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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교육과학기술부는 대학 정보공시 사이트인 `대학 알리미'(www.academyinfo.go.kr)에 입력된 대학별 공시 내용을 토대로 7일부터 현장 실사에 나선다고 5일 밝혔다. 현재 대학 알리미 사이트에는 2009학년도 기준으로 전국 각 대학의 졸업생 취업률, 학과별 신입생 경쟁률, 전임교원 확보율, 장학금 지급률 등 각종 학교 정보가 올려져 있다. 그러나 일부 대학이 신입생 경쟁률 등의 정보를 잘못 입력한 사례가 발견되는 등 오류가 나타남에 따라 정확한 사실 관계를 파악하고자 현장 조사를 하는 것이라고 교과부는 설명했다. 교과부는 이번 조사에서 사이트에 입력된 정보들이 사실과 일치하는지 확인한 뒤 허위 정보를 입력한 대학에 대해서는 시정 명령을 내리거나 향후 대학 재정지원 사업 때 불이익을 주는 등 제재할 방침이다. 또 대학 알리미 사이트에 `오류정보 신고센터'를 개설해 오류 또는 허위 정보에 대한 신고를 받을 예정이다.
전문계고가 살아남기 위한 방안으로 문제시된 것은 고입 전문계고 우선 전형이었다. 그런데 정작 지금 어떤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가? 전문계고교 학생의 몇 %가 대학에 진학하고 있는가? 왜 이들이 거의 대부분 대학을 지망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이들 전문계고의 본질은 어디에 가고 말았는가? 대학 진학이라는 현실은 그 답에 대한 엄연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전문계고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기보다는 전문 기술을 배워 사회에 나가 직업전선에서 자신의 소질을 계발시키겠다고 한 본래의 취지는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제 전문계고의 본질을 다시 찾아야 할 때가 왔다. 전문계고를 5-6년제로 부활시키고 이들에 대한 전문 기능공으로서의 갈 길을 찾아 주어야 한다. 5-6년제를 마치고도 더 많은 전문 기술을 배워야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학생은 각 대학에 편입시험을 쳐서 갈 수 있는 길을 찾도록 하는 길이 바람직하지 않는가? 과학고를 만들어 놓았어도 진정 과학고의 본질은 사라지고 대학입시에 유리한 고지를 찾기 위한 수단으로 돌아서 버리지 않았던가? 이제 전문계고의 진정한 본질을 찾아야 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때가 되었다. 전문계고를 전문기술의 기능장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일선 전문계고등학교와 전문대학과의 유기적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여 자매결연식 자동 진학 형식을 취하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전문계고를 졸업한 학생이 왜 대학으로만 가야만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발버둥치는가? 심도 있는 사고의 깊이를 찾을 때가 된 지금, 전문계고의 갈 길을 바로 찾아 주어야 한다. 고입전형을 전문계고 우선으로 하다 보니 전문계고 떨어진 학생이 인문계로 진학을 하니 이들의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문제아로, 학교 부적응아로 나타나 학교에서 소위 골치 아픈 학생으로 낙인되어 올바른 지도를 받지 못하고 전문계고로 다시 위탁가는 현실만 기다라는 1,2학년 시절 이들에 대한 책임은 누구 져야 한단 말인가? 전문계고와 전문대학의 통합이 하루 빨리 이루어지도록 하여 진정 이들이 갈 수 있는 길을 찾아 주어야 하고 인문계고로 진학하는 전문계고 낙방생들이 없도록 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수학능력이 부족해 부진아 반으로 편성되도 이들은 자신에 대한 열등감으로 인해 수업에 대한 무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전문계고 학생들이 다시 대학이라는 곳을 향하여 나아가지 않도록 5-6년제 대학으로 부활시키고 인문계로 진학하는 전문계고 진학 낙오자들이 없도록 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교육의 핵심역량은 창의성 개발이란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교사는 교육이란 방법을 통하여 학생들의 무한한 잠재적인 창의성을 일깨워주고 개발시켜 주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우리나라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 인적자원이 유일한 자원임을 내세운다. 이 같은 우리의 인적자원은 바로 창의성을 가진 인적자원을 의미하며, 이는 교육을 통하여 길러지는 것이다. 앞으로는 ‘창의성 경제(creativity economy)’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들 한다. 이에 대비하여 세계는 미래 인류의 부와 삶의 질을 높이는 창의성 교육에 앞을 다투어 경쟁하고 있다. 학교교육을 통하여 변화를 바르게 보고 읽는 통찰력, 기존의 틀을 깨는 발상의 전환, 상상력 등을 위한 기초적인 창의성 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러한 세계 창의성 교육과는 달리 우리의 교육은 아직도 대학 입시교육에만 관심을 둘뿐 창의성 교육을 강조하면서도 실제적인 창의성을 교육할 시간이나 교육 프로그램 하나 없는 상태이다. 고작해야 초·중학교의 창의성 관련 시범학교 운영 장학자료에 불과하다. 이러한 우리의 교육환경에서는 글로벌 인재육성에는 차질을 겪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교육 선진국들은 모두가 창의력을 기반으로한 고등사고력을 기르는 교육방법과 내용에 힘을 쏟고 있다. 그 하나의 예가 바로 토의와 토론수업, 체험중심 교육, 문제해결 학습이며, 자기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쓸 수 있는 엣세이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선진국의 교육과는 달리 언젠가부터 우리교육에서 글쓰기 교육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있는 분위기가 되고 있다. 물론 교사에 의한 수동적인 칠판쓰기 교육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컴퓨터에 의한 학습방법이 많이 도입되면서부터 학생들이 공책에 쓰는 교육이 적어지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 하고 있다. 미래는 무한한 경쟁사회이다. 창의성을 바탕으로 남들이 생각지 못한 차별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교육만이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창의성은 바로 이런 인간을 기르는 교육이다. 따라서 창의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학교교육을 통하여 학생 개개인이 생각하는 아이디어와 상상력을 최대한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창의성 교육은 사회적인 분위기도 필요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학교장이나 교사의 지속적이고 헌신적인 노력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미래를 예견하고 교육자의 소명의식 없이는 근시안적인 입시교육에만 관심두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이 글로벌 인재로 세계를 누비며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학부모나 교사의 교육관이 바꿔야 한다. 그러면 창의성을 기르는 교육방법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는 학생들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학습과제를 부여해야 한다. 학생들이 창의적인 생각을 많이 하게하기 위해서는 우선 단순하고 반복적인 학습과제보다는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 있어, 깊이 생각하고 기록할 수 있는 일을 많이 부여해야 한다. 둘째는 학생들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들을 많이 제공해야 한다.우리는 지금까지 빠르게 정답을 찾은 교육만을 해 왔다. 그래서 학생들은 짜여진 교육과정에 의해 제한된 시간내에 교과목의 교육내용을 공부해온 나머지 학생들에게 학교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생각할 여유와 시간을 갖게 하는 교육을 해 오지 못했다. 셋째는 건설적인 위기를 조성해야 한다.발상의 전환을 촉진하기 위한 또 하나의 포인트는 구성원들이 위기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다. 기존의 방법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치열하게 해법을 고민할 때,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질 수 있다. 넷째, 학생들에게 토론과 대화를 유도하는 수업을 해야 한다.학생 개인의 생각을 표출하게 하는 커뮤니케이션의 핵심 수단은 치열한 토론과 대화이다. 토론과 대화는 학생들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게 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장이자, 각 개인의 다양한 생각들이 충돌하고 융합되어 보다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창출되는 상호작용의 과정이기도 하다. 다섯째, 학생들의 질문과 경청을 교육해야 한다.학생들의 토론과 개방된 대화가 이루어지려면, 무엇보다도 교사가 학생들에게 지시하거나 자기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질문을 많이 던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일방적인 지시나 훈계는 학생들의 손발을 움직이게 할 수 있으나, 머리를 쓰게 하지는 못한다. 다소 엉뚱한 이야기, 교사의 생각과 다른 이야기를 하더라도 들어주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래야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말을 하고,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다. 여섯째, 실험과 체험학습 중심의 교육방법이 되어야 한다.학생들로 하여금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과감히 실험해 보게 하는 것도 중요한 창의성 촉진 요인이다. 혁신적인 아이디어일수록 리스크가 있고, 불확실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직접 실험해 보고 배우면서 발전시켜 나가는, 소위 ‘실험에 의한 학습(learning by experiment)’을 장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곱째, 창의적 실패의 수용과 격려가 필요하다.아이디어를 직접 실험해 보고 발전시켜가도록 하려면, 그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 등 물질적 지원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때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과거 실패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재도전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상에서 논의한 몇 가지 교육방법만으로 창의성 교육을 대변할 수는 없다. 창의성은 모든 학생에게 잠재되어 있는 재능을 찾아 개발하는 교육이다. 그러므로 우리교육은 지금의 대학입시 교육에서 벗어나 교육의 본질을 회복하는 교육이 선행되어야 진정한 창의성 교육이 가능할 것이다.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하여 일부 대학들은 학생을 선발하면서도 수능의 최저학력등급을 적용하겠다는 것은 현장 고교의 생활기록부를 믿지 못하겠다는 의미요. 동시에 과학고나 외국어 고등학교 학생들을 뽑겠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진다. 물론 과학고나 외고 학생들이 나가는 길이 국내 대학이 아니라 할지라도 각 대학에서 입학사정관제도의 도입은 학생의 생활기록부만으로 학생을 뽑겠다는 취지인데도 대수능의 최저학력기준을 굳이 적용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지방고의 학생들에게 불리한 것이요, 나아가서는 사교육비 절약에 앞장서야 할 대학들이 사교육비를 부채질하는 격이 되는 것이다. 최저학력기준이 없어질 경우 일선 학교에서는 생활기록부에 충실하기 위해 학교 수업을 보다 충실하게 할 것은 물론 심도있는 수업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수시전형에 “논술”평가가 있는 데도 최저학력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서울 대학들의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최저학력기준을 적용하지 않고 뽑은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여 대학 수학능력 부족이라는 평이 나타나고 있는지 반문하고 싶다. 대학에서 대학 수학능력이 부족한 학생들에게는 과감하게 경고를 통해 학업에 매진할 수 있는 길을 찾도록 해 주어야 하는 것이 바로 대학이 가지고 있는 학점이다. 대학이 무서운 것이 무엇인가 대학에서 중간고사 기말고사 두 번으로 학생을 평가하는 것이 거의 전부다. 그만큼 학생들 자신에게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마음껏 부여해 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실력을 길러 갈 수 있는 시간은 얼마든지 많다. 대학생은 하루 3시간 정도만 수업하면 온통 자유시간이다. 그런데 나머지 시간을 유흥으로 소비해 버린다면 진정한 대학생으로서의 바른 길을 간다고 말하기 어렵다. 입학사정관제가 대학에서 최우선 과제로 떠오르는 것이라면 고교 수업을 심화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고 고교 교사들의 학업에 대한 권한을 되찾는 길이 될 것이다. 보고서 중심 수업, 토론 중심 수업, 수행평가 중심 수업 등으로 진정한 교실 수업이 그 본래의 위치를 되찾을 수 있는 것이 입학사정관제의 장점을 되살리는 길이다. 따라서 각 대학들은 수시 학기에 최저학력등급을 과감하게 폐지하여 고교 내신만으로 학생을 평가할 수 있는 진정한 길을 고교 일선에서 마련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서울의 대학들은 최저학력등급을 더욱 높여 학생들로 하여금 학원으로 과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고교 현장이 살아나야 진정한 대학문화의 진면목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에서 학생들이 놀고 고교에서 공부하는 이런 모순된 상황을 누가 만들고 있는가? 이런 모순을 누가 풀어주어야 하겠는가? 고교 현장은 대학수학능력 시험을 보는 도구로서 존재하는 학교로 전락된다면 한국 대학생들의 진정한 지성인으로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대학의 문화는 고교 현장에서 그 기초를 다지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대학에서 보고서 중심 학습, 토론 중심 학습이 되도록 일선 고교는 현장 수업에서 그 길로 이끌어 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어야 하는 길은 바로 대학 당국이 생활기록부만으로 수시 전형에서 학생을 선발하고 정시는 생활기록부 비중과 수능 성적이 고루 적용되는 대학전형이 자리잡아야 한다. 아침부터 새벽까지 학생들을 학원으로 도서관으로 과외로 여전히 내몰리고 있는 한국의 고교 현장이 과연 대학문화의 전당인가 아니면 고교 현장의 문화인가. 고교는 고교다워야 한다.
탐방단의 일원이 되며... 9월 5일부터 10일까지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을 다녀왔다. 1988년 11월 중순 서울올림픽의 뜨거운 열기를 자랑하며 우리 조상들의 발자취를 돌아본 지역이었고, 21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그때의 추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설렘이 가득한 탐방 길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고 지역의 답사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고 있던 터라 탐방단 모집에 관한 공문을 보고 주저 없이 지원했다. 내심 기다리고 있다 탐방단의 일원이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고 탐방 경비부터 입금시킨 후 차근차근 탐방에 관한 준비물을 챙겼다.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담아오는 것은 물론 잘못된 역사를 똑바로 배워와 아이들에게 제대로 전해주는 탐방을 계획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보여줄 사진자료를 많이 담아올 수 있도록 준비했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탐방지로... 한민족사 탐방의 일정상으로는 전국의 단원들이 부산영도국제크루즈터미널에 모여 후지마루호를 타고 일본으로 출항하면서 시작되지만 마음은 부산으로 가는 우등버스가 오전 9시 30분경 청주고속버스터미널을 출발하면서 일본의 탐방지로 향했다. 차안에서 탐방지에 관한 안내책자를 읽다 먼저 출근한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하늘빛이 참 좋은 하루입니다. 일본도 그렇겠지요. 건강히 잘 다녀오세요.' 직원들이 보내온 문자가 탐방 길을 마냥 즐겁게 했다. 고속버스도 설레는 마음을 알았는지 칠곡휴게소에 들려 커피까지 마셨는데 3시간 만에 범어사와 가까운 부산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점심을 먹은 후 노포동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부산역으로, 다시 한민족사탐방 셔틀버스에 탑승해 국제여객선터미널로 이동했다. 오후 2시 40분경 터미널에 도착해 충북에서 탐방에 참여한 13명이 얼굴 익히는 시간을 가졌다. 5박 6일 동안 함께 할 가이드들이 탑승차량별로 승선권과 명찰을 나눠주고 탑승과정을 안내했다. 더운 날 좁은 공간에서 시간 때우는 일이 무척 지루했다. 밖으로 나가 낚시하는 사람들과 후지마루호를 카메라에 담고 들어오니 오후 3시 30분경부터 출국 수속이 시작되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만남같이 소중한 게 어디 있으랴. 후지마루호에 올라 탐방기간 동안 419호에서 같이 생활할 서 선생님들을 만났다. 선창가와 출입문 쪽에 나란히 있는 1층 침대와 맞은편 2층 침대의 잠자리도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닿소리 순서에 'ㅂ' 다음이 'ㅅ'이라 이뤄진 만남이지만 나이 더 먹은 서성교와 변종만, 나이 조금 적은 서영웅과 서보장은 첫 느낌에 황금콤비였다. 각자 다른 삶을 사는 낯선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인생살이를 배우는 게 여행의 묘미이기도 하다.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9개 층으로 구성된 초대형 전용여객선 후지마루호를 돌아봤다. 선체길이 167m, 폭 24m, 무게 2만3235톤, 속도 18노트의 후지마루호는 모든 안내가 선내방송으로 이루어진다. 선내에 600명 수용의 대강당, 310석의 식당, 영화관, 라운지, 매점, 목욕탕, 수영장, 의무실, 공중전화, 각종 자판기가 갖춰져 있어 쾌적하고 편리한 여행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선내를 돌아보고 눈길 가는대로 부산앞 바다를 구경했다. 뱃전을 서성거리며 일본으로... 오후 5시가 되자 출항을 알리는 선내방송이 나온다. 예인선이 방향을 바꿔주자 덩치가 큰 후지마루호가 위용을 자랑하며 서서히 움직인다. 배로는 처음 떠나는 해외탐방이라 설레는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아내에게 출항을 알리는 전화를 했다. 뱃전에는 먹빛 바닷물을 바라보며 바닷바람을 쐬는 사람들이 많다. 멀리 바라보이던 오륙도를 스쳐지나가는 후지마루호 옆으로 갖가지 사연을 가득 담은 배들이 부지런히 오간다. 백제의 선진문화를 일본에 전하던 선각자들도 우리처럼 설렘으로 뱃전을 서성거리며 이곳을 지나갔으리라. 오후 5시 30분부터 저녁식사가 시작되었다. 식사 한 끼 먹고 나면 선상에서 제공되는 음식이 후지마루호의 자랑거리라는 말을 이해한다. 깔끔하고 정갈한 음식뿐만 아니라 우리의 입맛에 맞춘 고추, 마늘, 상추, 된장을 식사 때마다 무한정 제공한다. 일본 사람들의 철저한 서비스 정신이 돋보인다. 식사 후 대강당에서 조선일보 문화사업단 이문준 차장이 '후지마루호에 교사 289명ㆍ일반인 189명ㆍ본부직원 49명ㆍ승무원 134명이 타고 있으며, 삼성의료진에서 식사시간 전후 이동의무실을 운영하고. 일본 배인 후지마루호에 오르는 순간부터 일본의 통제를 받아야 하며, 배로 이동하는 항로와 관광버스로 이동하는 육로의 총거리가 2,000여㎞에 달한다'는 한민족사 탐방과 후지마루호에 관한 안내사항을 전달했다. 이어 단상에 올라온 일본인 의사는 신종플루가 독감보다 경미한 질병이지만 최선을 다해 예방하겠다는 말로 탐방단의 불안감을 줄여줬고, 선내 책임자는 '만나서 반갑습니다ㆍ걱정마십시오ㆍ꽈당ㆍ한국말은 여기까지' 등 우리말을 재미있게 섞어가며 탐방단원들을 즐겁게 했다. 피날레를 장식한 선상대학 '우리문화의 일본전파'는 한국 고고미술사학계의 원로인 정영호 교수님이 한민족사 탐방과 관련이 깊은 귀한 사진자료들을 구수한 입담으로 설명하는 알찬시간이었다. 이날 정 교수님은 육지, 바다, 하늘이 모두 공원지역이라 4,000톤 이상 배의 출입을 금하고 있어 한민족사 탐방 단원들이 대마도에 들를 수 없는 것을 아쉬워하며 대마도에 있는 우리 문화를 전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정 교수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요약하며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빠른 시일 내에 대마도에 들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대마도(쓰시마)는 태종대에서 48.5㎞ 거리라 지리적으로 우리에게는 가까운 곳이고 일본에게는 먼 곳이다. 우리의 문화가 일본으로 전래되는 관문이라 여러 번 정벌을 시도했다. 유배당해 죽은 면암 최익현과 한문을 일본에 처음 전래한 왕인박사의 발자취가 많이 남아있다. 조선통신사가 거쳐 가던 곳으로 1703년 배가 좌초하여 사망한 조선 역관사(통역관) 108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묘비 조선국 역관사 순난비가 있다. 우리의 불상 124점 등 우리의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고 여연(우나쓰라)은 임진왜란 때 조선의 여인들이 잡혀온 곳으로 조선의 제14대 왕 선조의 옹주묘가 있다. 농토가 없는 지역이라 김해평야 하류 사람들의 발바닥이 나온 이다스께 유적지의 볍씨가 발견되지 않는다.' 정 교수님은 부산에서 대마도까지는 대한해협, 이키섬까지는 일본해협, 큐슈까지는 현해탄이라며 국내에 경주의 성덕대왕신종과 상원사의 동종 두 개만 존재하는 신라종이 일본에 6개나 있다는 것을 얘기했다. 또 불에 탄 것을 옛날과 비슷한 수준으로 복원해 보존하고 있는 법륭사의 벽화는 시대적으로 담징이 그렸다고 볼 수 없어 무조건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관이 아니라며 백제나 신라의 문화가 대한해협을 건너와 하카다, 오사카, 교토, 나라 등지로 전파되었다는데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상대학이 11시가 넘어 끝났지만 첫 만남에 첫날밤인데 어떻게 그냥 보내겠는가? 일행들과 늦은 시간까지 술잔을 나누면서 자기 지역의 학교 실정을 얘기했다. 다른 시도에 사는 교사들이 같은 자리에서 우리나라의 교육을 생각하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하카다에 입항해 한민족사 탐방을 시작하며... "한민족사 탐방에 참여하신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9월 6일 아침 해가 밝았습니다. 지금 후지마루호가 위치한 곳은 하카다항 외항입니다. 아침 식사는 6시 30분에 A조부터 하시기 바랍니다." 하카다항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을 듣고 밖으로 나갔다. 깜빡이는 도시의 불빛이 가깝게 보인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턱을 괸 채 사색하고, 갑판 위를 뛰며 일본에서의 첫 아침을 진지하게 맞이하고 있다. 그림솜씨가 없는지라 선상에 앉아 항구의 풍경을 스케치하는 사람이 부러웠다. 아침을 먹은 후 8시부터 후지마루호에서 하선해 입국심사를 했다. 나라 사이에도 힘이 없는 국민은 괄시받는다. 여기저기 한글 안내판이 눈에 띄고 우리말로 "안녕하세요?"를 외치며 친절하게 대해 우리 국력의 힘을 실감한다. 처음만난 관광버스 기사들이 차에 오를 때까지 일사분란하게 교통안내를 하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하지만 입국심사 시 지문과 얼굴 사진을 찍어 기분이 언짢았다. 일본 열도 중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곳이 하카다만이다. 부산과는 200㎞인데 비해 도쿄와는 300㎞나 되는 거리를 보더라도 규슈(큐슈)는 우리의 문화가 일본에 전해지는 루트였다. 하카다항은 규슈(九州)에서 가장 큰 도시 후쿠오카에 있다. 탐방자료에 의하면 인구 134만여 명의 후쿠오카는 일찍부터 한반도, 중국, 동남아와 교류하던 관문으로 문화유산이 잘 보존되어 있다. 나카가와 강 동쪽의 상인 도시 하카다, 서쪽의 무사 도시 후쿠오카가 하나의 후쿠오카로 합병되었지만 아직 하카다로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기후가 따뜻해 아름다운 바다경치를 즐기기에 좋고 하카타돈타쿠 개항축제와 하카타 인형이 유명하다. 하카다항에서 한반도를 향한 전진기지 대재부(다자이후)로 향했다. 화려하게 꾸미지 않은 주택과 좁은 골목길, 55년만에 정권을 바꾼 선거벽보 등이 차창 밖으로 펼쳐진다. 대재부(大宰府)는 일본인들이 멸망한 백제를 구원하기 위한 몸부림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라 더 가깝게 느껴진다. 일본이 국가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8세기 초 이전에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아스카 도성을 떠나 규슈로 나오던 열도의 여제 사이메이 천황이 병을 얻어 아사쿠라궁에서 사망(661년)한다. 그의 아들 나카노오오에노는 하카다 연안에 전진기지를 구축한 채 두 번에 걸쳐 구원군을 파견했지만 금강하구 백촌강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규슈로 되돌아온다. 나카노오오에노는 하카다만에 있던 전진기지를 철수하고 백제유민들의 선진기술을 이용해 백제식 토성과 산성을 쌓으며 신라가 규슈까지 쳐들어올 것에 대비했다. 이때 만들어진 수성은 주위가 모두 산으로 막혀있는 지형을 이용했고, 산성인 오노성은 백촌강 전투 패전 후 열도로 건너온 백제귀족들의 지도로 665년에 축성되었다. 대재부 가기 전 오른편에 해자를 물로 채워 성을 지키던 수성의 표석이 서있다. 표석 뒤편으로 수성이 1.2㎞나 남아있지만 울창하게 산림이 우거져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9시 10분경 수성에서 가까운 대재부 터에 도착해 손승철 교수님의 문화해설을 들었다. 이번 탐방지는 모두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는 창구로 우리와 관계가 밀접했던 지역이다. 손 교수님은 일본문화의 특성을 신사문화, 고분문화, 절문화, 성문화로 구분하며 한민족사 탐방은 일본역사속의 우리 문화를 돌아보는 시공간의 역사여행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대재부는 크게 다스리는 관청으로 일본의 행정과 외교의 중심역할은 물론 외래 문물을 들여오는 창구였다. 정무를 보던 대재부 터를 한 바퀴 돌아보노라면 주변에 큼지막한 주춧돌이 규칙적으로 놓여있다. 백제식의 이 주춧돌들이 당시 건축물의 규모를 알게 한다. 대재부 터에서 바라보이는 산등성이에 오노성이 보이고 가까운 곳에 유물을 전시한 박물관이 있다. 9시 50분경 1시간 거리인 구마모토로 가는 길목의 후나야마 고분으로 향했다. 대나무와 소나무 숲 속에 있다 1873년 토지 주인이 꼭대기를 파보라는 꿈을 꾸고 발굴했다는 이 고분은 중요 유물이 100여 점이나 나온 전방후원분이다. 전방후원분은 앞부분에 제사 같은 의식이 치러졌을 네모반듯한 기단을 마련하고 뒷부분에 둥근 봉분을 축조하여 매장하는 고분이다. 일본학자들은 영산강 유역에서 발굴된 정방후원분의 문화적 수준이 낮다며 문화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전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영호 교수님은 '아무리 지역이 넓어도 통상 2년 이내에 보고서를 내는 게 학계의 관례인데 이렇게 대단한 발굴을 일본 학자들의 연구를 거치느라 오랫동안 보고서를 내지 않은 게 의심스럽다며 백제식인 석관의 맞배형 뚜껑을 비롯해 금동관, 금동신발, 철검 등 무령왕릉이나 익산고분에서 나온 유물과 닮은 것들이 많다.'는 것을 강조했다. 고분 아래에 토지 주인이 살던 큰 농가주택과 물레방아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주택에서 신당과 불당을 보고나면 일본을 왜 종교천국이라고 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된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도쿄박물관에 있고 모형전시관에는 모조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전방후원분과 가까운 곳에 동물을 닮은 비석들이 서있어 이채롭다. 11시 50분까지 후나야마 고분을 둘러보고 아소산을 관람하기 위해 떠났다. 가는 길에 제법 규모가 큰 사찰 오지원 옆 식당에서 일식도시락을 먹었다. 1엔이 모자라도 물건을 살 수 없을 만큼 에누리와 덤이 없는 사회가 일본이다. 가이드는 단무지 한 개라도 더 먹은 만큼 추가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물건 값을 깎아주기도 하고, 서너 개 쯤 덤으로 줄 수 있는 사회라야 사람냄새가 난다. 그러고 보니 일본은 자판기 천국이다. 아소산까지 도로변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이어져 눈이 즐겁다. 구불구불한 산길에 삼나무 군락지가 많아 현무암으로 이뤄진 아소산의 분화구와 주변의 초원지대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규슈의 얼굴인 아소산은 세계최대의 분화구(칼데라)를 가진 불의 나라 일본의 대표적인 활화산이다. 둘레 4km, 깊이 100m의 밑바닥에서 끊임없이 하늘로 내뿜는 분연이 끓는 물에서 나오는 하얀 수증기를 닮았다. 분연을 뿜어내는 웅대한 산을 배경으로 풀밭이 천리나 펼쳐진다는 쿠사센리(草千里)가 펼쳐진다. 소와 말의 무리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광활한 초원지대에서 대여한 말을 타고 여유를 누리는 관광객들이 많다. 제주도의 한라산을 연상시키는 이곳이 겨울에는 인공스키장으로 변신을 한다. 시간에 쫓겨 200만 년 전의 대폭발부터 수많은 폭발과 분화는 물론 아소화산의 현재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주는 화산박물관 입구에서 사진만 담은 채 발길을 돌린 게 아쉽다. 쿠사센리에서 벳부까지는 산 넘어 산이라는 표현에 어울릴 만큼 고갯길이 길게 이어진다. 같은 차를 타고 탐방을 하는 일행들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 차안에서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다. 조경이 잘된 나라답게 길가의 가로수들이 인상적이다. 오이타현의 벳부가 가까워지자 먼 산과 굴뚝에서 김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벳부는 동경 인근의 아타미와 함께 일본 최고의 온천지대이고, 서민들이 적은 돈으로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전통 온천마을 유후인과 가깝다. 온천물을 이용해 난방을 하고, 수증기 부뚜막에서 달걀을 삶고 여러 가지 음식을 요리한다. 인구 13만이 사는 곳에 대욕탕이 100개가 넘고 마을의 작은 목욕탕도 모두 온천물일 만큼 시내 곳곳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라 유황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벳부는 화약의 원료로 쓰이는 유황 때문에 왕래가 더 많았던 곳이다. 앞은 바다, 뒤는 산으로 둘러싸인 온천지대에서 매년 4월 초 온천축제가 성대하게 열린다. 일본의 생활필수품인 다다미방에서 잠을 자며 여름위주인 일본의 주택 구조와 부엌과 온돌방 등 겨울위주인 한국의 주택 구조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4박은 후지마루호 선상에서, 1박은 벳부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스기노이 호텔에서 숙박하는 것으로 탐방 일정이 짜여있다. 주위가 어둠으로 물드는 시간에 도착했지만 최고급 호텔답게 직원들이 밖에까지 나와 탐방단을 반갑게 맞이했다. 저녁식사도 숙성시킨 갈치회 등 진수성찬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여행지에서는 하나라도 더 구경하고 경험하는 게 최고다. 가이드가 외출하는 것을 꺼렸지만 식사 후 같은 방 일행들과 호텔에서 나와 해변 쪽을 향해 걸었다. 소형차에 맞게 그려진 주차선과 클랙슨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에서 일본 사람들의 검소함과 배려심이 보였다. 큰 마트에 들어가 물건 값을 알아보니 자판기보다 훨씬 저렴하다. 호텔방에서 마실 맥주를 싼값에 사니 괜히 기분이 좋다.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호텔로 향하는 일행들의 발걸음이 가볍다. 방 식구들 모두 유카타로 갈아입고 본관 6층의 대온천장 다나유로 갔다. 이천여 명이 묵는 호텔의 온천이라 사람들로 붐볐지만 온천물에 몸을 담그니 피로가 풀렸다. 몸을 씻고, 뼈를 씻고, 마음까지 씻었으니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없다. 각자 유카타 입은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기도 하고, 학교에서 아이들과 경험한 일이나 교육이 나아가야할 방향 등을 이야기하다보니 2시가 넘었다. 나이 더 먹었다고 대우받으며 다다미방에서 꿈나라로 향했다.
우사신궁에 신라범종이... 일본에서 맞이하는 9월 7일에도 태양은 밝게 떠올랐다. 호텔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오전 8시 30분경 우사신궁으로 향했다. 해지옥과 피지옥을 보러 다시 벳부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어떻든 '짧고 굵게 보는 날'이 될 것이라는 말을 기대하며 길 옆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구경했다. 나라와 민족이 다를 뿐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은 대부분 비슷하다. 다만 아무 곳에나 버리지 않는 일본인들의 습관 때문에 길거리가 깨끗한 것은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 오전 9시 20분 경 입구에 도착해 안내판을 보니 우사신궁을 '전국 하치만신의 총 본궁으로 상궁 본당은 국보, 광대한 경내는 국가사적, 이치이떡갈나무 숲은 국가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일본인의 마음의 고향'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치만은 대륙문화를 수입해 추앙받는 오우진 천황의 신령이다. 작은 다리를 지나자 '고마(코마)이누'가 맞이했다. 고마이누는 신사를 지키는 상징물로 '고구려 개(犬)'를 뜻한다. 가야 사람들이 이곳에 철을 전해줬고, 최초에 철의 신을 모셨던 곳이 우사신궁이다. 탐방에 같이 참여한 포철 직원에게 포항제철에 제련기술을 전수했던 NSC(신일본)제철소 공장이 이곳 오이타에 있다는 얘기를 들으며 역사는 돌고 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전해준 것이더라도 신기술은 다시 배워 와야 하는 게 문명의 흐름이다.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은 전문 교수님들이 역사의 현장에서 문화해설을 해줘 배울 게 많았다. 신궁에 도착하자 정용호 교수님이 신사와 천황의 관계, 신과 인간의 중간 매개체인 새가 머무르던 도리 등 일본과 우리 문화의 관계를 여러 가지 들려줬다. '우리의 홍살문을 떠오르게 하는 붉은색 도리가 화재를 방비하는 역할까지 한다. 일본의 민속 신앙체계는 신토(神道)로 고유의 다신교 종교다. 신사도 천황을 중심에 두지만 현실 생활에 도움을 주는 신을 믿는 현세구복 신앙이라 신사와 절이 같이 있는 곳이 많다. 석가탄신일과 크리스마스가 휴일이 아닌데 비해 성인식은 휴일 날 신사에서 성대하게 거행한다. 기쁘거나 슬픈 일이 생겼을 때, 계절이 바뀔 때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신사다. 신사에 오면 손과 입을 씻고, 방울 흔들고 박수 두 번 치며 신을 부르고, 돈을 넣고 두 번 절하고, 손뼉을 네 번 치고 또 두 번 절하고 소원을 빈다. 교통안전, 수험생합격, 결혼 등 신사마다 전문분야가 있을 만큼 역할이 다르다. 운세 뽑기로 길흉을 가리고 그것을 신전 앞에 묶어놓고 가면 신이 길흉을 거두어간다고 믿는다. 1월 1일부터 3일 사이에 일본인 1억 3천만 명의 3/5이 신사를 참배한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에서 나온 문서에 멀리서 들려오는 은은한 종소리가 적혀있다. 숭유억불정책을 쓰던 조선시대 유생들이 성덕대왕신종을 에밀레종,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을 스님을 높여 부르는 화상에 비유하며 불교를 깎아내리던 시절이 있었다. 범종의 '종'자는 1974년 한국범종학회에서 쇠북 종자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에 있는 우리의 종 70여개 중 20여개가 일본 보물로 지정되었다. 국내에 있는 신라의 종은 752년에 주조된 상원사 동종과 성덕대왕신종 2개인데 일본에는 무려 6개가 있다. 우사신궁에 있는 범종은 위치를 아는 4개의 신라종 중 하나다.' 설명을 들은 후 우사신궁 박물관에 진열된 유물부터 관람했다. 탐방단이 우사신궁에 들른 가장 큰 이유가 이곳에 있는 신라범종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이 범종은 신라시대 전형적인 청동주조법으로 만들어졌고 조성연대 등이 새겨진 명문이 있다. 촬영을 금했지만 우리 것을 자세히 알고 싶어 카메라에 담았다. 해지옥의 유황불이 끓는데... 오전 10시 30분, 다시 벳부로 향했다. 벳부에는 온천의 물색깔이 피같이 붉은 피지옥, 바닷물같이 푸른 해지옥 등 화산의 나라를 확인시키는 9개의 지옥관광지가 있다. 온천, 원숭이산과 함께 벳부의 명물로 통하는 지옥 중 가장 크고 볼거리가 좋다는 해지옥에 도착하자 유황냄새가 진동한다. 해지옥에 들어서니 아름다운 연못 사이로 수증기가 높이 솟아오른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98도 온천물이 투명한 옥색이라 매혹적이다. 저절로 감탄사가 나오는 풍경에 예서제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가까이에 있는 피지옥은 규모가 작은데 핏빛을 닮은 붉은 열탕에서 뜨거운 김을 내뿜는다. 수련과 가시연이 꽃을 피운 유리온실과 야자수정원도 구경거리다. 지옥이라는 이름은 지하 250~300m에서 100℃ 전후 열탕과 분탕이 분출하는 모습이 지옥을 연상시켜 붙여졌다. 지옥에서 김이 펄펄 나는 온천물로 달걀을 삶아 파는데 먹어보니 말랑말랑하다. 화산이 주는 재앙을 슬기롭게 이용해 돈을 번다. 오전 11시 20분부터 12시까지 해지옥을 관람하고 차에 오르자 "지옥구경 잘하셨습니까?"가 인사다. 막 해지옥과 피지옥을 구경하고 온 사람들끼리 건네는 말이라 재미있다. 뜬금없이 지옥순례를 마친 사람들이 '지옥의 온천물에 들어가면 얼마나 뜨거울까?'를 생각하며 죄짓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5분 거리 식당으로 이동했다. 이곳 식당도 물건을 판매하는 가게를 지나도록 되어있다. 그러고 보니 계산적으로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알 먹고 꿩 먹기를 하는 게 일본 상술이다. 점심을 먹고 오후 1시경 일본 최대 석불군을 보기위해 우스키로 향했다. 차량 안에서 가이드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면 새로운 것을 많이 알게 된다. 그런 면에서 5호차에 탑승한 탐방단원들은 앉아서 복을 받았다. 5호차를 담당한 가이드는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들을 하나라도 더 전해주기 위해 잠시도 쉬지 않았다. '일본은 위험한 화산 때문에 혜택을 누리는 것도 있다. 토양의 25%인 화산재가 빗물을 땅속으로 스며들게 하고, 지하수는 땅속에서 깨끗하게 정화된 물이라 수돗물을 식수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길옆으로 보이는 삼나무 숲들이 참 아름답다. 그런데 단단한 편백나무(히노끼)와 달리 삼나무 화분알레르기 환자가 일본인의 20%에 달하고, 투자금을 회수하기 어려워 애물단지로 방치되고 있다. 교토와 오사카는 법으로 공회전을 금할 만큼 환경오염방지와 문화재보호에 신경 쓴다.' 우스키 석불군에서 과거의 일본을 발견하며... 경주의 남산을 연상케 하는 우스키 석불군에 도착해 발굴 초기부터 이곳을 답사하며 한일마애석불을 연구하신 정영호 교수님의 문화해설을 들었다. 정 교수님은 교통 불편을 감수하며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의 흔적을 찾아다니던 시절을 회상하셨다. '석벽에 새긴 글자, 그림, 불상 등을 마애라 한다. 독자적으로 남만 문화가 개화했던 오이타에 석조미술의 보고로 일컬어지는 우스키가 있다. 우스키에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에 걸쳐 조성되었지만 언제, 누가, 어떤 목적으로 조각했는지가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마애석불들이 집단으로 모여 있다. 걸작으로 꼽히는 대일여래상을 비롯해 일본에 있는 석불의 2/3가 한곳에 모여 있는 석불 박물관이다.' 당시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게 불상의 얼굴이다. 암벽을 깎아 만든 우스키의 마애석불들은 빙긋이 웃는 우리의 마애불과 표정이 다르다. 편안해 보이지 않는 석불들이 과거의 일본이었다면 석불군 앞으로 펼쳐지는 농촌마을의 한가로운 풍경은 현재의 일본이다. 우스키의 마애석불 앞에서 서산마애삼존불 등 우리나라의 마애불이 얼마나 미술적 가치가 높은지를 떠올린다. 일본은 석산이 드물어 석불이 많지 않은 나라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석불의 조형미를 공부한 일본인들이 경주의 석굴암을 보고 놀라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일정을 끝내고 오후 2시 30분경 오자이항으로 갔다. 후지마루호를 배경으로 차량탑승 탐방단원별 기념사진 촬영을 하고 승선했다. 후지마루호는 배에 오를 때마다 출입국 심사과정을 거친다. 몸이 후지마루호에 적응을 하는지 419호의 침대에 눕자 집같이 포근하다. 오후 4시에 후지마루호가 오이자항을 출항한 후 극장에서 영화 을 감상했다. 'NO'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부정적인 남자 칼 알렌(짐 캐리)이 친구의 권유로 '인생역전 자립프로그램'에 가입해 모든 일에 'YES'라고 대답하면서 인생이 180도 뒤바뀌는 내용이다. 어린이들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극정적인 자세를 갖도록 교육하라는 가르침이었다. 짐 캐리의 "청주 날씨는 어때요"라는 우리말 대사 때문에 한바탕 웃기도 했다. 선내 식당에서는 바다풍경이 잘 보이는 자리가 명당이다. 창가에서 석양빛에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며 양식 코스요리를 맛있게 먹었다. 쉴 틈도 없이 선상대학에 참여해 손승철 교수님의 '조선통신사와 21세기의 한일관계' 강의를 들었다. '왜구는 고려 말 혼란기에 도서, 해안지방은 물론 내륙 깊숙이 침입해 약탈을 일삼았다. 고려는 사절파견과 최영, 최무선, 이성계 등 군사적 대응으로 맞섰는데 이성계는 황산대첩 승리를 기반으로 조선을 건국했다. 일본에 안정된 정권이 등장하면서 조선과 일본은 조선통신사와 일본국왕사를 파견하며 우호적인 교린관계를 유지했다. 삼포를 개항하고 상호 무역이 이뤄지던 교린관계가 1592년 풍신수길이 임진왜란을 일으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이씨단지, 김씨단두 등의 사진과 귀무덤 등이 그 당시 왜구들의 만행을 알려준다. 1604년 사명대사를 파견해 통신사를 부활하며 다시 평화의 시대를 열었으나 1872년 왜관을 점령해 침략을 시작한 후 1910년 한일합방에서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의 불행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500년 동안 끝없이 우정과 배신을 반복한 역사로 통신사는 조선시대의 한류였다. 조선통신사는 선진문화를 전하면서 일본의 국정을 알아보기 위해 험난한 여정을 거쳐야 했다. 풍랑을 만나 모두 죽는 등 일본을 다녀오는 8개월에서 2년여 기간에 죽은 사람이 많았다. 일본은 끊임없이 한류의 영향을 받았고 조선통신사가 왕래한 길을 따라 온 한민족사 탐방단원들은 21세기의 통신사다. 지금까지 적대적인 관계에 있지만 앞으로는 한국과 일본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가까운 이웃으로 발전해야 한다.' 특히 '일장기를 달고 있는 일본배가 아니라 태극기가 펄럭이는 우리 배를 타고 일본의 항구에 입항하는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이 되어야 한다'는 손 교수님의 얘기가 마음에 와 닿았다. 좁은 나라지만 사는 곳마다 얘깃거리가 다르다. 선상대학이 끝나고 419호 식구들과 일상사로 얘기꽃을 피우는데 12시 10분경 세토대교를 지나고 있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일본의 지중해로 불리는 세토내해(세토나이카이)는 조선통신사들이 오가던 교통중심지였다. 뱃전은 세토내해의 명물인 세토대교의 밤풍경을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추억남기기를 하느라 분주한 사람들 틈에서 충북교육청 김기선 장학사 일행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일정이 빠듯해 피곤한지 선실에 들어오자 하나, 둘 잠자리에 든다. 정신이 또렷했지만 일행들에게 맞춰주기 위해 하루의 일정을 대충 정리한 후 잠을 청했다.
나라의 법륭사와 동대사를 찾아... "한민족사 탐방단원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지금 후지마루호가 아카시 대교를 지나고 있습니다. 밖으로 나가셔서 아카시 대교를 구경하시기 바랍니다." 탐방단원들은 단꿈에 빠져 있었지만 후지마루호는 부지런히 이동해 목적지인 오사카항이 가까워졌다. 5시 50분경 9월 8일을 알리는 선내방송을 듣고 밖으로 나가니 고베와 아와지섬을 연결하는 총길이 3911m의 아카시 대교가 눈앞에 있다. 연륙교이자 현수교인 아카시 대교는 단일교로 세계에서 가장 길고 주탑의 높이도 해면에서 298m나 된다. 같은 자리에서 전날 저녁에는 산 너머로 사라지는 석양을, 다음날 아침에는 대교 아래 수면 위로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보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였다. 아침을 먹고 나라의 법륭사(호류지)와 동대사(도다이지), 교토의 광륭사(코류지)를 관람하는 탐방 4일째 일정이 시작되었다. 오전 8시 20분경 하선하기 위해 입구로 가자 필리핀 승무원들이 상냥하게 웃으며 우리말로 "안녕하세요. 계단 조심하세요"라고 인사한다. 교육 받은 대로 행동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라는 서기 794년 교토로 천도 할 때까지 일본 최초의 국가를 유지했던 곳이라 도시 자체가 마치 박물관을 연상케 했다. 한편으로는 삼국시대의 문화를 받아들이며 국가를 뜻하는 우리말 나라를 지명으로 사용해 정이 갔다. 법륭사 앞에 도착하자 정용호 교수님의 문화해설이 이어졌다. 정 교수님은 재미있는 강의만큼이나 코미디언 송해씨를 닮은 인상이 정겹다. 일본 사람들에게는 탐방단원 300여명이 정 교수님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있는 장면이 구경거리다. '오사카와 나라 옆에 위치한 아스카는 6∼7세기 대륙에서 여러 문물을 받아들이며 일본의 문화를 꽃피워 일본인들에게 마음의 고향인데 그 아스카의 고향이 백제다. 일본의 관서지방은 바다를 끼고 있어 우리의 문물이 지나던 통로였다. 이곳을 많은 인원이 알차게 탐방하려면 돈이 많이 들더라도 후지마루호를 대여할 수밖에 없다. 일본의 탑은 대부분 중창과정에서 모습이 많이 바뀌었고, 법륭사는 일본이 세계 최고의 건축물로 자랑하는데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을 빼닮았다. 법륭사에 국보 19점, 중요문화재 36점이 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삼국시대 문화를 종합한 건축물과 불상이 많다. 특히 2.8m가 넘는 백제관음(구다라)은 7세기 초 백제 장인의 솜씨로 살포시 머금은 미소가 백제의 마애불상을 떠올리게 한다.' '일본이 불교를 받아들이는데 큰 역할을 했던 쇼토쿠 태자가 거처였던 이카루가미야 근처에 세운 절이 670년 벼락으로 전소해 바로 옆에 새로운 절을 조성하고 금당과 오층탑을 재건한 것이 지금의 법륭사다. 쇼토쿠 태자가 세운 서원(사이인)에 금당ㆍ오층탑ㆍ백제관음이 있고, 쇼토쿠 태자를 모신 동원(도인)에 몽전이 있다. 한반도의 불교와 건축물이 일본에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일본미술의 보고라 조각, 공예 등의 예술품을 모두 만날 수 있다. 금당의 아름다운 벽화는 화재로 소실되어 사진을 보고 재현한 모사품이다. 담징이 그리지 않았더라도 여러 가지 표현 양식으로 봐 한반도인의 솜씨가 전해진 것은 분명하다. 불경공부하다 졸던 성택태자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어려움을 해결해줬다는 몽전에 1년에 두 번만 공개하는 구세관음이 모셔져 있다.' 현장학습 나온 학생들과 관광객들이 길게 줄을 이었고, 실내가 어두워 대낮에도 금당의 벽화가 잘 보이지 않았다. 일본 관광객이 비추는 소형랜턴의 불빛이 벽화를 살아나게 했다. 보물전에서 우아한 모습과 인자한 미소로 사랑받는 백제관음을 만났다. 예술성이 뛰어났던 우리 조상들이었기에 인체를 저토록 신비롭고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감동적인 장면을 놓칠 수 없어 온화한 모습을 재빨리 카메라에 담았다. 수막새와 암막새, 짚을 썰어 흙과 반죽한 토담 등 법륭사에 우리 문화를 닮은 것들이 많았다. 우리의 기술자들이 건축하며 삼국의 문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법륭사에서 우리 조상들의 찬란했던 문화에 대해 자부심을 키우고 동대사로 향했다. 오전 11시 50분경 동대사 부근의 초등학교를 지나는데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집단으로 체육활동을 하고 있다. 이렇게 더운 날 땡볕에서 체육수업을 하면 우리나라의 아이들과 학부모님들이 어떻게 반응할까를 생각해보니 씁쓸했다. 오전 11시 55분경 동대사에 도착하자 입구에서 사슴들이 반겼다.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귀를 쫑긋 세운 채 겁을 먹는 일반 사슴과 달리 동대사를 둘러싸고 있는 나라공원의 순한 사슴들은 먹이를 든 관광객을 졸졸 따라다니며 얼굴을 비벼댔다. 사찰을 느릿느릿 오가며 모델 역할을 하던 사슴들이 서서 변을 보는 것도 이곳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동대사는 글자 그대로 나라시대 동쪽에 지은 큰절이다. 에도시대 때 복원된 동대사의 대불전(금당)은 동서 57m, 남북 50m, 높이 49m의 단일 규모로는 세계 최대인 목조건축물로 무게 425t, 높이 16m의 세계 최대 청동대불이 그 안에 있다. 동대사는 민심을 수습하고 왕실의 존엄을 높이는 한편 적대관계인 신라에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741년 쇼무천황이 칙령을 내려 조성했다. 대불의 완성은 신흥 일본국의 탄생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지 200년이 되는 752년 불상에 눈을 그려 넣어 혼을 집어넣는 개안공양(開眼供養) 의식이 열렸는데 신라에서도 700명에 달하는 대규모 사찰단을 파견했다.' '동대사와 대불주조를 책임졌던 양변스님이 백제계 씨족의 후손이었고, 일본 조정에서 감사의 뜻으로 지어줘 우리 조상을 모셨던 신사가 사찰 옆에 있는 가라쿠니신사(辛國神社)로 알려져 있다. 절 입구에 있는 고마이누(고구려 개)가 우리 선조들이 만들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어 동대사는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우리와 일본,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역사적 유산이다.' 세계 각국에서 대불을 구경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일본 최고의 관광지답게 향불이나 촛불을 피우고 돈을 넣은 후 합장한 채 소원을 빌고, 대불전 기둥의 구멍을 빠져 나오며 즐거워하고, 불상에서 신체의 아픈 부분을 찾아 만지며 병을 낳게 해달라고 비는 사람들로 붐볐다. 1988년 11월에도 이곳 동대사에서 현장학습 나온 아이들을 만났었다. 21년이 지났건만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 아이들의 생활태도는 변한 게 없다. 서서 듣건, 앉아서 듣건 관광지에서 만나는 아이들마다 반듯하게 줄을 맞춘 채 바른 자세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다. 학교 현장에서 보면 21년 동안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변했다. 개인의 권리를 앞세우며 자유스럽게 크고 있는 우리 어린이들의 현장학습지 풍경과 비교하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작고 하찮은 일이라고 무시하겠지만 이런 것들을 고치지 않고는 일본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도 했다. 문화재를 크기로 동양 최대,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세상이다. 힘이 있는 나라의 문화재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 유산에 더 많이 등록된 것도 현실이다. 사실 크다고, 힘 있는 나라의 문화재라고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세계 최대 목조건축물과 세계 최대 청동대불을 자랑하는 동대사에서 엉뚱하게 작고 적어서 소중한 것과 하찮게 여기면 안 되는 것들을 생각해봤다. 동대사 관람을 마친 후 오후 1시가 넘어 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우리가 먹은 도시락을 일본인 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분리수거하는 모습을 눈여겨봤다. 교토와 광륭사에 관한 영상물을 시청하며 일본의 국보1호가 있는 광륭사로 향했다. 교토의 광륭사에서 만난 일본 국보1호... 차에서 내려 정영호 교수님의 이번 탐방 마지막 문화해설을 들었다. 정 교수님은 일본 국보1호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손가락을 일본 대학생이 부러트려 보수한 이야기부터 불상을 만든 적송이 일본에서 나지 않는 것으로 봐 한국의 적송을 가져가 만들었거나 한국에서 만든 것이 일본으로 건너갔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광륭사가 위치한 교토는 나라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역사도시로 794년부터 1869년 메이지 천황이 수도를 도쿄(동경)로 옮길 때까지 1100여 년 동안 수도였던 곳이라 아직도 수도라는 의식이 강하다. 일본천황과 황실이 있던 곳이라 절과 신사 등 일본적인 것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 독특한 건축미를 찾아볼 수 있다. 일본 국보1호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우리의 국보83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닮아 친근감이 느껴진다. 일본서기에는 양잠, 농업 등 선진문명을 전한 신라 도래인 진하승(하타노 카와카쓰)이 광륭사의 전신인 호코지를 창건해 쇼토쿠 태자의 고귀한 불상을 모신 것으로, 광륭사에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한반도로부터 도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설명을 듣고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는 영보전으로 갔다. 관람객이 많기도 했지만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앞에 선 사람들이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 만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보는 사람들을 매료시킬 만큼 예술성이 뛰어났다. 오랜 세월 잘못된 역사를 속으로 삭였을 텐데 반가부좌 자세로 눈을 감고 사색에 빠진 모습이 편안해 보였다. 광륭사에 여러 번 불이 났다는데 영보전에는 국보급 유물들이 즐비하게 보존되어 있다.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예술성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왜 '지구상의 모든 시간적 속박을 초월해 도달할 수 있는 인간 존재의 가장 간결하고 원만하며 영원한 모습의 상징'이라고 했는지, 일본인들이 다른 불상들은 백제불과 신라불이라고 명시하면서 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출처'는 숨기고 있는지를 이해했다. 하지만 영원한 비밀이 어디 있을까? 언젠가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출처가 밝혀질 날이 있을 것이다. 일본은 세계적으로 평균수명이 높은 나라다.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인지 가는 곳마다 관광지의 안내인들이 모두 노인이었다. 그렇다고 대충 시간만 때우거나 자리만 지키고 봉급 받을 사람들이 아니다. 눈을 부릅뜬 노인들이 지키고 있어 국보1호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촬영할 수 없다. 어떤 일이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 일에서 보람을 찾는 것은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 광륭사에서 나와 차에 오르니 오후 3시 25분이다. 오후 5시 20분경 배에 도착할 때까지 스쳐 지나가는 길거리 풍경을 구경했다. 펜스를 흰색으로 칠한 자전거 주차장이 멋졌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차와 달리 차창 밖 풍경은 한가로웠다. 그 모습을 담느라 여러 번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하나라도 많이 보고 많이 경험하기 위해... 여행지에서는 하나라도 많이 보고 많이 경험할 필요가 있다. 자판기 천국인 일본에서 마트 등의 가게를 이용하면 물건 값이 저렴했다. 차가 부둣가에 도착하자 승선하지 않고 맥주와 안주를 사러 큰길가로 나갔다. 술만 파는 가게에서 맥주를 사고 유리컵을 빌리려 하자 바에 앉아 안주를 사먹으라며 거절했다. 급한 상황인지 대형차 한 대가 쏜살같이 달려갔다. 큰길에서 한참을 걸었지만 크락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작고 수수한 가게였지만 '도라지 한국식당'을 만나니 반가웠다. 오늘따라 식사가 늦어져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났다. 일행들과 맥주 한 잔으로 허기를 달래다 저녁을 뷔페로 먹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여행해야 남는 것, 배우는 것, 느끼는 것이 많다고 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식사 후 자유를 누리기 위해 일행들과 하선했다. 후지마루호가 정박하고 있는 부둣가 가까이에 젊은이들로 붐비는 놀이공원이 있다. 대형 우주관람차를 타고 20여분 동안 오사카 시내의 야경을 감상했다. 관람차가 캄캄한 밤하늘을 향해 높이 올라가자 우리가 묵는 후지마루호와 오사카항, 불빛이 화려한 시내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야경을 배경으로 개인별 기념사진도 남겼다. 놀이기구를 내려와 출구로 나가니 영업마감시간이다. 부지런히 돌아보고 들어왔지만 오후 9시부터 시작된 선상대학에 20분 늦게 참석했다. 공주대 서정석 교수님의 '한국과 일본의 전방후원분'에 대한 강의가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전방후원분은 둘째 날 정영호 교수님의 설명이 있었고, 후나야마 고분을 직접 탐방했던 터라 이해가 쉬웠다. 역사나 여행은 아는 만큼만 보인다고 한다. 이번 탐방에서 전방후원분을 자세히 배운 것도 큰 소득이다. 선실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일행들이 한자리에 앉았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마시면 술술 잘 넘어가는 게 술이다. 낮에 맥주 사러 밖에 나갔다 왔으니 술 떨어질 걱정도 없다. 많이 보고 배운 만큼 많이 마시고 잠에 들었다.
오사카 성에는 아직도 풍신수길의 야욕이... "안내말씀 드리겠습니다. 탐방대원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지금 시간은 오전 6시입니다. 밖의 날씨는 무척 맑습니다. 오늘은 6시 30분에 14호차부터 식사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아침잠을 깨우는 선내방송마저 정겹게 들렸다. 선상에서 자고, 씻고, 먹는 일이 일상처럼 느껴지는데 탐방은 마무리로 접어들었다. 오늘은 탐방 닷새째인 9월 9일이다. 오전 9시 10분경 임진왜란을 일으켜 한일관계를 적대국으로 만든 도요토미가 자신의 거처로 만든 오사카성으로 향했다. 인구 260만의 오사카는 한반도의 대륙문화가 들어온 관문이자 일본 제1의 상업도시다. 일찍부터 수로와 운하가 발달한 이곳에 오사카성이 있다. 오사카성의 박물관 앞에서 손승철 교수님의 문화해설이 있었다. 이날 손 교수님은 여러 가지를 얘기 하셨는데 2천년 전의 일본과 그 당시 일본 문화의 뿌리였던 한국의 모습, 2009년의 일본과 한국의 모습을 비교하고 일본이 우리보다 국민소득이 월등히 높은 이유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을 특히 강조하셨다. '사무라이는 귀인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자, 섬기는 자를 뜻한다. 무사들은 중앙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보호한 대가로 교토, 오사카 등 노른자위 땅을 하사받으며 중앙으로 진출했다. 천황은 상징적인 자리이고 무사정권이 실세가 되는 막부시대가 열리는 시초다.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후반까지 100여 년 동안의 전국시대에 도요토미 등의 무사가 등장했고 이들은 자신의 본거지에 성을 쌓았다.' '오사카성은 1583년부터 절터에 성을 쌓기 시작해 1년 6개월만에 본채만 완공한 채 15년 동안 건축했다. 천수각의 5층 누각 전체를 금과 은으로 도금해 화려했지만 침략의 야욕을 키우던 도요토미가 죽은 뒤 폐허로 변했다. 3대 쇼군시절 각 지역 영주들에게 공사를 할당해 복원한 후에도 세 번의 벼락이 천수각을 불태웠다. 영주들의 충성심 경쟁으로 각 지역에서 크고 잘생긴 돌만 옮겨와 성을 복원했지만 1931년 완공한 지금의 천수각은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원형이 많이 훼손돼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실패했다.' '일본의 성들은 외성과 내성 사이에 물이 채워진 해자가 있고, 성문이 뚫려도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3번 꺾어서 들어오는 구조다. 한국의 성은 산에 쌓은 산성과 도시에 쌓은 읍성인데 일본의 성은 평지에 쌓은 평성이다. 군인들만 사는 평성과 달리 군인과 백성들이 같이 살던 읍성이나 산성은 전쟁이 나면 인명피해가 컸다. 임진왜란 때 진주읍성에서만 7만 명이 죽는 등 200여만 명이 희생당했다.' 일본의 3대 장군은 무력으로 전국을 통일했으나 부하의 배신으로 자결한 오다노부나가(직전신장),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켜 국력만 소모하고 질병으로 사망한 도요토미히데요시(풍신수길), 대망의 천하를 통일하고 에도막부시대를 탄생시킨 도쿠가와이에야스(덕천가강)다. 울지 않는 두견새를 두고 세 장군이 했다는 말이 재미있다. '오다노부나가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죽여 버려라.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게 하라. 도쿠가와이에야스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 때까지 기다려라.' 결국 평화주의자인 도쿠가와이에야스가 최후의 승자가 된 것에 인생살이의 의미가 있다. 적장이지만 도쿠가와의 삶이 너그럽고 여유로웠기에 수도를 에도(도쿄)로 옮기고 일본의 근세 봉건제사회를 확립했다. 도요토미가 살아보지도 못했다는 천수각은 웅장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 전망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볼 수 있다. 내부는 겉모습과 달리 도요토미 개인의 역사박물관 위주로 꾸며져 있다. 왜군들이 입던 전투복 등 옛 전시물에 풍신수길의 야욕이 남아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오사카성 공원을 나와 오전 10시 40분경 차가 신사이바시로 향했다. 입구에 도착해 오전 11시 30분부터 신사이밧과 면세점을 돌아봤다. 신사이바시는 오사카 최대의 쇼핑가로 각종 백화점과 아케이드 거리가 연결되어 있었다. 아케이드 거리를 걷는데 '창업 명치 2년'이 써 있는 상호가 보인다. 140년 동안 대대로 가업을 이어온 가게주인의 생활자세가 부럽다. 충동구매를 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이것저것 구경하다보니 아이들에게 줄 모자 두 개와 아내에게 줄 소형 라디오를 샀다. 오후 1시 10분경 후지마루호가 정박하고 있는 부둣가로 돌아왔다. 버스에서 내리는데 단체복과 단체모를 쓴 유치원생들이 보인다. 놀이공원에 현장학습 나온 꼬마들이다.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아이들이 노는 모습은 모두 귀엽다. 배에 오르기 전 일행들과 어제 들렸던 마트로 향했다. 맥주, 안주 등 저녁 간식거리를 사고 부둣가로 가는 길에 일본에서 제일 낮다는 천보산을 구경했다. 서너 걸음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는 4.5m의 낮은 산이지만 주변에서 천보산(天保山) 지명을 많이 볼 수 있어 도시가 들어서기 전에는 산이었음을 증명한다. 후지마루호의 승무원들은 마지막까지 신종인플루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했다. 배에 오를 때는 공항과 같이 검색대를 통과했는데 오늘은 여권을 들고 입국심사대까지 거쳐야 했다. 한 번에 300명이 식사할 수 있는 식당이지만 600여 명의 탐방단을 2조로 나누다보니 오후 2시가 넘어 식당으로 갔다. 그래도 탐방단원들은 하나같이 고추, 마늘, 상추, 된장, 김치, 깍두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후지마루호의 식단을 칭찬한다. 늦은 식사 탓인지 여정을 뒤돌아보는데 갑자기 졸음이 쏟아진다. '눈꺼풀 이기는 장사 없다'고 선미의 침상에 누워 잠깐 눈을 붙였다. 단잠을 자는데 '잠시 후 부두에서 환송식이 열린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통로를 가득 메운 탐방객들에게 오색테이프를 나누어줬다. 부둣가에는 멋진 제복을 입은 브라스밴드가 등장하고 14대의 관광버스 기사들이 일렬로 줄을 맞춘 채 서 있었다. 올드랭사인에 감사의 눈물이... 오후 3시 50분경 식이 시작되고 버스기사들이 '다시 만납시다. 감사합니다'가 써 있는 종이를 펼쳐들었다. 일본의 관광버스 기사와 인근 건물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손을 흔들자 탐방단원들이 일제히 오색테이프를 던졌다. 장관을 이룬 테이프 사이로 기사들이 머리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보이고 밴드들이 춤을 추며 '올드랭사인'을 들려줄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왔다. 감격의 눈물이 아니라 현재 내가 누군가에게 진심에서 우러나는 환송을 받는 영광의 자리에 있다는 감사의 눈물이었다.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야 작별이란 웬 말인가 가야만 하는가 어디 간들 잊으리오 두터운 우리 정 다시 만날 그날 위해 노래를 부르네/ 잘 가시오 잘 있으오 축배를 든 손에 석별의 정 잊지 못해 눈물만 흘리네 이 자리를 이 마음을 길이 간직하고 다시 만날 그날 위해 노래를 부르자' 배가 부둣가에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탐방단원들도 열심히 손을 흔들었지만 일렬로 늘어선 기사들이 부산을 향해 뱃머리를 돌린 후지마루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드는 모습도 이색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일본의 관광버스 기사들은 손님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손님 모두에게 계단조심을 안내하고 미리 손님을 하차시킨 기사들은 하나같이 다른 차에서 내리는 손님들의 안전을 위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일본이나 우리나 서로 적대시 할 게 아니라 조선통신사가 드나들던 예전과 같이 선린우호를 다지며 친근한 이웃으로 지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오후 4시 20분경 후지마루호가 정박했던 부둣가 주변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스쳐 지나가는 바다풍경을 바라보다 선실에 들어와 맥주 한잔 먹고 있는데 현수교 중 세계에서 가장 긴 세토대교가 가깝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가듯 또 밖으로 나가 셔터를 눌러댔다. 본인이 즐겨 하는 일이지만 사진 찍는 것 좋아하는 사람들은 신세가 고되다. 오후 5시 40분경 후지마루호가 세토대교를 지나고도 한참을 뱃전에 있다 들어오니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오후부터는 배 안에서만 지내는데다 점심 먹은 것을 소화시킬 시간도 없다. 시같이 아름다운 인생을 계획하며... 마음이 즐거우면 몸의 피로가 풀린다. 오후 8시부터 시작된 선상대학은 그걸 증명해줬다. 정호승 시인은 노래로 만들어진 본인의 시를 들려주며 일상생활이 시의 둥지이고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맨 앞자리에 앉아 정호승 시인의 감성과 하나 되는 시간이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목표가 있다. 이것저것, 여기저기 글을 쓰면서 무작정 흘러가는 시간을 아까워했다. 언제인 줄 모르지만 아이들에 관한 사랑이 예전만 못하면 내 글을 쓰는 인생을 설계하고 있다. 이런 사람에게 정호승 시인은 생활에 활력소가 되는 비타민이었다.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 종일/ 찬란하게 비춰주셔서 감사합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이날 정호승 시인이 육성으로 들려준 '햇살에게'와 '수선화'는 인생살이를 뒤돌아보게 했다. 시를 마음 속으로 되뇌며 감사함에 인색했던 그동안의 삶을 반성했다. 한편으로는 스스로 행복을 키우며 즐거워하는 인생살이를 계획했다. 가수 윤짱이 선상대학의 마지막 무대를 장식했다. 윤짱은 날씬한 몸매만큼이나 관객들을 사로잡는 가창력을 지녔다. 탐방단원 모두가 같이 박수치고 엉덩이를 흔들며 하나가 되었다. 밤 11시가 다 되어 선상대학이 끝났다. 선실에서 맥주를 마시다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는 7층의 선미로 갔다. 한민족사 탐방의 마지막 밤을 아쉬워하는 팀들이 여럿이었다. 우리도 부산 팀들 옆에 앉아 주거니 받거니 정을 주고 받았다. 자판기의 맥주가 품절이다. 하지만 419호에는 영웅호걸 선생님이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영웅답게 다른 일행의 여직원이 선물로 구입한 양주를 구해왔다. 양주를 깨끗이 비우고 잠자리에 들었다. 9월 10일, 탐방 마지막 날이다. 다른 날보다 늦게 일어나 뱃전으로 나갔다. 탐방 없이 배에서만 생활하는 날이라 모든 게 여유롭다. 뱃전을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느리다. 구쥬와 혼슈를 잇는 다리가 나타나자 연세가 드신 어른들은 시모노세키(下關)와 부산(釜山)을 오가던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얘기부터 했다. 식민지시대 우리 민족의 한과 눈물이 고여 있는 곳이니 그럴 만도 하다. "엄마, 춥지 않으세요?" "응, 괜찮다." 뱃전에서 모녀가 나누는 대화가 하도 정겨워 2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했다. 긴 바다여행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오전 9시부터 3회 연속 영화상영이 이어졌다. 그중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며 가슴을 울리는 실화영화 과 전직 특수 요원 출신의 아버지가 파리 여행 중 납치당한 딸을 구하기 위해 리얼하게 추격전을 펼치는 을 감상했다. 탐방단원들의 숙박을 편안하게 해줬던 후지마루호에서 하선할 시간이 가까워진다. 사물함을 열고 부피가 줄어든 짐을 정리했다. 선상에서의 마지막 점심을 먹고 오후 2시 30분부터는 한 곳에 모여 커피타임을 가졌다. 윤짱의 노래를 조용히 듣고 있던 오후 3시 20분경 해운대가 보인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밖으로 나가니 멀리 해운대의 아파트들이 눈에 들어왔다. 배가 우리나라 해역을 달린 지 한참 되었건만 부산이 보이자 모두들 설레는 표정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떠날 때 눈도장을 찍었던 오륙도가 그 자리에서 반겼다. 5박 6일 동안 같이 생활한 서 선생님 3분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오후 4시 20분경 하선을 하고 입국수속을 밟았다. 충북 교육청에서 제공한 버스를 타고 다시 청주로 달렸다.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곳이 자기 집이다. 몸이 피곤했지만 집식구들을 만날 생각에 눈이 말똥말똥했다. 차 안에서 조선왕조 5백년사를 읽다보니 청주에 도착했다. 탐방을 마무리하며... 우리 반 아이들이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이 재미 있었느냐고 물어왔다. 물론 바쁜 일정이었지만 재미있었다. 하지만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어 우리 문화를 찾아보는 역사탐방이 즐거울 수만은 없었다. 과거의 어두웠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라나는 아이들이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한일 양국의 인적교류가 계속 늘어나는데 '가깝고도 먼' 관계로만 지낼 수도 없다. 점점 멀어지며 희미하게 사라졌던 부산앞바다가 크게 다가왔듯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사이의 관계도 가까워지면 크게 보이고 멀어지면 작게 보이는 사물의 이치와 다를 게 없다. 한국과 일본은 선의의 경쟁을 하되 이웃사촌으로 가깝게 지내야 한다. 예전처럼 선린우호 관계를 이어가야 양국의 미래가 밝다. 양국의 젊은이들이 손을 마주잡고 미래를 향해 도약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다.
지난번에 리포터는 공부 잘하는 비결로 헤르만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 이론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한교닷컴 9월 27일자 '진짜 공부 잘하는 비결' 참고)그 이론에 의하면 공부 잘하는 최고의 비결은 기억력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기억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방법에는 또 어떤 학습법이 있는지 살펴보자.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사진을 찍듯이 찰카닥 해서 머릿속에 집어넣었다가 꺼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총 동원해서 이를 조직화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따라서 기억을 잘하기 위해선 항목별로 조직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심리학자들의 실험에 의하면 100개의 카드를 무작위로 기억하게 했을 경우 평균 기억량이 23.92개인 반면 이를 항목별로 분류화해서 기억시켰을 경우 40.62개로 크게 늘었다고 한다. 세계적인 인지 심리학자이자 하버드대 교수인 대니엘 샥터는 "분류화한 사람은 여러 개를 몇 개의 의미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조직화하기 때문에 기억해야 될 덩어리 수가 줄어든다. 때문에 조직화를 하지 않고 무작정 외우는 사람보다 훨씬 빠르게 또 많이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만 봐도 조직화와 기억력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어서 대니엘 샥터 교수는 분류화를 보다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선 좋은 이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선의 기억은 완벽한 이해로부터 오기 때문에 학습자는 어떤 한 가지가 이해될 때까지 끈질기게 파고드는 근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공부에도 냉엄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적용된다고 한다. 즉, 지식이 부족한 사람은 정보처리를 제대로 못해서 이해를 못하게 되고 이해를 못하니까 기억을 못하고 기억을 잘 못하니까 지식이 줄어들고 지식이 줄어드니까 그 다음 정보를 또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반면에 지식이 많은 사람은 그때그때 주어지는 정보들을 많은 지식을 동원해서 잘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조직화하니까 지식이 자꾸만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학생들이 성적을 올릴 수 있는공부의 왕도는 없는 것일까? 심리학자들은 획기적인 공부방법으로 연기식 공부법, 강의식 공부법, 첫 글자 암기법, 스티커 공부법 등을 예로 들었다. 연기식 공부법은 마치 배우가 연기하듯이 공부 내용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자신만의 이미지와 연결시키는 방법인데, 이렇게 하면 기억이 잘 나지 않을 때 자기가 상상했던 어느 한 장면을 떠올리면 기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고 한다. 강의식 공부법은 학습자가 전신거울을 보며 직접 강의하는 식으로 학습내용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의 장점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고 자신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으며 칠판에 쓰면서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암기가 된다고 한다. 이렇게 자신의 학습방법을 스스로 모니터링 하는 과정인 메타인지형성은 과학이 설명하는 최고의 학습방법이기도 하다. 첫 글자 암기법은 흔히 복잡한 내용을 암기할 때 쓰는 방법으로 예를 들면 '세계에서 제일 긴 10대 강은?' 이라는 문제를 외울 때 각각의 강 이름의 첫 글자만 따서 암기하는 방법으로 정답은 '나미아양 오라, 황콩 아래로!'로 나일강, 미시시피강, 아마존강, 양쯔강, 오브강, 라플라타강, 황하강, 콩고강, 아무르강, 레타강이다. 이처럼 단어의 첫 글자만 따서 외우면 쉽게 외워지고 재생도 쉽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스티커 학습법을 알아보자. 공부하다가 중요한 내용을 발견하면 이를 메모지에 적어 공부방 여기저기에 붙여놓는 식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자주 보게 되고 저절로 반복학습이 되는 셈이다. 이밖에도 긍정적인 생각과 자신감도 학습에 크게 영향을 끼치며 싫은 과목은 제일 나중에 하는 방법도 좋다고 한다. 우선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과목부터 공부하다가 싫증이 나면 다시 다른 과목으로 바꾸면서 동시에 여러 과목을 하는 것도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는 '공부법'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공부 방법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지는 리포터도 장담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학습자들의 성격과 성향 개인차 등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습자가 이 중에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학습방법이 무엇인지 찾아내어 그것을 체득화 시켜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공부 잘하는 왕도인 셈이다.
‘오랜만’과 ‘오랫동안’도 자주 혼동한다. 특히 ‘오랜만’을 ‘오랫만’이라고 엉뚱하게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두 단어를 살펴보면, ‘오랜만’은 오래간만’의 준말이다. - 야, 정말 오랜만이다. 이게 얼마만이냐. - 타향에서 오랜만에 고향 사람을 만나면 반갑다. ‘오랫동안’ 시간상으로 썩 긴 기간 동안. - 지금은 오랫동안 인기를 끄는 가수가 드물다. -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는 기계가 필요하다. ‘오랜만’의 본말인 ‘오래간만’은 ‘어떤 일이 있은 때로부터 긴 시간이 지난 뒤.’를 뜻하는 말이다. ‘오래간만에 찾은 고향은 옛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오래간만에 내린 비로 가뭄이 해갈되었다.’라고 쓴다. 이는 ‘오래’라는 부사에 ‘간(間)’, 그리고 동안이 얼마간 계속되었음을 나타내는 의존명사 ‘만’이 합성된 단어다. 반면 ‘오랫동안’은 ‘오래’와 ‘동안’이 결합된 합성어다. 이는 순 우리말로 된 합성어로 앞말이 모음으로 끝난 경우(오래), 뒷말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날 때([똥안])사이시옷을 받치어 적는다는 조건에 들어맞아 ‘오랫동안’과 같이 사이시옷을 쓰는 것이다. ‘오랜만’과 ‘오랫동안’은 형태소를 세밀하게 분석하면 이해가 빠르다. 또 ‘오랜만’은 긴 시간이 지나간 뒤를 언급한 것이고, ‘오랫동안’은 시간의 진행 상황을 표현한 말이라는 의미를 새겨도 쉽게 구분이 된다. 참고로 ‘동안’이라는 단어도 살펴보자. ‘동안’ 어느 한때에서 다른 한때까지 시간의 길이.- 3시간 동안/사흘 동안 - 며칠 동안을 두고 생각했다. - 내가 없는 동안 집을 잘 보아야 한다. ‘동안’은 시간의 길이를 나타내는 명사로, ‘3년 동안의 군대생활/평생 동안 외길을 걸어온 장인(匠人)/한참 동안/내가 집에 없는 동안’이라고 쓴다. ‘동안’이 쓰일 때는 앞에 시간의 양이 언급되거나 그와 유사한 상황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동안’이라는 명사 앞에 같은 의미를 지닌 ‘기간(其間)’을 중복해서 쓰는 습관이 있다. ○ 신종플루, 추석 연휴 비상, 연휴 기간 동안 거점 병원 운영. ○ 올림픽 기간 동안 중국 문화를 널리 알리기 위한 각종 전시회가 개최됩니다. ○ 유급 휴가를 갔을 경우에는 휴가 기간 동안이라도 임금을 정상적으로 지급하여야 합니다. ‘기간’은 ‘어느 일정한 시기에서 다른 일정한 시기까지의 사이’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이는 ‘동안’과 뜻이 비슷하다. 그렇다면 위 문장은 모두 의미가 중복되었다. 위 예문은 모두 ‘기간’이나 ‘동안’을 하나만 써도 뜻이 통한다. 문장에서 같은 단어, 구절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한 표현이 아니다. 어미, 조사도 마찬가지다. 반복을 피할 수 없거나 뜻을 강조하여 쓰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동일한 어구나 문법적인 요소를 되풀이하여 쓰면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다. 다음 예문 ‘기(期)’와 ‘때’의 중복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 광복 직후엔 디자인 제작과 인쇄기의 미비로 일제강점기 때의 것에 약간 수정을 가해 사용했다. ○ 성수기 때 울릉도 여행하시는 분들 아래사항 꼭 참조 하세요. ○ 환절기 때 일교차가 크다보니 감기에 걸리는 분들도 많으시죠? 예문의 ‘강점기(강제로 점령한 시기)’, ‘성수기(상품이나 서비스의 수요가 많은 시기. ‘한창 쓰이는 철’, ‘한철’로 순화.)’, ‘환절기(철이 바뀌는 시기)’는 ‘-기’에 ‘때’라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뒤에 ‘때’는 군더더기다.
부모님이 돌아가고 계시지 않으니 추석이 쓸쓸하기만 하다. 우리 부모님의 자식들 모임도 추석 몇 주 전에 미리 갖다보니 추석이라고 특별히 모일 일이 없는 것이다. 또 고향이 수원이다보니 귀성, 귀경 이야기는 내 일이 아니다. 추석 때 그래도 송편맛은 보아야 한다고 아내가 송편을 사왔다. 솔잎이 묻어있어 마치 집에서 만든 것 같은데 우리집 네 식구가 몇 개씩 맛을 볼 정도의 분량이다. 5,000원 어치면 충분하다. 문득 초등학교 때 어머니가 해 주시던 송편이 생각난다. 벌써 40여 년전 일이다. 추석 때면 온 식구가 모여 앉아 송편을 빚는다. 어머니, 형, 누나가 가르쳐 주는대로 빚지만 그 모양이 어설프기만 하다. 내가 만든 어설픈 송편은 누가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우선 송편 크기가 크다. 껍질이 일정하지 않다. 속이 삐져나온다. 모양이 예쁘지 않다. 입술이 벌어진다. 울퉁불퉁하다. 마치 송편 반죽으로 장난을 논 것 같다. 우리집에서는 송편 속으로 밤, 깨, 콩 등을 넣었는데 송편을 찌고 나서 가장 맛있는 깨송편을 골라먹는 것이 재미있었다. 깨의 단맛 때문이었다. 밤이나 콩이 든 송편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추석 송편 만들 때 가장 싫은 일은 콩 까는 일과 솔잎 뜯어오는 일. 콩가지의 콩꼬투리에서 콩을 까는 일은 그래도 여러 명이 달라붙어 하기 때문에 좀 힘이 들어도 참아내면 금방 끝난다. 협동하여 일을 해내니 그런대로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솔잎을 준비하는 것은 혼자서 해야 한다. 지금은 시장이나 마트에서 솔잎을 살 수 있지만 그 당시는 산에 가서 채취를 해야 했다. 인근 팔달산에 가야 하는데 나라산을 지키는 사람에게 걸리면 붙잡힌다고 하여 마치 도둑놈의 심정으로 그 일을 수행해야만 했다. 빨리 따고 가야 들키지 않기에 손에 잡히는대로 솔잎을 뽑는다. 자연히 딴 솔잎이 고르지 않고 거친 것을 따가면 어머니께 야단을 맞는다. 연하디 연한 어린 솔잎을 따와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해에는 잘못 솔잎을 따와서 어머니가 다시 채취한 적도 있다. 그나저나 내가 딴 솔잎이 송편의 솔 향내를 풍기게 해주어 송편의 맛을 좋게 한다고 생각하면 하기 싫어도 그 일은 숙명처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막내 아들로, 가족의 일원으로서 솔잎 따는 것이 내 일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어른이 되어 교직생활을 30년 넘게 하고 있지만 요즘엔 학교에서 송편 먹을 일이 흔치 않다. 집집마다 송편을 집에서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방앗간도 구경하기 힘들다. 고작 맛본다는 것이 추석을 전후해 학교 식당에서 나오는 송편 한 두 개가 전부다. 요즘 아이들, 송편의 재료가 무엇인지 알고나 있을까? 송편 만드는 방법을 어깨 너머로라도 배울 기회조차 없다. 편한 것만 추구하다보니,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생각에 문화의 단절이 일어날까 걱정이 된다. 아, 그 옛날이 그립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시국선언에 참여한 교사 74명이 각 시도 교육청 징계위원회에 회부돼 중징계 처분을 받게 됐다. 4일 교육과학기술부에 따르면 전국 16개 시도 교육청을 통해 시국선언 참여 교사 징계 현황을 취합한 결과, 경기도교육청을 제외한 15개 교육청이 소속 교사에 대한 징계위 회부를 마쳤고, 회부 인원은 총 74명인 것으로 파악됐다. 74명은 모두 전교조 본부 및 각 지부의 전임자들이다. 앞서 교과부는 지난 7월 시국선언 주동자에 대한 파면, 해임, 정직 등 중징계 방침을 밝히고 각 시도 교육청으로 하여금 9월30일까지 해당 교사들에 대한 징계를 완료하라고 요청한 바 있다. 징계위는 시도 교육청별로 구성하고 위원장은 부교육감이 맡게 되며, 앞으로 징계위별로 해당 교사들을 소환, 사실 관계를 조사한 뒤 구체적인 징계 수위를 결정하게 된다. 징계위 회부 인원을 시도별로 보면 서울이 18명으로 가장 많고 충남이 6명, 전남과 경북, 울산이 각 5명, 나머지 시도는 4명 이하였다. 경기도교육청의 경우 징계 대상자는 총 15명이지만 아직까지 이들을 징계위에 회부할지 여부를 결정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기도교육청은 진보 성향의 김상곤 교육감이 시국선언 교사 처리 문제에 대해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교과부와 마찰을 빚어왔다. 경기도교육청 소속의 징계 대상자 15명 가운데에는 정진후 전교조 위원장도 포함돼 있다. 교과부는 당초 시국선언을 주도한 전교조 전임자들 외에 일반 참여 교사들도 주의, 경고 등의 행정처분을 하겠다고 밝혔지만 이들에 대한 처분은 '용두사미'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시국선언문에는 소속 학교, 지역 등의 정보없이 교사들의 이름만 적혀 있어 참가자들을 가려내기가 매우 어려울뿐 아니라 교사들도 시국선언 참여 사실을 부인하거나 묵비권을 행사하는 등 사실 조사에 응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국선언에 참여한 교사 수는 1차 때 1만7천여명, 2차 때 2만8천600여명이었다. 교과부 관계자는 "참가 여부를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긴 하지만 사실 관계가 확인된 교사들에 대해서는 다음달 중순까지 처분을 완료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국 유치원 및 초ㆍ중ㆍ고교 건물의 90%에서 석면이 검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민주당 김춘진 의원이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제출받아 4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1만5천201개 유치원, 초ㆍ중ㆍ고교, 특수학교 가운데 89.8%인 1만3천656개교에서 석면이 나왔다. 이는 지난 7월에 발표된 학교 석면 검출률(99.1%)보다 10% 포인트 가까이 낮아진 것이다. 교과부는 석면 위험성에 대한 지적이 계속되자 16개 시도 교육청을 통해 전국 모든 학교의 석면관리 실태에 대한 전수 조사를 벌이고 있다. 7월 발표는 올 2월까지 조사가 끝난 3천158개 학교(전체의 16%)에 대한 것이었으며, 이번 자료는 8월까지 조사가 끝난 1만5천201개(전체의 61%) 학교에 대한 결과를 취합한 것이다. 조사 대상 학교 수가 지난 2월보다 4배 이상 늘어났음에도 석면 검출률은 오히려 낮아진 셈이다. 이번에 석면이 검출된 1만3천656개교 가운데 위험 정도가 가장 높은 '1등급'에 속하는 학교도 초등학교 9곳, 고등학교 9곳, 중학교 6곳, 특수학교 2곳 등 총 26곳으로 지난 7월 발표(22곳) 때보다 4곳 늘어나는데 그쳤다. 김 의원 측은 "학교 수가 훨씬 늘었음에도 석면 검출률이 낮아진 것을 보면 조사 자체가 부실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실제 7월에 1차 조사 결과가 공개된 후 상당수 시도 교육청이 판정 기준을 엄격히 적용해 고위험 등급 학교 수를 줄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오는 13∼14일 전국 초중고가 학업성취도평가를 앞둔 가운데 학부모ㆍ청소년단체 등이 작년에 이어 올해도 시험을 거부하고 집단 체험학습을 떠나기로 해 교육당국과 마찰이 예상된다. 4일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연대(참학) 등에 따르면 이 단체를 비롯해 학부모, 청소년, 교원단체 등이 가입한 일제고사폐지시민모임은 최근 일제고사 형태의 학업성취도평가를 거부하고 시험 당일 전국적으로 체험학습을 하기로 했다. 윤숙자 참학 정책위원장은 "일제고사 결과 부진아라는 낙인이 찍힌 학생들은 쏟아지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제대로 된 지원책은 거의 없다. 심지어 부진아에 대한 기준마저 시도교육청별로 다를 정도로 정책도 엉터리"라고 주장했다. 이번 체험학습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지역별로 진행되며, 지난달 말부터 참가자 신청을 받기 시작한 서울지역은 시험 직전인 12일까지 계속 참가 학생과 교사, 학부모 등을 모집한다. 참학 등은 자연관찰 및 자연탐구 활동 위주였던 작년 체험학습과 달리 올해는 문화와 체험행사, 공연 등이 어우러진 대형 문화예술제를 서울시내에서 연다는 방침도 세웠다. 체험학습에 앞서 9일이나 11일 일제고사 형식의 평가로 발생하는 교과과정의 파행 운영, 비교육적 상황 등을 학생과 학부모가 증언하는 '학생ㆍ학부모 하소연 대회'(가칭)도 계획하고 있다. 작년 학업성취도평가 거부 등을 이유로 상당수 소속 교사들이 중징계를 당했던 전교조는 체험학습과 관련해 전면에 나서지는 않되 학부모에게 '일제고사 부당성을 알리는 편지 보내기' '거리홍보용 전단지 제작' 등의 방법으로 체험학습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윤숙자 참학 정책위원장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자문을 받아 (일제고사로 인한) 교육과정의 파행운영 등에 대한 법적 대응 방안을 찾고 있다"며 "이달 중순께는 실제 소송이 제기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이에 대해 "(체험학습을 불허하고 평가시행을 거부하는 학교나 교사를 징계조치한다는) 방침은 작년과 동일하다"며 "각 시ㆍ도교육청 단위에서도 자체 계획을 세워 각급 학교에 지침을 내려보냈다"고 밝혔다.
전국 학교에 무허가 및 미등기 건물이 600여개나 돼 학생들의 안전에 위협이 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3일 국회 교육과학기술위 소속 한나라당 서상기 의원이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넘겨받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올해 7월 현재 전국 초·중·고 학교 건물 중 103곳의 213개 건물이 건축허가 없이 지었거나 준공검사를 받지 않은 무허가 건물이었다. 용도별로는 학생들이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교사(校舍)가 68개(31.9%)로 가장 많았고, 창고가 36개(16.9%), 매점, 강당 등 기타 시설물이 109개(51.1%)였다. 지역별로는 서울이 83개로 가장 많았고 경북 50개, 경기 22개, 부산·대구 각 14개 등 순이었다. 특히 1970~198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 81개였고 그 전에 지어진 건물도 20개나 됐다. 소유권 인정이 되지 않아 사고가 났을 때 책임 소재를 묻기 어렵고 보험 가입도 안 되는 미등기 건물도 249개 학교에 425개나 됐다. 서 의원은 "상당수 무허가·미등기 건물이 학교에 방치돼 있어 우려된다. 학생이 밀집해 있는 학교의 특성상 대형사고의 가능성이 커 교육당국이 주기적으로 점검하거나 이를 양성화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학교 정보공시제 시행으로 지난해부터 전국 고교별 대학 진학률이 공개되고 있는 가운데 진학률은 학생 개개인의 가정적 배경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는 대학 진학률만으로는 해당 고교의 교육력을 제대로 평가하기 어렵다는 의미여서 정보공시 내용의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3일 한국교육개발원이 내놓은 '고교별 대학진학률 차이와 그 의미'라는 정책보고서(책임자 류방란)에 따르면 전국 189개 고교, 9천300여명의 대학 진학 실태를 분석한 결과 학생들의 가정 배경에 따라 진학률에 큰 차이가 있다. 조사 대상 학생들의 평균 대학 진학률은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이 13.3%, 상위권 대학(서울 소재 명문대, 전국 의ㆍ치대 등)은 4.5%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가정 배경(수입, 부모의 직업, 교육수준 등)을 상, 중, 하로 나눠 다시 분석했을 때 가정 배경이 '상'인 경우 대학 진학률은 서울 소재 4년제가 31.4%, 상위권 대학은 12.4%로 평균을 훨씬 웃돌았다. 반면 가정 배경이 '하'이면 서울 소재 4년제 대학 진학률은 2.0%, 상위권 대학 진학률은 0.2%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학생들의 가정 배경 차이에 따라 대학 진학률이 최대 30% 포인트 가까이 벌어지는 것이다. 학교의 사회ㆍ경제적 배경 수준, 즉 해당 학교에 어떤 가정적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모여있느냐에 따라서도 진학률이 달라졌다. 예를 들어 가정배경이 평균에 비해 '1표준편차' 아래인 학생이 평균 수준의 학교를 다닐 경우 4년제 진학률은 57.5%, 상위권대 진학률은 6.8%였으나 평균 아래의 학교에 다니면 4년제 및 상위권대 진학률은 45.0%, 3.1%로 떨어졌다. 류방란 박사는 "단순 진학률만 보여주면 자칫 '진학률이 높은 고교가 무조건 잘 가르친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진학률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정보를 함께 제공하거나 학생들의 가정배경 수준을 고려한 진학률을 다시 산출해 공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경기도는 지난해 9월부터 저소득층 및 맞벌이 가정 자녀들의 방과후 교육을 위해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설치, 운영중인 '꿈나무 안심학교'를 내년부터 학교밖에 확대 설치하기로 했다고 2일 밝혔다. 도는 이를 위해 내년 교내 꿈나무 안심학교가 없는 시.군을 중심으로 청소년 수련시설이나 공공도서관, 교육.체육시설 등을 이용, 7개의 학교밖 꿈나무 안심학교를 추가 설치할 계획이다. 현재 도내에는 화성 유엔아이센터에 1개의 학교밖 꿈나무 안심학교가 설치, 운영중이다. 교사들이 주로 운영을 담당하는 교내 꿈나무 안심학교와 달리 학교밖 꿈나무 안심학교는 대학이나 문화시설, 도서관 등이 운영을 담당하게 된다. 도는 꿈나무 안심학교의 수혜 폭 확대를 위해 교내 꿈나무 안심학교보다 학교밖 안심학교를 추가 설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도는 이와 함께 교내 꿈나무 안심학교 참여를 위해 현재 대기중인 70여명의 학생은 유사 형태로 도 교육청이 곳곳에 설치, 운영중인 '종일돌봄교실'에서 수용하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도내에는 20개 시.군에 32개(초교내 31개, 학교밖 1개) 꿈나무 안심학교가 설치돼 958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방과후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영원초, YP 시범학교 보고회 성료- 지난달 30일, 정읍 영원초등학교(교장 이학구)는 도내 초등학교 교원들이 참관한 가운데 2년 동안 추진한 YP(Youth Patrol= 청소년 스스로 지킴이) 프로그램을 적용한 유해매체 대응 자기 보호 능력 신장을 위한 교육의 시범 운영 결과 보고회를 성황리에 실시했다. 유해 환경·매체·물품으로부터 청소년의 권리와 생활권을 보호하기 위한 주도적 환경 정화활동과 스스로 주체가 되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자발적 활동을 벌였던 학습산출물과 사진 등을 전시하였으며, YP프로그램을 적용한 3개 학급의 실증수업을 공개하였다. 최규호 교육감은 격려사를 통해 “건전한 사이버 문화생활은 어렸을 때부터 습관화 되어야 하며, 교원들은 넘치는 각종 유해매체로부터 우리 아동들을 지켜야할 책무가 있다.”면서 영원초등학교에서 적용한 YP프로그램이 더욱 보완 확산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요즘에는 인터넷의 유해사이트 접속이나 게임 등에 중독되어 있는 초등학생들도 있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체계적인 학습과 교육이 필요하며, YP 프로그램 운영 결과 학생들이 유해매체나 게임에 의한 폐해를 인식하고 자제하려는 의지가 확산되었다.”고 이학구 교장은 말했다. 한일석 정읍교육장은 영원초교에서 연구시범 운영한 YP 프로그램이 일반화 되어 모든 학교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어진다면 청소년들의 정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시범학교 운영을 후원한 보건복지가족부의 아동청소년보호 사업과 교육현장에서의 생활지도가 조화를 이룬다면 효율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본격적인 가을이 시작되는 10월의 첫날, 충남 서산시 소재 서령중학교에서 '한양대학교 이동과학교실'이 열렸다. 오전 10시 30분부터 운동장에서 1, 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각종 과학이론을 '심봉사와 뺑덕어멈 과학에 눈떴어요.'라는 제목으로 강연이 있었고, 오후엔 3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과학실에서 '지구가 23.5도 기울어 졌어요' 등의 주제로 과학실험이 있었다. 모든 장비와 소품을 대학이 직접 준비하여 진행한 이번 강연에는 한양대 과학과 교수님 두 분과 대학(원)생 10여명이 진행하고 많은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참관하여 관심을 보였다.
'교사 특별과정을 이수한 자'를 기존의 교육대나 사범대 졸업자, 교육대학원 또는 교과부 장관이 지정하는 대학원 교육과의 석사 학위 소지자, 임시 교원양성기관을 수료한 자, 대학 교육과 졸업자 등 8가지 기준에 의해서만 초 · 중 · 고교 교사가 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 현재의 규정에 추가할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전문계고,특성화고,예체능계열 학교,영재학교,과학고,외국어고 등에 다양한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교사로 임용되도록 문호를 넓힌 것이라고 한다. 교사양성과정을 좀더 다양하게 하기 위함 이라고 한다. 문제는 위에서 언급한 전문계고, 특성화고, 예체능계열 학교, 영재학교, 과학고, 외국어고의 특정교과에한해 특별과정이수자를 선발할 것이냐는 것이다. 또한 특별과정이수자의 전공을 이들 학교에서 필요로 하는 특정한 과정에 한해서 과정을 개설할 것인가이다. 그것이 아니고 모든 교과의 특별과정을 개설한다면 현재의 교원양성 기관이 불필요해 질 것이다. 최소한 4년의 기간이 필요한 교원자격증 취득을 단기간에 할 수 있도록 한다면 대부분의 교사를 양성하는 교대와 사범대의 존재가 무의미해 지는 것이다. 여기에 또 한가지의 문제는 특별과정이수자의 경우, 위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학교에서 필요하다. 그런데 이들을 단기간의 과정이수만으로 선발한다는 것은 전문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물론 기간이 길어야 전문성이 형성된다는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전문성확보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기간도 함께 인정되어야 한다. 교대나 사범대를 졸업하지 않아도 교원자격증 취득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은 현재의 상황으로 볼때도 바람직하지 않다. 현재와 같은 예비교원자원이 풍부한 현실에서 또다시 특별과정을 개설한다는 것이 결코 옳은 방향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현재의 인력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방법보다는 기존의 교사들에게 필요한 과정을 이수토록 하여 전공을 바꾸도록 하는 편이 더 옳은 방향이라는 생각이다. 어차피 단기에 교원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도록 한다면 당연히 현직교사들을 활용하는 편이 옳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교원의 전문성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충분한 경험을 쌓았기에 신규임용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이 기존의 교원양성기관을 통해 배출된 예비교원들의 문호를 넓힐 수 있는 것이다. 기존의 양성과정에서 양성된 교사자격증 취득자들에게 문호를 넓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전문성을 중요시하는 교직사회에 단기간의 특별과정이수가 필요하지 않다. 도리어 교원양성과정의 양성기간을 더 늘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현실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전문성의 문제가 있을 수 있고, 기존의 교원양성기관에서 오랫동안 노력해야 취득이 가능한 교원자격증이기에 단기에 취득하는 것은 형평성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기존의 교원자격증 취득자를 활용하는 방안이 연구되어야 한다. 단기간의 특별과정이수를 통한 교원자격증 취득에 반대한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더욱더 불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다. 이번의 특별과정이수를 통한 교원자격증 취득방안은 재고되어야 한다. 원칙없는 교원양성과정 추가는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