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검색결과 - 전체기사 중 79,293건의 기사가 검색되었습니다.
상세검색이창희 | 서울 강현중 교사 “학교가 다 같은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군요. 여러 학교를 방문해 봤지만, 교문에 들어서는 순간 그 학교의 분위기와 수준이 느껴지더군요. 여러 교장선생님과 대화를 나누어본 경험에 비춰볼 때, 역시 학교교육의 질은 교장선생님의 질을 넘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 저의 결론이었습니다.” 학교운영위원회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어느 학부모의 이야기이다. 단순히 학부모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넘길 수도 있겠지만, 학교교육에서 교장의 중요성을 몇 번씩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는 것을 대변해 주는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싶다. 실제로 학교교육에서 교장의 역할에 따라 교육의 질이 결정된다는 데에는 교사, 학부모 모두 이견이 없다. 이렇듯 중요한 위치가 바로 교장인데, 교육부총리는 좀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것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 과정에서 “교장 임용과 관련하여 공모형 초빙 교장제를 확대 실시하고, 교사 자격이 없어도 교장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는 이유는 “학교경영에도 경쟁의 원리를 도입해서 다른 학교와 차별된 교육을 실시할 수 있도록 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미 흘러나온 이야기 중에 “교장 자격이 없는 교사가 교장이 될 수 있도록 한다.”는 공모형 초빙 교장제 도입 방안이 있었다. 교장에 대한 전문성이 없는 사람이 교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출신이 교사라고 해도 현실성이 떨어지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데, 한 발 더 나아가 학교경영에 경쟁원리 도입의 필요성을 부각시켜 교장 자격이 없음은 물론, 교사 자격조차 없는 일반인도 교장이 될 수 있도록 한다는 발상은 학교경영의 전문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로밖에 볼 수 없다. 만일, 전문성이 전혀 없는 인사를 교장으로 임용하게 된다면, 학교교육은 더 이상 전문가에 의해 이루어지는 효과적인 교육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자칫 어렵게 이루어 놓은 현재의 학교교육이 도리어 퇴보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도입 가능성의 취지에 대한 논리에 있다. 교장을 할 수 있는 인사를 교사 자격이 없는 일반인에게까지 문호를 개방해야만이 학교경영에서 경쟁이 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논리, 그렇게 해야만 다른 학교와 차별화된 교육을 실시하여 경쟁을 할 수 있다는 논리가 더 큰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학교는 이윤을 창출해야 하는 일반 사기업체처럼 지나친 경쟁을 필요로 하는 곳이 아니다. 학생을 교육한다는 독특한 목표를 두고 있는 곳이다. 현재처럼 교사로부터 시작하여 학교경영 기법을 하나씩 터득하면서 연륜을 쌓은 교육전문가가 교장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도리어 지역적 특성이나 당해 학교의 실정에 맞게 차별화된 교육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있긴 하다. 완전한 자율성의 부여이다. 즉, 현재와 같은 구조에서 임용된 학교장에게 자율성을 부여하되, 책무성의 임무도 함께 부여해 준다면 충분히 효과적인 교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현행제도를 어떻게 개선하여 효과적으로 운영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현재의 학교장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방안을 내놓자는 것이다. 시·도교육감의 입후보 자격에도 ‘교육경력 또는 교육공무원으로서의 교육행정 경력이 5년 이상 있거나 양 경력을 합하여 5년 이상 있는 자’로 제한하여, 교육경력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 그만큼 교육은 여타의 분야와 달리 경력과 전문성을 고루 갖출 필요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변호사 자격 없는 사람도 특별연수과정을 통해 변호사가 될 수 있도록 한다면 법조계의 반응이 어떨까. 법률적인 식견이 없기 때문에 절대 안 된다고, 아마도 난리가 날 것이다. 어떠한 논리로 접근해도 설명이 되지 않는 언어도단이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맥락으로 볼 때, 교장은 오랫동안 교육계에 종사하여 전문적인 식견을 갖춘 인사가 임용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교사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교장의 문호를 개방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고, 설명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단지 경쟁의 원리를 도입하겠다는 것이 이유라면 설득력은 더 떨어진다. 이미 오래전에 교사 자격 없는 일반직 출신들이 연수를 거쳐 교장으로 임용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경우가 사라졌다. 부연 설명이 없어도 그 제도가 왜 사라졌는지 금세 이해가 될 것이다. 교원은 전문직이다. 전문적인 자질과 식견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교장을 한다는 것은 날이 갈수록 세분화되어 전문성을 요구하는 현대 사회의 특성에 반하는 것이다. 밀어 붙이기 식으로 이루어지는 개혁은 절대로 개혁이라고 할 수 없다. 교장 임용을 위해 좀더 전문성을 검증하여 임용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지는 시점에서 무자격자의 교장 임용 가능성은 철회되어야 옳다. 아니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유는 확실하다. 교장은 아무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변중희 | 서울 보인중 교사 어느새 봄이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다. 황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가 다르게 빛을 내는 산수유 꽃! 이사하고 처음 맞이한 봄을 그 꽃으로 열었다. 솜털처럼 작고 족두리모양으로 퍼진 모습과 보드라운 꽃술이 섬세한 수채화의 번짐처럼 나름의 그림자를 갖고 있어 귀티까지 난다. 먼발치에서 칙칙한 노란 빛이 때도 맞추지 못 한다고 무시했던 눈길이 부끄럽다. 마음이 간사해서인지 개나리 빛깔은 너무 노래서 가볍고, 목련은 큰 송이가 주체할 수 없어 부담되고, 벚꽃은 불꽃놀이 같아서 허망하고, 동백꽃은 너무 처연하고, 매화는 서민적이지 않아 보여 먼발치로 맴돈다. 봄철에 먹을거리로 제일 욕심나는 것은 두릅나물이다. 쌉쌀한 맛에 도톰하여 씹히는 느낌이 일품이다. 그러다가도 시간이 흘러 더 자라면 억세고 온통 가시로 덮여버려 그 맛을 낼 때와는 딴판이다. 그 외에도 나른한 봄에 입맛을 돋우어주는 것은 돌나물 물김치, 산미나리 초장 무침, 달래 무침, 쑥국 등이 있다. 그러나 여름으로 접어들면 이것들 역시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된다. 대신 또 다른 먹을거리가 나타난다. 먹는 것뿐 아니라 약재로 쓰이는 것도 그렇다. 어떤 것은 나무껍질이나 뿌리가 소용되는가 하면, 열매나 말린 잎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또한 부위에 따라, 증상에 따라 각기 그 효능이 다르다. 신입생의 부모는 누구나 첫 등교를 불안과 걱정으로 맞이하게 된다. 초등학교든 중·고등학교든 마찬가지다. 맨 처음에는 ‘공부는 열심히 할까?’ ‘아이들에게 따돌림 당하지는 않을까?’ ‘잘 지도하시는 담임선생님을 만날까?’ 등의 걱정과 함께 조급한 마음을 갖게 마련이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성적은 나오겠지.’ 기대를 求鳴?시험 결과가 안 좋게 나오면 세상이 무너질 듯 와글와글 시끄럽다. 생각과 현실의 차이이리라. 자기 자식과 경쟁 관계에 있는 아이들의 현상을 학과시험만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럴수록 교육 본질에 대한 부모들의 태도에 따라 성장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 20여 년 전, 성적이 전교 바닥인 아이가 있었다. 실업계 고교도 미달인 곳이나 지원이 가능할까 그 이상은 무리인 학생이었다. 그런데 그 부모님은 한사코 인문계 고교에 입학시키겠다고 우겨 쉽게 원서를 쓰지 못했다. 결국 재수하여 특지 인문계 고교(서울 외곽이라 특별전형으로 학생을 모집하는 인문계 학교)에 들어갔다. 몇 년 후 어엿이 서울의 H 대학교에 진학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의 열의와 끈기가 이뤄낸 결과였다. 중학교 때는 간단한 방정식조차 풀지 못하던 실력이었지만 뒤늦게 철이 들어 열심히 노력한 결과였다. 어쩌면 그 아이는 늦게 피는 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부모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뒷바라지한 공이 크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언제 어디서나 격려와 지지와 사랑이라는 순수의 믿음으로 보살펴 주는 후원자이어야 한다. 부모가 믿어주지 않는 아이를 어떤 사람이 믿어주랴? 현재 전교에서 수위(首位)를 달리는 중학교 3학년인 아이가 있다. 1학년부터 ‘양’아니면 ‘가’를 독차지하는 실력인데도 그 아이의 부모는 늘 ‘네겐 잠재력이 있어, 잘할 수 있어!’라고 격려하며 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담임선생님이 한심하다는 듯 눈치를 주고 진한 충고도 주었지만 ‘우리 아이는 단지 공부에 대한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며 믿어준 결과, 아이가 결심을 굳히고 노력하여 부모에게 큰 기쁨을 드리고 있다. 마치 아이는 물 만난 고기처럼 승승장구하고, 부모는 가뭄 끝에 단비를 맞는 행복을 느끼고 있다. 어젠 퇴근길에 한 졸업생 어머니를 만났다. 그 분은 아이가 중3때 몇 십 년 동안 몸담았던 교직도 사양하고 뒷바라지 했었다. 아이가 집중 괴롭힘으로 학과 공부에는 마음이 멀고 아주 우울한 중학시절을 보냈다는 얘기, 대학을 마치고 공군에 입대하여 지금은 직업군인의 길을 걷고 있는데 며칠 전에 집에 왔다갔다는 얘기를 들려주셨다. “우리 환이 많이 어른 되었죠. 사람 되었어요!”라며 마음이 놓인단다. 스스로 선 모습이 대견하다는 생각에 함께 기뻐했다. 모르는 사람들은 ‘뭐 대단한 일이라고 겨우 그 정도 가지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엄마로서는 아이 스스로 역경을 헤치고 우뚝 선 기분은 탯줄이 잘려지고 개체로의 아이가 울음을 터트릴 때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저 녀석 저래가지고 사람 구실 할까?’ 걱정했는데 사십이 다 되어 만나보면 사회인으로서의 몫을 우리보다 더 잘하고 있는 것을 본다. 성경에도 있지 않은가. 기쁠 때가 있으면 슬플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면 부술 때가 있다고‥‥‥. 부모들의 욕심이 앞서서 시간이 부족하다는 조급증에 시달리게 되고 아이들을 몰아치게 된다. 그러면 아이에 대한 긍정적 지지가 아주 미욱해지게 마련이다. 혹 내 아이가 다른 아이에 비해 조금 뒤처진다 해도 인내를 갖고 지켜봐 주어야 한다. 삶의 성공은 얼마만큼 인내하는가가 결정짓는 것이 아닐까? 오랜 기간 교단에 선 교사로서 생각하면 젊어서 기다려주지 못했던 후회가 많다. 아이들에게 침묵과 지지로 그 자리에서 기다려주기만 했어도 힘을 주고, 기를 돋우며 미래를 보장할 수 있었을 텐데, 다그치고 몰아붙이며 낙인찍힌 아이를 만든 것은 아닌지, 지난 시간만큼 아쉬움이 커진다. 그래서 철들자 망령이라고 했던가?
윤재열 | 경기 수원 장안고 교사·수필가 새학기가 시작되면, 나는 아이들에게 제일 먼저 김영랑의 이라는 시를 읽어준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영랑의 모든 시가 그렇듯이 이 시도 섬세하고 영롱한 음악적 서정의 표현이 돋보여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있다. 나도 이 시를 좋아한다. 세련된 우리말 구사와 은근하고 부드러운 정서 등의 조화가 마음에 와 닿는다. 특히 이 시의 마지막 구절 ‘찬란한 슬픔의 봄’은 되뇌면 되뇔수록 깊은 영혼을 울리는 매력이 있다. 나는 올해도 아이들에게 시를 읽어주고 ‘모란’은 여러 가지 꽃 중의 하나이면서 지상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 꽃이라는 설명을 했다. ‘봄’은 황량한 겨울의 불모성을 극복하고 대지에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북돋우는 계절의 신비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시를 읊조리면서 가슴 속에 소망과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 그러나 올 봄은 소망도 희망도 없는 슬픈 날이 시작되었다. 개학과 함께 언론에서 학교폭력에 대한 기사로 도배를 했다. 현직 교사가 일진회라는 조직이 있다고 폭로하면서 전국이 들끓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의 유형이 제시되고, 피해에 대한 구체적 사례도 속출했다. 이에 편승해 언론에서는 학생들이 술집에서 공개 성행위를 즐기는 성적 일탈까지 하고 있다며 선정적인 보도까지 했다. 참으로 슬픈 현실이었다. 무엇보다도 학교에 폭력 조직이 있다는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학교에 어두운 폭력 조직이 있다는 현실보다 우리를 더 슬프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교육인적자원부가 학교폭력 신고 실적이 우수한 학교장과 교사에게 인센티브를 주겠다는 발표를 했다. 학교폭력 실적이 뭐 그리 칭찬할 일이라고 상을 준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몇 년 전에도 ‘촌지를 받은 교사들이 자진 신고를 하면 인센티브를 주겠다. 촌지 신고 센터를 설치한다.’며 부산을 떤 적이 있다. 그때 이 일이 결국 전국에 있는 교사가 모두 촌지를 받고 있는 것처럼 떠드는 꼴이 되었는데, 지금 학교폭력 신고 센터 개설도 전국에 있는 학교가 모두 폭력 조직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이것뿐이 아니다. 작년에 교육부가 사교육을 잡고, 공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EBS 교육방송 제도를 도입한다고 했을 때 학교에 있는 교사들은 황당했다. 공교육을 정상화시키겠다면 당연히 학교교육에 대한 대책이 수립되어야 하는데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사교육을 잠재우기 위한 차선책이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올해는 학교교육이 중심이 되고, EBS 수능 강의는 보조 역할만 할 수 있는 정책으로 결정되기를 바랐건만 정반대로 가고 있다. 답답하고 슬픈 현실은 언론도 거들고 있다. 신문에서 어느 교수가 쓴 칼럼을 읽었다. ‘강당에서는 조회 대신 미팅이 있었고, 학생들은 제멋대로 앉아 심지어 다리를 꼬고 거의 눕다시피 의자에 앉아 그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반장도, 학년 간 서열도, 줄서기도, 체벌도 없는 곳. 아, 인간집단이 제식 훈련 없이도 이렇게 자유와 질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구나!’ 위에 옮긴 글은 대학 교수가 유학 시절 미국의 학교에서 보았던 풍경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글에서 교수는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글을 읽는 나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부럽다. 미국이라는 사회가 부럽고 자유와 질서를 누리는 학교의 모습이 너무나 부러웠다. 우리의 학교 모습은 언제나 저렇게 변할 수가 있을까? 자괴감이 앞서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이런 자괴감은 금방 분노로 변했다. 교수는 미국의 모습에 이어 우리나라의 상황을 ‘여전히 학교에서는 일제 잔재인 애국조회, 사랑의 매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 서열화, 복장 및 머리에 가해지는 규격화된 신체적 억압 등을 비롯한 크고 작은 인권피해 및 비리가 매일 일어난다.’라고 적고 있다. 교수가 앞에 표현한 한국의 상황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다 바른 상황의 표현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우리 학교의 모습도 아름다운 면이 많다. 우리는 아직 교실에 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자기 욕심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때로는 나의 권리를 포기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우리의 교실에서 볼 수 있는 익숙한 모습이다.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얽매여 학교의 기능과 역할을 왜곡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학교의 모습은 탓잡기 시작하면 한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잘 보려고 하면 학교만큼 아름다운 곳이 없다. 올해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특수반이 만들어졌다. 이를 두고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은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런데 막상 개학이 되니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누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아이들은 서로 도와주고 있다. 특수반 아이들이 몸이 좀 불편한 것 외에는 학교생활을 하는 데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인다. 오히려 서로가 즐겁게 뛰어노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마음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사실 난 이 뜨거운 광경을 보고 싶어서 요즘 쉬는 시간이면 슬그머니 교무실에서 나와 복도를 서성거린다. 학기 초라 어수선한 가운데, 학교는 다시 교원평가제가 도입된다고 술렁거리고 있다. 교원평가제를 하지 말자는 주장은 하고 싶지 않다. 교육의 핵심이 되는 교원평가야말로 교육의 질을 높이는 지름길이다. 문제는 방법이다. 1년에 한 번 수업공개를 통해서 교사들을 평가하겠다는 발상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1년에 한 차례 하는 반짝 수업 연구로 교사를 평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영랑은 가장 사랑하는 꽃의 소멸은 곧 모든 보람이 무너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영랑은 또다시 봄을 기다린다. 물론 영랑은 다시 돌아오는 봄도 지나가는 것이며, 새로 피어날 모란도 곧 떨어진다는 것을 안다. 그러기에 그 봄은 슬픔의 봄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아름다움을 삶의 가장 높은 가치로 삼는 그에게 봄은 삶의 유일한 보람이다. 앞에서 돌이켜본 것처럼, 최근 교직 생활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나는 늘 3월이면 설레는 마음을 버릴 수 없다. 모란이 지듯이, 나의 기대와 희망이 곧 시들해지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들과 함께 하는 삶은 나에게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랑이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린 것처럼, 나는 오늘도 나를 향한 선한 눈망울을 보면서, 찬란한 슬픔의 봄을 보낸다.
안병우 | 한신대 교수·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공동운영위원장 머리말 한국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한 일본의 후소샤 발행 역사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여, 충격과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2001년에 이어 두 번째 검정을 통과한 이 교과서는 이미 당시에 위험한 교과서로 판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4년 동안 이 교과서를 만든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새역모)은 조직을 개편하고 채택 환경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조성하면서 올해에 대비해 왔다. 그리고 에히메 현과 도쿄의 중고일관교(中高一貫校)에서 채택되는 성과도 거두었다. 검정 결과 밝혀진 개정판 후소샤 교과서의 내용은 이전보다 교묘하게 개악되었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이다. 그 내용은 이미 언론과 학계의 발표 등을 통해 상세히 밝혀졌다. 간단히 말한다면 이 교과서는 두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하나는 한국사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를 보는 관점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이 두 측면에서 후소샤 교과서를 살펴보려고 한다. 1. 후소샤 교과서는 한국사를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가 1) 한반도 위협론 새역모의 한국사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읽을거리 칼럼으로 제시된 ‘조선반도와 일본’이다. 근대사의 전개과정에서 일본이 왜 한국을 침략하고 지배했는지, 그리고 한국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칼럼은 이번 개정판에 새로 추가된 것이다. 이 칼럼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은 ‘일본의 독립과 조선반도’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아시아의 지도를 보자. 일본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조금 떨어져, 바다에 떠있는 섬나라다. 이 일본을 향해서 대륙에서부터 팔처럼 조선반도가 돌출해 있다. 양국의 이와 같은 지리적 관계는 오랜 역사 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래로 조선반도로부터 중국 등의 선진 문명이 일본에 전해졌다. 그러나 동시에 조선반도에 일본의 안전을 위협하는 세력이 미친 적도 있다. 일본은 중국과 조선반도의 동향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본이 고대 율령국가를 형성한 것도 동아시아 속에서 자립을 지향했던 것이다. 가마쿠라 시대에 원구(元寇)의 거점이 되었던 것도 조선반도였다. 반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반도에 군대를 보낸 일도 있다. 에도시대에는 쓰시마번을 통하여 도쿠가와막부와 조선 사이에 좋은 관계가 계속되었다(검정신청본, 163쪽. 이하 쪽수는 모두 검정신청본). 지정학적으로 한반도가 유라시아 대륙의 끝부분에서 일본을 향해 팔처럼 돌출해 있고, 이 반도를 통해 중국 등의 선진 문명이 일본에 전래되기도 했지만, 몽골처럼 일본에 위협을 가한 세력이 한반도를 지배한 적도 있다는 것이다. 도요토미처럼 명을 정벌하기 위해 한반도를 침략한 사실도 지적했다. 요컨대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대륙과 일본 사이의 통로였고, 대륙 세력이나 일본의 침략 대상이었으며, 대륙세력이 한반도를 지배하면 일본의 안전이 위협받았다는 초역사적인 지정학적 역사결정론에 입각하여 한반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한 한반도관은 이어지는 칼럼에서 노골적으로 표현되었다. 검정신청본에서는 ‘조선의 근대화를 도운 일본’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었는데, 검정과정에서 ‘조선의 근대화와 일본’으로 수정된 두 번째 부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메이지유신 정부는 정권 수립 후 바로 조선과 국교를 맺으려 했다. 그러나 중국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던 조선은 외교관계 맺는 것을 거절했다. 조선을 개국시킨 1876(明治 9)년의 일조수호조규는 그 제1조에서 ‘조선은 자주국’이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청의 영향에서 조선을 분리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청 이상으로 무서운 대국은 부동항을 찾아 동아시아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1891년에 시베리아철도 건설에 착수하여, 그 위협은 바짝 다가왔다. 조선반도가 동방으로 영토를 계속 확대하고 있는 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가면 일본을 공격하는 아주 절호의 기지가 되어, 섬나라 일본은 자국의 방위가 곤란하게 된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일본은 개국 후 근대화를 시작한 조선의 군제개혁을 원조했다. 조선에서도 시찰단이 와서 메이지유신의 성과를 배우려고 했다. 조선이 다른 나라에 침범당하지 않는 국가가 되는 것은 일본의 안전보장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했다(163쪽). 강화도조약은 청에 복속되어 있던 조선을 분리 독립시킨 것이라고 평가하고, 러시아의 위협을 강조하는 한편 조선의 군제개혁이라는 근대화를 일본이 원조했다고 서술하였다. 당시 조선은 국가적 자주와 독립을 추구하고 있어서 청에 조공을 바치던 이전의 상황과는 매우 달랐는데, 이러한 점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강화도조약을 통해 마치 일본이 조선을 해방시킨 것처럼 서술한 것이다. 이 교과서는 다른 곳에서도 갑신정변 등을 통해 근대화를 지원했다고 서술하였으나, 일본의 지원이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은 은폐하고 있다. 또한 현실적으로 나타나지도 않은 러시아의 위협을 내세워 러일전쟁과 한반도 병탄을 합리화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은 ‘조선을 둘러싼 일청의 대립’이다. 여기서는 오랜 동안 청에 조공을 해 온 유구(琉球)가 1879년 일본의 영토로 편입되고, 청불전쟁에 패하여 베트남이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가자 동아시아 질서 붕괴의 위기를 느낀 “청이 최후의 유력한 조공국인 조선만은 잃지 않으려고 해서, 일본을 적으로 간주하게 되었으므로, 일본이 일청·일러 두 전쟁을 하게 되는 배경에는 이와 같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가 있었다.”고 하였다. 일본이 청과 러시아와 전쟁을 하게 된 까닭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 야욕 때문이 아니라, 부동항을 찾아 한반도에 진출할지 모르는 러시아의 위협과 조공국을 놓지 않으려는 청의 욕심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결코 한반도를 침략하거나 지배할 적극적 의사가 없었는데, 청과 러시아가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셈이다. 이렇게 지정학적 결정론에 입각하여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고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는 것이 새역모 교과서가 한국사를 바라보는 가장 큰 특징이다. 2) 식민지 지배의 미화 후소샤 교과서는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고, 지배로 인해 고통받고 저항했던 사람들의 모습은 철저히 무시하였다. 병합 후에 조선총독부가 철도와 관개시설을 정비하고 토지조사사업을 개시하여 조선의 근대화에 노력했다고 서술했다가 검정 과정에서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이러한 일들을 한 것으로 수정 당하였다. 그러나 ‘팔전댐’을 만들어 대만 남부의 가남평야를 개발한 사실은 핫타 요이치의 인물 칼럼에서 상세히 소개하였다. 식민지에서 일본이 벌인 경제활동이 일차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필요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한국을 근대화시켰다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의 입장에서 식민지 개발을 미화하는 입장을 새역모는 가지고 있다. 또 일제의 지배에 대항한 한국인의 저항을 무시하고 있다. 3·1운동 이후 한국인의 저항에 관해 전혀 서술하지 않고,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실시된 동원정책에 저항했던 한국인의 움직임을 이전에는 조금이나마 언급했지만 이번에는 아예 빼버렸다. 더구나 전시동원정책에 관한 서술에서 강제성을 약화시켜 마치 한국인이 일본의 침략정책에 호응한 것처럼 묘사하였다.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는 서술은 검정과정에서 약간 수정되었지만, 새역모의 역사관이 바뀌지는 않았다. 한국만이 아니라 동남아시아 각국의 식민지배 과정에서도 일본어교육 및 천황숭배와 신사참배에 대한 현지인의 반발, 베트남인 아사 사건처럼 불리한 사실은 기술하지 않고, 패전 후의 배상과 대동아공영권론에 대한 비판도 싣지 않았다. 마치 식민지 인민들이 식민지배에 순응한 것처럼 서술한 것이다. 3) 타율성과 종속성의 강조 후소샤 교과서는 한국사의 타율성과 종속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서술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고조선의 부정, 대방군의 위치, 임나일본부설에서 볼 수 있다. 후소샤 교과서에 고조선은 없다. 한국사 전체의 발전과정을 볼 수 있는 것은 부록으로 실은 연표인데, 연표에서는 낙랑군을 제일 첫 머리에 적어 한국역사가 낙랑군에서 시작한 것으로 기술하였다. 이러한 연표 작성은 한국 역사가 중국이 설치한 군현의 지배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한국민족사의 기원을 부정하는 것이다. 본문에 등장하는 최초의 한국 관련 기사 역시 중국 군현과 관계된 것이다.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을 설명하는 가운데 별로 관계가 없는 대방군을 ≪삼국지≫ 위지 동이전 왜전의 각주에서 설명하면서, 그 중심지를 서울 근처라고 하였다. 대방군의 중심지는 황해도 봉산으로 보는 것이 통설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대방군에 대한 설명이 중요한 곳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서술한 것은 낙랑군과 마찬가지로 한국사가 중국의 지배에서 시작하였음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라고 하겠다. 이러한 입장에 서 있으므로 지도에서는 낙랑군이 한반도 서부 한강 남쪽까지 영역을 확장한 것으로(26쪽) 그려놓았다. 타율성과 종속성을 강조하는 입장은 임나일본부설에서도 여실히 드러나 있다. 한반도 남부에 야마토조정의 거점인 임나가 있었다고 여러 곳에서 서술하였는데, 검정과정에서 ‘야마토조정의 거점’이라는 표현은 삭제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임나일본부설을 바탕에 깔고 있다. 임나에 관한 서술은 분량이 늘고, ‘신라의 대두와 임나의 멸망’, ‘백제를 도와 고구려와 싸우다’라는 항목 이름으로까지 등장하였으며, 내용도 보강하였다. 지도에서는 가야의 전 영역과 마한까지(전라도)를 임나로 표시하고 있다(32쪽). 종속성을 표현한 또 다른 서술은 한국의 국가들을 중국의 조공국으로 표현한 것이다. 본래 신청본에서는 신라는 당의 복속국(42쪽), 조선은 중국, 청의 복속국으로(148, 163쪽) 서술했었는데, 검정과정에서 조공국으로 수정되었다. 2001년에도 조선을 복속국으로 표현했다가 자체 수정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새역모의 속내를 또 한 번 드러낸 것이다. 표현은 비록 복속에서 조공으로 바뀌었지만, 지칭하는 내용은 별반 차이가 없다. 후소샤 교과서는 조공을 ‘신하의 국가’가 중국 황제에게 보내는 의무로 이해하기 때문이다(27쪽). 요컨대 새역모 교과서에 따르면 한반도의 북부는 중국의 지배 아래서, 남부는 일본의 지배 아래서 역사가 시작되었고, 한국은 대대로 중국의 조공국, 즉 속국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일제시기 식민사관의 타율성론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사를 서술하는 것은 한국이 외국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국가임을 강조하여 일제의 한국 지배를 정당화하고, 식민 지배를 통해 조선을 중국에서 해방시켜 주었다고 강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4) 조선의 비하와 예속 암시 새역모 교과서는 특히 조선을 비하하는 서술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한 모습은 정식 국호인 조선 대신 이조(李朝)로 표현한 데서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을 오늘날 일본의 일부인 유구(오끼나와)나 에조치(북해도)와 함께 서술하고 있는 점도 문제이다. 즉, 26절 ‘오닌의 난과 센고쿠 다이묘’라는 장에서는 느닷없이 ‘조선과 유구’ 항목을 설정하여 14세기에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이씨조선)을 건국한 사실과 일본과 무역을 시작한 사실 등을 기록하고, 유구왕국이 건립된 사실도 서술했다(87쪽). 또 34절 ‘쇄국하의 대외관계’라는 장에 ‘조선 유구 하이지(朝鮮 琉球 蝦夷地)’라는 항목을 설정하고, 막부가 임란으로 인해 단절되었던 국교를 회복한 사실과 장군이 바뀔 때마다 통신사가 온 사실 등을 서술하였다(106쪽). 일본의 일부인 유구나 에조치와 같은 항목에서 조선을 기술한 것은 마치 조선이 오늘날 일본의 일부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 뿐 아니라, 당시의 조선이 유구나 에조치 정도의 위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통신사를 조공 사신인 것처럼 서술한 것과 맞물려 조선이 일본의 속국이었던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결국 이러한 서술은 조선의 위상을 낮추고, 유구나 에조치처럼 조선도 명치유신 후에 일본 영토가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서술이라고 하겠다. 2. 후소샤 교과서의 역사관 후소샤 교과서가 한국사를 이렇게 왜곡하고 있으면, 일본 역사는 제대로 서술했는가? 여기서는 일일이 일본사 서술을 검토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일본사를 보는 관점이 올바른가 하는 점을 살펴보려고 한다. 관점, 즉 역사관이 제대로 잡혀 있으면 역사는 제대로 서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소샤 교과서를 집필한 새역모의 역사관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사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태평양전쟁을 총괄한 자민당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한 자유주의사관은 2차 대전은 일본의 자위와 자존을 위한 전쟁이었고, 전쟁 과정에서 일본은 아무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지만, 패전 후 미국을 비롯한 승전국이 일본에게 죄의식을 심어주었다고 비판하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한다. 1) 생각과 집단 중심의 역사관 후소샤 교과서의 역사관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머리말과 맺음말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역사관을 살펴보자. 머리말에 해당하는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에서 “역사를 배우는 것은 과거에 일어난 일들 중에서 과거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고민했으며, 어떻게 문제를 극복했는가를 배우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역사를 배우는 것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지 모르지만, 이것이 반드시 옳지는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를 배우는 것은 과거의 사실을 배우기보다는 과거 사람의 생각과 고민, 그리고 문제의 극복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주장은 일견 매우 그럴 듯해 보이지만, 역사적 사실 자체를 경시하고 ‘과거 사람의 생각’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고, 동시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역사적 사실보다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배우는 것이 과연 역사교육인가? 수많은 역사상의 인물 가운데 누구의 생각을 배울 것인가는, 역사에서 가치판단의 기준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어떤 기준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편의에 따라 어떤 사람의 생각이든 인용하고, 마치 그것이 주류이고 사실인양 내세우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는 위험한 발상이다. 실제로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러시아가 한반도를 지배하게 되면 일본의 안보가 위협당할 것이라고 생각한 결과 러일전쟁을 하게 되었다고 서술하였다. 러시아가 실제로 한반도를 지배할 계획이 있었는지 하는 사실보다 그러리라고 한 생각이 더 중요하다고 새역모 교과서는 서술한 것이다. 이것이 어찌 올바른 역사 서술일 수 있는가?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에서는 일본역사를 배우는 것에 관해 설명하면서 ‘조상’을 유달리 강조하였다. 다음은 소항목의 제목이 ‘조상이 살았던 역사’라는 부분 내용의 일부이다. 지금부터 배우는 역사는 일본의 역사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여러분과 피가 이어지는 조상의 역사를 배운다는 말이다. 여러분의 가장 가까운 조상은 여러분의 부모다. 부모의 앞에는 네 사람의 조부모가 있다. 이렇게 세대를 거슬러 올라감에 따라 여러분의 조상의 숫자는 계속 증가한다. 이 일본열도에 살았던 사람들은 현재 교실에서 책상을 맞대고 있는 여러분의 공통의 조상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일본의 역사는 어느 시대를 잘라보아도 모두 우리들의 공통의 조상이 살았던 역사인 것이다(6쪽). 이렇게 일본사가 배우는 학생들과 피가 이어지는 조상의 역사임을 감성적으로 강조하였다. ‘피로 이어지는 조상’의 역사라는 관점은 혈연집단을 강조하는 것이고, 곧 가족과 그에 기초한 집단, 궁극적으로는 국가를 강조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머리말과 맺음말에 해당하는 ‘역사를 배우고’에서는 한결 같이 일본 문명의 전통과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일본이 외국의 문화를 배우면서도 독자성을 상실하지 않았다는 점을 힘주어 강조하였다. 맺음말에서는 2차 대전 후 경제성장을 통해 세계 유수의 경제대국이 되었지만 아직 어딘가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독립심을 잃어버린 믿을 수 없는 국민이 될 우려가 있다고 경계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를 분명하게 갖기 위해 더욱 깊이 자국의 역사와 전통을 배워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어느 나라나 자기 나라와 민족의 역사를 중요하게 여기고, 그를 통해 민족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갖게 하려고 노력한다. 자국사 교육의 목적을 이런 데서 찾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민족이나 국가를 위해서만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민족과 국가 못지않게 개인의 지적 성장과 인격 형성에 도움을 주는 데 역사교육의 목적을 둔다. 우리나라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는 역사를 배우는 목적으로, 과거의 사실을 토대로 현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역사를 통해 삶의 지혜를 습득하며, 역사적 사고력과 비판력을 기르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역사교육이 잘잘못을 가려 정당한 평가를 내리는 비판력을 기르는 데 가장 적합한 과목이라는 점을 개인과 민족의 정체성 확립이나 미래에 대한 전망 능력을 함양할 수 있다는 점과 함께 강조하고 있다. 이 교과서에서는 역사교육에서 문제 해결 능력의 함양을 중시하고 있다. 역사를 배울 때 중요한 것은 각 시대 조상들이 직면한 문제를 알고, 그 문제를 자신의 일로 상상해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문제 해결의 방향이나 문제 해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개인의 인격적 성장이나 비판능력 제고 같은 효과에 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개인의 판단력이나 비판력을 길러준다는 목표는 제시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다만 머리말의 맨 마지막 구절에서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미래를 향해 열린, 과거 사람들과의 대화’라고 추상적으로 제시하였을 뿐이다. 2) 천황 중심의 역사관 새역모 교과서의 중심에는 천황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한 사실은 초대 천황이라고 일컬어지는 진무(神武)천황의 동정(東征) 전승을 칼럼으로 실은 데서 출발한다. 칼럼은 이 전승이 야마토조정이 성립될 때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던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진무천황은 고대 일본인이 이상을 담아 그려낸 인물상이라고 하였다. 정복군주 진무천황이 일본인에게 이상적 인물상이라고 하는 이 칼럼의 서술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복자 찬양은 일본이 국내의 정복전쟁은 물론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이나 19세기 말 이후의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서술의 기조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과서는 천황이라는 칭호가 수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과정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을 자세히 설명하고, 천황 호칭 사용이 수나라와 대등한 관계에 서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서술하였다. 천황 칭호는 일본의 자립 자세를 나타내는 것이며, 오늘날까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사용되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천황은 권위를 지녔고, 때로는 실권을 막부에 넘겨주었지만, 막부는 천황을 존중하는 자세를 유지했다고 한다. ‘아무리 막부가 정치적 힘을 떨치고 있어도 조정의 권위가 상실되어 버리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막부정치 시기에 천황의 권위는 형식적인 것에 그쳤음에도, 천황의 권위를 강조하는 것은 일본의 중심으로 천황을 설정하고 있는 역사관의 표현이다.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정부를 조직한다고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발표한 사실과 신정부군이 천황의 군대임을 나타내는 비단 깃발을 선두에 세워 관군으로서의 권위를 배경으로 에도를 점령한 사실, 제국헌법은 우선 천황이 일본을 통치하지만 천황에게 정치적 책임을 지우지 않게 하였다는 사실 등을 서술하였다. 그리고 2차 대전에서 항복할 때에도 성단(聖斷)을 내린 사실과 ‘한 사람이라도 많은 국민이 살아남아 그 사람들이 장래 다시 일어서는 것 외에 이 일본을 자손에게 전할 방법은 없다’는 그의 발언을 특기하였다. 이렇게 천황을 중심에 놓고 역사 교과서를 서술했으므로, 교과서의 대미 역시 천황으로 장식해야 했다. 인물 칼럼 ‘쇼와천황’이 그것이다. 이 칼럼에선 ‘인품’ 항목에 1931년 규슈의 가고시마에서 군함을 타고 귀경할 때, 멀리 어두운 해안에 천황의 군함을 배웅하기 위해 주민들이 피웠다고 생각되는 불의 행렬을 향해 혼자 거수의 예(禮)를 하고 있었다는 일화를 서술하였고, ‘쇼와천황과 그 시대’에서는 일본이 큰 위기를 맞았던 시기에 천황은 각국과의 우호와 친선을 마음으로부터 바라고 있었지만, 시대는 그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서술하여 일본의 전쟁 책임에서 천황을 면제시켜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민과 함께 걷다’라는 항목에서 종전 직후 ‘자신을 당신이 대표하는 제국(諸國)의 재결(裁決)에 맡기기 위해 방문했다’고 하여 맥아더를 감동시킨 일화를 소개하고, ‘패전 후 천황은 일본 각지를 순행하시며 부흥에 힘쓰는 사람들과 친히 말씀을 나누고 격려하셨다. 격동하는 쇼와라는 시대를, 일관해서 국민과 함께 걸으신 생애였다.’라고 칼럼을 맺었다. 일급 전범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쇼와를 전쟁에는 책임이 없는, 격동의 시대를 국민과 함께 걸은 위대한 천황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천황을 중심에 놓는 역사관은 황국사관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일본 역사의 전개 과정에 천황이 중심이 되어 왔다는 역사관이므로, 당연히 그 연장선상에서 19세기 후반기 이래 일본이 자행한 침략과 식민지지배 활동의 중심에 천황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새역모는 침략전쟁을 부인하고, 전쟁 범죄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곧 천황의 오류와 범죄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3) 침략전쟁의 미화와 왜곡 앞에서 본 것처럼 후소샤 교과서는 침략전쟁을 방위전쟁으로 왜곡할 뿐만 아니라 전쟁 자체를 미화하고 있다. 러일전쟁에 대하여 ‘근대국가로 탄생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유색인종의 나라 일본이 당시 세계 최대의 육군 대국 러시아를 이긴 것은 식민지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안겨주었다.’(168쪽)고 평가하면서 무려 4쪽에 걸쳐 전투상황을 상세히 서술하였다.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은폐하고 러일전쟁을 인종간의 대결, 식민지 해방전쟁인 양 묘사하여 전쟁을 미화한 것이다. 태평양전쟁도 일본에 대한 미국과 서구의 경계와 압박, 인종차별 때문에 일어난 ‘자존자위’의 전쟁으로 규정하였다. 미국은 문호개방, 기회균등을 외치면서도 일본이 독자적인 경제권을 만드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고, 중일전쟁에서는 장개석을 공공연하게 지원하였다. 일본은 석유 수입처를 찾아 인도네시아를 영유하는 네덜란드와 교섭했지만 거절당했고, 미국·영국·중국·네덜란드의 4개국이 일본을 경제적으로 압박하는 ABCD 포위망을 형성한 것이 태평양전쟁의 원인이라고 하였다(201~3쪽). 그러므로 자위를 위하여 출격하는 가미가제를 환송하는 여학생 사진을 당당히 게재하여 전쟁을 찬양하였다(209쪽). 더 나아가 일본의 승리가 동남아시아나 인도의 많은 사람들에게 독립의 꿈과 용기를 북돋워주었고, 구미 세력을 배제한 아시아인에 의한‘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을 전쟁의 명목으로 내걸게 되었다고 호도하였다. 현지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구미 각국으로부터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일본의 군정에 협력했다는(206~7쪽) 서술도 빼놓지 않았다. 침략전쟁의 왜곡과 미화는 근대의 전쟁에만 그치지 않고, 중세에도 그대로 관철되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은 여전히 침략이 아니라 ‘출병’으로 표현하였다. 군대를 보냈을 뿐이지, 침략은 아니라는 뜻이다. 심지어 왜구도 일본인으로 구성된 게 아니고, 고려인과 중국인이 많았다고 하였다. 일본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거나 괴롭힌 적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왜구도 일본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침략전쟁을 왜곡하고 미화하다 보니, 전쟁과정에서 일본은 잘못을 범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피침략국의 민중들이 당한 피해에 대하여는 고려하지 않았다. 남경대학살 같은 전쟁범죄를 저질렀을 리가 없고, 종군위안부 같은 사실이 있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 사람들이 입은 피해에 관한 서술도 검정신청본에는 모두 삭제하였다가 검정과정에서 할 수 없이 다시 살려냈다. 맺음말 후소샤에서 발행한 일본 역사교과서는 이웃 국가인 한국의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하였다. 지정학적 결정론에 입각하여 한반도를 일본에 위협적인 존재로 상정하고, 한반도를 러시아가 지배하면 일본의 방위가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러일전쟁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조선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서술이 극단적이고 대표적인 왜곡이라고 하겠다. 이 교과서는 또한 한국의 역사가 중국과 일본의 지배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는 타율성론에 입각해 있으며,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고 조선을 비하하였다. 이 교과서에서 역사를 보는 관점은 보통 역사가들의 그것과 매우 다르다. 사실보다는 ‘생각’을 중심으로 역사를 보고, ‘생각’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였다. 그리고 집단을 중시하며, 천황을 역사인식의 중심에 두었다. 또한 침략전쟁을 왜곡 미화하여 일본이 벌인 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자위와 자존을 위한 전쟁이었다고 강변하였다. 이러한 역사관은 과학성을 결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침략을 미화하고 있어 매우 위험한 역사관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교과서로 역사교육을 받게 되면, 어떤 역사인식을 갖게 될 것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곽해선ㅣ 경제교육연구소 소장(www.haeson.net) 지하경제란 ‘지하경제(underground economy)’란 거래 내용이 세무 당국에 포착되지 않아 세금 부과 대상에서 빠지고, 국민경제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경제 활동을 말한다. ‘공식경제(official economy)’에 상대되는 개념이다. 세무서에 신고하지 않는 경제 활동이라고 해서 다 불법은 아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파출부가 노임을 받는 활동은 세금을 내지 않는 한 지하경제에 속하지만 불법은 아니다. 그래도 지하경제에는 불법 활동의 비중이 크다. 밀수, 마약 제조나 판매, 매춘, 사설 도박장 영업, 불법 부동산 투기 같은 것이 가장 전형적인 지하경제 형태이기 때문이다. 뇌물이나 촌지라는 이름의 음성적 자금 거래도 불법 지하경제의 일부다. 기업 활동과 관련해서는 비자금이 불법 지하경제의 대표적 형태로 손꼽힌다. 비자금이란 출처와 용도가 가려진 돈을 말한다. 보통 기업들이 회계장부에 수입액을 실제로 번 것보다 적게 기록하거나 지출 액수를 부풀려 장부 밖으로 빼돌려 조성한다. 장부에 없는 돈이니 세무서에 신고하지 않고 주로 뇌물이나 촌지에 충당하므로 부정부패를 낳는다. 그렇기는 해도 지하경제가 다 나쁜 것은 아니다. 부분적으로는 소비를 늘려 경제에 좋은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자영업자가 물건을 팔아 소득을 얻고도 이를 신고하지 않는다고 하자. 말하자면 탈세를 하는 것인데, 해당 자영업자로서는 세금으로 나가지 않는 만큼 소득이 늘어 소비를 더 늘릴 수 있다. 하지만 지하경제로부터 득을 보는 이들은 탈세를 하고 국민경제의 성장은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탈세와 지하경제가 커지면 정부로서는 정당하게 거둬들여야 할 세금을 걷지 못한다. 자영업자들의 탈세가 많아지면 어떻게 될까? 정부의 세수가 부족해지는 현상이 생긴다. 세수가 부족해지면 정부는 흔히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내게 한다. 세금을 더 내는 사람들로선 소득이 줄어드니 그만큼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소비가 줄고, 소비 위축에 따라 기업의 판매가 줄고, 경기가 위축된다. 결국 지하경제가 커지면 부분적으로는 탈세자들의 소비를 늘리는 효과도 있지만, 공식 부문 경제로 자금이 흘러 국내 경제 자원이 생산적으로 쓰이는 것을 막고, 소비 증가 → 판매 증가 → 생산 및 고용, 투자의 증가 → 소비와 판매 증가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막아 국민경제의 성장세를 낮추고 공식 부문 경제를 좀먹는다. 그 결과는 공식 부문 경제의 성장률 하락으로 집약된다. 우리나라의 지하경제 규모, 얼마나 되나 최근 현대경제연구원에서 밝힌 연구에 따르면, 지하경제 규모까지 포함할 경우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실제보다 훨씬 높아진다. 지난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전년 대비 4.8%로 추정되는데, 지하경제를 감안한다면 5.4%로 올라선다. 2003년에도 우리 경제는 전년 대비 3.1%의 저성장을 보였지만 지하경제를 합하면 5.1%로 훌쩍 뛴다. 이런 식으로 따지고 보니,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은 1997년 이래 지하경제로 인해 연평균 1.4%p씩 줄어들었다. 근년 국내 경제가 연평균 3%대의 저성장 늪에 빠진 데는 지하경제가 커진 탓도 한몫 단단히 한 셈이다. 정부는 올해 하반기 대규모 재정을 투입해 종합투자계획을 시행할 예정이다. 이 계획이 경기 부양 효과를 낸다면 약 0.2~0.3% 가량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데, 지하경제의 경우 경제성장률을 1%p 이상 줄였다는 것이므로 지하경제가 경제성장률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지하경제 규모는 2003년 현재 150조 원 정도로 추정된다. 2003년 국내총생산(GDP)의 21% 정도 규모다. 1998년 통계를 기준으로 하면 우리나라의 지하경제 규모는 GDP 대비 약 16.6%로 선진국보다 약 1.6%p~7.7%p 높다. 미국은 GNP 대비 지하경제 규모가 1970년 2.6~4.6%에서 1998년 8.9%로 약 168% 증가했고, 호주, 캐나다, 프랑스, 독일 등은 지하경제 규모가 1960년대 GNP의 5% 미만에서 1998년 들어 GNP의 약 13%를 넘는 수준이다. 정확한 규모 파악이 어려운 지하경제 속성상 대략적인 추산으로는 2000년 이후 미국,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선진국의 경우 지하경제의 GDP 대비 비율이 10% 미만이고 일본, 영국, 캐나다, 호주, 싱가포르, 홍콩 등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수준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필리핀, 태국, 멕시코, 페루 등은 지하경제 비중이 매우 커 GDP 대비 50% 안팎인 것으로 추산된다. 최근 지하경제가 커지는 이유는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우리나라 지하경제 규모는 약 14%에서 19%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그러다 1993년 이후부터 규모가 꾸준히 줄어 1999년 GDP 대비 16%대까지 됐다. 그러나 1999년을 기점으로는 다시 상승세로 돌아선 추세다. 지하경제가 감소했던 1994∼1999년 사이에는 금융실명제 도입, 외환위기, 코스닥의 IT 주식 붐(Boom)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 1994년 금융실명제 도입으로 지하경제에서 움직이던 자금이 공식경제로 많이 유입됐고, 1997년 외환위기 때는 소비가 줄면서 주로 소비 부문에서 많이 움직이는 지하경제로의 자금 유입이 줄었다. 1999년 IT 붐으로 코스닥 시장에서 주가가 뛸 때는 지하경제 자금이 공식 부문인 주식시장으로 많이 유입되었다. 이 기간 동안 지하경제 규모는 약 18%에서 16%로 줄었다. 그러나 2000년부터 2003년 사이엔 지하경제 규모가 약 19.6%에서 약 21%로 증가했다. 한동안 줄어들던 지하경제 규모가 최근 다시 상승세로 돌아서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정부가 편 경제정책에서 빚어진 부작용이 꽤 기여했다. 첫째, 지난 1998년부터 정부가 부동산 부양정책을 편 것이 지하경제 자금을 부동산시장으로 흘러들게 해 단기 시세차익을 올릴 수 있도록 도와줬다. 1998년 이래 정부의 주택경기 활성화 정책은 간단(間斷)없이 이어졌다. 1998년 주택경기 활성화를 위한 자금 지원 방안으로 국민주택 중도금 5조 6400억 원을 지원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1999년엔 주택자금 지원조로 중도금 4조 원, 그리고 추가 지원금 1조 7522억 원 지원방안을 내놓았다. 주택구입 자금 상환액에 대한 소득공제를 확대했고 주택구입 자금 대출 금리를 낮췄다. 2000년엔 11조 7000억 원 상당의 국민주택기금 지원 방안을 내놓았고 분양중도금 대출 한도를 올리는 한편 대출 금리는 내렸다. 지방 건설 활성화를 위해 사업비의 50%까지 지원하고, 재개발 조합원에게는 이주 전세금을 신규 지원하기로 하는 한편 건설자금 융자 이율을 내렸다. 2001년엔 신축 주택 구입 때 양도소득세를 면제하며, 부산, 대구, 천안 등 6개 신시가지 개발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1998년~2001년간에 걸쳐 부동산 경기 부양을 위한 정부의 재정지출 규모가 약 23조 원에 달한다. 이런 부양책을 거쳐 전국의 지가는 2002년에 전년 대비 16.4% 올랐고, 서울 강남의 지가는 27.4%나 올랐다. 둘째, 역시 내수경기 부양을 위해 금융정책 당국이 금리를 내리고, 낮게 가져간 정책이 지하경제 자금을 공식경제로 흘러가는 길목을 막는 데 한몫했다. 1990년대 말 연 8~9%이던 실질 이자율은 지속으로 하락해 2003년 약 1.8%대로 떨어졌다. 일부 지하경제 자금은 정부가 저금리를 유지하면서 재정지출을 늘려 주택 경기를 띄우는 것을 보고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어가 지가 상승에 따른 단기 시세차익을 봤다. 셋째, 정부가 내수 경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신용카드 발급 남발을 방치한 정책 등이 신용불량자를 양산하면서 불법 사채시장을 키웠다. 신용카드 발급 남발은 신용불량자의 양산과 사채시장 규모의 확대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지하경제를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신용불량자 수는 2000년 약 284만 명에서 2003년 약 370만 명으로 약 78.5%나 급증했다. 정부가 신용불량자 문제에 대응한다며 2002~2003년 현금 서비스 한도를 줄이자, 돌려막기 등으로 신용불량을 면하려 했던 사람들이 대부업체나 카드 할인을 이용하는 사금융으로 몰리면서 이 기간에 사채시장과 지하경제는 규모가 한층 커졌다. 지하경제를 줄여나갈 대책은 최근 늘어나는 지하경제를 줄여나갈 대책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정부가 진정한 의지를 갖고 단기적으로 경제이득을 취하려는 경제 주체들의 투기적 경제 활동을 근절해 나가야 한다. 그럼으로써 장기적으로 지하경제의 양지화를 촉진해야 한다. 부동산 시장의 성장은 공식경제의 성장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하지만 전체 경제성장 정책을 수단 삼아 임시방편으로 부동산 시장 띄우기를 앞세우는 경기 대책은 자제해야 한다. 지하경제를 축소시키기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경제의 형평성과 효율성을 향상시켜야 하는데 부동산 투기는 이를 저해하므로 부동산 투기 억제책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사금융 시장의 양지화와 관리감독 강화도 필요하다. 신용카드 남발에 따른 불법 사금융 시장 발달로 인해 지하경제 규모가 커진 예에서 보듯이 건전한 사금융 업체 양성화가 필요하고 불법 사금융에 대한 규제, 단속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건전한 사금융 업체에는 과감한 세제혜택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물론 양성화 방안과 함께 고리대금업체에 대해서는 관리감독을 강화해야 한다. 노동시장의 구조적 개혁도 필요하다. 우리나라에선 최근 실업률을 줄일 목적으로 근로시간 감축이 추진되고 있는데, 그 결과 비정규직 근로자 고용이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우리나라의 비정규직 근로자 수(임시직+일용직)는 1999년 652만 9000명이던 것이 2002년엔 731만 9000명으로 약 12.1% 늘었다. 그 결과 실업률을 줄이는 쪽으로는 영향이 미미한 대신 불완전고용자들이 가난한 가계를 사금융에 의지해 메워나가는 성향은 높아져, 결국 지하경제가 더 커지는 결과가 빚어졌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비정규직 근로자는 축소하고, 노령인구를 위한 일자리 창출을 늘리는 방향으로 노동시장 구조를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 앞으로는 특히 노령인구를 위한 일자리 창출이 중요하다. 인구 노령화로 인해 노령 노동자들의 지하경제 참여가 가속화될 전망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지하경제 참여 억제를 위해 사회보장제도를 더 효율적으로 운용하고 고령자 일자리 창출이 선행되어야 한다. 아울러 학생과 성인을 상대로, 지하경제를 타기(唾棄)하는 방향으로 경제 규범 교육을 강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탈세와 체납 등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중심으로 세금과 경제에 관련된 교육도 더 적극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신동호ㅣ코리아 뉴스와이어 편집장 급할수록 신중한 생각 적어져 우리 속담에 ‘급할수록 돌아가라.’ ‘급할수록 천천히 가라.’는 말이 있다. 영어에도 ‘천천히 서둘러라(Make haste slowly)’ ‘급할수록 돌아가라(The longest way round is the shortest way home)’라는 속담이 있다. 급할수록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생각하면서 움직이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전해져 내려오는 격언이다. ‘급하면 서둘러야 하는데 왜 돌아가라는 것일까?’ 하고 의문을 가져 본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처럼 어리석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라고 생각했던 분이라면 박남준 시인의 아래 글을 보면 아마 조금 이해가 갈 것이다. “약속 시간이 가까워져서야 뒤늦게 그걸 기억해 내고는 부랴부랴 옷을 차려 입고 집을 나선 날이 있었다. 한참 산길을 내려가다가 문득 생각해 보니, 정작 그 약속은 내가 어떤 물건을 전해 주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책상 앞에 꺼내 두고는 다급한 마음에 미처 가지고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그걸 챙겨서 내려갔다. 으으 저런, 버스 정류장이 가까워져서야 또 한 가지 빠뜨린 것, 이번엔 주머니 속이 텅 비어 있었다. 옷을 갈아입으며 꺼내 둔 지갑을 집어넣지 않은 것이다. 시간은 이미 늦고도 늦었다. 시간을 좀 줄이기 위해 아랫마을 아는 분께 들러 사정을 이야기하고 차비를 꾸며 전화를 걸었다.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진땀을 흘렸던 날이었다. 비로소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급히 서두르는 경우 늦어지는 것은 단지 심리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서두르는 경우 전체의 속도가 늦어지는 사실은 실험을 통해서도 증명이 된다. 운동장, 공공시설, 지하철 등에서 군중들이 먼저 빠져 나가려고 몸부림치다가 밟혀서 목숨을 잃는 일이 흔히 벌어진다. 1990년에는 이슬람의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보행자 터널에서 무려 1426명이 깔려 죽는 최악의 참사가 일어났다. 이런 문제 때문에 공공시설이나 지하철 등을 설계하는 건축가는 통행자의 흐름을 원활히 하고 부상자가 생기지 않도록 복도와 비상구를 잘 설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서두를수록 더 느려지는 이유 독일 드레스덴 기술대학 디르크 헬빙 교수와 헝가리 에트보스 대학의 타마스 비첵 교수는 위기 속 개인의 행동을 계산해 집단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획기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 프로그램은 겁에 질려 도망치는 군중들의 행동을 컴퓨터로 모의 실험할 수 있는 것으로, 공공시설을 안전하게 설계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 동안 과학자들은 사람이나 교통의 흐름을 유체로 파악해 모의 실험을 해왔기 때문에 예측 결과가 정확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빨리 출구로 도망치려고 몸부림칠수록 사람들이 빠져 나가는 속도는 실제로 느려진다. 왜냐하면 빨리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넘어진 사람이 장애물이 돼 흐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만든 프로그램으로 모의 실험을 한 결과는 이렇다. 위험이 없는 상태에서 45초 동안 초속 1미터로 방을 빠져 나갈 때 바깥으로 나가는 사람은 90명이다. 하지만 초속 5미터로 나가려고 하면 서로 몸이 부딪쳐 65명밖에 나가지 못한다. 천천히 움직여야 더 빨리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화재가 일어난다든지 하는 공포 상황이 되면 사태는 더 심각해진다. 치열한 몸싸움 속에 200명 중 5명이 쓰러진다. 쓰러진 부상자는 장애물이 된다. 따라서 이 경우 문 밖으로 빠져 나가는 사람의 숫자는 44명으로 줄어든다. 군중이 많으면 비극은 더 커진다. 400명이 나가려고 몸싸움을 하게 되면 24명이 깔려 죽게 되고 부상자들 때문에 45초 동안에 3명밖에 빠져 나가지 못한다. 연구팀은 비상구 바로 앞에 둥근 기둥 하나를 놓으면 몸싸움을 벌이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압력이 두 갈래로 분산돼 빠져 나가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 복도의 너비가 일정해야 탈출에 효율적이란 사실도 알아냈다. 복도가 좁았다가 넓어졌다가 하면 사람들이 앞사람을 제치려 하다가 좁아진 곳에서 더욱 격렬히 충돌하게 돼 탈출구로서의 효율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같은 사람을 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을 때 흔히 ‘세상 참 좁다.’고 말한다. 이런 경우 ‘우연한 일이겠지’ 하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인간관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는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만일 60억 명의 세계인 가운데 어떤 한 사람에게 이메일을 보내려면 중간에 몇 사람이 이메일을 중계해야 그 사람에게 전달될까?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이 필요할 것 같지만 정답은 6명이다. 세상은 매우 넓은 것 같지만 도처에 지름길이 존재한다. 세상 어디에나 지름길은 있다 2003년 콜롬비아 대학 수학자인 던컨 와츠 교수는 전 세계 수만 명을 상대로 서로 아는 사이를 통해 전혀 모르는 몇 명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실험을 실시해 결과를 발표했는데 대부분 5∼7명을 건너 메일이 전달됐다. 6명만 건너뛰면 누구하고나 연결된다는 이른바 ‘6단계 분리’ 이론은 1960년대에 하버드 대학 사회심리학자인 스탠리 밀그램 교수가 체계화했다. 1967년 밀그램 교수는 네브래스카 주의 오마하에 사는 사람을 임의로 추출해서 160통의 편지를 띄웠다. 그 편지를 최종적으로 받아야 할 사람은 보스톤에 사는 한 증권 브로커였다. 편지 내용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편지는 보스톤에 사는 증권 브로커에게 전달되어야 할 편지입니다. 이 증권 브로커의 이름을 참조해서, 귀하가 알고 계시는 분 중 가장 이 사람에 근접한 사람 한 분을 골라서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편지는 보스톤의 그 증권 브로커를 향해 아는 사람에서 아는 사람으로 전달됐다. 160통의 편지 중 최종적으로 증권 브로커에게 전달된 편지는 42통이었다. 전달된 편지가 몇 사람을 거쳐서 도착했는지를 조사해 보니 평균 5.5명이었다. 그 뒤 밀그램은 아무리 넓고 복잡한 세상도 대체로 6단계를 거치면 모두 연결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일컬어서 ‘6단계 분리’라고 한다. 6단계 분리에서 힌트를 얻은 미국 코넬 대학의 스티븐 스트로가츠와 콜롬비아 대학의 던컨 와츠 두 수학자는 복잡한 네트워크가 어떻게 ‘좁은 세상’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모형을 만들어 1998년 과학 잡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모형실험 결과 세상에는 지름길이 있었다. 두 수학자는 전력 송전망과 생물의 신경망 그리고 2만 3500명의 배우를 수록한 인터넷 정보은행 등 3개의 시스템을 분석한 결과, 몇 안 되는 지름길이 ‘좁은 세상’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를 ‘좁은 세상 효과(small world effect)’라고 한다. 지름길이란 어떤 조직이나 시스템에서 고착된 영역을 뛰어넘어 통신이 이루어지게 해주는 사람이나 부품을 말한다. 부서 간, 계층 간 장벽을 넘어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게 해주는 사람이 대표적인 지름길이다. 어떤 조직이나 기업이 비슷한 사람끼리만 모여 있으면 발전이 없다. 그래서 집단은 다양한 외부의 세계와 연결된 사람들이 모일 때 가장 큰 힘을 낼 수 있다. 또한 관료적 조직에서는 지름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회사마다 건의함을 만든다. 의사소통의 마비가 자칫하면 엄청난 파국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가 1986년 우주 왕복선 챌린저 호의 사고이다. 이 사고는 매우 낮은 온도에서 견디지 못하는 고리가 부서지면서 일어났다. 조사 결과 우주왕복선 수리를 맡은 기술자들은 이 부품이 온도에 민감해 폭발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이런 우려를 정책 결정자에게 알릴 수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두 수학자는 만일 기술자와 미국 항공우주국 최고 관리들 사이에 지름길이 있었다면 이런 사고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네트워크는 어디에나 있다. 뇌는 신경세포의 네트워크다. 조직은 사람의 네트워크다. 세계는 국가 간의 네트워크이다. 경제는 시장의 네트워크이다. 시장은 공급자와 소비자의 네트워크다. 미국의 네트워크 판매회사가 국내에서도 막대한 판매 실적을 올리고 있다. 이것도 ‘좁은 세상 효과’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네트워크로 생각하는 사람이 앞서 간다 전염병의 확산에도 지름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사스도 한 명의 환자가 바이러스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스 발생 초기에 중국 광동성에서 사스 환자를 치료하다 감염된 한 명의 중국인 의사가 2003년 2월 21일 홍콩 메트로폴 호텔에 투숙한 뒤 이 호텔에서 12명의 외국 투숙객이 감염됐다. 이들은 비행기를 타고 홍콩, 미국, 캐나다, 싱가포르, 베트남, 아일랜드로 퍼져 3월 26일까지 249명에게 사스를 감염시켰다. 단 한 명의 의사가 사스를 순식간에 세계로 퍼뜨린 것이다. 따라서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에는 이런 지름길을 차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미국 인터넷 망의 정보 흐름도 선이 굵을수록 통신량이 많다. 인터넷망은 두뇌의 신경망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전 세계를 연결하는 인터넷 망은 거대한 두뇌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침팬지 행동을 연구해 온 미국 에모리 대학 프란스 드 왈 교수는 “침팬지 사회에서는 무엇을 아느냐보다 누구를 아느냐가 훨씬 중요하다.”고 말한다. 침팬지 사회에서도 혼자서 잘난 체하는 것보다 네트워크가 강한 침팬지가 잘 나가는 것이다. 하물며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다. 일을 하다가 장벽에 부딪치면 인맥을 동원해 문제를 푼다. 세상에서는 인맥이 두터운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으로 꼽힌다. 학연과 지연을 타파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지만 세상 어디에도 학연과 지연이 없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학연과 지연도 인터넷의 등장으로 점차 낡은 네트워크가 되어 가고 있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지구촌에는 상상할 수 없이 복잡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가고 있다. 네트워크 사이에서 광속으로 흘러가는 정보는 과거의 인적 네트워크와 비교도 할 수 없이 빠르다. 게다가 복잡한 네트워크 속에서 순식간에 지름길을 찾아내는 서치엔진은 갈수록 강력해지고 있다. 인터넷은 전 세계의 모든 지식과 경험을 통합하고 있다. 지식의 통합은 필연적으로 지능을 낳는다. 전 세계의 인터넷 망을 보면 1000억 개의 뉴런이 거미줄처럼 서로 연결된 뇌와 모양이 매우 흡사하다. 지구적 규모의 인터넷 네트워크는 발전되면 될수록 어마어마한 능력을 갖는 뇌가 될 것으로 보는 과학자들이 벌써부터 생겨나고 있다. 지금까지는 인맥이 두터운 사람이 잘 나갔지만 앞으로는 인터넷을 잘 쓰는 사람, 세상을 네트워크로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 세상을 이끌어 나가게 될 것이 분명하다.
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 cafe.daum.net/parqueM/ 아시리아 인, 오리엔트 최초 통일 내륙 교역의 중심지로서 변화무쌍한 메소포타미아 지역, 그리고 아라비아를 가로질러 조용하게 딴 살림을 차리고 있는 이집트에 이르는 지역을 호시탐탐 노리는 세력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아시리아 인이었다. 그들은 소아시아에서 활발한 무역활동을 전개하면서 상대방이 강하거나 힘이 비슷하면 정상적인 교역을 하지만 만약에 세력이 약한 도시를 만나면 힘으로 정복하는 셈어계의 유목민이었다. 메소포타미아와 소아시아 지역은 민족수 만큼이나 생각하는 것도 다른 모자이크 형 지역이어서 아시리아 인들은 교역과 정복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과정에서 막강한 전투력과 우수한 철제 무기와 전차, 그리고 기병 등을 확보하여 기원전 7세기 중엽에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포함한 오리엔트 세계를 최초로 통일하였다. 그런데 아시리아가 정복한 그들의 영토 내에 서로 다른 이질적 민족을 떠안았지만, 무조건 힘으로만 억누르는 강권통치로 피정복민의 목숨을 건 강력한 반발을 초래하게 되었다. 특히, 이때 유일하게 일신교를 믿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들은 종교적으로 혹독한 탄압으로 신음하였고, 살마네셀 왕 때 많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포로로 끌려가 수많은 고초를 당하였다. 이스라엘은 기원전 11세기에 다윗 왕이 대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고 영화를 누렸으나 솔로몬 왕이 죽자 나라는 북부의 이스라엘과 남부의 유다 왕국으로 나뉘어져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의해서 멸망하고 말았다. 마침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민족들이 들고일어나 무자비한 정복자 아시리아에 대한 무장반란을 일으켜 기원전 612년 아시리아 통일제국을 무너뜨린다. 이는 피지배 민족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게 만든 결과였다. 유대왕국을 멸망시킨 신바빌로니아 기세등등했던 아시리아가 붕괴되자 오리엔트는 네 나라로 분열되었다. 통일 이전에는 여러 민족과 도시가 난립하였으나, 이제는 크게 네 나라로 구조조정이 되었다. 즉, 이집트의 신왕국, 소아시아 지방의 리디아, 메소포타미아의 신바빌로니아와 메디아였는데, 신바빌로니아는 칼데아라 부르기도 한다. 이때 남부의 유다 왕국은 북부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 후에 한동안 아시리아에 예속되어 왕국 자체는 명맥을 유지할 수는 있었으나 이제는 그 존립 자체가 위태롭게 되었다. 신바빌로니아의 네브가드네사르 2세가 기원전 586년 오갈 데가 없는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대규모의 유대인들을 그들의 수도 바빌론으로 끌고 갔는데 이를 ‘바빌론의 유수’라 한다. 그는 부왕이 추진하였던 거대한 태양신의 성탑을 세웠는데 이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의 재건이었으며 19세기에 독일의 탐험대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신앙을 종교로 승화시킨 헤브라이 인 그럼 아시리아에 정복당한 북부 이스라엘, 그리고 신바빌로니아에 멸망당한 남부 유다 왕국의 백성들, 즉 지금의 유대 인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그들이 이룩한 종교가 서양문화의 뿌리가 되는 그리스도교의 모태가 되니 말이다. 고대에는 유대 인을 헤브라이 인이라 불렀다. 셈어계 유목민에 속하는 그들은 기원전 1850년경 아브라함의 영도 하에 ‘약속의 땅’을 찾아 나섰는데 그들은 주변 각지를 전전하다가 심한 기근을 피하여 이집트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들어갈 때는 이집트 조정에서 봉직한 요셉 덕분에 환영을 받았지만, 나올 때는 노예의 신분으로 갖은 박해를 받다가 모세의 영도로 목숨을 건 민족의 대탈출이 이루어졌다. 이때가 기원전 1250년 무렵이었다. 모세의 뒤를 여호수아가 이어받아 기원전 1220~1200년 사이에 야훼가 약속한 땅 ‘가나안’을 정복하였다고 하는데, 여호수아가 죽은 뒤인 기원전 1200~1025년의 시대적 상황은 고대국가 형성 이전의 부족동맹 체제가 확립되는 과정이라 생각하면 무리가 없다. 이스라엘의 역사도 다른 민족과 같이 부족 동맹체에서 발전하여 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을 밟게 되는데, 이때가 기원전 1025~586년까지의 이스라엘 왕국의 흥망사이다. 원래 부족동맹 체제였던 이스라엘이 서부 해안의 블레셋 족과 동부 요르단 산악지대의 암몬 족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력한 지도력을 원함에 따라, 이웃나라의 왕정체제를 도입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기원전 1000년경에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그곳을 통합왕국의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 삼고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였다. 부왕(다윗)이 죽자 왕위를 계승한 솔로몬은 기원전 970~933년까지 통합 이스라엘 왕국을 다스렸지만 여러 가지 실정으로 인심을 잃어 그가 죽자 통일왕국은 남·북, 두 왕국으로 분리되었다. 북 왕국은 ‘이스라엘’이란 국호로 기원전 933~721년까지 유다와 베냐민의 일부 지파를 제외한 10지파가 모인 왕국을 이루고 후에 ‘사마리아’가 수도가 되었으며, 정통 다윗 왕가를 계승한 남 왕국 유다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여 다윗의 손자이며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함으로부터 약 346년간 20명의 왕들이 통치하게 된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완충지대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자연스럽게 오리엔트 세계의 패권다툼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말한 참담했던 바빌론의 유수,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그들의 성전을 재건하는 한편, 신앙 차원에 머물러 있던 것을 종교로 업그레이드 하기 시작하면서 유대교 경전의 뿌리가 되는 모세 오경이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모세 오경이란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를 가리키며 천지창조로부터 이집트 탈출과 40년간의 방랑생활 가운데 야훼의 백성이 되기 위한 모든 규범과 율법이 기록되었으며, 모세 이후의 여러 예언자의 예언서와 역사서·교훈서가 합쳐져 구약성서를 구성하고 있다. 즉, 유대교는 그리스도교의 모체가 되었으며 마호메트가 창시한 이슬람교에게도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쉽게 말해서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서에 신약성서를 추가하여 성전으로 삼은 종교가 그리스도교, 구약성서의 많은 부분에 크리스트교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으로 편집한 ‘코란’을 성전으로 삼은 종교가 이슬람교이다. 이렇게 성립된 유대교는 유대인의 생활을 근본부터 규정하고 있는 독특한 사고방식이고 인생관 그 자체이며 신앙생활의 중심은 모세를 통해서 유대 인에게 계시된 율법(토라)이다. 유대 인들은 모세 오경을 중심으로 오래된 율법을 각 시대적 상황에 적용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해석과 주석을 달아 왔는데 이것이 ‘미슈나(반복)’이며, 다시 미슈나의 해석을 정리한 것이 ‘게마라(보완)’이고, 이 두 가지(미슈나+게마라)를 집대성한 것이 바로 ‘탈무드(연구)’인데, 보통 유대인의 생활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 탈무드이다. 탈무드 정신으로 이스라엘 공화국 재건 헤브라이 판 명심보감이 바로 탈무드이며 세계인들은 유대인을 일컬어 ‘가장 교육적인 민족’이라 하였다. 때문에 3000여 년의 핍박과 2000년의 무국적 민족, 심지어는 아돌프 히틀러의 민족말살정책(홀로코스트)의 대상물이 되었지만 말이다. 유대인의 비극은 이미 서기 70년대 티투스(Titus Flavius Vespasianus; AD 79~81)가 로마 황제에 즉위하기 전에 시작되었다. 티투스는 로마의 통치에 거세게 반발하는 유대 민족주의자들과 그의 잔당들을 소탕하기 위해서 대대적인 말살작전을 감행하였고 그 이후 유대 민족은 디아스포라, 즉 나라 없는 유랑민족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바빌론의 유수시대’를 거치고 헬레니즘이라는 이민족의 침략을 극복하기 위해서 전개한 시오니즘 운동을 근세기에 이르러서는 제2의 건국운동으로 전개하여, 결국 서기 1948년 옛 이스라엘의 영광을 구현하기 위해 다윗의 별을 그들의 국기에 그려 넣고 이스라엘 공화국을 탄생시켰다. 무려 2000여 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유대인들은 멸시와 탄압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그들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그들의 종교를 지켜왔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주변을 포위한 절대 열세의 아랍 민족들과의 수차례의 중동전쟁을 치르면서도 꿋꿋하게 영토를 지켜내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거듭되자 오히려 가자·골란 지역 일대로 영역을 넓혀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유대인의 저력은 그들의 교육, 다시 말해서 ‘탈무드’에 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탈무드를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을 거듭하면서 다음 세대에 물려줌으로써 교육과 행동규범의 지침으로 삼았던 것이다. 아마 유대교 랍비들이 경전의 시대적 해석을 게을리 했더라면 나라 없이 떠돌던 유대인들에게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해 그들은 수용소 가스실에서 모세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절규했을 것이다. 페르시아의 오리엔트 재통일 기원전 7세기 무렵에 인도·이란어족에 속하는 민족이 페르시아만(걸프만) 동부에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메디아(Media)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메디아는 기원전 8세기 말에 이란 고원의 북서부에 메디아 인들이 세운 왕국이며, 신바빌로니아와 함께 아시리아를 멸망시키고 이란 전토에 걸친 땅을 차지했던 나라다. 기원전 500년경 키로스의 지도하에 반란이 일어나 메디아를 멸망시키고, 새로 나라를 건국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페르시아(Persia)이다. 사실 페르시아 인들은 그들의 나라를 페르시아라고 하지 않았다. ‘페르시아’란 이름은 고대 그리스 인들이 이란의 서부지역을 ‘페르시스(Persis)’라 한데서 유래되었다. 즉 ‘페르시아’란 말이 그리스인들이 붙여준 이름이라 한다면, ‘이란’이란 그들 스스로 이름을 붙인 ‘고귀한 사람’이라는 의미의 ‘아리안’에서 유래한다. 페르시아는 리디아와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기원전 525년에는 제26 왕조의 이집트도 멸망시켜 오리엔트를 통일한 최대 최후의 통일국가였다. 페르시아는 무자비한 철권통치를 했던 아시리아를 반면교사로 삼아 정복지의 관습을 존중하고 자치를 인정하는 관대한 정책을 폈다. 덕분에 바빌론에서 집단적 포로생활을 하고 있던 유대인들이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특히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1세(BC 522~486)의 치세에 화폐의 주조와 교통망의 정비로 광범위한 교역과 문화교류가 이루어지는 한편, 수사에서 사르데스에 이르는 ‘왕의 길’을 닦고 새 도읍지로 페르세폴리스를 건설하는 등 전성기를 맞았지만, 나중에 알렉산드로스 3세(알렉산더 대왕)의 군대와의 ‘이소스-가우가메라 전투’에서 패하여 멸망함으로써 역사의 축은 오리엔트에서 서방세계로 넘어가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와 유대교 고대 페르시아 인들의 종교에 대한 지식은 주로 ‘젠드 아베스타’, 즉 페르시아 인의 경전으로부터 얻은 것이며 창시자인 조로아스터(짜라투스트라)는 탁월한 종교 개혁가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가 분명하지는 않으나 조로아스터교의 교의가 키로스 시대(BC 550년)부터 알렉산드로스 3세의 페르시아 정복까지 서아시아 지방의 주된 종교가 되었음은 확실하다. 마케도니아 왕정 치하에서 외국의 여러 사상이 들어왔기 때문에 조로아스터의 교의도 많이 변질되고 퇴색하였지만 나중에는 다시 교세를 회복하였다. 조로아스터교 역시 원래 하나의 창조주를 가르치고 있지만 다른 두 신을 창조하고 자신의 본성을 그들에게 나눠주었다는 이원론적 교리를 전개하고 있으며, 우주의 역사는 ‘창조·혼합·분리’라는 3단계로 구분되는데, 현재의 세계는 ‘혼합기’에 해당되기 때문에 선신과 악신의 싸움이 천국과 지옥의 중간인 이 우주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고대의 조로아스터교는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바빌론의 유수시대에 유대교에도 많은 영향을 줌으로써 신학적인 발전과 조직화에 공헌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