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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노래방에도 시가 있어 젊은 시절에 시인이 아니었던 사람 누가 있는가 하는 이야기를 가끔 듣는다. 그런데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대개는 시를 잊고 산다. 시와 담을 쌓고 산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시를 써 보겠다는 의욕을 이야기하는 이들을 이따금 만난다. 반가워서, 시를 써 본 적이 있는가 물으면 대개는 고개를 가로 젓거나 초등학교, 중학교 정도에서 시를 써 본 적이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로 얼버무린다. ‘글은 손으로 쓴다’는 화두를 잊은 것이다. 시를 써 본 적이 까마득하다는 이들에게, 다시 시를 자주 읽는가 묻는다. 답은 아주 당연하기라도 한 것처럼, 시간을 못 낸다고들 한다. 시간을 내어 시를 읽을 정도면 시에 가까운 사람이다. 아무튼 시는 까마득히 먼 곳에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시를 이야기하고 시를 써 보는 나로서는 이따금 아득한 느낌에 빠지곤 한다. 시가 뭐기에 이렇게 사람들에게서 멀어져 간 것인가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를 쓰고자 하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간단하다. 시는 우리 주변에 널리 흩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이미 우리들 삶이 시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함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시는 노래다.” 노래가 있는 곳에는 늘 시가 있다. 다만 우리가 잘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묻히고 말 뿐이다. 시와는 무관하게 사는 사람들이라도 노래방에 가서 노래 몇 곡 못 부르는 사람은 없다. 그가 부르는 노래가 유행가인가 팝송인가 가곡인가 하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노래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잘한 노래, 잘 부른 노래는 그 자체가 시적 자질을 보증하는 단서가 된다. 노래 잘하는 사람, 노래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가수(歌手)라 한다. 가수를 예술가라 하고, 시인도 예술가에 든다. 그러니까 시 잘 읊는 사람이나 노래 잘 하는 사람이나 예술가 축에 든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노래를 할 줄 아는 이는 누구나 시를 알고 시를 쓸 수 있는 사람들이다. 정말 그러한가? 모임에서거나 노래방에서 노래를 할 때, 사람들은 노래 내용에 따라 감정을 잘들 조정한다. 기쁨과 슬픔의 영역을 넘나들며 열에 들뜨기도 하고 처연하게 가라앉아서 노래를 하기도 한다. 노래 내용에 내 감정을 전이하고 다시 거기 빠져들어 열창(熱唱)을 한다. 노래를 부르는 것은 시를 읊는 것과 흡사하다. 감정이 섞인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말을 할 때도 내 이야기를 하는 경우와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노래도 나의 심정을 직접 토로하는 경우도 있고 남의 마음을 내 노래에 담는 경우도 있다. 본인이 작곡가나 작사자가 아니면 대부분 남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남의 노래를 부르되 그것이 마치 나의 기쁨과 슬픔인 것처럼 노래한다. 노래에서 나는 남과 심정적으로 하나가 되어 기뻐하고 슬퍼한다. 시인이 쓴 것을 내가 읽으면서 혹은 낭독하면서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은 인간의 정서적 소통의 한 전례(典例)가 된다. 시인의 시를 내가 읽는 데도 정서적으로 공감하고 나아가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데 하물며 나의 심정을 시로 쓴 경우야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내가 쓴 시를 내가 읽어야 절실한 감정이 살아난다든지 체험이 우러난다든지 하는 식으로 과장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남의 승리에 환호를 하기도 하고 남의 슬픔에 눈물을 흘릴 줄도 아는 공감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공감력이야말로 인간의 보편성을 증거하는 중요한 징표이다. 인간의 예술활동은 절실한 자기표현을 통해 공감을 얻어내는 행위이다. 공감을 통해 타자를 이해하고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세계를 자아 가운데 아우르는 행위가 예술행위이다. 자기표현은 남에게 동의를 구하는 일이다. 나는 이러이러하게 느낀다, 그런데 당신도 그렇게 느끼지 않는가, 내 표현에 동의를 해 달라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이 예술행위다. 예술행위가 관객과 감상자를 요구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한 사람이라도 독자가 없다면 시인은 시인일 수 없다. 극단적으로 자기 자신이 독자라도 독자가 있어야 시적 행위가 가능하다. 시는 공감이고 대화이기 때문이다. 노래와 시가 상통한다는 이야기는 기실 진부하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노래가 본질적으로 시와 상통한다는 점을 설명할 일이 없기 때문에 그저 넘어간다. 거듭하건대 시는 노래다. 노래를 할 줄 아는 모든 사람은 시를 읽을 줄 알고 쓸 수 있다. 한잔 하고 나서 노래방에 다녀 나오면서 시원하다거나 가슴이 좀 트이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면, 그게 노래의 힘이다. 그런 힘은 시에도 있다. 노래를 하는 것처럼 시를 읽고, 노랫말을 만들어보는 것처럼 시를 써 보기로 하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가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노래 가운데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게 있다. 1997년에 발표된 노래니까 10년 넘겨 애창되는 노래다. 정지원의 작사로 되어 있고, 안치환이 작곡하고 노래한 곡이다. 우선 가사를 옮겨 놓고 읽어 보기로 한다(여기 옮겨 놓은 가사를 따라 노래를 불러 보거나 노래를 들어 보면서 가사를 음미하기 바란다. 형식을 따로 갖추지 않고 인용하기로 한다.)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내내 어두웠던 산들이 저녁이 되면 왜 강으로 스미어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으음~ .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 본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의 온기를 품고 사는 바로 그대, 바로 당신, 바로 우리, 우린 참 사랑.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의 온기를 품고 사는 바로 그대, 바로 당신, 바로 우리, 우린 참 사랑. 이 노래는 리듬이 힘차고 패기가 있어서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출하기 좋다. 노래하는 사람으로 상정되는 대상에 대한 의미부여가 당당하다.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 되지” 누군들 강물 같은 자기 노래를 가지고 싶지 않겠는가. 강물처럼 흘러가는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다가 이들이야말로 알게 된다고 하면, 노래하는 이들은 자연 그렇게 자신을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으로 동일시하게 된다. 이 노래를 하는 동안 당신은 이 노래의 주인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셈이다. 그런데 무엇을 아는가, 알게 되는 내용을 뒤에 제시함으로써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기대를 하게 하면서 음미하는 중에 노래가 진행된다. 호기심을 부추기기 위한 방안인지 내용이 그렇게 쉽게,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강물을 품고 있어서 강의 위치로 자리바꿈을 한다. 강물은 산과 어울려야 제대로 된 풍경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강산’이라는 말이 실감을 하게 된다. 강이 조용히 바라보는 산들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모양을 달리한다. 낮에는 오히려 침묵으로 ‘내내 어두웠던 산’들인데 저녁이 되면 강으로 스미어 꿈을 꾼다. 산 그림자가 질 시간은 아니니까 산의 기억이 혹은 산의 정기가 강으로 스미어 낮에 꾸지 못한 꿈을 꾼다. 산이 강에 잠기어 꿈을 꾼다는 데부터는 시적 발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이 들어간다. 누가 부둥켜안는가? 산과 강이, 아니면 강물 속에서 산들이? 아무튼 부둥켜안는 주체가 누군지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는 중에 노래는 멜로디를 따라 흘러간다. 멈추지 않고 나아가야 하는 노래 때문에 이미지의 확실한 논리는 리듬에 밀려 나간다. 그런 풍경은 강 같은 노래를 지닌 사람이라야 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제는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사실로 화제를 바꾼다. 그 사람이 아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되어 있다.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그 사람이 알게 된다는 것인데 맥락이 단순치를 않다. 형식상으로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 본 사람”이 알게 되는 사실을 나타내는 목적절로 되어 있다. 그 절에 포함된 주어는 ‘사랑’이다. 그런데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는 존재”는 사람으로 짐작이 된다. 헌데 사람이 ‘꽃눈을 닫’을 수는 없다. 더구나 잎을 키우는 것은 나무다. 사랑으로 자라는 나무가 “숲이 되고 산이 되어” 강에 비치고 강물과 교감하는 그런 세계에서 울려 퍼지는 환희성(歡喜聲) 그것이 메아리일 터이다. 이런 맥락의 뒤에 거듭되는 핵심구절이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하기에 앞에서 분석해본 사실들이 충분한 근거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바로 그대’이고 ‘바로 당신’ 이며 ‘바로 우리’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는 수사학 때문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렇다. 이 정도로 분석을 해 보아야 뜻을 알 수 있는 가사로 되어 있는 노래를 아무 거침없이 부른다는 점이다. 노래를 부르면서 뜻을 묻기 전에 느낌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에 취한다. 시도 그렇다. 전체적으로 산뜻하다, 명랑하다, 처연(悽然)하다, 비애감(悲哀感)이 든다 등 전체적인 분위기로 접근하고, 그러한 분위기와 느낌이 발생하는 구조는 시를 공부하는 과정에 부과되는 과업이다. 노래를 하듯이 시를 읽으라. 그리하여 그 리듬을 몸에 저장하라. 몸에 저장될 때는 시의 어느 한 부분이나 요소가 아니라 ‘시 전체’가 저장된다. 몸에 저장된 시들이 때를 만나면 저절로 당신의 시가 되어 싹터 나온다. [PAGE BREAK] 짜증스런 일상도 노래가 되나 문학을 하는 목적 가운데 하나는 고정관념을 탈피하는 것이다. 모든 노래는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도 고정관념의 일종이다. 시가 아름다운 정서의 표현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모든 감흥이 시가 된다. 짜증스런 일상을 노래하고 시로 읊을 수도 있다. 장기하라는 신예가 작사를 하고 작곡을 한 노래 가운데 싸구려 커피가 그러한 예에 속한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진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어 바퀴벌레 한 마리쯤 슥 지나가도 무거운 매일 아침엔 다만 그저 약간의 기침이 멈출 생각을 않는다. 축축한 이불을 갠다. 삐걱대는 문을 열고 밖에 나가 본다. 아직 덜 갠 하늘이 너무 가까워 숨쉬기가 쉽질 않다. 수만 번 본 것만 같다. 어지러워 쓰러질 정도로 익숙하기만 하다. 남은 것도 없이 텅 빈 나를 잠근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달라붙었다가 떨어진다. 반복) 뭐 한 몇 년간 세숫대야에 고여 있는 물마냥 그냥 완전히 썩어가지고 이거는 뭐 감각이 없어. 비가 내리면 처마 밑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멍하니 그냥 가만히 보다보면은 이거는 뭔가 아니다 싶어 비가 그쳐도 희꾸무리죽죽한 저게 하늘이라고 머리 위를 뒤덮고 있는 건지. 저거는 뭔가 하늘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너무 낮게 머리카락에 거의 닿게 조금만 뛰어도 정수리를 꿍하고 찧을 것 같은데 벽장 속 제습제는 벌써 꽉 차 있으나 마나. 모기 때려 잡다 번진 피가 묻은 거울 볼 때 마다 어우 약간 놀라 제멋대로 구부러진 칫솔 갖다 이빨을 닦다 보면은 잇몸에 피가 나게 닦아도 당최 치석은 빠져 나올 줄을 몰라. 언제 땄는지도 모르는 미지근한 콜라가 담긴 캔을 입에 가져가 한모금 아뿔싸 담배꽁초가. 이제는 장판이 난지 내가 장판인지도 몰라 해가 뜨기도 전에 지는 이런 상황은 뭔가. 이하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축축한 이불을 갠다” 등을 반복한다. 마치 이상의 소설 날개를 방불케 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무 할 일도 없이 빈둥대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 주인공의 짜증스런 일상을 지루하게 늘어놓았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남은 것도 없이 텅 빈 나를 잠근다”는 비유는 시적 자질을 보여준다. 그리고 주제부(라이트모티프)에 해당하는 구절,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를 아무런 변조 없이 몇 차례 반복하고 있다. 이러한 반복은 일상적 사건의 특징이다. 낡은 표현으로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식으로 지나가는 일상의 특징이 그러하다. 일상의 구조와 노래 가사의 구성이 유사성을 지니기 때문에 실감을 불러온다. 이러한 지루한 일상의 나열이 노래가 되는 까닭은 타성적 상투성을 깨고 지루하고 짜증나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을 과장하지 않는 것이 이 노래의 미덕이다. 시가 별거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출발하라. 좋으면 좋다고, 뭐가 좋은지 생각하면서 반복해서 써 나가라. 분통이 터지면 분통이 터진다고 되풀이해서 말해보고, 가능하다면 노래처럼 흥얼거려 보라. 가락이 생기면 일단 써 놓고 그게 시가 되는지 안 되는지는 뒤에 찬찬히 살펴보아도 늦지 않다. 노래로 시의 형식을 익히자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는 좀 다른 맥락에서, 시는 일정한 형식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형식은 우리와 친숙하고 어떤 것은 너무 익숙해서 그게 시 형식인지를 인식하기 어렵기도 하다. 그런 예가 시조(時調)다. 안민영의 시조 가운데 하나를 예로 든다. 바람이 / 눈을 몰아 / 산창에 / 부딪치니 3 / 4 / 3 / 4 찬 기운 / 새어들어 / 자던 매화를 / 침노하니 3 / 4 / 5(3) / 4 아무리 / 얼우려 한들 / 봄뜻이야 / 앗을소냐 3 / 5 / 4 / 4(3) 오른편에 적은 숫자는 음절수이다. 괄호 안의 숫자는 시조의 자수율 원형에 해당한다. 두 군데 변형이 나타난다. 종장의 첫 구절이 3음절로 맞아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치 않다. 이 시조를 호흡단락을 중심으로 분절하여 빗금으로 표시하면 4음보(四音步) 율격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요컨대 ‘4음보 3행’으로 쓴 시라면 시조형식의 기본을 갖춘 셈이 된다. 한문의 경우는 한자(漢字) 하나하나가 독립된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글자 수를 맞추기가 쉽다. 그런데 우리말에서는 명사에 조사가 붙고 동사는 활용을 하는 중에 글자가 추가되기 때문에 자수를 정확하게 맞추어 율격을 조성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호흡단락을 중심으로 율격을 조성하면 설명이 포괄성을 띤다. 가곡으로 널리 불리는 가고파는 이은상의 연시조를 가사로 삼은 것인데, 그 첫 수는 이렇게 되어 있다. 내 고향 / 남쪽 바다 / 그 파란 물 / 눈에 보이네 꿈엔들 / 잊으리요 / 그 잔잔한 / 고향 바다 지금도 / 그 물새들 날으리 / 가고파라 / 가고파 자수는 정확하게 맞지 않지만 음보는 위에 보는 것처럼 분석이 된다. 한국시에서 엄격한 의미의 정형시는 없다. 형식적 유연성이 한국시의 특질인 셈이다. 형식은 필요하되 그것이 가변성이 크다면, 짐짓 해보는 식으로 시의 틀에 맞추어 글을 만들어 보는 데서 시쓰기는 시작된다. 자유시의 시대에 무슨 시조냐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되지 않는 소리를 할 때 그를 비웃어 ‘시조하고 있다’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 또한 우리가 깨버려야 하는 고정관념이다. 사람들이 한 천 년쯤 해온 일은 까닭이 있는 법이다. 시조의 역사를 천년으로 본다면, 그 천년의 존재이유를 탐구할 것이지 시대가 변했으니 버려야 한다고 납들 일이 아니다. 글쓰기 어렵다고 한숨 푸념 뱉다가도 한나절 궁굴려낸 생각들 보석이 되면 보게나, 그대 가슴에 수를 놓는 별무리 이런 정도의 어설픈 시도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공연히 쑥스럽고, 그게 무슨 소용이 쓸모가 있는가 망설이는 동안 당신의 시적 재능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서서히 마모된다. 하얗게 바래고 닳아 없어지는 그대의 재능을 새파랗게 싹이 돋도록 하기 위해서는 노래방에 가서 노래하듯이 그렇게 시를 써 보시라. 운율이니 이미지니 상징이니 함축성이니 하는 등의 전문용어는 다 잊어버려도 좋다. 흉내도 방법이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지금 당장 컴퓨터를 켜고 글을 써 보라. 형식을 유념하자면 먼저 ‘노래틀’을 만들고 시작하라. 이러한 틀 속에 당신의 시적 상상력이 보석처럼 박히기를 바란다. 모종을 심듯이 철에 맞춰 하나하나 쌓아 가다보면 당신은 어느 사이 시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문명의 발달로 세계는 점점 좁아지고 있지만, 낯선 나라의 다른 문화에 적응하며 살아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이제 갓 자기가 속한 사회의 문화를 배워가기 시작한 어린 아이들의 경우 이러한 고충은 성인보다 몇 배는 더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이제 수많은 외국인이 거주하고, 가르쳐야 할 외국인 자녀들도 점점 늘어가고 있다. 전혀 다른 문화, 다른 언어를 사용해 온 외국인 자녀들이 우리나라에 적응하기 위해 교육은 필수적이지만, 그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아직 부족하다. 특히, 외국인 학교가 아닌 일반 학교에서의 고민은 더욱 깊을 수밖에 없다. 이에 외국인 특별학급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는 초등학교 두 곳을 소개하고 다문화 교육에 관한 고민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민족은 다르지만 이 아이들도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있다” -안산 원일초등학교 많은 산업시설만큼 외국인 노동자도 많이 거주하고 있는 안산시 단원구 선부 1동에 위치한 원일초등학교(교장 권상근)는 경기도교육청에서 지정한 ‘외국인근로자 자녀 특별학급’을 운영하고 있다. 원일초 외국인 특별학급에는 현재 9개국에서 온 14명의 학생이 수업을 받고 있는데, 특별학급이라고 해서 일과를 완전히 특별학급에서 따로 받는 것이 아니라 일반학급에 원적을 둔 채로 수업을 듣다가, 특별학급 수업시간이 되면 교실을 옮겨 수업을 받는다. 수업은 주로 생활과 언어 적응을 위주로 이뤄지며, 숙달 정도에 따라 2개조로 나누어 진행한다. 외국인 근로자 특히, 불법체류자의 경우는 한국어를 쉽게 습득하지 못하고 한국생활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그들의 자녀에게도 그대로 옮겨지기 때문에, 특별학급 운영의 초점은 무엇보다 한국에 대한 적응에 맞춰져 있다. 한국어를 모르는 부모, 후행학습에 한계 수업은 한국어로 진행되는데, 굳이 한국어 수업을 따로 시킬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이들의 한국어 발음이 대단히 정확하다. 하지만 아직 글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한국어 교육은 필수라고 한다. 보통 한국어를 제대로 알아듣는 데 1년, 숙달해서 사용하는 데 3년 정도가 걸린다. 좀 더 열심히 하면 기간을 줄일 수 있을 것도 같지만, 학교에서 열심히 가르쳐도 집에 돌아가면 부모들이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아 후행학습이 이루어지질 않는다. 한국의 농촌 남성과 외국인 여성이 결혼해 이룬 일반적인 다문화가정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여기에서 학급운영의 고민이 시작된다. 학생들이 1학년 때부터 특별학급에서 수업을 받으면 언어숙달에 3년의 시간을 투자한다고 해도 나머지 3년 동안 노력해 다른 학생들과 원활한 수업이 가능하지만 학령이 높은 상태에서 입학하는 경우가 많이 이 또한 여의치가 않은 실정이다. 중학교 진학을 위해 고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준별 개별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중학교에 진학을 하지 못하거나, 입학을 하더라도 중간에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중학교 진학에 큰 어려움 언어문제 외에도 어려움은 있다. 법규상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초등학교 6년 과정을 이수해야 하는데, 학령이 높은 상태에서 입학하는외국인 근로자 자녀의 경우는 6년을 채우기에는 일반학생들과 나이차이가 너무 많다. 그러다보니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고, 중학교에 진학한다 해도 중학교에는 아직 외국인 자녀를 수용할 만한 시스템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아 적응에 어려움을 겪을 뿐 아니라 일반학생들의 보이지 않는 텃세가 어려움을 가중시킨다고 한다. 학교교육에 확 달라지는 아이들 학교에 들어 온 후 태도가 확 달라지는 아이들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는 손소연 담임교사는 “더 많은 아이들이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문호가 개방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특히 불법체류자 자녀의 경우 2년 내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출국해야 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 어려운데, 학교를 마칠 때까지만이라도 국내에 체류하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인근의 원곡초등학교에 특별학급이 새로 지정되어 좀 더 많은 학생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일초 권상근 교장은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을 담당교사 혼자 가르치려니 언어문제 등 어려움이 많았다”면서 “원곡초등학교에도 특별학급이 생겼으니 국적별로 서로 나눠 가르치자고 건의하는 것을 고려 중”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끝으로 권 교장은 “비록 민족은 다르지만 앞으로 우리나라의 구성원으로서 한 부분을 담당하게 될지도 모를 외국인 근로자 자녀들이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학교에 대한 즐거운 기억으로 교육외교를 실천” -대전자운초등학교 육,해,공 삼군의 교육기관이 모여 있는 자운대 안에 위치한 대전 자운초등학교(교장 정종진)는 외국에서 국내로 유학 온 외국군 자녀 특별학급을 운영하고 있다. 군부대 내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자운초의 외국인 특별학급은 다른 학교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비록 우리나라보다 후진국인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 자신의 나라에서 엘리트로 꼽히는 영관급 이상 군인들의 자녀이고 1~2년 정도 단기체류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학생들을 한국화하는 것이 주목적인 다른 외국인 특별학급과는 교육목적이나 과정에 차이가 있다. 한국에 애정을 갖도록 하는 교육 자운초 정종진 교장은 특별학급의 운영방향을 묻는 질문에 대해 ‘교육외교’라는 말로 답한다. 앞으로 자기 나라에서 중요한 인재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은 학생들이 우리나라에 대한 애정을 가질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어 교육 등 우리나라에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교육은 실시하지만, 굳이 짧은 시간 내에 한국화를 시키려하기보다는 우리 문화를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를 위해 사물놀이 발표회, 유성 장날 체험, 태권도 교육, 국악수업 등 체험 위주의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학생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앨범으로 만들어 보관하는 등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우리나라를 찾았을 때 자신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도록 기록물을 보관하고 있다. 자운초의 외국인 특별학급은 2007년 매일 아침, 저녁으로 정 교장이 외국인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우리말 교육을 시킨 것이 계기가 되어 지난해 처음 만들어졌고 올해는 2개 반으로 확대 편성됐다. 학년 구분 없이 보통 5~9개국 10~20명의 학생으로 운영되며, 현재는 요르단, 터키, 브라질 등 5개국 13명의 학생이 수업을 받고 있다. 자운초 역시 특별학급에 속하더라도 원적은 일반학급에 두고 오전 시간에만 교실을 옮겨 수업을 받는다. 우리나라에 온 지 얼마 안 되고 영어가 가능한 학생들이 많아 수업은 보통 영어로 진행되는데, 새로운 단어가 나오면 각자의 모국어와 영어, 한국어로 차례로 읽어보는 방식으로 학생의 이해를 돕는다. 외국인 학생을 통해 국제적 시각 키워 특별학급 운영이 외국인 학생에게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반 학생들도 외국인 학생과 함께 생활하며 외국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어 국제적인 시각을 키우는 데 효과가 크다고 한다. 특히 매월 돌아가며 외국인 학생과 국내 학생을 단짝 친구로 정해 서로 편지나 선물을 주고받고 집에 초대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외국인 친구와 1:1 단짝친구 맺기’는 다른 일반 학교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학습기회이다. 또한 터키의 날, 브라질의 날 등 매월 한 차례 다른 나라에 관한 정보를 소개하고 음식과 복장을 경험하는 행사를 개최해 세계의 여러 문화를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다. 가르치는 기쁨에 외교를 한다는 보람이 더해 학생들을 집으로 초대해 우리의 예절을 가르치는 등 학급운영에 생활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것이 힘들기도 하지만 가르친다는 즐거움에 더해 외교도 함께 한다는 보람을 느낀다는 임수진 교사는 “앞으로도 아이들에게 한국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 소록도역사관, 한센병 자료관 지난 호에 이어 소록도를 찾아갑니다. 이름만으로도 무시무시한 검시실과 감금실 맞은편에는 자료관이 있습니다. 자료관은 제1관 소록도역사관과 제2관 한센병자료관으로 나뉩니다. 소록도역사관은 병원 현황, 원생의 생활 모습, 영부인 기념대, 사건과 인물, 자연환경을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고 한센병자료관은 한센병 관련 역사적 인물, 치료기구, 문예작품, 도서, 한센병의 과거와 현재, 한센병치료제 등을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건물은 작지만 소록도와 한센병에 대한 자료가 잘 정리되어 있어 소록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곳입니다. 소록도역사관에서는 소록도 사람들이 쓰는 말에 대해 정리해 놓은 패널을 볼 수 있습니다. 그중 소록도에서 생활하는 환우들을 일컬어 ‘문 씨(文氏)’ 또는 ‘한 씨(韓氏)’라고 부르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예전에 한센병 환우들을 비하해 문둥이, 나환자 등으로 부른 것에 대해 자신들을 좀 더 높여 부르는 의미로 문 씨라고 불렀고 이후 한센병의 원인을 발견한 학자의 이름에서 한 씨라는 성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답니다. 또, 이 섬에서 ‘모집(募集)’이라는 말은 1930년대 병원 확장 당시 전국에서 수차에 걸쳐 행해졌던 강제수용을 의미한다고 하네요. 이렇게 모집되어 온 환자들은 대개 젊고 건강해 중증환자의 병간호 또는 병원 내 잡다한 작업에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한센병이란 이름은 노르웨이의 세균학자인 한센(1841~1912)에게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는 1873년에 나결절(癩結節)의 세포 내에서 한센균을 발견해 한센병이 유전이나 천형병이 아니라 단순한 전염병임을 밝혀낸 사람입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세종대왕 때 최초로 국가적 차원으로 한센병 환자들을 관리했다고 합니다. 제주도에 치료소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세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제주도에 나질(환센병)을 앓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제주 안무사가 계를 올려 말하기를, 주 및 정의와 대정에 나질이 흥행하고 있습니다. 만일 병을 얻은 사람이 있으면 전염될 것을 두려워해 해변의 사람이 없는 곳에 옮겨 놓습니다. 그 환자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바위 낭떠러지에 떨어져 모습을 잃으니 진실로 가련하고 불쌍합니다.’ + 중앙공원의 명암 소록도를 찾는 외부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곳이 바로 중앙공원일 것입니다. 중앙공원은 소록도 해수욕장과 더불어 외부에 개방되는 대표적 명소입니다. 공원은 소록도갱생원 시절인 1936년 12월 1일에 착공해 3년 4개월의 공사 끝에 1940년 4월 1일에 완공되어 ‘부드러운 동산’이라 불렀답니다. 연 6만여 명의 불구원생이 강제 동원되었는데 산림을 깎아 6000평 규모의 용지를 조성하고 완도, 득량만, 주변 도시에서 암석을 채취해 운반했으며, 관상수는 일본과 대만 등지에서 반입해 식재했다고 합니다. 이후 1971년과 1972년 두 차례에 걸쳐 공원용지 확장이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공원에는 솔송, 능수매화, 황금편백, 반송, 삼나무, 돈나무, 매화, 나한송과 같이 독특한 형태의 관상수를 비롯해 공덕비나 시비, 방문기념비 등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공원 뒤에는 수많은 원생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더욱더 애절한 마음이 듭니다. 공원을 조성할 당시 원장으로 있던 일본인 수호 원장은 악명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제4대 원장으로 1933년부터 8년 9개월 동안 머물렀는데 온갖 강압적인 수단으로 환자들을 동원해 소록도 내의 각종 공사를 추진한 장본인입니다. 환자들에게 기금을 강제 징수해 1940년 8월 20일 자신의 동상을 세운 후 매월 20일을 ‘보은감사일’로 정해 환자들로 하여금 참배하게 했습니다. 또 연간 140만 장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의 벽돌 공장을 지었으며, 벽돌 제조, 자재 하역, 골재 운반, 도로 개설, 도배 등 힘들고 험한 공사에 원생들이 동원되었습니다. 게다가 전쟁이 확대되자 송진을 채취하고 연간 1500장의 토끼가죽과 3만 포의 숯을 제조하는 등 전쟁 군수 물자 생산에도 동원했었다네요. 이렇게 1차, 2차, 3차 확장 사업을 전개하면서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집되어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소록도를 세계 최고의 나요양시설로 만들겠다는 그는 결국 참다못한 원생 이춘상에 의해 살해되고 맙니다. 이에 반해 소록도에는 원생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하나이 원장 창덕비가 남아 있습니다. 제2대 원장이었던 일본인 하나이 원장은 1921년부터 1929년까지 8년 동안 재직하면서 원생들을 위해 선정을 베풀었는데, 일상생활에서 일본식을 강요하던 초대 원장과 달리 환자들의 요구에 따라 이를 상당히 완화하고 본가와의 통신이나 면회,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허용하고 교육의 기회도 넓혀줬다고 합니다. 이러한 원장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원생들 스스로 모금한 돈으로 비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광복 후 일제 잔재 청산정책에 의해 비석이 폐기될 위기에 처하자 원생들이 몰래 땅에 묻어둔 것을 5 • 16 이후에 발굴해 중앙공원 입구에 다시 세웠다가 1988년 원래의 자혜의원 옆에 옮겨 세워두었습니다. 역대 원장들은 저마다의 천국을 가꾸기 위해 애썼겠지만 결국 그것은 ‘당신들의 천국’일 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청준의 소설당신들의 천국에서 드러나듯이 천국을 가꾸어 나가려는 데 병원 측과 환우들 간의 갈등은 명약관화한 과제였을 터입니다. ‘우리들의 천국’을 건설한다면서 결국 자신을 영웅화하고 환우들을 착취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환우들과의 충분한 대화와 타협이 없는 천국 건설은 결국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 속 조 원장의 오마도 간척사업도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요. [PAGE BREAK] 구라탑+ 소록도를 찾은 사람들 중앙공원에는 소록도를 찾아 봉사활동을 하고 간 다른 나라 사람들의 공적비도 있습니다. 다미안공적비와 세마공적비가 그것입니다. 또, 공원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는 구라탑(救癩塔)은 1963년 8월 1일에 완공되었는데 미카엘천사가 사탄을 밟고 있는 장면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환우들의 자립을 위한 오마도 간척사업을 펼칠 때 국제평화봉사단으로 소록도를 찾아온 국제워크 캠프단이 봉사활동을 펼치면서 병원 측과 의논해 세웠다고 합니다. ‘한센병은 낫는다’는 글귀가 사방으로 드러나 있어 한센병을 현대의학으로 뿌리 뽑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돋보입니다. 생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소록도를 두 번이나 방문했습니다. 그의 방문 이후 소록도의 환우들과 일반인들과의 차별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합니다. 교황이 방문했던 성당 건너편에는 육영수여사공덕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이미 불구가 되어버린 의지할 곳 없는 고령자들을 위해 양지회 기념회관을 마련해준 영부인을 기리는 비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준공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준공 3개월 전 피살되고 말았습니다. 소록도를 직접 찾은 최초의 영부인은 이희호 여사였습니다. 여사는 2000년 5월에 소록도 방문했는데 자원봉사자들을 위한 자원봉사회관 건립을 약속한 후 2001년 11월 완공했습니다. + 한하운 시비 한하운은 대표적인 한센병 환우였습니다. 그가 쓴 나의 슬픈 半生記에 처음 한센병을 진단받았을 적 상황이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 성대 부속병원을 찾은 한하운은 기타무라 박사에게서 처음으로 한센병 판정을 받게 됩니다. 박사가 신경을 만지고 바늘로 피부를 찌르고 했지만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박사는 마치 재판장이 죄수에게 말하듯이 문둥병이라 하면서 소록도로 가서 치료하면 낫는다고 했답니다. 뇌성벽력 같은 선고 앞에 앞이 캄캄해진 시인은 그 판정을 부정하고 부정했다고 하네요. 공원에는 그의 대표작 보리피리 시비가 있습니다. 그가 쓴 또 다른 시에서는 한센병을 앓는다는 이유로 어쩔 수 없는 죄인처럼 살아가야 했던 심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 소록도의 학교 소록도는 등록문화재, 즉 근대 보물로 가득한 섬이기도 합니다. 구 소록도갱생원 검시실, 구 소록도갱생원 감금실, 구 소록도갱생원 사무본관 및 강당, 구 소록도갱생원 만령당, 구 소록도갱생원 식량창고, 구 소록도갱생원 신사, 구 소록도갱생원 등대, 소록도 구 녹산초등학교 교사, 소록도 구 성실중고등성경학교 교사, 구 소록도갱생원 원장관사가 모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간단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구 녹산초등학교는 1935년경 사설 보통학교로 건립된 초등학교로, 한센병 환자를 대상으로 자체적으로 설립한 초등학교라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1961년 8월 3일 문교부의 사립 인가를 받았고 이후 1987년 2월 더 이상의 입학생이 없어 폐교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녹산중학교는 1946년 9월 17일에 설립해 1967년 5월까지 병원에서 운영하고 1967년 6월부터 성실고등공민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아 교회에서 운영했습니다. 성실고등성경학교는 1957년 5월 교역자 양성을 목적으로 소록도교회에서 설립했고 이후 인문고등학교 교육과정으로 전환했으나 80년대 말 더 이상의 입학생이 없어 폐교되었습니다. 이와 별도로 병원에서는 아이들에게 병이 전염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이들을 격리할 영아원과 보육소를 운영했습니다. 환자인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즉시 영아원으로 보내져 만 3세까지 양육된 후에 보육소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지금 소록도에는 학생들이 있는 유일한 학교로 소록도분교가 있습니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로 아주 작은 학교이지만 섬 이름만큼 예쁘게 꾸며져 있습니다. 특히, 모 대학에서 건물 벽에 그려 준 재미있는 그림들은 같은 분교에 근무하고 있는 제게 벤치마킹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소록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연륙교가 정식으로 개통되었습니다. 다음에 소록도를 찾을 때는 승용차로 갈 것 같군요. 이제 한결 가까워진 그 길로 인해 소록도가 섬사람들과 바깥사람들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편리해진 교통으로 이 섬이 더 이상 당신들의 천국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천국으로 바뀔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을 쓰는 내내 소록도의 붉은 벽돌 건물들, 중앙공원의 울창한 숲, 해수욕장의 소나무 숲이 자꾸만 저를 유혹하고 있네요. 여름방학이 오면 얼른 떠나고 싶습니다.
정년을 앞둔 시점에서 호적정정을 한 경우 정년 산정의 기준 시점 최근 대법원에서는 공무원이 호적을 정정해 출생일을 변경한 경우 정년도 이에 맞춰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원심에서는 정년퇴직일은 생물학적인 연령이 아니라 규범적으로 판단해야 하고, 원고가 지방공무원으로 임용된 이래 약 36년간 신규임용 당시 호적상 생년월일이 기재된 공무원인사기록카드의 내용에 대해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다가 이를 기준으로 산정한 정년퇴직일을 약 1년 3개월 앞둔 시점에 이르러 호적상 생년월일을 정정하고 호적정정 후의 생년월일을 기준으로 해 정년의 연장을 요구하는 것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한다며 원고 패소판결을 내린 바 있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에서는 “공무원의 인사사무 처리규칙에는 인사기록 변경 신청기간을 제한하지 않고 있고 원고가 신의성실의 원칙을 어겼다고 볼 수 도 없다"며 원심을 깨고 사건을 광주고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아울러 대법원은 "지방공무원 인사기록 및 인사사무 처리규칙 [별표 3]이 지방공무원의 정년퇴직 시 구비서류로 가족관계기록사항에관한증명서 중 기본증명서 1통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지방공무원법상 정년은 지방공무원의 정년퇴직 시 구비서류로 요구되는 가족관계기록사항에관한증명서 중 기본증명서에 기재된 실제의 생년월일을 기준으로 산정해야 한다"며 정년 산정일의 기준을 판시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호적정정을 하더라도 임용 시 기록한 나이를 기준으로 정년을 산정하는 것으로 다뤄 온 기존 개념에 큰 변화를 가져 온 판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판례 : 2008두21300 공무원지위확인) [PAGE BREAK] 사립학교 교장 임기만료 시 신분의 상실 여부 사립학교법 제53조 제2항의 규정에 근거한 학교법인의 정관에 임기가 정해진 사립학교 교장은 그 임면권자에게 임기가 만료된 자를 다시 임명할 의무를 지우거나 그 요건 등에 관해 아무 근거규정을 두고 있지 않는 이상, 그 임기가 만료된 때 재임명을 받아야 하고 재임명을 받지 못하면 특별한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교장으로서의 신분관계가 종료되어 당연퇴직을 하게 됩니다. 또한 사립학교법 제52조, 교육공무원법 제6조와 제7조 등에서 사립학교의 교장과 교장 이외의 교원의 임용자격과 임용절차를 달리 규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립학교의 교장으로서 그 임기가 만료되면 그 임면권자에게 그 임기가 만료된 자에 대해 교장 이외의 교원으로 임용할 의무를 지우거나 그 요건 등에 관해 아무런 근거규정을 두고 있지 않는 이상 별도의 임용절차가 없다면 임기만료와 동시에 교원으로서의 신분도 확정적으로 상실됩니다. 한편 최근 대전지법에서는 사립학교 교감의 임기제가 사립학교법에 명시가 되어 있지 않더라도, 정관을 통해 임기제로 운영하는 것을 위법 • 무효로 단정할 수 없다며 임기만료 후 평교사로 발령한 것이 위법하지 않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참고판례 : 대법원, 1994. 5. 13 / 대전지법 2008가합669 강임처분무효확인) 재임용거부처분 취소판결 후, 재임용되기까지의 기간이 공무원연금법상 재직기간에 산입되는지 여부 기간을 정해 임용된 국ㆍ공립대학의 교원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임용기간의 만료로 교원으로서의 신분관계가 종료됩니다. 임용기간이 만료된 교원의 재임용이 거부되었다가 그 재임용거부처분이 법원의 판결에 의하여 취소되었어도 임용권자는 다시 재임용 심의를 하여 재임용 여부를 결정할 의무를 부담할 뿐, 위와 같은 취소 판결로 인하여 당연히 그 교원이 재임용거부처분 당시로 소급하여 신분관계를 회복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재임용거부처분 취소판결을 거쳐 재임용된 교원이라도 임용기간 만료로 교원으로서의 신분을 상실한 후 재임용되기 전까지의 기간은 공무원연금법 제23조 제1항에 정한 재직기간에 산입할 수 없습니다. (참고판례 : 2009두416 재직기간합산불승인처분취소)
“최초의 사회주의체제 파리코뮌, 티에르의 중앙정부와 싸워 결국 승리하다.” 가정의 이야기일 뿐 파리코뮌은 2개월여 만에 사라졌다. 파리코뮌의 뿌리는 프랑스 • 프로이센전쟁이었다. 독일 통일을 주도한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전쟁(1866)에서 승리한 후 통일의 완성을 위해 계획한 그 다음 일은 프랑스와의 전쟁이었다. 당연하지만 프랑스는 자국의 동쪽에 통일된 독일이 등장하는 것을 우려했고, 따라서 오스트리아를 꺾은 후 프로이센이 결성한 북독일연방에 저항한 남독일의 영방들과 유대를 강화하는 등 독일의 통일을 가능한 막으려 했다. 통일과업 시작 때부터 프랑스와의 일전이 불가피함을 인지하고 대비해온 비스마르크에게 프랑스 • 프로이센(보불)전쟁의 직접적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스페인왕위계승 문제였다. 스페인인들이 1868년에 그들의 여왕을 몰아낸 후 왕위가 비어 있었는데, 1870년에 이르러 프로이센 왕가 호엔촐레른가의 레오폴드 공(公)이 국왕 물망에 올랐다. 빌헬름 1세하지만 레오폴드는 스페인 국왕이 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프랑스가 결사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반(反)독일적 정서가 강했던 프랑스에서 반(反)레오폴드 • 반독일 여론이 들끓었다.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의 친척인 레오폴드가 스페인 왕이 될 경우 프랑스는 호엔촐레른가의 프로이센과 스페인에 포위될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레오폴드는 프랑스의 반대가 심하고 유럽의 여론도 호의적이지 않자 1870년 7월 12일 사의를 표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프로이센 왕가가 스페인 왕위를 영구히 겸하지 않을 것임을 보장받고 싶어 했다. 독일주재 프랑스대사 빈센트베네디티는 확답을 받기 위해 7월 13일 온천장 엠스에서 휴양 중인 빌헬름 1세를 방문했다. 빌헬름은 베네디티에게 “나는 호엔촐레른가의 수장으로써 동의했을 뿐 프로이센정부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만약 레오폴드 부자(父子)가 후보수락을 철회할 의향이면 나도 수락할 것이다”고 말했다. 빌헬름 1세는 프랑스 대사와의 회견내용을 몰트케 등과 함께 베를린에 대기하고 있던 비스마르크에게 타전케 했다(엠스전보). 프랑스의 선전포고를 유도하는데 그 전보를 이용하기로 한 비스마르크는 그 다음날 전보의 앞뒤 내용을 잘라 발표했다. 양인 사이에 있었던 정중한 의례가 빠져버린 ‘엠스전보’엔 “산책하는 중에 가로막으며”, “대단히 성가신 태도로…(중략)… 요구하다”, “나는 그런 개입이 옳지도 가능하지도 않다며 꽤 완강히 요구를 거절했다”는 등의 문구가 들어 있었다. 그 전문은 독일인에게는 프랑스대사가 자국 국왕에게 무례한 짓을 한 것으로, 프랑스인에게는 자국 대사가 모욕당한 인상을 주게 되었다. 독일의 여론도 일변해 반(反)비스마르크세력의 목소리는 줄어들고 프랑스 타도를 외치는 주전론이 기세를 올렸고 프랑스의 경우 국민의 분노가 충천했다. 에밀 졸라의 소설 나나의 끝 장면이 파리의 들끓은 반(反)독일 정서를 전해준다. 시민들은 “베를린으로! 베를린으로!”하고 외쳤다. 그 1주일 뒤인 1870년 7월 19일에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는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했다. 그리하여 독일 통일을 위해 비스마르크가 기획하고 연출한 제2의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전쟁에서 실전경험을 쌓은 최강의 프로이센군은 노도와 같이 프랑스로 진격했다. 더욱이 전쟁이 일어나자 남독일 영방들이 나폴레옹 3세의 기대와는 달리 프로이센 편에 가담했다. 피는 역시 물보다 진했다. 독일군은 3개 군단으로 나뉘어 프랑스로 진격했다. 2개 군단은 로렌으로 쳐들어가 바제느 휘하의 프랑스군을 메츠에서 포위했다. 메츠에서 포위된 프랑스군을 구원하기 위해 나폴레옹이 직접 나섰으나, 프로이센군은 스당에서 프랑스군을 괴멸시키고 그를 포로로 잡았다. 개전 후 한 달 반쯤인 9월 2일의 일이었다. 제3군단도 알자스로 침입해 맥마흔이 지휘한 프랑스군을 괴멸시켰다. 파리가 포위된 상태에서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이 무너지고 공화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파리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저항했으나 군사적 열세에 식량까지 떨어져 1871년 1월 28일에 결국 항복했다. 이어 그해 2월 12일에 휴전조약을 비준할 국민의회가 보르도에 설치되고 티에르가 임시행정장관에 임명되어 뒷수습에 나섰다. 그리고 국민의회는 조약을 비준했으나 프랑스인들의 분노와 저항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한편 독일은 오랜 꿈을 성취해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 전체를 아우르는 독일제국을 탄생시켰다. 비스마르크가 통일과업을 시작한 지 10여년 만의 일이었다.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는 프랑스의 항복 열흘 전인 1월 18일에 루이 14세가 프랑스의 영광을 과시하던 베르사유궁전에서 독일제국을 선포하고(제1제국인 중세의 신성로마제국을 계승한 제2제국이었다) 황제로 즉위했다. 통일의 영웅 비스마르크는 후작작위와 함께 제국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때 이미 히틀러의 제3제국을 태동시키고 있었다. 프랑스는 1871년 5월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체결된 평화조약으로 알자스 전체와 로렌의 일부를 독일에 양도하고 배상금(50억 프랑)도 지불했다. 프랑스의 국민적 굴욕감은 크고 지속적인 것이었다. 국경을 사이에 둔 이웃 나라, 오랜 대립의 역사를 기록해온 나라와의 전쟁에 참패한 후에 땅을 빼앗기고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나라의 국민이 느낀 패배감과 복수심, 그리고 굴욕과 분노가 눈에 보일 듯하다. 알퐁스 도테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은 독일에 병합되어 다음날부터 독일어를 배워야 했던 어느 소년의 이야기를 빌려 알자스 • 로렌 사람들의 참담한 심정을 전해 준다. “어린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을 위해 수업을 하는 것은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알자스와 로렌 주(州)에서는 이제부터 독일어 외에는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베를린으로부터 시달된 것이에요… 오늘은 프랑스어를 배우는 마지막 수업이 됩니다… ”교실 저쪽 구석에서는 오제영감님이 안경을 끼고 앉아서, 자신의 아베세 독본을 두 손으로 들고 이 조그만 어린애들과 함께 글자 읽기를 하고 있었다…. 별안간 학교의 괘종시계가 열두 시를 치고, 이어서 알젤뤼스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프로이센병사의 나팔소리가 우리 교실의 창 밑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멜 선생님은 얼굴이 새파랗게 되어, 교단 위의 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그렇게 크게 보인 적은 일찍이 없었다. ‘여러분’하고 그는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 나는… 나는…”그러나 무엇인가가 그의 숨을 막히게 했다. 그는 말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그는 칠판 쪽으로 돌아서더니 한 조각의 분필을 집어 들고 있는 힘을 기울여 한껏 큰 글씨로 이렇게 쓰는 것이었다. 프랑스 만세(VIVE LA FRANCE)! 그리고는 머리를 벽에 눌러대고 잠시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있더니, 이윽고 말없이 우리에게 신호하는 것이었다.“끝났어… 모두 돌아가거라.” [PAGE BREAK] 하지만 슬퍼하고 분노하는 것이 끝은 아니었다. 임시정부의 항복 선언과 민의회의의 휴전조약 비준을 수용하지 않으려던 노동자와 시민, 그리고 무장해제 당한 국민군 등은 결국 1871년 3월에 폭동을 일으킨 뒤 ‘파리코뮌’으로 불리는 자치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사회주의자와 일부 급진적 중산층이 주도하고 노동자 • 하층시민 • 군인 • 자영업자 등이 참여한 파리코뮌은 임시정부와 국민의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파리시의 자치권을 주장했다. 이후 리용, 마르세유, 툴루스 등지에서도 코뮌이 출현해 패전 프랑스는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1871년 3월 1일에 파리에 입성해 주둔하고 있던 프로이센(독일)군은 파리 시민들의 무언의 적의와 저항 가운데 3일에 철수했다. 그로부터 프랑스, 특히 파리는 중앙정부와 파리코뮌의 각축장으로 변해갔다. 3월 18일, 임시정부는 프랑스국군에게 파리에서 농성하던 코뮌 측 군대의 대포를 압수하도록 명령했다. 국군과 시민군 사이에 마찰이 있었으나 그때는 큰 충돌 없이 사태가 일단락되었다. 양측 대표가 파리시청에서 회합한 후 코뮌 측의 중앙위원회가 결성되고 중앙정부는 베르사유로 퇴거했다. 중앙위원회는 즉각 포고문을 내어 인민의회, 곧 코뮌의회의 의원선거가 실시될 것이며 중앙위원회는 그때까지 잠정적으로 활동할 것임을 공지했다. 파리코뮌 의원선거가 며칠 후인 3월 26일에 시행되었다. 노동자 출신이 20석을 차지했고 자영업자와 중산시민 출신이 나머지 70석을 점유했다. 28일에는 20만의 시민이 파리시청 광장에 모인 가운데 코뮌수립 선포식을 거행했으며 29일에는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아래에 군사 • 재정 • 식량 • 노동 • 교환 • 교육 • 외교 • 사법 • 보안의 9인 위원을 두었다. 코뮌은 이어 징병제와 상비군제 폐지, 인민에 의한 국민군 설치, 미지불 집세의 일시 연기, 공무원 급료의 최고액 설정, 종교재산의 국유화, 주인이 방기한 공장의 노동조합 관리, 부채의 지불유예와 이자 폐기, 노동자의 최저생활 보장 등의 정책을 시행하거나 관련 법령을 제정했다. 중앙정부와 파리코뮌의 대결로 프랑스는 일시 무정부적 상태에 빠졌으나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파리에서 철수했던 중앙정부군이 전열을 정비한 후 코뮌 측을 압박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알자스에서 프로인센군과 싸웠던 멕마흔이 지휘한 정부군은 프로이센군의 지원 아래 5월 21일 파리로 진격해 파리코뮌 세력을 포위했다. 이후 파리 교외에 독일군이 주둔해 있는 상황에서 중앙정부군과 코뮌군은 생사를 건 처절한 살육전을 전개했다. 정부군은 5월 21일부터 28일까지 피의 시가전을 통해 한 거리 한 거리를 탈환해 갔고, 그 과정에서 다수의 시민이 살상되었다. 코뮌 측도 파리대주교를 포함한 많은 인질을 처형했다. 저명인사를 포함한 3만 명의 시민이 죽은 ‘피의 1주일’ 후 파리코뮌은 붕괴되었다. 파리코뮌은 해체되었으나 그 후유증은 이후 30여 년 동안 프랑스를 괴롭혔다. 정부 측과 파리코뮌 측은 서로 상대의 과잉행위와 비행을 비난했고, 파리시민들 사이의 불화는 프랑스의 정치와 사회에 오랫동안 악영향을 끼쳤다. 사실 프랑스는 위그노전쟁 때의 신 • 구교도의 싸움, 프랑스혁명 때의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의 투쟁,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가 독일에 군사기밀을 판 혐의로 1894년에 체포된 이래 드레퓌스의 유 • 무죄를 놓고 정계와 학계가 벌인 심각한 대립,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알제리 처리문제를 둘러싸고 벌인 대립 등 ‘프랑스 • 프랑스전쟁’으로 불리는 국론의 분열과 대립을 자주 겪었지만 파리코뮌 사태도 그 중의 하나였다. 파리코뮌이 실패하지 않았을 경우 프랑스와 서유럽은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파리코뮌은 흔히 최초의 사회주의체제로 평가되지만, 파리코뮌이란 사회주의체제의 실험이 성공했을 경우 사회주의는 더 빨리, 그리고 더 확고하게 뿌리를 내려 인류 복지에 이바지했을까? 혹은 46년 후 볼셰비키의 소련공산체제가 한바탕 실험으로 끝났듯이 파리코뮌 또한 결국은 무익한 실험으로 막을 내렸을까?
학교에서 특별한 교육 운동 펼쳐보자 1983년 미국에서 ‘위기에 처한 국가(A Nation at Risk)’라는 보고서가 레이건 대통령에게 보고된 이후, 세계 여러 나라도 교육개혁을 국가적 과제로 설정하고 적극 추진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 개혁의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추진해 왔다. 하지만 아직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지는 못했다. 교육개혁 및 교육정상화를 국가적 수준의 거시적 관점에서 추진하는 이유는 교육이 미래의 국가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주요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인 듯하다. 전문가들은 미래의 국가 경쟁력은 산업화 시대의 기업 등 ‘집단’보다는 우수한 개인, 즉 ‘인재’의 수준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지식정보화 사회가 더 진행된 미래 사회에서는 뛰어난 인재 한 사람이 수만 명을 먹여 살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하는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사 빌 게이츠의 예에서 보듯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교육을 주요 과제로 다루고 있는 것은 우리 교육계에 호재가 아닐 수 없다. 국가적 관심이 교육에 모아지고 있으니, 어쨌거나 여러 가지 지원이 예상되고 좋은 정책이 개발되고 실행될 것이고, 우리 교육이 개혁 • 개선되고 정상화되면 교육의 본질을 추구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희망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교육개혁정책은 다른 생각을 가진 다양한 집단들의 조직적인 이의 제기 및 반대에 부딪혀 수년간 논의만 이루어질 뿐 실질적인 교육 개혁 결과를 뚜렷하게 나타내기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교육개혁 및 교육정상화 방향은 대체로 국가 - 교육청 - 학교 - 교실로 이어지는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 이를 교실 - 학교 - 교육청 - 국가순으로 아래서부터 접근해 보는 것은 어떨까? 본고에서는 학생과 선생님이 만나는 지점인 교실에 주목해 정상적인 교육을 수행하려는 ‘교실승리운동’에 대하여 논의해 보고자 한다. 학교에서 보다 특별한 교육운동을 펼친다면 달라진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왜 교실승리인가? 초 • 중등 보통교육 수준에서 국가적으로 추진하는 교육 개혁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교육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하는데, 정확히 어느 부분의 질을 높여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여러 가지 답이 나올 수 있지만 선생님과 학생이 만나는 곳, 즉 교실이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보았다. ‘교실의 질=선생님의 질+학생들의 질’로 이것을 높이는 것이 궁극적으로 교육의 질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의 현장전문가(선생님)와 미래의 리더(학생)들이 함께 가르치고 배우는 교실 구성원들의 유능감과 에너지가 넘친다면 교육의 질은 당연히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교실승리란, 구성원인 선생님과 학생들이 믿음에 기초한 신뢰를 바탕으로 가르치고 배우려는 에너지가 충만하고 유능감을 느끼는 상태를 말한다. 선생님도 학생도 ‘유능감’을 느껴 보람과 자신감을 느끼는 교실을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 국가 수준에서 접근하는 것보다 훨씬 접근성이 높다는 점이다. 국가 전체의 질을 제고하려는 거시적 접근은 고려해야 할 요소가 너무 많고 방대해 물꼬 트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교실 교육의 질을 높여 보자고 한다면 누구에게나 교실이라는 분명한 대상이 떠오르고 또한 고려해야 할 요소도 선생님, 학생들, 환경 정도로 단순해 다루기가 용이하다. 둘째, 교육개혁 및 교육 정상화를 현장의 실정에 맞게 추진할 수 있어 효과적이다. 현장에 기반을 둔 정책은 다른 정책보다 실현 가능성 및 효과성 면에서 우수할 가능성이 높다. 현장의 문제점과 해결해야 할 과제 등은 현장 전문가들이 잘 알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책들을 개발해 이들의 자발적인 열정과 노력을 이끌어 낸다면 보다 질 높은 교육이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고전적 의미에서의 교육 3주체의 협동적 노력을 이끌어 낼 수 있다. 학생, 선생님, 학부모를 교육의 주체라고 말한다. 과거 산업시대에는 이들 3주체가 같은 방향으로 교육에 참여하는 경향이었다. 하지만 지식정보화 사회가 도래하고 사회적으로 선생님들에 대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약화된 결과, 학부모들은 학교교육과 선생님에 대한 기대 수준을 낮추고 사교육 등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방법으로 자녀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선생님들의 사회적 지위가 낮아지고 학부모들이 다른 교육 기회에 관심 가지게 되면서 교실교육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새로운 3주체의 협동적 노력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도 모든 국민들이 교실교육에 초점을 맞추는 교실승리 관점이 유리하다. 넷째, 관심의 초점을 교실에 둠과 동시에 학생들에게 분명하고 구체적인 목표를 심어줄 수 있다. 사교육 시장이 지나치게 확대된 우리나라에서는 어린이들이 태어나서부터 학교에 들어와서까지도 교과서 이외에 배워야 할 과목이 너무 많아 ‘과잉 학습’ 논란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 결과 학생들은 교과 공부와 기타 학습 중 어느 것을 더 열심히 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한다. 교과서(교육과정)를 여러 교수 학습 자료 중 하나로 덜 중요하게 생각해, 선생님도 학생도 학부모도 교과서를 예전에 비해 덜 중요하게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교실승리운동을 통해 초 • 중등 보통교육에서 학생들이 배워야 할 국가수준의 교육과정을 가장 잘 구현한 것이 교과서임을 공고히 하면 학생들이 분명하고 구체적인 목표(교육과정 → 교과서)를 가지게 할 수 있다. 목표가 분명하면 이를 성취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마련이다. 성공적인 신뢰 되찾기를 위한 전제 조건 일반적으로 구체적이고 명확한 목표를 달성한 것을 성공, 성취, 승리 등으로 부른다. 하지만 본고에서는 교실에서의 활동들이 바람직한가, 바람직하지 않은가? 교육 계획이 효과적인가, 효과적이지 않은가? 선생님들이 열정이 있는가, 없는가? 학생들이 몰입을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학부모들이 교육적으로 참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등 둘 중에서 전자의 상태를 지칭하기 위해 ‘승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우선 교실승리운동의 전제조건부터 살펴보자. 조건 1 선생님, 학생, 학부모 모두의 목표는 학생들이 교육과정, 즉 ‘교과서’를 행간의 뜻까지 알고 이해하는 것이다. 보통교육에서는 국가수준의 교육과정(교과서)이 학생들이 꼭 배워야 할 바이블과 같이 소중하다는 것을 교실 구성원 모두가 이해하는 것이 제일의 조건이다. 이루어야 할 목표가 분명하면 달성할 가능성이 커지게 마련이다. 조건 2 교실에서는 선생님의 영향력이 매우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학생과 교실 밖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풍토가 조성돼야 한다. 이러한 풍토에서는 선생님들이 심리적 ‘보약’을 먹은 것과 같이 열정과 사명감이 높아질 것이다. 조건 3 모든 어른들(선생님, 학부모, 지역사회)은 학생들이 배우는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주어진 교육과정을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때 학생들은 희망과 자신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조건 4 학교행정가, 지역사회, 교육청, 국가 등 교실 밖의 구성원 모두가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교수 • 학습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가능한 지원을 해야 한다. 선생님을 돕고 학생을 도울 일이 무엇인지 각자의 처지에서 고려해 보는 ‘시민의식’이 필요하다. 어떤 모습이 교실이 승리한 상태일까? 앞에서 우리는 교실승리운동의 전제조건을 숙지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과연 ‘교실승리’ 상태일까? 교실승리 1 교실 구성원 모두는 교과서가 우리 학생들이 배워야 할 목표임을 충분히 이해하고, 선생님, 학생, 학부모의 협동적 노력을 통해 이를 충분히 달성한다. 뒤처지는 학생은 동료 학생으로부터 배우기, 선생님 도움받기, 부모님 도움받기로 이를 보충할 기회를 갖는다. 또한 교과서를 충분히 익힌 학생들은 선생님과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심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교실승리 2 선생님은 학생들과 신뢰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이다. 선생님은 ‘선행 학습자’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보다는 그들이 교육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스스로 배우는 방법은 익힐 수 있도록 돕는다. 구체적으로는 교과서 범위에서 부모님의 도움이 없이도 해결할 수 있는 예습과 복습과제를 제시하고 이를 다음 수업에 활용한다. 자기주도적 학습 습관을 들일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제공한다. 아침 자습 시간은 학생들 자신이 계획한 내용을 실천해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배려한다. 수업 시작 전에는 결석한 학생이 없는지 확인하고, 아프거나 집안에 걱정이 있어 학습할 준비가 덜 된 학생이 있는지를 살펴 학습 분위기를 조성한 후 수업을 시작한다. 수업 중에는 예습한 것을 활용해 진행한다. 수업이 끝나기 직전에는 하루 학습 중 성공적인 사례들을 확인하고 자신감을 가지도록 격려한 후 귀가하도록 한다. 선생님과 학생 간 신뢰 관계가 형성되도록 지속적으로 학생들을 배려한다면 선생님들은 진정한 보람을 맛보게 될 것이다. 교실승리 3 학생들은 자기주도적 학습 습관을 들이는 것이 최고의 목표이다. 교과서를 배우는 것이 이들의 목표이고, 이를 예습 • 복습 및 아침 자습 시간을 통하여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을 익힌다. 과목에 따라서는 교과서 내용을 암송할 수 있으면 더욱 좋다. 현재 기초 • 기본학습이 되지 않은 학생이 많은 것은 교과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서로 가르쳐 주고 배우는 교실을 만드는 것도 교실승리의 상태에 속한다. 학생들 간에 잘하는 과목은 가르치고, 자신 없는 과목은 배우는 열린 마음이 있는 교실이 바로 승리한 교실이다. 또한 스스로 공부하면서 ‘아하’를 자주 체험할 기회가 주어지는 교실, 이곳이 승리한 교실이다. 교실승리 4 선생님을 섬기는 풍토가 조성된 상태다. 학생들이 선생님을 섬기고 존경하는 마음이 있을 때, 가장 잘 배울 수 있다. 선생님을 섬기는 마음이 있는 순간 선생님의 말씀 하나, 행동 하나하나를 따라 하려고 하고, 표정 하나에서도 배우려 하기 때문에 ‘선생님 섬기기 풍토’는 배움의 시작점이 된다. 학부모들은 밥상머리 교육을 통해 선생님이 매우 귀중한 사람이고, 선생님의 모든 것을 따라 배워야 잘 배울 수 있음을 지속적으로 지도해야 한다. 또한 부모가 선생님을 존중하는 본보이기를 하면 자녀들도 그렇게 할 것이다. 선생님을 섬기는 풍토 조성에는 예산이 들지 않는다. 단지 심리적인 응원이면 충분하다. 교실승리 5 매일 매시간 새로운 과목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이해하고 격려하는 지역사회의 분위기가 조성된 상태다. 학생들은 학교 수업을 하는 것만도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다. 집중할수록 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제대로 학교수업을 받는 것만으로도 힘이 드는데 추가적인 학습은 낭비가 되거나 과잉학습이 될 수 있다. 위와 같은 교실승리의 조건과 상태에 기초해 수립한 2009학년도 본교의 교실승리 전략과 시스템을 간략히 소개한다. 사례. 서울 연가초등학교의 교실승리 전략 전략 1 ‘교과서를 꿰뚫어라’ •학생들이 배워야 하는 제일 중요한 것이 교과서인 것을 학생, 선생님, 학부모 모두가 동의한다. 이를 위해 지속적인 연수와 가정통신 등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을 시도했다. •교과서를 행간의 뜻까지 익힐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구체적인 학습지도 전략을 마련했다. 선생님의 교실 내 활동을 다양화할 수 있도록 돕는다. 아침 활동, 수업시작 전 활동, 수업 중 활동, 수업 종료 전 활동 과제 제시 방법 및 평가 결과 통지 등에서 선생님들이 자율과 창의를 발휘해 ‘나만의 교수 방법’을 찾도록, 그 예를 교육과정에 제시했다. 필수 활동은 자기주도적 학습 습관들이기 3단계로서 교과서 내에서 예습, 복습 과제를 제시하고 이를 활용한 수업을 하도록 했고, 아침 자습 시간엔 선생님이 함께하며, 학생들이 제출한 계획서를 자기주도적으로 수행하도록 하고 선생님은 이를 확인하도록 했다. •선생님들 간의 다양한 교수 방법을 공유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 평가회를 연 2회에서 4회로 확대하고 예산도 배정했다. 1학기 중간과 2학기 중간에 각 반에서 특색 있게 운영하고 있는 ‘나만의 교수방법’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학생들이 자기주도적 학습 습관을 가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교과서를 확실히 익히도록 돕기 위해 예습, 복습 및 오답 공책을 학교가 제작해 배부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스스로 예습하고 복습하면서 ‘나만의 학습 방법’을 찾도록 했으며, 아침 자습은 선생님의 부담을 덜고 학생들의 자주적인 학습 습관을 익힐 수 있도록 계획 및 실행은 학생이 하고 선생님은 확인만 하도록 시스템화했다. •교실승리를 위한 예산을 별도로 책정해 담임선생님이 상을 주고, 특색 있는 교실을 운영하도록 했으며 자기주도적 학습 능력이 신장된 학생과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학부모를 학교장이 표창할 수 있도록 했다. •각 반 2명씩 150명으로 구성된 교실승리 학부모회를 조직해 스승 존경 및 섬기기 캠페인을 매월 1회 실시하고 학년 • 학급 수업도우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서 교실을 지원하고 선생님 섬기기 운동을 활성화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써 선생님을 존경하고 섬기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교사는 교실수업을 통해 보람을 느끼고, 학생들은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며 자주 ‘아하~’를 경험하여 공부하는 맛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학부모들이 교과 관련 사교육은 줄이고 자녀가 교과서를 꿰뚫을 수 있도록 격려하고 칭찬하며 적극적인 관심을 보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속적인 학부모 연수를 실시하고 가정 통신 등을 통해 소통 할 수 있도록 했다. 전략 2 ‘한마음 한뜻으로’ : 기준(원칙)이 있는 학교생활 ‘질풍노도’로 집약되는 청소년기의 특징이 초등학교 6학년 단계로 내려왔다. 지금 초등학교 6학년 교실에서는 생활지도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기존 선생님들이 6학년 담임을 기피해 새로 전입한 선생님들이 담임을 맡다 보니 생활지도에 더욱 어려움이 많은 실정이다. 이에 본교에서는 선생님들에 대한 적극적인 설득 전략과 제도적 뒷받침으로 이를 최적화 하고자 했다. •생활지도가 어려운 학년이지만 적극적인 설득으로 2008년 6학년 담임들과 기존 선생님 다수가 6학년 담임을 다시 지원했고, 새로 전입한 선생님들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기존 선생님들이 많으니 훨씬 안정적이다. •선생님들, 전교 어린이들, 학부모들의 의견을 수렴해 연가어린이 생활규칙을 만들었고 등교에서 하교까지 지킬 수칙을 만들어 코팅하여 전교생 가정에 배부, 학생 생활지도의 기준으로 활동하도록 했다. 느슨해진 학교의 생활지도 못지않게 가정에서의 훈육이 약화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5~6학년 수준만 되면 부모님에게 저항하고 심지어는 담임선생님에게도 반항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때에 학교에서 마련한 언행 기준과 등교에서 하교까지의 수칙을 마련한 것을 상당한 의미가 있다. 이를 근거로 학급 규칙과 가정 규칙을 만들어 학생 지도에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 규칙 책받침 제작 예산을 편성해 운영했다. •학교 규칙의 두 가지 특징은 자기 일을 스스로 하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규칙을 어기면 ‘생각마당’을 쓰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봄으로써 스스로 잘못을 알게 하며, 학부모와 연계해서 가정에서 지도할 수 있도록 학부모에게 통지하고 선생님이 보관하도록 했다. 실질적인 지도를 학부모가 하게 함으로써 선생님과 학생 간 불미한 ‘체벌’이 일어나지 아니하도록 시스템을 마련했다. 공교육이 정상 궤도를 이탈했다는 사실에 대부분 사람들이 공감하는 분위기이다. 공교육이 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이 미국을 위시한 여러 나라에서 시도되었고 지금도 추진 중이다. 우리나라도 국가 수준에서 공교육 정상화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 왔다. 여러 정권이 교육을 국가 운영의 주요 과제로 삼고 교육 개혁을 시도했지만 아직도 공교육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는데 대부분의 국민이 동의하고 있는 실정이다. 적절한 공교육 제자리 찾기 방안이 절실히 필요하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공교육 제자리 찾기 방안의 한 가지 방법으로 교실승리를 제시했다. 교실승리는 모든 국민이 공교육의 정상화를 바라는 만큼 관심의 초점을 교실에 모으자는 것이다. 선생님, 학생, 학부모가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만큼 공교육이 발전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교실승리운동이 아래로부터의 공교육 제자리 찾기 운동의 시작이 되었으면 좋겠다. 많은 학교가 함께 실행해 보기를 희망한다. 교실이 승리하면 학교가 승리하고, 학교가 승리하면 교육청 및 지역사회가 승리하고, 그다음은 국가 공교육이 승리할 것이다. 공교육이 제자리를 찾는데 ‘교실승리운동’이 한몫을 했으면 한다. 교실승리운동과 관련된 자료를 원하는 분들은 연락해 주시기 바란다.
교과부 소관 2009년 제1회 추가경정예산이 최종 44조 1296억원(학자금신용대출기금 제외)으로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경기침체로 인한 내국세 세수 결손을 감안해 당초 예산 45조 2836억원에 비해 1조 1377억원이 순감한 44조 1460억원 규모 추경안이 예결위를 거치며 다시 164억원이 감액됐기 때문이다. 예결위는 차상위 저소득층 무상장학금 710억원 증액 등 6개 사업에서 959억원을 증액했다. 노후학교 리모델링 지원사업에 150억원을 증액하고 학습보조 인턴교사 채용사업에도 20억원을 얹어줬다. 대신 당초 2000억원이 계상된 교과교실제 지원사업은 500억원이나 삭감됐다. 또 군단위 소규모학교 통폐합 예산도 120억원이 삭감되는 등 5개 사업에서 모두 1123억원을 가위질했다. 미취업대졸생 조교 등 학내채용 사업 323억원, 평생학습 중심대학 육성 81억원 등 8개 사업은 원안대로 통과됐다.
초중등 교육 단계의 취학 대상 탈북 학생들이 1천600여명으로 추산되지만 이달 현재 전국 435개 학교에 1천143명이 재학중인 것으로 집계돼 취학률이 70%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만길 한국교육개발원 통일교육연구실장은 30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북한이탈학생의 증가와 교육의 과제'라는 주제로 열린 통일교육포럼에서 이같이 밝히고 "나머지 500여명은 일부 대안교육기관에 취학한 학생을 제외하면 학교교육 밖에서 방황하고 있다"며 이들에 대한 교육대책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한 실장은 또 재학중인 학생들이라도 학교교육에 대한 부적응으로 인한 탈락자가 지난 2007년 4월 기준으로 초등학생 3.5%, 중학생 12.9%, 고등학생 28.1%로 나타나 학년이 올라 갈수록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탈북 학생들의 학습부진과 부적응에 대해 한 실장은 "학습 공백기가 길어 기초학력이 부족한 데 원인이 있다"며 "북한에서 지난 10여년간 경제침체와 식량위기 등으로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데다 탈북이후에도 중국 등 제3국에서 난민생활로 인해 제대로 공부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그러나 "학교 현장에선 이러한 북한이탈 학생에 대한 개별지도가 이뤄지지 않는 등 이들을 교육할 만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이라며 보통 동급생보다 나이가 많은 탈북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력에 따라 학년이동이 자유로운 '무학년제'를 운영하거나 정규학교에 적을 두면서도 전문성을 갖춘 대안학교에 위탁교육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또 탈북 학생들의 부모가 북한에선 자녀교육을 전적으로 학교에 맡겼던 경험 때문에 남한에서 학부모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을 감안, 이들에 대한 학부모 교육을 실시할 필요도 제기하고 지역사회의 사회복지기관이 학부모와 학교를 연결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수행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탈북학생 대안학교인 여명학교의 조명숙 교감은 특히 "대량아사 사태가 발생한 90년대 출생 학생들의 경우, 성장기의 영양실조가 뇌에도 영향을 미쳐 학습지진 현상을 보이는 것으로 의심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며 "식량난으로 육체적, 정신적 타격을 입은 북한 내부의 청소년에 대한 지원과 교육적 대안을 생각해 봐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능검사나 다면적 인성검사(MMPI) 등이 모두 남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져 북한이탈 청소년에 맞는 검사지가 없어 객관적 실태 파악이 되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날 사례발표에서 탈북 학생인 건국대 1학년 신호남씨는 "일반 고등학교에서 학습부진에 시달리는 나에 대해 학교측에선 영어회화 무료 수강외엔 특별한 조치를 해주지 않았고 북한이탈주민 특별전형으로 진학지도를 해주는 선생님도 없었으나 대안학교의 자원봉사 선생님이 많은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최영실 NK지식인연대 교육부장은 "한국에 온 지 벌써 9년인데 탈북자 학부모로서 북한에서 사교육을 몰랐기 때문에 남한에서도 아들을 학원에 보내지 못한 게 많이 후회된다"며 탈북 학부모 대상의 교육 필요성에 공감했다.
인천교육청은 이번 달부터 방과후학교를 지원하기 위해 326명으로 구성된 ‘방과후학교 컨설팅단’을 운영한다. 컨설팅단은 시교육청 및 지역교육청별로 활동하며 전문직·교장·교사·학생·학부모·강사 등 관련 인사들로 모니터링 요원도 선발했다. 컨설팅단은 방과후학교 프로그램을 확인하고 문제점을 파악해 컨설팅해준다. 또 관련 정책에 대해 관련부서와 협의하고, 우수사례를 발굴해 학교에 보급하는 역할도 담당한다. 컨설팅을 받고자 희망하는 학교는 교육청에 신청서를 제출하면 된다. 심영숙 인천교육청 장학사는 “방과후학교에 대한 관심이 늘어가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교가 많아 컨설팅단을 구성하게 됐다”며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티끌모아 태산 따뜻한 마음을 품는 심성 심어줘- 인천부평서초등학교(교장 곽영길)에서는 굿네이버스에서 주관하는 “행복한 나눔 가족 100원의 기적” 동전모으기 행사에 2009년 4월 1일부터 4월 28일까지 전교생 1,000여명의 학생들은 아끼고 아껴서 모은 자신의 저금통을 고사리 같은 정성어린 손에 들고 와서 개인별로 사랑의 모금함에 사랑을 가득 담아 넣었다. 6학년 신하은 어린이는 “모금함에 십원짜리, 백원짜리 동전들만 있지만 저는 부끄럽지 않아요. 100원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는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과자 먹을 돈을 아껴서 모았거든요.”라며 자신의 저금통을 기부하면서 뿌듯하게 말했다. 5학년 조윤경 어린이도 “액수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 기회를 통해서 세계로 저의 눈을 넓힐 수 있었고, 그 친구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뿌듯했어요. 앞으로도 제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다른 친구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이 행사를 밑거름으로 하여 부평서초등학교 학생들이 타인에 대한 이해를 통해 나누는 기쁨을 느끼며, 따뜻한 마음을 품고 세상을 바라보는 훌륭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