땅이다. 너희가 감히 여기에 산다고 하느냐?”하고 이들을 꾸짖어 내쫓았다. 안용복이 이튿날 배를 타고 우산도(독도)에 들어가보니 일본인들이 솥을 걸어놓고 물고기를 조리고 있었다. 안용복이 막대기로 걸어 놓은 솥을 부수며 큰소리로 꾸짖으니 일본 어부들이 모두 도망갔다. 안용복은 그 길로 일본 어부들을 쫓아 은기도로 들어갔다. 은기도 도주는 찾아 온 이유를 물었다. 안용복은 “몇 년 전에 내가 이곳에 들러 울릉도와 우산도는 조선의 땅으로 정하고 관백의 문서를 받아 가기도 했는데 일본이 격식도 없이 우리 영토를 침범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라고 말하였다. 이에 은기도 도주는 안용복의 항의를 백기주 태수에게 전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래 기다려도 백기주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안용복은 이에 격분하여 배를 타고 백기주(지금의 시마네현)로 향하였다. 안용복은 이때 스스로 ‘울릉우산양도감세장(鬱陵于山兩島監稅將)’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백기주 태수가 일본에 들어온 이유를 물으므로 안용복은 “전날 두 섬(울릉도와 독도)의 일로 문서를 받았음이 명백한 데도 대마도 도주가 문서를 탈취하고 중간에 위조하여 여러 번 사절을 보내서 불법으로 침입하니 내가 장차 관백에게 상소하여 대마도주의 죄상을 낱낱이 진술하겠다.”고 따졌다. 이 때 마침 대마도의 도주 아버지가 백기주 관아에 머물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백기주 태수를 찾아가 “만약 이 상소가 올라가면 내 아들은 반드시 중죄를 얻어 죽을 것이니 이 상소를 올리지 말아 달라.”고 애걸하였다. 백기주 태수는 이에 안용복에게 그 상소를 올리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백기주 태수는 우선 안용복에게 쫓겨 온 일본 어부 15명을 적발하여 처벌하였다. 또한 백기주 태수는 안용복에게 “두 섬이 이미 당신네 나라에 속한 이상 만일 다시 침범하는 일이 있으면 마땅히 무겁게 처벌하겠다.”고 약속하고 안용복 등을 귀국하도록 하였다. 숙종22년(1696)에 도쿠가와 막부 장군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의 일부이며 일본 어부들의 고기잡이를 금지한다고 재확인하므로 논쟁은 종결되었다. 10. 근대에 들어와서 메이지 정부도 계속적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영토로 간주했는가? 메이지정부도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영토로 인정하였다. 그 증거로 1869~1870년의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라는 문서가 일본 외교문서 제3권에 수록되어 있다. 메이지정부는 신정부 수립 후 1869년 12월에 조선국과의 국교 확대 재개와 ‘정한(征韓)’의 가능성을 내탐하기 위하여 외무성 고위관리인 좌전백모(佐田白茅)·삼산무(森山茂)·재등영(齋藤榮) 등을 부산에 파견하였다. 이때 외무성은 14개의 항목을 정탐하여 오라는 내용인데, 그 중 하나가 ‘죽도(竹島)와 송도(松島)가 조선의 부속(附屬)으로 되어 있는 시말’을 내탐해 오라는 지시사항이다. 이들이 귀국하여 보고한 ‘죽도와 송도가 조선부속으로 되어 있는 시말’ 보고서에서 송도(독도)는 죽도(울릉도)의 이웃 섬으로 두 섬이 모두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라고 지적하고 많이 생산되는 물건의 이름을 들어 보고하였다. 이는 일본의 공문서에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분명히 한 자료이다. 11. 일본 내무성도 독도와 울릉도를 조선의 영토로 알고 있었다. 일본 내무성은 1876년에 일본 국토의 지적을 조사하고 근대적 지도를 만들려고 할 때 시마네현의 지적 담당자로부터 동해에 있는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를 시마네현의 지도에 포함시킬 것인가, 뺄 것인가에 대한 질의서를 1876년 10월 16일자 공문으로 접수하였다. 일본 내무성은 5개월간의 조사 끝에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고 태정관에게 최종 결정을 미루었다. 일본 내무성이 태정관에게 올린 질문서의 요지는 첫째 죽도(울릉도)와 그 밖의 1도에 대하여 지적(地籍) 편찬을 시미네현이 물어 왔고, 둘째 내무성이 시마네현이 제출한 서류와 또 1693년에 조선인 안용복이 일본에 들어와 주고받은 왕복문서를 검토해본 결과, 셋째 내무성은 죽도(울릉도)와 그 밖의 1도가 일본과 관계 없는 곳이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넷째 지적을 조사하여 일본의 판도에 넣을까, 뺄까는 중대한 사건이므로 태정관의 최종 결정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태정관은 이들 서류를 검토하고 내무성의 판단과 같이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조선의 영토라고 최종 판단을 내렸다. 1877년 3월29일 정식으로 내무성에 지령을 내렸다(일본 국립공문서관 소장). 12. 일본이 독도를 송도라 하지 않고 리앙쿠르드암(岩)이라고 부른 이유는? 1876년에 일본인 무등(武藤平學)이 동해에서 울릉도 아닌 새 섬을 발견하였다고 하며 ‘송도개척건’을 청원하였다. 일본 해군성은 천성환(天城丸)이란 군함을 파견하여 1878년과 1880년 두 차례에 걸쳐 송도의 실체를 조사했으나 송도는 곧 울릉도임을 확인하였다. 이때부터 울릉도를 송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전까지 독도를 송도라고 불렀으므로 독도의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여 프랑스의 포경선이 붙인 ‘Liancourt Rocks’를 취하여 ‘리앙쿠르드암’이라고 수로지에 표시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본 일본 어부들이 ‘리앙코도(島)’라고 약칭하였다. 13. 울릉도 검찰사(檢察使) 이규원의 활동은? 일본 군함의 불법활동에 대응하여 조선 정부는 이규원(李奎遠)을 울릉도 감찰사로 보내 공도정책의 폐기와 재개척 여부를 조사시켰다. 이규원은 배 세 척에 102명의 대규모 조사단을 편성하여 현지 조사를 실시하였다. 1882년 4월 29일부터 6일간 울릉도를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①울릉도에는 본국인이 모두 140명인데 전라도가 115명(82%), 강원도가 14명(10%), 경상도가 10명(7%), 경기도가 1명(0.7%) 순이고 ②본국인 중 선박을 만드는 자가 129명(92.2%),인삼 등 약초 캐는 자가 9명(6.4%), 대나무 베는 자가 2명(1.4%)이었고 ③울릉도에 침입한 일본인은 78명이었으며 ④울릉도의 장작지포에 ‘대일본제국 송도 규곡,명치 2년2월13일 기암충조 건립’이라는 푯말을 발견하였으며 ⑤나리동을 비롯하여 6~7곳에 주민을 상주시킬 수 있는 거주지를 조사하였다. 14. 울릉도 재개척 사업은? 1883년 3월에 김옥균(金玉均)을 ‘동남제도개척사겸관포경사(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使)’로 임명하여 1883년 4월에 최초의 이주민 16호 54명을 정착시켰다. 일본인들 중 불법 침입한 일본인 254명을 모두 철수시켰다. 그 후 울릉도에 전임 도장(島長)을 두고 관리하다가 1895년에 도장을 도감(島監)으로 바꾸었다. 15. 근대 문서 중에 독도가 우리 땅임을 밝혀 주는 문서는 어떤 것이 있나?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울도군 설치에 관한 칙령인데, 그 내용은 제1조에 1900년 10월 25일자로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며, 제2조에 울도군의 관할 구역은 ‘울릉 전도와 죽도(竹島)·석도(石島)를 관할할 사’라고 한 점이다. 여기서 죽도는 울릉도 바로 옆의 죽서도(竹嶼島)이고, 석도(石島)가 독도(獨島)를 가리킨다. 전라도 방언에 돌을 독이라고 하고 돌섬을 독섬이라고 부르는데 의역하여 석도(石島)라고 했기 때문이다. 16. 독도(獨島)라는 표기는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는 우산도라고 불렀는데, 1904년에 일본 군함 신고호(新高號)가 이 지역을 답사하고 쓴 항해일지에서 “송도(울릉도)에서 리앙쿠르드암을 한국인은 독도(獨島)라고 쓰고 본방[日本]의 어부들은 리앙코도라 한다.”고 기록한 것이 처음이며, 우리나라에서는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의 보고서에서 처음 발견된다. 신고함의 항해일지를 참고하면 1904년 이전부터 울릉도에 거주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도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17. 러·일 전쟁과 독도의 관계는? 1904년 러·일 전쟁이 터지자 일본은 러시아 함대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하여서는 독도가 전략적으로 매우 귀중한 전략적 요충지임을 인식한다. 일본 해군이 설치했던 20개소의 해군 망루 중 두 개는 울릉도, 한 개는 독도에 설치하였다. 일본이 독도에 야심을 드러낸 것은 러·일 전쟁을 수행하면서 독도의 전략적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18. 나카이(中井養三郞)의 독도어업 독점권은 어떤 목적에서 나왔는가? 나카이는 독도에서의 물개잡이가 이익이 많았으므로 독점권을 확보하려고 하였고, 일본 정부는 전략적 요지인 독도를 확보할 목적에서 이 사업이 추진되었다. 1904년 9월 29일에 해군성의 협조로 일본 정부의 내무성·외무성·농상무성의 세 대신에게 ‘리앙코도 영토편입 및 대하원’을 제출했다. 내무성은 한국정부와 국제적 여론을 고려하여 이 청원을 각하하려 하였으나 외무성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이를 허가해 주었다. 19. 일본 정부는 ‘독도 영토 편입’ 고시를 어떻게 하였는가? 1905년 2월 15일일의 훈령으로 시마네현의 지사에게 통고하였고, 시마네현은 1905년 2월 22일자에 ‘다케시마 편입에 대한 시마네현의 고시 제40호’로 “북위 37도9분30초,동경 131도 55분, 은기도에서 서북으로 85해리 거리에 있는 섬을 다케시마(竹島)라고 칭하고 지금 이후부터는 본현 소속 은기도사(隱岐島司)의 소관으로 정한다.”는 고시문을 시마네현의 에 조그맣게 게시하였다. 이 고시 내용은 지방신문인 에 1905년 2월 24일자에 짤막하게 보도되었다. 20. 대한제국정부는 이 사실을 언제 알았는가? 1906년 3월 28일에 일본 시마네현의 은기도사 일행이 독도를 시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울릉도에 들려서 울도군수 심흥택(沈興澤)을 방문하여 대화하는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독도 편입 사실을 알렸다. 21. 울도군수 심흥택의 조치 사항은? 심흥택은 깜짝 놀라 그 이튿날인 3월 29일에 강원도관찰사에게 긴급 보고하였다. 그 보고서에는“본군 소속 독도가 본부의 외양 백여리허에 있었는데….” “자운(自云) 독도가 이제 일본의 영지가 되었기 때문에 시찰차 내도했다.”라고 하였다. 강원도 관찰사는 내부대신에게 보고했다. 내부대신은 “독도가 일본 속자라고 칭하여 운운하는 것은 전혀 그 이치가 없는 것이니….” 라고 말하였으며, 참정대신은 “독도가 일본 영지 운운한 설은 전적으로 전혀 근거없는 주장에 속하나….”라고 말했다. 대한매일신문이나 황성신문은 특보로 이 사실을 보도하였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울릉도의 바다에서 거리가 동쪽으로 100리 거리에 있는 한 섬이 있어 울릉도에 구속(舊屬)했는데 왜인이 그 영지(領地)라고 늑칭(勒稱)하고 심사하여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22. 1951년의 ‘대일본강화조약’에서 독도가 왜 누락되었는가? 제1차 초안(1947.3.20.)과 제2차 초안(1947.8.5.), 제3차 초안(1948.1.2.), 제4차 초안(1949.10.13.), 제5차 초안(1949.11.2.)까지는 독도가 명기되었다가 제6차 초안(1949.12.29.)에는 일본측의 집요한 로비로 인하여 오히려 독도가 일본의 영토로 표시되었다. 이 초안을 본 다른 연합국들이 강력히 항의했는데 호주, 뉴질랜드, 영국 등의 항의가 있었다. 이 중 영국은 세 차례의 초안을 작성하여 미국 측에 항의하고 지도까지 작성하여 독도가 한국 땅임을 명시하였다. 사정이 이와 같이 전개되자 미국도 당황하여 제7차 초안부터는 독도의 영유권을 한국이나 일본 어느 쪽에도 명시하지 않은 채 합동초안(1951.5.3.)를 마련하여 독도의 영유권을 분명히 하지 못했다. 23. 신한·일어업협정과 독도의 영유권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협정의 제1조에 “이 협정은 대한민국의 배타적 경제수역(EEZ)과 일본 측의 배타적 경제수역에 적용한다.”고 규정한 점이 문제이다. 이 어업협정은 고기잡이만이 아니라 EEZ의 기점·기선문제를 통해 영토문제와 관련시키고 있다. 제15조에는 “이 협정의 어떠한 규정도 어업에 관한 사항 이외의 국제법상 문제에 관한 각 체약국의 입장을 해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아니 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홍성근 | 한국외대 법대 강사·독도학회 이사 들어가며 독도는 2개의 큰 섬인 동도와 서도, 그리고 그 주변에 30여 개의 바위들로 구성되어 있다. 동도(0.0647㎢)와 서도(0.0954㎢) 등을 합친 독도의 총 면적은 0.186㎢(약 5만7000평)에 불과하다. 동도의 정상 부분을 제외하면 섬 전체가 급경사로 평탄한 곳이 거의 없다. 그리고 서도의 물골이라는 곳에서 물이 나긴 하지만, 배수가 잘 되는 암석으로 되어 있어 다른 곳에서 담수의 식수원을 찾기란 쉽지 않다. 또 나무가 자라긴 하지만 대부분 초목류로 집을 지을 만한 나무는 아니다. 또한 일구어 양식을 생산할 만한 땅도 없다. 섬의 규모가 작아, 섬 주변을 흐르는 해류의 영향을 바로 받게 되어 예상할 수 없는 거센 바람과 파도가 몰아친다. 특히 태풍계절에 동해 방면으로 진행하는 태풍이 거의 빠짐없이 독도를 강타한다. 기온은 연교차와 일교차가 크지 않으며 연중 비도 많고 겨울에는 눈도 많이 내린다. 자연히 독도에서의 생활은 바다를 이용할 수밖에 없고, 거주(居住)는 거센 바람과 파도를 피해 어로작업이 쉬운 계절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과 환경으로 인해, 독도가 지금으로부터 250만 년 전에 형성된 섬이지만, 사람들이 상주하게 된 것은 불과 반세기 전인 1954년 독도의용수비대가 상륙하면서부터이다. 이처럼 열악한 환경과 여건을 가진 ‘독도가 과연 어떠한 의미와 가치를 가질까?’ 지금까지 ‘독도가 어떻게 이용되어 왔는가’를 살펴봄으로써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있어 독도의 가치와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이를 바탕으로 독도에 대한 영토의식을 고양하여 독도문제 해결에 보다 적극적 자세를 가지며, 아울러 독도에 있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었으면 한다. 삶의 터전, 독도 1905년 일본의 독도 침탈이 있기 전까지 독도는 울릉도민의 평화로운 삶의 터전이었다. 울릉도 재개척민(홍재현)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1883년 울릉도에 입도하여 일본의 식민지배를 거치는 동안 모두 45차례나 독도를 드나들면서 미역 채취나 강치 잡이를 했다. 미역은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울릉도보다 상대적으로 많고 품질도 좋다. 그리고 울릉도에는 산짐승이 없는 터라 주민들은 독도에 있는 강치 잡이를 통해 동물성 영양분을 보충하였다. 부기가 있는 몸이라도 강치를 먹고 나면 씻은 듯 그 몸이 나았다고 한다. 독도는 미역이나 강치 외에 전복이나 해삼의 어채지로도 이용되었다. 독도의 전복이나 해삼은 유난히 크다. 서도의 물골에 샘이 있어 그 물을 먹을 수 있고, 또 바람과 파도를 피하기에 적당히 들어간 지역이 있어 그곳에 막사를 치고 일정 기간 머무르며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작업은 주로 파도와 바람이 잔잔한 계절에 이루어졌다. 해방 후에는 주로 미역 채취가 이루어졌다. 독도의용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을 때에는 그들이 미역채취권을 얻어 미역을 채취하여 운영자금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64년 최종덕씨와 1991년 김성도씨가 독도에 거주하면서 미역 채취뿐만 아니라 전복이나 해삼도 채취하였다. 또한 독도 주변 바다는 오징어가 풍부하여 울릉도 주민이나 동해안 지역 어민들의 주요 어장이 되었다. 최근 독도 어장은 울릉도 도동어촌계에서 직영으로 관리하며 미역 채취, 고기 잡이 등의 어로작업을 통해 수익을 얻고 있다. 울릉도 주민들이 독도를 얼마나 긴요한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았는지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독도경비에 나서는 독도의용수비대 홍순칠 대장에게 그의 할아버지(홍재현)가 한 말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독도는 울릉도 도민들이 문전옥답과 같이 애지중지하는 우리의 생활터전이니 기어이 너희들이 그 곳에 가서 싸워 독도를 지켜야 한다.” 독도는 이러한 삶의 터전인 동시에 우리 민족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미군기와 정체불명의 비행기에 의해 자행된 1950년 전후의 독도폭격사건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약 3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1948년 6월 8일 사건과, 1952년 9월의 폭격사건은 당시 연일 신문에 오르내리며 국민들의 마음을 울렸다. 특히 1948년 사건은 일본으로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여전히 미군의 통치를 받고 있던 우리 민족의 울분을 더 크게 자아내게 했다. 독도는 민족의 가슴에 더욱 애잔한 마음으로 녹아 들어가며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삶의 터전이 되었다. 독도는 이렇게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들이 뼈 묻고 땀 흘리며 가꾸어 온 삶의 터전인 것이다. 군사 전략 요충지, 독도 울릉도 주민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으며 살아온 독도는 일본의 침탈 시도 이후에는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 일본은 우리 정부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제정 러시아를 배제하고 한반도를 침략하여 식민지화할 목적으로 1904년 2월 10일 대러시아 선전포고를 하고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1904년 2월 23일 일본은 한반도를 러일전쟁의 발판으로 사용하기 위해 ‘제1차 한일의정서’를 조인케 한다. 6개조로 된 이 의정서에는 전쟁중 일본의 활동에 대한 편의를 충분히 제공하며, 군사 전략상 필요한 경우 수시로 한국의 영토를 수용할 수 있다는 조항을 담고 있다. 그에 근거해 일본은 우리나라의 곳곳을 한반도 지배를 위한 전쟁의 전략 거점으로 이용하였다. 특히 독도는 울릉도와 함께 대한해협과 동해를 지나는 러시아 함대의 동향을 관측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일본 해군은 1904년과 1905년 울릉도와 독도에 통신시설 등을 갖춘 감시 망루를 설치하고 해저전선을 부설하여 일본과 연결하는 등 군사 전략의 요충지로 이용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은 1905년 1월 28일 일본 내각의 결정과 그해 2월 22일 시마네현의 은밀한 고시를 통해,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 이름하고 자국의 영토로 포함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독도는 일본 해군의 저탄장(貯炭場)으로도 사용되었다. 독도가 군사 전략상 중요한 위치였다고 하는 것은 1949년 당시 주일 고문(駐日顧問)이었던 미국인 시볼드(William Sebald)라는 사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는 대일강화조약의 초안 작성 과정에서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명기할 것을 요청하며, ‘독도에 기상과 레이더 기지를 설치하면 안보의 측면에서 미국에 이로울 것’이라고 미국을 설득한다. 시볼드의 로비에 힘입어, 그전까지 ‘독도는 한국의 영토’로 있던 것이 잠시 ‘독도는 일본의 영토’로 명기되게 된다. 하지만 다른 연합국의 반발로 결국 대일강화조약의 본 규정에서는 ‘독도는 일본의 영토’라는 부분이 삭제되었다. 지금까지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과 일본, 러시아 등으로 둘러싸여 있는 동해에서, 독도는 바둑판의 화점(花點)으로 비유될 만큼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애국심의 표상, 독도 근현대사에 있어 우리 민족에게 있었던 시련이라고 한다면, 16세기말과 17세기의 왜란(임진왜란, 정유재란)과 호란(병자호란, 정묘호란)을 들 수 있다. 또한 19세기말과 20세기 초 열강의 침입과 일본의 식민지배, 1950년대 한국전쟁, 그리고 1996년 이후 IMF 금융위기 또한 빼 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 때마다 독도를 지켜낸 것은 국가가 아니라 안용복이나 독도의용수비대(대장 홍순칠)와 같은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셨다. 특히 독도의용수비대가 독도 경비에 나설 당시 독도는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1948년과 1952년에 폭격이 있어 많은 선량한 우리 어민들의 희생이 그 곳에서 있었다. 또한 일본인들이 독도에 침입하여 ‘독도는 일본 영토’라는 말뚝을 세우고 가는 일도 잦았다. 당시 육지에서 한국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때, 독도에서는 우리 어민들이 외세에 맞서 처절한 생존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울릉도 청년들은 스스로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하여 독도로 갔다. 그들은 젊은이로서의 청청한 꿈도 접고 갓 결혼한 아내와 신혼의 단꿈도 멀리한 채 독도로 갔다. 자신들의 논과 밭은 물론이고 몸 바쳐, 생명 바쳐 삶의 터전인 독도를 지켰던 것이다. 우리는 독도를 보며, 그곳을 피와 땀으로 적신 우리네 할아버지,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분들 가슴에서 우리 가슴으로 이어지는 나라사랑, 겨레사랑을 한껏 느낄 수 있다. 해양관할수역의 발양지, 독도 바다 한 가운데 있는 대부분의 작은 섬들은 초기에는 물이나 연료 주입을 위해, 또는 임시 거처나 구아노(조분석: 鳥糞石) 채집 등 섬 자체를 이용하기 위해 활용되었다. 그런데 인구는 늘어나고 그에 비해 육지 자원이 감소하게 되자, 세계 각국은 해양의 식량 자원이나 에너지 자원을 개발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반응으로 해양법이 발달하게 되고, 대륙붕, 배타적 경제수역 등의 새로운 공간도 출현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크기에 비해 광대한 넓이의 해양관할수역을 갖는 섬의 중요성이 점차 부각되었다. 실제 작은 섬이 갖는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EEZ)의 넓이는 약 12만 5660평방해리나 된다. 섬은 국가간 해양경계 획정이나 자국의 해양자원 이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섬을 영유한 국가는 그 주변수역에서 어업 자원이나 광물자원과 같은 생물, 무생물 자원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며, 인공시설의 설치 및 사용, 해양과학조사, 해양환경의 보호와 보전 등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가진다. 1952년 1월 한국의 평화선 선언 이후 한일 정부간 외교적 쟁점으로 부각된 독도문제는 1965년 한일어업협정의 체결, 그리고 1996년 이후 있은 EEZ 경계획정 논의와 1999년 신한일어업협정의 체결을 전후하여 더욱 가열되었다. 이는 독도영유권 이면에 해양관할권을 조금이라도 확대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연유한다. 국제해양법상 섬은 당연히 12해리 영해와 24해리 접속수역을 갖는다. 하지만 그 섬이 인간이 거주 가능하고 독자적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있느냐에 따라 200해리 EEZ나 대륙붕을 갖게 된다. 독도는 0.18㎢밖에 되지 않은 섬이지만, 그가 가질 수 있는 수역은 한반도를 담을 만큼 광대하다. 현재 독도 주변수역에는 풍부한 어업자원뿐만 아니라 가스 하이드레이트(Gas Hydrates)와 같은 무한한 양의 천연자원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독도가 어느 나라의 영토가 되느냐에 따라 독도 주변수역에 있어 무수한 어업 및 해양자원은 독도를 영유하는 국가가 배타적 권리를 갖는다. 일본이 독도 침탈 야욕을 쉽게 버릴 수 없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천연보호구역, 독도 2005년 3월 현재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맞서 독도 방문 대폭 허용 등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적극적으로 강화할 것이라는 발표가 있기 전까지 독도는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 표면적 이유는 독도가 문화재보호법상 천연기념물 제336호 해조류(海鳥類)(괭이갈매기, 바다제비, 슴새 등) 번식지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또 ‘독도 도서지역의 생태계보전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자연보호구역으로 관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환경부는 생물의 다양성이 풍부하거나 멸종위기의 야생동식물이 서식하는 지역을 생태보전지역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특히 자연환경이 우수하고 희귀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도서의 경우, 특정도서로 지정하여 특별한 관리를 하고 있는데 여기에 독도가 포함된 것이다. 환경부는 독도와 울릉도 및 인근 해상의 뛰어난 자연경관과 독특한 자연생태계를 보호하고 지속 가능한 이용을 도모할 목적으로, 최근(2002~2004년) 이 지역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기로 논의한 바도 있다. 이처럼 독도는 울릉도와 함께 ‘한국의 갈라파고스’라 불릴 정도로 생태보고로 이야기되고 있다. 이러한 곳에 예전에 그 많던 강치들이 다시 뛰어 놀게 된다면 그만한 해양생태공원도 없을 것이다7.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의 동인(動因), 독도 일본이 최근 독도의 날로 제정한 2월 22일은 일본이 독도를 편입했다고 주장한 1905년 2월 22일을 뜻한다. 일본은 아직도 1905년과 그 이후 한반도 식민 지배를 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이 오늘의 ‘독도의 날’ 제정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독도문제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화 과정에서 잉태되었다. 따라서 독도는 우리의 일그러진 역사를 다시 생각나게 하고, 한일관계를 급속히 냉각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일 양국은 1965년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비약적인 관계 증진과 상호 협력으로 긴밀한 동반자 관계를 형성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은 과거사 문제로 인해 양국간 관계 발전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한일 양국이 공통된 평가를 내리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일본의 식민지배라는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두고 한국은 불법이라고 함에 반해, 일본은 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독도문제는 이처럼 얽혀 있는 과거사 문제를 풀고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를 정립함에 있어 중요한 동인(動因, motive)이 된다. 독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독도문제의 실체를 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독도문제의 실체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독도문제의 해결과정을 통해 독도문제의 실체와 아울러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공통된 평가를 내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로써 한일 양국이 미래지향적 동반자 관계를 더욱 성숙시켜 나가며 동북아와 세계 평화에 기여해 나갈 것을 기대한다. 맺으며 1994년 유엔 해양법 협약의 발효로 세계는 더욱 치열하게 해양주권과 관할권 확대 경쟁을 벌이고 있다. 더욱이 반폐쇄해(半閉鎖海)인 동해에서의 한일 양국의 이러한 경쟁은 매우 치열하다. 여기서 동해 남부 중앙에 위치하는 독도는 그 자체로는 작은 돌섬에 불과하지만, 한국의 관할 범위를 확대시켜 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또한 차츰 동아시아에서 미국을 대신하여 일본의 군사적 역할이 증대됨에 따라, 독도는 일본의 세력과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안보적 가치도 매우 크다고 생각된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첫 희생양이 되었던 독도는 국민과 민족을 통합시키며,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을 이끌어내는 요소로도 작용할 것이다. 이미 우리는 2002년 서울에서 있은 8·15 민족통일 남북공동학술토론회에서 ‘독도영유권 수호와 일본의 과거청산을 위한 우리 민족의 과제’라는 주제로 남북이 함께 논의한 바 있다.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독도가 가지고 있는 갖가지의 가치와 의미를 최대한 활용하여, 독도가 영토적 안정을 누리고 동시에 동해에서 우리의 입지가 더욱 공고하게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독도가 동북아에 있어 정의를 구현하고 평화를 영구히 정착시킴에 있어 귀한 도구로 사용되길 바란다.
손영관 | 경상대 지구환경과학과 교수 동해의 한복판에 외로이 서 있는 섬 독도는 우리 민족과 함께 가장 먼저 아침 해를 맞이해 온 섬이자 우리 영토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섬이다. 독도는 그 크기에 비해 국민의 지대한 관심을 받아 왔으며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섬이다. 최근 일본에 의해 야기된 독도 파동의 한 대응책으로 독도 관광이 개방되어 앞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독도를 찾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독도에 가 본 사람도 별로 없고 가기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마찬가지로 독도의 지질과 형성 과정, 그리고 독도가 가지고 있는 잠재적 가치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 독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10여 년에 불과하다. 그러면 독도에 대한 연구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어떤 사실이 밝혀졌는지 알아보자. 독도의 지질(地質)이 밝혀지기까지 1992년 초 필자가 학위논문 준비로 바빴던 어느 날, KBS에서 독도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계획으로 있으니 나중에 독도를 방문하여 독도의 지질과 형성과정에 대한 자문을 해달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화산지질학을 전공한 학자가 드문 우리나라의 현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 제의가 당시 대학원생 신분이던 필자에게까지 온 것은 뜻밖이었다. 이 제의에 대해 필자는 망설임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지질학 연구에 몰두해 있던 필자에게 논문을 쓰기 위한 답사 이외의 여행은 단순한 관광 그 이상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발 디딜 틈도 없이 조그만 암초 같은 섬에 학술적 가치가 있는 연구거리가 있을까? 있다손 치더라도 며칠간의 짧은 관찰만으로 논문을 쓸 수 있을까? 그것도 기존 연구 자료가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 이런 회의적인 생각 속에 독도의 일이 점차 잊혀져 가던 1992년 가을 어느 날, 결국은 독도에 와달라는 전화가 왔고, 필자는 임시로 몸담고 있던 연구소의 지인 그리고 대학원 후배와 함께 부랴부랴 짐을 챙겨 독도로 가는 여정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우리가 독도의 지질조사를 위해 준비해 갈 수 있었던 자료는 1:2만5000 지형도에 손톱만 하게 나와 있는 독도를 몇 차례 확대 복사한 후 손으로 다시 그린 지도 한 장이 전부였다. 어렵사리 독도에 도착한 후 필자는 일주일 가량 독도에 머물며 지질조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독도는 걸어서 접근할 수 있는 지역이 극히 제한되어 있어 고무 보트를 타고 섬 주위를 돌며 조사를 해야만 했는데, 파도가 조금이라도 치면 배가 암초에 부딪히거나 전복할 위험성이 커 파도가 없는 날에만 배를 띄울 수 있었다. 그런데 독도 주변은 파도가 잠자는 날이 매우 드물었고, 지질 해석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지질도도 작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필자는 독도에서 철수해야만 했다. 그 이듬해인 1993년 초 KBS 다큐멘터리 제작팀이 독도에서 철수하기 직전 또한번의 독도 방문 기회가 주어졌다. 이번 방문에서도 별 성과를 얻지 못한다면 독도의 지질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속에, 그리고 독도 방문을 단순한 관광의 추억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각오 속에 독도를 또다시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약 보름 동안 거친 겨울날씨와 싸우며 2차 지질조사를 한 끝에 결국 독도의 지질도 작성과 함께 여러 지질자료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약 1년 여에 걸친 실험실 분석과 집필과정을 거쳐 독도에 대한 연구결과가 1994년과 1995년에 각각 대한지질학회와 국제화산학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에 논문으로 게재될 수 있었다. 이 논문을 통해 독도에 대한 많은 사실들이 알려지게 되었다. 먼저, 독도 암석의 연대 측정을 통해 독도가 과거에 추정되던 것처럼 신생대 제4기(180만 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기간)에 형성된 섬이 아니라, 제3기 플라이오세(약 460만 년 전부터 250만 년 전)에 걸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독도가 매우 작은 섬이기는 하나 제주도나 울릉도와 같이 지난 100~200만 년 이후부터 최근까지 만들어진 화산섬보다 훨씬 나이가 많으며, 울릉도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독도가 이미 동해의 망망대해 위로 솟아올라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 논문을 통해 독도의 독특한 지질과 형성과정을 밝혀내고 독도만이 가지는 지질학적 가치를 국제화산학계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화산섬 중에 무엇이 독도를 특별한 화산섬으로 만들었을까? 그럼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필자의 논문에 소개된 독도의 형성과정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독도의 형성과정 약 1500만 년 전 동해가 만들어진 후 동해의 심연 속에서는 1000만 년의 고요함이 흘렀다. 약 460만 년 전의 어느 날, 2000m 수심의 동해 밑바닥 한 곳에선 심해의 차가운 물 속으로 뜨거운 용암이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200기압의 높은 압력으로 인해 마그마는 큰 소리를 내며 폭발하지도 못하고 숨을 죽인 체 조용히 용암을 분출시켰다. 분출된 용암은 차가운 심해의 바닷물에 의해 급격히 식고 깨지며 베개용암(물속에서 분출하여 베개 모양의 구조를 가진 용암)과 유리쇄설암(용암이 물과 만나 급격히 식으며 깨진 부스러기로 이루어진 암석)으로 이루어진 해산(海山, seamount)을 만들어 나갔다. 해산을 만드는 이 과정이 수백만 년에 걸쳐 꾸준히 일어난 결과 이 해산은 높이가 2000m에 육박하게 되었으며, 조금만 더 자라면 동해 한복판의 유일한 섬이 되려는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울릉도는 없었으니까. 이 해산이 해수면 가까이 자라게 되자 동해의 거센 파도가 시샘이라도 하는 듯 독도해산 상부의 용암과 유리쇄설암을 끊임없이 깎아내고 깊은 바다 속으로 씻어내어 갔다. 약 250만 년 전, 독도해산은 마지막 힘을 다해 마그마를 분출시켰고 그 결과 해산 위에 커다란 화산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독도 탄생의 순간이다. 이 때 독도 분출의 모습은 이전과 매우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독도 최하부의 암석은 수중에서 조용히 분출한 베개용암과 유리쇄설암들로 되어 있지만 그 위를 덮고 있는 암석은 층상의 응회질 각력암(화산재와 각진 돌조각으로 이루어진 암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각력암은 화산쇄설물이 강한 폭발로 인해 분수와 같이 하늘로 치솟은 후 화구 주위에 겹겹이 쌓여 만들어졌는데, 이와 같이 화산분출의 모습이 바뀐 이유는 폭발을 억누르는 수압의 영향이 해수면 근처에서는 작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폭발은 더욱 격렬해졌고, 화산쇄설물은 더욱 잘게 부스러져 응회암(모래입자 크기의 화산재가 쌓여 만들어진 암석)이 쌓이기 시작했는데, 터져 나온 물질들은 단순히 낙하한 것이 아니라 화쇄난류(火碎亂流, 화산재와 가스의 혼합체가 지면을 따라 빠르게 흐르는 현상)라고 부르는 매체에 의해 화구 주위로 빠르게 운반되며 퇴적되었다. 화쇄난류는 화산재를 쌓을 때 층리, 사층리, 또는 점이층리와 같이 퇴적암에서 볼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데, 독도의 응회암에서는 이러한 구조가 잘 보인다. 한 동안 격렬한 폭발이 지속되며 각력암과 응회암이 쌓인 후, 대규모의 용암 분출이 일어났다. 이때 분출한 용암(조면안산암)은 독도의 상부 암석을 이루고 있으며 멋진 주상절리를 보여주고 있다. 이 용암 분출 이후에도 소규모의 분출과 관입이 일어났지만, 이 용암의 분출과 함께 독도의 화산활동은 사실상 막바지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때가 지금으로부터 약 250만 년 전이다. 독도의 지질학적 가치 과연 독도의 지질학적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해산은 ‘수중(水中) 성장단계’에서 베개용암과 유리쇄설암이 쌓여 만들어지다가, 해수면 근처의 ‘전이단계(轉移段階)’에서는 폭발적 분출을 일으키고, 해수면 위로 성장하여 섬이 된 후의 ‘대기하(大氣下) 성장단계’에서는 다시 용암을 분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산의 성장과정을 모두 보여주는 지질학적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 매우 드물다. 그 이유는 해산이 좀처럼 해수면 위로 노출되어 지질단면이 쉽게 관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질단면이 관찰되는 경우에도 해산 성장의 전 과정을 한 눈에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해산이 해수면 바로 아래에서 해수면 위로 성장하는 ‘전이단계’의 산물은 관찰하기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이 전이단계에서 만들어지는 화산쇄설암은 파도에 의해 쉽게 침식되거나 추후의 용암에 의해 덮여버리기 때문에 보존되기도 어렵고 관찰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도는 해산 진화의 전 과정을 한 눈에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전이단계의 분출기록을 잘 보존하고 있어 지질학적으로 큰 가치가 있다고 필자는 판단하고 있다. 외국의 화산 전문가들은 독도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외국 학자들의 독도에 대한 평가의 한 단면을 보여주기 위해 독일의 저명한 화산학자들이 2002년도 국제지구과학회지(International Journal of Earth Sciences)에 게재한 논문의 서론 일부를 소개하겠다. (전략)… Uplifted and dissected deep-water to shoaling volcanoes provide insights into the internal structure of seamounts. Such sections generally lack the transitional(shoaling to emergent) stage, however, because this stage is small in volume compared with the entire edifice and is easily eroded by wave action. The uplifted Tok Islands (Korea) are, as far as we are aware, the only example of a shoaling to emergent island volcano located in a marine setting in which the transitional stage is preserved… (후략). 이 글을 한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심해에서 수면 근처까지 성장한 후 융기되고 깎여나간 화산들은 해산의 내부구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화산의 단면들은 대체로 수면 바로 밑에서 수면 위로 성장하며 만들어진 전이단계가 누락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이 단계가 전체 화산에 비교하여 부피가 작을 뿐만 아니라 파도의 작용에 의해 쉽게 침식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한, 한국의 독도는 해양환경에 위치해 있으며 전이단계가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화산섬이다… 필자가 독도에 대한 논문을 발표할 당시 독도의 이러한 지질학적 가치와 희소성을 언급하긴 하였으나 필자의 견해가 외국 학자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또한 국제 지질학계와 화산학계에서는 독도가 명백한 한국의 섬으로 거명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물속에 잠긴 독도의 모습, 그리고 독도의 미래 1992년과 1993년 필자에 의한 지질조사를 통해 독도의 나이와 독특한 화산분출 과정이 밝혀지긴 하였으나 물속에 잠겨 있는 독도의 모습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다행히 1990년대 말부터 한국지질자원연구원과 한국해양연구원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독도와 주변 해역에 대한 해양탐사를 수행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독도의 해저지형에 대한 새롭고도 놀라운 사실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먼저 독도의 모습을 살펴보면, 독도는 지름이 500m도 되지 않는 두 개의 조그마한 섬(동도와 서도)으로 되어 있지만 해수면 밑에는 높이가 2000m, 하부직경이 20~25km에 달하는 거대한 해산이 놓여 있다. 크기로 따지면 한라산만한 화산이 독도 밑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독도해산(獨島海山)으로 명명된 이 해산은 일반적인 해산과 달리 독특한 지형을 보여주고 있는데, 해산의 윗부분이 운동장처럼 평평하게 깎여나간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러한 해산은 정상부가 평평하다고 해서 평정해산(平頂海山 guyot)이라고 부르는데, 독도는 약 200m의 수심을 갖는 평정해산의 정상부 위에 조그만 첨탑과 같이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며 뾰족하게 솟아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해양탐사를 통해 독도해산 주변에 평정해산이 두 개가 더 있다는 것도 밝혀졌으며, 이들은 각각 동해해산과 탐해해산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동해의 한 복판에 세 개의 평정해산이 나란히 만들어져 있다는 것은 해산의 성인은 물론이거니와 동해의 형성과정 해석을 위해서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평정해산은 일반적으로 바다 한복판에 만들어진 화산섬이 파도의 작용으로 인해 해수면 윗부분이 깎여나가 평탄하게 된 후 물 속에 잠겨 만들어지므로 독도해산은 물론 그 옆의 동해해산과 탐해해산 역시 한 때는 커다란 섬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해저지형을 바탕으로 판단컨대, 원래 동해의 한복판에는 세 개의 섬이 있었고 이들 모두가 동해의 거센 파도에 깎여 사라져 버리고 지금은 독도만이 섬의 일부분으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거대한 평정해산 위에 마지막 한 점 섬으로 남아 있는 독도의 미래는 어떠할까?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독도는 동해의 거친 해양환경과 기상조건에 처해 있다. 게다가 독도의 응회암과 각력암은 견고하지 않으며, 섬의 상부에 놓인 용암에는 주상절리가 촘촘히 발달해 있어 암석의 붕괴 현상이 지금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또한 화구함몰로 인해 생긴 단층들이 암석과 지층을 조각조각 자르고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지질학적 조건으로 인해 독도는 우리나라의 어느 섬에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취약한 지반을 갖고 있으며 빠른 속도로 침식이 진행되고 있다. 250만 년이라는, 지질학적으로 그다지 길지 않은 기간 동안에 독도 화산체의 대부분이 침식된 점에 비추어 볼 때 독도는 섬으로서 수명을 다해 가고 있는 셈이다. 독도 방문자들은 독도의 이러한 지질학적 취약성을 염두에 두고 독도의 자연환경 보존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독도삼경(獨島三景) 독도는 지질학적 가치도 크지만 섬 자체가 매우 아름다워 경관적 가치 또한 매우 큰 섬이다. 용암이 식으며 만들어진 주상절리, 단층을 따라 만들어진 수많은 해식동(sea cave)과 시 아치(sea arch), 첨탑처럼 솟아있는 수많은 시 스택(sea stack) 등 바닷가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지형이 이 작은 섬에 모여 있다. 독도를 몇 차례 방문한 경험이 있는 필자는 독도의 여러 경관 중에서도 동도의 천장굴과 얼굴바위, 그리고 서도 위에서 바라본 동해의 모습을 특히 좋아하여 이 세 가지를 독도삼경(獨島三景)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천장굴은 동도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깊은 수직동굴과 이 동굴로 향해있는 깊은 골짜기를 지칭한다. 섬의 한가운데에서 바다와 파도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가. 보트를 타고 북쪽에서 천장굴로 들어서면 깎아지를 듯한 수직 절벽에 둘러싸이고 절벽 위로는 하늘이 손바닥만 하게 보이는데 그 장엄함에 압도되어 탄성이 절로 나온다. 또한 해식동굴 몇 개가 동쪽으로 연결되어 있어 동도를 땅 밑으로 통과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이로 인해 천장굴의 신비감이 더해진다. 천장굴은 과거에 독도의 분화구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동도에는 수많은 단층들이 있는데 단층이 있는 곳엔 어디나 크고 작은 해식동굴이 발달해 있으며 천장굴 또한 이 단층들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는 천장굴이 해식동굴들과 마찬가지로 파도에 의한 차별침식으로 생겼음을 지시한다. 독도의 두 번째 절경인 얼굴바위는 사람의 옆모습을 연상시키는 바위로서, 어떻게 보면 ‘절경’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도 든다. 그러나 이 바위가 독도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독도삼경(獨島三景)에 포함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얼굴바위는 정확히 동남쪽을 향하고 있어 독도를 일본으로부터 지키는 초병의 모습으로 비유된다. 바다를 묵묵히 응시하고 있는 얼굴바위를 한참 바라보고 있노라면 국토를 지키다 사라져간 선열들의 모습이 떠오르며 비장감마저 느끼게 된다. 독도의 세 번째 절경은 서도를 가로질러 물골까지 나 있는 가파른 산길을 따라가며 볼 수 있는 주변 경치들이다. 숨을 몰아쉬며 130m 높이의 가파른 계단을 밟고 밟아 서도의 능선에 오르고 나면 발밑으로 동도가 보이는데, 그 모습이 새의 둥지마냥 포근하기만 하다. 고개를 들면 사방에 동해의 푸른 물이 펼쳐져 있으며 서쪽 수평선 너머로 울릉도가 희미하게 보인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냄새를 맡으며 이곳이 우리의 국토와 바다임을 다행으로 생각하게 된다. 발길을 옮겨 물골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독도의 여러 식생을 관찰할 수 있으며, 바닷가에 닿으면 독도에서 유일하게 담수를 얻을 수 있는 저수지를 볼 수 있다. 이곳이 바로 물골이다. 정광태의 노래가사에 나오는 ‘우물 하나’가 바로 이곳이다. 이곳은 또한 독도의 초기 정착민들의 흔적을 더듬어볼 수 있는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독도는 몇 걸음에 가로지를 수 있는 작은 섬이다. 그러나 독도에서의 한걸음 한걸음이 우리에게 국토와 자연의 의미를 일깨워 주기 때문에 가치와 의미로 따지면 어느 섬보다도 큰 섬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독도에 정을 쏟고 국민 각자가 독도의 이미지를 만들어 간다면 누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길 수 있겠는가.
윤철경 | 한국청소년개발원 복지정책연구실 1. 머리말 일진회 실태에 대한 한 현장교사의 보고가 언론에 보도된 이후 ‘학교폭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뜨겁다. 일간신문을 비롯해 각종 언론매체가 학교폭력 문제를 보도하고 있고, 특집을 통해 학교폭력에 대한 진단과 제언을 쏟아내고 있다. 정부는 학교폭력 문제에 대한 단호한 의지를 불태우며 연일 새로운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사실 학교폭력이 사회적 문제로 제기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 10년 동안 학교폭력의 심각성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고, 학교폭력의 특정 사건 발생 시마다 간헐적이나마 그 충격적인 단면들이 국민들에게 알려져 왔다. 이번에도 역시 일진회 실태에 대한 보고 이후,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보도하자 학교폭력에 대한 대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학교폭력 문제를 누가 해결해야 할 것인가? 해결의 주체는 누구인가? 학교폭력 근절을 위한 정책 아이디어 부재인가? 정책 부재가 아니라 학교폭력 문제를 끈질기게 붙잡고 해결하려는 주체가 모호해서 해결이 어려운 것이다. 학교폭력 문제에 관여하는 중앙정부 부처만 8개에 이른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부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정책의제가 되지 못하며, 사안이 생길 때만 한 번씩 강조될 뿐 체계적인 대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학교폭력 문제에 전념하고 있는 민간단체나 기관도 몇 개 없다. 학교폭력 문제의 안정적 해결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2004년 1월,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이하 학교폭력법)을 법제화하고, 이에 따라 기본계획이 수립·발표되었으나 그 대책 또한 현실적인 조치가 부족하여 잘 실현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기가 어렵다. 본고에서는 학교폭력 실태에 대한 간단한 진단과 더불어, 정부의 학교폭력 정책현황을 살펴보고 학교폭력을 위한 정책을, 시급성과 중요성에 따라 재구조화 해보고자 한다. 2. 학교폭력 실태에 대한 진단 학교폭력법에 의하면 학교폭력이란 ‘학교 내외에서 학생 간에 발생한 폭행, 협박, 따돌림 등에 의하여 신체·정신, 또는 재산상의 피해를 수반하는 행위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행위를 말한다(법 제2조 1호)’고 정의되어 있다. 동법 시행령에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행위라 함은 상해, 폭행, 감금, 협박, 약취, 유인, 추행, 명예훼손·모욕, 공갈, 재물손괴 및 집단 따돌림 그 밖에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행위를 가하거나, 가하게 한 행위를 말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폭력을 당한 청소년은 학교에 가기를 두려워하거나 가지 않으려 하며, 친구를 대하기 어려워하고 때로는 가출을 하거나 정신적 증세로 인하여 병원이나 상담기관에서 치료를 받는 등 심각한 후유증을 경험하게 된다. 폭력이 피해자 입장에서는 이렇듯 심각한 것이지만, 정작 가해청소년들은 놀이적 측면이 강하다. 가정과 학교에서 소외되거나 억압된 청소년, 분노가 쌓여 있는 청소년 등은 자신의 동료집단으로부터 비행문화를 받아들인 뒤 강력한 놀이집단으로 유착되게 된다. 그들은 이 집단에 소속되지 못했을 때는 누릴 수 없었던 소속감, 권력, 세상에 대한 지배감, 놀이의 쾌감 등을 얻고 즐기게 된다. 학교의 공식적·형식적 동아리로는 충족시킬 수 없는 자기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자신이 속한 생활세계를 지배하며 억압되어 왔던 욕구를 충족시키게 된다. 학생들 스스로가 진단하는 학교폭력 실태를 보면1) 일진회 등 학교폭력은 고등학교보다 중학교에서 훨씬 빈번하게 발생한다. 폭력의 사유나 사례는 매우 다양하며 폭력형태는 점차 잔혹성이 심해지고 있다. 다행히 일진회의 외형상 모습을 동경하여 가입을 희망하는 학생은 많으나 실제 가입은 그렇지 않다. 일진회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구성되며 지역에서 연합을 구성하고 있고, 패싸움을 통해 일진 간의 서열을 정하며 성인조직과 연계하고 있다. 연합을 통해 일일찻집 등을 개최하여 자금을 마련할 정도로 무모하다. 일진회 가입 이후 행동을 거부하거나 탈퇴하려고 할 때 집요한 협박, 구타, 괴롭힘 등이 발생한다. 학교폭력의 발생은 근본적으로 가정과 학교, 사회문제의 복합적 요인에 기인한다. 가정과 학교의 기능적 결손과 학벌·학력위주, 입시위주 교육관 등이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개인적·가정적 요인으로는 학생의 자아통제력 및 타인에 대한 존중감 결여, 대인관계 부족, 가정폭력, 해체가정 증가 등으로 인한 가정에서의 교육기능 약화, 가해학생 학부모의 자녀에 대한 무관심 등을 들 수 있다. 학교적 요인으로는 입시와 출세위주의 교육경쟁으로 인한 학교환경의 피폐화를 들 수 있다. 인권·자율·책임을 중시하는 학교풍토 조성 미흡, 폭력예방 및 폭력 발생 시 대처에 관한 교육 미흡, 생활지도에 전념할 수 없는 교육현장 여건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사회적 요인으로는 물질만능적이고 향락적인 사회분위기, 온라인·오프라인 상의 유해환경 범람, 매스미디어의 폭력성 등의 영향을 들 수 있다. 3. 정부의 학교폭력 대책 현황 정부가 학교폭력 문제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고 대책을 수립해 온 지 10년이 넘었다. 1995년 정부는 학교폭력이 사회문제로 부각됨에 따라 교육부·검찰청·경찰청 등 관계부처별로 ‘학교폭력근절대책’을 수립·시행하였다. 1997년부터는 국무조정실 주관 하에 교육부, 행정자치부, 문화관광부, 정보통신부, 청소년보호위원회, 대검찰청, 경찰청 등 관계부처 합동으로 ‘학교폭력 예방·근절대책’을 추진하여 왔다.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2004. 1. 29.)’제정을 계기로 관계부처 합동으로 추진해 온 ‘학교폭력 예방·근절 관련 업무’는 교육인적자원부로 이양되었다.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과 동법 시행령에 따라 현재 교육부에는 학교폭력대책기획위원회가 구성되어 있고 교육청에는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 전담부서를, 학교에는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를 구성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각급 학교별로 학교폭력 책임교사 선임 및 폭력예방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하도록 되어 있으며 상담실을 구비하도록 되어 있다. 동법은 5년마다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 기본계획’을 수립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교육부는 이에 따라 지난 2월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 5개년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발표하였다. 이 계획은 학교폭력에 대한 각 부처의 관련 정책을 종합한 것으로 대단히 광범위하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 5개년 계획 내용 교육부는 향후 5년 이내(2005∼2009년) 학교폭력의 25% 경감을 목적으로 매년 학교폭력 발생 건수를 5%씩 줄여가겠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학교폭력 대책은 크게 5개 영역에 21개 과제의 세부 추진과제를 다음과 같이 설정하고 있다. (1) 학교폭력 예방·근절을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관련 추진체 간의 연계적 운영 활성화 ▲범정부 차원의 ‘학교폭력대책위원회’ 구성·운영 ▲지역단위 ‘학교폭력근절추진협의체’운영 활성화 ▲시·도교육청별 ‘학교폭력대책전담부서’ 설치·운영 ▲학교별로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구성·운영 ▲경찰 주관 ‘학교폭력대책반’ 운영 ▲지역 사회 내 ‘폭력예방 협력망’ 운영 (2)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교육 및 지원 강화 ▲학교폭력 예방교육 강화 ▲학교폭력 피해 신고 및 상담의 활성화 ▲다양한 전문가를 활용한 예방교육 및 상담의 입체적 지원 ▲학교폭력 예방 시범학교 운영 및 우수 사례 발굴·보급 ▲학교폭력 실태조사 실시 ▲추진상황 평가의 내실화 (3) 교원의 학생생활지도 전문능력 제고 ▲교원 및 예비교원 대상 연수 강화 ▲학교폭력 예방·근절 우수 교원 및 관련 업무 담당자에 대한 우대 (4) 피해자 보호 및 가해자 선도 강화 ▲피해학생 치료·재활 지원 ▲가해학생에 대한 선도 프로그램 운영 다양화 (5) 범정부 차원의 사회적 분위기 조성 ▲학생의 ‘인권·자율·책임 중시 풍토’ 조성 ▲학교·학생 공동 주관 자율활동 활성화 ▲온라인·오프라인 상의 유해환경 집중 모니터링 및 지도·단속 ▲학교 내외의 학생 보호활동 강화 ▲계도·공모전 등 전개 ▲청소년·학생 복지 지원 ▲대안교육 확대·내실화 2) 최근의 정부 대책 교육부가 이상과 같이 학교폭력 기본계획을 입안·발표한 게 지난 2월이지만, 3월 일진회 사건 보도를 계기로 정부 각 부처는 이 외에도 각종 대책을 쏟아 내놓고 있다. 경찰청은 교육부·행자부·법무부 등과 공동으로 매년 3월과 4월, 2개월간 ‘학교폭력 자수 및 피해신고 기간’으로 정하고 관할 경찰서에 신고하도록 하고 있다. 전직 경찰을 학교에 파견하는 ‘스쿨 폴리스 제도’와 CCTV 설치 등을 5월부터 시범운영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법무부는 3월 25일부터 전국 335개 보호관찰소를 통해 일진회 가입 등 학교폭력에 연루된 보호관찰 청소년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야간 외출 제한명령, 집중보호관찰과 함께 심성개선과 정서안정을 위해 병영체험훈련을 실시하기로 발표하였다. 그런가 하면 교육부는 학교폭력을 학교평가에 반영하여 학교폭력 발생시 감점을 하고 선도시에는 가점 부여방식을 도입하겠다고 공표하였으며, 학교폭력을 모범적으로 처리한 학교나 교원에 대해 표창이나 국외연수 등의 인센티브를 제공하기로 했다. 또한 각 지역에 생활지도 담당교사와 경찰, 지역인사 등을 중심으로 초·중·고 지구별 통합협의회 90개를 조직하며 학교폭력 책임교사제를 강화, 운영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상과 같이 교육부를 비롯하여 정부 각 부처가 각종 정책의 시행을 발표하고 있지만 학교폭력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를 갖기가 어렵다. 그것은 과연 정부가 시행하겠다고 발표한 정책들을 얼마나 책임성 있게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10여 년간 정부의 학교폭력에 대한 정책적 대응은 다분히 전시적인 것이었다. 1996년에도 언론에 학교폭력이 집중 보도되면서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각 부처는 대통령의 특별지시에 따라 온갖 대책을 마련하느라 부산스러웠으나 그 이후 흐지부지되었다. 2002년 말에도 이와 비슷한 조치가 있었다. 이번 사태 또한 그러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정부가 학교폭력 대책으로 제시한 정책들은 즉흥적으로 황급하게 내놓는 설익은 대책들이며, 학교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고심 끝에 내놓는 정책들이 아니다. 또한 정책 추진주체의 책임성과 의지가 뒷받침되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4. 학교폭력 해결을 위한 정책의 재구조화 지금까지 논의, 제시된 학교폭력 대책만 해도 너무나 광범위하고 다양하다. 서로 긴밀한 연결 없이 산발적·간헐적으로 수행되는 종합선물 세트 같은 대책으로는 학교폭력을 해결하기 어렵다. 학교폭력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대책들 중 시급성과 중요성을 고려한 ‘선택과 집중’을 통해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정책의 로드맵을 설정하고, 분명하고 단호하게, 또한 지속적으로 정책을 추진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효과적·효율적 학교폭력 대책 설정을 위한 몇 가지 기본 전제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첫째, 가해-피해의 구분 없이 현재 학교폭력에 노출되어 위험에 빠져 있는 청소년을 조기 발견하고 개입·치료·선도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에 정책적 노력을 집중하여야 한다. 둘째, 폭력 청소년에 대한 사후처벌보다는 폭력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는 청소년에 대한 예방, 상담과 교육을 통한 청소년의 성장과 변화를 위해 정책적 노력을 하여야 한다. 셋째, 폭력예방과 폭력발견을 위한 효율적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교사뿐 아니라 학생, 학부모 등 교육관련 인적자원, 지역기관이나 시민단체 등을 충분히 동원하고 활력을 만들어 내는 데 정책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전제 하에 폭력에 노출된 청소년의 입장에서 시급한 것부터 논의하고자 한다. 1) 학교폭력에 대한 긴급 구호대책 가해-피해청소년 양편의 입장에서 학교폭력 대책으로 가장 시급한 것은, 첫째, 학교폭력을 조기에 발견하고 개입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일이다. 학교폭력은 그 실체가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지만 전국의 학교에 존재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교사나 학부모의 눈에는 가해학생들의 조직적 위협이 발견되기 어렵다. 그러나 그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는 학교폭력의 실체가 가장 쉽게, 먼저 발견될 수 있다. 따라서 피해학생, 또는 폭력조직을 인지하고 있는 제3자 청소년이 안심하고 신고할 수 있는 신고 시스템을 구축하여야 한다. 여러 개로 분산되어 있는 신고·상담전화를 통합하여야 하며, 신고자가 안심하고 신고할 수 있도록 신고자의 기밀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학생들의 신고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학교폭력 신고 및 상담전화를 교실이나 학교화장실 등 학생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홍보하여 폭력신고에 대한 인지도를 높여야 한다. 또한 폭력이 발생했을 경우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는 원스톱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현재 폭력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초기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은 물론 감정싸움으로 번져 법정까지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피해신고의 접수와 전문가 그룹의 신속한 개입을 강화하는 대응체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둘째, 학교폭력 피해자에 대한 지원체제를 구축하여야 한다. 학교폭력 피해학생을 위한 상담 및 의료, 법률 등의 지원 시스템이 필요하다. 현재 학교폭력법은 피해학생의 보호를 위해 ①심리상담 및 조언 ②일시보호 ③치료를 위한 요양 ④학급 교체 ⑤전학권고 ⑥그 밖에 피해학생의 보호를 위하여 필요한 조치 등을 규정하고 있다. ①에서 ③까지의 조치를 위해서는 외부시설이나 전문가를 활용할 수밖에 없다. 외부시설이나 전문가를 활용하기 위한 실효성 있는 조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먼저 전문가의 상담과 치료를 위한 요양 등에 필요한 치료비를 확보할 수 있도록 ‘구상권’제도가 필요하다. 즉, 시·도교육청이나 사립학교가 치료비를 먼저 부담하고 추후 가해 학생측에 그 비용을 청구하게 한다. 또한 피해학생의 긴급 피난성 결석에 대해서도 이를 출석일수에 산입시킬 필요가 있다. 현재 학교폭력에 의한 결석일수의 산입은 ‘일시보호’와 ‘치료를 위한 요양’에 국한시키고 있다. 셋째, 학교폭력 가해청소년에 대한 실효성 있는 선도교육 시스템이 강화되어야 한다. 경찰력을 동원한 일진회 조직 와해 등은 폭력에 대한 경각심 등으로 일시적인 효과는 있겠지만, 그에 가담한 청소년들의 변화를 유도하지 못하는 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학교폭력의 가해학생 역시 피해학생과 같이 사회적 도움을 필요로 한다. 폭력이라는 공격적 성향은 오랜 세월 누적된 분노의 표현이다. 폭력을 행사하게 되기까지의 잘못된 성장과정에서 자존감의 상처, 가정과 사회에 대한 건전한 소속감과 애착의 상실 등을 갖고 있으며 피해청소년과 마찬가지로 치료를 필요로 한다. 현행 학교폭력 가해자의 처리규정은 폭력의 경중에 따라 사법적으로 처리되는 경우, 소년원 수감이나 보호관찰소 처우를 받게 되며, 학교 징계처리지침에 따라 학교봉사 및 사회봉사, 출석정지 등의 조치를 받게 된다. 가해학생에 대한 교정이 철저하지 못한 상태에서 동일한 사건이 재발되는 경우가 많다. 보호관찰소 처우를 받는 청소년에 대한 대안교육이 강화되어야 한다. 가해학생에 대한 지도는 일반학생과 달리 상당한 인내심과 전문성, 교육적 노력을 필요로 한다. 가해학생을 지도할 수 있는 전문인력의 양성과 대안교실 운영이 필요하다. 교회, 사찰 등 종교시설과 종교인력을 활용한 대안교실 체제를 적극적으로 검토해 볼 만하다. 교내봉사, 사회봉사 등에 처해지는 가해청소년의 경우 자신뿐 아니라 부모까지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게 하는 조치 등이 필요하다. 2) 학교폭력 예방대책 학교폭력 예방대책은 학교수준에서 학생과 학교를 대상으로 실시함으로써 학교문화의 변화와 학교 내 인간관계의 변화와 성장을 도모하는 데 초점을 둘 수 있다. (1) 학교상담기능의 확충 및 강화 교육부는 초·중등교육법을 개정하여 지역교육청별 2명 이내의 전문순회상담교사를 배치하기로 하고 교육청별로 필요한 인원을 모집하고 있다. 그러나 기본계획에는 상담인력으로 전문순회상담교사 외에 상담자원봉사자, 사회복지사, 보건교사, 학교순회청소년상담사 등의 활용과 아울러 또래상담의 활성화를 내세우고 있다. 학교폭력법이 요구하고 있는 전문상담사의 인적자원에 대해서는 명확한 방침이 없는 상태이다. 교원의 법정정원 확보율이 낮은 상태에서 사실 전문상담교사의 배치를 의무화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문상담순회교사 제도를 활용하는 것도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학생들은 담임교사나 부모에게도 학교폭력 피해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다. 하물며 학교전임교사도 아닌 교육청순회교사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상담을 받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경정신과 의사, 청소년상담사, 사회복지사 등 청소년상담 관련 외부 전문인력을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들은 초·중등교육법 제22조, 동법 시행령 제 42조에 의한 ‘산학겸임교사’로 임명하는 것을 고려해 볼 만하다. (2) 학교교육과정에 반영하는 학교폭력 예방교육 실시 학교폭력법 제13조는 학교폭력 예방교육의 정기적 실시와 전문단체, 전문가에의 위탁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동법 시행령에 따르면 학교폭력 예방교육을 학교장이 학교 실정에 따라 정하도록 되어 있다. 학교폭력 예방교육이 학교장의 재량에 맡겨진 것이다. 학교폭력 예방교육은 학교폭력 발생 후 대처보다 더욱 중요하다. 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아동기 때부터 예방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린 시기부터 긍정적 대인관계, 대인간 갈등해결, 충동조절, 정서조절 등에 관한 교육과 법지식이나 폭력 발생시 행동지침 등에 관한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행동을 습관화시키는 것이 요구된다. 이미 외국에서는 어린 아동기 때부터 여러 가지 예방교육을 학교수업시간에 실시하여 학교폭력에 대한 예방을 해오고 있다. 실제로 많은 개인기관이나 지역사회 기관들이 예방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실시하고 있는데, 가장 효과가 큰 것은 학교에서의 정규교육과정에 예방교육을 포함시켜 실시하는 것이다. 학교교육과정에 반영하는 학교폭력 예방교육은 저학년·고학년, 중학교, 고등학교에 따라 차별화된 내용으로 구성된다. 구체적인 내용은 ①긍정적인 사회기술·감정이입기술·분노조절기술 훈련 ②충동통제 훈련 ③공격에 대한 대안행동 획득 훈련 ④스트레스 관리기술 ⑤사회적인 단서들을 해석하여 의도성을 정확하게 탐지하는 능력 등을 강화하여 사회적 상황에서 타인의 행동적 단서들에 대한 해석과 범주화 훈련 ⑥긍정적인 의사소통기술 훈련 ⑦역할 훈련 ⑧폭력과 관련된 위험에 대한 교육 ⑨또래의 압력에 대한 저항기술 훈련 ⑩문제해결기술 훈련 ⑪협상기술 훈련 ⑫학교폭력에 대한 통계적 정보를 제공하며, 폭력에 대한 잠재적 손익을 토론하게 해 봄으로써 학생들 스스로 싸움의 전조들에 대해 분석해보기 등과 같은 것으로 구성될 수 있다. (3) 학교의 건전문화 조성 학교폭력 예방을 위해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학교의 공동체성을 살리고 학교를 정서적으로 따뜻하고,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학습공간으로 학교를 리모델링하는 것이다. 그 동안 한국의 학교교육은 교육철학이나 가치관이 부재한 상태에서 오로지 입시교육을 목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학교폭력은 학생들의 건강한 문화의 부재, 따뜻한 인간관계의 부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활동욕구와 에너지 분출이 왕성한 청소년기에 입시와 시험, 경쟁 등으로 피폐화된 학교문화를 갖고 있는 상태에서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에너지를 분출시킬 기회를 찾지 못한다. 청소년들의 역동적인 에너지를 분출시킬 수 있는 동아리활동, 문화예술활동, 청소년인권활동, 공동체활동 등 다양한 활동의 제공을 통해 역동적이고 민주적이며 공동체적인 학교문화와 인간관계를 강화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3) 교사,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의 참여와 역할 강화 학교폭력 문제는 학교와 교사의 힘만으로 해결하기에는 한계를 넘었다. 학교폭력은 교육적 해결을 중심으로 한 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 가정, 학교, 지역사회를 구성하는 주체들의 공동 노력이 필요하며 지역사회 단위에서 협의체가 함께 대응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먼저, 교사들의 의식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교사들이 보는 일진회 회원들은 단순히 골치 아픈 문제아 정도이다. 그러나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선배를 배경으로 하여 학교폭력을 행사하는 두렵고 무서운 존재이다. 교사들 역시 학생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학생들이 교사를 신뢰하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다. 또한 일진회 회원들도 골치 아픈 문제아들로 인식하는 단계를 벗어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점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둘째,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개입을 촉진해야 한다. 학교폭력을 가장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는 집단은 학생이다. 학생들이 일진회 등의 폭력문제에 대해 대안적인 시각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실제로 일진회 학생들과 일반 학생들은 서로 대화도 하며 어울릴 수 있는 관계이다. 학생회 등 기타 학생조직을 통한 토론문화 형성, 또래상담, 폭력에 대한 대안적 활동 등을 통하거나 청소년의 참여와 개입을 통해, 스스로 개혁해 나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안이 될 것이다. 실제로 소위 일진회 ‘짱’이었던 학생이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해당학교 일진회를 해체한 사례도 발견되고 있다. 셋째, 학부모는 자녀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자녀와 솔직하게 대화할 수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학부모들이 관심을 갖고 교사와 협력할 때 학교폭력의 사전예방이 가능하다. 학교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학부모들의 자율적 소모임 등이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넷째, 지역사회단체는 학부모, 교사, 전문가, 검·경찰, 학교, 시·군·구청, 교육청 등의 연계를 통해 청소년폭력을 사전에 예방하고 조기 발견하는 지역사회협의체를 구성, 활동을 촉진함으로써 청소년폭력 예방 및 추방을 위한 범시민운동의 중심이 될 수 있다. 학부모, 교사, 지역주민으로 구성하는 자율적인 순찰활동과 폭력 예방교육, 유해환경 정화 및 폭력추방 캠페인 등을 실시할 수 있다.
구자억 |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위원 중국의 학교 현장에 외국어로 수업을 하는 쌍어교육(이중언어교육; bilingual education) 바람이 불고 있다. 중국 사회의 국제화에 따라 외국어 특히 영어의 중요성이 증대하면서 국가 차원에서 외국어를 모국어처럼 말할 수 있는 인재양성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미 상해시·요녕성·산동성·광동성·강소성 등 여러 성에서는 수많은 쌍어교육 실험학교를 두어 운영하고 있다. 국제화가 쌍어교육의 주원인 ‘쌍어’라는 이름을 단 학급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으며, 사회에서는 ‘쌍어’반을 우수반의 대명사로 여기고 있고, 쌍어교육을 실시하는 실험학교를 일류 학교로 여기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조류에 부응하듯 일부 학교에서는 쌍어반 운영을 학생 모집의 방법으로 활용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전국 각지에서 쌍어교육 바람이 일어남에 따라 쌍어교육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뒷받침할 연구기구도 만들어지고 있다. 예를 들면, 교육부 교육과정교재연구소에 설립된 쌍어교육과정교재연구개발 센터와 소주(蘇州)시에서 설립한 쌍어교육연구 센터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전국 각지에서 쌍어교육에 대한 세미나가 개최될 뿐만 아니라, 이제는 쌍어교육이 국가가 수행하는 중점연구과제 속에 포함될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보면 중국에서 쌍어교육은 교육부를 비롯한 국가 차원에서 관심을 갖고 추진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 및 학교에서도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중국에서 이루어지는 쌍어교육은 모국어 이외의 다른 언어를 이용해서 수업을 진행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 주로 이과 과목, 즉 초·중학교의 수학·과학, 고등학교의 물리·화학·생물 등의 과목을 중심으로 쌍어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면 이렇게 중국 내에 쌍어교육 바람이 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중국의 경제 및 사회발전과 관계가 있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면서 외국어 인재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많아졌다. 즉 시장경제가 발전하면서 외국인과 능숙하게 말하고 교류할 수 있는 인재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게 된 것이다. 특히 중국정부의 국제화 노력도 쌍어교육 바람이 불게 하는 한 원인이 되고 있다. 상해시의 경우 WTO 가입에 즈음해서 국제적 대도시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내어놓았다. 이를 위해 상해시는 ‘영어를 강화하고, 쌍어를 시험하며, 다양한 언어를 탐색하자(强化英語, 試驗雙語, 探索多語)’는 외국어교육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쌍어교육 담당 교사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 현재 쌍어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는 몇 가지 방법을 통하여 양성되거나 충원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재직교사에 대한 쌍어교육 연수를 통하여 필요한 인력을 충원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이 방법은 쌍어교육을 실시하는 대다수 지역이나 학교에서 이루어진 보편적인 방법으로서, 영어교사에 대해서는 다른 과목의 전공연수를 실시하고, 비영어 교사에 대해서는 영어연수를 실시하는 것을 말한다. 이보다 한 단계 발전한 것이 여건이 되는 지역이나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방법으로서 교사들을 외국에 연수를 보내어 쌍어교육을 담당할 수 있는 어학능력과 교육방법을 배워오도록 한 것이었다. 이와 함께 외국인교사를 초빙하는 형태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면, 요녕성의 경우는 성 차원에서 외국인교사 500명을 직접 초빙해서 쌍어교육실험학교에 배치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일부 지역에서는 외국인 교사를 채용해서 쌍어교육을 담당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만으로는 급증하는 쌍어교육을 담당할 교사를 확보하기에는 미흡한 형편이다. 당연히 국가 차원에서 쌍어교육을 담당할 교사양성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였다. 요녕성의 경우 성정부 차원에서 수학과 응용수학, 물리, 화학, 생물과학, 컴퓨터과학과 기술 등 5개 전공에 200명의 쌍어교육 전공반을 일반 대학에 설치하여 운영토록 하고 있다. 동시에 본과 학력의 초등학교 쌍어교사를 양성하기 위하여, 3년 과정의 중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학생 500명을 대학에 보내어 쌍어과정을 이수하도록 하고 있다. 한편 강소성의 강소외국어학교는 전국을 대상으로 중학교를 졸업한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모집하여 5년 과정의 쌍어교사를 양성하고 있다. 상해시에 있는 화동사범대학에서는 현재 수학, 지리, 교육 등 20여 전공에 쌍어과가 개설되어 있다. 이렇게 중국에서는 현재 다양한 방법을 통해 쌍어교육을 담당할 교사를 양성하는 데 진력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쌍어교사 양성은 최근 몇 년간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아직 그 실적은 미미한 편이나, 앞으로 지속적으로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쌍어교육 교재는 무엇을 사용하는가? 현재 중국에서 쌍어교육을 위해 사용되는 교재는 외국에서 수입한 교재, 번역교재, 중국 내에서 자체 편찬한 교재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자체 편찬한 교재는 출판사가 직접 편집, 출판한 교재, 특정지역에서 편찬한 교재, 각 학교가 편찬한 교재 등이 있다. 번역교재는 현재 인민교육출판사의 영어판 교재를 중국어로 번역한 것 등이 있다. 그러나, 교육전문가들은 현재 중국 내에서 사용되는 쌍어교재가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 쌍어 교재 종류가 과목이나 학년에 따라서는 그 숫자가 너무 적다는 것이다. 현재 수입, 자체 편찬, 번역한 쌍어 교재는 그 종류로 볼 때 적지 않은 숫자이다. 그러나, 학년이나 과목으로 구분하여 보면 그리 많은 숫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쌍어교육이 많이 실시되는 자연, 과학, 정보기술, 수학 등의 과목에 대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종류의 교재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교재 종류별 사용하는 용어가 통일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배우는 교재들이 다양하다 보니, 학교교육과정상에 제시된 내용의 용어가 교재별로 다르게 표기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교재를 가지고 공부를 했는가에 따라 학문에 대한 이해 및 용어 표기가 달라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셋째, 초·중·고등학교에서 사용되는 쌍어 교재가 대학과의 연계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현재 중국 내에는 북경대학, 청화대학, 난주대학, 화동사범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쌍어교육전공이 개설되어 있다. 앞으로도 더 많은 대학들이 쌍어교육 전공을 개설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런데, 현재 학교현장에서 사용되는 쌍어 교재는 대학과의 연계가 부족하여 교재 따로, 대학의 양성과정 따로인 현상이 발생되고 있는 것이다. 교육방법은 무엇을 사용하고 있는가? 현재 중국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쌍어교육방법은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 침투형이다. 일반 수업시간 중에 필요한 경우 영어를 사용하는 경우이다. 예를 들면, 자주 사용하는 수업용어 혹은 특정한 명사 술어를 학생들에게 영어로 강의하고, 중국어로 보충설명을 하는 방법이다. 둘째, 첨삭형이다. 중국어와 영어 두 가지 언어를 교체해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혹은 중국어의 기초 위에서 영어로 보충해서 수업을 하는 방법이다. 또는 영어를 기초로 해서 수업을 하되 필요한 경우 중국어로 해석과 설명을 보충하는 방법이다. 셋째, 시범형이다. 대부분의 시간은 중국어로 수업을 하고, 일정한 내용을 선택해서, 일정한 시간동안 완전 영어로 수업을 하는 방법이다. 넷째, 선택과목형이다. 일부 과목을 선택과목으로 편성해서 그 과목에 대해서는 영어로 수업을 하는 방법이다. 대학은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현재 중국 내에서 쌍어교육 열풍이 일어나자 대학들도 쌍어교사를 양성하는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대학들이 사회적 요구를 간파하고 그것을 수용한 결과이다. 흑룡강성 가목사대학 교육계는 이미 2000년부터 2년 과정의 유아교육 전공에 쌍어전공학생을 모집하고 있다. 이 전공에서는 쌍어로 교육을 담당할 유치원교사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교육과정을 보면 외국어, 예술, 교육심리 과목 세 영역을 중심으로 그 중 외국어 과목은 영어발음, 회화, 독해, 듣고 말하기, 공공외국어 등의 5개 과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의 이수시간은 651시간으로 전체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또 예술 과목은 무도, 음악원리와 노래, 건반, 성악, 회화 등 5개 과목, 340시간으로 전체 수업시수의 15%를 차지하고 있다. 교육심리 과목은 16개 과목으로 그 속에는 유아쌍어교육원리가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2년간 이수하는 시간의 30%가 외국어로 이루어져 있음으로써 대학을 졸업하고 교육을 담당할 때 외국어로 강의가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실제로 이 대학 2004년 졸업생의 경우 80% 이상이 영어를 사용하여 능숙하게 유아를 대상으로 수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양사범대학 유아와 초등교육계는 4년제로 유치원교사와 초등학교교사를 양성하고 있다. 이 대학도 쌍어교사 양성을 하고 있는데, 그 과정을 보면 2학년까지는 영어(듣기·말하기·쓰기·읽기), 전공영어 등을 개설함으로써 영어의 기초지식습득에 주력하고, 그 이후에는 전공과정 중 일부를 쌍어과정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4년간 지속적으로 영어교육을 받고 있는 셈이 된다. 소주시 쌍어교육 사례 “소주실험초등학교는 쌍어교육을 시범적으로 실시하는 학교이다. 2학년 수학과의 통계수업을 보면, 교사는 기본적으로 유창한 영어로 통계를 강의하고, 학생도 영어를 사용해서 교류를 한다. 2학년 과정의 학생이 기본적으로 모두 영어로 수업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영어 수준은 상당히 높기 때문에 수업을 참관하는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한다.” 소주시는 앞에 설명한 것과 같은 쌍어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를 2007년까지 150개 초·중·고등학교에 보급할 예정이다. 그리고 보급 결과를 참고해서 소주시 전체에 쌍어교육을 보급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서 소주시는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하고 있다. 첫째, 쌍어교육연구센터를 설립하였다. 이 기구에서는 쌍어교육 교재, 교육방법, 교사양성, 쌍어교육 효과 등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수행할 예정이다. 둘째, 교육행정기관 및 초·중·고등학교의 쌍어교육 조직체계를 정비하였다. 이 외에 쌍어교육과정 개발, 교사양성 및 연수제도 수립, 쌍어교육 평가체제 수립 등을 준비하고 있다. 이외에 2004년 12월 중순 소주시는 제1회 쌍어교육제를 개최하였는데, 이 행사는 중국에서 최초로 개최된 쌍어교육축제이다. 소주시는 이 행사를 통하여 시민들의 쌍어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이를 시작으로 쌍어교육을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 이렇게 쌍어교육이 활발하게 일어나자, 이에 대한 찬반양론도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쌍어교육이 현재까지의 소모적인 외국어 교육형식에서 벗어나, 외국어 사용 기회를 확대함으로써 그 구사능력을 배가시킬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반대자는 쌍어교육이 모국어 사용능력을 떨어뜨리는 등 학생들의 모국어 사유능력이 약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반대하는 이들은 외국어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지 쌍어교육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의 쌍어교육은 그 필요성 때문에 더욱 확대되어 실시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특히 중국의 경제발전 및 국제화에 대한 강한 의지는 제2외국어에 대한 중요성을 더 한층 부각시키게 될 것이고, 이것이 사회의 요구와 맞물리면서 쌍어교육이 학교교육의 보편적 형태로 자리잡게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신동호 | 코리아 뉴스와이어 편집장 인간과 유전자가 흡사한 침팬지 침팬지는 나뭇잎이나 나뭇가지를 개미굴에 넣고 한참 동안 기다렸다가 여기에 개미가 까맣게 묻으면 꺼내 핥아먹는 영리한 동물이다. 인간처럼 집단을 이뤄 사냥하는 것은 물론, 사냥한 음식을 나누어 먹을 줄 알고, 돌과 나뭇가지를 도구로 사용한다. 침팬지에게 수화를 가르쳐 주면 수백 단어의 수화도 할 줄 안다. 한국, 일본 등 국제공동연구팀은 2002년 침팬지의 게놈 지도 초안을 발표했다. 침팬지와 사람의 생명체 설계도를 열어보니 유전 정보를 기록한 DNA 염기서열 가운데 98.8%가 같았다. 침팬지와 인간의 염기서열 차이는 1.2%이다. 침팬지 다음으로는 고릴라, 오랑우탄이 인간과 가깝다. 고릴라는 사람과 DNA가 97% 같다. 최근에는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가 너무 흡사해 사람과 같은 호모(Homo)속으로 분류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구에 생명체가 탄생한 35억 년 전을 24시간 전이라고 보면, 사람과 침팬지가 한 몸에서 갈라진 600만 년 전은 3분 전에 불과하다. 이런 이유로 동물의 행동과 진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침팬지를 거울삼아 인간의 본성을 알고자 노력해 왔다. 하지만 초기 침팬지 연구자들은 침팬지의 공격성과 잔혹성에 매우 실망했다. 야생의 침팬지들이 무리지어 다른 집단의 침팬지를 무참히 살해하는 장면이 자주 목격됐다. 침팬지 수컷들은 몇 마리씩 떼 지어 정찰을 하다가 혼자 떨어져 나와, 근처 다른 그룹의 침팬지를 발견하면 기습해 사지를 붙잡고 입으로 물어뜯고 돌로 쳐 죽인다. 침팬지 연구에 평생을 바친 여성 동물행동학자인 제인 구달은 1970년대에 아프리카 탄자니아 곰브 국립공원에서 침팬지 4개 집단 가운데 두 집단이 참혹한 동족상잔과 유아 살해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구달과 곰브 국립공원에서 1974년부터 침팬지를 관찰해 온 하버드 대학 리처드 랭햄 교수는 “수컷이 무방비 상태의 동족을 치명적인 공격으로 죽이는 것은 동물 사회에서 인간과 침팬지만의 유일한 특징”이라고 말한다. 프로 사냥꾼인 사자나 호랑이의 경우도 동족끼리 싸우면 자기 자신도 적지 않은 상처를 입기 때문에 승부가 어느 정도 가려지면 싸움을 중단한다. 반면 사람과 침팬지들은 자신은 다치지 않고 상대방 동족에게 치명상을 가하는 전문 킬러라는 것이다. 동물행동학으로 노벨상을 탄 독일의 콘라드 로렌츠 박사는 1963년 ≪공격성에 대하여≫에서 인간의 행동은 굶주림, 번식, 두려움, 공격성이 결정한다고 썼다. 그는 2차 대전의 대학살도 인간 본성의 표출로 보았다. 그는 “사자나 늑대와 같은 육식동물도 자기 자신의 종족에 대해서는 무기를 쓰지 않도록 억제하는 능력을 진화시켜 온 데 비해 불행하게도 인간은 이런 방향으로 진화하지 못했다.”고 통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침팬지에게는 공격성과 더불어 화해 본성이 있다는 증거가 많이 발견되면서 동물행동학자들이 인간을 보는 눈도 크게 변하고 있다. 침팬지는 쉽게 화를 잘 내며 흥분하고 공격한다. 그런데도 특이한 점은 침팬지들은 안정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점이다. 전 세계 수십 명의 동물행동학자들이 지난 20년 동안의 연구 보고서 100편 이상을 묶어 2001년에 ≪자연의 갈등 해소≫란 책을 펴냈다. 보노보 침팬지는 성행위까지 인간과 흡사 이 책에는 침팬지, 보노보 등 영장류가 싸움 뒤 의식적인 키스, 껴안기, 섹스, 손잡기 등을 통해 화해를 모색하는 것을 밝혀낸 11건의 보고서가 포함돼 있다. 670번에 걸친 ‘짧은꼬리원숭이’의 싸움을 관찰한 결과 싸움 직후 10분 동안 이들 사이의 ‘몸 접촉 행동’은 평소보다 크게 증가했다. 또 격렬하게 싸웠던 암·수 침팬지가 10분 뒤 제3의 장소에서 껴안고, 키스하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했다. 공격적인 침팬지들이 분쟁이 초래한 사회적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화해를 시도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동물행동학자들이 영장류 사회에서 화해와 평화의 모습을 발견한 것은 흔히 피그미 침팬지로도 불리는 보노보에 대한 연구가 1980년대부터 활발해지면서부터이다. 보노보는 침팬지와 더불어 지구상에서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지만, 전쟁을 좋아하는 침팬지와는 달리 평화와 사랑을 즐긴다. 또한 침팬지가 남성 중심 사회를 이루는 데 반해 보노보는 여성 중심 사회를 이뤄 산다. 235종의 영장류 가운데 남·여가 서로 마주 보고 성 행위를 하는 것도 인간과 보노보뿐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인간은 마주 보고 하는 성 행위를 사람과 동물을 구분하는 특징으로 여겨왔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침팬지나 말, 개처럼 하는 후방위를 죄악으로 여겨왔다. 보노보가 사람처럼 마주 보고 성 행위를 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독일 뮌헨동물원의 두 연구자였다. 동물이 마주 보고 성 행위를 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1954년 이 사실을 논문으로 쓰면서도 비전문가는 볼 수 없게 라틴어로 발표했고, 녀석의 존재는 그 후 잊혀졌다. 보노보가 침팬지의 아종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1929년이지만, 본격적인 연구는 1970년대 들어 시작된다. 동물학자들이 아프리카 열대우림에 숨어 살며 몹시 수줍음을 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보노보 집단 옆에서 살면서 하나 둘씩 이들의 생활 모습이 공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보노보는 평화와 자유분방의 상징 미국 에모리 대학 심리학과 프란스 드 왈 교수는 미국 최대의 동물원인 샌디에이고 동물원에서 보노보를 연구해 1997년에 ≪보노보: 잊혀진 원숭이≫란 책을 출판했다. 지난 1982년에 ‘원숭이 정치학’을 통해 침팬지와 인간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남성 중심적 파워 정치학을 그렸던, 침팬지 연구가 드 왈 교수는 “보노보가 좀더 일찍 알려졌다면, 인간의 진화를 재구성하는 데 남성, 전쟁, 사냥, 도구, 파워 정치보다 남녀의 동등한 성 관계, 가족의 기원에 초점을 맞췄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인간이 침팬지류와의 공통의 조상에서 먼저 갈라져 나와 서로 다른 진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 600만 년 전의 일이다. 그 뒤 침팬지류는 다시 침팬지와 보노보, 즉 피그미 침팬지로 갈라졌다. 현재 보노보는 자이르 강변 열대우림에서 1만 마리 이하가 생존하고 있다. 학자들은 보노보가 인간이나 침팬지보다 덜 진화해 이들 3종의 공통 조상의 원형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보노보의 세계는 여성이 중심이고, 섹스를 통해 공격성을 스스로 통제한다. 또 독재자가 아닌 평등주의자이다. 보노보의 사회 생활은 섹스를 빼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미국의 성 해방론자들 그리고 동성애자들이 ‘보노보 웨이(bonobo way)’를 외치며 보노보처럼 자유분방하고 평화적으로 살자는 주장을 할 정도다. 보노보는 남녀는 물론 남-남, 여-여, 어른-청소년 등 어떤 조합으로도 섹스를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한다. 하지만 새끼는 아주 드물게 5∼6년에 한 마리씩만 낳는다. 사람의 특징인 섹스와 생식의 분리가 보노보에게서도 나타난다. 번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섹스는 인간과 보노보만의 두드러진 행동 특징이다. 만일 섹스의 목적이 오로지 번식이라면 왜 사람들은 적게 낳고 더 많은 섹스를 즐기려 하는 것일까? 보노보는 아주 쉽게 성적으로 흥분한다. 먹이를 가져다주면 수컷은 성기가 발기한다. 음식이 오기도 전에 보노보들은 서로 상대방을 섹스에 초대한다. 수컷은 암컷을, 암컷은 수컷이나 암컷을 초대한다. 또 사슴을 잡았거나 익은 무화과가 많은 숲을 발견해도 이들은 5∼10분 동안 섹스를 하고 난 뒤 음식을 먹는다. 음식을 둘러싼 쟁탈전을 피하기 위해 섹스를 통해 먼저 돈독한 분위기를 만들고 사이좋게 나누어 먹는 것이다. 또한 다른 어떤 유인원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보노보의 가장 전형적인 섹스 패턴은 어른 암컷 간의 생식기 문지르기이다. 이때 이들은 오르가슴을 느끼는 것처럼 소리를 지른다. 수컷은 서로 등을 돌려 엉덩이를 붙이고 음낭을 문지른다. 특히 레즈비언 섹스는 암컷의 사회생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보노보 사회의 섹스는 사교적 행위” 보노보나 침팬지의 암컷은 어른이 되면 다른 그룹으로 이주해 새끼를 낳고 동화돼 산다. 암컷의 이주는 근친교배에 의한 열성 유전을 막고, 다양한 유전자가 서로 섞여 그 종이 생존해 나가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보통 다른 집단으로 이주한 암컷 보노보는 나이든 암컷을 한 마리를 골라 성기 문지르기를 하면서 좋은 관계를 맺어 나간다. 상대가 답례를 하면 좋은 관계가 형성되고, 젊은 암컷은 그 집단의 일원으로 동화된다. 동성애가 이주자의 사회 진입을 순조롭게 하는 수단인 것이다. 그리고 새끼를 낳으면 그 젊은 암컷의 지위는 더 확고해지게 된다. 암컷 보노보는 수컷이 음식을 갖고 있으면 접근해서 섹스를 한다. 그리고는 섹스중 음식을 달라고 높은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 빼앗아간다. 보노보 수컷은 암컷이 먼저 음식을 먹도록 양보한다. 보노보 사회의 결속력은 암컷 사이의 결합에서 온다. 암컷들은 어떤 수컷이 특정 암컷을 괴롭히면 뭉쳐서 수컷을 쫓아낸다. 반면 수컷은 암컷에 집단적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없다. 집단 내에서 어린 수컷의 지위도 보통 자기 엄마의 지위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수컷은 평생 엄마와 아주 가깝게 지낸다. 반면 침팬지 사회에서는 사냥을 통해 사회적 결속력이 형성되고, 영토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수컷이 중심이 된다. 또한 보노보 암컷은 사람처럼 언제나 섹스가 가능하다. 따라서 제한된 시간, 즉 발정기에 암컷을 차지하려고 수컷 간에 치열하게 벌어지는 내부 경쟁이 보노보 사회에는 거의 없다. 프란스 드 왈 박사는 “보노보 사회의 섹스는 호색이나 에로틱으로 해석되기 쉽지만, 나는 일상적인 애정 표현과 같은 일종의 사교적 행위라고 표현하고 싶다.”고 말한다. 실제 보노보의 성 행위는 빈번하지만 성기 삽입 시간이 13초에 불과해 사람의 기준에 비하면 매우 짧다. 섹스와 번식의 분리는 긴밀한 남녀 관계와 사회의 기초인 가족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문제는 누가 이를 주도했느냐는 점이다. 흔히 여성은 섹스에 수동적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여성은 수동적이라기보다 조심스러울 뿐이다. 여성이 조심스러운 것은 10개월의 임신과 출산 뒤 보육 등 섹스 이후의 엄청난 투자 시간을 감안할 때 상대방이 능력이 있고, 이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인가를 가리기 때문이다. 침팬지보다 인간과 더 닮은 점이 많은 보노보는 여성이 적극적으로 섹스 능력을 진화시킴으로써 미숙아로 태어난 자녀를 돌보는 데 수컷의 참여를 유도해 냈고, 결국은 이것이 핵가족 형성과 질 높은 자녀 교육, 나아가서는 일부일처제에 기반을 둔 인간의 문명이 탄생하게 됐다는 이론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곽해선ㅣ 경제교육연구소 소장(www.haeson.net) 일본에 발목 잡힌 한국의 무역 우리나라는 일본을 상대로 하는 상품 무역에서 단 한 해도 연간 흑자를 내지 못해, 만년 적자국 신세다. ‘일본을 상대로 상품을 수출하고 받은 대금’에서 ‘일본으로부터 상품을 수입하고 내 준 대금’을 빼면 그 결과가 대일 상품수지(무역수지)가 된다. 대일 상품수지는 수출액보다 수입액이 항상 더 커서 해마다 적자를 보고, 매년 적자폭도 커지고 있다. 1970년대에 우리나라의 대일 무역적자액은 145억 달러. 1980년대에는 353억 달러, 1990년대에는 1001억 달러로 대략 10년에 3배씩 규모가 늘어났다. 2000년대 들어와서도 대일 무역적자는 2000년 114억 달러, 2001년 101억 달러, 2002년 145억 달러, 2003년 190억 달러, 2004년 245억 달러로 매년 연간 적자 신기록을 갈아 치우고 있다. 해마다 적자를 크게 보면서 적자 누적액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한·일 두 나라가 대한민국 수립 후 국교를 재개한 것이 1965년. 그때부터 2003년 말까지 38년간 누적된 대일 무역적자가 무려 2070억 달러다. 달러 당 1000원으로 환산하면 우리 돈으로 200조 원이 넘는다. 2004년만 해도 우리나라의 상품 수출은 약 2542억 달러로 사상 최대치였다. 수입은 약 2245억 달러를 해서 무역수지가 297억5000만 달러 흑자를 냈다. 그런데 대일 적자가 245억 달러다. 한 해 동안 세계를 상대로 상품을 수출해 번 돈이 일본 한 나라하고만 교역해 입은 손실과 맞먹는다. 이쯤 되면 ‘사상 최대의 수출’을 했고 무역흑자를 냈다는 얘기가 무색해진다. 1990년부터 2003년까지 14년간 우리나라가 세계를 상대로 벌어들인 무역흑자 총액이 427억 6300만 달러다. 이 금액은 2003년과 2004년, 단 2년간의 대일 무역적자와 맞먹는다. 14년을 일해서 번 돈을 불과 2년 사이 일본에 넘겨준 셈이다. 대일 무역으로 적자를 크게 보지만 않아도 우리나라 무역수지 흑자는 훨씬 커질 것이다. 그러나 대일 적자를 워낙 크게 내다보니 전체적으로는 아무리 무역흑자를 내더라도 흑자폭이 줄어든다. 미국이나 중국, 동남아, 유럽에 수출해서 버는 돈 중 상당액을 일본에 쏟아 붓는 꼴이다. 일본과의 무역, 왜 늘 적자만 보는가 대일 무역은 왜 늘 적자만 보는가? 우리가 유독 일본에만 수출을 못해서가 아니다. 유난히 일본에서 수입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일본을 상대로 해서는 우리나라도 매년 상당한 규모로 수출하고 있다. 하지만 해마다 수입액이 수출액보다 더 크다. 왜 일본을 상대로 해서는 수출보다 수입을 더 많이 할까? 우리나라 기업들이 완제품 제조에 필요한 부품, 소재, 생산설비 등 중간재를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에 심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경제 개발을 시작하면서 우리나라는 공업 분야 기업들이 원료를 가공해 완제품을 만들어서 수출하는 형태로 경제 성장을 꾀해 왔다. 공업 완제품을 만들어내려면 원재료(원자재) 외에 부품이나 생산설비(자본재) 등 중간재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휴대전화를 만들려면 액정화면, 반도체 칩 등이 필요하고 이들 부품을 만들어내는 기계가 필요하다. 부품이나 생산설비의 상당 부분은 국내에 기술력이 충분하면 만들어 쓸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수입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 기업들이 공업 완제품 생산과 수출을 늘리면 늘릴수록 중간재·자본재 수입도 따라서 늘어나게 되어 있다. 기술력이 미약한 상태에서 경제개발을 시작한 우리나라는 수출용 완제품 생산에 필요한 중간재를 수입에 크게 의지해야 했다. 지금은 기술력 발달로 일부 중간재의 경우 국산품 자급도가 높아졌지만 여전히 수입에 의지하는 것들이 많다. 이런 경위로, 우리나라의 전체 수입 중 40∼50% 가량은 늘 중간재다. 문제는, 그렇게 수입하는 중간재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일본에서 들여온다는 데 있다. 전보다 꾸준히 줄어들고는 있지만 일제 부품·소재 수입은 여전히 우리나라 전체 부품·소재 수입의 30% 가까이 된다. 일본 다음으로 미국, 유럽에서도 많이 들여오지만 수입 중간재는 1990년대 전까지만 해도 절반이 일본산이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나라 기업들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수출용 완제품 생산에 필요한 중간재의 태반을 일본에서 들여오고 있다. 그 결과 대일 무역에서는 수입액이 수출액보다 항상 크다. 또한 완제품 생산에는 중간재가 필수이고 중간재는 주로 일본에서 들여오므로 국내 기업들이 제품 생산과 수출을 늘리려면 언제나 그만큼 더 많은 중간재를 일본에서 들여와야 하는 구조가 생겼다. 그래서 수출이 늘어나면 대일 수입도 함께 자동으로 늘어나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대일 의존형 무역구조가 굳어졌다. 중간재를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는 대일의존형 무역구조 아래서는 기업들이 아무리 수출을 많이 해 무역흑자를 내더라도 그 흑자의 상당 부분을 일본으로부터의 중간재 수입분에 잠식당할 수밖에 없다. 중간재인 부품·소재의 대일 무역수지는 1988년 74억 달러 적자를 기록한 이래 2001년까지 계속 연평균 100억 달러 수준의 적자를 냈다. 2001년 대일 무역적자가 약 101억 달러였으므로 연간 대일 중간재 무역적자가 대일 무역적자의 전체 규모와 비슷했다. 이런 가운데 국내 경기와 대일 무역적자는 기계가 맞물려 작동하듯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국내 경기가 살아나 설비투자와 생산, 수출이 늘면 곧바로 부품·소재의 대일 수입이 늘어난다. 그 결과 대일 무역적자도 함께 늘어 무역수지가 흑자를 내더라도 흑자폭을 줄인다. 거꾸로 국내 경기가 침체하면 같은 이치를 거꾸로 밟아, 대일 무역적자도 줄어든다. 지난 1997년 대일 무역적자는 131억 달러였는데 이것이 1998년에는 46억 300만 달러로 크게 줄었다. 1997년 말 찾아온 경제위기로 국내 기업들이 일시 생산을 크게 줄이면서 대일 부품·자본재 수입을 40% 이상 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위기를 넘긴 뒤 수출이 활발해지자 대일 무역적자는 다시 1999년 82억 8000만 달러, 2000년 113억 6192만 달러로 크게 늘었다. 2001년에도 대일 무역적자는 101억 2760만 달러로 전년보다 다소 줄었다. 이 해에도 국내 경기가 침체해 기업들이 설비투자를 줄이면서 대일 부품, 소재 수입을 줄였기 때문이다. 불균형 무역·산업구조의 고착 무역구조는 산업구조를 반영한다. 중간재 수입을 일본에 의지하는 양상으로 무역의 불균형 구조가 굳어지면서 우리나라에는 산업도 일본 산업에 일방적으로 의지하는 불균형 구조가 함께 고착됐다. 무역과 산업의 극심한 대일 의존은 지난 수십 년간 거의 그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매년 총수입의 1/5 정도를 일본에 의존하고, 농수산물 등을 뺀 중간재나 최종 완성재의 절반은 일제 수입품으로 충당한다. 우리의 주력 수출업종인 전기·전자·반도체 같은 IT 분야, 그리고 산업기계·철강·금속 분야도 일제 수입 중간재를 특히 많이 쓴다. 우리나라의 대표 수출 상품인 휴대전화만 해도 그렇다. 휴대전화에 들어가는 국산 부품은 전체의 40% 정도에 불과하다. 반도체와 LCD 같은 핵심 부품은 30%를 일제로 수입한다. 이렇게 만든 휴대전화를 수출해 100달러를 벌면 그 중 30달러는 일본 차지다. 반도체도 마찬가지다. 2003년 반도체의 대일 수출은 약 188억 달러, 반도체 부품의 대일 수입은 207억 달러로 20억 달러 적자다. 대일 무역적자 185억 달러 중 20억 달러가 반도체 부문 적자다. 수입 반도체 부품 중 상당수는 TV나 휴대전화, 기타 정보기기에 탑재되어 다시 수출 길에 오르지만 수출입 통계만 놓고 보면 반도체가 대일 무역적자에서는 큰 요인이 되어 있다. 실제로 최근 대일 무역적자의 70∼80% 가량은 반도체 등 IT 분야를 중심으로 한 부품·소재 부문에서 발생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수출하는 상품의 70% 정도는 철강·반도체·전기전자·제품·기계류 등 중화학공업 제품이다. 그러나 주력 수출품목인 전자·철강·화학제품 제조 분야에서 대일 수입의존도가 모두 30%를 넘는다. 일본은 주요 수출품이 승용차·반도체·컴퓨터·산업용 로봇·전자복사기 등 기술 수준과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에 모여 있다. 반면 우리나라 수출품은 반도체를 제하고는 기술과 부가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은 선박·직물·철강 등에 모여 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수출이 늘면 대일 수입도 그만큼 거의 자동으로 늘어난다. 수출을 많이 할수록 대일 무역적자도 커진다. 일본이 부품 수출을 중단하기라도 한다면 그 즉시 우리 수출기업은 생산을 멈춰야 한다. 우리 경제를 이끄는 견인차가 수출인데, 우리의 수출은 일본 땅에 굵은 끈으로 묶여 있다. 대일 의존에서 벗어날 길은 우리나라의 무역이 일본의 손에 묶인 끈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기업들이 중간재·자본재 수입처를 다른 나라로 돌리면 되지만 이 일은 개별 기업들이 당장 해내기 쉽지 않다. 좋은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려면 중간재도 좋아야 하는데 일제가 품질이 좋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랫동안 수입 거래를 했던 까닭에 일제품에 의존하는 구조가 굳어지기도 했다. 워낙 대일 의존구조가 굳어지다 보니 요즘엔 황당하게도 ‘대일의존에서 벗어나려 하기보다, 질 좋은 일제 중간재 덕에 우리 수출이 잘 되는 걸 일본에 감사하고 일제품을 더 가져다 쓸 일(?)’이라는 주장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그러나 대일무역 불균형은 한·일간 기술력 차이가 주된 원인이므로 우리가 기술력을 키우면 해결될 수 있다. 일본은 대부분의 부품·소재를 자국에서 생산하는 이른바 풀 세트(full-set)형 산업구조를 갖추고 있다. 부품·소재 생산 기술을 기반으로 두고 있으니 일본은 기술력이 좋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완성품 위주 수출 전략을 채택해 부품·소재의 수입 비중이 높다 보니 부품·소재 기술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최근 우리나라 부품·소재 기업의 설계 기술, 신제품 개발 능력, 신기술 응용 능력은 선진국의 70% 수준에도 못 미치고 생산기술 수준도 선진국의 80% 미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핵심 부품·소재를 주로 수입에 의존하다보니 선진 기업들과 구별되는 제품을 개발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부가가치도 크게 낮다. 그 결과 90년대 이후 우리나라는 수출이 크게 늘어나기는 했으나 수출단가는 일본에 비해 크게 떨어진 채 물량을 늘리는 양 위주 수출이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우리나라에는 전자부품용 소재만 전문으로 생산하는 기업이나 소재 관련 전문 연구소가 없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50인 이하 영세기업의 비중이 기계, 자동차, 전자 등을 중심으로 전체의 89.5%를 차지한다. 외국에서는 부품·소재 시장에서 대기업의 지배력이 높아지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거꾸로 가고 있어서 기술 수준 개선이 요원하다. 기업 수나 종사 인구로 보면 국내 부품·소재 산업은 비중이 작지 않다. 2002년 4월 현재 약 9만 8000개의 제조업체 중 전기·전자·기계 분야를 위주로 3만 6000여 개 업체에서 약 123만 명이 일하고 있다. 사업체 수로는 전체의 36.7%, 종사자 수로는 전체의 46.4%로, 제조업 총생산액의 절반(48.2%)을 생산해낸다. 그러나 기술 수준이 낮기 때문에 부가가치를 높이지 못하고 기술의 해외 의존을 계속하는 것이다. 일본에 대한 기술의존에서 벗어나려면 국내 기업들이 연구개발 투자를 많이 해서 자체 기술력을 키우고 일본을 뛰어넘는 원천 기술을 확보해 수출용 완제품 생산에 필요한 핵심 부품·소재와 기계류, 생산설비를 국산 기술로 마련해야 한다. 정부도 우리가 일본에 의지하는 부품을 국산화할 수 있도록 대체산업, 부품·소재 산업 육성에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