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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교총과 한국청소년단체협의회, 보건교사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2009 비만예방 건강캠페인 우수실천 사례’ 공모 결과 심영희 음성 감곡초 교사가 한국교총 회장상을 받는 등 총 12명의 수상자가 결정됐다. 심 교사는 올해 학교에서 진행한 ‘날씬 가꾸미 교실’ 운영을 소개했다. 학기 초 희망 학생들을 모아 1년간 음악 줄넘기, 바른 식습관 교육 등을 진행했다. 심 교사는 “바로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에게 바른 습관을 길러주는데 도움이 됐다”며 “체육, 영양 등 관련 선생님들과 함께 진행하는 노하우를 다른 학교에서도 많이 활용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번 공모전은 교총이 매년 진행하고 있는 건강캠페인 중 하나로 올해는 ‘건강한 생활 습관, 내일의 몸짱’을 주제로 1년간 선도학교 운영, 특별 수업 실시, 선도학교 운영, 포스터 및 UCC 경진대회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다음은 수상자 명단. ◆ 교총회장상=심영희 음성 감곡초 교사 ◆청협 회장상=이인화 당진 석문초 교사 ◆최우수상=▲이규란 홍천 매산초 교사 ▲소현정 대구학정초 교사 ▲김천 모암초 ◆우수상=▲이광철 밀알학교 교사 ▲황국희 오산대원초 교사 ▲박운하 통영 용남초 교사 ▲홍말숙 제주동중 교사 ▲박혜경 진주 평거초 교사 ▲류제정 고양 풍동초 교사 ▲박성은 용인 현암고 교사
23일 열린 울산교총 제6대 회장 선거 개표 결과 차명석 후보(현대정보과학고 교사)가 당선됐다. 울산교총은 8~18일간 진행된 선거에서 총 회원 수 3335명 중 3145명이 참가해 94%의 투표율을 나타냈으며 이중 차 당선자가 2047표를 받아 확정됐다고 밝혔다. 홍종만 후보(달천고 교장)는 1040표를 얻었다. 차 당선자는 “울산교총 회원 30년 경력을 지지해주신 회원들께 감사하다”며 “회원과 학교현장 중심의 울산교총을 만들어 회원에게 맞춤형으로 다가가겠다”고 당선 소감을 밝혔다. 학성고, 울산대를 졸업한 차 당선자는 울산교총 3대 부회장 및 4~5대 수석부회장과 울산교육청 홍보대사, 울산 학교급식지원 심의위원 등을 역임했다. 차 당선자는 연구 및 동아리 활동 활성화, 복지후생 및 지위향상 활동 전개, 상임 법률 고문 변호사 선임, 전문위원 제도 활성화, 교육정책 토론회 개최 및 교육관련 학술 세미나 지원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특히 교권침해 발생 시 직접 학교를 방문해 사건 해결에 나서는 등 현장과의 소통을 늘려나갈 예정이다. 차 당선자는 “임기 중 울산교총 회관 건립을 위한 기초 마련에 힘쓸 것”이라며 “교육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힘 있는 울산교총이 되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차 당선자의 임기는 3월 1일부터 3년간이다.
내년 2월 부산에서 전국의 초ㆍ중ㆍ고교생 300여명이 공교육을 바탕으로 갈고 닦은 토론 실력을 겨루는 대회가 열린다. 사단법인 세계화교육재단(이사장 이돈희)은 부산시교육청 주관, 교육과학기술부 후원으로 내년 2월20일 부산 동서대학교에서 `제1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배 전국 청소년 토론대회'를 연다고 24일 밝혔다. 재단은 올해 3월 이돈희 전 교육부장관을 중심으로 교육의 세계화 및 글로벌 시대에 적합한 인재 양성을 위해 설립된 비영리단체다. 대회는 초ㆍ중ㆍ고등학생별로 국어와 영어 2개 부문으로 나뉘어 열리며, 이달 25일까지 16개 시도교육청별로 지역 대표 1팀씩 총 96팀을 선발한 뒤 내년 열리는 본선에서 8강 토너먼트 방식으로 기량을 겨룬다. 본선에서 초등학생 부문은 참가자들이 각자 준비해온 주제로 의견을 발표하며, 중ㆍ고등학생 부문은 주최측이 준비한 주제를 놓고 학생들이 직접 토론을 벌일 예정이다. 각 부문 우승팀에게는 대상인 교과부장관상이, 2∼4위팀에는 부산시교육감상이 수여되며 부문별 우승팀을 이끈 지도교사 6명에게도 지도자상이 주어진다. 재단은 교과 내용에서 주제를 뽑고 저학년생을 팀에 반드시 포함시키도록 하는 등 공교육 강화에 중점을 뒀다고 전했다. 재단은 이번 대회를 시작으로 매년 도시를 바꿔 정기적으로 토론대회를 열 계획이다. 재단 관계자는 "글로벌 인재 양성에 기여하고자 대회를 준비했다. 입학사정관제 확대 시행으로 토론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학부모와 학생의 관심이 뜨겁다"라고 말했다.
한국 근대 수필은 너무 경수필 위주로 발달해온 면이 있다. 글에 대한 편협한 관념 때문에, 그마저도 흔히 ‘문학적’이라 여겨온 몇 가지 형태로 굳어졌다. 응모작들을 보면서 글쓰기의 재미와 보람에 맛들인 이가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전통적 범주에 갇힌 ‘교과서적’ 수필이 많아서 다소 답답하였다. 사적인 체험을 어떻게든 일반적 진실과 연결시키려는 내용도 많았는데, 필자의 진솔한 태도는 느껴져도 글로서의 참신함은 아쉬웠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5편이다. 앞의 셋은 자료를 모으고 논리를 밀고나가 애초의 착상을 발전시키려 노력한 작품들이다. 그 결과 앞의 문제점들에서 다소 벗어났지만 일반적인 내용을 반복하는 데 머문 경향이 있다. 뒤의 둘은 새로운 글감을 포착하는 섬세함과 상식에 매이지 않고 사색을 전개하는 날카로움이 돋보인다. 그러나 그 중 이 경험을 겹치고 편지투를 활용하여 표현 효과를 높인 반면 은 구성이 평면적이다. 논의 끝에 앞의 계열에서 을 가작으로, 뒤의 계열에서 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글쓰기는 이른바 심신수양에 도움이 되지만 심신수양을 위한 방편이 아니다. 규범을 넘어섬으로써 보다 개성적이고 자유로운 세계와 만나는 데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비눗방울 속에는/ 내 마음 들어있고/ 내 마음은 두둥실/ 비눗방울 따라가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갈대 성이 보이고/ 비눗방울 터지면/ 내 마음 허전하네. 한글을 깨치고 글로써 제가 본 풍경이나 떠오른 생각을 붙잡아 둘 수 있다는 것이 마냥 신기해 아홉 살쯤엔가 처음으로 써본 시입니다. 30년이나 지났지만 이제껏 그 시를 외울 수 있었던 건 짧기도 짧아서였겠지만 무언가를 글로 써서 간직하는 일이 스스로에게 대견하고 즐거운 기억으로 남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 순수한 즐거움을 참 오래도록 잊고 지내왔습니다. 어린 시절의 비눗방울 놀이만큼도 제 가슴을 울리고 흔드는 것이 없다고 변명하며 지내왔습니다. 혹은 성급하고 경직된 언어들로 채 익지 않은 상념들을 붙잡으려 헛된 노력을 하기도 했던 것도 같습니다. 그러다 문득 바람처럼, 공기처럼 제 마음에서 떠오르는 비눗방울들이 그저 흘러가도록, 그러다 마침내는 터져버린 비눗방울마저도 가만히 감싸 안을 수 있는 언어가 제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습니다. 그저 지그시 바라보고자, 찬찬히 응시하고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품어보고자 하는 노력이 지금 제겐 소중한 일이 되겠구나 하는 깨달음이라 해도 좋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수상소식이 나이 드신 부모님께 새삼스런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무엇보다 감사합니다. 늘 곁에서 보살펴 주시는 시부모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글이란 걸 쓸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곁에서 좋은 책을 권하기도 하고 때론 쓴 소리도 마다않는 남편의 도움도 컸습니다. 중학교 시절 제 보잘 것 없는 감수성을 인정하고 북돋아 주셨던 차용문 선생님, 그리고 새로이 글쓰기의 즐거움을 일깨워주신 박인기 교수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글을 뽑아 주신 최시한 교수님, 배봉기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며칠 전 학교 급식에 고추장 비빔밥이 나오던 날이었습니다. 밥먹다 말고 한 아이가 울상을 짓고 있길래 밥 먹던 숟갈을 내려놓고 그 아이에게로 갔죠. 평소 매운 것을 잘 못 먹는 아이였기에 고추장을 덜어주어야 하나 맨밥을 더 퍼 줘야 하나 하면서요. 제가 맡고 있는 1학년 교실에선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으니까요. 부지런한 숟가락질 소리, 몹시도 매웠는지 후울쩍 콧물을 들이마시는 소리, 조곤조곤한 이야기 소리를 들으며 비교적 뒤 쪽에 위치한 그 아이 자리로 갔습니다. “○○야, 밥 먹다 말고 왜 울상이니? 누구하고 다퉜어?” 다른 아이들이 듣지 못하도록 작은 소리로 말하려고 허리를 달싹 엎드려 물었어요. 그랬더니 그 아이는 여지껏 참고 있던 울음을 한꺼번에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차라리 묻지나 말 걸 제 물음은 그 아이의 한껏 부풀어 오른 울음보를 바늘로 콕 터뜨린 꼴이 되고 만 겁니다. 이미 봇물처럼 터져 버린 아이의 울음이 어찌나 구슬프고 처절하던지 저희 반 아이들은 모두 목이 메이는 점심을 꾸역꾸역 먹어야만 했습니다. 그랬거나 말거나 제 몫의 비빔밥을 한 그릇씩 뚝딱 비운 아이들은 하나 둘 집으로 가고 교실에는 어느새 그 아이와 저만이 남았습니다.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아이들이 모두 떠난 교실은 얼마나 휑뎅그레 적요로운지 몰라요. 흘러가는 먼지나, 언뜻 불어 온 바람에 흔들리는 화분의 잎사귀에서도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싶게 쨍하니 고요한 속에서 그 아이만이 목놓아 통곡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몇 십분이 흘렀건만 아이는 울음 그칠 생각을 당체 하질 않았죠. 복도를 지나는 옆반 선생님이나 교실 청소를 도우러 온 학부모들이 무슨 재미난 구경이나 난 듯 창문 앞에 기웃기웃하는데 참 난처하더라구요. 마치 제가 아이를 흠씬 패준 것같이 보이기 딱 알맞은 배경에 풍경이었거든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못되고 사나운 선생으로 비치는 게 아닐까, 우습지만 두려워지는 것도 사실이었지요. ‘이 아이는 도대체 왜 이리도 울음 끝이 질긴 것이지?’ 아무리 달래고 이유를 물어봐도 대답도 않은 채 계속 울기만 하는 아이에게 저는 슬슬 지쳐가기 시작했습니다.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부아를 다스리기도 쉽지 않더라구요. 책상 위에는 몇 술 뜨지도 않은 채로 식어가는 제 몫의 비빔밥이 널부러져 있고 4교시 내내 장난꾸러기들과 씨름하느라 피로와 허기로 두 눈이 푹 꺼진 채로(거울은 안보았지만 그랬을 거라 믿으면서) 아이에게 다시 한 번 간청하듯 물었어요. “왜 우는지 선생님한테 말해줘. 이건 부탁이야.” 그러자 아이는 간신히 울음을 참고는 제게 아주 놀라운 대답을 들려주더군요. "인섕이 너무 힘들고 고달파서요." "뭐라고? 인생?" 저는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습니다. ‘환상의 짝꿍’인가 하는 어린이 대상 TV 프로그램의 예선을 통과한 바 있는 이 아이는 평소 말본새가 당돌하고 야물딱지기까지 했지만요, 초등학교 1학년짜리한테서 인생이란 말을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거든요. 게다가 더욱 가슴 찡한 것은 앞니 빠진 그 아이가 말한 인생은 '인생'도 아니고 '인섕'이었다는 점입니다. 아이는 이제 어느 만큼 진정이 되었는지 울음 소리도 잦아지고 나중에는 여지껏 울어 제낀 것을 좀 민망해 하는 눈치였어요. 잠시 넋이 나갔던 저도 정신을 차리고 조금 더 캐물었더니 ‘요즘, 영어 학원 숙제가 너무 많아요. 그래서 놀 시간도 없단 말이에요.’ 하데요.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여덟 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겪어야 했을 고단한 하루가 머릿속에 그려지며 진정으로 가슴이 아파왔습니다. 매스컴에도 종종 오르내리는 ‘소아우울증’이란 단어가 머릿속을 헤집으며 잠시 아연하기도 했구요. 기회가 되면 아이 엄마에게 의당 선생으로서 기분 나쁘지 않을 만큼은 충고해 주리라 마음도 먹었답니다. 도무지 놀 틈이 없는 아이들인 걸요. ‘놀아도 놀 줄 모르는 아이들’-운율까지 맞추어 굳이 말해 보지 않아도 그것은 요즈막의 서글픈 현실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랍니다. ‘하지만, 하지만 말야. 이 아이가 단지 그 이유로만 울었던 것일까?’ 스스로 생각해도 다소 엉뚱한 생각이 비집고 들어선 것은 바로 그 때였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교회학교 동극에서 예수 인형을 붙안고 마리아역을 하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 것입니다. 너무 경건하기만 한 배역이었던지라 입체적인 감정표현 따위는 필요도 없었겠지만 아무튼 자동인형처럼 감정 없는 대사를 외우고 있던 제가 객석 쪽을 바라볼 여유를 부렸던 게 불행이라면 불행이었습니다. 교회당을 메우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유리알 박은 듯 무연한 눈들을 하고서 제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어두운 객석에서 수백 개의 눈들만이 이상한 실감으로 교교히 빛을 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왜 그리도 무안하고 서럽던지요. 지금 와 생각하니 그건 다름 아닌 서늘한 고독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찌어찌 대사를 주워 섬기고 제 몫의 역할을 마치고는 허둥허둥 무대에서 내려와 저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비빔밥을 먹다 울던 바로 그 아이처럼 말이죠. 저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 요셉이나 천사 역할을 맡은 아이들은 저마다 굉장한 모험을 막 끝마친 후인 듯 두런두런 무용담을 나누고 있었답니다. 스스로를 대견해 하며 한 뼘씩은 훌쩍 자란 의젓한 표정을 하고 서로를 칭찬하기도 하면서 말이죠. 그 사이에서 잔뜩 구겨져 흐득흐득 느껴 울던 저의 모습은 얼마나 쌩뚱맞고 엉뚱한 것이었을까요? 무대 뒤로 달려오신 엄마는 제 모습을 보고 참으로 당황해 하셨어요. 왜 넌 다른 아이들처럼 웃질 못하고 그리 우는 것이냐 내쳐 물었을 때 저는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는데 당황했습니다. 사실은 그 이유를 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저는 얼른 마음과는 영판 다른 대답을 꾸며 말했답니다. “아빠가 이 자리에 계시지 않아서 너무 슬펐어.” 순간 제 입에서 나오는 거짓말에 스스로도 놀랐지만 더욱 놀란 것은 엄마 쪽이었던 모양입니다. 엄마는 제 대답을 듣고 대번에 얼굴이 화알짝 피시더니 저를 끌어 안으셨습니다. 그리곤 아빠를 주님 전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갸륵한 효성이라며 여러 사람들한테 떠들고 다니셨어요. 어찌나 민망하고 부끄럽던지. 선생님, 그 아이의 울음은 이렇듯 아련한 기억을 제 앞에 홱 잡아끌어 놓았답니다. 그 울음도 어찌 보면 그렇듯 설명할 길 없는 삶에 대한 막연한 서러움, 애매한 예감에 대한 반응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 아이의 말로는 혹은 제 입을 빌어서도 도저히 형언할 길 없는, 보다 근원적인 감정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울림으로서 말이죠. 인간의 속에 오래 전 부터 심겨져 왔던 씨앗 같은 슬픔이 고 작은 아이를 흔들어 깨우고 울렸던 것은 진정 아니었을까요? 제가 중학교 3학년이던 그 때 선생님은 제게 황순원의 ‘소나기’를 가르쳐 주셨지요. 소설의 끝부분에 소녀의 죽음을 이야기하던 소년의 아버지는 이렇게 중얼거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계집애가 여간 잔망스럽지 않아.” 초등학교 5학년쯤이나 되었을 계집아이는 소년과의 추억을 간직하려고 자기가 입던 분홍의 스웨터를 그대로 입혀 묻어달라고 했다지요. 그 부분을 가르치시다 선생님께서는 문득 제 얼굴을 바라다 보셨어요. ‘보기엔 몹시 약하고 가냘픈 데가 있어 보이면서도 얄밉도록 맹랑한 데가 있다.’는 뜻을 가진 ‘잔망스럽다’는 말이 제게 꼭 들어맞는다고 껄껄 웃으시면서요.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어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의 기복으로 툭하면 울기 잘하고 엉뚱스런 질문도 곧잘 하던 저를 밉게 보지 않으시고 너그러이 보듬어 주시던 선생님. 선생님을 떠올리면 ‘소나기’가 생각나고 ‘잔망스런 소녀’로 저를 아껴 주시던 선생님의 마음이 물결처럼 퍼져간답니다. 삶이 힘들다고 여겨질 때, 스스로가 못나게 느껴지고 싫증이 나고 말 때 저는 마흔을 목전에 둔 아줌마라는 사실도 잊고 열 여섯 잔망스런 소녀 적 기억을 떠올려보곤 한답니다. ‘나에게도 그런 귀한 시절이 있었다. 열 여섯 그 얄궂은 마음을 곱고 순전하게 받아주신 선생님이 계셨다.’는 위안은 그렇게나 제게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흐득흐득 느껴우는 아이의 어깨를 토닥이며 어느새 저는 선생님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고 있었답니다. 그리곤 제 곁에 서서 작은 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는 아이를 눈시울이 뜨뜻해질 만큼 뭉클 솟아나는 애정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예전 선생님께서 보내 주셨던 그 눈빛과 닮아 있기를 진정으로 바라면서요. 그리곤 한 팔로도 가풋하니 안겨지는 그토록이나 잔망스런 아이를 가만히 감싸 안으며 이렇게 뇌까렸답니다. '아이라고 슬픔이 없겠는가? 무엇이 너를 울게 했니? 마음껏 울려무나. 인섕은 길기도 하다.'
최종 논의 대상으로 남은 작품은 , ,,등 4편이었다. 당선작을 가려내기 위해 다시 흠이 많은 것부터 밀어내기로 하였는데 두 심사위원의 의견이 비슷하였다. 은 석수장이 인도인 샴과 꿈을 이루지 못한 석수장이 할아버지를 내세워 불상이 완성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한국인 딸을 가진 인도인 샴을 끌어들였지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지 못하고 이미 익숙해진 이야기에 머물고 말았다. 불교의 나라 인도 이야기로 시선을 확대했더라면 더 새로운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은 가장 동화적인 분위기를 지닌 작품이다. 그러나 주독자인 어린이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이다. 항아리에 모신 ‘부처님의 몸’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있었더라면 훨씬 빛나는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는 특수한 아이 ‘지호’ 때문에 벌어진 일을 제재로 하고 있다. ‘성질이 나면 무엇이든 내리치는’ 지호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은 개연성을 지니고 있으나 동화로서의 향기는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 은 할머니와 아들 그리고 손녀간의 갈등과 화해를 짧은 글 속에 잘 표현한 작품이다. 많은 습작기를 거친 듯 깔끔한 문장이 돋보였고 다른 두 편의 작품 수준도 골라서 쉽게 당선작으로 정할 수 있었다. 쉬지 않고 정진해 훌륭한 동화작가로 성장하기 바란다.
청소년 교육을 위해 만든 출판물이나 교육자료 라고 하면 목적이나 동기에서부터 과정까지 속속들이 교육적이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제 중3 학급에 들어갔더니 처음 보는 신문이 교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물론 학급 담임교사의 손을 거쳐 학급 학생들에게 전달된 인쇄물이리라. 경제엔 문외한이지만 수업 후 여유시간이 있어 살펴보니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학생에 이르기 까지 청소년들의 경제교육을 돕기 위해 탄생한 신문임을 알 수 있었다. 정보통신부 장관도 지냈고 대통령실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낸 한국경제교육협의회 회장 명의의 발간사가 눈부시고, 그래서인지 대통령이 보낸 축하 말씀도 있고 경제인 대표의 글도 있어 한층 공신력을 갖춘 신문임을 과시한다. 발간사와 축사를 살펴보면 ‘경제교육 시간에 부교재로 활용’, ‘한국경제의 현안이나 경제 원리 등 경제 정보의 지속적 제공‘, ’경제현상의 올바른 이해‘, ’경제적 소양과 문제해결력 획득‘, ’학교경제교육 활성화 추진‘ 등 희망찬 가치와 비전을 제시해 놓고 있다. 또한, 신문과 온라인의 영역을 넘어 경제강좌 및 세미나, 출판, 연수 등 다양한 형태의 교육이 실천되도록 돕겠다는 약속 어떻게 얼마나 실천되는지 큰 기대를 걸고 지켜보겠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주간인지 격주간인지, 월간인지 구분이 없고 단지 기사 내용을 보고 주간지로 어림잡을 수 있다. 그런데 매주 가정이나 학교로 배달될 종이 신문인지, 창간호만 이렇게 종이신문으로 보여주고 다음부터는 인터넷으로만 볼 수 있을지는 창간호 신문 내용만으로는 알 수 없으며, 특히 이 신문이 비매품인지 학생들이 구독료를 지불해야 하는 출판물인지도 아무런 기록이 없었다. 그리고 옥에도 티가 있다 했던가? 내 눈에 아주 거슬리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으니 제목 글씨가 모두 ‘안상수체’인가 그런 비슷한 글씨체로 되어 있는데 편집상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모르나 도무지 이해가 안 될 맞춤법에 어긋난 띄어쓰기로 점철되어 있어, 왜 인쇄물로 나오기 전에 진작 교정을 거치지 않고 배포했는지 의문스럽다. 3p. ‘생활 속 경제 재미있게 전달해주 길’, ‘경제교 육 부교재로 활용’, 7p. ‘창간을 축 하합니다’, 9p. ‘경제교 육 우리가 앞장…’, 14p. ‘경제교 육 은 어릴 때부 터 시작’…, 16p. ‘현영 이렇게 돈 모 았어요’ 22p. 온 라인 쇼 핑몰 인기…등 등 이처럼 제목의 이상한 띄어쓰기 현상은 끝 페이지까지 이어진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는데 경제신문이 갖추어야 할 정부와 경제단체, 노동자와 사 용자 등 어떤 쪽에도 편향되지 않은 공정보도라든지, 몇 년 전에도 거론되었던 이념문제라든지 개인정보 유출문제… 하나부터 열 까지 교육현장의 교사보다 더 꼼꼼히 살펴서 제작해 주시기 바란다. 마지막 부분에는 각각 초 중 고등학교 학생을 위한 신문활용 글쓰기(NIE) 학습 내용을 실었는데 과연 신문 한 부에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경제기사를 두루 담아내면서 유익하고 흥미로운 경제교육 신문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을지, 교사가 학생들에게 마음 놓고 구독을 권장할만한 가치가 있을지 의문이다. TV프로그램의 수준처럼 여러 계층이 볼 수 있는 내용은 그만큼 오락적이거나 수준이 낮거나 아주 보편타당한 상식 수준의 내용이 많지 않은가. 과연 10살짜리 철부지 초등학생과 대학입시를 눈앞에 둔 18살 고교생이 함께 보는 신문이라니, 지면에 나타날 광고로는 또 어떤 내용이 실릴지 살펴볼 일이다. 원컨대 경제교육은 시급하고 중차대한 현안이니만큼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꼭 필요하고 적합한 교육신문으로 발행될 수 있도록 한 번 더 신중한 협의와 개선방안 모색에 힘써주시길 바란다. 주간신문 아니라 격주간, 월간을 만들더라도 학교급별로 분리하는 것은 어떨까?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오래 전 경험에 의하면 초중등 교사를 위한 교육자료 내용이 함께 실린 잡지가 있어예로 든다. 교육대상에 따라 커리큘럼이나 학생발달수준이 다르다 보니 특별한 부분을 제외하고는초등교사에겐 중등, 중등교사에겐초등학교 내용과 전공과 무관한대부분 자료는 교육현장에서 별 도움이 되지 않는구나라고 느꼈던 일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우리 집 아이들은 할머니 집에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도시 속에 있는 할머니 집이지만 들어서는 순간 마당에 펼쳐진 각종 플라스틱 그릇, 세숫대야에 심어진 고추, 상추 등 여러 채소를 보면서 신기해합니다. 만져보고, 직접 캐보기도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어릴 적 시골 할머니의 텃밭이 생각났습니다. 그런 텃밭을 할머니는 도시 속에 옥상, 베란다, 작은 화단에 가꾸고 계신 것입니다. 신기하게만 채소를 들여다보는 아이들을 위해 할머니의 고마움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그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 긴 터널을 뚫고 온 느낌입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내가 쓴 동화를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동화는 정말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이야기 끈이 풀리지 않을 때는 꼬박 밤을 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것이 좋았습니다. 부끄럽지만, 제가 쓴 동화에 혼자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계속 울고, 웃으며 동화를 써 나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당을 텃밭으로 가꾸어 저에게 소재를 안겨준 할머니에게 오늘의 영광을 돌립니다. 부족한 글이나마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써서 기대에 보답하겠습니다.
안개가 자욱한 숲 속입니다. 어둠에서 깨어난 나무들이 이슬을 머금고 있습니다. “왕을 배신하는 신하는 있어도 백성을 버리는 왕은 없는 것이여.” 할머니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이어집니다. 바위 뒤로 할머니의 옷자락이 보입니다. “할머니!” 나는 할머니에게로 다가가려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허공을 걷는 듯 발은 제자리를 맴돕니다. “은하야! 은하야!” 은비 언니가 흔들어 나를 깨웠습니다. 아직 방문에 어둠자락이 묻어 있습니다. “찾았다. 할머니는 지금 산골짜기에 작은 왕국을 세우고 계시는 거야.” “너 요즘 드라마 너무 많이 보는 거 아니야?” 머리를 빗던 은비 언니가 쿡쿡 비웃었습니다. 할머니의 왕국이 무너지기 전에 왕을 배신한 첫 번째 신하가 바로 언니였습니다. 시골에 있는 할머니 집은 하나의 작은 왕국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할머니는 왕처럼 살았습니다.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쌀을 나누어 주고 병든 사람에게는 약도 사다 주었습니다. 베풀기를 좋아하는 할머니를 사람들은 왕처럼 받들었습니다. 마을 사람 누구도 왕의 말을 거역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왕의 창고는 곡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과일들이 단지를 꽉 채웠습니다. 그것들은 언니와 나를 왕의 신하로 만드는 꿀떡이었습니다. “할머니 호두 좀 더 주세요.” “오냐. 기침에 호두가 좋다 카더라. 우리 은비 마이 묵거라.” 왕은 은비 언니를 끔찍이 생각해 주었습니다. 어려서 홍역에 걸려 기침으로 기관지가 많이 나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침에 좋다는 산초기름으로 전이나, 두부 무침을 해주었습니다. “할머니, 난 군밤 먹고 싶어요.” 내가 샘을 내며 말하자 따끈따끈한 군밤이 나왔습니다. “할머니 집은 없는 게 없는 왕국 같아요.” “그라믄, 내가 바로 왕이라 카이.”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할머니의 작은 왕국에서 넉넉한 먹을거리는 언니와 나를 더욱 충성스런 신하로 만들었습니다. 갈 때마다 가득 차에 실리는 곡식들이 아빠와 엄마도 왕의 신하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년 전 할머니는 위암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왕은 어쩔 수 없이 우리 집으로 왔습니다. 시골에 있는 땅과 집을 팔아 함께 살게 된 것입니다. 할머니는 도시 생활을 답답해 하셨습니다. 고향 텃밭을 그리워 하셨습니다. 그래서 좁은 뜰과 옥상에 고향의 텃밭을 옮겨 놓았습니다. 거리에 버려진 스티로폼 상자와 플라스틱 그릇은 멋진 화분이 되었습니다. 뜰과 옥상에는 곡식을 심은 화분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래도 성이 안차자 화단에 있는 분재도 캐냈습니다. 올 봄이었습니다. 분재를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소나무와 소사나무가 윤기를 잃자 생기를 되찾아주기 위해서 화단에 옮겨 심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 분재를 다 캐내고 상추를 심었습니다. 나는 불안했습니다. 아무리 아빠가 효자라도 이번에는 큰일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퇴근하여 화단을 본 아빠의 얼굴이 구겨진 종잇장처럼 일그러졌습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누가 왜 그랬는지 아빠는 벌써 다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여기 있던 나무 어떻게 했어요?” “천지 쓸 데도 없는 나무라가 캐냈다 아이가.” “그럼 나무들은 어디다 두셨어요?” “쑥 뜯으러 가면서 산에 옮깄다. 나무도 지 자리가 있는 법인데 집안에 철사로 감아 두면 죄받는데이.” 할머니는 왕답게 당당했습니다. 집안은 할머니의 왕국이 되었습니다. 할머니의 화분에서는 채소들이 잘도 자랐습니다. 창문으로 옥상을 내다보면 마치 들판 위에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옥상이 시골 들판을 닮아가던 어느 여름날 소나기가 우산까지 찢어버릴 기세로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소나기는 할머니의 화분에서 물을 넘치게 했습니다. 결국 화분은 버티지 못하고 흙과 함께 스티로폼 조각을 조금씩 뱉어내기 시작했습니다. 흘러나온 흙과 스티로폼 조각들은 서로 뒤섞여 옥상의 배수구를 막아 버렸습니다. “아빠, 옥상이 호수 같아요.” 창문을 내다보던 은비 언니가 넘치는 물을 보며 소리쳤습니다. 아빠는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배수구를 뚫었습니다. 그리고는 화가 나신 듯 옥상의 화분 들을 아무렇게나 화단에 던져버렸습니다. “이기 뭔 짓이고?” 경로당에서 돌아오던 할머니가 쓰고 계시던 우산을 내던지며 고함을 치셨습니다. “이것 때문에 물구멍이 막혀 물이 방으로 넘칠 뻔 했다고요.” 아빠는 할머니 앞에서 큰소리를 쳤습니다. 신하에게 공격당한 왕의 얼굴은 금방 새파랗게 변했습니다. 비를 맞고 섰던 왕은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도 할머니를 뒤따라 방으로 갔습니다. 할머니는 비에 젖은 안주머니에서 헝겊으로 만든 봉지를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그 봉지를 비닐로 싸서 다시 안주머니 깊숙이 넣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던 할머니는 옷가지 몇 개를 보따리에 싸셨습니다. 입을 꾹 다문 채 바삐 움직이던 할머니의 손이 점점 느려지더니 눈물이 굵은 주름을 타고 흘러 내렸습니다. 어느새 내 눈에서도 울컥 눈물이 솟았습니다. “할머니, 어딜 가려고요?” “내 답답해가, 어댈 좀 댕겨올라 칸다.” 할머니가 집을 나서자 아빠, 엄마가 잘못했다며 말렸습니다. 하늘도 왕의 가는 길을 막아보려는 듯 장대비를 더욱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왕의 마음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쩐지 할머니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불안했습니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껌만 질겅질겅 씹어대는 언니가 미웠습니다. 언니가 왕을 배반한 건 함께 산지 한 달쯤 지나서였습니다. 경로당 잔치에서 돌아오신 할머니 손에는 초코파이와 사탕이 들어 있었습니다. “야들아, 이거 묵그라.” 할머니는 초코파이와 사탕을 내밀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 손 안에 있던 초코파이는 가루가 되어 있었고, 사탕은 녹아서 껍질 채 찐득거렸습니다. “싫어요. 안 먹을래요.” 언니가 고개를 획 돌리며 말했습니다. “와, 무 봐라. 너거 줄라고 내 묵도 않고 일부러 갖고 온거데이. 니가 좋아하는 거 아이가. 어서 무라.” 할머니는 초코파이 든 손을 언니 앞에 더 가까이 내밀었습니다. “더러워서 싫어요. 치우세요.” “드럽다이? 그기 뭔 말버릇이고?” “그럼, 손때가 묻어 찐득찐득 거리는 게 안 더럽단 말이에요?” 언니도 지지 않고 할머니를 흘겨봤습니다. 호두를 달라며 쫓아다니던 예전의 언니가 아니었습니다. 그 때부터 왕은 한 신하를 잃었고, 언니는 왕을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하고 따로 살았으면 좋겠어.” 언니는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렸습니다. 그런 언니 입버릇처럼 할머니가 어쩌면 영원히 떠날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 안 가면 안돼요?” 나는 할머니를 따라 나오며 말했습니다. “내 어여 갔다 올텡께, 걱정 말고 드가거래이.” “언제 오는데요?” “몇 밤 자고 나면…….” 할머니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더니 말을 잊지 못했습니다. “할머니, 빨리 와야 해요.” “오냐. 내 강생이…….” 할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을 보았습니다. 할머니는 눈물이 흘러내리기 전에 몸을 돌렸습니다. 잰걸음으로 걸어가시는 할머니의 어깨가 바람 탄 갈대처럼 흔들렸습니다. 나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왕과 마지막 신하는 이렇게 눈물로 헤어졌습니다. 할머니의 빈자리는 골목이 먼저 알았습니다. 깨끗했던 골목에 휴지가 나뒹굴었습니다. 할머니의 고함이 떠난 집은 절간 같았습니다. 아빠는 이리저리 할머니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가실만한 곳 어디에도 할머니는 없었습니다. 다만 잘 있으니 찾지 말라는 전화 한 통이 다였습니다. 그래도 아빠는 주말마다 할머니를 찾으려 다녔습니다. “따르르릉” “예? 응급실이라고요?” 어느 날 밤 전화를 받으시던 아빠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순간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아빠와 엄마를 따라 나도 나섰습니다. 언니도 걱정스러운 듯 옷을 챙겨 들고 뒤따라 나왔습니다.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구석에는 한 시골 할머니가 침대를 힘없이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침대에 우리 할머니가 누워있었습니다. 아빠가 달려가 흔들어 보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아이구, 이 할망구가 입만 열면 자랑하던 그 효자 아들인갑네.” 그제야 아빠는 옆에 있는 할머니를 쳐다보았습니다. “독사한테 물렸다 아이오. 큰손녀 기침 때문에 산초기름이 필요하다고 뱀골에 갔 다 아인교. 내가 그렇게 말려도 내 말 안 듣고는 굳이 간다 캐가……. 그래도 내 가 같이 가가 다행인기라.” “그런데 할머니는 우리 어머니와 어떻게 되세요?”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와 만나게 된 것부터 말해주었습니다. 할머니는 산마을이 좋다며 낯선 산마을로 찾아갔습니다. 그리곤 밭두렁에 손녀들이 좋아하는 호두나무, 밤나무를 심고, 아들이 좋아한다며 못난이 소나무와 소사나무도 심었다고 했습니다. 듣고 있던 아빠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신하는 왕을 배신해도 왕은 백성을 못 버리는 법이여.” 할머니의 말이 귓가에 새롭게 맴돌았습니다. 신하를 잃어가던 할머니는 시골에 초라한 작은 왕국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 연락처는 어떻게…….” 눈물을 훔치던 엄마가 물으셨습니다. “119 사람들이 옷을 뒤지더니 이걸 꺼내주데요.” 할머니가 내민 헝겊봉지 속에서 통장 두개가 나왔습니다. 아빠는 통장을 열어보았습니다. 언니와 내가 태어난 날 우리 이름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떨어져서 말없이 지켜보던 언니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릴 때 할머니가 눈을 뜨셨습니다. “어머니!” 온 식구가 할머니의 손을 잡았습니다. 할머니는 주위를 두리번거립니다. “은비는?” 할머니는 자기를 미워하는 언니를 찾으며 웃으셨습니다. 모두들 우는데 할머니만 웃고 있었습니다.
돈을 벌까? 아니면 공부를 할까? 그것이 문제로다 지난 16일(수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아이들에게 예치금 일자(12.14∼16)를 다시 상기시켜 주려는 의도에서 수시모집에 합격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전화를 건 적이 있었다. 확인결과, 아이들 대부분이 예치금을 납부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연락이 되지 않는 일부 아이들에게는 ‘기간 내 꼭 예치금을 납부하라’는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등록 여부를 확인하고 난 뒤, 자투리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아이들 대부분은 특별히 하는 일이 없었으며 일부 아이들만이 자격증 공부와 대학과 관련된 공부를 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리고 용돈과 등록금을 벌 요량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이들 모두에게 자투리 시간을 잘 활용하라는 말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퇴근 무렵,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일부 아이들이 비번을 이용해 학교를 찾아왔다. 사복을 입은 아이들의 모습이 왠지 낯설어 보였지만 성숙미가 묻어나왔다. 반가움에 악수를 하고 난 뒤, 아이들을 데리고 휴게실로 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아이들은 아르바이트하면서 느낀 점과 어떤 일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학창시절 공부하기 싫다고 늘 투정을 부리곤 했던 한 여학생은 지금 하는 일이 힘든지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고충을 먼저 이야기하였다. “선생님, 공부보다 쉬운 것은 없는 것 같아요.” 어떤 아이는 열심히 일한 만큼 보수가 너무 적다며 다른 일자리를 알아볼 생각이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공부만 하고 육체적인 노동에 길들여지지 않은 아이들이기에 그 힘듦이 더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무엇인가를 해보겠다는 아이들의 생각이 대견스러웠다. 아이들은 학창시절 추억을 떠올리며 졸업을 못내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그날 밤. 한 아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 아이는 수시모집 1차에 합격하여 입시에 대한 부담을 일찌감치 떨쳐버린 상태였다. 전화에서 그 아이는 간단한 안부내용과 더불어 전화를 건 목적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몇 번이고 일자리를 구해보려고 했으나 헛수고를 했다며 담임인 내게 일자리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건강하시죠? 죄송하지만 일자리 좀 구해 주세요. 아무 일이나 관계없습니다.” 통화를 끝낸 뒤, 녀석의 사정이 딱해 평소 친분이 있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일자리 구하기가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특히 졸업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선뜻 일자리를 주려고 하는 곳은 거의 없었다. 대학 방학과 더불어 입시가 끝난 중․고등학교 3학년 아이들로 일자리 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설령 일자리를 구했다고 할지라도 고작 해야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순직 일(배달, 서빙, 판매 등)뿐이다. 또한, 아이들 대부분이 받는 시급 또한 노동부가 고시한 최저 임금(시급 : 4,000원, 일급 : 32,000원, 월급 주40시간제 : 836,000원, 주44시간제 : 904,000원)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간신히 피자집을 운영하는 친구에게 녀석을 소개해 주었다. 피자 배달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녀석이 그 일을 잘해낼 지가 관건이었다. 아무튼, 녀석이 피자 배달을 시작한 지일주일이 지났다. 문득 녀석의 근황이 궁금하여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친구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근무를 잘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녀석이 이틀 일하고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에서, 녀석은 계속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공부보다 쉬운 것은 없다며 남은 방학동안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하였다. 내심 녀석이 어려운 일을 해봄으로써 돈 버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를 느껴보기를 바랬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 돈을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녀석이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교장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희가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었어요. 교장 선생님께 드리려고요." 우리 학교 희망반, 소망반 학생들이 교장실을 찾았다. 필자는 크리스마스 카드 두 장을 받았다. 색도화지에 겉표지에는 눈꽃 모양이 붙어 있고 'LOVE'글자와 산타 모자,크리스마스를 나타내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고맙다, 애들아! 너희도 메리크리스마스다!" 희망반, 소망반은 우리 학교 특수학급 명칭이다. 과연 편지 속에는 무슨 내용이 있을까?대표라고 신분을 밝힌 여학생은 10여 줄 이상 길게 썼다. 특수학급 학생들에게 비친교장의 모습은 어떠할까? 주 내용을 보니 '저희 학교를 잘 이끌어 주셔서 감사하다' '더 좋은 학교를 만들어 달라' '인사를 잘 받아 주시고 농담도 잘 해 주시고 너무 재미있다' ' 건강하시고 안전 운전하세요' 등이다. 또 다른 학생도 자기 신분을 밝히고 '몸 건강' 과 '안전 운전'을 당부하였다. 특수반 학생들에게도 건강의 중요성과 교통사고의 위험이 각인 되었나 보다. 교장과 학생들과의 만남, 그렇게 많지 않다. 애국조회도 없어지고 하여 기껏 만나는 것이 복도에서의 지나침, 급식실에서의 만남 정도다. 그 짧은 시간이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교장을 평가(?)하고 이미지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교장은 그들로부터 혜택(?)을 받았다. 교장을 보면 언제 어디서든지 꼬박꼬박 인사를 하고, 요리 실습을 하면 시식 기회도 주고. 그런데 교장은? 베푼 것이 별로 없다. 요즘 많은 학교에 특수학급이 설치되어 있다. 지금은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보는 시선은 굴곡되어 있다. 선진국이 되려면 그것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비장애인이나 장애인이나 모두 다 소중한 존재이다. 모두 어울려 함께 잘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번 교원문학상에 응모한 응모자수는 시 부문 91명, 동시 부문 37명으로 전체 교원수에 비하면 지극히 소수라 하겠다. 어쩌면 교육현장에 있는 교사들조차도 문학에 대한 관심도가 점차 옅어지는 게 아닌가 하고 염려되었다. 그렇지만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교사들의 작품이라 기대가 컸다. 전체적으로 작품 수준이 골랐으나 고르다는 그 점이 바로 문제점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개성적이지 못하고 평균적이라는 뜻으로, 문학은 ‘개성’에 많은 점수를 주지 ‘평균’에 많은 점수를 주진 않는다. 교실현장을 평면적으로 노래한 시, 여행지 풍경을 일차원적으로 묘사한 시, 감상적 추억담을 나열한 시, 일상을 정리한 일기풍의 시,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 등과 같은 뻔한 교훈시, ‘삶의 향기’ 같은 상식적 기도시 등은 이번 심사를 통해 숙고해봐야 할 문제점이라고 생각되었다. 시 부문 당선작 ‘풍경의 살해(권영준)’는 군계일학이라고 할 정도로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그의 시에 의하면 카메라로 풍경을 찍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의 풍경을 살해한다는 것이다. 대부분 카메라로 찍은 풍경을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는 풍경의 존재가 살해된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어느 공원에 가더라도 풍경의 목을 치는 자들이 있다/ 찰칵, 찰칵, 살아 숨쉬는 풍경의 숨통을 끊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나아가 ‘사람들이 풍경을 도려내어 기억에 끼운다’고 한다. 이 얼마나 예리한 시적 사유인가. 그의 다른 응모작 또한 언어의 숨결에 힘이 있고 상상력이 뛰어났다. 아직 충분히 소화되지 않거나 숙성되지 않은 거친 부분이 있다는 점이 큰 단점이지만, 이번 수상을 계기로 교단시단에만 머물지 말고 더 넓은 한국시단으로 진출하길 바란다. 가작 ‘자전거(박인경)’은 완결미가 뛰어난 작품이었으나 응모한 다른 작품들이 지나치게 설명적이고 산문적인 것이 큰 흠이었으며, 가작 ‘엄마의 굽은 등’은 ‘엄마는/ 굽은 등이 더 굽어져/ 둥근 알을 닮아가신다’라는 부분에서 큰 개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영천사, 한낮(김춘기)’은 2009년도 가작 당선자의 작품이라 당선작이 될 수 없다면 가작에서도 제외시키는 게 마땅하다고 여겼으며, ‘겨울 서울역에서’ ‘구두의 잠든 시간’ ‘오늘도 족발 사러 간다’ ‘매화’ 등도 최종적으로 검토된 작품임을 밝힌다. 그리고 ‘우공(牛公)의 한 생’은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다고/ 먼 길이었다고/ 아버지가 목덜미에 손을 얹자/ 큰 눈에서 별똥별이 떨어진다’ 부분이 김종삼의 시 ‘묵화’와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동시 부문에서는 ‘내게 이런 우체통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김원정)’가 동심의 진정성을 시로 승화시키는 데에 크게 성공했다는 점에서, ‘담쟁이넝쿨(이경순)’이 완결성이 뛰어나다는 점에서 최종적으로 겨루었으나 ‘내게 이런 우체통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가 보다 더 동심의 진정성에 가닿아 있다는 점에서 당선작으로 정했다. 가작 ‘지게(조재형)’는 내용이 교훈적이고 산문적으로 풀어져 있다는 점이 아쉬웠으며, ‘햇빛의 말’ ‘누에학교’ ‘공부’ 등도 최종적으로 거론되었다는 점을 밝힌다. 동시 응모자들은 동시는 동(童)과 시(詩)의 결합체라는 점을 숙고해주길 바란다.
당선 소식을 받았다. 일단 기쁨보다 부끄러움이 앞섰다. 그 무언지 모를 이유로 나는 며칠 동안 이 소식을 입안에 물고 우물거렸다. 학교에 당선 공문이 도착했다. 당선소감을 써 달라는 것인데, 무엇을 써야할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시 한편 쓰는 것보다 소감을 쓰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닐 때가 있었다. 내면에 우울한 무기력이 창궐하여 시간을 생매장시키던 때가 있었다. 나는 반생을 그렇게 살았다. 산 자의 몸에서 나는 腐臭가 사라진 자의 소멸보다 지독하다고 느꼈을 때, 나는 썩어도 거름이 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 때 바싹 마른 나뭇잎 하나가 내 가슴을 건드리며 날아갔고, 나는 살고 싶었다. 火口의 재처럼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간절히 詩를 찾았고 시의 젖가슴을 더듬었다. 몸속의 죽은 꿈들에 새살이 돋기 시작하자 나의 별에도 따스한 봄이 몰려왔다. 생은 지독하게 허무했고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내일이 나를 담보해 주지 않을지언정, 오늘 나는 살아 눈 뜬 자가 되고 싶다. 한국교육신문사에 고마움을 전한다.
기억될만한 풍경이 스쳐 지난 후 다시 고개를 돌려 쳐다보면 풍경은 이미 창백하게 숨져 있다 갓 피어난 저 꽃도 지금 스쳐 지나가는 저 사람도 좀 전의 그 꽃이 아니다 좀 전의 그 사람이 아니다 어느 공원에 가더라도 풍경의 목을 치는 자들이 있다 찰칵, 찰칵, 살아 숨쉬는 풍경의 숨통을 끊고 있다 아름다운 꽃과 단풍든 가을산, 화사한 웨딩드레스의 행복한 웃음의 육질이 예리한 시선의 렌즈에 떠져 액자에 걸리고 있다 사람들은 풍경을 도려내어 기억에 끼우고 풍경은 사물의 표정을 쉴새없이 베어 추억에 걸어둔다 이것이 시간이라 불리는 슬픈 통념임을 아는 자들은 풍경의 살해에 함부로 동참하지 않는다 시시각각 풍경은 새로 태어나 이미 죽은 꽃잎과 사랑을 속삭이며 시선의 칼날이 닿지 않는 먼 미래에 광속도로 이관된다 한때 삶과 죽음을 반복하며 쉼 없이 타오르던 풍경들아, 창백한 시간이 날(刀)이 너의 마지막 웃음을 베고 조용히 지나갈 때까지 아름다운 꽃잎 앞에 섣불리 무릎을 꿇지 마라 너는 다시는, 지금 스쳐 지나는 이 풍경을 보지 못한다
그 날 아버지께서는 깻단을 지고 마당에 들어서셨으며 어머니는 그것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들깨 향기가 배어있는 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글짓기에서 상을 받은 초등학교 3학년 어느 저녁의 풍경입니다. 학교 가는 길은 멀었지만 아이들은 개미굴보다 더 많은 샛길을 만들어내었고, 모롱이 모롱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달아두었습니다. 청보리밭 둑을 지나면서는 풀피리를 불었고, 아무 곳에서나 신발을 벗어 던지기만 하면 바로 뛰어들 수 있는 개울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소나무가 많은 숲길 그늘엔 보물인양 공깃돌을 파묻어 두었으며 홍시가 하늘을 메울 만큼 가득한 동네도 지나다녔습니다. 그리고 그 샛길들이 모여드는 끝에 초등학교가 있었습니다. 학교에 들어서면 운동장 한켠에서 넉넉한 품으로 우리를 맞아주던 아름드리 노란 은행나무는 아이들에게 또 하나의 엄마였고 이야기가 모여드는 우체통이었습니다. 묻어두기엔 아까워 하나 둘씩 끄집어낸 유년의 그림들이 어쭙잖게 시의 모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름다운 유년의 뜰을 마련해 주신 부모님, 나의 글을 읽고 함께 즐거워해 준 가족, 동심의 세계로 길을 내어주고 있는 우리 반 아이들, 늘 힘이 되어주시는 동료 선.후배 선생님들, 부족한 점 많은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주말엔 샛길을 되짚어 가며 모교의 은행나무를 찾아가보려 합니다. 오랫동안 못 다한 얘기들을 실컷 나누겠습니다. 문학상을 받았단 자랑은 끝머리에 수줍은 듯 짧게 할거구요.
내게 이런 우체통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시골에서 올라온 보따리에 딸려온 달팽이 한 마리 누군가 가지고 놀다 날개 부서진 잠자리 한 마리 냇가에서 잡아 와 잊어버린 다슬기들 그 우체통에만 넣으면 다시 제 곳으로 갈 수 있는 내게 그런 우체통 하나만 있었으면 참 좋겠다. 만약에 우표값 만큼만 데려갈 수 있다면 나는 얼마만큼의 기도를 올리면 될까?
MBC대하드라마 ‘선덕여왕’이 12월 22일 62부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선덕여왕’은 평균 시청률로는 2위를 차지했지만, 방송평론가 · 연출가 등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올해 최고의 드라마였다. 40%대 시청률을 기록하며 가히 국민드라마로 군림했다 해도 시비할 사람이 없을 듯하다. 실제로 지난 10월 마지막 일요일 ‘선덕여왕’ 세트장이 있는 경주신라밀레니엄파크를 갔을 때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세트장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귀가하려고 시내를 벗어나 고속도로로 접어드는 데만 1시간도 더 기다려야 할 만큼 ‘고통’을 안겨준 ‘선덕여왕’이었던 것이다. 5월 25일 첫 방송부터 끝까지 한 번도 빼지 않고 드라마를 지켜본 나로서는 먼저 그 이전의 대하사극들을 떠올리게 된다. ‘선덕여왕’은 ‘자명고’ · ‘천추태후’ · ‘바람의 나라’ 등 최근 1년 사이 전파를 탔던 대하사극에 비해 진일보한 드라마라 할만하다. 그들 대하사극이 부진했던 것은 새로운 트렌드 개발 실패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많다. 잠자던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운 ‘주몽’(2006)이나 ‘대조영’(2007)과 ‘태왕사신기’(2007) 들에 이어 ‘이산’(2008) 등이 시청률 30%를 웃도는 등 성공했지만, 올해의 경우 그게 없어졌다는 것이다. 대하사극 침체기류를 한방에 날려버린 ‘선덕여왕’이 된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여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자명고’나 ‘천추태후’가 외면받았던 것에 비해 같은 설정인데도 ‘선덕여왕’만이 국민드라마 반열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뭔가 안맞는 것 같지만, 거기에는 차이점이 엄존한다. 우선 미실역의 고현정이 너무 큰 인기요인이 되었다. 악녀가 분명한 미실을 고현정은 악녀같지 않게 연기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상당부분 작가의 몫에 해당하는 캐릭터 형상화에 고현정의 표정, 몸짓, 대사 등 연기가 금상첨화의 결과를 가져온 셈이라고나 할까. 스토리 전개의 기교도 인기몰이에 한몫했다. 극본(김영헌 · 박상연)과 연출(박홍균 · 김근홍)의 공동 힘이겠지만, 시청자들로 하여금 매회 궁금증이나 애태움 같은 정서를 갖게 하여 드라마에 대한 ‘충성도’를 이끌어낸 것. ‘자명고’나 ‘천추태후’에서 보듯 그것이 작가나 연출자 누구나 할 수 있는 테크닉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요인은 기존 드라마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신라와 최초의 여왕 이야기일 것 같다. 우선, 이른바 삼국통일로 영토 축소와 자주성 훼손을 가져온 신라의 저력에 대한 호기심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기구한 운명에 빠진 덕만(이요원)이 선덕여왕에 오르고, 이후의 고군분투기가 경제난 속 각박해진 시청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안겨줬을 법하다. 그러나 역사와 허구의 경계를 허물어뜨려 혼란에 빠지게 한 점, 명확한 선악 구분이 촌스럽다하더라도 전형적 악녀 미실을 좋은 인상으로 남게 한 일종의 최면효과 등은 되새겨볼 문제이다. 역사에 가정이 있을 수 없듯 아무리 현대적 재해석을 한다하더라도 악인은 악인일 뿐이니까. 스펙터클해야 할 대하사극이라는 점에서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오류도 짚고 넘어갈 문제다. 가령 60부(12월 15일 방송)에서 나라의 명운이 걸린 쿠테타 주모자를 체포하러 가는데 고작 7명의 장졸만 출동하는 걸 예로 들 수 있다. 제61,62부 거의 대부분을 할애한 비담(김남길)의 난 묘사도 아쉽다. 결국 정신적 불구자인 비담에 대한 인기가 치솟자 선덕여왕과의 로맨스를 너무 작위적이면서도 집요하게 전개한 것은 아닐까? 그렇더라도 ‘선덕여왕’은 대하사극의 진일보한 면모를 보인 ‘명품’ 정치드라마임에 틀림없다.
어제 동료 교장의 전화를 받고수원미술전시관(수원시 송죽동 소재)를 찾았다. 뭔지도 모르고 동료 교장의 문화에의 초대가 고마워 방문하니 공식 타이틀이 '제27회 수원일요화가회 회원전'이다. 맹기호 교장이 화가로서 활동하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모임의 회장인 줄은 몰랐다. 20여 명의 회원 50여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수원교육장님을 비롯해 교직에 있는 분들은 낯이 익는다. 행정실에 근무하는 초교 여자 동기도 만났다. 정년퇴직하신 분들도 보인다. "올해가 27회니 이런 짓(?)을 27년간이나 했습니다." 회장이 한 인사말이다. 농담 속에 뼈가 있다. 비하하는 말로 들리지 않고 27년이라는 역사에 초점이 맞춰진다. 1983년에 창립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아마추어들이 모여 역량을 쌓아 드디어 전문가들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맹 회장(영덕중 교장)은 말한다. "작업을 통해 독자적인 개성을 발견하고 표출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라고. "우리들의 창작 활동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위한 노력이지만 그 결과로 주변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하여 문화적 확산을 도모하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필자도 예술을 좋아한다. 음악회는 일부러 기회를 만들어 간다. 연극은 모처럼 만에 찾아온기회를 잡는다. 그러나 미술은 좀처럼 대하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선입관 때문일까? 선입관을 깨뜨려야 접근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제27회 수원일요화가회 회원전은 12월 28일까지 수원미술전시관 제1관에서 열린다. 연말 송년회 모임, 술로 흥청대기보다는 차분히 문화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어떨까? 수원시민들의 행복한문화적 향유! 문화시민으로서 바람직한 일이다.
현장체험학습이 학급단위는 물론 개인에게까지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도 체험학습을 떠난 학생들이 있다. 중1,2학년 학력평가가 실시된 날의 이야기이다. 1주일동안 체험학습을 신청하고 가족들과 외국에 나간 학생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그 학생은 무단결석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한다. 2-3일간 연속으로 체험학습을 낸 학생도 있었지만 역시 무단결석이라고 한다. 학력평가가 실시되는 날에는 어떤 형태의 체험학습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체험학습을 가야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었다. 아침일찍 경찰서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다. 일제고사 반대 1인시위를 교문앞에서 할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었다는 것이다. 잠시전에 교문앞에 들렀지만 시위자가 없었다고 한다. 다시한번 살펴봐 달라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가장 많이 등교하는 시간에 교문앞으로 나가봤다. 중년의 남자가 혼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그는 '일제고사보다 더 좋은것'이라는 문구를 몸의 앞 뒤에 걸치고 있다. 일제고사보다 더 좋은 체험학습을 가야 한다는 문구를 본 것 같다. 그런데 그의 행동에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학생들에게 체험학습을 권고하는 글이 적힌 전단지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컴퓨터용 싸인펜을 한 자루씩 나누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학생들에게 물었다. 컴퓨터용 싸인펜인지.... 그렇다고 한다. 이 모습을 지켜 보면서 그에게 가까이 갔다.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선생님 이냐고도 물었다. 그는 선생님은 아니라고 한다. 어디 사느냐고 물었다. 시민단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또 이 지역에 사는 주민이라고 한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느냐고 물었다. 일제고사 반대를 위해 1인시위 중이라고 한다. 여기 말고도 서울시내 300여개 학교에서 회원들이 1인 시위를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경찰서에서 전화가 걸려왔었다고 했다. 그러니 이제 그만하고 돌아가라고 했다.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전단지와 싸인펜을 모두 나누어주어야 한다고 한다.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어서 그대로 돌아섰다. 그리고 교무실로 들어와서 시험준비를 했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그는 왜 거기에 서서 1인 시위를 하는 걸까. 그것은 그래도 어느정도 이해가는 부분들이 있다. 그런데 의문점이 있다. 그는 왜 컴퓨터용 싸인펜을 나누어 주고 있는 것일까. 일제고사를 거부한다면 도리어 학생들이 준비해온 싸인펜을 내 놓으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싸인펜을 나누어 주다니.... 시험을 보지 말라고 하면서 싸인펜을 주는 그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계속해서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그 순간, 혹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싸인펜이 컴퓨터용이 아니고 일반 싸인펜이라면... 학생들이 표기한 답안이 채점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방송실로 달려갔다. 이미 1교시 국어 듣기평가가 진행되고 있었다. 듣기평가 끝나고 오늘 교문에서 싸인펜 받은 학생들은 싸인펜이 컴퓨터용인지 확인하고 사용하라는 방송을 부탁했다. 그대로 방송이 나갔다. 그러나 싸인펜이 컴퓨터용이 아니라고 대답한 학생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왜 그랬을까. 최소한의 기본은 생각하고 한 행동이었을까. 지금까지도 그의 행동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시험을 반대한다면서 싸인펜을 왜 나누어준 것일까. 이 글을 읽는 독자여러분들은 이해가 가는지 모르겠다. 헷갈리는 일제고사 거부 1인 시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