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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자 지방 신문 교육관련 소식이 교육자의 고개를 떨구게 만든다. 기사 큰 제목이 "수능 끝난 高3 교실 ‘놀자판’ 파행수업 여전"이다. 소제목으로는"'6교시 수업 의무화’ 말 뿐 TV 보거나 잡담하다 귀가" , "교사들 '통제 안 돼' 손 놔… 일부 학교 '단축수업 고려'"다. 기사 내용을 보니 수학능력시험이 끝난 경기지역 상당수 고3 교실의 ‘시간때우기식’ 파행수업이 올해도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아이들은 아침 일찍 학교에 등교하지만 기껏해야 영화를 보거나 잡담만 하다가 귀가 하고, 교사들도 아이들 지도가 어렵다며 수업 시간에도 교실을 비우는 등 신경을 쓰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기자 3명이 출동, 현장 고교를 방문하여 관찰한 것을 그대로 기사화하였는데 3개교의 학교 실명이 그대로 노출되어 학교 명예가 많이 실추되었다. 이에 대한 도 장학관의 대안 제시도 나와 있지만 현장 여건에서는 어려운 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고입시험을 치룬 중학교도 그 정도보다야 덜하지만 거의 마찬가지다.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는 3학년을 위해 특별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로맨틱 크리스마스 이브 콘서트' 원래는 24일(금) 오후 7시 30분 공연인데 우리 학교 3학년을 위해 23일(목) 11시에 공연을 하는 것이다. 장안구민회관 담당자와 연결이 되어 서호중학교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든 것이다. 입장료 10,000원은 학교 단체여서 50% 할인 받고, 학교에서 3,500원 지원하여 주니 학생들은 1,500원만 부담하면 된다. 고전음악 연주회에 이 정도면 저렴한 가격이다. 연주 단체는 수원음악진흥원 현악 5중주팀이다. 공연 시기와 콘서트 내용이 딱 맞는다. 필자는 졸업을 앞둔 학생들에게 중학교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주고 싶다. 성탄절을 앞두고 음악회 관람은 더욱 뜻이 깊다. 어린 시절 음악적 감동이 삶을 풍요롭게 하고 장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 콘서트 후에 귀에 익은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귀가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오늘 연주 곡목을 보니, 편곡한 크리스마스 캐롤 메들리 2곡, 영화음악 3곡, 탱고, 모짜르트 곡, 바하와 헨델 곡, 차이코프스키의 왈츠 등 귀에 익은 곡이 대부분이다. 연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연주자는 작곡가와 연주곡해설이 곁들인다. 그 뿐 아니다.영화 줄거리도 이야기 하고현악 5중주 악기 설명도 덧붙인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교육이다. 게다가 연주곡에 맞는 화면이 뒷배경을채운다. 귀만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눈도 즐겁게 한다. 기억에 오래 남게 하는 방법이다. 세심하게 신경을 써 준 장안구민회관 관계자가 고맙기만 하다. 연주 후, 시간 여유가 있어 필자가 마이크를 잡았다.방금 연주된 모짜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하트 뮤직'을 입으로 연주하니 학생들이 박수가 나온다. 지금 우리나라의 유명한 음악가들은 중학교 시절, 등하교 하면서 베토벤의 교향곡 1번부터 9번까지 입으로 흥얼거려 오늘에 이르렀다고 알려준다. 수원음악진흥원 최혜영 원장은 말한다. 중학교 때 음악회 관람이 인연이 되어 음악을 전공하고 지금의 음악가가 되었다고. 이재린 장안구민회관 관장은 클래식 콘서트가 학생들의 정서 교육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음악의 힘은 이렇게위대한 것이다. 필자의 경우, 대학 방송실에서 클래식 음악을 가까이 하고 교단에 첫발을 디딘 첫 해에 누님과 함께 번스타인 지휘 뉴욕 필하모니의 내한공연을세종문화회관에서 본 적이 있다. 당시 거금(?)을 들여 관람한 것이다. 그러나 수준 높은 음악을접하니 돈이 아깝지 않았다. 오늘 콘서트, 중학생 대상이라고 대충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5명이 호흡을 맞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역력히 보인다. 해설도 중학생 눈높이에 맞는다. 이게 바로 연주자의 바른 자세다. 참교육자의 자세와도 같다. 수능 이후 프로그램, 노력하여 찾거나 학교 자체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지역의 인적자원과 유대관계를 맺고 물적 자원을발굴 활용하면언론에서 지적한 등교 후 무의미한 시간은 없앨 수 있다. 학교의 교장과 교감, 3학년부장, 3학년 담임들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졸업할 때까지 그들에게 정성을 쏟아야 한다. 그게 학교가할 일이다.
엄마가 주신 만 원짜리 돈을 만지작거리며 선생님께 다가섭니다. “선생님, 날갈이 해도 돼요?” “시간 없다. 그냥 신어라.” 나는 집에서 가져온 스케이트를 든 채 쭈뼛거립니다. 날갈이를 해야 잘 나가는데 그냥 신으라니 짜증이 납니다. 긴 파마머리를 뒤로 묶은 선생님께서는 친구들이 스케이트 신는 걸 도와줍니다. 그냥 내 스케이트를 신고 얼음 위에 서니 자꾸만 엉뚱한 곳으로 미끄러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안전모 타고 갈까?” “동민아, 그거 재밌겠는데.” 준혁이가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세워 흔들더니 안전모를 벗습니다. 나를 따라 안전모를 엉덩이에 깔고 앉습니다. 쭉 미끄러져 나갑니다. 빙글 돌기도 하고 기우뚱하며 아이들과 부딪히려고도 합니다. 스케이트 타는 것과는 색다른 아슬아슬한 맛이 있지요. 선생님께서 호루라기를 불어 우리를 부릅니다. 준혁이는 재빨리 안전모를 머리에 쓰더니 스케이트를 타고 갑니다. 나는 안전모를 깔고 앉아 두 발로 중심을 잡고 선생님 앞까지 미끄러져 갑니다. “동민아, 너 지금…….” 선생님은 어이없다는 듯 말을 잊지 못합니다. “기분 짱이예요!” “뭐?” 이상하게 선생님의 얼굴이 굳어집니다. 그러고는 아직도 내가 깔고 앉은 안전모를 곁눈질합니다. 그동안 선생님이 말없이 뭔가 유심히 볼 때는 날벼락이 떨어지곤 했었지요. 나는 얼른 안전모를 들고 일어섭니다. 선생님께 더 대꾸는 못하고 손으로 뒤통수를 긁적입니다. 스케이트나 안전모나 타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요? 규칙은 다시 정하면 되는 거고요. 꼭 안전모를 쓰라고만 할 필요는 없잖아요. 왜 내가 잘못한 건가요? 나는 준혁이와 가끔 발차기 놀이를 즐깁니다. 마주보고 한 걸음 정도 떨어져서 상대편 다리를 얼른 차고 피하거나 발바닥을 맞대서 공격을 막는 놀이지요. 스케이트 강습에서 돌아온 다음 날 2교시 뒤 쉬는 시간입니다. 선생님이 교실을 비운 틈에 내가 준혁이에게 눈짓을 보내며, 교실 뒤로 갑니다. 준혁이가 얼른 따라옵니다. 내가 창 쪽을 바라보고 자세를 잡자, 준혁이는 나와 마주보고 섭니다. “휙. 차악.” “파박. 척.” 발바닥과 발바닥이 팍팍 맞부딪히는 게 마치 장단을 맞추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먼저 다리 공격을 시도합니다. “휙, 어엇.” 준혁이가 잽싸게 피하는 바람에 그만 내가 헛발질을 합니다. 벗겨진 내 실내화가 붕 뜹니다. 이런! 공교롭게도 열린 창문 밖으로 날아갑니다. 창가로 달려가 고개를 창문 사이로 쭈욱 내밀어 봅니다. “어떻게 하지? 실내화가 …….” 장식 동그라미가 나를 곤란하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우리 학교의 건물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게 이 동그라미입니다. 창문 네 개를 에워싼 커다란 장식 동그라미가 2층 교실마다 두 개씩 있어요. 이 동그라미는 벽돌 하나만큼 벽에서 튀어나와 있지요. 하필 여기에 실내화가 딱 걸릴 게 뭐지요? 준혁이도 창까지 와서 내 실내화를 내려다봅니다. “비로 걸어 올리자.” 준혁이가 청소함에서 비를 꺼내옵니다. 거꾸로 잡은 비를 쭉 내밀어 보지만 실내화에 닿지 않습니다. “창문을 타고 내려가 볼까?” 내 말에 준혁이가 깜짝 놀라 말립니다. “안돼. 큰일 나.” 선생님께서 커다란 난화분에 꽂혀 있던 지지대를 뽑아 둔 것이 생각납니다. 그걸로 칼싸움하다가 걸린 적도 있습니다. 무슨 구경났다고 아이들이 몰려듭니다. 그들을 헤치며 교실 앞으로 간 나는 모서리 구석에 세워져 있는 지지대 하나를 들고 옵니다. 왼손은 창틀을 잡고 배를 걸친 채 허리를 내밀며 오른손으로 한 쪽 끝을 잡은 지지대를 뻗칩니다. 좀 어질어질 합니다. 그 끝이 실내화에 닿을락 말락 합니다. “끌어 올리려 하지 말고 아래로 떨어뜨려.” 옆에서 준혁이가 못 거들어 안달입니다. 다시 고개를 창밖으로 내미는 순간 누군가 내 뒷덜미를 잡아당깁니다. “뭐야? 어떤 놈이야?” 나는 잡힌 목을 흔들며, 소리를 꽥 지릅니다. “나다.” 선생님의 낮고 힘을 준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엇, 선생니~임!” 놀란 내가 고개를 휙 돌리는 바람에 잡혔던 목덜미가 선생님의 손아귀에서 풀렸지만 얼얼합니다. “뭐하는 거야, 지금?” 화가 잔뜩 난 목소리입니다. “실내화가 저기…….” 고개를 빼서 밖을 보고 난 선생님은 내 어깨 양쪽을 꽉 잡습니다. “이런 위험한 짓을 또…….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지면 실내화도 못 신어.” “안 위험한데…….” 어깨를 잡은 손을 두어 차례 흔들다 놓은 선생님께선 내 눈을 똑바로 쏘아봅니다. 나는 목을 움츠리며 또 뒤통수를 긁습니다. 선생님은 참 이상합니다. 내가 몸을 창밖으로 내민다고 떨어지는 건가요? 나는 나대로 조심한다구요. 괜시리 안전모 탈 때처럼 걱정만 많아서 꾸중합니다. 너무 억울합니다. 대체 왜 내가 잘못한 건가요? 재량 휴업일과 토요 휴업일이 이어져 3일 내리 쉰 뒤에 등교한 날입니다. 교실에 들어서니 페인트 냄새가 가득합니다. 맨 먼저 와서 교실에 첫발을 딛는 순간에 나는 내가 잘못 들어온 줄 알았어요. 온 벽이 밝은 회색으로 깨끗이 칠해져 있어 낯선 느낌이 들었거든요. 다시 나갔다가 3학년 1반 학급 팻말을 확인하고 들어옵니다. 그때 교실에 들어 온 준혁이도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재미있는 일이 있을만하면 때맞춰 나타나는 준혁이가 맘에 듭니다. “벽에 축구공 때리기 할까?” 내 제안에 준혁이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앞뒤로 흔듭니다. “오예. 좋은 생각이얌!” 나는 축구공을 재빨리 꺼내옵니다. 칠판 아래쪽 깨끗한 벽이 나를 부르는 것 같습니다. 앞에는 책상도 없으니 공차기는 제격입니다. “팍!” “퍽! 팍, 퍽!” 나는 준혁이와 죽이 잘 맞아 번갈아 공을 차니 흥이 절로 납니다. 축구공도 재미있는지 퍽팍 소리를 내며 벽에 무늬를 만들어 놓습니다. 이건 상상도 못한 재미입니다. ‘발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란 생각이 떠올라 혼자 씩 웃습니다. 친구들이 들어오면서 가방을 던진 채 달려듭니다. 축구공이 네 개로 늘어납니다. 열 명 남짓 몰려들어 겨루듯이 하는 공차기는 더욱 신바람이 납니다. “좀 더 빨리!” “팍, 팍, 파팍!” 온통 벽엔 축구공 무늬가 빼곡합니다. 공이 여러 개니 여기저기서 날아와 정신이 어지럽습니다. ‘우와! 넘 재밌다. 난 역시 천재야.’ 그 순간 내가 힘껏 찬 공이 칠판을 맞고 뒤쪽으로 튕깁니다. 공에 맞았는지 ‘아야.’ 하는 비명 소리도 들립니다. 그 북새통에 자리에 앉아 자습하던 여자 아이들이 왁자지껄 일어섭니다. 하지만 그런데 신경 쓸 내가 아니지요. 누가 뒤에서 던진 공이 데구르르 공이 굴러가는데 아무도 안 차네요. “뭐 해. 공 굴러 가잖아.” 내가 잡으려는 순간에 불쑥 나타난 발이 그 공을 밟아 세웁니다. 빨강 꽃장식이 두 개 달린 은색 슬리퍼가 나를 얼어붙게 합니다. “엉? 선생니~임.” 힐끗 보니 준혁이도 어느 새 한쪽으로 비켜서서 슬그머니 눈꺼플을 내립니다. 공을 찼던 친구들이 고개를 숙이고 교실 한쪽에 몰려 서 있습니다. 선생님은 축구공 무늬가 어지럽게 찍힌 벽을 바라보며 한숨을 쉽니다. 그리곤 말없이 우리들을 둘러봅니다. 이럴 때가 나는 제일 힘듭니다. 차라리 한 대 맞았으면 속이 후련할 것 같습니다. “매를 맞을게요.” “…….” 이렇게 나서는 내가 한심한지 선생님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토끼뜀 10바퀴…….” 준혁이 말에 또 한번 한숨을 쉬며 창 밖으로 눈을 돌립니다. “한 달 간 청소할게요.” 누군가 한 말에 나는 깜짝 놀랐지만 선생님은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다시 보니 벽에 그려진 축구공 자국이 지저분하네요. 페인트칠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베란다에서 동생하고 장난치며 찍은 신발자국을 닦던 엄마 모습이 떠오릅니다. 페인트 위에 코팅하지 않았으면 닦아지지도 않았을 거라며 잔소리를 하였지요. 나는 슬그머니 뒤에 있는 청소함으로 갑니다. 청소할 때 쓰던 세제와 양동이, 걸레를 꺼내옵니다. 엄마가 한 것처럼 세제를 벽에 뿌리고 걸레로 빡빡 문질러 닦습니다. 축구공 무늬가 조금씩 지워집니다. 준혁이가 슬금슬금 다가와 같이 닦습니다. 다른 친구들도 하나 둘 슬그머니 끼어듭니다. 세제를 묻히지 않은 걸레를 양동이에 떠 온 물에 빨아 거듭 벽을 닦습니다. “쓱싹쓱싹.” 벽을 닦는 소리만 납니다. 우리가 그렇게 조용히 청소한 적은 여태 없습니다. 벽이 깨끗해질 즈음에 땀으로 속옷이 젖고 튕긴 물에 겉옷이 젖어 있습니다. 나는 재빨리 대걸레를 가져와 바닥의 물기도 닦습니다. 어느 새 1교시가 끝나가고, 공차기를 하지 않았던 친구들도 자기 주변 청소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뒷정리를 마치고 선생님을 보니 처음 그대로 서 계시네요. 하지만 얼굴 표정이 뭔가 달라져 있습니다. “선생님, 죄송해요.” 나는 선생님께 한 발 다가서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합니다. “뭐가?” 선생님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를 긴장시킵니다. “교실에서 벽 축구한 거요.” “왜?” 짧고 강하게 묻는 말이 내 가슴에 파고듭니다. “축구는 운동장에서 하는 걸 알면서도 안 지켰어요. 깨끗한 벽도 더렵혔어요.” “그래?” “소리도 지르고 뛰었어요.” 내가 잘못한 것이 왜 이렇게 술술 나오지요? 이제는 지난 잘못까지 떠오릅니다. 안전모 사건, 실내화 사건도 생각나며 잘못을 고백하고 싶어집니다. 이상합니다. 난 분명히 그 때는 잘못한 게 없었는데요. 이걸 다 용서 빌 자리는 아닌 것 같아 꾹 참고 있는데, 그럴수록 고개가 점점 무거워짐을 느낍니다. “축구가 그렇게 하고 싶었니?” 선생님 목소리가 뜻밖에 다정하여 움찔 놀랍니다. “예!!” 우리는 잘못한 것도 잊고 큰소리로 대답합니다. “그럼 축구를 해야지.” “지금요?” “그래.” 이게 왠일인가요? 우리 모두 어리둥절합니다. 사실이 아닌 것 같아 선생님의 눈치를 살핍니다. 체육시간에도 운동장에 나가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우리 선생님이 수학시간에 축구라니요. 그런데 정말 선생님이 축구공을 들고 교실을 나섭니다. 그제야 우리는 함성을 지르며 따라 나갑니다. 두 팀으로 나누어 신이 나서 운동장을 누빕니다. 선생님도 처음으로 우리들과 함께 운동장을 뛰며 심판을 봐 줍니다. 아까 벽 축구로 몸을 풀어서 그런지 내가 한 골을 넣기까지 합니다. 그날 이 후로 신나게 운동장을 누비는 시간을 선생님은 가끔 주셨지요. 다른 반 친구들은 그걸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모릅니다. 나도 선생님 등 뒤에서 뭐라 뭐라 하는 것보다 선생님 얼굴을 쳐다보며 웃는 일이 많아졌다고 준혁이가 그러네요. 비밀인데, 사실 나에겐 입이 두 개 있어요. 하나는 여느 사람과 같이 얼굴에 달린 입이고, 다른 하나는 뒷덜미 바로 위의 뒤통수 속에 숨겨져 있어요. 머리 속의 입이 나도 모르게 하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는 투덜대는 소리로 들리지요. 내 손이 뒤통수를 긁적일 때가 바로 그 순간이랍니다. 어쩐 일인지 요즘 빨래집게를 짚어놓은 듯 그 입이 꾹 다물려 있어요. ‘왜 내가 잘못한 건가요?’는 이젠 어디에 쓰지요?
2010 교
우리 집에 실란이 이사 온 지는 5년이 좀 넘었나 봐요. 정확히 표현하면 공원에 버려진 말라가는 실란이 가여워 주어다가 우리 집 화분에 심은 지가 그 정도 됐다는 거죠. 빈 화분에 거름흙을 섞어서 정성껏 심었습니다. 그렇지만 첫해에는 몸살을 앓는지 꽃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다음 봄에도 꽃을 피우지 않아서 이젠 그러려니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3년 째 되는 봄이었습니다. 우연히 베란다를 바라보던 나는 마치 조화처럼 올라온 3개의 꽃대에 피어난 하얀 꽃이 생소하여 깜짝 놀랐습니다. “아! 네가 꽃을 피웠구나.” 나도 모르게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수줍은 듯 약간 오므린 꽃을 보고, 또 보았습니다. 다시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아 꽃도 피웠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5년째 되는 올 봄엔 지난해보다 더 많은 20여 개의 꽃대를 올렸습니다. 봄마다 분갈이를 해 주는 나의 정성을 잊지 않았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올해에는 봄에 꽃을 피운 것도 모자랐는지 10월쯤에 또 쉴 새 없이 많은 꽃대를 올리며 꽃을 피웠습니다. ‘이게 무슨 일 일까? 좋은 일이 있으려나?’ 막연히 꽃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이 11월을 맞이했고, 그날은 18일이었습니다. 퇴근 시간이 되어갈 무렵 핸드폰이 울렸습니다. “교육신문사입니다. 선생님의 동화가 당선되어 연락드립니다.” 대화를 더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단지 이 전언만 기억이 날 뿐입니다. 버려진 실란이 저를 만나 새 삶을 시작하였듯 저는 동화를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실란이 한 해에 꽃을 두 번 피웠듯이 저도 올해 동화로 인하여 다시 태어났으니 두 번 태어난 거지요. 동화를 쓰기 시작하면서 저에게는 아주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시간을 쪼개서 쓰게 되고 동화책을 옆에 끼고 살았습니다. 아이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는 습관이 생기고 아이들이 제게 와서 하는 말들을 끝까지 들어 주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나를 격려 해준 가족, 응원 해준 동료, 소재를 안겨준 우리 반 아이들까지 다들 너무나 고맙습니다. 이제 한걸음 떼었으니 그 격려를 바탕으로 더 힘차게 나아갈 생각입니다.
‘찌릉~’ 아직 붐한 날인 줄로 아셨는지 거미가 촉수로 더듬듯 짧게 한 번만 보냈다. 무얼 핑계 삼더라도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데 곤한 잠을 깨울 새라 안쓰러워하는 엄마의 고민이 벨 소리에 역력히 묻어 있었다. 새벽잠이 없는 어머니가 일찍 전화를 넣으신 것이다. 잠 들 때까지 자식 생각하다가 밤새도록 가슴에 품고 눈 뜨면 다시 생각하는 존재가 엄만 것 같다. 이적지 살아오시며 자식들에게 기운을 다 내어 준 어머니한테 아직도 남은 게 있을까? 안 골목에 사는 고향의 누나가 들어오더니 안고 온 보자기를 거실 바닥에다 내려놓는다. 이리로 오는 차편에 어머니가 끝물 감을 부친 것이다. 벽시계의 분침이 아래로 처지며 나를 출근길로 밀어낸다. 홍시 담은 함지박을 급하게 싸느라 자꾸 주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까지 같이 쌌을 그 보자기를 나는 풀어볼 시간이 없어 그냥 나갔다. 고향집을 야트막하게 두른 돌담을 사립문까지 따라오면 키가 큰 돌감나무와 과육이 꾀죄죄한 고욤나무를 만난다. 잘아빠진 돌감이나 고욤은 씨 치레라서 늦가을에 까치밥으로나 남을 뿐 별로 실속이 없다. 타작마당에 요긴하게 새참을 하도록 건넌방 옆에 증조할아버지가 반시나무를 심었다. 납작감은 떫지 않은 감으로 동네에 퍼져 있다. 다스운 온상 속의 열매라면 속이 덜 익어 떫겠지만 이리저리 치인 납작감은 떫을 새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집 납작감은 가을을 한두 달 더 얹어 익는다. 마을 뒤에는 ‘소리못’이란 이름을 가진 저수지가 있다. 둘레를 다 돌면 해동갑한다고 못지기가 자랑하는 못이다. 여러 계곡에서 몰려온 바람은 폭과 길이가 기다란 못 위에서 회오리바람을 일구어 아랫마을로 불어댄다. 우리 집은 맨 뒷집이어서 이 못 바람을 안고 산다. 농사지을 물이 가득 실리면 저수지는 더욱 득의양양하다. 옛날 아들 많은 할머니가 딸만 낳은 며느리 앞에 유세 떨던 것처럼 못 바람은 언제나 떵떵거렸다. 산골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사정없이 수면 위를 흘기고는 뒷문 문고리를 덜그럭거리며 감나무로 몰아친다. 못 바람으로 가을이 유난히 빨리 느껴져 긴 추위 속에 껍질이 트며 납작감은 익어갔다. 납작감이 떫지 않은 연유 가운데는 우리 집 할머니도 빼놓을 수 없다. 다사스런 성미에 귀까지 먹은 할머니는 하루 종일 입으로 사신다. 손자에게 보리밥 한 톨이라도 이에 걸리면 종종거리며 담뱃대를 들고 감나무 밑에 둔 평상으로 간다. 담뱃대에 봉초를 꾹꾹 눌러 채우고는 성냥불도 붙이려 안 하고 연해 빈 입만 달싹이신다. 그러다가 할머니에게 미운털이 박힌 이모네 아이들이 사립문에 얼찐거리면 갑자기 마음이 심란해져 성냥불을 붙여 볼이 합죽해지도록 빨고 거푸 연기를 뱉어낸다. 상한 마음이 밴 연기는 납작감에 감긴다. 납작감은 할머니의 분을 삭이며 속이 부드러워졌다. 세 철을 겪어 온 납작감은 풋감 때부터 단련이 되어 군속한 환경도 잘 견뎌내는 이력이 생겼다. 비를 추적추적 맞아도 무른 속은 군소리가 없다. 못 바람에 껍질은 거칠어져도 속살은 달큼하게 익어갔다. 어머니도 그랬다. 가을이 훨씬 길었던 우리 집 납작감처럼 어머니의 시집살이도 늦가을까지 남아 된서리맞은 감과 같았다. 어머니는 딸만 둘 낳고 상처한 아버지와 처녀 결혼을 했다. 찔레꽃이 장가드는 곳에 석류꽃이 상객으로 간다는 노랫말처럼 아버지는 대를 이으려고 한 세대나 어린 어머니를 만났다. 할아버지는 생산력이 쾌해 보이는 새 며느리를 보며 흐뭇한 기분으로 긴 수염을 쓸어 내렸을 것이다. 며느리의 불룩한 배만 쳐다보고 있으면 굶어도 든든할 할아버지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누나와 할머니의 태도는 아주 달랐다. 귀가 먹은 대신에 눈이 초롱같은 할머니는 입으로 정기가 쏠렸다. 보이는 것마다 참견이다. 생전에 손때 묻었던 가재도구들이 새 엄마 손에 익숙해지는 걸 보면 누나의 어머니에 대한 미어지는 그리움은 장미 가시 같은 질투로 변했을 것이다. 누나는 어머니가 이모에게 된장 한 사발 주는 것도 할머니에게 다 일러바쳤다. 누나는 할머니를 지렛대로 사정없이 어머니를 헐뜯었다. 모진 가난이 아버지를 만난 고리였지만 친정이 여자 힘의 원천인 것 같다. 한번은 밥을 먹다가 할머니가 젓가락을 빼앗고 밥그릇을 엎은 적도 있었다. 갓 시집온 젊은 것은 바가지에 밥을 담아 먹어야 하고 여자가 젓가락질하면 본때 없어 보인다는 것이 이유였다. 내가 여남은 살 때부터 노년에 접어들던 아버지는 몸 움직이는 걸 귀찮아 하셨다. 멍석에 늘어놓은 보리가 떠내려가도 구들장을 안고 두루마기 제문을 읽으시는 아버지였다. 상노인 두 분과 집 밖을 도는 누나들, 일할 때는 남이고 먹을 때만 식구였다. 잔심부름 하나 만만하게 시킬 자리 없는 어머니는 형과 나만 바라보았다. 우리는 어머니에게 안 걸려들려고 학교를 마치면 친구 집을 맴돌다가 시간을 다 때우고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일은 시키지 않고 쌀밥만 주던 할머니가 나는 좋았다. 어머니를 나무라 주는 할머니는 우리 편이었다. 가난을 밥풀 떼먹듯 했던 외삼촌과 이모들은 양배추 속처럼 꽉꽉 껴안는 우애뿐이었다. 이모네가 우리 집 논마지기라도 얻어 부치려고 이웃에 살았던 것이다. 어머니에겐 그것도 짐이었다. 이모네 아이들이 양재기에 쌀밥을 폭폭 축내면 할머니는 궁둥이를 위아래로 들썩거리시며 심란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감나무 밑이 할머니의 해우소라면 빨래터는 어머니의 해우소이다. 속을 털어낼 곳이라곤 이모밖에 없다. 이웃에 두고도 늘 허기졌던 자매끼리 대화를 빨래터에서 속까지 헹궈 흐르는 물에 쏟아낸다. 어머니가 마음 바닥까지 훑어내면 이모는 소리가 새어 나갈까봐 빨래방망이를 더 세게 두드린다. 어머니는 빨래터에서 빨래만 빠는 것이 아니라 갑갑한 마음도 함께 치대서 훌훌 흔들었다. 할머니는 자매가 냇가에 마주 앉아 빨래하는 모습도 달갑지 않았다. 빨래 그릇 속에 쌀 봉지를 감춰 몰래 이모에게 준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어머니는 할머니로부터 늘 의심의 족쇄를 차고 살았다. 서운한 마음을 머리에 꿰고 살았지만 어머니는 누구를 탓하는 법이 없었다. 물 흐르듯 순리에 따르며 운명으로 받아들인 것이리라. 어머니의 고충은 대단한 데 있었다기보다 아무도 그 속을 알아주지 않음에 있었을지 모른다. 조석으로는 대가족으로 북적댔지만 집안일과 농사일 가운데서는 언제나 외로운 섬이었으니까. 어느덧 할머니의 노구를 닮은 어머니는 이모와 마주 앉으면 옛일을 넋두리처럼 풀어내신다. ‘두 시어른에 영감님까지 삼년상을 치르고 딸 둘을 추성시킨 데다 내가 낳은 것들까지 끈 이어 주고 나니 삭신이 다 무지러졌다.’고 일을 마치고 들어오자 아내가 홍시 보자기를 식탁 위로 들고 왔다. 어머니의 온기가 배어 있을 보자기의 매듭을 조심스레 풀고 있다. 용하게도 오디오에선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보고파진다.’는 나훈아의 노래가 흐른다. 아내는 껍질이 트고 금 간 홍시를 이리저리 돌려보다 한입 베어 물고는 달다고 야단이다. 간간이 감 씨를 식탁 위에 뱉어내고 있다. 가을이 깊을수록 속살은 맛깔스럽게 익었는데 씨는 이리도 여물어졌냐고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속살이 흐물흐물하게 연해질수록 씨는 수분이 빠지고 딱딱하게 굳었다. 감 씨에 저장되었던 양분을 시나브로 과육에게 내주고 스스로 말라 버린 것이다. 심장이 뜨뜻해왔다. 창틈으로 째어든 비로 베란다에 놓인 제라늄 화초에 맺혔던 빗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어머니도 홍시처럼 넉넉하고 부드러웠지만 첩첩물길 가슴속은 권속들에게 기운을 다 빼앗기고 쇠약한 감 씨 같은 응어리로 맺혔을 것이다. 아마 어머니는 가슴에다 대장간을 하나 차리셨던 것 같다. 못 바람을 견디고 숙성된 홍시처럼 늘 한 발 뒤에서 속을 발효시킨 어머니, 어머니의 가슴 깊은 곳에 감 씨처럼 여문 못이 박혔을 테니까. 아니, 어쩌면 그 못이야말로 가정을 일궈낸 자양분이었으리라. 식탁 모서리에 뱉은 자갈색 감 씨가 벽에 걸린 어머니 사진 속의 저승꽃과 겹쳐져 보임은 왜일까? 어머니의 쿨렁거리는 기침 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온다. 자애로운 목소리 구만리 밑에 까맣게 탄 응어리는 아무도 모르게 엄마 가슴에 묻혀 있다. 아내가 뱉어 놓은 감 씨는 아무리 봐도 어머니의 가슴에서 파 온 것 같다.
보통 수필은 작가의 개성이 드러난 산문 문학이라고 한다. 허구적이지 않은 사실적인 개인의 경험을 성찰의 과정을 거친 후 글로 표현한 것이 수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경험이다 보니 특정한 형식이 없지만 내용이 유기적으로 잘 조직되어 있어야 읽는 이로 하여금 흥미를 이끌 수 있다. 흥미 이외에도 수필에는 삶의 교훈과 세계에 대한 비판이 함께 녹아 들어가 있어야 좋은 글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개성, 흥미, 교훈을 수필 심사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이번 교원 문학상에 응모한 작품들의 특징은 학교나 개인의 일상에서 경험한 일, 자연에 대한 경외, 여러 가지 경험을 토대로 한 단상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았다. 특히 교사라는 직업을 통해 겪게 되는 학내의 소소한 일들에 대해 개성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다수였다. 최근의 경향인지는 몰라도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그로인한 본인의 성찰과 관련한 작품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수필이라는 장르가 워낙 개성적이다보니 그것을 평가하고 순위를 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가운데 몇 작품을 위에서 언급한 개성, 흥미, 교훈, 문장 능력을 토대로 골라보았다. 감씨와 민들레 씨앗을 두고 심사위원들은 매우 고심을 하였다. 민들레 씨앗은 사유의 확장에서 감씨는 우리말의 표현과 서사적 갈등 면에서 우수하였다. 수필도 글이다보니 우리말을 잘 활용하여 잘 읽히는 것에 손을 들어 주어 감씨를 최종 우수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감씨는 우리말을 활용하고 쓰는 표현능력이 매우 우수하다. 어휘 선택이며 비유가 매우 참신하고 정갈하다. “옛날 아들 많은 할머니가 딸만 낳은 며느리 앞에 유세 떨던 것처럼 못 바람은 언제나 떵떵거렸다”와 같은 비유를 통해 이 글의 전체 내용을 암시하는솜씨는 매우 뛰어나다. 이 글은 어머니와 할머니 사이의 갈등, 소위 고부 갈등을 자식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 도회지로 나온 자식에게 그해의 수확물인 감을 보내주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어린 시절 어머니의 삶을 돌이켜 보는 수필이다. 고향의 풍경과 어머니의 고된 삶을 적절히 배치하여 고즈넉한 장면들이 혹 한편의 회상 소설을 보는 듯하다. 아쉽게도 가작으로 선정된 민들레 씨앗은 민들레 씨앗이라는 작은 자연물을 바라보며 자아의 성찰로 나아가고 있어 사유의 확장이 훌륭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수필이 지니고 있는 자유로운 글쓰기 방법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그 자유로움을 토대로 해서 ‘민들레 씨앗-텅빈 마음-나답게 사는 것’으로 사유가 확장되어 나가고 있다. 단순한 사고나 단상에 머물지 않고 점차적으로 글이 깊어지면서도 자아에서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편, 사유의 근간이 은유로 되어 있어 글쓴이의 상상력의 폭이 매우 넓다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밖에도 좋은 수필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작품이 많이 있었다. 그 가운데 흔적, 음치타령, 꽃이 필자리, 선생 노릇 등 여러 편은 선정된 작품과 같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라는 것을 이 자리를 통해 밝힌다. 엄해영 서울교대 교수 / 이준순 교과부 학교지원국장
진로진학상담교사 1500명 배치, 학교성과금제 도입 올 3월부터 전국 1500개 고교에 진로진학상담교사가 배치된다. 또 500명의 교사가 연구년에 들어간다. 학교성과금제가 도입되며, 임용고시 사전예고제도 실시된다. 신묘년 새해 달라지는 교원정책들을 간추려본다. △진로진학상담교사 1500명=진로진학지도 경력이나 능력을 갖춘 기존 교과교사 중 1500명(국공립 1000명, 사립 500명)을 진로진학상담교사로 전환시켜 3월부터 고교에 배치한다. 체계적인 진로교육과 입학사정관 전형 준비 등을 맡게 된다. 학교에 따라 선택교과인 ‘진로와 직업’ 수업도 맡는다. 비교과 교사는 전환 대상이 아니다. 지난해 12월 중 선발된 이들은 겨울방학 중 180시간, 학기중 180시간, 여름방학 중 210시간의 자격연수를 이수해 부전공 자격(중등 ‘진로진학상담’)을 획득하게 된다. 교과부는 올 1500명을 시작으로 내년부터는 중학교에도 배치를 시작해 2014년까지 전국 5383개 국공사립 중·고교에 배치를 완료한다는 계획이다. 매년 12월초 시도교육청별로 선발공고를 하고, 희망 교사를 대상으로 전형을 진행하게 된다. △연구년 교사 500명=지난해 99명이던 연구년교사가 500명 내외로 확대된다. 교육경력 10년 이상(정년 잔여기간 5년 이상) 교사 중 교원평가에서 동료평가, 학생만족도조사(초1~3은 학부모만족도) 결과가 각각 최상위(시도 자율 설정)여야 지원자격이 주어진다. 학교장 추천을 받아 본인이 희망하며 자기학습계획서, 수업연구역량 등을 심사해 선발한다. 교과부 선정 ‘으뜸교사’는 우선 선정하도록 했다. 또 연구년 교사 중 260명에 대해서는 교과 교육과정 기준 개발과 수업 개선 등의 연구과제를 부여하기로 하고, 이를 감안해 교과별 전공자를 안배해 선발하기로 했다. 1년 기간에 1000만원 지원이 기본이지만 시도에 따라 학기단위(6개월)로 하면서 500만원을 지원하는 것도 가능하다. 경력 및 급여․호봉은 100% 인정되며, 근평 반영 여부는 시도가 자율로 정한다. △학교성과금 도입=지난해 성과를 평가해 올 6월까지 학교성과급이 처음 지급된다. 교원성과급 예산의 10%인 1400억원을 학교평가 결과에 따라 3등급(S-30%, A-40%, B-30%)으로 차등 지급한다. 성과급 액수는 등급별 1인당 지급액(S등급 33만3천270원, A등급 22만2천180원, B등급 11만1천90원)에 학교별 교사수를 곱해 계산한다. 교과부가 제시한 학업성취도평가 향상도(초등 제외), 방과후학교 참여율, 취업률 등 성과지향적 지표는 반드시 반영해야 한다. 성취도 평가를 거부한 학교는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달리 시도는 교원 연수실적, 평균 수업시수, 체험활동 현황, 학교폭력 예방교육 현황 등을 자율지표로 반영하게 된다. 이 때 학교급별, 지역별, 규모별로 시도교육감이 학교군을 구분해 평가할 수 있록 했다. 여건이 다른 학교를 획일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임용시험 사전예고제 도입=교원 임용시험의 선발교과 및 인원이 올해부터는 4월중 사전예고된다. 임용시험 20일 전에야 공고돼왔던 문제가 소위 ‘노량진녀’의 1인 시위로 공론화되면서 교과부가 임용시험 규칙개정을 약속한데 따른 것이다. 교과부는 △전체 교원정원 변동 △정년퇴직 및 명퇴자 수 △전년도 미발령 대기자 수 등을 감안한 각 시도의 교과별 중장기 수급계획과 연계해 4월 중 사전예고를 실시하고, 시험 30일 전에 확정공고를 할 계획이다. 세부 추진계획은 곧 발표할 예정이다.
오 일마다 장이 서는 읍지역 학교에서 아이들과 지내는 것이 참으로 넉넉하고 즐겁습니다. 장이 열리는 날, 보부상들이 길을 꽉 채우며 보따리 위에 펼쳐 놓은 홍시, 찐쌀, 메밀묵 같은 먹을거리들을 보면 마치 점방에 들어선 어린애마냥 이것저것 가지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설렙니다. 장날이 걸린 토요일 오후는 사물들에 감춰진 재미난 얘기도 듣고 아이들에게 던질 미끼도 찾기 위해 재래시장으로 나서지요. 장날은 무싯날보다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한층 들떠, 장에 가는 날은 저도 덩달아 부푼 마음이 발걸음을 따돌리고 저만치 앞서 갑니다. 쫀득쫀득한 강냉이를 까먹으며 장 구경도 참 좋고 양념 냄새 풋풋한 국수도 사 먹을 수 있어 더욱 신났습니다. 저의 수준에는 이런 재래시장 풍경이 언제나 잘 맞습니다. 할머니가 싸 온 보자기에 홍시 여남은 개가 남아 있었습니다. 발갛고 튼실한 감을 보니 고향집 납작감을 만난 것 같아 그만 할머니 앞에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오후 내내 아무 입 다실 일이 없으셨던지 할머니는 저를 보자 아들 같다며 홍시 흥정은 간데없고 자식 이야기로 침을 튀기시더군요. 홍시 하나를 손바닥으로 쓰윽 닦더니 풀쑥 저의 입에 갖다 댑니다. 어느새 저는 어머니의 향수에 젖어 있었습니다. 재래시장이나 들판으로 다니며 정겨운 소재들을 물어다가 작문 시간에 아이들과 글짓기를 하는 것은 우리 직업만의 보람입니다. 학생들과 저는 쓴 글을 꼭 돌아가며 발표합니다. 저의 차례가 되어 원고 읽기를 끝내면 아이들이 서툰 솜씨로 제가 쓴 글을 합평해 줍니다. 이런 교감으로 우리는 같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생활이 더욱 탄력을 받으라고 교원문학상 공모전에서 힘을 실어주신 심사위원님과 신문사에 진정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갈고 닦겠습니다. 비록 작은 능력일망정 반드시 그것을 교실의 아이들에게로 환원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흰 와이셔츠에도 뼈가 있다는 말을 흘려듣다 너무 오래되어 어슴푸레한 기억 하나를 끄집어냈다 옷장 속에 묵혀 누렇게 탈색된 흰 와이셔츠 물 뿌리고 풀 먹여 등덜미를 문지르자 생솔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대나무 관절 꺾이는 소리 감나무 제 힘에 부쳐 어깨 찢어지는 소리 뼈와 뼈가 부딪쳐 자지러지는 소리에 벌레가 구멍을 갉아내는 소리였다 그동안 등에 흐르던 물방울 소리가 늘 따뜻했던 것은 흰 와이셔츠를 떠받치고 있던 등뼈 때문이었다 골다공증이었다 흰 와이셔츠에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었다 다리미가 지나갈 때마다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생을 추스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흰 와이셔츠를 다리는 일은 금방이었지만 벌집 숭숭한 등뼈의 맨홀을 덮는 일은 또 몇 년이 걸려야 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시 쓰는 일이 밥이라면 며칠 굶겠습니다. 아니 단식에 돌입하겠습니다. 한번쯤 머리를 깨끗이 비우고 나면 사람 사는 풍경을 보는 시선이 달라지겠지요. 밥그릇만 챙기다 보니 늘어나는 건 설거지해야 할 시간뿐입니다. 빈 그릇을 무엇으로든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앞선 나머지 겉만 번지르르한 말장난이 담길까 두렵습니다. 속 빈 강정 같은 시 말입니다. 뒤돌아보는 여유도 없이 먼발치에서 풍경만 바라보다 말 같지 않는 말만 늘여놓고 있는 것 같아 정말 시에게 미안할 따름입니다. 다림질 하다말고 잠시 다리미를 내려놓습니다. 손에 너무 힘이 많이 들어갔는지 뼈가 시려옵니다. 반듯하게 옷을 펴겠다고 무턱대고 용만 썼으니 그럴 법도 합니다. 다리미의 적정온도를 잊었던 것입니다. 구부정해진 척추를 바르게 펴려면 따끔한 침과 알맞은 온기에 찜질이 물리적으로 이루어져 함에도 나는 느긋함을 참지 못해 병원 문을 박차고 나옵니다. 어느 시인이 골다공증을 하늘을 날기 위해 몸을 가볍게 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아직 난 몸을 가볍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 못합니다. 아는 것이 있다면 뼈에 구멍이 나는 병이기에 바람이 드나드는 구멍을 열심히 막아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연탄구멍만 빼고 말입니다. 연탄불은 겨우내 시린 손을 달굴 유일한 화로이기에 그렇습니다. 얼음이 꽁꽁 얼었습니다. 추울수록 따뜻한 사람 냄새가 그립습니다. 따뜻한 사람 냄새 나는 시를 쓰겠습니다. 졸시를 선택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좋은 시로 보답하겠습니다.
교원문학상 응모작은 예년에 비해 편 수가 적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작품의 수준차는 크지 않아서 낙심할 정도는 아니었다. 소재도 다양해서 세상을 촉지하는 여러 생각들을 읽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 좋았다. 다만 정서를 평이하고 상투적으로 표출하거나 심정 토로식으로 나열하는 것이 올해도 산견돼서 아쉽다. 이는 시의 긴장이나 밀도를 약화시키는 요인이므로 늘 유념해야 할 것이다. 시 부문 당선작 (정영희)는 사물을 의인화하고 이를 인간의 이력과 연계시켜 삶을 통찰하는 예리한 눈을 확보했다. 눈부시게 흰, 그러나 이제는 ‘누렇게 탈색된’ 와이셔츠와 퇴락한 자신의 삶을 연계시키는 발상이 신선했다. 구멍난 와이셔츠 그리고 골다공증과 관절이상으로 신음하는 화자가 일체되며 묘한 연민을 자아낸다. 섬세한 감수성과 삶을 진지하게 통찰하는 안목이 뛰어났다. 당선작 외 응모시편들 역시 시적 긴장을 끝까지 잘 유지하며 안정적으로 마무리했다. 그런데 안정적이라는 것은 자칫 시를 지루하게 만들 수 있다. 보다 예리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세상과 삶을 통찰하는 작품을 기대하고 싶다. 시적 모험이 동반된 생동하는 개성을 선보여 주길 기대한다. 가작 (안영선)는 당선작에 비해 경쾌하고 날렵하다. 주변을 관찰하는 신선하고 경쾌한 비유가 생생하다. ‘자벌레처럼 늘어진 그림자가 유모차에 끌려가고’, ‘파지로 남은 생’, ‘언덕길 오르는 저 바퀴의 정점’, 그믐달을 흔드는 바람, 빈 골목을 헤매는 폐지(廢紙)같은 숨소리 등등. 풍경은 그야말로 꿈틀거리며 다채롭게 변주된다. 주변을 예리하게 관찰하며 비로소 자신과 대면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런 비유들은 어디서 보고 읽은 듯한 느낌을 전해준다. 3연 역시 이상의 ‘거울’모티프를 연상시킨다. 장점은 이를 자기식으로 잘 직조하여 주제를 전달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자칫 상투적 수사로 그칠 수 있으니 끊임없이 자기 언어로 세계와 주변을 응시하고 삶을 통찰한다면 좋은 시를 쓸 수 있으리라 판단된다. 이밖에도 , (정병근)은 재미도 있고 발상도 신선해서 좋았으나 간혹 시적 긴장을 허무는 관념어가 아쉬웠다. 그러나 시가 힘도 있고 스케일도 커서 정진하면 좋은 작품을 낳을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윤종덕), (하상만) 등은 시의 밀도와 긴장을 유지한다면 좋은 결과 있으리라 기대된다. 건투를 빈다. 다음 동시 부문이다. 동시는,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어린이의 정서(童)와 문학적 성취(詩)를 조화시키는 것이 지난하다. 이런 까닭에 종종 동심 혹은 문학성 등의 상대적 우열에서 당선작이 가려질 때가 많다. 그런데 이번 당선작 (임만택)과 가작 (류상희)은 우연이지만 두 작품 모두 어린이의 정서보다 문학적 완결성이 상대적으로 돋보였다. 은 처마 끝 풍경(風磬)과 이를 흔드는 바람과의 관계를 통해 사물과의 제연관을, 은 연못에 반사된 달을 잡으려는 마음(꿈)과 그것의 허망함을 시적으로 승화시켰다. 다만 이 ‘동시’의 특성을 좀 더 드러낸다고 판단해서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두 분께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동시는 어린이의 시선과 상상력에 기반한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이해를 부탁드리고 싶다. 이외에 , (정안식), , (김선중)은 주로 어린이의 시선으로 사물이나 경험을 재미있게 표현했지만 완성도 면에서 상대적으로 아쉬웠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그러나 계속 정진한다면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자질을 갖추었으니 다음을 기약하고 싶다. 이가림 시인, 인하대 교수 / 조용훈 문학평론가, 청주교대 교수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은 깜짝깜짝 놀란다. 여리고 예민한 풍경은 바람이 오는 소리를 먼저 듣고 바람이 불기 전에 소리를 내며 바람이 오고 있음을 알린다. 풍경의 추에 부딪친 바람은 아프다고 엄살떨고 풍경은 감싸는 바람이 간지럽다고 앙탈을 부린다. 바람이 풍경을 흔드는지 풍경이 바람을 울리는지 가는 바람이 마냥 아쉬워 풍경은 바람이 올 때마다 운다.
고등학교 시절 문학소년으로 한동안 심취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이 장르 저 장르 넘나들며 습작을 통하여 꿈을 키웠었습니다. 얼마큼의 습작을 해보니 자신이 생겼습니다. 이 정도 수준이면 다른 전공을 택하여 대학에 가서도, 아니 사회에 나가서도 충분히 창작활동이 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공대로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공학(건축)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교수가 되니 다른 분야는 좀처럼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고, 선택한 전공분야에만 전심전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문학과 병행이 가능하리라는 예상은 무척 잘못되고 건방진 생각인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바야흐로 정년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한 분야에만 열중하느라 겸업이 가능하리라 예상했던 문학은 도저히 접하지 못하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이가 드니 자다가 문득 잠이 깨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지겨워져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동시가 되었습니다. 동시는 별로 습작해보지 않던 장르입니다. 옛날의 감각을 회복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중입니다. 공학은 호기심으로 시작하게 되었지만, 문학은 즐기면서 하고 싶습니다. 정년이 되면 어떻게 지낼까 고민했는데 우선 할 일이 하나 생긴 것 같습니다. 갑자기 문학소년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수년은 훨씬 젊어진 기분마저 듭니다. 앞으로 문학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고 무명에서 이름을 갖게 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공학을 탐구했던 열정으로 이제는 지속가능한 창작활동에 정진하고 싶습니다.
공존의 히트작, 『강남몽』 최근 공존의 히트를 기록(출간되자마자 넉 달 만에 18만부 가량 팔림)한 소설가 황석영의 『강남몽』을 서점에서 구입하여 읽었다. 조정래, 이문열 등과 함께 금세기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대문호로 일컬어지는 그의 창작력을 의심해서는 아니었지만, 도대체 얼마나 잘 썼길래 주요일간지에서부터 인터넷 배너 광고 등에까지 저리도 요란하게 홍보를 하는가 싶은 궁금증이 컸기 때문이었다. 물론 읽기 전에 각종 블로그나 뉴스 자료 등을 검색해 보고 사전 배경 지식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기에 그의 삶의 궤적들이 작품 속에 잘 녹아 있다는 대중들의 지배적인 생각에 좀처럼 공감대를 형성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말하면 될런지 모르겠지만, 귀한 시간 쪼개어 괜히 읽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정도가 이렇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겨우 이 정도의 책을 만원이 훌쩍 넘는 거금(?)을 들여 살만한 가치가 과연 있었나 하는 점이었다. 최근에 이 책을 긍정적으로 읽고 나름대로 감명을 받은 누군가가 자신의 블로그에 남겨 놓은 글이 눈에 띄었다. “400페이지도 못 되는 한 권의 책속에 해방 전 만주에서부터 시작하여 현대까지의 우리 민중들의 애환과 삶이 그대로 녹아 있는 작품이었다. …… (중략) …… 박정희. 김구. 여운형. 박헌영 등 우리의 근현대사의 인물들을 다시 불러와, 그들과 함께 역사의 흐름을 따라 흐르는 기분을 들게 한 소설이었다. 숱한 정치가, 사업가, 조직폭력배, 화류계 여인 이야기가 나왔지만, 역시 나(해당 블로그의 실제 주인)와 같은 하층을 이루고 살았던, 임판식, 정아, 민자 언니 등에게 더 공감을 하고 시대를 거슬러 그들과 함께 호흡을 하는 시간은 즐거웠다.” 그가 본 사실이 분명 잘못된 것은 아니리라. 이 말은 블로그 주인이 틀렸고, 내가 맞다는 단순 논리를 뜻하는 게 아니다. 대문호가 썼기에 그래서 그만큼 후하게 점수를 주기엔, 작품 전반에 흐르는 모순점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꿈(夢)과 꿈(dream, hope)의 차이 대한민국의 소위 1%라는 강남공화국(?)에 살고 있는 그네들의 삶의 애환이랄까, 그들이 성장하게 된 배경을 들여다보는 이 이야기는, 석연치 않은 데가 몇 군데 있어 보인다. 황석영은 말한다. 우리 나라의 근간을, 아니 주축을 형성하는 강남 피플들은 우리가 보는 실제의 현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꿈으로서 존재한다고, 그래서 실체 없는 그 허영들이 언젠가는 쓰러져 나갈 것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꿈이 깨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일어나면 그건 더 이상 꿈이라고 할 수 없다. 꿈은 어디까지나 잠 속에서만 이루어져야 하고 무의식 속에 잠재된 우리의 생각들이 약간의 환상과 가미되어 전개되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꿈은 한바탕의 화려함 뒤에 따르는 처절한 현실 인식이 있어야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보면 황석영이 말한 "강남몽"은, 아무리 한여름밤의 꿈같이 일장춘몽할 꿈이라 해도 "夢"의 의미로 해석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든다. 강남은, 그리고 강남에 산다는 것은 최소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살아간다는 자부심은 물론이고 그 인생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성공이라는 보증수표 역할을 하고 있다. 오죽하면 강남에 산다고 하지 않고, 강남에 입성(入城)했다고 표현할 정도니까. 그래서, 강남은 대한민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형이자 어쩌면 부유하게 살아가길 원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아로새겨진 지고의 가치인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처럼, 대성백화점의 붕괴와 함께 그렇게 속절없이 스러질 수 있는 것이 강남공화국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지금의 이 자본주의가 더욱 공고해 질수록 강남-비록 황석영의 말처럼 그 실체가 허상일지라도-의생명력은 더욱 굳건해 질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한다. 어쩌면 백화점의 붕괴와 함께 강남 피플을 대표하는 박선녀와 나머지 99%의 중산층 및 하층민을 대표하는 임정아-사실 그녀는 하층민에 지나지 않지만-가 함께 잔해에 매몰된 그 장면에서, 그리고 두 사람이 정상적인 시스템이었다면 결코 나누었을 리 없는 그런 솔직한 대화를 이끌어 낸 그 장면에서, 황석영은 의도했는지도 모른다. 실체없는 그 허영들이 쓰러져 나가는 적나라한 과정을……. 너무도 우습지만 그렇게 해서 무너질 강남의 아성이었다면 애초에 성립 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바의 노래(The winner takes it all)처럼, 모든 것을 가지고 누릴 수 있는 승자가 되는 가장 최종적인 목표는 적어도 우리 나라에선 강남에 입성하는 것이 되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강남몽의 몽은 “夢”이 아니라 “꿈(dream, hope)”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난 이 책의 제목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강남몽이 아니라 강남 드리밍(dreamming)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고 본다. 흥미 위주의 에피소드의 무분별한 남발 다음으로, 이야기의 전개라는 측면에서도 어색한 부분이 없지 않다. 강남을 형성하게 된 그네들의 삶을, 어떻게 태동이 되었고 또 어떤 식으로 성장해 왔는지 그 궤적을 더듬어 본 것까진 좋았는데, 필요 이상의 등장인물들까지 훑어 본 것은 아무래도 납득이 되질 않는다. 또 그렇게 한 것이 그저 훑어본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원래의 작가의 의도를 지나치게 훼손할 만큼 이야기 전개에 있어 너무 흥미 위주의 에피소드를 무분별하게 나열했다는 점이다. 삼풍백화점을 풍자한 대성백화점의 김진의 생을 더듬어 볼 때에도 그렇게 세세하게 언급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평범한 여인에 지나지 않았던 박선녀가 요정(화류계)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자신의 커리어를 십분 활용해 결국엔 대재벌 총수의 후실이 됨으로써, 누구나가 꿈꾸는 신분의 급상승을 이루어 낸 것은 그렇다 치고라도,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그의 동업자 홍양태라는 조직폭력배의 생에 대한 지나칠 정도로 세세한 언급은 흡사 조직폭력배를 화두로 한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또 일제식민지와 전후 문제의 청산 속에 굳건히 자라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세력들과 그 잔재들에 대해서 서술한 부분도 필요 이상의 사족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다음의 기사를 보면 그 의미가 보다 분명해지지 않을까 싶다. ‘의도의 과잉과 형상화의 미흡’이란 제목의 글에서 “‘강남몽’은 말 그대로 강남 형성사를 다루고 있다”고 전제한 뒤 “등장인물들은 ‘꼭두각시놀음’의 캐릭터처럼 현실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풍자·희화화하지 못하고 있으며, 주요 인물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파편화된 에피소드들은 ‘강남 형성사’라는 중심 서사의 흐름에 온전히 수렴되지 못하고 제각기 부유하고 있는 인상”이라고 지적했다. …… (중략) …… ‘강남몽’의 인물들은 역사의 주요 갈피와 흐름을 실감나게 체현한 개인이 아니라 역사에 압착된 개인이라고 전제, 이는 ‘강남몽’이 주어진 역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인물들을 서사를 전개시키기 위해 매우 기능화된 단자로서 처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결국 ‘강남몽’은 거대한 역사의 지류를 조형화하기 위해 다층적인 욕망, 차이의 욕망이 발산하는 역동적인 서사의 세계를 방기한 매우 순응적인 텍스트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관련기사 : 「젊은 평론가 고인환·권채린씨, ‘강남몽’ ‘허수아비춤’ 정면 비판」, 2010.12.10, 국민일보) 소문 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 진짜로! 잡다한 얘기들을 너무 두서없이 한 감이 없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난 이 책을 그다지 추천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아니, 친밀도가 높은 사람일수록 가급적이면 읽지 말라고 얘기해 두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냥 흥미 위주로-작가에게는 심각한 명예훼손이 될지 모르지만-, 그저 예능 프로그램 하나 보는 기분으로 보기를 원한다면 모를까, 뭔가를 얻기 위해서 이 책을 보려 한다면 말리고 싶다. 황석영 씨의 글솜씨는 그야말로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누구나가 인정한다. 그래서 스토리 상으로 보면 분명 재미는 충분하다. 하지만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작가의 의도나 주제 의식이 책을 다 읽고 덮을 때쯤엔 ‘그게 어디 있더라?’하며 헤매게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솔직히 광고가 너무 요란했다. 대문호가 쓴 작품이기에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렇게 충심으로 믿고 책을 구입해서 읽어 보고 나서 밀려드는 허탈감을 견딜 수 없다. 이번에 확실히 한 번 더 느꼈다. 소문 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는 것을…….
인천시교육청(나근형 교육감) 앞마당에는 노랗게 잘 익은 제주도 감귤(5kg) 150박스가 도착했다. 지난 20일 제주도교육청(양성언 교육감)에서는 인천시교육청에 연평초․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제주도 감귤을 전달했으면 한다는 의사를 밝혔고, 인천시교육청은 흔쾌히 화답했다. 이번 제주도 감귤 전달은 양성언 제주도교육감이 북한 포격을 입고 정든 학교와 마을을 떠나 있는 연평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을 위로하고자 보내준 것으로, 이날 감귤은 연평학교 김영세 교장에게 전달됐다. 이날 감귤을 직접 전해 받은 나근형 교육감은 "양성언 제주도교육감님께서 친히 연평학생들의 안위를 걱정해 주시고, 위로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전하며, "멀리 제주도에서 전해진 사랑의 귤향기와 따뜻한 마음이 우리 연평학생들에게 큰 위로가 될 것이다"라고 전했다.
- 한국장애인장학회, 인천시 관내 특수교육대상학생 7명에 장학금 수여 - 한국장애인장학회(인천시협회장 김재필)는 지난 12월 20일 인천연일학교에서 가정형편이 어려운 관내 특수학교 재학생 7명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고 학생들을 격려했다. 한국장애인장학회는 각종 기부를 통한 장학기금을 조성, 장애인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사단법인 장학회로 이번 장학금 수여 대상자는 인혜학교, 연일학교, 미추홀학교, 성동학교, 은광학교, 혜광학교 , 예림학교에 각 1명씩으로, 연말연시를 앞두고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학업에 정진하는 학생을 대상으로 엄격하게 선발되었다. 장학금을 받은 한 학생은 “나중에 어른이 되면 장애를 딛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 공부하기 어려운 환경의 학생들을 도와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고 말했다. 김재필 협회장은 “장학사업을 통해 장애학생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 매우 보람을 느낀다. 학생들이 용기를 잃지 않고 학업에 정진하면 훌륭한 사회구성원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고 밝혔다.
한국교총이 변경을 요구해 온 전국소년체육대회 개최 시기가 5월로 확정됐다. 대한체육회(KOC)는 21일 제12차 이사회를 개최하고 전국소년체육대회 개최시기를 현행 8월에서 5월로 변경하기로 의결했다. 한국교총은 지난 11월 11일 한국스포츠교육학회, 한국체육교육학회, 한국체육정책학회, 한국체육학회, 한국초등체육교육연구회 등의 단체와 공동으로 학생들의 안전사고 예방, 경기력 향상을 위해 전국소년체육대회 개최시기를 5~6월로 환원해 줄 것을 정부에 건의하고 관철을 위한 활동을 추진해왔다. 이번 대한체육회의 의결은 한국교총의 요구를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평가된다. 대한체육회는 1972년 제1회 대회 이래 매년 5~6월에 전국소년체육대회를 개최해 왔으나 학생의 수업권 보장을 위해 올해 제39회 대회는 8월 혹서기에 개최했다. 그러나 성장기에 있는 선수들이 심한 무더위에 노출됨에 따라 경기력 저하와 안전사고 위험이 제기됐고 방학을 통해 선수들이 부족한 공부를 보충하고 휴식기를 가지는 것이 실질적 학습권 보장의 취지를 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5~6월 개최가 바람직하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거미줄도 합하면 사자를 묶을 수 있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습니다. 교권 수호를 위해, 우리의 정당한 권리 보호를 위해 한국교총과 함께 합시다.” 신규임용교원 연수 및 1정 자격 연수 등 각종 연수에서 교총을 알리는 최 일선의 홍보대사 김성길 한국교총연수지원단 회장(인천 연수고 교사, 사진)은 “2010년은 우리 선생님들에게 체벌금지, 학생인권조례 등으로 눈에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피해가 큰 한 해였다”며 “2011년에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인 만큼 우리 교사들은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교원단체의 존재 이유와 교총회원 가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8일 교총회관에서 열린 한국교총연수지원단 연수회에서 김 회장과 50여명의 단원들은 각종 연수 시 활용할 강의안과 PPT자료를 소개하고 이를 수정․보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연수 후 만찬에서도 어떻게 하면 교총을 더 잘 알릴 수 있을지, 특히 신규교사들의 회원 가입 독려를 위한 아이디어를 고민하는 모습이 엿보였다. “요즘 2~30대 젊은 교원들은 교원단체 가입을 기피하는 점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몸이 아플 때 병원을 찾게 되지만 의사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사의 권익 보호를 위해, 좋은 교육을 위해 교총이라는 단체에 가입이 필요합니다. 의사를 양성하는 일에 젊은 선생님들도 동참해야 합니다.” 기존 회원에 대한 부탁의 말도 빼놓지 않았다. 김 회장은 “회원이면서도 교총이 하는 일에 관심이 없는 선생님들이 많다”며 “교총에서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잘못된 것이 있다면 채찍질도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해엔 과반수이상 교원을 회원으로 확보하는 것이 목표”라고 포부를 밝힌 김 회장은 “세상에 중요한 3금이 있는데 소금, 순금 그리고 지금이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바로 교총에 가입하십시오.”
서울시교육청에서 지난해에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교사초빙제를 비롯한 교원인사에서의 자율화가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해에는 교사초빙인원을 전체교사수의 20%로 했었고, 학교장이 요청할 수 있는 전입교사수를 전출예정교사의 20%로 확대했었다. 전보유예율을 전출대상교사수의 30%로 조정했었다. 학교장이 유능한 교사를 데려오거나, 유예시킬 수 있도록 권한을 주어 학교경영의 자율성을 확대한 조치였다. 그러나 올해는 사정이 달라졌다. 전입요청교사의 비율을 10%로 하향조정했고, 유예율 역시 20%로 하향조정했다. 다만 초빙교사는 당해년도에 전체 초빙가능한 교사수의 30%를 초과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매년 일정비율의 교사를 초빙할 수 있게 되어 한꺼번에 모든 교사를 초빙하는 문제를 해결했다. 그나마 다행스럽다는 생각이다. 여기에 각 지역의 교육지원청마다 선호학교를 지정할 것으로 보인다. 선호학교란 교사들이 근무하기를 희망하는 학교들을 이야기하는데, 교통편이 좋거나 학생들의 수준이 주변보다 높은 학교들이다. 문제는 서울의 11개 지역교육지원청중에서 해당지원청내에 선호학교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인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부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같은 지역에서 특별히 선호하는 학교들이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생각이다. 중학교 교사들의 경우는 과목이 맞는 학교를 선택해서 정기전보의 희망학교로 기재하고 있을 뿐인데, 선호학교라는 표현은 맞지 않는 표현이다. 시교육청의 이야기대로 선호하는 학교가 되기 위해서는 매년 해당학교에 가기 위해 내신희망을 절대적으로 많이 하는 학교들이 되어야 하는데, 실제로 그런학교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선호학교를 지역교육지원청마다 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도리어 선호교육지원청을 지정해야 한다. 누구나 다 알듯이 강남이나 강동은 상대적으로 여건이 우수하기 때문에 교사들이 근무를 선호한다. 이들 지원청내에서 선호학교를 또 지정한다는 것은 다른 지원청에서 근무하는 교사들의 사기와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선호하는 지원청내에 비선호 학교가 존재한다는 이야기인데, 실제로 해당지원청에서 다른 지원청으로의 전출을 염려하는 것이 해당지역 교사들의 고민일 뿐이다. 선호학교에서는 매년 초빙인원을 15%로 묶었고, 전보유예율도 다른 학교의 절반정도인 10%로 제한하고 있다. 또한 선호학교는 전보대상이 되는 교사들의 당해학교 초빙을 원천적으로 제한하고 있다. 비선호학교만 해당학교 교사들의 초빙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선호학교로 지정된 학교에서 같은 지원청내의 또다른 선호학교로 초빙받아서 갈수 없도록 하고 있다. 학교자율화 시대에 선호학교의 학교장은 별다른 권한을 발휘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만일 선호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들은 당초에 선호학교가 될 줄 꿈에도 모른 상태에서 근무를 시작했는데, 떠날때가 되니 초빙받아서 이동할때 제한을 두고 있는 것이다. 형평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최소한의 경과기간을 두었어야 옳다는 생각이다. 서울에는 경합지역이라는 곳이 있다. 이들 경합지역에서의 교사초빙에 제한을 두는 것은 어느정도 납득이 된다. 그러나 나머지 지원청에서 선호학교를 지정하여 제한을 두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학교자율화에 따른 초빙비율이나 전보유예율은 학교장이 행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한이다. 이들 권한마저도 제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단위학교별로 평가를 하면서 선호학교라는 이유로(실제로는 선호학교도 아니지만) 제한하는 것은 다시한번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선호학교로 지정될 경우, 대부분의 교사들이 고개를 끄덕여야 한다. 만일 반대의 경우가 된다면 교육청에서 추진하는 인사원칙을 상당히 신뢰하지 않게 될 것이다. 객관성이 결여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교사들이 동의하기 어려운 선호학교 문제는 또한번의 실패한 정책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확대 시행했던 인사원칙을 1년만에 다시 수정하는 것이 과연 공감할 수 있는 것이 깊이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최근 서울시교육청에서는 내년 2월 말에 명예퇴직할 교원들의 희망서를 접수하였다. 각 지역에 따라서는 접수중일 수도 있다. 얼마나 많은 교원들이 명예퇴직을 신청 할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어쩌면 다른 해에 비해 신청자가 늘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여러가지로 교사로 계속해서 근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학교도 한분의 선생님이 명예퇴직을 신청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목소리도 크고 성격도 시원시원해서 학생들이 상당히 따르는 선생님이다. 50대 중반이지만 학생들과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수업에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항상 인상적인 선생님이었다. 학교에 오는 것이 매일 매일 즐겁고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정말 행복했다고 항상 이야기하던 선생님이었다. 올해 1학기때만 해도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하시는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런 명예퇴직 소식을 접하고 그 선생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제는 더이상 버티거나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올해 1학기 까지만 해도 학생들을 적절히 지도하는 것에 자신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2학기 들어서 학교가 갑자기 변하는 바람에 더이상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 이유중의 하나가 체벌금지였다는 이야기도 했다. 학생들이 교사의 이야기를 알아듣고 행동에 옮긴다면 체벌은 벌써 없어졌을 것이라고도 했다. 최소한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는 방법마저 사라진 지금에 와서 학생들의 갑작스런 변화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듣지 않는 학생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 여러가지로 고민을 한 끝에 명퇴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이대로 계속해서 가다가는 교사인 자신이 병이 날 것 같다고 했다. 아이들 지도를 포기해서 명퇴를 결정한 것은 절대 아니라고 한다. 앞으로 남아있는 교사들에게 짐을 지운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한다. 교육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교육을 위한 학교에서 학생들의 인권이 너무나 전면에 나서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한다. 오죽하면 자신처럼 학생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교사가 명예퇴직을 신청했는지 헤아려 달라고 했다. 단순히 학생들의 체벌문제로 명퇴의 결단을 내린 것은 아닐 것이다. 말로해서 안듣는 것이 힘들어서도 아닐 것이다. 학교가 변하고 학생들이 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변화가 긍정적으로 변해가지 않고 부정적으로 변해가기 때문일 것이다. 교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교사를 따르지 않는 학생들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아쉬움이 남는 것이 교단의 현실인 것이다. 그 선생님의 마지막 말씀이 왠지 서글프다는 느낌이 든다. 교원노조에서 열심히 활동해 봤지만 이렇게 교육이 흘러가지는 않았었다. 학교교육이 이렇게 흘러가서는 절대로 안된다. 뭔가 계기가 있어야 한다. 교육이 이런식으로 흘러가는 것은 누구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끝까지 교단을 지키지 못해서 너무나 안타깝다. 이제는 떠날때가 아닌가 싶다. 그말을 끝으로 그 선생님은 돌아섰다. 아쉬움이 남는 그 모습을 보는 마음이 너무나도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