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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이면서 초월적인 세계 우리 안에는 이야기 본능이 있다(여기에 대해서는 지난 호에 실린 글을 읽어주기 바란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이야기를 지어내고 들려주면서 살아가게끔 되어 있다.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음식을 먹고 잠을 자는 것처럼, 이야기를 만들고 전달하는 일은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합리적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거나 해명할 수 없는 현상에 부닥쳤을 때, 이야기로 꾸미는 과정에서 인간은 그것을 알아 나간다. 고난이나 상처로 얼룩진 상황에 빠졌을 때는 이야기가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치유하며 구원을 모색하는 길잡이가 되어주기도 한다. 이야기 속에는 풍요로움이나 복을 기원하는 마음이 들어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자기 성찰의 정신도 담겨 있다. 이렇듯 이야기를 향한 욕구는 삶의 구석구석에 촉수를 드리우고 있다. 한마디로 이야기는 상상력을 발동하여 개인과 집단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자기 생존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 가운데는 인간의 세계를 훌쩍 벗어나 영혼이나 신의 세계를 넘나드는 것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신화와 전설을 꼽을 수 있다. 신화와 전설은 인간이 자신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이라는 경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노력의 결실이며, 현실을 넘어선 세계로 진입하는 열쇠다.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는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욕구를 바탕으로, 인간은 인간이면서 신적이고, 삶이면서 죽음이며, 현세적이면서 초월적인 독특한 세계를 창조해왔던 것이다. 신화의 생명은 신성성 말뜻 그대로 풀어보면, 신화는 신의 세계를 다룬 이야기, 전설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된다. 한국의 전설을 떠올려보건대, 대개 전설에서는 귀신, 도깨비, 망령(亡靈)이 곧잘 출몰한다. 그것들은 괴상망측하고 엽기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비범한 초능력을 지녔다고는 해도, 대체로 죽은 사람이 모습을 바꾼 것이거나 동물이나 인간의 형상을 띠고 있다. 이래저래 비교적 인간과 친근한 존재인 까닭에 아무래도 신성성과는 거리가 좀 있다. 이에 비해 신화에 나오는 신은 현세와는 차원이 다른 ‘별세계’에 살고 있다(別世界 혹은 星界). 인간 세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인간사를 두루 관장하는 전지전능의 그들은 인간과 자연을 초월한 신령스러운 존재이기에 감히 범접할 수조차 없다. 애당초 인간과 이 세상을 존재하게끔 해준 창조주가 바로 신이 아니던가. 신화는 삼라만상에서 이 세상 최초로 일어났던 일을 다룬다. 인간의 삶에 본질적인 의미를 지닌 우주, 자연, 인간, 사물, 제도 등이 신의 손에 의해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즉 만물의 기원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신화는 신성하다. 신성성은 신화의 생명이다. 만약 신화가 신성성을 상실하거나 부여받지 못하면 신화로서 제 구실을 해내기는 어렵다. [PAGE BREAK] 신화와 민족은 불가분의 관계 그러나 신화라고 다 신성한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그리스 신화가 아무리 널리 퍼져 있고 붐까지 일으킨다고 한들, 그것은 어디까지나 흥미롭고 가치 있는 읽을거리일 뿐이다. 즉, 한국인에게는 어디까지나 소비하거나 향유하는 서사적 문화유산이기 때문에 일반교양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는 될지언정, 그리스 신화가 한국 사회를 통합해주기를 기대하는 한국의 독자는 거의 없다. 원래 신화는 종족이나 민족 단위로 전승이 이루어진다. 민족이나 국가, 지역이나 집단의 흥망에 따라 신화는 신성성을 상실하기도 하고 강화시키기도 한다. 새롭게 나라를 세운 집단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는 동시에 사회적 통합을 꾀하기 위해 건국신화를 동원한다. 특히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지배층이나 지도자들은 신화에 숨을 불어넣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단군신화와 주몽신화는 수차례에 걸친 몽고의 침입으로 국토의 피폐와 민중의 수난이 극에 달했을 때 두드러지게 부상했다. 신화를 통해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고 사회 구성원의 단결을 촉진할 수 있었다. 단군이 민족의 시조로 굳건히 자리 잡고 혈연민족주의의 핵심을 차지하게 된 것은 근대적 민족의식의 고양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1909년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평안도와 백두산 지역의 단군신앙운동을 이어받아 나철이 창시한 대종교(大倧敎)에서 알 수 있듯이, 서구 열강이 침략해온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단군신화가 민족의 신화로서 더욱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신화의 진실성 논란? 허구적 이야기라는 뜻의 그리스어 mythos에서 유래한 영어 낱말 myth는 19세기 초엽에 등장했다고 한다. myth는 본디 이야기나 스토리를 가리켰지만, 나중에는 실제 존재하거나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을 지니게 되어 logos나 historia의 상대어로 통했다. 이후 신화(myth)는 차츰 전설(legend)과 구별되기 시작했다. 전설은 믿을 수 없으면서도 역사와 관계가 있고, 거짓이면서도 어떤 진실성을 품고 있는 이야기인 데 비해, 신화는 거짓이고 믿을 수 없으며 교묘하게 지어낸 속임수라는 뜻이 널리 퍼졌다. 그렇다면 19세기 역사학에서는 신화로 여겨졌지만, 1870년부터 하인리히 슐리만이 유적을 발굴하면서 역사적 사실성을 인정받은 트로이 전쟁 같은 예는 신화보다는 전설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만물의 시원을 이야기하는 신화에서 태초라는 시간은 상상을 넘어설 만큼 아득히 멀 뿐 아니라 전적으로 허구적인 시간이다. 이에 비해 전설은 태초와 현재 사이에 실제로 존재한 인물이나 발생한 사건을 이야기로 전한다. 즉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전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지역성과 역사성은 전설의 성격을 결정짓는 커다란 조건이다. 그러나 신화의 허구성이 거짓으로만 똘똘 뭉쳐 있는 것은 아니다. 신화의 세계는 허구와 상상으로 가득 차 있지만, 세속적인 역사 해석이나 과학적 설명보다 훨씬 더 심오한 진실성을 담고 있다. 신화의 초월성과 비합리성은 인간의 심성이나 정신을 심오하게 드러내 준다는 점에서 도리어 진실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진실성이야말로 신화를 예술과 문학이 뿌리 내리고 있는 근원적인 토양으로 대접하는 이유일 것이다. 전설에는 고향이 있다 신화와 전설 모두 인간의 경험적 현실을 넘어선 상상적 내용을 다루지만, 신화에 비해 전설은 역사적 근거나 사실(史實)과 훨씬 더 강하게 결합해 있다. 이를테면 신화 속에 나오는 장소나 유적을 찾아 헤매는 고고학자와 탐험가는 있지만, 신화를 이야기하거나 듣는 사람이 내용의 사실성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일은 흔치 않다. 이에 비해 전설에 대해서는 그 내용이 구체적인 사실(史實)이라고 믿는 경우가 많다. 친숙한 TV드라마 전설의 고향을 보면 작품 말미에 “☆☆바위에 얽힌 이 이야기는 ○○마을의 전설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추임새처럼 따라붙는다. ☆☆바위와 ○○마을이라는 구체적인 장소와 증거물을 내세워 전설의 내용이 믿을 만한 사실임을 강변하는 것이다. 이처럼 ‘전설’에는 ‘고향’이 있다. 전통적인 농촌사회의 해체에 따라 고향을 잃어버린 현대 산업사회에서 전설이 설 자리는 없어 보인다. ‘창업 신화’, ‘가요계의 전설’에서처럼 절대적이고 획기적인 업적을 비유하는 말로 쓰일 때, 전설은 겨우 신화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현대사회에서는 대중문화의 스타가 신화의 명맥을 잇고 있다. 20세기 인간의 역사가 만들어낸 스타의 신성스러움은 신과는 달리 한시적이고 부서지기 쉬우며 세속성이 강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과학기술과 인간 이성의 발달로 인해 신화와 전설의 위력은 우리 삶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듯 보인다. 그러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던 신화와 전설 속에 인간의 심리 저 밑바닥에 침잠해 있는 무의식의 작동과 상징의 뜻을 푸는 열쇠가 들어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왜 미디어 활용 교육이 필요한가? 최근 미디어를 활용한 수업이 학교 현장에서 크게 각광받고 있다. 이미 예전부터 우리의 삶은 미디어와는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의사소통에는 반드시 미디어라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목소리와 눈빛, 몸짓을 활용하는데 이런 것이 바로 미디어의 넓은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즉, 미디어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매개체를 의미한다. 미디어 활용 수업은 기존의 전통적인 미디어 수업과 달리 ‘대량으로 복제하고 대량으로 유포할 수 있는 매스 미디어’를 활용한 수업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매스 미디어가 정치, 경제, 사회, 국제 영역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 후보자들의 방송 토론이나 특정 상품의 광고, 국경을 초월한 거대한 공동체의 모습도 매스 미디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최근 학교 현장에서의 수업 방법이 신문, TV 프로그램, 라디오, 영화, 음악 등의 매스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사회의 변화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교사의 수업 방법에는 ‘말’ 중심의 구술 수업 방식과, ‘글’ 중심의 문자 수업 방식이 주로 활용되었다. ‘말’은 청각만을 이용하는 미디어 수업 방식으로 볼 수 있으며, ‘글’은 시각만을 이용하는 미디어 수업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최근에 등장하는 매스 미디어는 ‘말’과 ‘글’을 동시에 활용하는, 즉 시각과 청각을 모두 사용하는 특성을 보여준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시각과 청각을 모두 사용하여 수업을 진행했을 때 교육적 효과가 훨씬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미디어 세대인 학생들에게는 단편적인 ‘말’과 ‘글’뿐만 아니라, ‘말’과 ‘글’을 적재적소에 효과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의 교사들에게 다양한 미디어를 활용한 수업은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미디어 활용 교육의 종류 학교 현장에서 미디어를 활용한 수업은 크게 ‘미디어를 가르치고, 미디어로 가르치며, 미디어를 창조하는’ 3가지로 구분된다. 현대 사회의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통로로서의 미디어는 그 자체를 이해해야만 한다. 미디어를 이해해야만 사회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민주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미디어 세대인 요즘 학생들에게는 다양한 시각과 청각 효과를 통해 빠르고 쉽게 가르치는 미디어 활용 교육이 큰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미디어로 가르치는 것은 교사의 일방적 강의와 단편적인 텍스트로 가르치는 것보다 교육적 효과가 뛰어나다. 지식기반사회에서는 지식과 정보의 창의적 생산자가 시대의 흐름을 주도하게 된다. 미디어 시대에 미디어를 통해 자기주도적으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창출해낼 수 있는 학생을 길러내는 것이 교육의 중요한 목표가 되고 있다. [PAGE BREAK] 미디어를 가르쳐라 미디어를 가르치는 것을 흔히 미디어 리터러시(Literacy)라고도 한다. 우리는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사회의 정보를 접하게 된다. 그러나 미디어가 보내는 정보는 현실을 모두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정보들 가운데 메시지를 발신한 사람에 의해 선택된 하나의 견해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보의 사실 여부, 가치 판단의 문제 등에 유의하며 미디어를 접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미디어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민주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다. 미디어 리터러시는 미디어가 형성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중요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놀이하는 미래(Playing the Future, 1966년)에서 저자 더글러스 러시코프(Douglas Rushkoff)는 지금의 젊은 세대를 “스크린 세대(Screen-agers)”라고 불렀다. 스크린 세대에게 있어서는 미디어가 전달하는 특정한 메시지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매일매일 받아들이는 수천 가지 메시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정보를 분석하고 그 새로운 정보를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과 비교해서 평가하고 반응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이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얼마나 수월하게 해내느냐 하는 것이다. 메시지 자체가 아니라 ‘메시지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즉, 미디어로 전달되는 우리 세상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미디어의 메시지를 해독할 수 있는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 education)가 필요하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정보화 시대에서 살아가고, 일하고,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갖추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점차 정보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세계화가 확대되는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미디어 리터러시 능력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미디어로 가르쳐라 미디어로 가르치는 것은 교수 • 학습 방법으로서의 활용을 의미한다. 저학년일수록 교육과정의 내용보다 어떻게 학생들에게 효과적으로 내용을 전달할 것인지에 대한 교수 • 학습 방법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듯이 아무리 좋은 내용을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하더라도 제대로 꿰어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다면 교실은 금세 교사의 지루한 원맨쇼 현장으로 바뀌고 만다. 요즘 많은 교사들이 교과와 관련된 동영상을 수업에 도입하고, 신문을 스크랩해 학생들의 현실 감각과 논리력을 키워주는 것이 바로 미디어로 가르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미디어를 수업 현장에 끌어 들여 학생들이 쉽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수업 방법적 측면의 미디어 활용 방법을 말한다. 미디어를 창조하라 미디어를 창조해 지식기반사회의 능동적 생산자가 되어야 한다. 지식기반사회에서는 개인의 창의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식과 정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현실에서 모든 것을 머릿속에 담아둘 수는 없다. 과거 몇 천년동안 쌓여 왔던 지식과 정보보다 불과 몇 십년 동안 새롭게 창조된 지식과 정보의 양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의 지식과 정보를 잘 활용해 자신만의 창의적 아이디어를 덧붙이는 적극적 생산자 역할을 해야만 이 시대를 이끌어나갈 수 있게 된다. 지식과 정보의 단순한 소비자에서 벗어나 능동적 창조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발맞춰 학교 현장에서 널리 확대되고 있는 UCC 제작은 미디어를 창조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자신이 제작한 UCC 동영상을 수업의 일환으로 즐겁게 제작하고, 개인 블로그 등에도 올려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4~5명으로 구성된 모둠에서 영상, 자막, 음악 등을 선정해 UCC 제작의 아이디어를 도출하는 과정에서 협동학습의 장점을 얻을 수도 있다.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학교 축제에 학생들의 창의적 UCC 작품이 뜨거운 호응속에서 상영되기도 하며, 각종 단체에서의 UCC 공모전은 전국적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빈번하게 개최되고 있는 상황이다. 학교 현장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는 이미 지식과 정보의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일반 시민들까지 누리고 있다. 예전과 달리 가정의 중요한 행사에 가족들이 손수 제작한 UCC가 상영되는 것이 새로운 풍속도이다. 예를 들면, 회갑연과 같은 잔치에서 가족과 친지, 이웃들이 모여 노래와 춤으로 진행되던 모습이 요즘은 UCC 상영을 통해 잔잔한 감동을 얹어 주고 있다. 주인공의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에 촬영한 사진들을 모아 감동적인 UCC를 제작해 상영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과 젊었을 때의 모습, 결혼과 자녀의 출생, 단란한 가정의 소소한 일상과 기억에 남을 중요한 일들을 스크린을 통해 상영하는 동안 참석한 손님들은 많은 말과 글보다 훨씬 의미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미디어 활용은 교실을 벗어나서도 늘 우리에게 영향을 주며 소통에 큰 도움을 주게 된다.
“갓 독립한 미국, 남북전쟁에서 어느 편도 승리하지 못해 결국 북부와 남부로 갈라서다.” 물론 가정해 본 이야기다. 주지하듯이 미국은 독립한 지 얼마 안 되어 남북전쟁(1861~1865)이란 심각한 내적 도전을 잘 극복했고, 더불어 초일류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남북전쟁이 북부-남부의 분열을 고착시켰을 경우 오늘의 북아메리카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까?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서쪽과 남쪽으로 영역을 확장해가면서 비교적 순탄하게 성장해가던 미국 또한 마냥 순풍만을 노래할 수는 없었다. 미국이 부딪친 내외의 여러 도전 중에서도 흑인노예 문제는 국론을 분열시키는 것을 넘어 드디어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어 처절한 싸움을 벌이도록 했다. 남부에서는 인구의 5%에 불과한 백인 지주들이 400만 명을 넘어서는 흑인노예를 사역해 담배 • 목화 • 사탕수수 등을 재배하는 이른바 재식(栽植)농업적 대농장을 경영했다. 영국이 선도한 산업혁명으로 원면에 대한 수요가 증대하는 가운데 새로운 품종의 면화가 들어오고 씨아가 발명되면서 남부의 면화농업은 아연 활기를 띠었다. 초기에는 주로 해안지대에서 이루어지던 담배재배 또한 미시시피강 유역의 주들을 거쳐 마침내 텍사스주까지 확산되었다. 한편 루이지애나 동남부의 기름지고 따뜻한 지역에서는 사탕수수재배가 성행했다. 루이지애나는 1830년에 이르러 미국 전체 사탕수수의 절반을 생산했다. 반면 북부지방은 철과 석탄 등 풍부한 지하자원을 이용해 방직 • 제지 • 금속 등의 공업을 발전시켜 갔다. 따라서 북부는 영국 공산품 유입을 막기 위해 남부와 달리 보호관세정책을 지지했다. 거기다 북부는 흑인노예문제와 관련해서도 흑인노동력에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했던 남부와 달리 보다 신축적 태도를 보이다가 점차 흑인노예를 해방시키는 쪽으로 기울었다. 정치적으로도 중앙집권 지향적이던 연방당(후일의 공화당)은 북부 공업지역에 그 토대를 두고 있는 반면 지방분권 지향적이던 공화민주당(후일의 민주당)은 남부 농업지역을 그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 사실 독립 후 정부를 조직할 때부터 정치지도자들은 연방파와 반연방파로 나뉘었다. 첫 정부의 국무장관 제퍼슨이 이끈 연방파와 재무장관 해밀턴이 이끈 반연방파 사이의 대립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해밀턴은 보다 긴밀한 연방, 보다 강력한 중앙정부를 지지했고 제퍼슨은 보다 광범위하고 자유로운 민주주의를 원했다. 또한 해밀턴은 무정부상태를 두려워해 질서와 보다 효율적인 중앙정부에 관심을 둔 반면, 독재를 두려워한 제퍼슨은 “지구상의 모든 인간과 단체는 자치권이 있다”는 신조에 따라 폭넓은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했다. 연방파와 반연방파는 점차 정당형태로 발전했다. 하지만 미국은 연방파와 반연방파의 주장을 융합하고 조절해 나가는 예지를 발휘해 삼권분립에 입각한 공화제 헌법을 만들어 각 주에 광범위한 자치를 허용하되 중앙정부가 각 주를 통할하게 했다. 또한 상 • 하원으로 구성된 연방의회에 입법권과 과세 동의권을 부여하고, 연방 최고재판소와 주 재판소가 사법권을 갖도록 했으며, 행정권은 4년 임기의 연방 대통령이 행사하도록 했다. 미국의 연방헌법은 그처럼 협상과 타협의 산물이지만 그렇다고 초기의 연방주의와 반연방주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영토가 넓어지고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미국의 북부와 남부는 각각 대체로 연방과 반연방을 지향했다. 남부의 지주들은 ‘5분의 3 타협’에 의해 선거권이 없는 흑인노예를 포함시킨 인구비례로 하원의석을 배정받아 정치적으로도 특권을 행사했다. 특히 흑인노예가 남부만이 아니라 서부에서도 증가하면서 신주(新州)가 노예주 자유주(非노예주) 중 어느 쪽으로 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정치적 문제로 부상했다. [PAGE BREAK] 노예제를 택한 이른바 노예주와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 자유주는 서부개척으로 새로운 주가 생길 때마다 자기 쪽으로 넣으려고 다퉜다. 각 주는 2명의 상원의원을 선출했기 때문에 신 주의 향방은 정치적으로 중요했다. 1818년에 자유주인 북부의 일리노이주가 연방에 편입돼 노예주는 10개, 자유주는 11개였으나 앨라배마주가 노예주로 편입되어 노예주와 자유주는 동수가 되었다. 그때 미주리주의 연방편입문제가 대두했다. 북부에서 자유주로 들어오지 않는 한, 미주리의 연방가입을 반대한다고 한 것이다. 전국적 항의가 발생하는 등 한동안의 폭풍이 지난 뒤 타협이 이루어졌다. 미주리주는 노예주로 연방에 들어가되 메인주를 자유주로 넣었던 것이다. 1845년에 텍사스가 미국의 영토로 되고 멕시코전쟁으로 서남부에 넓은 새 영토가 생겼다. 그리고 1848년 1월에 캘리포니아의 새크라멘토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1년 만에 8만 명의 ‘포티나이너(Forty niner)’를 등장시킨 ‘골드러시’를 낳았다. 이미 텍사스가 노예주로 편입되었으므로 뉴멕시코 • 유타 • 캘리포니아주의 향방은 매우 중요했다. 역시 첨예한 대립상태 끝에 타협이 이루어져 캘리포니아를 자유주로 하되 뉴멕시코와 유타는 노예제에 대한 언급 없이 준주(準州)가 되게 했다. 경제적, 사회적 구조의 차이에서 비롯한 북부와 남부의 갈등과 대립은 그처럼 노예문제로 인해 더욱 격화되었다. 그리고 노예폐지론자인 공화당의 링컨이 1860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갈등은 대립을 넘어 전쟁으로 발전했다. 켄터키주의 빈농 출신 링컨은 이미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선거에 나섰을 때(1858년 7월) 남북 대립상태에 대한 자신의 기본신념을 토로했다. “내분을 일으키고 있는 집안은 오래갈 수 없다. 나는 이 정부가 半노예와 半자유를 영원히 지탱해 갈 수 없다고 믿는다.…(중략)… 나는 분열상태가 종결되리라 기대한다.” 미국 제16대 대통령 링컨노예해방주의자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남부는 곧바로 행동에 나서려 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대표자회의는 “이로써 미합중국이라는 이름 아래 사우스캐롤라이나주와 다른 주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방은 해체됐다”고 선언했다. 남부의 다른 주들도 사우드 캐롤라이나주를 따랐다. 그리고 1861년 2월 남부 7개 주는 아메리카연방, 즉 남부동맹을 결성했다. 남부동맹은 분리 독립을 선언한 후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대표자회의를 열어 수도를 버지니아주의 리치먼드에 두는 ‘아메리카연합’을 조직하고 노예제를 인정하는 헌법을 제정한 다음 미시시피 출신의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들은 세금을 징수하고 자신들의 국기를 내걸었다. 링컨은 남부동맹이 결성된 1개월 뒤인 1861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취임연설에서 이탈한 주들의 복귀를 요청하면서 연방의 결속을 호소했지만 버지니아와 아칸소 등 4개 주가 가담해(4월 17일) 아메리카연합은 11개 주로 늘어났다. 버지니아주는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헌법의 기초를 놓는데 크게 공헌을 했으며 5명의 대통령을 낸 주 아닌가? 전쟁을 피하려던 링컨의 노력도 헛되이 외국무기를 구입하는 등 전쟁준비를 서둘러온 남부가 북부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미국은 비극적 내전에 휩싸였다. 처음 수세에 몰렸던 북부는 다수의 인구(남부 11개 주 9백만 명의 두 배를 넘는 23개주 2200만 명) 및 우수한 공업력과 해군력으로 점차 남부를 제압해 갔다. 전쟁 중에 링컨이 ‘노예해방령’을 선포하자(1863. 1. 1) 흑인노예들이 다수 북부로 도주해 남부는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고 게다가 남부가 믿었던 영국도 국제 여론 등을 의식해 개입을 포기했다. 북부는 결국 우세한 해군력으로 남부의 해안을 봉쇄하여 남군을 곤경에 빠뜨렸다. 특히 1863년 7월 1~3일의 게티스버그전투 이후 북군의 우세는 확고해졌다. 군대를 증원한 양측이 사흘 동안 처절한 싸움을 벌인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스버그전투에서 남군은 투입 병력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만 8000여 명이 전사 혹은 부상했고 북군도 2만 3000여 명의 인명손실을 입었다. 4개월 뒤인 11월 19일, 격전지 게티스버그 국립묘지 개관식에 참석한 링컨은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 남겨진 위대한 과제…. 하느님의 가호 아래 이 나라가 자유롭게 다시 탄생하리라는 것, 그리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세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남겼다. 그리고 한때 남군이 북군에게 ‘치욕’을 안겨준 셰넌도어계곡회전도 4년 만인 1865년 3월에 결국 북군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은 결국 그다음 달에 끝났다. 그랜트 장군 휘하의 북군은 1865년 4월 3일에 리 장군 측의 저항을 일축하고 남부동맹(아메리카연합)의 수도 리치먼드를 함락시킨 뒤, 9일 리 장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4월 13일, 워싱턴시에서는 환희에 젖은 군중들이 시가지를 누볐다. 노스캐롤라이나로 진격한 셔먼장군 휘하의 북군도 4월 26일에 존스턴의 항복을 받았다. 그로써 내전은 끝났다. 남군의 수송력과 전쟁물자상의 열세 및 정치적 리더십의 한계도 북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PAGE BREAK] 전사자 62만여 명, 부상자 50만여 명(북군은 155만 6000명 중 35만 9000명이 전사하고 27만 5000명이 부상당했고 남군은 80만 명 중 25만 8000명이 전사했으며 22만 5000명이 부상당했다)에 전비가 150억 달러에 달한 남북전쟁의 뒷수습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전쟁의 총성이 멎은 며칠 뒤인 4월 14일에 링컨이 남부의 광신적 청년 J.W.부스에게 피살됨으로써 사태는 더 악화됐다(남군으로 참전한 부스는 소수의 공모자와 함께 링컨을 워싱턴의 한 하숙집에 납치하려 했으나 계획을 변경해 링컨을 정부의 고위 인사들과 함께 암살하기로 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유명을 달리한 15일 아침, 시인 제임스 로웰은 “모두가 경악했던 4월의 아침처럼,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직접 만나본 이 없는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 그토록 많은 눈물을 흘린 일은 일찍이 없었다”고 썼다. 전후 10여 년 동안 군정이 실시된 남부는 혼란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사실 섬멸전과 다름없는 격전을 치른 뒤의 재통합은 평탄한 길은 아니었고 일부 사람들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보았지만 미국은 분열의 위기를 극복하고 남북이 융화하여 국가적 재통합을 이루어냈다. 남북전쟁은 내란적 전쟁이 흔히 그랬던 것과는 달리 보복 • 처형 • 추방 등을 불러오지 않았다. 전쟁 중인 1864년에 재선된 링컨은 남부동맹이 항복하기 3주일 전에 행한 두 번째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전략)…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말고 모두에게 자비심을 가지고 …(중략)…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완수하기 위해, 이 나라의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 싸움하러 나간 이와 전쟁미망인과 고아를 돌보기 위해 …(중략)… 우리 다 같이 힘써 나갑시다”라고 말했다. 미국 의회는 1868년에 아칸소, 사우스캐롤라이나, 노스캐롤라이나, 루이지애나, 조지아, 앨라배마, 플로리다 등 7개 주의 연방 재가입을 승인했다. 의회는 또한 1872년에 포괄적 사면령을 통과시켜 남부동맹 동조자 500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완전한 정치권을 누릴 수 있게 했다. 북부 사람들은 전쟁 중에 “제퍼슨 데이비스를 풋사과나무에 매달아라”고 외쳤으나 데이비스는 교수형에 처해지지 않았다. 그는 2년간 투옥되었지만 30년을 더 살면서 자신의 일생을 정당화하는 회고록을 쓸 수 있었다. 거기다 항용 패배자의 몫인 망명이나 추방도 거의 없었다. 남부의 병사들도 사면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북군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한 그랜트 장군은 한 회의에서 돌아오는 길에 부하 장병들의 소란스런 시위를 중단시키면서 “반란군들은 이제 다시 우리나라 사람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랜트는 물론 남부의 실패한 영웅 리 장군 또한 뛰어난 영도력과 위대한 패배를 통해 널리 존경받았다. 제2의 아메리카혁명으로도 불리는 남북전쟁에서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했더라면 오늘의 미국은 어떤 모양일까? 아마도 북부 미국과 남부 미국으로 분열되어 대치해 왔을 것이다. 그럴 경우 북미대륙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을 것이다. 초일류 강국으로 ‘팍스 아메리카나’를 자랑해온 미국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세계사도 상당히 다르게 흘러왔을 것이다. 특히 풍부한 인적, 물적 자원과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미국이 1, 2차 대전에 연합국 편에서 참전하지 않았을 경우 1, 2차 대전은 훨씬 더 장기화했거나 독일의 세계제패 꿈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후 전개된 동서냉전도 없었거나 다르게 진행됐을 것이다.
올해 6월 저탄소녹생성장체험학교로 재탄생한 ‘곤평늪’ ‘저탄소녹색성장체험학교 곤평늪’(이하 곤평늪)은 대표 권영정 전 교장이 충주 야동초 교장으로 재직하던 지난 2002년 학생들에게 ‘사람과 자연의 공존’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자연체험학습장에서 시작됐다. 당시에도 내실 있는 교육프로그램으로 각종 언론에 보도되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었으나, 권 전 교장은 퇴임 후 보다 미래지향적이고 체계적인 학습공간을 조성하기 위해 대대적인 리모델링에 착수, 올해 6월 저탄소녹색성장체험학교로 재개장했다. 2100㎡(약 600평)의 작은 공간이지만 약 167종 10만여 점의 습지생물이 인공이 아닌 자연 그대로 자라고 있어 실제 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으며, 풍차와 태양열판 등을 직접 체험하며 다양한 차세대 친환경 에너지에 대해 배울 수도 있다.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교육프로그램이 알맞게 구성돼 있어, 작은 공간이 오히려 이동에 따르는 불필요한 체력소모를 최소화시키는 장점으로 여겨진다. 오감을 이용한 살아있는 관찰학습 곤평늪의 최대 장점은 모든 프로그램이 눈으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관찰하고 만져보는 실제적인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토마토, 조롱박 등 농작물부터 줄풀, 애기부들, 연, 창포, 개구리밥과 같은 수생식물까지 학생이 직접 채취한 후 오감을 통해 관찰하기 때문에 학습효과가 매우 크다. 더욱이 학생이 직접 채취한 것을 원하는 경우 가져갈 수도 있기 때문에 기억에도 오래 남는다. 이러한 관찰 • 실험 학습은 학생의 창의력을 크게 넓혀줘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영재성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권 전 교장은 “실제로 전체 참가학생의 4~5%가량에서 이러한 영재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며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충주 탄금초 3학년 김경용 학생이 식물을 관찰한 후 ‘식물은 생존하기 위해 진화한다’는 결과를 도출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탄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참여 학생의 영재성이 발견되면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부모는 물론 해당 학생이 다니는 학교에도 공문형식으로 학습내용을 발송해 지도에 참고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학부모에게는 교육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추후 학생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제시해준다. [PAGE BREAK] 현장 경험을 토대로 한 학습과정으로 효과 극대화 살아있는 체험은 그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지만,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교과과정과 연계된 프로그램이 필수적이다. 이 부분에서 곤평늪의 체험프로그램은 큰 강점을 갖는다. 오랜 현장경험을 토대로 권 전 교장이 직접 구성한 학습프로그램은 교과과정과 연계해 이뤄질 수 있도록 짜여 있다. 예를 들어 신재생에너지 시간에는 풍차나 태양열판을 눈으로 관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코일을 감고 만들어 보도록 하며, 한 발 더 나아가 교과서에 나오는 플레밍의 법칙과 람사르협약, 교토의정서까지 여러 분야를 연계해 수업한다. 또한 탐구결과에 대해 토론 • 발표시간을 가진 후 탐구보고서를 작성하기 때문에 언어 • 논술 영역도 자연스럽게 학습할 수 있다. 세분화된 다양한 프로그램 곤평늪의 프로그램은 크게 대중적 지도코스와 심화(과학특기)코스로 구분된다. 대중적 지도코스는 1시간 과정으로 환경과학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심화코스에는 하루 8시간씩 3일 코스와 7일 코스가 있는데, 크게 물리, 화학, 생명과학, 대기과학의 4개 파트로 진행된다. 물리는 태양열 발전 등 신재생에너지, 화학은 민속 증류주 만들기, 생명과학은 개구리 해부, 대기과학은 배타고 수온 측정하기 등 각각 교과학습과 관련이 있으면서도 학생들이 호기심을 가질 만한 것들을 직접 해보도록 구성돼 있다. 이 외에도 100여 가지의 개별 학습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는데, 그 중 ‘개구리 해부’가 가장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각각의 체험학습 프로그램은 시기별로 변동이 있으므로 방문 전 홈페이지나 전화로 프로그램을 확인 • 예약하는 것이 좋다. 교육 • 환경적 가치 큰 습지, 조성 어렵지 않아 일반적으로 체험학습장은 어린 학생의 교육을 위한 공간으로 여겨지고 실제로 그러한 경우도 많다. 그러나 곤평늪은 가족단위 방문을 적극 권장하고 있으며, 학부모나 교사도 함께 체험활동에 참여하도록 하고 있다. 어른들이 함께 체험하며 학생들을 이끌어줘야 학습효과가 크고 실제 행동으로도 옮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권 전 교장은 “습지는 온난화를 방지하는 데 숲보다 훨씬 큰 효과를 갖고 있으며 교육적으로도 활용가치가 매우 높다”면서 “각 학교에 습지를 조성하는 것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습지는 300평 정도의 공간만 있으면 적은 비용으로 조성할 수 있고 한 번 조성하면 스스로 생태계를 유지하므로 비용대비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습지조성에 대한 관심이 있다면 얼마든지 도움을 주겠다”며 교육당국과 교사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를 부탁했다. | 강중민 jmkang@kfta.or.kr 곤평늪 관련 문의 홈페이지 : www.gon2002.com 전화 : 02)744-0050, 019-447-7655 메일 : gyj7655@chol.net
본디 인간은 착한 천성을 갖고 태어난다고 믿고 있다. 부연 설명하자면 인간의 내면엔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함께 자리 잡고 있어 늘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상적인 평온한 상황에서는 대체로 선한 마음이 지배하겠지만, 원치 않는 고난을 당하거나 감당할 수 없는 시련과 사건에 휘말릴 때 인간은 평상심을 잃게 된다. 그래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꺼내 든 날 선 마음이 어느새 무기가 되어 상대방을 해치고 결국 부메랑처럼 돌아와 스스로를 비극의 수렁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집, 인간의 희로애락이 담긴 곳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필자가 살았던 고향 동네엔 낮은 언덕 하나를 경계로 재래식 주택가와 아파트 단지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요즘의 고급 아파트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4층짜리 아파트였지만, 대도시임에도 아파트 단지가 흔치 않았던 당시로써는 넓은 앞마당과 놀이터가 있던 그 아파트는 주변의 초등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시절만 해도 아파트가 지금처럼 부의 척도나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인식되진 않던 때라, 아랫동네 아이들이 윗동네 친구 따라 아파트 놀이터에서 노는 것이 창피하지 않았더랬다. 그러다 드디어 그 아파트에 이사 가던 날, 열두 살짜리 아이는 뛸 듯이 기뻤다. 그저 싱크대와 베란다가 있는 집이 좋았고 아파트에 살던 친구들과 옥상에서 밤늦게까지 놀 수 있게 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내 생애 최초의 아파트는 유년의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부동산 붐을 타고 우후죽순 솟아오른 도심의 고층아파트는, 그곳 원주민들의 애환과 눈물 위에 세워졌기에 그 태생이 아름답지만은 않다. 윤종찬 감독의 장편 데뷔작 소름 속의 또 다른 주인공인 ‘미금아파트’도 어두운 사연을 담고 있다. 재개발을 앞두고 철거 직전에 놓인, 주민들이 떠나간 낡은 아파트엔 지저분한 낙서로 얼룩진 벽과 쓰레기로 뒤덮인 복도, 삐걱거리는 문이 스산함을 더한다. 그 흉물스러운 폐허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남겨진 사람들, 미래가 보이지 않는 가난한 인생들이다. 미금아파트 504호에 새로 이사 온 택시운전사 용현(김명민), 고아라는 이유로 조롱과 무시를 받으며 자란 그는 부모에 대한 원망이 가슴 깊이 맺혀 있다. 용현이 우연히 도움을 주면서 가까워진 510호 여자 선영(장진영)은, 아이를 잃어버리고 남편에게 매 맞는 것이 일상으로 늘 반쯤 정신이 나간 듯 불안정해 보인다. 용현의 옆집 남자 이 작가(기주봉)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다. 소설가로 대박을 꿈꾸지만 출판사로부터 번번이 퇴짜를 맞는다. 선영과 언니 동생하며 지내는 은수(조안)는 504호에 살던 남자 친구 광태가 의문의 화재로 죽은 후 그의 환영에 시달리며 괴로워한다. 하나같이 어깨를 짓누르는 인생의 무게에 허덕이며 남루한 현실을 맴돌지만 용현은 그마저도 자각하지 못하는 듯 매사에 무심하고 권태로운 표정이다. [PAGE BREAK] 어리석은 욕망이 빚어내는 공포 하지만 자신의 집에서 사람이 죽어나갔다는 말에도 동요하지 않고 건들건들 인생을 사는 듯 보였던 용현의 삶은, 선영이 남편의 시체를 아파트 뒷산에 매장하는 걸 도와주면서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또한 30년 전 504호에 살던 한 부부의 이야기(바람난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집에 불을 지른 후 버리고 간 갓난아이가 겨우 목숨을 건졌다는)를 듣게 된 후 그의 정신적 공황 상태는 점점 심해진다. 집주인이 운영하는 이발소에서 504호 부부의 사진을 본 용현은, 자신의 몸에 있는 화상 흉터를 들여다보며 왠지 모를 불안과 슬픔을 느낀다. 두 시간 남짓한 영화 속에서 대부분 어둠에 파묻힌 채로 등장하는 미금아파트. 외관도 내부도 흉흉한 이곳은 그 자체로 원인 모를 두려움과 공포를 배가시키는 공간이다. 양끝이 개방된 낮은 복도 위 어슴푸레한 달빛아래 스르르 움직이는 그림자,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깜빡거리는 백열등은 인물들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대변하며 뒷덜미를 서늘하게 만든다. 소름은 등장인물들의 사건과 사연 속에 숨겨진 진실을 설명하는 데 불친절하다. 따라서 어떤 이에겐 다소 난해한 영화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인물들의 마음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감독이 조각낸 단편들을 꿰맞추어 추측해야 하는 수고가 따르지만) 그들에게 내재된 공포와 슬픔을 읽어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주인공들의 말 못할 비밀과 사연이 드러나는 순간,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용현과 선영이 부지불식간에 저지르는 또 다른 죄가 그들을 막다른 길로 내몰 때, 그들의 광기어린 눈은 슬프고 또 막막하다. 낡은 아파트를 부유하던 불순한 공기에 오염된 듯 미금아파트에 사는 이들의 불행은 서로에게 전염된다. 이웃의 불우한 사연을 소설의 소재로 이용하고 광태의 아이디어를 도용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한 이 작가의 독백처럼, 미금아파트의 비극은 30년 전 억울하게 죽은 504호 여자의 원한서린 저주로 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비에게서 버림받은 아이, 아이를 잃은 어미가 저지르는 그 비극의 악순환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욕망과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영화의 제목처럼 ‘소름’끼친다. 영화 소름은 한국에서 보기 드문 미스터리(공포)물로 장르의 전형성을 벗어나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다. 매순간 시청각적으로 전달되는 음산한 이미지들은 이야기의 비극성과 맞물려 강렬한 힘을 발휘한다. 특히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음향과 심장을 옥죄는 음울한 사운드는 낭자한 선혈도 귀신도 없는 이 영화에 낯선 공포감을 조성한다. 오래된 아파트의 먼지처럼 켜켜이 쌓아 올려진 긴장감이 폭발할 때까지 영화는 때론 격렬하게 때론 멈춰서면서 고유의 리듬을 잃지 않는다. 부조리한 인생을 응시하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절망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물들을 지켜보기가 고통스러웠다. 그 이유는 아마 그들이 나와는 전혀 다른 별종의 인간이 아니라 내 이웃으로, 혹은 나의 지인으로 동네에서 한두 번씩 마주쳤던 사람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저마다 소박한 꿈과 목표를 지닌 채 하루하루 인생을 이어가던 이들은 어느 순간 그들을 찾아온 비극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만다. 누군가는 자신의 몫보다 좀 더 가지려는 욕심으로 인해서, 누군가는 버림받은 유년의 기억과 상처를 감당하지 못해서,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을 옭아매는 삶의 올가미를 벗어나지 못해서. 그들이 살아보겠다고 항변하는 몸부림이 너무 절절해서, 또 그들을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한 사연들이 너무 안타까워서.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그 누구도 손을 내밀어 주지 않는 상황에 처한다면 나라고 다를 수 있을까 싶어서 더없이 착잡했다. 마음속에 묵직한 돌 하나를 얹고 영화 속의 인물들을 떠나보냈지만,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미금아파트를 빠져나와 뒤를 돌아보던 용현의 그 얼굴, 형언할 수 없는 공포와 슬픔으로 가득 찬, 그 뒷모습을 한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시종일관 검푸른 어둠 속에 묻혀 있던 미금아파트처럼 햇살 한 줌 끼어들 틈을 허락지 않는 이 영화는 대중의 외면을 받았다. 하지만 어둡고 추한 면을 애써 부정하고 사는 인생은 반쪽자리밖에 될 수 없고,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고 사는 것 또한 온전한 인간의 삶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수천 년의 인류 문명이 만들어낸 문학과 예술사 속에서 우리가 수많은 비극을 접하는 것은, 그를 통해 양면적인 인생과 인간의 속성을 깨닫고 타인을 향해 연민의 마음을 품게 되는 성숙한 삶을 살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인간 내면의 본질을 성찰하는 소름과 같은 영화는 잊히기엔 너무 아까운 작품이다. 용현이 그의 과거를 땅속에 묻고 떠날지라도 내면 깊은 곳의 죄책감과 분노는 영원히 묻힐 수 없는 것처럼, 이 세상엔 결코 잊혀서는 안 될 것들과 더없이 외로운 영혼들이 늘 존재하기에. 부조리한 인생의 심연을 응시하는 감독의 시선은 풍요 속 빈곤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감독 : 윤종찬 배우 : 김명민, 장진영 관람정보 : 18세 관람가, 112분
명절휴가비 지급기준 명절휴가비의 지급대상은 설날 및 추석날(이하 지급기준일) 현재 재직 중인 공무원으로서, 보수지급일 또는 지급기준일 전후 15일 이내에 지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급액은 지급기준일 현재 월봉급액의 60%이며, 직위해제, 정직, 휴직 중인 경우는 지급되지 않습니다. 단, 지급기준일 현재 감봉으로 인해 봉급이 감액 지급되는 경우에는 감액되기 전의 월봉급액을 기준으로 지급받을 수 있습니다. 재량휴무일 근무시 초과근무수당 초과근무수당은 근로시간을 초과한 경우에 지급되는 수당입니다. 그러나 재량휴일은 법정공휴일이 아닌 학교장의 재량에 따라 휴일로 정할 수 있다는 것으로 원칙적으로는 근무하여야 하나 근무하지 않는 날입니다. 따라서 재량휴일에 근무를 하더라도 초과근무는 인정되지 않습니다. 기간제 교원의 담임수당 지급 여부 담임수당은 학교장의 정식발령이 있는 담임에게 지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간제 교원은 퇴직교원을 기간제 교원으로 임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책임이 중한 직위에 임용될 수 없으므로(「교육공무원법」 제32조 제2항) 해당 학교에 담임을 할 자원이 없어서 기간제 교원을 담임으로 임명한 경우만 담임수당을 지급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담임의 업무를 대신하고 있어도 임시담임이나 부담임인 상태에서는 담임수당을 받을 수 없으므로, 반드시 학교장의 정식발령이 있어야 합니다.(교육공무원 보수업무 편람 133쪽) 명예퇴직수당의 압류와 환수 대법원은 지난 2000년 “퇴직위로금이나 명예퇴직수당은 그 직에서 퇴임하는 자에게 그 재직 중 직무집행의 대가로 지급되는 후불적 임금으로서의 보수의 성질을 아울러 갖고 있다고 할 것이므로 퇴직금과 유사하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습니다. 따라서 명예퇴직수당은 민사소송법 제579조 제4호 소정의 압류금지채권인 ‘퇴직금 기타 유사한 급여채권’에 해당합니다. 한편, 명예퇴직한 후 재임용된 경우 이미 지급된 명예퇴직수당의 환수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대법원에 따르면 공무원 명예퇴직수당제도는 정년 이전에 퇴직하는 공무원에게 정년 이전의 퇴직으로 받게 되는 불이익에 대한 보상을 지급함으로써 정년 이전의 퇴직을 유도해 조직의 신진대사를 촉진하고자 하는 데 그 취지가 있으므로, 명예퇴직 후 재임용된다면 명예퇴직수당을 환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이미 지급된 명예퇴직수당 중 적어도 명예퇴직한 시점부터 재임용된 시점까지의 퇴직기간에 상응하는 부분은 명예퇴직수당을 지급한 원래의 목적에 부합하므로 그 퇴직기간에 상응하는 부분을 제외한, 적정한 환수비율에 따라 환수해야 할 것입니다. (참고판례 : 대법원 2000. 6. 8. 자 2000마1439 / 대법원 2007. 11. 15. 선고 2005다24646 판결) 학원 강사 경력의 인정비율 학원 강사 경력 환산율은 관청의 허가를 받은 학원에서 교육청에 등록된 강사로서 활동한 경우는 50%, 교육청에 등록하지 않고 관청의 허가를 받은 학원에서 활동한 경력은 30%가 인정됩니다. 단, 관청의 허가를 받지 않은 학원의 강사경력은 인정되지 않으며, 학원 강사 경력을 반영할 때 환산율은 전공과는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