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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학교, 정규교육과정 차별화해 영재교육 - 학교 단위의 영재교육은 아직 한국에서는 생소한 개념입니다. 미국의 학교 단위 영재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오늘날 미국 영재교육의 핵심은 ‘얼마나 똑똑한가’가 아니라 ‘어떤 점에서 똑똑한가’를 알아내 학생의 다양한 재능 계발을 돕는 데 있습니다. 미국 학교에서는 영재만 따로 가르치는 것을 영재교육과정이라 하지 않습니다. 영재교육은 영재의 독특한 요구를 충족시키도록 정규교육과정을 차별화하는 것입니다. 정규 교육과정을 영재교육과정으로 차별화하기 때문에 그 두 교육과정 사이의 연계성이 중요하고 결과적으로 학교 정규교육과정의 질이 높아져야, 거기에 맞춘 영재교육과정의 수준도 향상되는 것이죠.” - 학교 영재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물론 교사입니다. 영재교육에서 교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아요. 영재의 특성에 맞춰 정규교육과정을 차별화해 수업하기란 상당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연수와 훈련이 중요하죠. 영재교육에서 교사에게 강조되는 차별화 전략은 속진, 깊이, 복잡성, 참신함 네 가지가 핵심입니다.1) 미국은 교사용 지도서를 철저히 만들어 도움을 받도록 하는데 영재, 학습부진아, 일반학생 등 학습자의 특성에 따라 핵심 교육과정을 어떻게 적용하는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교사가 해야 할 말까지 알려줄 정도로 아주 구체적이어서 편리하죠.” “세계적인 추세는 고차원적인 사고력, 언어지능” - 영재교육과정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 있다면. “읽기, 쓰기, 토론은 모든 학습의 기초로 전 교과에서 강조합니다. 영재교육의 핵심인 고차원적인 사고력(High level thinking)과 최근 세계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언어지능(Linguistic intelligence)을 기르는 데 중요합니다. 한국과 비슷하게 영재교육을 하던 싱가포르, 대만도 최근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는 뛰어난 수학자도 글이나 말을 통해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는 데 능숙해야 합니다. 뛰어난 업적이 주목받도록 훌륭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한국의 영재교육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영재교육이 수학, 과학 범주에만 있을까요? 한국은 지금 생각하는 영재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모든 아이들은 그만의 재능이 있고 이것을 계발해서 그 분야의 고차원적인 사고를 하게 하는 것이 영재교육입니다. 뛰어난 수학자, 과학자뿐 아니라 한국판 스티븐 스필버그, 오프라 윈프리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 매년 한국에서 많은 강연을 하시는데 한국 교육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우선 학교로 보면 한국 선생님들은 수업기술보다는 학급 경영(Class management) 연수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미국 학생들은 교실에서 산만하지 않아요. 한국 교실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또 주입식 교육방법을 버리고 선생님과 학생이 50:50으로 참여하도록 수업을 이끌어야 합니다. 한국 학부모들을 보면 자녀의 꿈, 소질보다 하버드대 진학을 더 좋아하는데 큰 틀에서 자녀의 장래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미국, 유태인 학부모는 자녀가 다닐 학교를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직접 조사합니다. 그에 반해 한국 학부모는 교육열이 높은데도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결정하죠. 다른 사람을 쫓아가거나 과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자녀 교육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 이상미 smlee24@kfta.or.kr ------------------------------------------------------------------------ She is = 수지 오 교장은 대학 졸업 후 도미, 1974년 ELS 교사로 시작해 LA 교육구 장학사 등을 거쳐 서드스트리트 초등학교 개방형 공모 교장을 맡으면서 32년간 미국 교육계에 몸담아 왔다. 서드스트리트는 유대인, 한국인 등 신흥 중산층이 사는 교육열이 높은 곳이어서 3년마다 심사를 거쳐 재임용되는 공모 교장으로 10년 넘게 자리를 유지한 것은 LA에서는 유례가 없는 일로 알려져 있다. 오 교장은 서드스트리트에 근무하면서 높은 교육열과 학부모의 요구 등으로 영재교육, 영어교육에 특별히 관심을 갖고 연구하게 됐으며 이 분야에서 앞서가는 교육자로 평가받고 있다.
망명 • 이민자녀, 학교 입학한 후 영어 접해 망명자들의 자녀들은 물론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상당수의 이민자 자녀의 경우에도 공교육기관에 입학한 후에야 본격적으로 영어를 습득하기 시작한다. 가 인용한 미국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5세 이상 미국 국민 중 거의 20%가 영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1990년 인구조사 당시는 13.8%에 불과하던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 제2외국어로서의 영어)학습인구의 급격한 증가는 라틴계 이민자 인구 급증과 관련이 크다. 통계에 따르면, 미국 내 5세 이상자 중 약 3500만 명이 집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800만 명이 이상이 중국어 또는 기타 아시아 언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일례로, 캘리포니아 주(州)의 경우, 영어학습인구가 42.6%에 달한다. 이런 상황 때문에 미국 교육계에서는 ESL 학습자들의 학습권 및 언어권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공립학교에서 ESL 특별반을 운영하는 것 외에도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뿐 아니라 모국어로도 수업을 제공해 ESL 학습자들의 학습권 및 언어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한편 일각에서는 지나치게 개별 언어의 사용을 허용하면 미국 국민의 정체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며 영어를 국가 공식 언어로 지정하자는 취지의 법안 발의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망명자 및 그들의 자녀의 경우, 언어 및 이로 인해 야기되는 교육결손의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문화 인류학자이자 교육학자인 존 오그부 교수에 따르면 비자발적 이민자의 학업성취도가 자발적 이민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고 한다. 특히 출신국가 혹은 망명과정에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채 미국 공립교육기관으로 편입된 학생들의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뉴욕타임스의 최근 기사에 따르면 뉴욕시에 거주하는 15만 명에 이르는 ESL 학생 중 10%에 해당하는 1만 5000명이 학업 결손의 정도가 심각하고 영어구사 능력이 현저하게 낮은 망명자 학생이라고 한다. 많은 숫자만큼 출신지역도 다양한데, 중앙아메리카 • 서아프리카 국가들, 티베트 등이 대표적이다. 이중 언어 학습자 교육결손 심각해 영어 구사 능력이 낮은 상태로 10대 후반의 나이에 미국으로 망명한 이들의 경우, 독립적으로 삶을 꾸려가는 것은 물론 그간 수업 결손을 만회하는 일이 참으로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뉴욕타임스가 소개한 한 마케도니아 출신 여학생의 경우 4년간 꾸준히 노력했음에도 21세가 돼 학교를 떠날 때까지 4학년 수준의 교과를 학습하는 데 그쳤다. 한편, 학업 성취수준에 따라 그림책 등 저학년 용 교구를 사용하게 되는데, 그럴 때면 머리가 이미 커진 아이들이 모욕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다. 영어습득,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적응, 그리고 망명기간 겪은 정신적 스트레스에 더해 ‘학업 손실 기간 만회’라는 적지 않은 부담까지 수많은 토끼를 잡아야 하는 아이들이 감내해야 하는 갈등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뉴욕시립대학의 엘린 클라인 교수가 수업 결손이 심한 ESL 학습자를 대상으로 2007년에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연구대상으로 선택된 약 100명의 아이들 중 이듬해 학습을 지속한 학생은 50명이 채 되지 않았다. 비록 이들 이민자들을 위한 최적의 교육프로그램 및 시스템 구축에는 상당한 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이지만 학자들 및 NGO 관련자들이 제시하는 주요 전략으로 두 가지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다양한 필요와 결손이 있는 이들 그룹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는 일정 규모 이상의 아이들을 한 교육기관에 두는 것이 좋다. 둘째, 먼저 학습을 시작한 아이들로 하여금 새로 입학한 아이들을 돕게 하는 것이 좋다. 특히 대개의 신입학생들의 경우 영어 구사 능력이 수업을 따라가는 데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기존 아이들이 통역은 물론 학습 지원에 효과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때 교사들은 아이들의 출신국 및 인종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위스콘신 대학의 스테이시 리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아시아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신입생을 도와주라고 하는 선생님들 때문에 난감한 경험을 한 학생들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신입생은 중국인 기존학생은 베트남인이라고 할 때, 미국인의 눈에는 두 학생의 외모가 비슷해 보일 수 있으나 실상 이들은 다른 언어권에 속하기 때문에 영어가 아니고서는 기본적인 의사소통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무슬림 종교기념일 반영 문제 논란되기도 한편, 미국사회 및 교육기관의 주목을 끄는 이민자 이슈는 라틴계 이민자 인구를 필두로 하는 언어의 문제만이 아니다. 최근 뉴욕시 의회는 무슬림의 양대 종교기념일을 학교력(學校曆)에 반영하도록 하는 결의를 통과시켰는데, 모든 종교의 기념일에 휴교하게 되면 수업일수의 지나친 결손을 초래할 소지가 있다는 마이클 블룸버그 시장의 입장 표명으로 그 시행 여부는 불투명한 상태에 있다. 무슬림 지도자 이맘 탈립 압두어 라쉬드는 “현명한 시장이 뉴욕시의 60만 명에 달하는 무슬림 표를 등질 리가 없다”며 강경한 입장을 표명했다. 결의를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뉴욕 공립학교의 12%에 달하는 10만여 명의 아이들이 종교기념일로 인한 학업결손을 염려하지 않도록 조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 기념일이 음력을 따르기 때문에 실제로는 휴일과 겹치거나 여름방학 기간인 경우가 많아 수업일수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이들의 주장대로 상당수의 무슬림 종교기념일이 휴일 혹은 방학이라면, 무슬림 그룹에서 굳이 이 기간에 대한 휴교를 합법화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간 미국 교육계에서 이루어진 종교를 둘러싼 논쟁 가운데, 이번 사건이 더욱 큰 의미를 갖는 것은 기독교권과 무슬림권 사이의 충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비극적 역사적 현장, 9.11 테러가 일어났던 뉴욕시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러함에도 라틴계와 마찬가지로 높은 출산율로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무슬림 이민자들의 목소리가 향후 미국 사회 내에서 점점 커질 것이라는 데에 이견을 보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실 미국의 성립 기반은 이민자에 있다.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영국에서 건너온 청교도들의 토대 위에 수많은 국가의 이민자들에 의해 세워진 다인종 다문화 국가인 것이다. 때문에 다양한 문화, 언어, 인종에 대한 경험의 다른 나라에 비해 상당히 풍부하게 축적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교육부문도 마찬가지이다. 초기 아메리칸 인디언을 대상으로 ‘교화’를 목적으로 기숙학교 교육을 제공하여 미국인 모두가 ‘동일한’ 국민교육을 받도록 교육정책을 비롯해 오랜 기간 동안 논쟁과 교육정책의 주요 이슈가 되고 있는 이중 언어 교육이 대표적이다. 그러함에도 다양한 그룹의 다양한 필요와 요구에 맞는 교육을 제공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은 과제인 것 같다.
금융환경의 변화로 저축 동기를 잃어 외환위기 이전에는 저축을 하면서 금리를 크게 따지지 않았다. 금리를 떠나 저축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융이 발달하고 신용사회로 접어들면서 저축을 해야 하는 이유가 줄어들었다. 돈을 쓰는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신용카드만 있으면 당장 돈이 없어도 손쉽게 무엇이든 살 수 있는데다 마이너스 통장으로 카드결제액이 조금 부족한 것 정도는 금방 메울 수가 있다. 그래서 당장 다음 달에 얼마의 돈이 필요한지도 예측하지 않는다. 저축 없이 신용카드와 마이너스 통장으로 가계를 운영하는 사이 저축률은 2%대로 떨어져 10년 전의 10분의 1도 안 되고, 상당수의 가정은 미래에 쓸 돈까지 당겨쓴 탓에 마이너스 현금흐름을 보이고 있다. 월급날의 즐거움은 사라진 지 오래다. 저축은 미래에 대한 계획과 준비 목돈 지출을 저축이 아닌 신용카드나 마이너스 통장으로 해결한다면 그때부터 현금흐름은 악순환의 고리에 들어서게 된다. 가뜩이나 빠듯한 살림에 이자 부담이 늘어나게 되고 늘어난 부담은 다시 생활비를 부족하게 만든다. 다시 신용카드와 마이너스 통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몰아가는 것이다. 저축의 기본 개념부터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저축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예측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미리 계획하고 차근차근 모아나가는 과정에서 돈에 대한 불안감이 줄어들어 심리적으로도 상당히 안정되고 돈을 더욱 넉넉하게 쓸 수 있다. 오늘 쓰는 돈은 그동안 저축해놓은 돈으로 쓰고 버는 돈은 다시 미래를 위해서 저축을 하는 선순환 구조가 되면 소득에 비해 훨씬 여유 있는 생활이 가능하다. 요즘은 저축하면 먼 미래의 자녀교육자금이나 은퇴자금같이 정말 큰돈이 들어가는 것만 생각한다. 하지만 가까운 미래의 돈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 상태에서 먼 미래가 나아질 리 없다. 저축은 일상의 소소한 것부터 하나하나 계획하고 실천해나가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준비해서 돈을 쓰면 미래에 대한 목표의식도 뚜렷해지고 이로 인해 현재 생활에 대한 만족감도 훨씬 높아진다. 저축을 통해 엄청난 부자가 되진 않더라도 하루하루 나아지는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또한 만기가 된 저축을 가지고 돈을 쓸 때와 신용카드 할부로 돈을 쓸 때의 기분은 다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만기된 적금으로 여행을 간다면 그간 열심히 모은 돈에 대한 보상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고 다녀와서도 여행의 기억이 즐겁게 느껴진다. 하지만 신용카드 할부로 여행을 간다면 여행 당시에는 즐거울지 모르지만 카드 결제 때문에 할부기간 내내 골머리를 썩는다. 그래서 저축은 금리를 보고 할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보고 하는 것이다. 작은 일상에 대해 예측하고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 미래의 재무위험을 통제할 수 있을 때 돈 버는 즐거움과 돈 쓰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 joy2joy@hanmail.net ------------------------------------------------------------------------ 적금에 관해 몇 가지 알아야 할 것들 1. 적금의 최저가입금액은 일반적으로 1000원이다. 2~3만 원짜리 6개월 만기 통장부터 만들어서 만기 때 써보자. 저축해서 돈 쓰는 재미를 느껴봐야 좀 더 큰 액수로 길게 하는 저축도 가능해진다. 2. 예 • 적금 가입할 때 굳이 은행에 갈 필요 없다. 웬만한 예 • 적금은 인터넷 뱅킹으로 가능하고 우대금리까지 준다. 인터넷상에서 별명 관리도 가능하기 때문에 ‘자동차 교체’, ‘신나는 여행’, ‘지름신 통장’ 이런 식으로 각 계좌별로 저축 목적에 따라 별명을 지어두면 관리하기도 편리하다. 3. 1% 높은 금리 찾느라 굳이 멀리 있는 은행을 찾아가기보다는 가깝고 편리한 은행을 선택하자. 장기상품과 달리 단기목적의 적금에서 1%의 금리 차이는 별로 크지 않다. 멀어서 불편한 은행에 금리만 보고 갔다가 불편해서 저축 자체를 멀리하게 되는 우를 범하지 말자. 4. 세금우대, 조합원비과세 등을 활용하자. 세금우대는 1인당 1000만 원, 조합원비과세는 신협, 새마을금고 등에서 1인당 3000만 원까지 가능하다. 부부 합산하면 이것만으로 8000만 원까지 은행이자에 대해 절세혜택을 누릴 수 있다. 5. 수시입출금 통장은 비상금 통장으로 쓸 것이 아니라면 금리보다는 수수료에 민감해져야 한다.
책의 아우라 작가가 혹은 시인이 되려면 자기 이름이 달린 책이 있어야 한다. 책을 내는 일은 등단 못지않게 마음 설레는 일이다. 그런데 이제 등단을 했거나 아직 등단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경우는 언제 책을 낼 수 있을지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그렇게 아득하기만 하지 않다는 점을 미리 알면 여러분이 글을 쓰는 데에 추진력이 붙을 것이다. 쓴 작품을 모은 것이 책이라는 정도로 마음 편하게 눌러 두고, 책에 대해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어떤 책이든지 그 책 나름의 권위를 지니고 있다. 그럴듯한 이야기를 들으면, 어디서 저런 걸 다 알았을까 의문을 가지고, 그 출처를 묻게 된다. 그럴 때 책에 나오는 이야기란 대답을 들으면 반론을 제기하기 어렵다. 책, 교과서, 경전을 포함하는 고전, 그런 책들은 일단 내용을 믿고 들어간다. 이는 책을 쓴 사람에 대한 믿음과 상통한다. 이는 독자들의 신뢰가 쌓인 결과이기도 하다. 책을 쓴 사람을 저자라고 한다. 저자(著者)의 著는 ‘기록하다’, ‘쓰다’ 라는 기본 뜻 외에 ‘두드러지다’, ‘나타내다’ 등의 부가적 의미가 있다. 글을 쓴 사람이 곧 두드러진 사람이라는 존경의 염이 담겨 있다. 서양의 경우도 이와 흡사한 뜻으로 저자의 권위를 인정한다. 저자는 영어로 author라 한다. 이는 창조를 뜻하는 라틴어 augere에서 파생한 auctor에 어원을 두고 있다. 또한 권위를 뜻하는 authority와도 같은 어원이다. 책을 쓴 사람은 일정한 권위를 지니게 마련이다. 여러분이 책을 내는 순간 그 권위가 일종의 아우라로 여러분에게 부과된다. 자신이 쓴 글에 자기 이름을 달아 책을 만든다면 이 과정에서 글쓴이는 저자가 된다. 이는 한 편의 작품에다가 이름을 달아서 남에게 내놓는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불러온다. 한번 읽고 버려도 좋은 그러한 글이 아니라 남들이 진정으로 읽어 주기를 바라며 자신이 오래 간직하고 싶은 그런 내용을 담은 것이 책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 책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책의 무게는 다른 말로 책의 권위, 즉 저자의 저자다움이다. “책은 영속적이다. 그것은 하나의 대상처럼 우리들 눈 아래 있다. 책은 저자 자신도 갖고 있지 않은 독특한 권위를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말을 한다.”(바쉴라르, 몽상의 시학) 잡지에 실린 작품은 그 잡지가 시한이 되어 구석에 처박힘과 동시에 영속성을 잃게 된다. 그러나 장정을 정성스럽게 한 책은 그 형태만으로도 보존할 가치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책을 사고, 책에 실린 작가의 말을 읽고, 책의 모양을 감상하면서 내용에 대한 기대를 한다. 아무튼 책은 하나의 작품이다. 그러니까 책은 디자인 작품 속에 언어 작품이 들어 있는 셈이다. 여러분의 글들이 책이라는 작품으로 되어 나올 것을 기대하며 글쓰기를 부지런히 할 일이다. 프랑스에서는 아직도 책에 가죽 장정을 해 주고 거기다가 금박으로 책 이름을 새겨 넣는 공예 전통을 이어가는 공방(샤토)이 있다. 노르망디에 있는 샤토 보메닐이 그것인데 제책 박물관을 떠올리게 하는 볼거리들이 수두룩하다. 책을 장정한다는 것은 책의 가치를 인정하고 책으로 집안을 장식하는 문화적 배경이 있어야 가능하다. 책을 소중히 하는 문화라면 우리 전통에 확실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웬만한 교양인이면 문집(文集) 한두 권은 가지고 있었다. 그 내용이 모두 문학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던 시대에 글의 장르나 양식은 그리 문제될 것이 없었다. 살면서 느끼고 사색하고 행동을 결단한 기록들이 모이고, 그것을 책으로 엮은 것이 문집이다. 그러한 문집의 전통은 되살려도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PAGE BREAK] 일기를 모으면 책이 되듯이 학교 다닐 무렵, 연말이 되면 일기장을 사다 놓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써 보리라고 작정을 하곤 했다. 그 작심(作心)이 며칠을 갈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부록까지 해서 365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일기장을 샀던 것은 그것이 책 모양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루 한 페이지씩 쓰면, 그리고 그것을 일 년 모으면 365페이지 이상의 책이 된다는 것을 막연히 알고 있었다. 일기를 모으면 책이 된다. 문집도 이와 하나 다르지 않다. 일기는 개인의 내밀한 생활을 기록하는 것이 일차적인 양상이다. 우리는 그러한 예로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기억한다. 유태인 소녀 안네가 히틀러 학정(虐政)하에서 겪는 불안과 공포와 처참한 나날의 일기를 2년여에 걸쳐 기록한 것이 전쟁을 고발하는 문학과 페미니즘의 문학으로 평가를 받게 된다. 일기는 독백적 성격이 강하다. 독백은 고백과 상통한다. 따라서 공개하기를 꺼리게 되는 경우도 있다. 공개하기를 꺼린다는 것은 인간의 내적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평생을 혼자 살면서 일기를 써온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은 자그마치 1만 7000 페이지의 일기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백미에 해당하는 것을 추려서 책으로 발간해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그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일기를 이렇게 성격규정을 하고 있다. 일기는 고독한 사람의 정신적 친구이고, 위로의 손길이며, 또한 의사이기도 하다. 매일매일 하는 이 독백은 축도(祝禱)의 한 형식이고, 혼과 그 본체와의 대화며, 신과의 이야기인 것이다. 우리의 전체를 되찾아주는 것, 우리를 혼란에서 밝음 속으로, 오뇌에서 고요함 속으로, 이산(離散)에서 자기파악으로, 우연한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특수화에서 조화로 이끌어 가는 것, 이것이 날마다의 독백인 것이다. (아미엘 인생일기, 동서문화사 판) 이렇게 본다면 일기는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 만하다. 파스칼의 명상록도 일기의 일종이다. 몽테뉴의 수상록은 주제를 정하고 이따금 쓴 일기이다. 일기를 매일 기록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글쓰기에서는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이 더욱 정채로운 중요성이다. 공적인 의미를 띤 일기로는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를 우선 꼽을 수 있다. 전란이 지속되는 동안 장수로서 여러 가지 일들을 기록한 일기인데, 이는 당시 정황을 파악하는 데는 물론 인간을 이해하고 역사를 음미하는 데까지 소중한 자료가 된다. 근간에 대거 출간된 ‘이순신계 소설’들의 자료도 물론 이 일기이다. 개인의 기록이 역사의 기록으로 전환된 예이다. 국가기록 차원의 일기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 일성록(日省錄)이다. 승정원일기는 1623년(인조 1년)부터 1910년(융희 4년)까지 승정원에서 처리한 왕명 출납과 제반 행정 사무 등을 기록한 것이다. 일성록은 1752년(영조 28년)부터 1910년까지 국왕의 동정과 국정을 기록한 일기이다. 왕의 입장에서 기록한 일기이기 때문에 개인적 기록이면서 왕이라는 신분으로 인해 국가적인 기록의 성격을 지닌다. 이들은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과 함께 실록(實錄)보다 생활에 밀착된 기록이다. 그리고 이들은 책의 형태로 남아 있다는 점이 우리들의 화제와 연계된다. 일기가 문학으로 되는 경우는 앙드레 지드의 전원교향곡, 베르나노스의 어느 시골신부의 일기등을 떠올릴 수 있다. 일기가 문학이 되고 그것이 책이 된다는 것은 평범한 사실이다. 다만 내가 기록한 일기가 책이 될 수 있다는 것, 내가 써놓은 글들이 모이면 책이 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글쓰기의 원형이라는 점이 의미 깊은 일이다. [PAGE BREAK] 혼자 내는 책과 같이 내는 책 우리 문학사에서 ‘청록파’와 청록집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1939년 문장에 정지용의 추천을 받은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세 사람을 일러 ‘청록파’라 한다. 이들은 1946년 3인 시집 청록집을 을유문화사에서 내는데, ‘청록(靑鹿)’은 푸른 사슴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고라니를 청록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 시집을 낸 이들이 그 말을 쓴 데서 일약 유명해진 말이다. 그 말은 박목월의 청노루에서 따왔다고 한다. 박목월의 청노루라는 시는 이렇게 되어 있다. 머언 산(山) 청운사(靑雲寺) 좌부터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두 굽이를 청(靑)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이 세 사람이 낸 시집이 한 유파(ecole)를 형성했는가 여부를 따지는 논의가 있을 정도이니 이들의 문학적 결속력은 녹록치 않은 것이다. 아무튼 박목월 편에 임, 청노루, 나그네 등 15편, 조지훈 편에 봉황수(鳳凰愁),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등 12편, 박두진 편에 향현(香峴), 묘지송(墓地頌), 도봉(道峯) 등 12편으로 모두 39편의 작품이 책 하나를 이루었다. 편수와 상관없이 이 시집은 우리 문학사에서 우뚝한 의미를 이룩하였다. 책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작품의 수가 문제가 아니라 문학적 수준이 문제가 아닌가 싶다. 어울러서 책을 내는 데는 여러 형태가 있다. 내외가 책을 내는 경우도 있다. 국어학자이며 수필의 진수를 보여주는 심재기 교수와 문학평론가이며 사회사업가인 이인복 교수 내외가 같이 낸 막내딸의 혼인날 은 일종의 기획저술이다. 부부 간에 그런 책을 내는 동안 뜻을 모으고 같이 사색하는 삶의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가족을 사랑하는 방법이 그렇게 구체화된 것이다. 이 글의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으니 내 이야기를 하나 하고자 한다. 20여 년 전 위아래로 서너 살 차이가 나는 동문 4명이 교과서 작업을 계기로 하여 모이게 되었다. 우리들은 일과 함께 삶의 진실을 찾아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여행이다. 주로 학술여행이었다. 학회에 참여하기 위해 주로 중국과 유럽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 학회가 끝나고는 간단한 여행을 하곤 했다. 어떤 경우는 학회에서 주선한 여행에 참여하기도 하고, 우리들 독자적으로 여행을 구상하여 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움직이고 일을 도모하고 해결하고 하는 가운데, 20년이 넘는 동안 우정을 가꾸어 왔다. 그 가운데 지난 해 내가 갑년(甲年)을 맞게 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네 사람이서 비슷한 분량의 글을 모아 책을 내기로 하였다. 책을 내기 위해 글을 다듬는 과정이 곧 우정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같이 다닌 여행지를 확인하고, 그것이 언제였던가 생각하는 과정에서 이제 잊고 있던 세세한 이야기들이 다시 떠오르고 우리들이 어떤 이야기를 했던가를 회상하는 과정에서 정말 아름다운 시간이었다는 생각을 거듭하게 되었다. 판형을 결정하는 일이며, 사진을 챙기는 일, 표지를 구성하는 일 그리고 나온 책을 어떤 이들에게 어떻게 나누어 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까지 같이 상의하고 의논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들의 생각이 각각 어떻게 개성이 있고,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는가 하는 점을 거듭 알게 되는 우정의 메타인식을 해갔다. 그렇게 나온 책이 우정의 길, 사색의 창이다. 지난 세월 우리는 우정의 길을 걸었고 그 길에서 학문적인, 인간적인, 삶에 대한 많은 사색을 했던 것이다. 70생애 가운데 20년, 앞으로 10년을 더한다면 30년을 사귀면서 그 사귐을 글로 남기고 책으로 만든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의미를 지닌 일이다. 이 일은 독자들에게도 권하고 싶은 까닭이다. 같이 글을 쓰는 친구들이 있다면 일정 분량 글을 모아 책으로 꾸며 보기 바란다. 그 가운데 글 쓰는 보람을 찾기를 바란다. 잡지에 여기저기 글을 발표하기도 하고, 동료들과 함께 책을 내기도 한 다음 자신의 글을 혼자서 책으로 묶어도 늦지 않다. 오히려 그것이 책을 내는 정석인지도 모른다. [PAGE BREAK] 좋은 책을 위한 열정 요즈음은 책을 내기가 비교적 수월하다. 인터넷에 블로그를 만들거나 홈페이지를 운영한다면 더욱 용이한 일이다. 책이 안 만들어지는 이유는 여럿이 있지만, 우선 글이 완결이 잘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블로그나 홈페이지에서는 덜 된 메모를 그대로 올려놓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 안에 글을 완성해야 한다. 완성되지 않은 글은 아이디어거나 메모에 지나지 않는다.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정량 글이 모아져야 한다. 요청에 따라 여기저기 발표한 글들은 다시 잘 모여지지 않는다. 그런데 블로그나 홈페이지에서는 글이 잘 모여진다. 그것도 유사한 주제끼리 글이 모여진다. 정확히 구분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그때 단상을 정리하여 올리는 ‘방’의 글들은 수필 성격이 짙다. 그 횟수가 축적되고 그것을 다시 모아 정리하면 수필집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긴 글은 연속하여 올리고, 독자들의 평을 받고 해서 그것을 책으로 내는 경우도 있다. 이른바 인터넷소설류가 그것이다. 이 경우 매체의 특성상 쌍방향 소통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어 소통양식을 바꾸는 시도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독자들이 의견을 달아 줄 수 있기 때문에 이미 작품을 쓰는 과정에 비평이 포함되는 묘미도 있다. 물론 이것이 정당한 비평인지는 가릴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책의 형태는 급격히 변하고 있다. 소통의 양식이 변하기 때문이다. 특히 멀티미디어의 영향으로 글에 사진이 포함되는 것은 물론 동영상까지 포함되는 텍스트들이 생산되고 있다. 종이책을 내면서도 CD를 첨부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교과서까지 그런 형식으로 발간되고 있는 실정이다. 동영상을 이용한 책 만들기를 시도할 수도 있다. 이는 여행기를 비롯한 수필 등에서는 손쉬운 일이다. 한편 조심할 일은 문학적 형상화에 소홀해지기 쉽다는 점이다. 들뢰즈의 영화이론, 예컨대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 등에서는 설명의 필요 때문에 사진을 도입하지 논리를 전개하는 데 사진자료를 사용하는 경우는 없다. 언어의 추상화기능과 논리전개의 편이성 때문이다. 사진이나 그림과 문자텍스트의 관계는 일종의 부분집합이다. 공유하는 부분이 일부 있고, 설명의 언어화와 사례의 시각화 사이에 가역반응이 늘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매체의 활용 결과 ‘그림 에세이’나 ‘포토 에세이’ 등 일상에서 겪은 경험을 볼품 있는 책으로 내는 경우가 빈번해진다. 그러나 문학과 그림, 문학과 시진 등의 경계 넘나들기에서 무엇이 우선인지는 늘 살필 일이다. 문학의 가치는 인생에 대한 철학하기에 있다. 시가 인생의 비평이라든지 소설이 문학적 인간학이라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그리고 문학 자체가 자신을 사유의 대상으로 할 수 있다는 점은 문학이 이미 비평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음악에 대한 음악, 그림에 대한 그림 등과는 사뭇 다른 특징이다. 모든 비평은 말로 이루어진다는 것, 언어텍스트를 생산하는 것이라는 점은 문학의 ‘무게’를 생각하게 한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치열한 사유를 해야 한다는 까닭이 여기 있다. “두 번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은 한 번도 읽을 가치가 없다”는 말을 한 작가가 있다. 여러분의 책이 두고두고 읽을 수 있는 가치를 지닌 책이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니체의 말대로 “피로 쓴 책”을 만들고자 하는 열정이 우선해야 한다.끝
정동진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하슬라아트월드는 자연과 어우러진 예술의 아름다움을 오감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복합문화예술공원이다. 오래 전부터 일출로 유명한 정동진이지만, 이 지역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바닷가보다 하슬라아트월드를 찾는다고 할 정도로 멋진 일출을 볼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곳에서 보는 월출은 일출 이상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하슬라아트월드는 전시장과 같은 울타리를 벗어나 예술과 자연이 어우러진 모습을 통해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해 보자는 예술가들의 뜻이 모여 2003년 10월 처음 문을 열었다. 자연미와 인공미가 어우러진 산책로 총 3만 3000평 규모의 하슬라아트월드는 전망대인 ‘항상’, 성성 활엽길, 소나무 정원, 시간의 광장, 놀이 정원, 바다 정원, 하늘전망대, 솟대박물관, 바다카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슬라아트월드의 산책로는 항상 수평선을 볼 수 있어 ‘항상’이라고 이름 붙여진 전망대를 지나면 바로 시작된다. 산책로 첫머리에는 300여 종의 식물과 예술작품이 조화를 이루는 성성 활엽길이 있고, 좀 더 걷다보면 각종 소나무가 심어져 있는 소나무 정원으로 이어진다. 하슬라아트월드의 중앙에 자리 잡은 시간의 광장 중턱엔 초대형 해시계가 설치돼 있어 해의 길고 짧음을 볼 수 있다. 마지막 코스인 바다 정원까지 하슬라아트월드의 산책로는 능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어 어디서든 고개만 돌리면 푸른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을 볼 수 있다. 다른 자연 • 생태체험학습장에 비해 동 • 식물의 양이나 다양성은 조금 부족하지만 자연과 더불어 예술을 동시에 느낄 수 있기 때문에 특색 있는 생태체험이 될 수 있다. 산책로를 관람하는 데 걸리는 총 소요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다. [PAGE BREAK] 다양한 재료를 이용한 예술체험프로그램 하슬라아트월드의 장점은 무엇보다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이다. 미술을 단순히 보거나 그리는 것을 넘어 시각, 촉각, 미각, 후각, 청각을 모두 이용하는 행동 위주의 체험을 해볼 수 있다. 특히, 전문 예술가가 고안한 세분화 된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자유롭게 선택해 학습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체험프로그램은 각 감각기관별로 크게 5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인체에 무해한 먹거리를 이용해 다양한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미술과 친숙해질 수 있도록 하는 ‘먹는 미술’, 솜, 양초, 점토 등 다양한 질감의 재료의 감촉을 손으로 느끼며 정서를 함양하고 상상력을 키우는 ‘만지는 미술’, 사물들을 관찰하는 습관을 길러 지각능력을 키우고 여러 가지 미술적 표현 방식을 직접 경험하면서 두뇌를 개발하는 ‘관찰하고 표현하는 미술’, 망치, 못, 나무판 등 주변의 여러 사물을 두드리고 엮어가는 과정을 통해 청각과 시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두드리는 미술’, 소의 배설물을 만지고 냄새를 맡으며 자연을 느낄 수 있는 ‘냄새 맡는 미술’ 등이 그것이다. 이 외에도 유리막대를 토치에 녹여 유리목걸이나 커피스틱을 만드는 램프워킹이나 유리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뒤 오븐에 구워내는 글라스 페인팅 등 다른 곳에서는 쉽게 접하기 힘든 유리공예를 직접 경험할 수 있다. 또한 ‘창작조형체험’과 ‘야생화 식물 체험’ 등 유희를 통한 두뇌개발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다. 이러한 예술체험프로그램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도 함께 참여할 수 있으며, 각종 재료를 따로 판매하고 있어 집에서 따로 교보재를 구입해 활용할 수도 있다. 또한 각 학교로 전문가가 찾아가는 출장지도도 가능하다. 예술성이 돋보이는 하슬라 뮤지엄 호텔 올해 6월, 완공된 하슬라 뮤지엄 호텔은 뛰어난 예술성을 자랑한다. 정동진 앞바다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어 객실에서 아름다운 일출을 볼 수 있고, 세세한 부분까지 설립자인 강릉대 미술학과 최옥영 교수가 직접 디자인했기 때문에 호텔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다. 호텔 1층의 레스토랑 ‘張’은 미술관과 식당의 복합 공간으로, 많은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는 예술적 공간에서 품격 있는 식사를 할 수 있다. 레스토랑은 굳이 식사를 하지 않아도 하슬라아트월드 방문객이라면 미술관처럼 이용이 가능하다. 단, 숙박비가 25만 원에서 250만 원 사이로 고가이고 객실 수가 많지 않아 단체숙박에는 적합하지 않다. 하슬라아트월드에서는 야외미술관 체험 축제나 국제 야외미술관 심포지움 등 방문객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문화관련 행사가 종종 열리므로 시기를 잘 맞춰 방문하면 보다 풍성한 경험을 할 수 있다. | 강중민 jmkang@kfta.or.kr
법정 스님의 첫 법문집인 이 책 일회일기(一期一會)는 삶과 인연의 소중함을 비롯한 여러 이야기를 일기일회. 법정. 문학의 숲. 1만 5000원독자에게 전달합니다. 넉넉한 편집에 편안한 구어체 문장으로 쓰여 있어 마음 단단히 먹고 죽 읽어 내려가면 단시간 내에 읽을 수 있지만,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내용이 많아 생각처럼 빨리 읽히지는 않습니다. 이 책은 2003년 5월부터 2009년 4월 사이에 있었던 법정 스님의 법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법정 스님의 한마디 한마디를 모두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힘들지만, 모든 법문에 법정 스님이 갖고 있는 삶에 대한 일관된 태도와 메시지를 담겨 있어 세월이 흘러도 인간이 지향해야 할 바가 쉽게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아, 그 빨래판 같은 거요.” 이 책에 담겨 있는 여러 이야기 중 ‘자기로부터의 자유’라는 제목의 법문에 나온 이 이야기는 재미있으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하루는 팔만대장경을 모셔 둔 장경각 쪽에서 할머니 한 분이 내려오면서 스님에게 “팔만대장경이 어디 있습니까?”하고 물었다.“지금 내려오신 곳에 있습니다.”하고 일러 주자, 할머니는“아, 그 빨래판 같은 거요.”하는 것이었다. 315쪽 이 이야기는 법정 스님이 해인사 선방에서 수행을 하던 시기에 실제로 겪은 일이라고 합니다. 팔만대장경은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가치 있는 문화재입니다. 더구나 수행 중이던 법정 스님에게 있어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법정 스님은 이 일을 불쾌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우리 불교가 옛것만 답습하고 제도권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팔만대장경의 말씀도 한낱 빨래판 같은 것임을 깨닫고 살아있는 언어로 불교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이런 법정 스님의 모습은 사회 어느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보고 배워야 할 모습일 것입니다. 과거에 많은 업적 쌓고 높은 위상을 인정받았다 할지라도 단지 과거에만 매달려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별다른 의미를 전할 수 없다면 큰 가치를 가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으로 이해한다면 하나의 재미있는 에피소드 정도로 여겨질 수 있는 이 사건은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뜻을 지닌 이 책의 제목 ‘일기일회’와 아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처럼 일기일회는 심각하지 않은 소소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지만, 치열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여느 자기개발서 이상으로 진지하게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모든 것은 한 번의 기회, 한 번의 만남” 각 법문의 말미에서 법정 스님은 항상 ‘자신의 삶에 감사하며 충실히 살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에 참으로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삶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일기일회, 한 번의 기회, 한 번의 만남입니다. 이 고마움을 세상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좋은 가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54쪽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고 있지만 입추가 지난지도 꽤 됐으니 금세 선선한 가을이 오겠지요. 독자 여러분들도 일기일회와 함께 선선한 가을, 좀 더 풍요로운 삶을 맞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강중민 jmkang@kfta.or.kr
우리가 잘 아는 우화 중에 ‘토끼와 거북이’가 있다. 말 그대로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 경주를 벌였는데 발 빠른 토끼가 한참을 앞서 나가다가 거북이의 그림자도 안 보일 정도로 앞지르게 되자 한 숨 쉬어가려고 낮잠을 잔다. 느린 거북이는 죽을힘을 다해 기어가도 토끼를 쫓아갈 수 없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경주에 임한다. 그래서 그 결과는? 토끼는 꾀를 부리는 나태함으로 자기 발등을 스스로 찍게 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성실한 거북이에게 지고 만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우화이고 동화이다. 현실에서는 느리고 둔한 거북이가 영리하고 부지런한 토끼를 이기는 경우를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드물다고 해서 그런 일이 아예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각박한 현실 세계에서도 아주 가끔씩 눈물겨운 인간 승리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그런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위로를 받으며 희미한 가능성과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주어진 삶을 열심히 꾸려가려고 노력하게 된다.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영화도 마찬가지다. 냉정하고 회의적인 시각으로 비정한 경쟁 사회를 그려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용기와 진심이 승리한다는 훈훈한 이야기를 통해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삶에 지친 관객들에게 위안을 선사한다. 배우 김윤석이 두 소매를 걷어붙이고 달리는 영화 거북이 달린다도, 촌스럽고 무능하지만 경주를 포기하지 않는 한 인간의 손을 들어준다. 시골형사와 탈주범의 대결 어수룩한 형사가 지능적인 범인을 뒤쫓는 이야기의 얼개와 캐릭터가 김윤석의 전작 추격자와 비슷한 느낌을 준 거북이 달린다. 개봉 전에는 내심 추격자의 아류작(?)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괜한 기우였다. 막무가내 형사로 분한 김윤석의 모습에서 기시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거북이 달린다는 추격자가 구축한 형사 - 범인의 대결 구도를 변주하고 기존 형사물의 장르적 관습도 살짝 비켜가면서 색다른 매력을 선보인다. 충남 예산의 시골 마을, 조필성 형사(김윤석)가 속한 강력반의 일상은 점심내기 바둑을 두며 소일하는 노인들의 하루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별다른 사건사고가 일어나지 않아 심심하기 짝이 없는 시골 형사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지역 행사 ‘소싸움대회’다. 경제권을 쥐고 있는 연상의 아내에게 구박받고 어린 딸에게조차 잔소리를 듣는 조 형사는, 아내가 땀 흘려 모은 쌈짓돈을 몰래 들고 나와 소싸움판에 건다. 동네 동생이자 양아치인 용배(신정근)를 통해 우승 후보 정보를 입수하고 세심한 관찰력을 동원해 우승 상금을 획득한 조 형사. 간만에 가족들 앞에서 어깨를 펼 수 있게 된 기쁨에 목이 메고 가슴이 울렁거린다. 하지만 갑자기 마을에 나타난 탈주범 송기태(정경호)에게 상금을 도둑맞고 애꿎은 피해자가 된 조 형사와 송기태의 힘겨운 술래잡기가 시작된다. ‘빠른 놈 위에 질긴 놈’이라는 카피가 말해주듯 거북이 달린다는 ‘느림보’ 조 형사가 ‘날쌘 돌이’ 송기태를 잡는 과정이 주요 플롯이고, 두 상반된 캐릭터가 펼치는 대결을 얼마나 밀도 있게 묘사하느냐가 영화의 관건이다. 불룩 처진 배에 싸움은 고사하고 총기 건사도 못하는 시골 형사와, 출중한 싸움 실력과 영리한 두뇌를 가진 신출귀몰 탈주범의 대결. 누가 봐도 한쪽으로 기울어진 승부다. [PAGE BREAK] 우직한 연기, 순박한 유머 실제로 형사라는 직업이 무색할 정도로 송기태에게 죽도록 얻어터지는 조 형사, 심지어 “너 형사 맞냐”라는 말까지 듣고 갖은 굴욕을 당하며 매번 코앞에서 송기태를 놓치고 만다. 하지만 제목 ‘거북이 달린다’가 암시하듯, 이 싸움의 승자는 빠른 토끼 송기태가 아니라 느린 거북이 조 형사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토끼와 거북’의 우화에서, 태생적 우월함을 이용해 저만치 내달려버린 토끼를 앞지르며 거북이가 승리한 원동력은 자신의 약점을 극복해낸 ‘인내심’과 ‘성실함’이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가 주목하는 지점도 송기태를 뒤쫓는 조 형사의 뚝심과 끈기다. 동료 형사들의 도움조차 받지 못한 조 형사는 용배 무리와 힘을 모아 나름 치밀한(?) 작전을 세우며 송기태를 압박한다. 물론 무모하고 미련스러운 그들의 도전은 번번이 실패하지만 조 형사는 포기하지 않는다. 처음엔 잃어버린 우승 상금을 되찾고자 이 싸움판에 뛰어들었지만 송기태에게 굴욕을 당하면서 점점 오기가 생긴다. 결국 “쪽팔리고 자존심 상하고 한이 맺혀서” 꼭 잡고야 말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무술 실력이 뛰어난 형사들도 우후죽순 나가떨어진다는 송기태(다소 무리한 설정이지만 ‘신창원’을 기억한다면 그리 비현실적이지도 않다)와 대적하기 위해 최후의 필살기를 배우는 조 형사. 단 한 번의 급소 가격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이 필살기를 몸치 조 형사가 과연 써먹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독기품은 조 형사, 결국 해내고 만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라 할 만한 마지막 대결 신은 소싸움장인 모래판에서 벌어진다. 소싸움대회에서 누구나 우승 후보라고 단정했던 소의 약점을 찾아내 새로운 우승소를 맞췄던 조 형사의 집념은 이번엔 더 강해졌다. 송기태의 아킬레스건을 물고 늘어진 후 끝내 그를 쓰러뜨리기까지 멈추지 않는다. 상처를 입고도 뜨거운 콧김을 뿜어내며 상대를 향해 돌진하는 소처럼,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는 두 사람의 이 무식한 육탄전은 흥미진진하지만 지켜보기 괴롭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판에서 사력을 다하던 조 형사가 최후의 일격을 날리고 쓰러지는 장면에 이르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송기태로 인해 파면되고 가족과 동료들에게 무시당하며 서울에서 내려온 형사들에게 조롱당했던, 무능한 형사로 마음고생하면서 흘렸던 그의 땀과 눈물이 안쓰러워서이다. 가족, 거북이를 달리게 만들다 영화 거북이 달린다는 외관상 형사와 탈주범 간의 대결 구도를 그리고 있지만 그 본질은 가족들에게 떳떳한 가장이 되고 싶었던 인간 조필성의 고군분투에 있다. 구멍 난 속옷을 입고 손이 부르트게 일하는 아내와 “울 아빠가 형사”라고 친구들에게 자랑하는 딸 앞에서 늘 고개 숙인 남자였던 그가, 우연한 계기(송기태와의 만남)를 통해 탈바꿈되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무기력해 보이던 거북이를 달리게 한 것은, 아내에게 속옷 하나 사주는 게 꿈인 못난 남자가 목숨걸고 싸워서 지켜낸 것은, 바로 ‘형사 아빠로서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딸과의 약속이었다. 그래서 그 약속, 소박한 꿈이 이루어진 순간, 가족과 동네 사람들 앞에서 머쓱한 미소를 짓는 이 투박한 남자의 등짝을 툭툭 두드려주고 싶어진다. 추격자에 이어 이 영화에서도 김윤석이라는 배우의 존재감은 눈부시다. 이제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한 그는 작품 편수가 쌓일수록 놀랍게 진화하는 듯하다. 캐릭터에 밀착되면서도 한층 더 여유로워진 그의 연기에, 남편을 구박하면서도 편이 되어주는 견미리(조 형사 아내 역)의 안정된 연기가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비중이 적은 조연들의 연기도 무난하다. 특히 야밤 잠복근무에 하얀 점퍼를 입고 오는 어리숙한 양아치, 용배 역 신정근의 감초 연기는 영화에 코믹함을 더한다. 다만 대결의 한 축인 송기태 캐릭터가 너무 밋밋해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이 흠이지만, 욕심내지 않고 한걸음씩 내딛는 영화의 우직함과 유머 감각이 훈훈한 감동과 재미를 선사한다. 감독 : 이연우 배우 : 김윤석, 정경호, 견미리 관람정보 : 15세 관람가, 117분 ★ 거북이 달린다는 이연우 감독이 데뷔작 2424의 실패 이후 7년 만에 선보인 두 번째 장편 영화다. 끝이 보이지 않는 불경기에 제작을 끝낸 영화들이 창고에서 썩고 있는 영화판에서, 어렵사리 두 번째 자식을 세상에 내놓은 그의 감회가 어땠을까…. 그의 영화에서 거북이에게 승리의 영광을 안겨주면서 감독은 제일 먼저 스스로를 위로하지 않았을까. 거북이 달린다는 영화의 만듦새에서 발견되는 소소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진정성이 강한 뚝심을 발휘해 비평과 흥행에서 좋은 점수를 얻었다. 살다 보면 그렇게 인생 역전의 기회는 찾아온다. 물론 이연우 감독처럼 ‘오랜 세월동안 포기하지 않고 칼을 갈았을 때’ 라는 단서가 붙겠지만.
삶을 좌우하는 이야기 본능 인간에게는 식욕, 성욕, 수면욕 같은 기본적인 욕구뿐 아니라 온갖 대상에 대한 욕망이 있을 터인데, 그 중에는 이야기를 향한 본능도 있다. 이야기는 우리 삶 도처에 스며 있으니, 이를테면 이야기와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스포츠 경기에서도 사람들은 ‘한 편의 드라마’를 기대한다. 사람들은 경기를 관람하면서도 이야기 본능을 충족할 수 있을 때 더욱 만족을 느낀다. 우리는 마치 기승전결을 갖춘 완결된 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게임을 지켜보면서, 경기의 흐름이 반전과 역전으로 긴장감 넘치는 전개를 보여줄 때 더욱 열광한다. 또한 스포츠 경기와 관련한 인물과 사건 등 끊임없이 주변 이야기와 뒷이야기를 즐긴다. 우리 속에 내재한 이야기 본능이 비단 즐거움 때문이라고만 여기는 것은 곤란하다. 이야기를 추구하는 열망은 상처 받은 마음의 치유에 관여하기도 하고 삶과 죽음을 좌우하기도 한다. 고아나 입양아처럼 부모가 누구인지, 고향이 어디인지 등등 자신의 서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정체성 혼란 때문에 고통을 받으며, 개중에는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괴로움은 삶의 첫 단추인 자신의 출생담을 제대로 구성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자신의 인생담을 유기적 구성을 갖춘 한 편의 이야기로 완성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지도 모른다. 삶은 자신의 인생을 한 편의 이야기로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과정인 까닭이다. 이야기 형식으로서의 서사와 소설 이야기는 아마도 인간의 언어와 거의 동시에 출현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본디 ‘말하다’는 ‘이야기하다’와 뜻이 같다. 다만 이야기에는 일정한 줄거리가 있거나 주제 혹은 화제가 있어야 하니까, 말의 분량이 어느 정도 모여야 이야기로 발전할 수 있다. 이야기 형식에는 크게 서사와 소설이 있다. 서사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거나 지어낸 이야기다. 그것은 이야기를 다루는 것, 또는 이야기에 관한 모든 것을 포함하므로, 동서고금을 통틀어 존재하는 모든 이야기를 서사라고 부를 수 있다. 이에 비해 소설은 서사 가운데 일정한 조건을 갖춘 것을 가리킨다. 문학의 장르를 구분할 때는 보통 서사, 서정, 극 장르가 상위 범주를 이루고, 소설, 희곡 등은 하위 범주에 포함된다. 소설은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기초해 허구적으로 꾸며낸 산문체의 문학 양식이지만, 무엇보다도 근대 이후에 서구에서 발생한 문학 형식이라는 점을 꼭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근대적 문학 양식이라는 세 마디 말에 소설의 본질을 둘러싼 매우 복잡한 내용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근대어와 소설의 언어 서사 일반과 소설을 가르는 가장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요소는 언어다. 소설은 근대국가의 출현과 더불어 융성하게 된 근대적인 문학 장르인 만큼, 창작도 수용도 근대어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근대어란 근대국민국가가 국가다운 체제를 정립하기 위해 일부러 힘을 기울여 정착시키려고 한 새로운 언어를 뜻한다. 소설의 언어는 입말이 아니라 글말, 모어(母語 • 지역어, 사투리)가 아니라 표준어를 전제로 삼는다. 근대 이전의 서사는 공동체라는 좁은 세계를 염두에 둔 이야기로서 공동체에 속한 성원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전라도 지방의 서사가 경상도나 함경도 사람들처럼 이질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독자에게 침투해 전국적인 서사로 발전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다(엄밀하게 따지자면 근대 이전에는 근대국가가 없었으므로 ‘전국’이라는 말도 어불성설이지만). 그러나 근대 유럽에서 발전한 소설이라는 문학 형식은 지역이나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 계층, 성별, 언어를 달리하는 이질적인 독자를 대상으로 삼는다. 이광수의 무정이 매일신보라는 신문 매체를 타고 조선 전역을 아우르는 독자의 사랑을 받은 현상이야말로 소설의 근대성을 보여준다. [PAGE BREAK] 소설의 번역 가능성 서사는 독자가 자연스럽게 몸으로 익힌 모어를 통해 창작과 수용이 이루어지는 데 비해, 소설은 그 매개하는 언어가 근대 학교교육을 통해 익힌 글말과 표준어라는 점에서 독자의 모어가 아니다. 이광수의 무정에 쓰인 언어는 전라도 사람이나 평안도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언어가 아니었던 것이다. 소설을 통해 각각 상이한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 똑같은 언어로 똑같은 작품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근대적 현상은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한 나라의 작품을 다른 국가의 언어로 번역해 함께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외국 소설을 번역해서 읽고 있기 때문에 소설은 으레 번역할 수 있는 텍스트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한국의 독자는 고전의 반열에 올라선 프랑스 소설 레미제라블을 번역해 읽고 감동을 느끼며 세계적인 명작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근대 이전의 서사는 결코 번역이라는 문제를 제기하기 않았다. 소설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중세문학이 번역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수용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언어와 문화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똑같은 작품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새롭고 신기한 일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의 번역 가능성은 소설이 지닌 근대성, 세계성을 나타낸다. 근대국가 형성에 기여한 소설 소설이 유독 근대에 들어와 흥성하게 된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인쇄나 제지 같은 책 만드는 기술의 발달도 큰 몫을 했다. 근대 이전의 서사는 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문학으로 존재했다. 문자로 쓰인 텍스트라 하더라도 대량으로 복사하고 제본해 책으로 내기에는 많은 한계가 따랐다. 그러나 근대 과학문명의 발달로 인해 책 만드는 기술이 괄목할 만큼 발전하면서 책은 대량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 책을 찍어내려면 종이, 잉크 같은 재료가 필요하며, 인쇄기, 제본기 같은 설비를 갖추기 위한 자본이 필수적이다. 또한 상품으로 제작한 책을 국내뿐 아니라 국제 시장에 광범위하게 유통시키기 위한 시스템도 있어야 한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 :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에서 근대어(문자)와 인쇄자본주의(Print-capitalism)야말로 근대국민국가와 민족의식의 형성을 촉진시킨 일등공신이라고 주장한다.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자각이 공동체 의식을 자극하여 상상 속의 공동체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소설은 인쇄자본주의의 물결을 타고 근대문학의 대표 장르로 떠올랐다. 근대교육은 ‘국어’를 가르쳤고, ‘국어’를 배운 독자들은 ‘국어’로 쓴 소설을 읽었다. 모든 소설이 내셔널리즘에 물들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근대국가의 국민이 내셔널리즘을 내면화하는 데에 소설은 중대한 역할을 해냈다. 신의 자리에서 세계를 창조하다 서사든 소설이든, 상상력을 통해 현실을 재구성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이 중에서 소설의 시점과 세계 창조는 특별히 연관이 깊다. 머릿속에 구상한 세계를 소설 속에 옮겨놓을 때 소설의 시점은 세계를 위(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곳에 머물러 있다. 신이 세상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뜻대로 천지만물을 빚어내는 것처럼, 작가는 소설을 창작하면서 자기만의 세계를 쌓아올린다. 근대 서양에서 소설이 흥성하는 시점은 교묘하게도 신과 종교가 쇠퇴하는 때와 맞물려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인간이 소설을 통해 신 없는 세계에서 자기중심적으로 세계를 창조하게 된 일과 무관하지 않다. 소설은 신의 자리에서 세계를 창조한다. 어쩌면 인간중심주의를 완성한 근대적 인간의 이야기 본능은 오만불손하며 불온한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