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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이른 봄 잎이 피기 전 길을 밝힌 벚나무 잎이 발갛게 물들고 있다. 만개한 꽃보다 더 깔끔한 붉은 색의 조화에 가까이 잎을 보니 군데군데 까만 반점과 벌레에 먹힌 구멍들이 지나온 몇 달의 시간을 기록하고 있다. 십일월의 초입 초겨울을 향해 밤낮 기온이 반전을 거듭하자 나무들은 겨울 채비를 한다. 돌아보는 시간! 생활이 녹록지 않았던 시절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하는 일이 겨울용 땔감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깻단, 솔가리, 나무 그루터기, 솔방울 등 불 땔 수 있는 것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렇게 나무를 하는 일이 일상이 되다 보니 인가 근처 산은 비로 쓴 듯이 깔끔하여 땔감을 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저마다 도끼, 낫, 갈퀴를 바작에 짊어지고 먼 곳의 산을 찾아다녔다. 다행히 자기 소유의 산이 있는 집은 그나마 낫지만, 그것도 나무를 누가 해 가는지 산지기 노릇도 해야 하는 가진 자의 불평도 있었다. 몇 년 전이었다. 망운산 망운사로 아이들과 늦가을 산 오르기를 하였다. 높은 곳에서 남해읍이며 강진만을 내려다보며 경치 좋다고 하자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은사님께서 철들어서부터 대학교 다닐 때까지 이곳까지 지게 지고 나무하러 온 일이 수십 번이라고 했다. 또한 여기까지 지게 지고 나무 한 짐 하러 오면 하루가 걸린다고 하였다. 굽이지고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는 좁은 길을 지겟작대기에 의지하여 참는 일과 쉬는 일을 반복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유일한 운반수단이 지게였으니 그 힘듦을 어떻게 말 할 수 있을까? 지게는 우리 고유의 짐을 옮기는 수단이라고 한다. 어떤 방송에서 지게가 우리나라 사람에게 인내하는 마음을 길러주었으며 삼각형 구조에 의하여 무게중심과 힘의 분산방법이 수학적이며 과학적이란 말을 들은 적 있다. 하지만 지게에 얽힌 우리네 부모님들의 삶은 좋은 점보다는 애환이 더 많다. 어느 지인의 아버지께 들은 내용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보내달라고 사흘 밤낮을 먹지 않고 문고리를 잡고 울었다 한다. 그래도 그분의 아버지는 꿈쩍도 않더라는 것이었다. 젖먹이일 때 어머니 여의고 형님네에 얹혀 살면서 언감생신 학교가 무어냐며 남의 집 머슴살이로 보냈다 한다. 하지만 정작 지인의 할아버지는 읍내에 있는 첩에게 눈이 멀어 좋은 것 다 갖다 주며 자식도 나 몰라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한을 삯이며 지게를 지고 이를 악물며 수년 동안 모은 새경으로 마을의 방앗간을 사 주었더니만 이번에는 노름에 빠진 형이 방앗간을 말아먹고 객사를 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울분을 참으며 또다시 지겟다리 두들기며 바작에 짐을 싣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광산에 일하여 일가를 이루었지만 본인은 환갑이 되기 전에 세상을 멀리하였다는 한스러운 얘기였다. 요즘은 지게를 보기 힘들다. 무슨 일을 하든지 중장비가 우선이다. 간혹 철물점에서 쇠파이프를 용접하여 지겟발을 끼워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거나 가벼운 알루미늄으로 만든 지게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모양이 비슷한 두 그루의 나무를 구해다가 자귀로 다듬고 끌로 구멍을 뚫어 빗장을 조립하고 짚을 엮어 멜빵을 만든 것은 민속촌이나 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다. 내가 지게를 처음 져본 것은 중학생 때였다. 다랑논 천수답에 가을걷이하면 아버지 따라 같이 집으로 볏단을 나르게 해 달라고 조르면 어머니는 겨우 벼 몇 단을 새끼줄로 묶어 등에 지어주셨다. 그리고 아버지를 졸라 내 몸에 맞는 지게 하나 만들어 달라 하였지만 지게 지는 게 무어가 좋다며 거절하셨다. 하지만 성화에 못 이겼는지 결국은 지게를 만들어 주셨지만, 약골이어서 불과 서너 번 져본 기억밖에 없다. 지게는 이런 아픈 추억도 있는가 하면 재미있는 추억도 갖고 있다. 다리가 귀한 시절 비 온 뒤 물이 불어났을 때 일하는 아버지를 따라 가면 항상 개울 근처에서 지게를 태워 건네주셨다. 겁이 많아 언제나 양손으로 지게를 꼭 잡고 눈을 감고 건넜던 일이 지금도 선하다. 지게! 지금을 사는 세대들은 그 의미를 이입하기가 참 어려운 물건이다. 하지만 오늘의 이런 시대는 일찍이 등골이 빠지도록 땀 흘리며 가꾼 우리네 부모님들의 유산이다. 간혹 이 깊은 가을날 둘레길을 걸으며 지천으로 널린 갈비(솔가리)를 보면 욕심이 생긴다. 갈퀴로 모아서 짊어지고 집에 가면 정지문 열고 머리에 수건을 쓴 어머니가 뛰어 나오실 것 같다. 아직도 촌집의 창고엔 아버지가 지셨던 땀과 체취가 밴 지게가 지난날을 기억하여 가쁜 숨을 고르고 있다.
오늘은 많은 선생님들이 4박 5일간 모처(某處)에서 신입생 면접 준비를 위해 출장을 갔기에 남아 있는 선생님들도 무척 힘들다. 쉬는 시간 없이 수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학교에서 볼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지혜롭게 학교를 잘 이끌어가는 선생님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더욱 빛난다. 조금 전에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을 읽었다. 허생전은 한문소설이다. 학교 다닐 때 한문으로 배운 적이 있고, 학생들에게 허생전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오늘 또 이렇게 읽어보니 또 새삼스럽다. 읽을 때마다 감동이 온다.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것 같다. 막힌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도 든다. 연암 박지원은 동서양의 유학파다. 누구보다 견문이 넓은 사람이다. 그러니 생각의 폭도 넓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지 못하는 생각을 해내는 패러다임의 전환자였다. 생각의 전환점을 가져오게 한 계기가 되는 학자였다. 지금도 우리들에게 기존의 틀에서 깨어나라고 하는 무언의 메시지가 들리기도 하다. 주인공 허생이란 인물은 남산에 살았다. 실제 인물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주인공을 통해 작자의 생각을 나타내려고 한 점에 초점을 맞추면 된다. 허생의 사람됨을 우선 배울 수 있다. 허생은 꿈이 있었다. 10년의 글을 읽고 과거를 보든지 자기의 꿈을 실현하려고 했다. 또 그는 글읽기를 좋아했다. 공부하기를 좋아한 것이다. 오직 공부, 오직 책읽기, 오직 학문연구였다. 또 허생은 돈과는 담을 쌓았다. 돈의 매력에 빠지지 않았다. 선비가 돈에 빠지면 선비다운 선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또 하나는 환경을 잘 이겨냈다. 가난이라는 장벽 앞에서도 넘어지지 않았다. 배고픔을 잘 참고 이겨냈다. 허생은 당돌한 야심가였다. 괴이한 선비였다. 성실했고 말이 적었다. 이러니 마음먹은 대로 성공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배우는 이들은 적어도 허생과 같은 자세는 되어야 세계를 이끌어갈 선도적 인재가 될 수가 있다. 허생의 아내는 성품이 좀 모자랐다. 인내심이 없었다. 10년 목표로 공부를 하고 있었으면 조금만 더 참고 뒷바라지 했더라면 꿈을 이룰 수 있었을 텐데. 한 3년을 남겨두고 그만 끝장을 보려고 했던 것이다. 또 허생의 아내는 인성교육을 잘못 받았다.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가장 피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마음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지 않아야 하는데 그만 폭언을 하고 말았다. ‘내가 바느질품을 팔아서 먹고 사는 것으로 당신을 만족하는 모양인데, 그게 몇 푼이나 된다고 그러시오. 그런 배짱이라면 도둑놈의 배짱이 아니구 뭐겠수?’ 도둑놈의 배짱이라고 폭언을 했다. 아뿔사! 돈을 빌려준 변부자는 관찰력이 뛰어났다. 침묵을 잘 지켰다. 정확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대담한 행동을 할 줄 알았다. 박애심이 있었다. 경멸하고 인색한 점도 있었지만 양심이 특기였다. 허생은 장사를 하려면 점포선정에 대한 탁월한 눈이 있어야 하고, 무엇이 귀중한 물건인지 파악하는 눈이 있어야 하며, 돈을 벌어서 그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매점매석 등과 같은 것은 나쁜 경제운용 방법임도 지적했다. 돈을 벌어서 구제 사업에 눈을 돌렸고, 필요 없는 돈은 바다에 버리고,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는 과감성도 본받을 만하다. 돈을 빌리면 적어도 갚을 줄을 알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자기는 10배가 넘는 돈을 갚는 파격적인 행동을 보였다. 요즘은 ‘빚 주고 뺨 맞는다’고 하면서 돈을 빌려주지 않도록 하고 있다. 빚 주면 뺨을 맞기도 하고 돈을 받기 위해 찾아가야 하는 경우도 생기며, 나아가 돈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됨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름도, 어디 사는 누군지도 모르고 빌려주는 변 부자나 돈을 빌렸으면 반드시 갚고자 하는 마음으로 몇 배의 이득을 안겨주는 이가 진정 우리들이 바라는 모델이다.
최근들어 한일간의 교류가 침체 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더우기 후쿠시마 원전 문제로 수산물 수입 금지 이후 한국의 일본에 대한 불신이 증가되어 이를 더욱 자극하는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쿠오카한국교육원은 필자를 강사로 초청,2일 오후 7시부터 교육원에서 제1회 한국문화포럼을 개최하였다. 수강자는 재일동포와 한국 유학생, 한국문화에 관심이 있는 일본인으로, 강의 주제는 '한일 문화 교류, 도자기 문화'를 중심으로 진행하였다. 후쿠오카총영사관 안상현 영사가 참석하여 수강생들을 격려하고 '영사관에서 개최하는 아리타 도자기 탐방과 강의는 관계가 깊어 이번 강의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지금부터 300여년 전 유럽에는 동양에서 들어온 도자기가 부와 명예의 상징이 된 것이다. 이때 유럽에는 중국도자기와 일본 도자기가 고가로 대 히트 상품이 된 것이다. 이같은 배경에는 이마리에서 제작된 자기가 나가사키항을 통하여 네덜란드에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이마리는 아리타와 가까운 곳으로 일본에서 최초로 백자를 생산한 곳이다. 16세기만해도 일본에는 자기를 만들 기술이 없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도코나메야키나 세토에서 생산한 도기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때까지만해도 오늘날의 반도체 기술에 해당하는 하이테크 기술이 자기를 굽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통하여 토요토미히데요시는 조선의 도공을 끌고가 도예 기술자들에게 무사 대우를 하면서 자기를 생산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 중심에 현재 일본 도자기의 신으로 불리우는 아삼평은 처음 원석을 발견하지 못하여 생산이 불가능하였으나 1610년 이즈미산에서 자석광을 발견함으로 양질의 원료 확보가 가능하였다. 아리타는 점차 도자기 생산에 대한 분업화가 진행되면서 산업화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러한 대량생산과 분업은 생산을 촉진시켰으며 이때 생산된 도자기들은 현재 아리타에 있는 도자문화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때 명청의 전환기를 맞이하여 중국이 전쟁을 하게 됨으로 아리타는 행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항상 세상은 변하고 있으며 시장은 새로운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문제는 세계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알아차리는 안목이 필요한 시대이다. 지금도 하이테크 전쟁은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30여년 전 삼성전자에 몸을 담은 기업인은 '일본이 너무 앞서 있다. 우리 세대에는 절대로 일본을 따라 잡지 못한다는 절망감이 들었다'고 한숨을 쉰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G2 시대'라 불리며 동아시아 판도가 급변하고 있다. 총칼의 전쟁이 아닌 두뇌 전쟁이며, 외교전쟁인 것이다. 특히 한,미,일,중의 관계가 쉽게 해결될 기미는 현재의 정치 상황으로는 찾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국가의 리더들이 잘 읽어 다시는 이땅에 과거에 있었던 비극의 참상이 재현되지 않도록 전략적 사고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며칠 뒤면 수능이며 벌써 수능을 본 학생들 지도 어떻게 하나 걱정을 많이 한다. 필자는 수능을 본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상담한 적이 있어 이들 학생들 지도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수능을 보고 나서 학생들은 지난 1년간 공부한 것에서 긴장이 풀리는 시기이다. 어떤 학생들은 학교에 무단으로 결석하여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한다. 이런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상담하고 싶다. 첫째,수능이후 기말고사 응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출석일수를 채워야 졸업이 됩니다. 출석일수 미달이면 그것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 자체가 안될수도 있습니다. 학교에 가서 정시에 관한 정보도 교류하고 즐거운 시간을 가지도록 하세요. 둘째,대학입시 설명회나 대입박람회 등에 학교에서 단체로 가려고 하는데 가고 싶어 하지 않는 학생도 있다. 이런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상담하였다. 언젠가는 대학에 갈 것이지요? 그러면 대학 입시에 관한 분위기도 보고 새로운 자극도 받는 의미에서 대학입시설명회 가보세요.하나라도 저산의 미래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을 것입니다. 셋째,대학 진학을 왜 하여야 하는가 다시 한번 생각하는 학생도 있다 . 이런 학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상담을 하였다. 대학진학을 하는 목적을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1. 자신이 하고 싶은 직업을 준비하는 것 2. 자신이 관심있어 하는 학문을 공부 3. 대학에서 친구를 사귀는 것(이성교제 포함) 왜냐하면 상당수의 청소년이 대학에 가니까 4. 재충천 5. 지역사회에서 중심체 수험생들은 기말고사를 보고나서 출석일수를 채우면서 수시지원도 하고 논술면접도 보면서 정시에서 어떻게 지원을 할 것인지 잘 지도하기 바란다.
우리말 사전에 ‘디지털 치매’라는 말이 생겨났다. 아는 길도 내비게이션을 켜놓고 가야 안심을 한다. 지도를 보고 찾아가는 것은 생각하기도 두렵다. 휴대전화 단축번호 사용으로 가족 간의 전화번호가 가물거릴 때가 많다. 모니터를 보지 않고 노래방에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다섯 손가락 셀 정도이다. 계산능력이 떨어져 스마트폰이나 계산기를 꺼내서 확인해야만 한다. 이것이 디지털 치매 현상이다. 지하철을 타면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이 스마트폰에 몰두하는 모습이다. 대다수 사람들 손에 스마트폰이 들려있다. 전화를 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자책을 읽는 사람도 드물다. 메시지 읽고 보내기, 인터넷 검색, 음악듣기, 게임 등에 몰두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많이 하는 것은 채팅과 게임이다. 사람들 손에서 신문과 책이 사라지고 스마트폰이 들려있다. 문명의 이기를 따르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스마트폰은 대인간의 관계를 단절하고 생각하는 능력도 퇴보시킨다. 무엇보다 중독 상태로 이르게 한다. 청소년 폭력문제도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 기기가 한몫 단단히 하고 있다. 스마트폰 중독을 걱정하는 소리도 늘고있다. 보도에 의하면 우리나라 청소년 7명 가운데 1명이 스마트폰에 중독되어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인터넷 중독의 두 배라고 한다. 얼마 전 KBS 방송 보도에 따르면 스마트폰이 없으면 허전함과 불안을 느끼는 청소년이 초등 4학년과 중1, 고1 등 이른바 학령전환기 170만 명 가운데 14%인 24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인터넷 중독을 겪는 10만 5천여 명에 비해 2.3배가량 많은 숫자라는 것이다. 학업 능력이 저하되고 금단현상까지 겪는 고위험군도 3만 9천 명이나 된다. 심지어는 식사 도중 스마트폰을 보기도 해서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불 속에서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려 잠을 설치게 만든다. 스마트폰 중독 현상이 심각하다. 스마트폰 중독 현상은 고등학교에 더 많아 절반 이상이나 된다고 했다. 가정에서도 자녀의 과도한 스마트폰 사용 때문에 갈등을 겪는다. 스마트폰 없으면 왕따 당한다는 성화를 이겨내지 못해 자녀에게 고가의 스마트폰을 구입해주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에 따르면 청소년의 스마트폰 보유율은 2011년 21.4%에서 2012년 64.5%로 1년 만에 3배가 됐다고 한다. 스마트폰 ‘카카오톡’ 채팅은 또래 간 갈등, 소문과 험담, 따돌림의 진원지로서 대인간의 관계를 해치고 집단욕설로 자살하는 사건까지 생겨났다. 때로는 은밀한 만남, 가출, 금품 요구 등 일탈과 협박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스마트폰이 학교 밖 폭력으로 확장하는데 이용되는 것이다. 스마트폰 중독 피해는 시력과 체력을 저하, 수면 감소, 집중력 저하, 과도한 통신요금, 전자파 노출 등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심각한 문제는 건강한 인간관계를 해쳐서 정서지능 발달을 막고 있다. 청소년들의 낮은 자존감과 행복지수, 자살률 증가, 어른 공경, 스승존경을 사라지게 하는 것 등 정서지능의 저하는 심각하다. 최근 학교 폭력 문제도 땀 흘리는 학교체육을 게을리하고 디지털 기기의 과도한 의존 때문이다.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기기의 과다 사용은 디지털 채매 등과 같이 두뇌발달에도 영향을 준다. 한 포털 사이트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직장인 10명 중 6명 이상이 디지털 치매를 경험했다고 한다. 디지털 치매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고 한다. 하나는 기억을 하거나 계산을 하는데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집중력 부족 현상. 또 하나는 학습 능력 감퇴 현상을 보이는 것을 말한다. 디지털기기의 지나친 사용은 이처럼 기억하거나 계산하는 의존심을 은연중 심어주어 집중력과 학습 능력 저하로 이어지는 것이다. 디지털기기 문명의 이기를 벗어나서 살 수는 없겠지만 현명하게 이용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기기 의존 뒤에 있는 피해를 각성해야 한다. 문제가 심각한 중독 학생들은 전문상담기관을 찾아 치유에 힘을 기울여야 하겠다. 함께 공유하는 가족 문화를 만들고 대화와 바른 이용을 모색하여 디지털기기 사용을 줄이도록 해야 한다. 학교에서는 휴대전화 사용을 제한하고 예술, 체육 활동 강화 등 보다 적극적인 대안을 찾아야 한다. 아이들 인성교육 말로 하는 것보다 땀 흘리고 실천하며 공유하는 문화를 만들 때 가능하다.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기기 사용을 줄이는 것과 함께 이루어지면 지금의 학교폭력 걱정하지 않을 수 있다.
완연한 가을이다. 단풍도 절정이다. 아름다운 계절이다. 그래서인지 결혼청첩장도 연달아 날라온다. 토요일인 오늘 비가 내린다. 그런데 예식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오후 1시,또 하나는 오후 5시 30분. 앞에 것은 고교 동창이자 교직동료 아들 혼사이고 하나는 우리 학교 교직원이다. 중국에서 날라온 미세먼지 농도가 짙으니 하늘이 뿌옇다. 비가 내리니 그 비 그대로 맞으면 건강에 좋지 않다. 그러나 기꺼이 예식장으로 향해야 한다. 예식장에서혼주와 결혼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하객들에게 직접 들려 주니 결혼의 뜻이 깊다. 앞서가는 결혼 풍속도다. 귀가하여 뒷베란다 일월저수지를 내려다 본다. 가을 풍광이 아름답다. 이 비가 그치면 이제 저 단풍도 이제 끝이라 생각하니 카메라를 잡는다. 8층에서 보는 풍경이 너무 익숙하여 19층으로 올라가 조망해 본다. 마치 낮게뜬 비행기에서 내려다 보는 기분이다. 일월저수지. 방죽 둑에서 한 바퀴 돌면 1,900m이다. 빨리 걸으면 20분에서 30분 정도 걸린다. 가까이 있어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산책할 수 있다. 그러나 출퇴근이 정해져 있는 공무원이라 토요일이나 일요일밖에 시간이 없다. 일부러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일월저수지 일주길은 크게 넷으로 구분된다. 버드나무 길, 메타세콰이어 길, 벚나무 길, 중국단풍 길. 버드나무는 아직 초록이다. 그러나 낙엽은 진행되고 있다. 카메라를 바닥에 잡으니 바닥 낙엽과 60대 할머니가 보행기를 밀고 가는 장면이 포착된다. 산책길 옆 논과 밭을 보니 벼는 이미 추수를 끝냈다. 부지런한 농부는 커다란 배추 포기를 끈으로 묶어 놓았다. 김장김치의 재료가되리라. 함께 재배하고 있는 무우와 상추, 파도 잘 자라고 있다. 저수지 물이 차가운지 오리들도 뭍으로 나와 햇볕을 즐기고 있다. 야외음악당을 지나니 보식할 나무들이 누워 있다. 지금이 가을철 식목에 적기인가보다. 해마다 보았던 저수지의 부들 열매는 보이지 않는다.소시지처럼 생긴 것이 터지면서 흩어져 하얀 털이 날렸었는데…. 저수지의 생태계도 변하나 보다. 벚나무 길은 꽃이 개화한 봄이 절정이지만 가을 분홍빛 단풍도 보기에 좋다. 저수지에 검은색의 가마우지가 보인다. 이 새는 잠수능력이 뛰어나 한 번 잠수하면 어디로 나올 지 모른다. 텃새는 아닌데혹시 먹이가 풍부한 이 곳에 자리 잡은 것은 아닌지? 방수로 쪽으로 가니 공사가한창이다. 저수지 개보수 공사다. 바닥을 레미콘으로 다지고 있다. 저수지 안전을 꾀하는 것인데 경기도의 경우 13곳 저수지를 140여 억원을 들여 공사를 펼치고 있다. 이 저수지가 1950년대 초반에 만들어졌는데 그 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다. 둑 위의 중국단풍길. 단풍이 아직 절정은 아니지만 좀 있으면 장관을 이루리라. 둑 아래 일월초등학교 어린이들이 가꾸는 행복텃밭.도시민들이 농작물을 가꾼다는 것은 행복의 시작이다. 도시학교에서농사 경험은 소중한 체험이다. 가까이 저수지가 있다는 것은 도시민에게 행복을 안겨준다. 사시사철 변하는 자연은 인간의 심성을 치료해주기도 한다. 아름다운 계절이다.
교사들더러 해적이 되라고? 헉, 도둑이 되라는 말인데 맞는 말인가? 자세히 보니 교사들에게 해적처럼 가르치라는 말이다. 더 자세히 보니 교사들에게 해적정신을 가질 것을 말하고 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을 보니 해적(PIRATE)의 첫글자에 해당된다. 얼마 전 학교 교장실에 책 한 권이 도착하였다. 제목은 '무엇이 수업에 몰입하게 하는가'다. 데이브 버제스가 저자인데 한국판이 나온 것이다. 원제는 'TEACH LIKE A PIRATE'(해적 같이 가르쳐라)다. 출판사 대표가 보내 준 편지를 읽고 나니 교사라면 꼭 읽어보아야 할 책으로 보인다. 그렇다. 해적이 실패를 두려워 하는가? 실패하지 않도록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해적은 자기의 목숨을 걸고 도적질에 나선다. 해적은 모험과 도전을 즐긴다. 그들은 도적질이 성공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지도 모른다. 목숨을 담보하고 도적질에 나선다. 교사도 목숨을 내걸고 수업에 임한다면? 부장회의에서 충격적인 두 문장을 소개하였다. "학교 출석이 의무사항이 아니라면 내가 들어간 교실은 텅 비어 있지 않을까?" "내 수업은 학생들이 티켓을 구입해서 들어올 만한 수업인가?" 학생들에게 출석을 자유 의지로 맡기고 티켓을 구입해서 수업에 들어오라고 할때 교실이 학생들로 차 있다면 성공한 교사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학생들이 억지로 등교하고 억지로 자기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은 아닌지반성해 보아야 한다.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지만 내 수업을 개인이 티켓을 구매해 듣는다면몇 명이나 교실에 들어올까? 교사들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해적을 가리키는 첫글자에 대해 알아본다. 첫째, 열정(P-Passion). 우리는 교사로서 우리의 일에 열정을 가져야 한다. 교사의 생명은 수업이다. 수업에 열정을 바치지 않고 대강한다면? 해적이 대충하여 도적질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 오히려 경찰에게 잡히고 말 것이다. 들째, 몰입(I- Immersion). 교사가 수업에 몰입하지 않고서 학생들을 수업에 빠지게 할 수는 없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하는 것. 교사가 가르치는 일에 푹 빠져야 학생들도 수업에빠져드는 것이다. 교사가 먼저 강물에들어가 있어야 학생들에게 수영을 가르칠 수 있다. 셋째, 관계(R-Rapport). 우리는 흔히 공감대 형성을 이야기 한다. 교사와 학생이 인간적인 공감대가 형성이 되었다면 교육의 90%는 성공이다. 염화미소가 통한다. 체벌이 금지되었지만 존경하는 교사의 체벌은 사랑으로 받아들인다. 인간적인 유대관계는 수업을 성공시킨다. 넷째, 질문과 분석(A-Ask and Analyze). 질문을 잘 하는 교사가 휼륭한 교사다. 그는 질문으로 학생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끌어낸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에서도 질문이 중요하다. 학생들에게 좋은 질문을 하고 학생들의 답변을 분석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다섯째, 변신(T-Transfomation). 학생과 교사간에 장벽을 허물려면 교사의 변신이 필요하다. 학생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변해 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학생들의 눈높이에 다가가지 못하면 그는 교직에서 점차 멀어진다. 수업시간 학생들과 코드가 맞지 않으면 수업은 실패작이다. 여섯째, 열광(E-Enthusiasm). 열광은 교실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도구다. 교사는 이 도구를 자유자재로 적시에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6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열광이다. 학생들이 교사에게 열광한다면, 배움에 열광한다는 그 수업은 성공이다. 그러고 보니 교사들이 읽어야 할 책 한 권이 늘었다. 여기에 나와 있는 수업애 임하는정신을 본 받아 자기수업에 적용시킨다면 교사들의 수업은 확 달라질 것이다. 교사와 학생이 수업에 몰입하고 열광하는 모습이 그리워진다. 그러면 우리의교육은 완전히 달라진다. 교사는 학생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조선시대의 시(市)인 여주목(牧)에서 군(郡)으로 강등되었다가 118년 만인 2013년 9월 23일 시로 승격한 여주시 천송동 물가에 영릉의 원찰이었던 사찰 신륵사(神勒寺)가 있다. 이곳의 정자에서 내려다보는 남한강의 아름다운 풍경은 영화나 드라마의 배경이 될 만큼 운치가 있어 찾는 사람들이 많다.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확실한 근거가 없고, 고려 말인 1376년에 나옹 혜근이 머물렀으며, 한때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자 영릉의 원찰로 보은사(報恩寺)라 불렀다. 이곳에서 입적하며 신륵사를 대찰로 만든 나옹선사는 무학대사의 스승으로 읽어볼수록 가슴에 와 닿는 ‘청산은 나를 보고’를 남긴 고승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 생략 ~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도 몇 가지 전해진다. 미륵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고, 건너 마을에 나타난 사나운 용마를 인당대사가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여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곳에 조사당(보물 제180호),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보제존자석종(보물 제228호),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보제존자석종앞석등(보물 제231호),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보물 제1791호), 극락보전(경기도유형문화재 제128호) 등 중요문화재가 많으며 구룡루, 명부전, 시왕전, 산신각 등의 부속건물이 있다. 편액에 ‘봉미산신륵사’가 써있는 일주문을 지나 강변을 걸으면 조포(潮浦)나루터 표석에 1963년 10월 23일의 조포나루터 나룻배 침몰사고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신륵사로 소풍 왔다가던 안양 흥안초등학교 5, 6학년 학생들이 탄 나룻배가 이곳에서 침몰하여 어린이 37명, 교사와 학부모 12명이 익사하였다. 세월이 약이라고 강물은 그때의 슬픈 사실을 모른 채 유유히 흐르고 한가롭게 표석을 지나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밝다. 입구에서 시원한 물 한 모금 마시며 갈증을 해소하고 고단한 마음을 씻어내는 세심정이 맞이한다. 범종각의 내부에 사물인 법고, 목어, 운판, 범종이 걸려있다. 범종은 깨달음을 얻게 하고, 법고는 축생의 무리·목어는 물속 생명·운판은 하늘을 나는 생명에게 석가의 진리를 전하는데 의미가 있다. 수령이 600여 년이나 되는 은행나무와 참나무 보호수가 높은 곳에서 키재기를 하고 있는 모습도 볼만하다. 구룡루, 다층석탑, 극락보전이 나란히 있는데 누각 구룡루의 명칭은 석가모니가 탄생할 때 물을 뿌려 목욕시켰다는 아홉 마리용에 대한 경전의 내용이나 창건설화의 승천한 아홉 마리의 용에서 따왔을 것이라 추측되고, 누대 밑의 높이가 낮아 통로의 기능보다는 정자로서의 역할이 컸다고 본다. 극락보전 앞에 있는 다층석탑(보물 제225호)은 왠지 균형미가 부족한데 기단에서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졌다. 돌의 재질이나 조각양식은 원각사지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비슷하다. 극락보전(경기도유형문화재 제128호)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으로 경내에서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기단 위에 추녀를 받치는 4개의 활주가 있어 금방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다. 수령이 500여 년 되는 향나무 주위에 산신각, 조사당, 명부전, 관음전 등의 전각이 있다. 그중 조사당(보물 제180호)은 덕이 높은 승려의 초상화를 모신 건물로 규모가 작지만 균형이 잘 잡혀 아담하다. 불단 뒷벽 중앙에 나옹, 그 좌우에 지공과 무학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조사당의 왼쪽에 북쪽 구릉너머에 있다가 현재의 위치로 옮긴 원구형부도(경기도유형문화재 제134호)와 팔각형원당형석조부도(경기도유형문화재 제195호)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원구형석조부도(경기도문화재자료 제134호)는 주인을 알 수 없는 원구형부도로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조사당에서 오른편으로 산길을 올라가면 나옹선사의 입적과 관련된 석재 불교문화재를 만난다. 보제존자석종(보물 제228호)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해 불교의 중흥을 꿈꿨던 나옹선사의 사리탑으로 단층 기단 위에 2단의 받침을 두고 종 모양의 탑신을 올렸다.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는 나옹선사의 탑비로 1379년에 세워졌다. 비문은 이색이 문장을 짓고 한수가 글씨를 써 역사적 가치가 크다. 보제존자석종앞석등(보물 제231호)은 8각 석등으로 보제존자석종 및 석비와 함께 세워졌다.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는 현재 비의 몸통에 균열이 많은데 대장각의 조성에 관한 기록이 적혀있다. 불경을 만들어 보관하기 위해 1382년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세웠던 대장각은 찾아볼 수 없다. 대장각기비각 밑에 있는 다층전탑(보물 제226호)은 아래로 남한강의 물줄기가 휘감아 도는 경치 좋은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쌓은 전탑이 많지 않은데 지붕돌이 몸돌에 비해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날카롭다. 나옹선사가 열반에 들자 다비식을 했던 장소에 세운 전탑으로 이 전탑 때문에 한동안 신륵사를 벽절이라 불렀다. 신륵사에서 경치가 제일 좋은 곳에 위치한 육각정자 강월헌은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사극 추노를 촬영했던 곳이기도 하다. 정자에 앉아 남한강 물줄기와 황포돛배를 바라보며 옛 사람들처럼 낭만과 풍류를 누린다. 정자 옆에 있는 삼층석탑(경기도유형문화재자료 제133호)은 암반에 건립된 3층 석탑이다. 나옹선사의 다비식을 거행했던 장소에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탑에 해당한다. 건너편의 강변유원지 선착장을 출발해 신륵사와 세종대왕릉을 연결하는 황포돛배에 올라 신륵사, 영월루, 여주보,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을 비롯해 자연경관유적 입암의 절경을 한눈에 바라보는 것도 좋다.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불가에 마주 앉아 밤새 속삭이네..” 누구나 한 번쯤은 흥얼거려봤을 법한 이 노래의 주인공, 가수 윤형주 씨가 재능기부의 일환으로 경기 기흥초(교장 이진건)의 로고송을 제작·기증해 화제다. 기흥초는 1일 전교생 예능발표회 ‘한마음 대잔치’에서 학생과 학부모, 주민을 대상으로 로고송 발표회를 열었다. “지난 3월 손주 입학식에 와서 학교 교가를 들었는데 너무 오래전에 만들어져서 노랫말이 아이들과 동떨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그는 “교가와는 별개로 요즘 트랜드에 맞는 의미 있고 신나는 학교 주제가가 있으면 아이들 정서에도 좋고 학교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직접 노래를 만들 결심을 했다고. 며칠 후 학교를 찾아가 제작 의사를 밝혔고 학교 측에서도 윤형주 씨의 ‘노래’ 기부를 대환영했다. 실제 기흥초는 1945년 개교해 역사가 깊은 만큼 ‘활기찬 고속도로’ 등 교가의 가사 중 일부가 다소 시대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8개월에 걸쳐 두 종류의 가사를 만들어 학교에 전달해 의견을 받고 채택된 가사에 또다시 두 종류의 곡을 붙여 편곡·녹음해 학교에서 최종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학교는 전교생에게 음원을 들려주고 선호도를 조사하는 과정을 거쳤다. “아이들의 심성을 건강히 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노래를 만들었다”는 그는 “노래를 부르며 친구에 대한 사랑,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 자신의 비전과 미래를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멋진 가사와 밝고 명랑한 멜로디에 듣고 있으면 저절로 신이난다”는 임태희(3학년) 학생의 말처럼 그가 만든 로고송은 ‘좋아서 귀여워서 사랑스러워서 늘 함께 있고 싶은 친구들’, ‘세상을 움직이는 이 나라의 리더’ 등 활기차고 귀에 쏙쏙 들어오는 가사로 구성돼 있다. 5학년 최은 학생은 “우리 학교만의 노래가 생겨 자랑스럽고 기쁘다”며 “이 노래로 우리학교가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윤수 교감은 “로고송이란 큰 선물을 받아 학교에 새로운 활력이 전달된 것 같다”며 “노래를 통해 학생들이 학교를 더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라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윤형주 씨는 “역사가 오래된 학교의 경우 간혹 교가 가사와 멜로디가 요즘 정서에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며 “후배·동료들과 함께 그런 학교의 교가나 로고송을 새로 제작해주는 재능기부에 나설 계획”이라고 말했다.
가을밤이 깊어지는 것도 잊은 채 학생들은 꿈을 찾기에 여념이 없다. 지난달 25일 밤 경기 금곡중(교장 강기욱) 다목적실의 풍경이다. 금곡중은 25일 오후 7시부터 26일 오전 7시까지 ‘온밤 진로비전 UP 나의 꿈을 디자인 하다’ 행사를 실시했다. 참여를 신청한 학생 53명이 학부모, 선배 멘토, 지역 멘토 등과 함께 온밤을 새우며 서로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찾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프로그램은 총 3부로 진행됐다. 1부는 모둠별로 선배 멘토와 ‘꿈이 왜 필요한가’, ‘선배멘토의 꿈 실현과정’ 등을 주제로 꿈과 직업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했고 2부는 와이즈멘토 학습멘토링을 통해 자신만의 학습 방법을 찾는 시간을 가졌다. 3부는 ‘꿈을 요리하다’를 주제로 학부모와의 즐거운 간식 시간과 함께 친구들과 각자의 꿈을 발표하는 꿈나무 만들기 활동 등이 이어졌다. 금곡중은 졸업생을 섭외해 학급별 멘토로 정해 진로 특강 등의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학생들은 국제변호사, 기업 대표, 교수, 병원 원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는 선배들을 보며 학교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직업인의 자세, 진로 설계에 대한 마인드를 갖게 됐다. 올해 3회째 실시하는 온밤 행사에 모두 참여한 최아영(3학년) 학생은 “온밤 활동을 통해 나의 꿈을 찾아가고 있다”며 “점점 꿈에 가까이 성장해가고 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장홍훈 충북 양업고 교장은 지난달 28일 교정에서 ‘WGI 좋은 학교 인증 선포식’을 개최했다. WGI 인증은 윌리엄 글라써 연구소가 제안한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관계, 총체적 학습 수행능력 향상 등 6가지 좋은 학교 기준을 부합하는 학교에 수여되는 것으로 양업고는 아시아 최초 인증 사례다.
아이의 담임선생님이 학기 중 기간제교사로 바꿔졌다고 생각해봐라. 문제될 거 없나? 담임선생님은 단순히 아이들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이들의 소질과 특성을 파악하고 꿈을 키워주는 역할을 한다. 때로는 잘못을 바로잡아주고 성장을 도와주는 멘토의 역할까지 한다. 그런데 학기 중에 바꿔진다면 바람직한가. 학기 중 어쩔 수 없이 기간제 담임교사를 써야 하는 경우는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 그런데 기간제 담임교사를 써야한다. 언론에 보도된 기간제 교사 담임 비율이 15%라고 하나 훨씬 높은 학교도 있다. 대다수 도시 학교는 여교사들이 몰려있다. 그런데 젊은 여자교원의 경우 산가, 육아휴직 등 중간에 그만두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게다가 공무원 육아휴직 기간도 확대 실시되었다. 그렇다고 아이 낳는 일자를 조사하는 것은 개인 신상과 인권의 문제이고 법적 보호를 받는 문제여서 쉽지 않다. 학교 관리자의 입장에서 휴가를 학생들의 학기와 동일하게 강요할 수도 없다. 그래서 중간에 기간제 담임교사로 대체하게 되는 것이다. 연세가 많은 여교사들이 몰려있는 학교는 6학년 담임 기피현상이 심각하다. 사춘기에 접어드는 6학년 아이들, 인권의 잣대로만 가르쳐야 되니 힘이 부쳐서 ‘6학년 점수’까지 주는 현상까지 생겨났다. 체육교육도 문제이다. 햇볕 내려쬐는 운동장에서 여성 교원들이 땀 흘리며 아이들과 체육 활동 할까? 여자라고 해서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여교사로만 이루어진 학교 아이들의 운동장은 조용하기만 하다. 운동장이 활기찬 학교를 만들기 위해 체육활동을 생명처럼 여긴 나의 학교는 체육교과전담을 4년째 실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여교사로 해보지는 못했다. 남자 기간제교사를 채용해서라도 체육활동을 실시해온 것이다. 여교사 편중현상은 최근 발표한 학교 폭력과 교권 침해와 무관하지 않다. 보도된 자료에 의하면 최근 4년 동안 학생, 학부모에 의한 교권침해가 5배 이상 급증하고 학생에게 폭행을 당하는 교사도 4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당 윤관석 의원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전국 초‧중‧고교에서 지난 4년간 학생, 학부모에 의해 발생한 교권침해는 1만 6568건이나 된다. 2009년 1570건, 2010년 2226건, 2011년 4801건, 2012년 7971건, 그리고 올 상반기에만 3276건에 달했다고 한다. 학생에 의한 교권침해 유형은 폭언‧욕설(61.1%, 1만 2126건)과 수업방해(21.6%, 4287건)가 대다수를 차지했다. 새누리당 이학재 의원은 학생이 야간에 교무실에 잠입해 오물을 투척하고 도끼를 놓는가하면 벌을 받는 도중에 담배를 피는 등 상상할 수 없는 교권침해가 학교에서 일어난다고 개탄했다. 지난달 1일 경북의 한 중학교 3학년 A(14)양이 교무실에서 교사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폭행까지 했다. 이 학생은 다른 반 학생들의 옷을 빼앗아 무단으로 나갔다가 불려와 경위서를 쓰라고 하자 얼굴에 침을 뱉고 허벅지와 정강이를 걷어찼다. 부장교사는 전치 2주의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고 있다. 2012년 6월 경기도 일산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담배를 피운 것 같으니 흡연 측정기로 측정해보자고 하자 교사를 발길질로 넘어뜨리고 주먹과 발로 폭행하고 침을 뱉었다. 국회 김세연 의원(새누리당)이 10월13일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교권 침해 현황 및 사례'에 따르면 지난 5년간 학생에게 폭행을 당한 교사가 343명에 달했다. 학생에게 폭행을 당한 교사 수는 지난 2009년 31명에서 2010년 45명, 2011년 59명, 2012년 132명 등으로 급증했다. 예전에 없던 교육현장의 문제, 김세연 의원이 지적한 학생인권조례 제정시기와 맞물린다는 지적도 틀리지 않지만 여교사 편중현상도 원인이다. 도시학교에 남교사로 부임하면 묻지 마 6학년, 묻지 마 체육교과전담이 되어야 한다. 남교사 수가 많으면 능력이나 적성을 고려하여 업무나 학년배정을 할 수 있는데 여성교원 편중현상이 워낙 심하기 때문이란다. 여성부와 여권신장 인권단체에서는 국회의원 정족수, 취업인력 등에서 남녀 차별금지법을 주장하지만 교직의 여성화야말로 성비 균형의 문제이다. 학기 중 기간제 담임교사를 써야 하는 문제, 학교폭력의 문제, 교원 성비균형이 있을 때 바람직하게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 교직에서 남성의 비율을 높이는 정책은 교육 정상화와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교직의 여성편중현상 완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 도입해야 한다. 교원인사 정책 시 시군별 남교사 비율을 조정하는 정책 검토해볼 만하다. 또한 장기적으로 교원임용교시 남교사 정수를 배정하는 정책을 고려해야 한다.
조선 왕조는 고려 왕조가 막을 내린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오랫동안 나라를 이끌었다. 500여 년의 역사를 지킨 조선 왕조의 무덤 119기를 왕과 왕비가 잠들어 있는 왕릉(42기), 왕세자와 왕세자빈이 묻혀 있는 원(13기), 대군·공주·옹주·후궁·귀인이 묻힌 묘(64기)로 구분하는데 왕릉 42기 중 개성에 있는 제릉과 후릉을 제외한 40기가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조선 왕릉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조선의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의 무덤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유적지로 주변의 풍경과 어우러지는 큰 봉분과 많은 석물들이 엄숙한 분위기를 만든다. 또한 자연을 중시하는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받아 자연친화적인 아름다움이 뛰어나다. 조선 왕릉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능(陵)이 여럿이다. 그중 영릉은 3기나 있다. 바로 4대 세종의 영릉(英陵), 17대 효종의 영릉(寧陵), 21대 영조의 맏아들로 사후 왕으로 추존된 진종의 영릉(永陵)이 그러한데 우리나라 역대 군왕 가운데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긴 세종의 능이 영릉을 대표한다. 세종대왕은 22세에 임금으로 등극한 1418년부터 1450년까지 32년간 재위하였다. 영릉(세종대왕릉)은 사적 제195호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매표소를 지나면 세계문화유산을 알리는 표석이 정문 입구에서 맞이한다. 정문에 들어서면 왼편에 야외유물전시장과 세종전, 정면에 훈민문, 오른편에 세종대왕상과 재실이 있다. 야외유물전시장은 세종시대의 과학기구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해시계·천상열차분야지도·자격루·관천대·측우기·혼천의·간의 등을 복원하여 야외에 전시하였고, 세종전은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유물전시관으로 세종대왕의 어진과 당시에 사용하거나 간행한 과학기구·악기·책을 진열하였고, 1970년 복원한 재실은 제관이 머물며 제사를 준비하던 집으로 담장에 조선왕릉 40기의 사진이 전시되고 있다. 현판의 한글에서 세종대왕의 숨결이 느껴지는 훈민문을 들어서면 물고기들이 노니는 연못(내연지)과 울창한 소나무 숲이 맞이한다. 나무에 붉은색을 칠하여 신성 구역을 알리는 홍살문 앞에 속세와 신성한 지역의 경계역할을 하는 계류 위에 놓인 금천교가 있고, 홍살문을 지나면 정자각(丁字閣)과 왕릉이 한눈에 들어온다. 참도가 길은데 길옆으로 넓은 잔디밭과 수령이 오래된 소나무들이 있어 운치가 있다. 참도는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돌길로 왼쪽의 혼이 다니는 신도(神道)는 높게, 오른쪽의 임금이 다니는 어도(御道)는 낮게 만들어져 있다. 정자각은 왕릉에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지은 ‘丁’ 자 모양의 집으로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은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 왼쪽 계단으로 내려와야 한다. 정자각의 왼쪽에 제례 음식을 데우고 준비하는 수라간, 오른쪽에 능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수복방과 영릉비가 서있는 비각이 있다. 영릉비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약력, 영릉을 옮긴 사실을 기록한 비석이다. 비문의 '조선국 세종대왕 영릉 소헌왕후 부좌'가 왕비가 대왕의 왼편에 묻혔음을 알려준다. 영릉은 오른편의 소나무가 늘어선 계단을 올라야 만난다. 영릉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조선 왕릉 중 최초로 하나의 봉분에 왕과 왕비를 합장한 능으로 국조오례의에 따른 무덤 배치가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둘러보면 멋들어진 낙락장송 앞에 봉분을 보호하기 위하여 삼면에 둘러놓은 곡장,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설치한 봉분, 영혼이 나와 놀다 가는 혼유석, 불을 밝혀 사악한 기운을 쫓는 장명등, 문인석과 무인석, 석양과 석마 등이 짜임새 있게 배치되어 있다. 원래의 영릉은 1446년에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헌릉의 서쪽에 미리 쌍실의 능을 만들었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이후 세조 때부터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주장이 있어 예종 때인 1469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봉분과 장명등 사이에 있는 혼유석 2좌가 합장릉을 알린다. 능에서 바라보는 아래편의 풍경도 아름답다. 영릉에서 내려오다 노송이 만든 멋진 그림자를 만났다. 하지만 그림자는 모양과 크기가 수시로 변하는 허상이다. 500여 년의 역사를 완전한 형태로 묵묵히 증명하고 있는 조선 왕릉의 가치가 크다는 것을 멋진 그림자가 알려준다.
세종대왕릉 영릉(英陵)과 효종대왕릉 영릉(寧陵)은 한글 이름이 같은데다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자락의 좌우에 자리하고 있어 세종대왕의 영릉만 기억하기 쉽다. 세종대왕릉을 돌아본 후 자연이 주는 선물을 만끽하며 산책길을 걸으면 가까운 곳에 꾸미지 않아 순수하고 소박한 효종대왕릉이 있다. 효종대왕릉인 영릉(寧陵)은 조선 17대 임금인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쌍릉으로 세종대왕릉과 함께 사적 제195호로 지정되었다. 효종대왕은 북벌이라는 큰 꿈을 이루지 못한 채 41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였지만 대동법 실시와 화폐단위 개혁은 물론 양란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바로잡는 기틀을 마련한 업적 또한 작지 않다. 효종대왕은 16대 임금인 인조의 차남으로 맏이인 소현세자가 급작스럽게 죽자 세자로 책봉되어 1649년부터 1659년까지 재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아버지 인조는 청나라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세 번 찧는 굴욕을 당하였다. 당시 봉림대군이었던 효종대왕도 이듬해 형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로 잡혀가 청나라에 8년간 머물렀다. 이때 청나라에 원한을 품게 되어 왕위에 오른 후에는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청나라에 강경한 입장을 가진 신하들과 은밀히 북벌 계획을 수립하였다. 매표소를 지나면 시골마을의 양반주택을 닮아 빗자루를 든 하인이 문을 열고 반갑게 맞이할 것 같은 재실(보물 제1532호)이 입구에 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왕릉의 재실 가운데 원형이 잘 보존되고, 건물의 공간 구성과 배치가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진 집안에 수령 300여 년으로 수형이 좋은 회양목(천연기념물 제459호), 수령 500여 년의 느티나무 노거수, 키가 큰 향나무가 있어 재실의 역사성을 높여주는데 한몫한다. 홍살문에서 능을 바라보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호위하듯 감싸고 있다. 비교적 거리가 짧은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속세와 신성한 지역의 경계가 되는 작은 개울 금천(禁川)이 흐른다. 정자각과 비각 뒤편으로 인선왕후릉이 가깝게 보인다. 정자각에는 신이 오르는 신계(神階)가 있고, 신계 첫 계단 양쪽에 태극무늬를 새긴 석고(石鼓)가 있다. 이곳의 정자각 주위에 제사 음식을 만들고 제기에 나누어 담는 수라간, 능을 지키고 제수를 준비하는 수복방, 효종의 영릉비가 서있는 비각 등이 있다. 효종대왕릉은 세종대왕릉과 달리 정자각 옆 수라간을 지나 왼쪽으로 올라가야 한다. 정자각 뒤편으로 가면 왼쪽에 사각형의 석함이 있다. 이것을 예감 또는 망료위라고 하는데 제례가 끝나고 제례음식을 치울 때 축관이 축문을 불태워 묻는 곳이다. 효종대왕릉 영릉(寧陵)은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가 아니라 아래위로 배치한 쌍릉으로 풍수지리적 이유 때문에 상하열 자리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했다. 이런 쌍릉 형식을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이라 하는데 효종대왕릉 영릉이 조선 최초다. 석물의 배치가 똑같은데 왕릉의 봉분에만 있는 곡장이 두 능이 한 영역 안에 있음을 알려준다. 왕릉과 왕비릉 모두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있다. 원래는 효종대왕이 승하한 1659년에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런데 1673년 병풍석에 틈이 생겨 광중에 빗물이 스며들었을 거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능을 옮겨야 한다는 천장론이 불거지자 현재의 위치로 입지를 정하고 능을 열어보았다. 물이 들어온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영릉은 천장하고 이에 연루된 자들은 면직을 당했다. 영릉 천장 다음 해에 인선왕후가 승하하여 효종 왕릉 아래에 인선왕후의 능을 조성하였다.
주말을 맞아 아침 일찍 길을 떠났다. 사진 찍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아내와 함께하는 여행은 늘 신선하고 가슴이 설렌다. 오전 여덟시. 서산을 떠난 우리의 애마는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 9시30분쯤 서울 갈림길에서 영동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오토크루즈 컨트롤을 시속 100킬로미터로 설정해놓고 끊임없이 스쳐지나가는 아름다운 산야를 흥미롭게 감상한다. 유난히 습하고 무더웠던 여름이 이곳 강원도 접경으로 들어서자마자 이미 저만치 뒷걸음질을 치는 듯하다. 아니 오히려 세상은 온통 가을색으로 가득하다. 아, 좋다! ‘좋다’는 말 이외에 또 어떤 형용사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핸들을 잡은 손은 가볍고 엉덩이는 들썩여진다. 조수석에 앉은 아내는 풍광이 바뀔 때마다 우와, 우와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다. 그랬다. 강원도로 가는 길은 정말 산세가 수려하다. 칼날 같은 능선과 능선이 겹쳐지며 푸른 녹음을 만들어내고 그 녹음은 다시 뭉게구름이 되어 능선을 타고 피어오른다. 산들은 녹음의 구름이요 녹음의 양탄자다. 겹쳐지고 포개어진 산세는 다시 하나로 흐르고 흘러서 영월로 집중된다. 세상의 그 어떤 솜씨 좋은 화가가 저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청량한 강원도의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여행객은 불현듯 신선이 되고 시인이 된다. 일찍이 조선시대 송강 정철 선생은 강원도와 금강산의 풍광을 일컬어 중국의 ‘여산(廬山)’보다 낫다 하였거늘, 그 말이 과장이 아님을 이제야 확실히 알겠다. ‘처음’이란 단어는 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첫사랑이 그렇고, 첫 출근이 그렇고, 첫 만남이 그렇다. 하루를 여는 신 새벽의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신선함이 코끝을 간질인다. 과연 영월은 어떤 모습으로 이처럼 설레는 여행객의 마음을 충족시켜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차는 이제 문막 IC로 접어들고 있다. 연꽃잎처럼 이어진 산봉우리 사이로 흰 운무가 춤을 춘다. 운무는 푸른 봉우리만 외로이 남겨놓고 아득히 멀어져간다. 하지만 이내 또 한 무리의 운무가 야금야금 봉우리들을 먹어치운다. 숨고 도망치며 숨바꼭질을 반복하던 산봉우리는 이제 흰 구름으로 가득하다. 어느 것이 하늘이고 어느 것이 봉우리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렵다. 문득 조선시대 이매창의 시 한 수가 떠오른다. 걸어서 백운사에 오르니 절이 흰 구름 사이에 있네 스님이여, 저 흰 구름을 쓸지 마소 마음은 흰 구름과 함께 한가롭다오. 잠시 여주휴게소에 들러 유부우동으로 이른 점심을 먹고 다시 길을 떠나 드디어 영월군내로 들어섰다. 제일먼저 큼지막한 돌에 “하늘이 내린 살아 숨 쉬는 땅! 강원도”라 새겨진 이정표가 우리를 반긴다. 시원하게 뚫린 이차선 도로를 따라 우리의 거침없는 진군은 계속된다. 이름 모를 산야초들이 아기자기하니 정겹다. 단종께서도 이 길을 걸었을까 생각하니, 갑자기 비감이 어린다. 숙부에게 왕위를 강탈당하고 천리 길을 걸어 영월로 오던 단종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우리 같은 범인의 경지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착잡한 심정이었으리라. 그래서 그랬는지 영월 땅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모든 경치가 슬프도록 아름답다는 역설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 부부는 한가로운 길섶을 골라 잠시 차를 세우고 가녀린 구절초 한 송이를 말없이 바라본다. 이름 없는 들꽃이지만 저 처연한 자주색의 자태가 단종을 추모하는 듯하다. 어떤 꽃들은 울고, 어떤 풀들은 슬픈 표정을 짓는다. 그랬다. 영월은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에도 단종에 대한 충심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과연 충절의 고장답다. 점심때가 조금 지나서 드디어 청령포의 너른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바라다 보이는 강 건너 저 곳이 바로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된 단종이 머무르던 곳이라고 한다. 비극의 현장답지 않게 원경으로 보기엔 참으로 수려한 풍광이다. 비취빛 강물이 둥그런 원을 그리며 유배지를 감싸며 흐르고 또한 단종이 머물렀다는 적소주변을 빽빽한 장송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단종에 관한 비극적인 사건만 없었다면 천혜의 휴양지라 해도 손색이 없겠단 생각이 든다. 아내와 나는 우선 다른 관광객들을 따라 선착장으로 이동하여 ‘청령3호’라 쓰인 나룻배에 올랐다. 배를 모는 사공이 말하길, 적소(謫所)까지 가려면 삼면이 깊은 강물에 둘러싸여 이 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출입할 수 없다고 한다. 여행객들은 대부분 초행길인 모양으로 전국 각지에서 골고루 모여든 듯하다. 배가 움직이자 이내 푸른 강물이 뱃전을 위협한다. 처음에 하찮게 생각했던 강물이었는데 막상 배가 물살을 가르자 꽤나 수심이 깊어 보여 사뭇 공포심이 인다. 정말 배가 없었다면 오도 가도 못하는 천혜의 고도인 셈이다. 그때 아내가 손에 들고 있던 새우깡 하나를 물속에 던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피라미들이 순식간에 새까맣게 몰려든다. 저 물고기의 조상들은 단종의 용안을 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숙연한 생각이 든다. 열일곱 어린 나이에 천만리 떨어진 낯선 고도에 갇혀 바람과 구름과 새와 물고기만을 친구로 삼으며 하루하루 사약이 오기만을 기다렸을 단종의 공포가 떠오른다.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나온 뒤로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 푸른 산 속을 헤맨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恨)은 끝이 없구나. 두견새 소리 끊긴 새벽 묏부리에 달빛만 희고 피 뿌린 듯 봄 골짜기에는 지는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슬픈 하소연 어이 못 듣고 어찌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듣는가. - 단종의 어제자규루시(御製子規樓詩) - 청령포에 들른 자, 그 뉘라서 통곡하지 않으리. 아내의 손을 잡고 청령포를 걷는다. 발걸음을 내딛자 땅속 저 깊은 곳에서 단종의 통곡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 556년 전의 비극이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는다. 어린 소년 단종이 흰 두루마기를 입은 채 어소주변을 걷고 있다.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다. 한양에 두고 온 아리따운 아내(정순왕후)를 생각하는 모양이다. 길가에 핀 야생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단종은 갑자기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낀다. 북받치는 설움에 통곡하는 것이리라.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아내의 고운 얼굴. 어린 아들을 두고 차마 눈을 감지 못하던 아버지 문종. 그리고 어여쁜 누나 경혜공주. 여기가 궁궐인가 착각하여 눈을 부릅떠보면 다시 섬이다. 이 넓은 백사장에 사람은커녕 단종의 마음을 알아주는 돌멩이 하나 없다. 그렇게 하루 종일 섬 안을 배회하던 단종은 어둠이 청령포를 깜깜하게 먹어치운 다음에서야 비로소 처소에 든다. 낮은 그럭저럭 지내왔지만 이제 찾아올 사람도, 찾아갈 사람도 없는 밤은 어찌 지낸단 말인가. 절대고독의 상황에서 슬픔과 두려움으로 몸부림치는 단종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소 안에서의 단종의 생활은 서민들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1457년 임금에서 노산군으로 낮추어진데다가 죄인의 몸으로 유배형까지 내려졌으니 지존의 존엄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주방시녀와 침방시녀만이 단종을 지켰으니 그 불편함이 오죽했으랴. 어소주변을 배회하다보니 일반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 눈에 띈다. 어소주변을 감싸고 있는 낙락장송들이 마치 사람이 절을 하는 모양으로 어소를 향해 굽어 있었다. 안내인의 설명을 들으니 소나무들이 모두 단종을 향해 절을 하고 있는 것이란다. 인공적으로 전혀 손을 대지 않았는데 나무들 스스로 굽어진 것이라고 하니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한낱 미물인 식물도 단종의 원통함에 공감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소주변에서 몇 발자국을 걷다보면 하늘을 찌를 듯이 기립해 있는 인자한 소나무 한 그루를 볼 수 있다. 바로 그 유명한 ‘관음송’이다. 언뜻 보면 두 그루처럼 보이는데 실상은 한 뿌리의 한 나무이다. 세조 2년인 1456년에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모습을 지켜보며 슬픈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볼 관(觀)’과 ‘소리 음(音)’ 자를 따서 관음송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높이 30m, 가슴높이 둘레 5.19m 크기로 청령포의 많은 소나무 중에 단연 으뜸으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한 시간 여를 청령포에 머물다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옥녀봉과 선돌을 가기 위해 다시 ‘청령3호’에 올랐다. 옥녀봉과 선돌에 가면 단종의 아내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안내인의 친절한 설명에 아내는 어서 가자며 나를 채근했다. 아내의 채근하는 모습을 보며 가정과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나를 지켜주는 아내와 딸.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이 사실은 아내와 딸이 나도 모르게 뒤따라와서 내가 주저앉고 싶을 때 내 어깨를 주물러주거나 부축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런 그들의 사랑을 나는 그동안 너무나 당연시하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반성해본다. 우리 인간은 한없이 어리석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정작 잘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물이 그렇고 공기가 그렇고 가족이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돈이 좀 없으면 어떠랴. 아무리 경제적으로 풍족한 사람일지라도 가족 간에 화목하지 못하고 갈등이 심하면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 영월 여행을 통해서, 또 단종의 생애를 통해서 나는 하루하루 생명의 위협 없이 편안히 살 수 있다는 것과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곁에서 마음껏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행복인지를 깨달았으니 참으로 귀한 여행인 셈이다. 오늘밤에는 아내와 함께 영월의 아늑한 객관에 누워 밤이 새도록 슬프도록 아름다운 영월의 역사와 사랑과 그리움과 인생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10월의 막바지인 30일부터 31일까지 이틀간 순천 팔마종합운동장에서 전라남도 학생종합체육대회가 있었다. 이번 대회는 2014년도 소년 체천을 대비한 1차 선수 선발전을 겸하여 실시한 것으로 초등학교 6학년과 1,2학년이 함께 하는 대회였다. 광양여중의 경우 2학년 선수가 없는 상태에서 1학년과 광양서초등학교에서 입학하게 될 6학년(강은영, 김수현, 정하연, 제인선, 강민지)이 팀을 구성하였다. 1차전은 장흥대덕중과의 대전에서 3대 0으로 가볍게 이기고, 2차전은 순천여중과의 대결이었다. 순천여중과는 2대 1로 이긴 성과를 이루었지만 역시 2학년 선수가 없는 연유로 다소 위축되어 팀이 1대 1의 경쟁을 보였다. 그러나 마지막 조가 이김으로 1학년(김혜미, 서현조, 이세희)과의 팀 구성을 잘 이루어 이번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학교에서 진로 교육이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진로 교육을 전담하는 부서와 전문 교사 제도가 만들어졌다. 교육부에서 현직 교사를 대상으로 연수를 실시한 후 진로진학상담교사로 발령을 내고 있다. 이들은 학생들에게 진로 수업을 하고, 학교의 진로 교육을 기획하고 실천을 한다. 고등학교는 물론이고 중학교에서부터 학생들에게 다양한 진로 교육을 한다. 학생들의 적성 검사, 개인별 포트폴리오 작성, 진로 탐색 프로그램 운영, 직업 현장 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진로 교육을 소홀히 했다. 오직 진학에 치중했다. 그것도 맹목적으로 명문대 진학에 목숨을 걸었다. 다행히 최근 학교에서 진로 교육이 활성화되고 있다. 비중도 크게 다루고 있다. 교육부의 주도 하에 체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진로 교육 강화를 위해 중학교 1학년 성적은 고입에 반영하지 않겠다는 계획까지 두고 있다. 학생들이 진로를 결정하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이다. 따라서 진로 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한 개인이 미래 삶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현실적이다. 사회적으로도 입시위주의 교육을 해소할 수 있고, 나아가서는 국가 발전에 필요한 인력을 균형 있게 양성 공급하는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도 기대가 크다. 그러나 현재의 진로 교육은 섬세하게 고민해 볼 것이 있다. 지나치게 직업 교육에 비중을 두는 것은 아닌가. 취업전문가이자 파라슈트의 저자인 리처드 볼스는 우리는 종잡을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세상을 가장 긴 안목으로 내다본 피터 드러커도 현대와 같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10년 후를 내다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직업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변화처럼, 현재 유망 직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는 시점이 되면 없어질 수 있다. 아울러 새로운 직업이 엄청나게 많이 생겨나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섣부른 직업 체험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IMF 위환 위기 이후 직업에 대한 생각이 많아 달라졌다. 직장이 우리 삶 전체를 흔들어버린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최근 청년들이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너무 눈앞에 현상에 얽매이게 된다. 일부 학교에서 취업 현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선배의 취업 강연을 준비하는 것을 보았다. 진로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안정성, 미래 유망성 등의 터널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다. 고등학교에서 전공 선택을 서두르게 하는 것도 걱정이다. 꿈을 만들기도 전에 전공 학과 선택을 강요받는다. 이것은 입시 제도가 그렇게 부추기고 있다. 저학년부터 진로와 관련된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것이 대학 입학에 유리한 시스템이다. 그래서 학과 선택을 일찌감치 하고 거기에 맞춰 동아리 활동을 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진로와 관련된 독서도 하면 유리 하다고 한다. 이렇게 지속적인 활동이 진정성이 있기 때문에 입학사정관제 등의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준다. 급할수록 천천히 가라는 말이 있다. 직업을 볼 것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봐야 한다. 낯선 것을 보았을 때 내 생각이 만들어지고 호기심이 생긴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로 예측 불가능한 삶을 산다. 하나의 길로 가는 것은 어리석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우리의 발전을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새로운 환경에 도전해야 한다. 진로를 빨리 결정하는 것보다 나를 채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스스로 방황의 길을 가야 한다. 방황이 있어야 삶의 면역력이 생기고, 근본적인 나를 찾을 수 있다. 방황하는 가운데 나를 들여다보고 그 관찰을 통해 나의 모습을 만난다. 어차피 우리 몸속에서 적성이라는 씨앗이 있다면 빨리 찾기 위해서 짓눌릴 필요가 없다. 외부의 강요에 의해 수동적으로 찾은 적성은 자칫 우리의 참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 그 씨앗이 튼튼히 싹을 틔우도록 내면을 살찌우는 것은 어떤가. 그렇다면 방황을 통해 토양을 기름지게 해야 한다. 방황의 퇴비가 쌓인 내면에서 생명처럼 자라는 적성의 씨앗을 발견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 교육이 성공했던 요인도 있지만, 실패한 면도 있다. 그중에 아이들의 삶에 어른들이 일방적으로 관여하는 측면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진로 안내도 어른들의 입장에서 하고 있다. 진로 선택을 채근하기보다는 아이들이 스스로 찾아나가도록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유망 직업보다는 꿈을 찾아다니도록 해야 한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뜨겁게 할 수 있는 꿈을 지니도록 해야 한다. 꿈을 찾는 일은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혼자서 힘겹게 찾아야 한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도 감동을 줄 수 있는 꿈, 행복한 꿈이 만들어진다.
광양중동중(교장 김한호)은지난달 31일 교육부 요청 전라남도교육청 지정 생활지도 연구학교 연구 보고회를 가졌다.이 보고회에는 동부지역인 순천, 여수, 광양, 구례,고흥, 보성,장흥 지역교사 50여명이 참여와 교육연구정보원 윤길준 연구사와 도교육청에서 임석관으로 장병호 장학관이 참관한 가운데 성대히 이뤄졌다. 현재 우리 나라의 학교교육은 지식 습득교육에 치중한 나머지 학생의 정서발달과 인성함양이 미흡하다는 판단 아래, 학교 교육환경이 취약계층, 소외계층, 한 부모 가정 학생의 비율이 높고 주거 환경도 열악하다. 이에 '실천 위주의 인성교육 프로그램 적용을 통한 인성 함양 방안'이라는 주제로 1년가 연구를 추진하였다. 학교의 이러한 요인으로 학생들의 자존감이 낮고 긍정적인 사고가 미흡하므로 학생들의 낮은 자존감을 향상시키고 올바른 인성교육을 기르기 위하여 학교생활을 통하여 학생들이 스스로 학교생활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함으로 정체성을 높이고 성취감을 높일 수 있는 프로그램 구성과 학교의 주 활동인 학교수업을 통하여 교과교육을 통하여 어떻게 인성교육을 실천할 것인가를 연구한 것이다. 장병호 장학관은 교육감의 격려사를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옳은 말보다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다. 나와 또 다른 나인 모든 사람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 이해와 협력이 곧 변화의 힘이며, 참다운 인성이다. 우리가 맡고 있는 교육은 오늘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20년, 30년, 나아가 100년 앞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배려와 나눔, 공동체 예절 등 인성이 바탕이 된 인간교육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번 연구를 통하여 얻은 결론으로 첫째, 학교 교육과정과 연계한 교과별 인성교육 프로그램 운영을 통하여 전 교사가 인성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교과서 내용 분석을 통해서 인성 요소를 추출하여 수업을 통해 지도한 결과, 학생들의 올바른 가치관이 형성되고, 바람직한 인성이 함양되었다. 둘째, 또래상담 프로그램을 통하여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도와주고, 학업 성적, 교우 관계, 이성 관계 등 또래들의 고민과 문제를 함께 모색하여 해결함으로써 즐거운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셋째, 체육, 예술 분야의 동아리 프로그램은 사전 수요조사를 하여 학생들의 희망에 따라 동아리 프로그램을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자신의 흥미와 적성에 맞는 동아리 활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공감, 소통, 긍정, 자율 등 인성교육 덕목을 실천할 수 있었다. 넷째, 학생 자치회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각종 행사에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친구, 선·후배 간에 활발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월별 행사 중 반별 스포츠대회를 통하여 협동심과 책임감이 강화되고 공감과 소통의 장이 형성되어 바람직한 인성이 함양되었다.
전남 광양여중은 10월의 마지막을 교사를 위한 마음 치유 음악회로 장식하였다. 이는 요즘처럼 학생들의 생활지도가 힘들고 다인수 학급에 1천여명에 가까운 교육공동체인 대규모 학교가 갖는 선생님들의 마음은 매우 지쳐 있음을 인식하고 이를 치유, 내지는 회복의 필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번 행사는 1학기를 마무리하면서 개최한 힐링 음악회가 선생님들의 좋은 반응을 얻어 2학기 바쁜 일정에도 추진하게 된 것이다. 출연자는 세한대학교 이광일 교수의 그리운 마음 외 1곡을 비롯하여 독일 카셀 음대를 졸업하고 룩스 앙상불 단원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은주, 첼리스트 김채연, 전남대 대학원 재학중인 김보나씨의 해금연주, 순천대학교 평생교육원 강사이신 박두규, 그리고 본교 음악교사로 피아노 전공인 노경희, 김희정 선생님이 피아노를 연주하였다. 올 해 광양여중에 부임한 공광재 교사는 이번 음악회를 통하여 “ 교사 스스로가 기획한 좋은 음악회를 가까이 접하면서 자신이 마치 왕족이나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고 소감을 밝히면서 다른 학교들도 이와 같은 프로그램을 통하여 학교생활에 지친 선생님들의 마음이 회복받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꿈과 끼를 키우는 2013 충북진로직업교육축제가개최되었다. 지난달 29일부터1일까지 충청북도교육과학연구원과 한림디자인고등학교에서 개최된 이번 행사는 충청북도내 상업계 12개교, 공업계 9개교, 농업계 4개교, 가사계 1개교가 참가하였다. 특성화고 920여명의 학생작품 684점과 68명의 교사작품 등이 전시되었고, 중학생 생활기술 경진대회, 특성화고 실무능력 경진대회, 장기자랑 한마당 등 경연대회가 이루어졌다. 또한 특성화고의 다양한 예비창업동아리 체험, 특성화고 취업박람회, 직업교육 정책 토론회가 개최되어 특성화고의 우수성과 비전을 지역 중학생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진로검사 및 상담, 릴레이 진로교육 특강을 통하여 충북의 직업교육의 위상을 한단계 더 성숙시킨 행사가 되었다. 행사 관계자는 특성화고의 이미지를 전환시키고, 지역 학부모와 중학생들에게 특성화고의 교육 내용을 알리고, 홍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특성화고의 이미지 개선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하며, 매년 개최되는 이 행사로 인해 특성화고의 부활을 기대해 본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