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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2007년 2월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발간한 두개의 해밀턴 프로젝트가 눈길을 끌고 있다. Jens Ludwig와 Isabel Sawhill은 ‘아동의 효율적인 생애초기 교육을 통한 10세까지의 성공(Success by Ten Intervening Early, Often and Effectively in the Education of Young Children)’ 보고서를 통해 생애초기 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또 하나는 ‘기회, 번영, 성장을 위한 교육전략(An Education Strategy to Promote Opportunity, Prosperity, and Growth)으로 Joshua Bendor, Jason Bordoff, 그리고 Jason Furman이 발표한 미국의 새로운 교육전략 보고서이다. 최근 AP통신에 따르면 미국의 극빈층이 1600만명으로 32년만에 최대 규모이며 빈부격차가 갈수록 심화된다고 한다. 미국인 6명 중 한 명이 정부보조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는 등 경제호황의 뒷면에 있는 미국의 어두운 단면이 드러나고 있는 가운데 이 보고서들이 세계 교육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부시대통령이 소득격차로 인한 사회문제를 이례적으로 인정하였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버냉키(Bernanke)도 소득격차가 자본주의 동력과 미국경제를 위협할 만큼 우려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어 우리에게도 많은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해밀턴 프로젝트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아동의 효율적인 생애초기 교육을 통한 10세까지의 성공(Success by Ten Intervening Early, Often and Effectively in the Education of Young Children)’ 보고서는 일종의 아동이 10세가 될 때까지 성공적 학업성취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저소득층 아동은 Head Start와 Early Head Start 프로그램을 통해 생애초기 5년 동안 양질의 교육 및 보육 혜택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 아동들이 그 이후부터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양질의 교육을 받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영유아 시기에 받은 교육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와 관련해 ‘10세까지의 성공(Success by Ten )프로그램은 Head Start프로그램과 Early Head Start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보완하며, 확장하는 차원에서 추진된다. 새로 추진되는 프로그램은 읽기 능력을 강조하는 교육내용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후 학업기간 동안 효율적인 성취를 위한 것이다. 생애초기교육을 강조하는 것은 뇌의 정형화가 아직 끝나지 않은 아동의 잠재력 실현 가능성 때문이다. 그런데 생애초기에는 아동들이 각 가정의 환경에 따라 겪는 경험이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그 경험의 결과에 따라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혹은 유아 프로그램에 들어가기 전 조차도 인종 및 계층 간 격차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대부분의 미국사회정책은 생애초기의 경험으로 인한 불이익을 따라잡을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 격차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활발하게 진행중인 영․유아 및 초등학교 시기 교육에 대한 연구의 결과에 의하면 태어나서 10세까지의 성공적인 교육경험은 이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생애초기 교육은 낮은 중도탈락률과 높은 대학진학률에 영향을 주고 더 나아가 성공적인 노동시장 진출로 이어져 가난의 연결고리에서 벗어 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또 다른 면은 이렇게 형성된 건전한 노동력은 미래의 노동기술을 향상시켜 국가경제에 기여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은 아동에게 전달되는 혜택이 부모를 통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부모들에게 임시고용이 아닌 완전고용 상태를 만들어주어 보다 양질의 보육 및 교육 환경 조성을 강조한다.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발표한 또 하나의 해밀턴 보고서는 ‘기회, 번영, 성장을 위한 교육전략(An Education strategy to Promote Opportunity, Prosperity, and Growth)이다. 생애초기부터 중등교육과정까지 교육정책의 틀에 대한 논의를 통해 지속적인 교육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육이 경제성장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밝히고 있다. 교육에 대한 투자는 사회와 개인에게 다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더구나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교육 불균형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사회 불균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노동현장에 있어서 기술이 빠르게 변화함으로써 고숙련의 노동자들만이 살아남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미국의 교육체계가 위기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다해도 성장잠재력이 없음을 역설한다. 강력한 교육체계를 갖추기 위해서 생애초기 교육에 대한 투자와 교사정년제도와 같은 교육계의 구조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최근에 제안된 생애초기교육프로그램은 주로 사회로부터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아동에 대한 것과, 주정부가 학생들을 대한 재정적 지원체계를 단순화해야 한다는 등의 논의를 하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의 많은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세계화 및 국가 경쟁력 그리고 노령화 및 저출산에 따른 문제이다. 무엇보다도 사회 양극화 현상과 고용불안에 따른 복지정책과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교육복지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교육 - 복지 - 노동정책에서 통합적인 문제해결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이런 면에서 해밀턴 프로젝트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고 볼 수 있다. 최근 Taylor-Gooby 교수도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효과적인 사회투자정책의 하나로 생애초기에 대한 교육을 강조한바 있다. 따라서 차제에 우리도 생애초기 교육에 대한 사회투자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 부모의 일자리 창출, 관련부처의 통합적 접근, 사회정책 인프라정비 등 미래의 한국정책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자리잡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청소년들이 앞으로 수십년간 살면서 다양한 사회변화를 경험할 것이다. 그중에서 지식정보사회의 발달에 따른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이 삶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한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이제 우리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더구나 앞으로 우리는 더욱 발전된 컴퓨터, 네트워크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이에 따라 국내외의 어떤 자료를 보아도 향후 성장 가능성이 높은 분야로 정보통신기술 관련 직업을 들고 있다. 앞으로 그 발전 속도는 더욱 가속화될 디지털과 유비쿼터스로 대표되는 정보통신기술에 대하여 잘 알아야만 미래 사회에 더 잘 적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정보통신기술이란? 정보통신 기술이란 정보의 수집, 가공, 저장, 검색, 송신, 수신 등 정보 유통의 모든 과정에 사용되는 기술 수단을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넓은 의미의 개념이다. 정보통신 기술은 반도체로 대표되는 소자 기술, 컴퓨터로 대표되는 정보처리 기술, 위성통신과 광통신으로 대표되는 통신기술이 합쳐진 것이며, 하드웨어라 불리는 물리적인 부분과 소프트웨어라 불리는 정보적인 부분간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디지털 기술, 초고속 정보 통신망, 뉴 미디어, 인터넷 등으로 대표되는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서 사회의 정보화가 급속도록 추진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우리의 생활 방식도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정보통신기술 관련 직업 정보통신 관련되는 직업으로 다음을 들 수 있다. 정보통신공학 기술자, 통신기기장비기술자, 통신망설계운영기술자, 인공위성개발원, 시스템소프트웨어엔지니어, 응용소프트웨어엔지니어, 컴퓨터프로그래머, 디지털영상처리전문가, 가상현실전문가, 음성처리전문가, 게임프로그래머, 교육과학용 응용소프트웨어엔지니어, 사무용 응용소프트웨어엔지니어, 데이터베이스관리자, 네트워크관리자, 네트워크엔지니어, 정보보호전문가, 웹엔지니어, 웹프로그래머, 전자상거래전문가, 시스템관리자, 시스템엔지니어, 통신장비운영원, 방송장비운영원, 시스템컨설턴트, 정보시스템감리사, IT컨설턴트, 방송장비 설치 및 수리원, 통신장비 설치 및 수리원, 통신케이블 설치 및 수리원 등이 있다. 이들 직업에 관하여 자세한 설명은 커리어넷(http://www.careernet.re.kr)이나 워크넷(http://www.work.go.kr)을 참조하기 바란다. 교육인적자원부, 한국직업능력개발원 등에서 펴낸 ‘미래의 직업세계 2007’에서도 앞으로 정보기술(IT)관련 직업이 전망이 좋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컴퓨터와 인터넷 관련 직업들은 기획, 설계 및 분석, 컨설팅, 영업 등 대부분의 분야에서 일자리 증가할 것이라는 것이다. 한국고용정보원에서 발표한 직업전망에 따르면 전자 및 정보통신 산업의 성장 추세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그에 따라 정보통신 관련 고급기술과 지식을 필요로 하는 직업의 일자리가 늘어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이 분야의 유망 직종으로는 컴퓨터시스템 설계ㆍ분석가, 시스템소프트웨어개발자, 응용소프트웨어개발자, 네트워크시스템 분석가 및 개발자, 데이터베이스관리자, 컴퓨터보안전문가, 정보기술컨설턴트 등이 꼽혔다. 정부에서는 신(新)성장 동력 10대 산업을 선정하고 향후 집중적인 투자를 하겠다고 밝혔다. 신성장 동력 산업은 디지털 TV 및 방송, 차세대 이동통신, 지능형 홈네트워크, 디지털 콘텐츠 및 소프트웨어 솔루션 등 대부분 정보통신기술과 관련된 분야이다. 정보통신기술과 관련된 직업을 갖기 위하여 필요한 것? 정보통신기술분야의 대표적인 직업으로 정보보호전문가가 가져야 할 것으로 분석적 사고(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정보를 분석하거나 논리를 사용한다), 혁신(새로운 아이디어를 산출하거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발한 아이디어나 대안을 생각해낸다), 책임과 진취성(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도전하려 한다), 성취/노력(도전적인 목표를 설정한 후에 이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꼼꼼함(사소한 부분까지도 주의 깊고 업무를 철저히 완수한다) 등을 높게 들고 있다. 즉 분석적이거나 꼼꼼하면서도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도전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청소년들이 창의력을 가지고 빌게이츠와 같은 사람이 되려는 꿈을 가지고 도전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다. 그러므로 정보통신분야에서 직업을 가지기를 원하는 청소년들은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무엇인가 이루어 보겠다는 꿈과 도전을 가지면서 아울러 모든 일을 분석적으로 살펴보고 꼼꼼함 등을 가져야 하겠다. 정보통신기술의 발전과 청소년 정보통신기술과 관련된 직업을 가지려는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일반 청소년들도 유비쿼터스와 디지털시대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요구되는 능력이 있을 것이다. 정보통신기술과 관련된 직업분야를 희망하지 않는 청소년들도 앞으로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갖기 위하여 디지털과 관련된 기초적인 능력을 가져야 하고 아울러 정보를 어떻게 수집하고, 이를 분석하여 의미 있는 정보를 찾아내며, 업무 수행에 적절하도록 조직하고, 관리하며, 활용하고, 이러한 모든 과정에 컴퓨터를 사용하는 능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또 앞으로 급격한 변화가 예상되는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따라 발생하는 역기능은 정보격차(digital divide)라고 하는데 이를 줄이는데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보통신기술의 수준은 세은 전 세계적이다. 전체 국민의 73%가 이동통신을 사용하고 전 가구의 74%가 초고속인터넷을 사용하는 등 통신이용률도 세계적 수준이다. 세계화시대에 우리나라의 뛰어난 정보통신기술을 전 세계에서 활용 가능할 가능성이 높아 청소년들이 더 많은 관심을 갖도록 하여야 하겠다.
부부가 함께 살면 식성도 따라가는 모양이다. 유난히 고구마를 좋아하는 남편 덕분에 내 식성이 변했기 때문이다. 생각만 나면 고구마를 쪄달라고 주문하다가 반응이 없으면 스스로 씻어서 쪄 먹곤 하는 남편이다. 나는 고구마에 대한 좋지 않은 추억때문에 고구마를 싫어하곤 했다. 초등학교 시절, 점심 시간이면 가난한 친구들은 밥 대신에 고구마를 먹던 시절. 어떤 친구는 거의 날마다 점심 도시락 대신 고구마를 먹었으며 그나마 없을 때는 수돗가로 달려가 물을 마시기도 했었다. 그 친구는 한 겨울에도 양말을 신고 온 적이 거의 없었고 헤진 바지에 길이마저 짧아진 옷을 입고 학교에 오곤 했다. 한 반 친구 50명 중에 제대로 점심을 가져오는 친구는 70% 정도 되었으리라. 나눠 먹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식사 시간이 되면 운동장에 나가 놀거나 어디로 가버려서 교실은 빈 자리가 많았었다. 내 기억 속의 고구마는 가난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우리 집도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다른 집들처럼 자식들이 많지 않으니 점심을 고구마로 때울만큼 형편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새 살림을 차린 새 어머니는 쌀을 아낀다며 호박밥이나 콩나물밥, 김치밥, 고구마밥을 즐겨 하셨다. 하얀 쌀밥은 명절에나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으니 요즈음 아이들이 들으면 정말이냐고 반문하리라. 어렸을 때 길들여진 입맛때문에 특정한 음식을 먹지 않거나 싫어하는 경우가 참 많다. 나에게는 호박이나 고구마가 좋아하지 않는 음식이 된 것은 바로 밥 속에 자주 등장한 탓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의 살림 지혜가 돋보인 선택이었으니, 쌀을 아낀다는 명분보다 건강에 참 좋다는 말씀을 하셨더라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 같다. 시장에 나가 보면 고구마 값이 비싼 과일값을 능가함을 본다. 참살이 식품(웰빙식품)으로 건강 식품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고구마를 사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내가 싫어하는 식품이니 혹시 친척집에서 선물로 받아도 즐겨 먹지 않으니 오로지 남편 몫이었다. 아내가 스스로 챙겨 주지 않으니 남편은 일요일 아침이면 양푼을 들고 고구마를 씻어서 쪄 먹는다며 아끼는 냄비를 태우곤 해서 타박을 듣곤 했다. 생각다 못해 지난 주말에는 할인매장에 가서 직화구이 냄비를 사들였다. 순전히 고구마를 구워 먹기 위해서, 아끼는 냄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오늘은 삼일절, 쉬는 날이니 남편은 어김없이 고구마를 들여다 보더니, "여보, 썩은 고구마가 있네. 아까워서 어떡해!" "알았어요. 날씨가 이렇게 따뜻하니 그런가 봐요. 내가 갈무리 해서 챙길 게요. 아니면 좋은 걸로 골라 사무실 식구들에게 나눠 주세요." "내가 워낙 좋아하는 거라서 다 나눠 주려다가 조금 남겨 둔 것이 화근이었네. 에이 욕심이 탈이야." 내가 안 좋아하니 자주 들여다 보고 관심을 주지 않아 생긴 일이라서 고구마들에게, 저것들을 길러낸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더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고구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은 일이었을 터인데 썩혔다며 내내 속상해 하는 남편에게도 미안하여 아침부터 부랴부랴 고구마를 씻어 불에 올렸다. 썩은 고구마들을 골라내보니 겉모습은 멀쩡한데 만지면 물렁물렁 했다. 아직 싹도 트지 않아서 얼른 봐서는 성한 것들과 똑같다. 게으른 주인때문에 제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고 버려지는 고구마들은 이제 흙으로 돌아가리라. 모든 고구마들이 싹을 틔우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대로 썩어버리는 것도 있는 걸 보니 생명의 신비감마저 느껴졌다. 어떤 것들은 땅에 심겨져 열 배 백 배의 수확을 올리는 가 하면, 어떤 고구마는 한 끼 식사로 없어지며 어떤 것들은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니, 사람의 삶과 같지 아니한가? 썩은 고구마는 땅으로 돌아가 흙을 비옥하게 할 테니 크게 보아서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고구마를 위로해 본다. 신이 창조한 세상의 사물들은 모두 이렇게 흙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길지 않은데, 인간이 만들어낸 물건들은 흙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너무 길거나 오염 물질들을 많이 뿜어내서 세상이 살기 어려워지고 질병이 창궐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썩는 데 수 백년이 걸리는 플라스틱이나 비닐 종류는 인류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었지만 쉽게 썩지 않아 땅을 오염시키는 물질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인간이 창조한 물질의 대부분은 썩지 않음을 기본으로 하니 쉽게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아닌가? 유리로 만들어진 물건들, 일용품들도 대부분 플라스틱이거나 합성수지 제품들이니 쓰레기 봉투에 넣을 것들이 못 된다. 신의 창조물인 인간과 동물, 모든 식물들은 한결같이 썩음을 전제로 한다. 그것이 우주 질서의 기본이라고 생각하니, 신의 창조 원리를 넘어선 인간의 오만함으로 생긴 환경파괴의 재앙은 곧 인간의 몫인 것이다.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과학기술의 숙제는 이제 잘 썩는 물질이면서도 오염시키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가오는 세기의 문제점은 환경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썩은 고구마를 버리면서, 아니 땅으로 돌려보내면서 나도 한 개의 고구마로 살고 있으니 제대로 살고 있는 지, 겉모습은 멀쩡한데 속이 폭삭 썩고 있지는 않은 지 돌아보게 되었다. 아마 오늘 이후로 나는 결코 고구마를 푸대접하지는 않을 것 같다. 모든 것이 다 연결되어 있음을 보았으니 뒤늦은 깨달음 한 조각에 감사할 뿐이다. 이제 다시는 고구마를 보며 가난을 연상하지도, 쌀밥을 그리워 했던 유년도 떠올리지 않으리라. 오늘 먹은 고구마 맛은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말없이 땅으로 돌아가는 썩은 고구마가 3월 첫날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구나! 홀리스틱교육은 바로 이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나와 연결되어 있으며 순환된다는 것을! 2007학년도에 만나는 아이들에게는 하찮은 사물 속에서도 숨겨진 의미를 찾게 하는 '마음의 눈'을 어떻게 띄워줄까 고민하며 살라는 3월 첫날에 깨달은 화두이다.
요즈음 외부에서 들려오는 교육관련소식은 교원들을 자꾸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원하지 않는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학생들을 마음편하게 지도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때도 있다. 그러나 이제 새학기가 시작되고 있다. 외부여건이 아무리 복잡하다고 해도 역시 교원들의 생각은 학생들 지도를 잘 해야 한다는 것이 전부일 뿐이다. 지난달은 어느학교나 새학기 교육계획과 교육과정편성의 마무리 시기였다. 이 시기에 계획을 잘 짜야만 1년동안 차질없는 교육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위해 지난해 말부터 충분히 준비를 해왔다. 그것을 방학내내 검토하고 수정하여 최선의 교육계획을 세우게 된다. 마지막으로 부장협의회에서 최종수정을 하고 교사들에게 공고하게 된다.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그대로 1년동안의 교육활동이 진행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과정중에 우리학교(서울 대방중학교, 교장: 이선희)는 좀 색다른 과정을 거친다. 보통의 학교는 각부서에서 세운 계획을 부장협의회에서 검토 결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그 과정의 범위를 조금더 넓혔다. 물론 지난해에도 이렇게 했다. 각부 부장교사와 기획교사가 함께 모여 검토를 하는 방법이다. 각 부서에서 업무를 추진할때 부장교사와 기획교사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는 것을 참작한 것이다. 하루를 잡아서 충분한 토론을 거쳐 최종확정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부장교사와 기획교사의 협의회는 교내가 아닌 가까운 외부로 나간다. 1차로 학교에서 협의회를 하고나면 외부에서 다같이 식사를 하면서 열띤 토론을 벌인다. 이 내용들은 빠짐없이 교감선생님이 주요내용을 기록하게 된다. 다시 학교로 돌아오면 토론된 내용을 정리하여 최종적인 교육활동 방향이 결정된다. 그렇게 하고나면 하루가 언제 지나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된다. 부장교사와 기획교사, 교장, 교감, 행정실장이 참석하면 이는 전체교원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다. 충분한 의견교환이 가능하다. 나중에 교육활동이 진행되면서 교사들의 불만이 없다. 거의 모든 교사들의 의견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관념에서 조금만 눈을 돌리면 좋은 방법들이 많다. 부장교사와 기획교사가 함께 참여하기 때문에 의견수렴이 충분하고 부장교사와 기획교사에게 의욕을 불어 넣어준다. 특히 새로전입해온 교사들중에서 부장이나 기획을 맡은 교사들에게는 더욱더 좋은 기회이다. 새로운 학교에서의 적응은 물론, 학교를 이해하는데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이렇게 시작된 부장교사와 기획교사의 협의회는 학년말에 또 한차례 실시된다. 1년동안의 교육활동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갖자는 뜻이다. 지난해 12월에도 똑같은 협의회가 실시되었었다. '올 한해도 학교교육 잘해 봅시다. 학교교육이 잘 되어야 우리나라 교육도 잘 되는 것 아닙니까?' 교장선생님의 정리 말씀을 들으면서 그렇게 협의회가 끝나갔다.
미국 고교생 대부분이 학교수업을 따분하게 느끼고 있으며 이로 인해 5명 가운데 1명 이상은 자퇴를 고려하고 있는 등 미국도 심각한 '교실붕괴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조사결과가 28일 나왔다. 인디애나대학이 미국 전역 110개 공.사립 고교생 8만1천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한 결과 응답자 가운데 75%가 교육내용이 흥미가 없어 수업에 싫증을 느끼고 있다고 답변했다. 또 응답자 가운데 절반은 수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학교수업에 빠진 경험이 있으며 전체 응답자 중 22%는 학교를 자퇴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수업에 빠졌던 적이 있는 학생들이 자퇴를 더 많이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 조사를 실시한 인디애나대학 교육평가정책센터의 야찌 민츠교수는 "이와같은 사태는 교실수업에서 교사와 학생간에 상호작용없이 수업이 진행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면서 학급당 학생수의 문제가 아니라 수업기법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번 조사에서 응답 학생 가운데 31%는 수업시간에 교사와 상호작용이 없다고 답했다. 민츠교수는 교사들에게 일방적인 강의식 수업보다 토론과 토론, 그룹프로젝트와 같은 교육기법을 검토할 것을 권고했다.
전북교육청이 최근 초등 교사 합격자를 번복해 논란에 휩싸인 가운데 중등 교사 탈락자에게 재시험 기회를 주기로 해 말썽을 키우고 있다. 1일 도 교육청에 따르면 지난달 발표한 2007학년도 중등 교원 임용 시험에서 불합격했던 A(43ㆍ여)씨에 대해 재시험 기회를 주기로 했다. A씨는 1980년대 당시 국립대 사범대 졸업생중 미임용자를 뜻하는 이른바 '미발추(미발령 교사 완전임용 추진위원회)' 정원으로 응시했으나 2차 전형인 논술 시험에서 답안 작성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불합격했다. A씨는 지난달 말 합격자 발표 이후 "답안 작성 규정이 명확하게 공지되지 않았다"며 이의를 제기해오다 교육청이 지난 23일 초등교사 합격자를 번복 발표하자 교육청에서 밤샘 농성을 벌이는 등 반발 수위를 높여왔다. 교육청 관계자는 "'미발추' 선발 취지가 미임용자에게 교단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보장하자는 것인 만큼 재시험 기회를 주기로 했다"며 "A씨의 탈락으로 정원이 1명 비어있는 만큼 논술 전형을 다시 치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임용 적격 여부를 가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교육부와 고문 변호사 등에 의뢰해 행정적.법률적 자문을 거친 결과 (재시험 전형에) 문제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덧붙였다. 교육청은 그러나 중등교사 합격자를 발표한 지 한달이 지나서야 뒤늦게 추가 합격자를 선발하기로 한 데다 특정 탈락생에게만 재시험 기회를 주기로 해 임용시험 합격 여부를 번복했다는 지적을 받게 됐다. 교육청은 특히 같은 시기 치러진 초등교사 임용시험에서도 특정 수험생의 부친이 면접관으로 참여했던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탈락생들이 반발하자 지난 23일 이들 27명을 전원 합력 처리했다. 이에 따라 교육청은 교사 임용시험을 진행하면서 불합격생들의 이의 제기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한 데다 합격자 발표 이후 뚜렷한 원칙 없이 합격 여부를 번복하게 됐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교육청 관계자는 이에 대해 "불가피하게 추가 합격자를 내거나 재시험 기회를 주게 됐지만 다각적으로 검토를 거쳐 최선의 결정을 내린 것"이라며 "추후 이러한 문제가 다시 불거지지 않도록 재발방지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혜숙 | 한국방송통신대 연구교수 우리사회에서 학부모는 어떤 존재로 비춰져왔는가? 학교교육에서 후원자이거나 소위 ‘치맛바람’의 근원지, 왜곡된 교육열의 주도 세력쯤으로 다루거나 비춰졌다. 적어도 십여 년 전에는 학부모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이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최근에 학부모를 보는 시각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교육정책 토론 프로그램에서 학부모 대표가 패널로 반드시 등장하거나 새로운 대입제도의 도입이나 전형제도의 변화 등 학교교육이나 교육정책과 관련하여서 교사단체의 인터뷰와 같은 비중으로 학부모단체의 인터뷰를 다루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을 굳이 구색 맞추기라고 저평가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그 만큼 학부모 집단에 대해 교육당국자들이 의식하고 있으며, 이들의 의견 수렴을 중시한다는 반증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본다. 학부모 집단을 다루는 현재의 모습이 단지 시간 흐름의 결과는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학부모들의 적극적이며 투쟁적인 노력의 산물이다. 특히 그 과정에서 참교육학부모회와 인간교육실현학부모연대 등 초기의 학부모운동 단체의 역할이 컸다. 초기엔 학교 후원자 역할에 머물러 해방 이후 초기의 학부모단체는 학교교육의 재정 협력자, 후원자로서 역할을 수행해왔다. 학부모들은 학교교육에서 재정 지원을 담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학교교육에서 주체로서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였다. 해방 이후부터 학교운영위원회가 만들어진 1995년에 이르기까지 학내 학부모 조직은 이름과 성격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근본적으로 그 역할에서의 변화는 적었다. 해방 후 처음으로 생긴 학내 학부모 후원단체는 ‘후원회’이다. 후원회는 1946년에서 1952년까지의 학교후원조직으로 당시의 취약한 국가교육재정을 보조하였던 단체이다. 후원회의 주요활동은 회비와 찬조금, 기부금, 자축금 등의 명목으로 기금을 모아 재정적인 후원을 하였다. 그러나 학부모에게 과도한 재정적 부담을 강요하는 폐단이 발생함에 따라 교육부에서 ‘사친회’로 개편하였다. 1953년 사친회는 후원회의 폐단을 방지하고, 당시에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PTA(Parent teacher association)의 기능을 도입하여 발족하게 되었다. 사친회는 교사와 학부모가 협력하여 학교교육의 효과를 증진시키겠다는 의욕으로 출발하였으나 사친회비 징수로 인해 심한 파장을 일으켰으며, 특히 교사가 회비 징수를 책임지게 됨으로써 비교육적인 문제와 폐단을 낳게 되었다. 사친회는 후원단체가 아닌 교육단체로 자주적이며 민주적인 단체였으나 잡부금 등의 징수 문제로 인해 1962년 해산되었다. 이후 각급 학교 산하에 사친회를 폐지하고 ‘기성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국가의 교육비 전담 능력에 어려움이 컸었는데, 기성회는 1963년 발족하여 긴급한 교육시설의 확보와 학교운영을 지원하여 교육의 정상화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후 기성회비가 학교의 시설 부족을 원조하는 데서 나아가 교재연구비란 명목 하에 교원 생계 보조금 지급으로 성격이 변질되면서 기성회 회비 전용, 회비 징수 등에서 여러 부작용이 발생하여 폐지되고, 1970년에는 ‘육성회’ 조직이 만들어졌다. 육성회는 1995년 ‘학교운영위원회’가 만들어지기까지 학교의 학부모 조직으로 자녀교육을 위해 학부모들이 교육비를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다 1995년 학교운영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학부모들의 학교교육 참여가 제도적으로 마련되기에 이르렀다. 학교 내에 학교운영위원회가 제도적으로 만들어지기까지는 학교 외에서 만들어진 학부모운동 단체의 역할이 컸다. 학교운영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학교 내 공간에서도 학부모들의 주체적인 참여의 길이 마련되어 50년 이상 학교 재정 충당을 담당한 학부모의 역할에서 변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전교조 영향으로 등장한 학부모회 학부모들의 학교교육 참여 촉구에 대한 주장은 학교운영위원회가 학교 내에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 학교 내 학부모 조직의 역할이 후원의 역할에 그치는 동안 학교교육의 문제를 제기하던 학부모들이 학교 밖의 모임을 사회적으로 조직하면서 학부모의 학교교육 참여 역사는 새로 씌어지게 되었다. 학부모들이 교육주체로서 자신의 권리와 목소리를 드러낸 것은 1989년 학부모운동 단체인 ‘참교육학부모회’를 발족시키면서이다. 이로써 학부모들은 학교교육의 후원자라는 소극적 위치에서 탈피하여 학교교육의 모순을 문제를 제기하고 학교의 변화와 개혁을 요청하는 적극적 위치로 이동하게 된다. 참교육학부모회가 발족하면서 학부모운동이 태동되었는데 이런 움직임은 당시의 시대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1980년대는 교육계에 일대 지각변동이 있던 시대로,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교원노조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이며, 학부모운동이 태동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교사들은 교육민주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의 이념을 표방하고 교사의 자주적 단결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1989년 5월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를 결성하게 되었다. 전교조의 결성은 다른 교육운동에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우리사회에서 교육운동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전교조의 결성은 국가주도의 교육에 변화를 촉구한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비록 합법성을 인정받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요구되었지만, 교사뿐 아니라 학부모도 교육주체로서 교육운동의 전면으로 나서게 된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이런 배경에서 학부모운동은 전교조의 결성과 더불어 일어나게 되었다. 전교조가 결성되고 난 몇 달 뒤인 1989년 9월에 참교육학부모회가 결성되고, 그 1년 뒤인 1990년에 ‘인간교육실현학부모연대’가 발족하면서 학부모운동이 교육운동의 전면으로 부각된 것이다. 1989년 5월 28일 전교조가 결성되면서 학부모들도 교육주체 선언을 하여 그 맥을 이었다. 이 당시에 학부모들은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의 실현을 주장하는 전교조를 교육문제 해결의 주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단체로 인식하였을 뿐 아니라 교육문제는 교사, 학부모가 공동의 목표를 위해 함께 노력할 때만이 해결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기존의 육성회, 새마을 어머니회가 문교부, 교육청의 전교조 탄압에 동원되어 어용 학부모의 모습을 드러내자, 많은 학부모들이 수치심과 분노를 느끼며 자주적 학부모 모임의 필요성을 요청하였고 이것이 참교육학부모회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게 되었다. 변화하는 학부모들의 사회적 인식 참교육학부모회는 1989년 3월 11일 마산 가톨릭 여성회관에서 민주 학부모 건설 준비 위원회 주최로 개최된 마산지역 학부모 중심의 모임을 그 시초로 하였다. 이후 발기인 성격의 모임이 창립총회로 이어지고, 대구, 의정부, 서울, 광주 등의 순으로 지역 학부모회가 결성되면서, 1989년 9월 22일에 단일 조직으로서의 참교육학부모회가 창립되었다. 참교육학부모회는 학부모들이 자녀를 학교에 보내면서 겪는 고민을 통하여 좀더 나은 교육환경을 조성해 주고 싶다는 학부모들의 자생적인 사회적 인식을 바탕으로 교육 정책에서 소외되어 온 학부모의 이해와 요구를 수렴하고 이와 함께 교사, 학생, 사회 각 계층의 의견도 함께 수용하여 교육문제에 대한 여론 형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또한 교육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그 해결 방안을 함께 모색하여 교육정책 결정 과정에 학부모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참교육학부모회는 발족 초기부터 전교조가 주창하는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을 위한 참교육 운동’에 동의하는 등 전교조 지원 및 연대의 차원에서 출발하였다. 참교육학부모회는 교사들이 결성한 전교조의 영향으로 학부모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결성한 단체이다. 참교육학부모회 임원이 교육비평의 한 좌담회에서의 말에서 전교조의 영향을 알 수 있다. “참교육학부모회가 출범할 당시에는 전교조 교사에 대한 탄핵이 극에 달했던 때였습니다. 육성회 간부 같은 극소수 학부모들이 전교조 교사를 불순한 교사로 매도하면서 교사를 찾아내는 데 일조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이건 안 된다. 학부모의 자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 일을 계기로 학부모회가 결성되었습니다. 당시 학부모들은 교육체제 전반에 대해서, 그리고 극소수 부유층이 주도하는 ‘치맛바람’에 대해서 깊은 불신을 느끼고 있었고, 그것이 전교조 사태를 계기로 자연스럽게 터져 나온 것이었다고 봅니다.” 참교육학부모회가 전교조의 영향을 받아 발족한 데 비해 ‘인간교육실현학부모연대’는 전교조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으나 전교조의 결성이라는 사회적, 시대적 분위기의 영향 하에서 설립된 단체이다. 인간교육실현학부모연대는 1989년 3월 크리스천 아카데미 주체로 열린 ‘중등교육 정상화를 위한 대화모임’에 참석했던 학부모 모임을 주축으로 1989년 비공식 모임인 두 차례의 워크숍 개최를 통해, 1989년 7월에 준비 위원회를 구성하고 10월 이후 60여 명의 준비위원이 모여 학부모 연대의 정식 출범을 위한 2차의 준비활동을 가졌다. 이후 1990년 3월 3일 발기인 대회를 가진 후 1990년 4월 28일 창립되었다. 교육의 주체로서 학교교육에 참여 학부모운동 단체의 설립은 당시 사회의 민주화 흐름과 관계가 깊다. 1980년대 우리사회는 거의 모든 부문에 있어서 기존의 지배적인 질서와 새롭게 창출되는 대안적인 질서가 대립·갈등하는 시기였다. 우리사회를 규율하고 있는 기존의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려고 의도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력을 이른바 ‘민주화 운동’으로 명명하였고,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는 모든 행위들을 민주화 운동의 범주에 포함시키면서 정당화하려고 하였다. 이런 사회 각 부문에서의 민주화를 향한 요구와 시도가 교육현장에서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어, 교육운동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1989년 참교육학부모회와 1990년 인간교육실현학부모연대의 설립으로 학부모도 교육의 한 주체로서 자신들의 교육적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들을 전개하여 교육운동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학부모운동을 통해 학부모들은 개별적인 대응이 아닌 조직적인 대응으로 학교교육의 문제와 모순을 제기해 나가면서 기존의 개별 학부모들이 보여 왔던 학교와의 관계 변화를 주도하여 왔다. 교육에서 소외되어 주변적인 위치에 머물던 학부모들이 학부모운동 단체의 활동을 통해 당당히 교육에서 주체적 역할을 하기 위한 노력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참교육학부모회와 인간실현학부모연대의 설립은 학부모 참여의 양상이 기존의 후원, 지원의 성격에서 학부모의 자녀 교육에서의 권리의식을 주장하고, 이런 주장을 사회적으로 관철시키려는 사회적 성격을 띠는 학부모운동의 전개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학부모 참여의 패러다임을 바꾼 획기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양대 학부모운동 단체의 설립은 그 동안 교육논의에서 소외되던 학부모들이 학부모의 관점으로서 자녀의 학교교육에 참여하는 시대를 열게 되었으며, 이후 1990년대에 접어들어서 학부모의 학교교육 참여의 길을 확대하는 데 공헌하게 되었다. 이들 단체는 ‘촌지 안주고 안 받기 운동’, ‘육성회비반환청구소송’, ‘학교운영에 학부모 참여 보장’ 등 기존 학부모 조직과 다른 주장을 통해 학부모 참여의 새 패러다임을 형성해 나갔으며, 교육의 주체로서 학부모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데 한 몫을 담당하였다. 1990년대 이후 다양한 변화 생겨나 1990년대 이후 시민단체에 의한 시민운동의 활성화로 교육운동은 시민단체에 의해 주도되는 성격을 보여준다. 학부모운동 역시 학부모 및 시민이 연대되는 방식으로 전개되면서 학부모운동의 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학부모들로 구성된 기존 학부모운동 단체와 함께 시민의 학교교육 참여를 촉구하는 교육시민운동단체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993년에 결성된 ‘교육개혁과교육자치를위한시민회의(교육민회)’는 학부모, 시민이 함께 모여 만든 최초의 교육시민운동단체라 할 수 있다. 교육민회의 등장은 학부모운동 단체들은 물론이고 교육에 관심이 있는 시민단체들 간의 협력과 연대활동을 촉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교육민회는 국가적 정책대안과 교육개혁을 위한 운동을 중심과제로 삼아 교육시민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90년대 중반에는 ‘새교육공동체를위한시민모임’이 교육개혁의 영향으로 만들어졌으며 이후 ‘교육바로세우기전국협의회’, ‘올바른교육개혁을위한범국민연대회의’, ‘정의로운사회를위한교육운동협의회’, ‘참교육시민모임’ 등의 교육시민단체들이 다수 만들어졌다. 2000년대 들어서도 ‘학교를사랑하는학부모들의모임’, ‘교육공동체시민연합’, ‘학교사랑학부모연합회’, ‘자녀교육학부모연대’들이 만들어졌으며, 가장 최근인 2006년 9월에는 ‘뉴라이트학부모연합’이 발족되었다. 학부모운동 단체가 발족한 후에 생겨난 교육시민단체들은 기존 학부모운동 단체와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이들 단체는 보충수업폐지 반대, 0교시 수업유지, 모의고사 수시 실시, 자립형 사립 고등학교 찬성, 평준화 해제 요구 등 경쟁 중심적 교육구조가 유지되는 일련의 교육정책을 지지하면서 기존 학부모운동 단체와 그 주장을 달리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흐름은 2000년대 들어 학부모운동 단체 또는 교육시민단체가 성격이 다르며, 그에 따라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특히 2006년에 결성된 뉴라이트학부모연합은 뉴라이트운동의 연장선에서 결성된 단체로서 교육시민단체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990년대 이후 교육시민단체의 출현은 학부모운동의 기조를 보수와 진보의 양대 진영으로 재편하는 듯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사안별로 의견이 첨예하게 달라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학부모운동이 다양한 교육시민단체의 출현으로 보수와 진보의 대립에서 벗어나 그 목소리가 다양해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학부모가 균질적이지 않은 집단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앞으로 교육시민단체의 목소리는 더욱 다성화될 것으로 보인다.
양정호 |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 한국은 광복 이후 지난 60여 년 동안 교육문제에 있어서 가장 많은 변화와 혼란을 겪었다. 한국교육의 다양한 변화는 가장 직접적으로 학교구성원인 교직원과 학생에게 가장 먼저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학생을 뒷바라지하는 학부모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이런 면에서 교육현안에 대해 이야기할 때 과거처럼 학교에서 주로 생활하는 교사나 학생에 초점을 맞춘 호의에 머물기보다는 학부모가 겪어온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도 매우 의미가 있다. 변치 않는 학부모의 자녀교육열 최근 각 가정의 자녀수가 줄면서 학부모의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이 예전에 비해 크게 늘었다는 언론보도를 자주 접할 수 있다. 우리나라 학부모의 자녀교육에 대한 열정은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이지만 과연 이전과 비교해서 더 늘어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자료를 보면 학부모의 자녀에 대한 교육열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다산 정약용의 경우에는 자녀에게 책을 많이 읽어야 좋은 가문의 규수와 결혼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다양한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한양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까지 했다고 한다. 이것은 현재 우리나라 학부모들이 학원이 밀집해있는 서울 대치동으로 이사 가는 것과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광복 이후에 우리나라 학부모의 자녀교육관에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60년대와 현재의 사례를 에피소드형식으로 재구성해서 보면 와 같다. 1960년대 - 중학교 입학시험에 엿기름 대신 엿을 만들 수 있는 물질에 관한 문제가 출제되었는데 무즙을 넣어도 엿을 만들 수 있다고 항의하는 학부모들의 ‘무즙 사건’이 일어났다. -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너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배워야 하고 못 배우면 농사나 짓고 사람대접을 못 받으며 모든 뒷바라지를 다할 테니 공부 열심히 하라고 격려하였다. 2000년대 - 서울의 세 엄마시리즈가 유행하는데 자녀가 공부가 어렵다고 하면 대치동 엄마는 다른 학원으로 옮겨보자고 하고 압구정동 엄마는 이제 유학을 떠날 때가 되었구나 하며 용산 동부이촌동 엄마는 집 주위에 있는 빌딩들이 다 우리 것이니 걱정 말라고 토닥였다고 한다. - 아이의 실력은 엄마의 능력에 달려있다며 약사를 그만두고 자녀를 위해 학원 스케줄을 짜고 교육정보를 수집하고 입시 설명회 참석으로 바쁘지만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 후회는 없다는 당당한 엄마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학부모의 자녀교육에 대한 사례를 보면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학부모가 자녀교육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는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다만 사회가 발전하고 시간이 흘러오면서 자녀교육에 대한 주도권이 아버지에서 어머니에게로 완전히 넘어가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과거처럼 학부모가 학교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교육을 통해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있다’는 믿음이 점차 약화되면서 이제는 단순히 학부모가 자녀교육에 있어서 부족한 부분을 지원하는 역할에서 적극적으로 자녀교육을 직접 설계하는 매니저로서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최근에 서점가에서 ‘~엄마들의 자녀교육 성공기’라는 책들이 증가하고 몇몇 책들은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학부모가 이렇게 수동적인 모습에서 적극적으로 바뀌게 된 것은 고등교육 기회의 확대와 현재의 어려운 교육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고학력화로 자녀교육에 참여해 광복 이후에 단기간 내에 급속하게 진행된 산업화와 더불어 중등교육과 고등교육 기회의 확대는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현상으로 알려지고 있다. 60년 전에는 가장 뒤쳐진 후진국이면서 초등교육을 받은 비율도 상당히 낮은 수준을 유지하다가 1960년대에 들어서 고등학교 진학률이 70%에 이르게 되었고 현재는 거의 100%에 육박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대학교 진학률도 2005년도에는 1960년대에 비해 무려 2.6배 상승한 82%까지 증가하였다. 즉, 대부분의 학생들이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졸업한 후에도 10명 중 8명이 전문대 이상의 대학에 진학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고등학교나 대학교 진학률이 증가하게 되면서 학부모 구성도 질적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광복 이후에 대부분의 학부모가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했다면 지금은 초등학교 학부모들의 약 절반 이상이 대학교를 졸업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학부모의 학력이 크게 증가하면서 자연히 자녀에 대한 관심과 자녀의 학교생활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과거처럼 단순히 학부모들이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어떤 활동들을 하는지 정보를 수집하려고 노력하며 수집된 정보를 학부모가 서로 교환하면서 정보를 축적하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학부모들은 학교 또는 교사만이 자녀에게 의미 있는 것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학부모 자신도 어느 단계까지는 가르치거나 자녀교육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공교육에 대한 불신도 한 원인 또한 학부모들이 이렇게 자녀교육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현재 우리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과거나 지금이나 학부모들의 최대 관심은 자신의 자녀가 대학에 진학하느냐, 또는 좀더 구체적으로 명문대학에 진학하느냐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자녀의 명문대학 진학여부를 부모의 사회적 체면과 어느 정도 연계시키는 독특한 한국문화에서는 더더욱 자녀교육 열풍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고등교육을 받은 학부모들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학부모 집단은 누구보다도 우리사회에서 대학출신이라는 기득권과 특정 명문대학 출신들이 사회지배층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자녀들이 좋은 초중등학교를 가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문제는 과거와 달리 최근 나타나고 있는 공교육 약화로 인한 학교교육의 불신이 커졌다는 사실이다. 몇십 년 전에는 학교에 자녀를 보내 놓고 자녀가 학교에서 열심히만 하면 원하는 대학에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학교에만 전적으로 의지해서는 이전과 같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학부모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 자연스럽게 학부모들은 공교육보다 사교육에 더 의지하게 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조사된 결과를 보면 학생 10명 중에서 7~8명이 사교육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연히 사교육비도 급격히 증가해서 가계지출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공교육 불신과 사교육 확대로 인해 조기유학을 보내는 편이 차라리 났다는 자조석인 목소리가 들리기까지 한다. 이런 교육현실 속에서 자녀를 키워야 하는 학부모들의 입장에서 볼 때 최근 나타나고 있는 지나친 자녀교육의 관심도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교육현실에 적응해 가는 학부모 그럼 우리나라 학부모들은 우리교육의 변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해 왔을까?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만을 생각하는 미시적 시각으로 교육 전반을 바라 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좀 더 적극적으로 또는 조직적으로 학부모들이 자녀의 학교교육에 참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지금까지 학부모가 학교의 한 구성원으로 학교에 공식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부분은 현재 모든 학교에서 운영되고 있는 학교운영위원회나 학부모회 두 가지이다. 예전에는 사친회, 기성회, 육성회라는 이름으로 학부모가 단순히 학교를 후원하는 역할에 그쳤다면 지금은 학교운영위원회의 한 구성원으로 당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현재 학교운영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학부모 위원이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로 주로 구성되었거나 학교운영위원회에 대한 홍보부족을 포함한 여러 가지 이유로 몰래 참여해 의도했던 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측면도 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학부모들이 학교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다는 것은 학부모들 입장에서 의미 있는 일이다. 이와 더불어 최근에는 학부모들이 보다 자발적인 조직을 만들어서 적극적으로 교육문제에 참여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1980년대에 나타난 교육운동의 영향으로 조직된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1989)’, ‘인간교육실현학부모연대(1990)’를 시작으로 ‘학교를사랑하는학부모모임(2002)’에 이르기까지 전국 규모의 학부모단체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졌다. 이러한 학부모단체들은 과거의 학부모단체들과 확연히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즉, 단순히 학교 후원조직을 넘어서 교육의 다양한 현안에 집단적으로 의사를 표시하고 학부모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대안을 제시하면서 새로운 학부모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학부모와 학부모단체의 영향력은 상당히 커졌다. 예를 들어 각종 교육관련 정책 간담회, 토론회, 공청회는 물론 정부 주도의 각종 위원회에도 학부모단체의 대표로서 학부모가 참가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으며 교육부나 국회의원도 역시 학부모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고 있다. 이렇게 과거와는 상당히 다른 학부모의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보다는 자신의 자녀교육에만 각자 개별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교육주체로서의 책임감 가져야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과거와 현재의 학부모들은 관심 정도나 집단구성 그리고 위상 면에서 상당히 변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 지금 시점에서 학부모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자녀를 교육시키고 우리나라 교육문제에 있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지금은 광복 이후에 변화된 학부모의 모습에 적합한 사고와 행동이 필요한 시기이다. 우선 교육정책에 있어서 보다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 흔히 언론에서는 우리나라 교육 문제를 학부모의 과도한 교육열로 돌리는 경우가 있는데 과연 그런지 적극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어떤 측면에서는 다양한 교육정책의 변화로 인해 희생된 집단이 학부모일 가능성도 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성장하는데 큰 공헌을 한 것은 자녀가 지속적으로 학교에 다니도록 지원한 학부모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학부모도 교육정책이 마련된 이후에 영향을 받는 수동적 입장에 놓이기 보다는 납세자로서, 자녀의 학부모로서 적극적으로 자녀의 교육현실이 개선될 수 있도록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안심하고 보낼 수 있는 학교, 믿고 맡길 수 있는 학교, 사교육이 필요 없는 학교가 되도록 수요자의 입장에서 정부에 요구할 것은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적인 노력에 더해서 학부모단체를 통한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노력이 병행될 필요가 있다. 교사를 포함한 다른 교육집단들도 학부모의 이런 요구들이 제시될 가능성에 미리 대비해야 할 것이다. 둘째, 학교의 한 구성원으로서 책임 있는 역할을 학부모가 해야 한다. 학교는 교직원, 학생, 학부모가 서로 교류하는 공간이다. 단순히 어느 한 집단만의 목소리가 커지게 되면 학교 공동체가 제대로 굴러갈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자녀가 피해를 보거나 하면 학부모는 학교 교직원에게 직접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시험문제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자녀 일로 교사를 폭행하는 경우에서처럼 적절한 절차를 거치지 않는 경우에는 문제가 심각해지고 학부모나 교직원 모두에게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학생들이 만들어 유명해진 〈학교대사전〉에 표현된 학부모와 교사의 관계를 봐도 이 두 집단은 서로 긴장관계에 있고 ‘평상시엔 교사가 우위를 점하나 학교에서 사고나 불상사가 일어나 학부모들이 분노하면 아무도 말릴 수 없다’는 부분에서도 잘 알 수 있다. 학교 차원에서도 학부모의 의견이 적절한 절차를 통해 수렴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학부모들도 책임감을 가지고 학교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될 때 교직원, 학생, 학부모 모두가 상생할 수 있을 것이다. 변화된 여건에 맞는 태도 보여야 마지막으로 자기개발을 통해 앞날에 대비해야 한다.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자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최대 관심분야가 교육일 것이다. 자녀교육을 위해서는 희생을 해서라도 지원해 줄 각오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특히 자녀수가 한명인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여기에서 문제는 과거와 달라진 사회현상에 대한 고려를 현재 학부모들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이전에는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것으로도 충분했는데 지금은 학교교육에 더해 사교육을 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 되었다. 자연히 자녀의 사교육비를 부담하느라 대부분의 학부모는 자기 자신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게 된다. 30대나 40대가 대부분인 학부모들은 자녀교육을 위해 수입의 상당 부분을 지출하기 때문에 정작 자신의 노후보장을 위한 투자는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 더욱 큰 문제는 은퇴시기가 점점 빨라지고 수명이 늘어나면서 미래사회에는 노후에 어떻게 생활할 지가 점차 큰 문제로 부각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학부모들은 자녀교육에 집중한 나머지 자신의 노후에 대해서는 준비를 할 겨를이 전혀 없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학부모들은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만큼이나 자기개발을 비롯한 체계적인 노후대비를 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자료를 보면 지금의 자녀세대는 학부모 세대처럼 부모봉양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다를 뿐만 아니라 자녀들이 사회생활을 할 시대의 사회여건은 자녀들이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그 자체만으로도 벅찰 가능성이 있다. 이상과 같이 우리나라 학부모는 지난 60년 동안 많이 변해왔고 교육여건도 상당히 달라졌다. 이제 학부모들은 현재의 변화된 위상에 걸맞은 책임감을 가지고 자녀교육에 임할 필요가 있으며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이 더 나아질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학부모가 자녀교육에 대한 부담을 전혀 가지지 않고 학교에 보내는 것으로 모든 일이 학부모가 바라는 대로 진행되는 사회가 오길 기대해 본다.
박보영 | 연세대 교육연구소 전문연구원 언론 통해 보이는 학부모의 모습 기사와 뉴스 등 언론 매체를 통해 그려지는 학부모들의 모습은 매우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라서,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우리 사회의 교육을 망치고 교실을 붕괴시키는 주범이 꼭 학부모들인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언론 매체를 통해 그려지는 학부모들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지만, 그 대표적인 양상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학생의 권리에 대한 수호자 혹은 대변인으로서 학부모의 모습이다. 언론 매체는 학부모들이 교육현장의 전반적인 인권 수호에 대해 합리적인 활동을 벌이는 일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고, 학부모들의 이의 제기 방법이 폭력적이거나, 이의 제기 과정에서 당황스러운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에 매우 선정적인 방식으로 학부모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2006년 5월 청주의 한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무릎 꿇은 교사’ 사건을 보더라도 언론은 교사가 학부모들 앞에서 무릎 꿇는 일이 발생한 전체적인 정황과 구조적 요인 등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다루기보다는 교사가 학부모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만을 선정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교권이 침해되는 것이 모두 ‘지나친’ 학부모들 때문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학부모들은 흡사 ‘공교육 붕괴’라는 제목의 폭력무협활극 주인공처럼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학부모가 학생의 권리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것 자체가 곧 교권에 대한 위협인 것처럼 연결시키는 논리적 비약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여기서 자칫 잘못하다가는 학부모들이 교육현장의 모든 구조적 문제까지도 뒤집어쓰는 희생양이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둘째는 대학입시의 최전선에서 학생의 전문적인 매니저로서 학부모들의 모습이다. 이들의 모습은 기존 전업주부의 모습이 아니라, 입시의 경향과 대책, 사교육시장에 대한 정보통으로서 준전문가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입시 매니저로서 가장 전문성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는 ‘대치동’의 엄마들은 ‘대치동 신드롬’을 만들어내고, 그에 관련된 책들도 출간되어,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오르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이에 뒤질세라 ‘목동 엄마’들도 신드롬 만들어내기에 열중하고 있으니 한국 사회에서 학부모 역할이란 자녀에 대한 책임, 교육현장에 대한 책임과 더불어 부동산 가격에 대한 책임(?)까지도 감당해야 하는 매우 막중한 역할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학부모들의 모습은 언론과 시장의 부추김과 더불어 학부모들 스스로의 욕망이 결합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묘사된 모습 이외에도 학부모들의 모습은 자식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모습으로, 때로는 자식을 위해 새벽기도에도 나가고 천배도 올리는 모습으로, 때로는 사소한 교육문제에까지 민원을 제기하는 모습 등으로 다양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위에서 묘사된 어떠한 모습도 학부모들의 실제를 심층적으로 그리고 있지는 않고, 대개 이기적이거나 천박하게 묘사하고 있다. 경험과 다른 현실에 혼란 가중돼 그러나 실제로 학부모들은 자녀양육이나 교육현장과 관계맺음을 어떤 획기적이거나 선정적인 사건들의 모음을 통하여 경험하기보다는 꾸준히 반복되는 일상성을 통하여 경험하고 있다. 일상성 속에서 경험되는 학부모 역할이란 참으로 수고스럽고 혼란스러워서 대단한 에너지와 노동력이 투입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학부모들이 경험하는 이러한 수고스러움과 혼란스러움은 한국 사회 학부모들의 대표적 정서인 ‘불안감’으로 고스란히 축적된다. 현재 한국 사회의 학부모들이 늘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학부모 역할을 해야 하는지가 혼란스럽다. 전통사회에서는 대가족제도 내에서 부모 역할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들을 조부모 세대로부터 전수받았다면, 현재의 학부모 세대들은 핵가족화된 가족 구조 속에서 부모 역할에 대한 구체적인 교육을 받을 수가 없다. 또한 산업사회에서 가정이란 아무나 함부로 간섭해서는 안 되는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자녀교육은 부모에게, 실제로는 어머니 혼자에게 맡겨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전 세대보다 자녀의 수가 감소되어 자녀 양육과 학부모 역할에 드는 노동력이 줄어들 것 같지만 이것은 산술적인 수치일 뿐 자녀에 대한 기대감은 이전 세대보다 더 커지고, 한 자녀 혹은 두 자녀를 어떻게 키워내는가가 인생의 가치와 맞물려 평가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학부모들은 상당한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예전에는 자녀들이 많은 형제들 속에서 상호작용을 경험하며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자생력 있게 성장하였는데, 현재 한 자녀 혹은 두 자녀로 이루어진 자녀 세대들은 이전 세대보다 심각한 정서적 빈곤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자녀들에게만 몰입하기에는 학부모 세대 스스로가 짊어져야 할 짐이 매우 무겁다. 생활세계에서의 무한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고, 학부모들 스스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공부하고 교육받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학벌 위주의 현실도 불안감 키워 둘째, 한국사회의 현실 또한 학부모 역할을 어렵게 만든다. 학부모들 스스로가 사회생활을 경험해보아서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되지만, 한국사회는 그야말로 ‘학벌사회’이다. 학벌이 곧 사회적 성공의 보증수표이며, 심지어는 학벌이 공공연히 능력과 도덕성을 가늠하는 척도로도 사용된다는 것을 학부모들은 알고 있다. 학부모들 자신이 그것을 여실히 경험하기 때문에, 학부모들은 자식들의 학벌을 관리하고 싶은 욕구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고, 이것이 학부모들 사이의 불안을 무한대로 증폭시킨다. 또한 아이를 낳아 잘 키우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해도, 보육과 교육에 대해 한국사회에서는 사회 전체의 문제로 보기보다는 모두가 부모들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에, 아이를 낳아 양육하고 교육하는 일이 여유롭고 행복한 일이기보다는 굉장히 팍팍한 일이 된다. 한국사회에서 출산을 꺼리게 만드는 가장 주된 이유라는 사교육은 그 시장이 점점 확대되어 학부모들의 무한한 지출만을 기다리고 있다. 동시에 한국사회는 현재 저출산,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사회적 대책은 없고 전체적인 복지의 수준은 일천(日淺)하다. 학부모들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자녀의 사교육에 대한 부담과 더불어 자신의 노후에 대한 부담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사회에서 학부모로 살아간다는 것은 비상구가 없이 앞뒤로 꽉꽉 막힌 미로에 갇힌 것과 같다. 셋째, 공교육과의 조율 없이 이루어지는 대학입시제도의 변화방향도 학부모들에게는 큰 혼란거리이다. 자녀교육 문제와 관련하여 학부모들이 현실적으로 가장 민감한 부분은 바로 대학입시와 관련된 부분일 터인데, 교육정책이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양상도 학부모들로서는 따라잡기가 힘들다. 대학입시제도는 변화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장기적인 숙고 속에서 공교육 제도와 조화를 이루며 이루어지는 것인지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08학년도 대학입시제도는 항간에서 ‘죽음의 트라이앵글’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는 2008학년도 대학입시제도가 수학능력시험과 내신 성적, 논술시험의 반영 비율을 비슷하게 균형을 이루도록 함으로써 이전의 대학입시제도와는 달리 수험생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공교육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내신 성적의 반영비율을 높이는 것이나, 논술시험을 강화 혹은 통합논술의 형태로 변형하여 창의적 사고력이 뛰어난 인재를 선발하겠다는 취지는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수학능력시험과 내신 성적, 논술시험의 반영비율을 비슷한 수준으로 조정한다는 것도 탓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까지 공교육 제도를 통해 논술시험을 준비할 수가 없었고, 오히려 폭넓은 독서와 토론, 창의적인 사고와 글쓰기 등이 공교육 제도에 적응하기에 방해가 되어왔던 것이 한국교육의 현실이다. 공교육의 현실과 동떨어져있는 입시제도는 결국 사교육에 대한 의존이라는 당연한 해결방안을 불러오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학부모들은 자녀들과 더불어 굉장한 불안과 혼란, 수고스러움을 통하여 교육현장을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 학부모들은 언론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거칠고 아무 생각이 없거나, 기득권의 유지를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는 스캔들 속에 있다기보다는 고단한 일상 속에서 묵묵히 불안을 걷어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학부모 둘러싼 환경의 지각 변동 그렇다면 학부모들의 실제 생활과 학부모들에 대한 이미지 사이에 이러한 간극이 발생하는 것은 왜인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과장된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무언가 서서히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기에 그 변화가 감지되는 것인가? 이러한 혼란스러운 질문 속에서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학부모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규정해나가야 하는 과도기에 있다는 것이다. 학부모들의 자기이해에 영향을 주는 힘들은 여러 각도에서 작용하고 있지만, 그 핵심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학부모들의 변화에 가장 광범위한 영향을 주는 것은 ‘교육 수요자’로서의 자기이해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교육에 시장경제논리가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교육을 인격적 관계의 측면으로 보는 입장과 더불어 서비스의 공급과 수요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입장이 저변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1995년에 ‘5·31교육개혁안’이 발표된 이후로 교육개혁의 방향이 ‘수요자 중심교육’으로 설정되면서, 학부모들이 스스로를 교육 수요자라는 정체성을 통해 인식하게 되었다. 자신을 교육 수요자라고 인식하는 학부모들은 학생들과 더불어 최고의 만족을 주는 교육을 소비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게 된다. 이것은 학교에서 경험하는 교육의 질 뿐만 아니라, 학교의 생활공간, 전체적인 복지와 배려의 수준 전체에 대한 평가를 포괄하게 된다. 학부모가 스스로를 교육의 수요자로 이해할 때, 학부모는 교사를 포함한 교육 전반에 대해 평가할 권리를 가지게 되며, 동시에 다양한 교육서비스 중 만족스러운 교육서비스를 선택할 권리를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만족스럽지 못한 교육서비스에 대해서는 민원을 제기하거나 이의를 제기하거나, 항의를 하는 등 불만을 표현하게 된다. 둘째, 학부모들이 자신을 권리의 주체로 인식하는 ‘인권의식’의 확대이다. 199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도 인권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미흡한 수준이나마 인권의식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전체적인 인권과 교육권, 학습권 등의 개념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학부모들은 학생의 보호자라는 측면에서 학교생활에서 학생의 인권이 보호되도록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우리 사회의 학부모들이 가진 권리의식이 성숙하고 균형 있게 자리 잡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에, 과도기적인 문제점들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우리 사회의 학부모들은 아직 자신의 권리 주장과 더불어 타인의 권리 존중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측면이 있고, 동시에 성숙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권리를 주장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다수의 학부모들은 그들이 학생들에게 주어야 할 최선의 것이 입시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실은 학부모들이 학생들의 존엄성을 가장 심하게 훼손하는 역할을 하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율배반적인 측면도 지니고 있다. 셋째, 학부모들이 공식적인 통로를 통하여 학교교육과 교육제도 전반에 관여하게 되었다. 이제 학부모들은 사친회, 육성회, 어머니회 등과 같이 학교의 행사에 조력하는 형태와 달리 학교운영위원회를 통하여 학교의 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다양한 학부모 단체들을 통해 교육현장에 대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학부모들이 교육현장의 조연이 아니라 주연으로서 비전과 안목을 가지고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학부모들은 교육현장의 문제를 개인적 차원이 아닌 연대의 차원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경험하고 있다. 과도기에 접어든 학부모의 역할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학부모들이 스스로를 교육 수요자와 권리의 주체로서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과 교육 참여의 통로가 공식화되었다는 흐름들은 서로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관통하는 하나의 맥락이 있다. 그것은 바로 모두 학부모들에게 이전보다 큰 권한을 부여한다는 점이고, 이러한 경향은 앞으로 보다 강력해질 전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를 관찰해보면 권한을 나누어야 할 시점이 오면 항상 어김없이 사회에 큰 진통이 있었다. 양반과 상민, 귀족과 노예, 백인과 흑인, 남성과 여성이 그들의 권한을 나누기 시작할 때 갈등과 폭력, 혼란과 분쟁, 투쟁과 대립, 가해자와 피해자, 선구자와 희생양이 꼭 발생하곤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을 겪더라도 권한의 나눔은 늘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하였다. 우리 교육현장에도 이제 예상된 혼란이 진행될 것이다. 교육에 대한 권한을 나누기 위한 혼란이다. 이제까지 교육현장에서는 사실 교권(敎權)이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이제 학생과 학부모들이 이러한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함께 나누기를 요구하고 있다. 어쩌면 ‘무릎 꿇은 교사’와 같은 일들이 앞으로 더욱 많이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우리가 ‘교육 3주체’에 대해 논의를 해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마도 예견되는 갈등을 지혜롭게 풀어나가기 위해서일 것이다. 2007년에는 교사들이 스스로 권위주의를 해체하고, 학생과 학부모에게 다가가는 진정한 의미의 교권(敎權)이 확립되기를, 학생들이 자신의 권리와 더불어 스승의 권위를 존중함으로써 진정한 배움이 생동하기를, 학부모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학생의 삶을 살리고, 교사의 기(氣)를 살리고, 학교의 생동감을 살리고, 교육현장의 평화를 일구어내는 진정한 의미의 상생이 넘치기를 기대해본다. ‘교육 3주체’가 권한을 평화롭게 나눔으로써 우리 교육이 보다 인간화되기를 기대해본다. 한국사회의 현실도 학부모 역할을 어렵게 만든다. 우선 학벌 위주의 현실이 그렇다. 학벌이 능력과 도덕성을 가늠하는 사회를 경험한 학부모들은 자연스럽게 자식들의 학벌을 관리하게 된다. 또한 보육과 교육을 부모들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사회적 분위기와 공교육과의 조율 없이 이루어지는 대학입시제도의 변화 방향도 학부모들에게 큰 부담이 된다. 학부모로 살아간다는 것은 복잡한 미로 속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김성열 | 경남대 교육학과 교수 오늘날 학부모가 수행하는 역할은 이전에 비하여 다양하다. 재정후원자의 역할을 넘어서서 자원봉사자로서 그리고 학교교육과 관련한 의사결정자로서, 교육위원과 교육감선출권자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학부모들은 이제 학교 교육활동을 지원하는 데 전문성을 가지고 보다 직접적으로 참여할 것이 전망되고 있다. 그러나 학부모들은 자신들의 역할이 증대되는 것을 기대하면서도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깨닫고 있다. 이 글에서는 학부모들이 수행하는 역할과 새롭게 수행하기를 요구받고 있는 역할에 대하여 논의하려고 한다. ‘우리 아이’를 위한 지원 필요해 초·중등학교 교육에 대한 학부모들의 역할은 재정적 후원자로서 시작되었다. 초등교육이 의무교육으로 규정되었지만, 열악한 국가재정 때문에 무상으로 실시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학부모가 일정액의 교육비를 부담해야만 했다. 학부모들이 재정적 후원자로서의 역할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학부모조직이 구성되었다. 시대에 따라 학부모조직은 후원회, 사친회, 기성회, 육성회 등으로 변천되어 왔다. 초등학교 교육의 완전 무상 의무교육화 그리고 중학교 교육의 완전 무상 의무교육화가 이루어진 후, 재정적 후원자로서의 학부모 역할 수행 조직이었던 육성회는 폐지되었다. 사실 그동안 학부모들의 재정적 후원자로서의 역할 수행은 끊임없는 논란거리가 되어 왔다. 논란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국가재정의 부족으로 인한 의무교육비 부담주체로서 학부모 역할에 대한 것이었다. 이 논란은 순차적으로 이루어진 초·중학교 교육의 완전무상화가 이루어지면서 해소되었다. 다른 하나는 공적으로 제도화되지 않은 일부 학부모들의 학교운영에 대한 재정적 기여의 정당성에 관한 것이었다. 학교발전기금의 조성을 제도화함으로써 일부 학부모들의 재정적 후원자로서의 역할을 공식화하였지만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학부모들이 재정적 후원자로서 역할을 떠맡는 것을 완전히 폐지해야 하는가? 모든 학부모가 의무교육단계에서 발생하는 교육비를 공적(公的)으로 부담하는 역할은 이미 폐지되었고, 더 이상 요구되지도 않는다. 국가가 새로 태어난 세대들을 민주시민으로 키우기 위한 공통의 교육을 하는 데 드는 비용을 부담하는 것은 당연하고, 이미 부담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별학교가 특별한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거나 운동부를 구성하여 운영하거나 특정의 시설을 필요로 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비용도 여전히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부담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물론 공공 재원으로 부담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단위학교가 주체가 되어 발전기금을 조성하여 그러한 소요재정을 충당할 수도 있다. 일부에서는 발전기금의 조성이 그것에 참여하지 않은 학부모들에게 부담을 준다는 이유에서 개별학교의 특별한 소요재정도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유 있는 학부모들이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제도를 통하여 재정적 기여를 하는 것은 오히려 권장되어야 할 일이다. 단위학교 수준에서 내 아이가 아니라 우리 아이를 위하여 기여하려는 마음과 행동은 소중히 여겨져야 할 것이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단위학교 수준에서 재정적 기여를 하는데 내가 그렇지 못한다고 해서 부담을 느끼는 분위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학부모 능력 활용할 수 있어야 학부모들이 단위학교 수준에서 수행하는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가 자원봉사자이다. 학부모들은 학교행사에 노력 봉사를 하는 일, 교통지도를 하는 일, 학교급식 운영에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하는 일, 일일교사로 참여하거나 보조교사로 참여하는 등 다양한 봉사 활동을 해왔다. 학부모들의 자원봉사활동은 크게 보아 노력을 제공하는 자원봉사와 전문적 지식을 제공하는 봉사로 나눌 수 있다. 전통적으로 학부모들의 자원봉사활동은 학교가 요청하는 도움에 노력을 제공하는 것에 한정되어 있었다. 학부모들은 학교행사에 노력 봉사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학교체육대회, 연구학교 시범발표회 등 외부에서 오는 방문객이 많은 행사를 치룰 때에는 학부모들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학부모들도 그러한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교통지도를 하는 것과 같은 자원봉사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참여하는 학부모들은 녹색어머니회를 조직하여 효율적으로 자원봉사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학부모들은 급식식자재 검수요원으로, 학교급식에 모니터요원으로 참여하거나 배식하는 데 참여하여 봉사하기도 한다. 전문지식을 제공하는 자원봉사 활동은 최근에 들면서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학교에서 학생들의 다양한 교육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인력을 학부모에게 구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 또한 전문성을 갖춘 학부모들이 늘어나면서 가능하게 되었다. 교원들이 부족하여 제대로 운영되지 않은 중·고등학교에서의 수준별 교육과정도 전문성을 갖춘 학부모들로부터 도움을 받게 된다면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전문성을 갖춘 학부모들에게 시민강사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교통비 등에 해당하는 상징적 수준의 보상을 하여 수준별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데 활용하고 있는데 이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자원봉사자로서의 학부모 역할은 학교의 일을 처리하는 데 필요한 인력을 충분하게 갖출 수 없는 한 여전히 요구될 수밖에 없다. 학교는 또한 학교행사에 학부모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도움을 청할 수 있다. 그러나 학부모들이 자원봉사자로서 활동하는 것이 활성화되고 있지 않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우선, 학교에서 학부모들의 자원봉사를 귀찮아하거나, 크게 반겨하지 않는 경우들도 없지 않다. 학부모들의 자원봉사활동을 위한 자생조직이 불법찬조금 등을 조성하여 학교가 곤란한 일을 당하는 경우를 경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학교에 학부모들의 전문지식을 활용할 개방적 분위기가 아직 조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일부 학부모들이 자원봉사활동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면서 치맛바람으로 폄하하는 경우가 있다. 일부 학부모들만이 자원봉사에 참여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도 한몫하고 있는 듯하다. 학부모들의 다양한 능력을 학교교육에 활용할 수 있는 자원봉사는 활성화되어야 한다. 학교는 학부모들의 노력과 전문성을 자원봉사를 통하여 제공받으려는 개방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학부모들은 학교행사나 일을 돕는 데 자발적으로 참여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 자녀들을 키우는 데 학부모로서 도움을 학교에 보태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를 권장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공동 목표 달성하기 위한 노력 학부모들이 학교운영과정에서 의사결정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의사결정자로서 학부모 역할이 제도화된 것은 학교운영위원회가 설치되면서부터였다. 학교운영위원회는 학부모들로 하여금 재정적 후원자로서나 자원봉사자로서 역할을 넘어서서 학교운영과정에 학부모로서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학교운영위원회는 학교장 중심의 닫힌 학교운영을 학교구성주체 중심의 열린 운영구조로 바꿈으로써 학교운영의 자율성을 높이고 지역의 실정과 특성에 맞는 다양한 교육을 창의적으로 실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도입되었다. 학교운영위원회는 단위학교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의사결정과정에 학교의 구성주체들을 참여시킴으로써 학교장 중심의 ‘닫힌’ 의사결정체계를 단위학교 구성주체 중심인 ‘열린’ 의사결정체계로 바꾸어 놓은 제도이다. 학부모들은 학교운영위원회를 통하여 단위학교 의사결정자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단위학교 의사결정자로서 학부모들은 무엇보다도 학교운영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하려는 의욕을 가지는 것이 요구된다. 학교운영위원회는 학부모와 지역사회가 적극적으로 학교운영에 참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만약 학부모들 사이에 학교운영에 대한 무관심이 만연한다면, 학교운영위원회는 실패의 위험에 봉착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학부모들과 지역사회 인사들은 학교운영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려는 태도를 견지해야 하며, 특히 학교운영에 관하여 식견과 합리성을 가진 학부모들은 참여하는 것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학부모들은 또한 교장, 교사들과 학교교육을 공동으로 논의하고 학교교육에 대한 책무성을 함께 나눠가지는 동반자적 관계를 맺도록 노력해야 한다. 일부 학부모들은 학교운영위원회를 이용하여 학부모들의 이익을 최대한 반영하기 위하여 압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동반자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학부모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무조건 관철시키려고 하기에 앞서 교장이나 교사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동반자적 관계는 동등한 기반위에서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특히 학교운영위원은 학교장의 이중적 지위에서 오는 고충을 이해하고 협력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학교장에 대하여 부정적 태도로 일관한다면 이는 학교현장을 책임지고 운영하는 집행자인 학교장을 무력하게 할 뿐 아니라, 나아가 학교운영위원회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다. 학부모들은 학교운영위원회에서 행하는 자신들의 모든 활동이 개인 자격이 아닌 학부모들의 대표자격이라는 점을 언제나 유념하도록 해야 한다. 학부모 학교운영위원은 개인적 판단에 따라 활동하기 보다는 전체 학부모들의 의사를 파악하여, 비록 그것이 자신의 판단과 다를지라도 대변해야 한다. 학부모 학교운영위원은 안건을 상정하거나 발의하기 전에 학부모들의 의견을 수렴해야 하며, 학교운영위원회에서 논의된 사항을 학부모들에게 전달하고 보고하여야 한다. 의식 있는 유권자로서의 조건 교육위원과 교육감의 선출방식을 규정하고 있는 ‘지방교육자치에관한법률’이 지난 2006년 정기국회에서 개정되었다. 학교운영위원이 선출하던 교육위원과 교육감을 이제는 주민들이 직접선거로 선출한다. 학교운영위원이던 학부모들만이 참여하던 선거에 모든 학부모가 유권자로서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 2006년 8월 교육위원 선거까지 적용되었던 학교운영위원으로 구성되는 교육감 또는 교육위원 선출선거인단에 의한 교육감과 교육위원의 선출은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우선, 일부에서는 지역교육의 수장(首長)이나 대의기관의 구성원을 학교운영위원인 일부 학부모들이 선출하는 것은 지역주민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선거인단의 규모가 작은 데서 초래되는 비리와 담합 등의 가능성, 학교운영위원의 30~40%를 차지하는 교원집단의 과도한 영향력의 작용 가능성들도 또 하나의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왔다. 금년 2월 14일에 실시된 부산교육감선거부터 적용된 주민직선은 지역 교육운영의 책임자 선출에 지역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고, 그들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게 하였다. 주민직선은 주민들로 하여금 지역 교육운영의 책임을 진 사람에게 잘잘못을 직·간접으로 따져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함으로써 주민통제의 원리라는 지방교육자치제의 본래적 의미를 실현한다. 교육위원과 교육감의 주민직선은 교원들의 집단이기주의에서 제기되는 여러 가지 요구들에서 교육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학부모들은 교육위원과 교육감의 선출권자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이전보다 훨씬 큰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학부모들은 자신들의 커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을 스스로 갖추어야 한다. 학부모들은 내 아이의 교육에 도움이 되는 기술적 능력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거시적 안목으로 우리 지역의 교육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지역단위에서 학부모회를 조직하는 것도 그러한 조건을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학부모 조직은 교육감과 교육위원 선출권자인 학부모들을 의식 있는 유권자로 만드는 일, 학부모들의 교육적 요구를 선거과정에 공론화하는 일 등을 할 수 있다. 능력 갖추기 위한 제도 필요해 이제까지 살핀 바와 같이 학부모들이 수행하는 역할은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그리고 과중하기까지 하다. 어떤 이의 지적처럼 학부모의 공적 역할은 커져 버렸고, 이에 따라 학부모들은 짐이 무거워짐을 느끼고 있다. 학부모가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역할수행능력을 충분하게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학부모들에게는 그러한 능력을 갖출 수 있는 기회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게 현 실정이다. “학교와 교육은 학부모의 도움 없이는 개선될 수 없다”는 인식을 우리 모두 가져야 한다. 그리고 학부모들의 역할 수행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학부모지원 프로그램의 제도화가 필요하다. 학부모 지원을 위한 다양한 활동(정보제공, 참여촉진, 역량구축, 재정지원 등)에 관하여 국가수준, 지방 및 지역수준, 단위학교 수준의 의무를 규정하는 가칭 ‘학부모지원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 학부모지원에 관한 국가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는 미국의 ‘교육개혁법(NCLB ACT)’은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학부모들이 학교운영과정에 의사결정자로서의 역할이 제도화된 것은 학교운영위원회가 설치되면서부터이다. 학부모들은 학교운영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려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반면에 학교운영위원회를 통해 압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경향도 있다. 학부모들은 학교교육을 공동으로 논의하고 학교교육에 대한 책무성을 함께 나눠가지는 동반자적 관계를 맺도록 노력해야 한다. 동반자적 관계는 동등한 기반위에서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모든 시작은 누구에게나 항상 설렘으로 다가온다. 입학, 첫 출근, 첫 데이트, 결혼, 이사 등 모든 새로운 시작은 기대와 희망, 그리고 막연한 불안감으로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중에서도 3월은 우리 선생님들과 학생, 그리고 학부모들을 설렘으로 잔잔히 흥분시키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올해로 교직생활 30년을 맞는 필자에게도 3월은 역시 설렘의 계절로 다가온다. 이번에 강의에 들어올 학생들은 어떤 학생들일까, 어떻게 하면 새 학기를 좀더 재미있고 알차게 보낼까 등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1학기를 시작하게 된다. 기대와 설렘으로 3월을 맞는 것은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학기 초가 되면 항상 필자를 긴장시키는 것은 학생들의 강의평가도 아니요, 성과급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얼마나 존경과 신뢰의 대상으로 다가갈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육이란 선생님을 존경하고 신뢰할 때만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교육이란 학생들이 선생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수용할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므로 학생들이 신뢰와 존경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강의는 한낱 학점을 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고 필자는 학생들의 평가대상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생님은 어디까지나 신뢰와 존경의 대상이지 평가의 대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지난해는 교원평가와 관련하여 교육부와 교원단체 간의 갈등이 다른 어느 때 못지않게 심각한 한 해였다. 교원평가 논란의 핵심은 무슨 내용과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것이냐의 문제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평가의 주체를 누구로 할 것이고 평가의 결과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교사평가의 주체로 처음에는 학생과 학부모가 포함되는 것으로 논의되다가 교장, 교감과 동료교사로 한정된 것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교육부는 교사들이 학생과 학부모의 요구에 부응하여 교육에 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교사에 대한 평가주체로 학생과 학부모를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평가의 대상으로 인식될 때보다는 존경과 신뢰의 대상으로 인식될 때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얻을 수 있는 이점 또한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사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권위를 가져야 한다. 학생들에게 선생님의 권위가 인정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것은 우선 교사 자신이 노력해야 할 측면과 교육부나 사회, 그리고 학부모가 노력해야 할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교사가 권위를 가지기 위해서는 교사 자신이 교육적인 면에서 전문성이 있어야 할 것이며, 솔선수범으로 학생들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교사가 가질 수 있는 실질적인 권위이며, 권위의 내재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교사가 교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어 가르치는 일에 정통하고, 애타적인 동기에 의해 학생들에게 봉사하고 헌신한다면 학생들은 선생님을 동일시 대상으로 여기고 신뢰하고 존경함으로써 선생님의 권위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또한 선생님의 권위가 한층 더 인정되기 위해서는 교육부나 사회, 그리고 학부모 등 주위에서도 선생님들에게 힘을 실어 주어야 한다. 교육부는 제도적으로 교사들의 사회적 지위를 강화해주고 경제적 처우를 획기적으로 개선해 주어야 한다. 학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선생님을 존경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하며, 방송이나 매스컴은 사회적으로 선생님들을 존경할 수 있는 풍토 조성을 위해 앞장서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교사가 예뻐서라기보다는 선생님들을 그렇게 존경하고 신뢰해야만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학생이나 학부모가 선생님을 평가의 대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존경의 대상으로 인식할 때 학생들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그를 통해 얻는 이점들이 그대로 학생들에게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새 학년 새 학기를 시작하는 이 3월에 교사들도 선생님으로 존경받을 수 있도록 각오를 새롭게 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며, 교육부도 어떻게 하면 선생님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을까 고심하여 정책을 개발해야만 한다. 아울러 학부모들도 진정으로 내 자녀들을 생각한다면 내 자식만을 잘 지도해주길 바라는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야 하며, 특히 자녀들 앞에서 선생님을 비난함으로써 선생님의 권위를 허무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학년 초만 되면 경쟁적으로 촌지문제 등을 부각시켜 교사 전체를 매도하는 매스컴도 자성할 필요가 있다. 선생님, 그들은 평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존경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2007년 신년사(新年辭)에는 ‘교육’이란 단어가 두 번 등장한다. “양극화와 고용 없는 성장, 부동산, 교육문제로 민생이 어렵고 저출산․고령화 등 미래의 불안도 있습니다”라며 한 번, “교육문제는 아직도 힘들고 불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빠르게 좋아지고 있습니다”라며 또 한 번. 교육계 입장에서는 좀 섭섭하기도 하지만 산적한 국정현안을 감안, 그나마 감사할 따름이라고 하면 너무 관대하다는 핀잔을 듣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볼 것은 아니다. 한명숙 국무총리의 신년사에는 ‘교(敎)’ 자도 없으니 말이다. 한 총리의 신년사(877자)는 대통령의 것(1240자)보다 양(量)이 적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아야겠다. 신년사는 새해를 맞이하며 하는 공식적인 인사말이다. 꼼꼼히 살펴보면 각 기관에서 추진하고자 하는 역점사업이나 새로운 정책비전을 파악할 수 있다. 주요업무의 흐름과 기관장의 철학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신년사가 읽히지 않고 있다. 시․도교육청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교육감 신년사 조회 수를 보면 소속 공무원의 1%에 못 미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교육감들이 신년사에서 밝힌 내용 몇 가지만 보자. 나근형 인천시교육감은 “폭력 없는 학교․학업중단 없는 학교․담배연기 없는 학교 등 ‘3무 학교’ 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효 교육을 강화하여 즐거운 가정과 학교가 되도록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김장환 전남도교육감은 “애교심과 애향심, 애국심을 기르는 교육활동에 주력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조병인 경북도교육감은 “인성교육을 최우선 시책으로 펼치기 위해 학교 실정에 맞는 과제를 선정하여 바른생활 실천운동을 전개하며,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인권교육과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는 나라사랑 실천운동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한장수 강원도교육감이 내 놓은 ‘자연환경 보전과 인간애 실현 및 남북교류와 평화협력의 기반 조성을 위한 ‘PLaN(Peace Life and Nature) 교육’은 제목만으로도 흥미롭다. 선생님들의 관심을 끌만한 내용도 많다. 김진춘 경기도교육감은 산하 기관장 신년하례회에서 학부모와 학생이 담임을 선택할 수 있는 ‘담임배정제도개선방안’에 대해 언급하고 지역청의 시범운영을 당부하기도 했다. 양상언 제주특별자치도교육감은 전국에서 가장 작지만 전국 최고의 교육수준, 나아가 국제적인 교육경쟁력 확보를 위해 외국어 교육 강화와 ‘제주국제고(가칭)’ 설립 등을 골자로 한 ‘글로벌 제주교육 7대 비전’을 제시했다. 물론 최규호 전북도교육감처럼 덕담으로 일관하거나 텍스트는 없고 동영상 신년사만 올려 읽어보기 불편한 곳도 있지만 한번쯤 찾아볼 가치는 충분하다. 새로운 마음으로 새 학기를 맞은 선생님들에게 늦게나마 해당 교육감의 신년사 일독(一讀)을 권한다.
누군가와 언쟁하다가 상대가 하는 공격의 말 중에, 듣자마자 숨이 탁 막히는 말이 있다. 하나는 “나잇값이나 하세요!”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름값이나 하세요!”하는 것이다. 이 말은 상대가 아무리 정중하고 부드럽고 경어체로 말해도 듣는 쪽에서는 치명적인 내상(內傷)을 입는다. 내상을 입는다는 측면에서 보면 차라리 천한 쌍욕보다도 더 듣기 고약하다. 특히 상대가 나보다 한 살이라도 젊은 경우는 그 모욕감이 오래 남는다. 그리고 오랜 모욕감에 비례하여 두고두고 나를 돌아보게 된다. 부질없는 질문이 될지 모르겠지만, 이 두 개의 욕 가운데 어느 욕이 더 심한 욕일까 하고 묻는다면, 어떤 쪽이라고 답을 할지 모르겠다. 물론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을 수 있어 딱히 정답을 제시할 형편은 아니다. 내 경우라면 나는 ‘이름값이나 제대로 하라.’는 말이 더 심한 욕으로 느껴진다. 부연하자면 단순히 욕의 표현이 심하다는 문제라기보다, 이 욕으로 인하여 나를 돌아보게 되는 심리 기제가 더 강하게 작동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나잇값이나 하라는 말은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경고로 쉽사리 해석이 되는데, 이름값을 못한단 말은 또 무엇인가. ‘이름값이나 제대로 하라’는 말 속에는 내 본명이 지니는 가치와 의미는 물론이고 내가 달고 다니는 각종 직함들에 대한 불신과 조롱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직함이야 내가 얻은 것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내 이름 석 자야말로 함부로 조롱당할 일이 아니다. 그 이름을 지어 주신 분들이 내 부모님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부모님까지도 함께 조롱을 당하게 된 것 같아서, 더욱 괘씸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저잣거리에서 하는 거칠고 질박한 댓거리 욕 가운데, “너 같은 놈을 낳고도 (네 어머니는) 미역국을 먹었겠지!”라는 것도 있다. 이름을 잘 보전하는 일이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는 일임을 실감하게 한다. 사람의 이름에는 기대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두 가지의 기대이다. 하나는 이름의 의미처럼 괜찮은 사람이 되어달라는 기대일 것이다. 이른바 존재에 대한 기대이다. 다른 하나는 이 이름이 만천하에 높이 알려지기를 바라는 기대일 것이다. 이른바 소통적 기대이다. 그러고 보니 사람의 이름만큼 ‘소통되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숨어 있는 것이 또 달리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이든 그 부모가 이름을 지어 줄 때는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며, 세상에 나아가 그 이름을 크게 떨치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꼭꼭 담는다. 착하고 아름다운 딸이 되기를 기대하며 ‘선미(善美)’라고 이름 짓는 부모의 마음을 누가 모르겠는가. 내 이름만 해도 그렇다. 조부께서 내 이름을 ‘동방 인(寅)’자와 ‘터 기(基)’자를 가져와 ‘인기(寅基)’라고 지으셨을 때는, ‘동방의 기틀’이 되라는 큰 기대를 가지셨다고 한다. 이 나이 되도록 내 마음 하나도 제대로 닦지 못하는 나로서는 조상의 기대를 소중하게도 간직하지만 송구할 수밖에 없다. 교육학자 ‘이칭찬’ 교수를 처음 접했을 때, 그의 이름 속에서 내가 느꼈던 그 부모님이 품으셨을 사랑과 기대는 자못 감동스러운 것이었다. 어렵고 살기 힘들었던 옛날에는 ‘개똥이’라는 이름도 드물지 않았다. 설사 ‘개똥이’라고 이름을 붙이더라도 이름 속에 숨어 있는 기원의 의미는 어느 고상한 이름 못지않게 간절하고 각별한 맥락을 끼고 있다. 흙먼지 풀풀 나는 시골 길가에 마른 잡초와 자갈들 틈새에서 한 철 내내 말라 나딩구는 개똥! 그 개똥에 내재하는 미덕이 있다. 그 질박하면서도 검질기고, 누가 발길로 걷어차도 또르르 굴러가 다시 저쪽 잡초와 돌 틈 새로 처박히면서도 결코 부서지지 않고 버티어내는 모습이 개똥의 모습이다. 가난과 질병과 난리가 들끓던 세상, 개똥처럼 강인하게 살라는 기대가 이 이름에 들어 있는 것이다. 웬만 천덕꾸러기가 되어도, 상처 같은 것은 요만치도 받지 말고 씩씩하고 건강하게 살라는 간절함이 배어 있는 것이다. 더러는 개똥이 민간에서 약으로 쓰이기도 하였다니, 남에게 유익한 바가 있기도 하였다. 이쯤 되면 ‘개똥이’란 이름이 만만한 이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개똥이’ 따위의 이름을 지니고, 그 이름에 담긴 소박한 기원을 어딘가에 안고, ‘개똥’처럼 살아왔던, 60, 70년대 아이들의 삶이, 오늘의 시점에서 그 나름으로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이름과 삶의 관계가 크게 왜곡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름 자체는 모두 멋있고 세련되고 참해 보이지만, 온갖 주변 욕망에 찌들려 쉽사리 나약하고 작은 상처도 이기기 힘겨워 하는 요즘 아이들에게 ‘개똥이’는 어떻게 인식될지 모르겠다. 이름이 지닌 원래 의미와 기대를 손상시키지 않고, 그 이름에 부합되게 살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훌륭한 도덕이다. 일찍이 공자님도 이름을 바로잡는다는 뜻으로 ‘정명(正名)’의 사상을 강조하였다. 이름[名]과 실체[實] 사이의 관계가 서로 어긋남이 없을 때 윤리가 설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름과 실체가 어긋나면 당장 오해와 왜곡이 생기고 혼란이 생긴다. 사물의 이름이 정명(正名)을 얻지 못하면, 즉 이름답게 역할을 하지 못하면 사물 자체가 왜곡된다. ‘수입 쇠고기’가 ‘한우 쇠고기’로 뒤바뀌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있는 일로 받아들인다. 그 정도로 ‘한우 쇠고기’는 이미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이름의 뒤틀림으로 인한 사물의 왜곡은 또 그렇다 치더라도 사람 이름이 정명(正名)의 경지를 갖지 못하면 그 폐해는 심각하다. 우리가 자기 이름값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이 사람이 이 사람 맞아?’라는 의문을 계속 투사하며 살 수밖에 없다. 세상은 깊은 불신의 늪에서 갈등의 골을 깊이 파고 속임과 미움을 악순환 시킨다. 이름에 걸맞게 살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이름을 얻을수록 이름답게 살기가 만만치 않다. ‘이름 없는 여인’이 되기를 소망했던 시인 노천명은 이름의 무거움을 미리 알고, 이름의 운명으로부터 피해 가고 싶은 예감이 있었을까. 1938년에 발표된 이 시는 시인 노천명이 아직 이름 앞에 자유로울 때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름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일찍이 바랐던 그녀,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일제 말 친일의 굴레에서 안타깝게도 훼손된다. 다시 6·25 전쟁을 겪으면서 분단 이데올로기의 굴레에서 그녀의 이름은 고초를 겪는다. 시대나 역사의 거울 앞에서 이름을 훼손하지 않고 보전하기가 만만치 않은 일임을 느끼게 된다. 이름에 걸맞게 살기가 만만치 않은 것은, 아직 세상에 이름을 크게 얻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더 하다. 요즘처럼 정보화 사회에서 살아가자면 더욱 그렇다. 인터넷 소통 공간은 익명성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익명성은 거침없는 표현의 욕구와 자유를 넓혀 주기도 하지만, 실명에 대한 책무성을 슬쩍 놓아버리게 하는 일면이 있기 때문이다. 익명성은 우리의 숨은 무의식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활개를 쳐보고 싶을 때 기대고 싶은 언덕이다. 심리적으로 보면 익명의 공간은 숱한 유혹을 유발시키는 공간이다. 범죄를 꿈꾸는 모든 범인은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상황’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을 전제로 범행에 착수한다. 자신의 실명이 알려진 고향 마을에서는 예의범절이 반듯하다가도, 대도시 군중 속의 익명 공간으로 들어오면 형편없는 행동거지를 보이는 경우를 굳이 남에게서 찾아야 할까. 그래서 심하면 아예 내 이름을 팽개치고 사는 것이 현대인들의 모습이다.
교육의 보편적 진리 담은 고전 지난 1967년 제작된 제임스 클라벨 감독의 영화 〈언제나 마음은 태양(To Sir, With Love)〉은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으로 일컬어지는 교육영화의 전형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제법 시간이 흐른 오늘의 시점에서 다시 바라본 이 영화는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로 교육영화들이 가진 정형화된 구성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사회와 학교가 포기해 버린 문제 학생들, 그런 학생들을 방관하고 있는 무기력한 교사들, 거기에 혜성같이 나타난 주인공으로서 교사, 그리고 그의 헌신과 희생에 극적인 변화의 순간을 체험하는 아이들과 여타 교사들, 마지막으로 멋진 해피엔딩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 그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러한 흐름의 이야기 구성이 전형적이라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이후 수많은 교육관련 영화들의 형식과 내용에 이 작품이 얼마나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는가를 역설적으로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혹자는 ‘전형적’이라는 말 때문에 이 작품에 선입견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장르의 예술이 그러하듯 한 영역의 전형이자 고전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형식적인 측면의 완성도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그런 형식을 생생히 살아 있도록 만드는 인생의 보편적 진리가 담겨져 있기 마련이다. 영화 〈언제나 마음은 태양〉 역시 여기에 예외이지 않다. 학업 이전에 인생을 가르치다 주인공 마크 태커레이는 흑인으로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정규 교육과정을 마친 후, 엔지니어로 직업을 구하고 있던 중에 생계를 위한 방편으로 임시 교사 생활을 시작한다. 그가 부임한 학교는 런던 항만 근처의 빈민촌에 자리 잡은 곳으로 대부분 교사들은 문제아 일색인 학생들을 이미 포기한지 오래고, 아이들은 희망 없는 미래를 기다리며 거칠고 폭력적인 태도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태커레이는 가정과 사회 그리고 학교마저 포기해 버린 아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직업인으로서 교사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절망의 구렁텅이에 내던져진 아이들에 대한 분노와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세상 그 어느 곳에도 마음 둘 곳 없어 반항과 일탈이 생활화 된 아이들의 계속된 빈정거림과 반항에도 불구하고, 태커레이는 묵묵히 교사로서의 직분이라고 생각하는 학업을 진행해 간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를 거부하는 아이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지고 결국 교사로서 태커레이의 인내도 그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 여타 교사들처럼 무관심과 방관의 길을 선택하거나 아니면 폭력적인 방법으로 제압하여 억압적인 교육환경을 만들어 가거나의 양극단의 양자택일을 강요받게 되는 바로 그 순간, 그는 깨닫게 된다. 자신에게 맡겨진 학생들이 문학이나 수학, 세계사와 같은 수업을 받아야 하는 대상 이전에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 곧 사회에 첫 발을 내딛어야 하는 그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나 예의조차 배우지 못한 정규 교육과정의 학생 이전에 ‘아이들’이었다. 태커레이는 이들에게 진도에 따른 수업을 진행하기에 앞서, 보다 근본적인 사람됨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가르쳐 알게 하는 것처럼 차근차근 알려주기 시작한다. 진실 담은 형식으로 마음 열어 이런 그의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타인에 대한 예의였으며, 다른 하나는 진실이었다. 바로 곁에서 삶을 같이 살아가는 친구들, 나아가 자신과 다른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 없는 삶이란 인간의 그것이라 말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태커레이는 먼저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학생들 상호간에서 존칭을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자유분방하게 살아왔던 아이들의 반발은 당연히 예정된 것이었으나 그는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는다. 크고 작은 마찰의 순간이 지나면서 일상의 어느 곳에서도 한 인격체로서 존중과 대우를 받아본 적 없던 아이들은 점차 이렇듯 작은 호칭에서부터 교사가 학생을, 또 서로 간에 존엄한 한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존중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시작한다. 기성의 형식에 대한 반항심이 거의 본능에 가까운 청소년기라 할지라도 사실 아이들은 알고 있다. 정신과 내용이 빠져버린 말 그대로 껍데기뿐인 형식의 강요, 형식에 의한 통제가 얼마나 참을 수 없는 것인가를 말이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비록 정형화된 형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그에 상응하는 진실과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면 기꺼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청소년기가 감각적 발달이 왕성한 시기일지라도 그네들도 당연히 다른 사람이 자신들을 대하는 태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엄격한 훈육이 일반적이었던 과거 중학시절, 수업 중에는 물론 그 외의 시간에도 어린 우리들에게 존댓말을 사용하시며 인격적인 대우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수학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잊혀 지지 않고 남아있다. 솔직한 자기 고백으로 신뢰 회복 그의 두 번째 교육방법은 ‘진실’이다. 태커레이와의 만남을 통해 아이들은 그가 실은 자신들 못지않은 빈민가 출신으로,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당시 흑인으로서 온갖 고생과 수모를 겪으며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이들은 모두 알고 있지만 서로 모른 척 감추려 하고 있는 삶의 상처들을 담담히 고백하듯 보여주는 그의 모습에서 일종의 충격을 받게 된다. 그런 아이들에게 태커레이는 말한다. “내 방식은 진실이다. 그것은 때로 두렵고 위험한 것일 수 있고, 실제 그러하다. 하지만 난 그런 삶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너희들도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한다.” 그렇다. 교사와 학생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 진실은 다소간의 위험을 내포한다. 내 진심을 드러내 보이는 일이 그러하며, 상대방의 진실을 목격하는 것 또한 그러하다. 교육에 있어 아이들의 삶, 그 진실과의 직면은 알게 되는 만큼 그것을 감당해야 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에 힘들고 부담스런 어떤 것일 수 있다. 교사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진실을 아이들과 나누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가장 손쉬운 길은 학생은 학생의 길을, 교사는 교사의 길을 가는 것이다. 각자 기능 과 역할의 측면에서 제 자리만 지키면 된다. 쇠락해 가는 학교의 대다수 직업인 교tk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태커레이는 이를 참아낼 수 없었다. 그는 두려운 진실과 직면하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자신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각자 삶의 진실과 맞부딪혀 싸울 것을 요구한다. 물론 진실이 진실로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 신뢰가 쌓여 있어야 한다. 신뢰 없는 진실은 오히려 서로의 가슴에 깊은 생채기만을 남길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태커레이는 먼저 자기가 겪은 어두운 삶의 진실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한다. 흑인으로서 가난과 편견, 차별을 극복하고 당시 거의 백인 일색이었던 교사의 자리에 오기까지 고난한 삶의 이야기들을 말이다. 이는 당시 흑인으로서 최초로 장편 극영화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되었던 태커레이 역의 ‘시드니 포이티어’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영화는 관객이 예상하는 동시에 기대하는 것처럼 변화된 모습으로 학교를 떠나는 학생들과 태커레이의 감동적인 이별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인생의 한때를 함께 했던 선생님과 헤어지는 순간에 아쉬움의 눈물을 나누는 모습이 이제는 점점 더 낯선 풍경이 되어가는 요즘, 이 영화는 시대의 변화와 관계없이 진정한 사제지간이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를 되돌아 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참고로 당시의 가수로서 영화에 학생으로 출연해 화제를 모은 ‘룰루(Lulu)’가 부른 주제가 ‘To Sir With Love’는 서정적인 멜로디와 감동적인 가사로 이 작품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도 알 수 있을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모았던 노래이기도 하다. *영화정보* 제목 : 언제나 마음은 태양(To Sir, With Love) 감독 : 제임스 클라벨 출연 : 시드니 포이티어, 주디 그리슨 제작년도 : 1967년 관람등급 : 15세 관람가
Q1. 취학유예는 학교장의 재량 권한인지와 유예 신청 시 의사의 진단서가 반드시 필요한지 궁금합니다. A1. 질병 등 부득이한 사유에 의한 취학유예는 학부모의 신청으로 학교장이 결정하도록 하고 있으며, 제출 서류에 대해서는 교육감이 정하는 바에 따라 진단서 외에 읍·면·동장 및 학부모의 소견서 등도 증빙서류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유예결정에 교원의 의견서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동에 대한 취학유예의 결정을 학교장의 교육적 판단에 맡기는 것은 보호자의 자의적 결정에 의해 아동의 교육받을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므로, 명확하지 않은 성장차이 등을 이유로 취학유예를 희망하는 보호자에게 학교장이 진단서를 요구하는 것은 의무교육 대상자의 교육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판단됩니다. 이때 학교별로 학부모, 교원, 의사 등으로 구성된 취학유예 결정을 위한 위원회를 설치·운영하여 취학유예를 신청한 학생과 학부모에 대한 면접을 통한 유예신청 사유 확인 등 합리적·민주적 절차에 의해 취학유예 결정을 하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Q2. 학적 처리용어에 유예와 정원 외 관리라는 것이 있는데, 의미상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A2. 유예는 재학하여 계속 교육받을 의무를 다음 학년도까지 보류(「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28조에 의한 입학 이후 유예자 또는 3월 이상 장기결석 중인 학생)하는 것으로 학칙에 의거 정원 외 학적관리를 할 수 있습니다. 즉, 유예는 의무교육 대상자의 해당학년 취학(교육)의 의무를 1년(해당학년도 말까지)의 범위 내에서 보류하는 것입니다(다시 유예하거나 유예기간 연장 가능). 따라서 취학 전 유예, 취학 중 유예 모두 가능합니다. 정원 외 관리는 합당한 사유와 절차를 거치지 아니하고 장기결석(3개월 이상 연락두절 등)하여 이후 출석하여도 해당학년의 수료 및 졸업이 불가능(출석일수 2/3 미달)한 자에 대해 학적을 별도로 관리하는 것입니다. 정원으로 관리할 경우 타 전입생을 배정하지 못하는 등 현실적 문제가 있어 해당학생을 정원에서 제외하는 것으로 결과적으로는 대상자의 학적을 유예 처분하는 것입니다(넓은 의미의 유예에 해당됨).
인천중앙초등학교(교장 김선경)내 직장보육시설인 어린이집이 2.28일 실내 공간 확장 및 실외 놀이시설을 확충하고 증설공사 개원식을 가졌다. 동부교육청 김기수 교육장을 비롯한 지역유지와 학부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개원식을 가진 직장 보육시설은 2005년 개원을 한 후 맞벌이 부부 교원 자녀의 보육시설로 알찬 운영을 해 왔으나 시설물의 높낮이나 구조가 영유아 보육에 맞지 않고 비효율적으로 배치되어 활용상의 문제점이 많아 이의 개선과 시설 확장 및 실외놀이터 설치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왔다. 어린이집 증설 개원식에 참석한 다수의 학부모들은 개선된 실내 시설물과 확장된 실내 공간, 신설된 놀이시설을 둘러보고 매우 만족감을 표시하면서 자녀 보육에 대한 기대를 한층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중앙어린이집은 1층 205.43㎡로 증설된 시설에서 원장1명, 보육교사6명, 조리사 1명이 4세까지 42명의 영유아를 6개반으로 나누어 알차고 희망찬 보육시설의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2월 28일자 동아일보 사설에 학교폭력 대책, 학교는 구경꾼인가라는 사설을 읽으면서 언론이 학교폭력의 실상과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쓴 사설인지 궁금하다. 해마다 정부 당국이나 학교에서는 학교폭력 근절 방안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지만 여전히 증가 추세이고, 피해의 정도가 심화되고 있으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학교폭력의 일반적 추세는 가해학생은 감소되고 있으나 학교폭력의 피해를 호소하는 학생이 늘어나고 있다. 학교폭력 피해 장소 또한 학교 울타리를 넘어 등하교길이나 학원 주변 , 오락실, PC방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1:1 멘토링제 운영, 대안교육 위탁교육 실시, 친한 친구 교실 운영 등의 대안 교실을 운영하고, 또한 주변 환경이 취약하고 비행 발생 빈도가 높은 지역에는 폭력 전담 경찰관을 배치한다고 한다. 또한 학교에서는 학교폭력 담당교사를 우대하는 방안을 마련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관계 기관의 노력에 대하여 동아일보에서는 학교폭력 대책, 학교는 구경꾼인가라는 사설을 내보냈다. 학교 현장의 선생님들과 학교폭력 예방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으로서 그 사설이 갖는 왜곡성에 대하여 당황하였다. 동아일보가 지는 대중적 전파력이 크기에 더욱 그렇다. 사설에서의 지적처럼 지금까지 충분한 노력을 해왔는가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학교 현장에서 학교폭력 예방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교사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도 전제되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까웠다. 아마 조금이라도 고통을 이해한다면 이와 같은 논조의 사설은 내지 않았을 것이다. 언론이나 일반 사회에서는 학교폭력을 단순히 학생들에 대한 학교 생활지도의 부재에서 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시각은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이는 단순히 생활지도상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선,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구조와 행동 방식에서 영향 받은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상식과 법을 초월한 이기적 자기중심성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모습을 바라보고 자라는 우리 아이들이 어찌 이웃을 생각하고 친구를 생각할 것인가. 나만 즐겁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보편적인 원칙과 상식에 동의하지 않고 특혜를 주장하는 사람이 많은 한 타인에 대한 폭력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떼법’이 통하는 사회에서는 보편적인 원칙과 상식이 살아날 수 없다. 개인주의와 집단적 이기주의만이 살아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점차 민주화로 지향하면서 욕구 분출 과정에서 적절한 방법에 대한 학습이 없었다. 목적만 그럴 듯하면 방법이 어떠하든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민원부서에 있는 공무원들이 민원인들의 유형 또는 무형의 폭력에 시달려도 그에 대한 뚜렷한 대책이 없다. 오히려 매끄럽게 해결하지 못한 공무원이 혼줄이 나는 구조에서는 은근히 폭력이 조장되고 있는 것 아닌가. 은연중에 우리 사회에는 이런 류의 학습이 전수되고 있다. 다음은 ‘잘못’에 대한 상응한 벌칙이 없는 것이 문제다. 아무리 좋은 대책이 나와도 잘못에 대한 적절한 벌칙이 없는 한 그것은 대책이 될 수 없다. 초중등육법과 시행령에 의하면 의무교육 대상자에 대해서는 특별한 벌칙이 없다. 영악한 학생들은 이런 점을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다. 최근 인권문제가 부각되면서 더욱 그렇다. 이런 문제점을 파악한 미국의 여러 주에서는 '무관용의 원칙(zero tolerance)'을 통하여 잘못에 대한 철저한 책임을 지게하고 있다. 최근에 제시한 위탁교육, 대안학급을 적극적으로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 학교 현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점을 들 수 있다. 학교폭력을 담당하고 있는 교사는 이중 삼중고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물론 교사이면 누구나 이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 중에서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지도해야 하는 사람이 학교폭력 담당교사이다. 여느 교사와 마찬가지로 학습지도에 부담감을 가져야 하고, 학생사고 발생시 해결과정에서 지게 되는 책임 또한 막중하다. 교내 생활지도, 교외 생활지도를 해야 하고, 때로는 파출소, 법원에도 가야한다. 이런 현실이고 보면 특별한 혜택이 없는 학교폭력 담당은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피하고 싶은 일이다. 이에 대하여 교사의 소명의식을 들먹이면서 탓하기에는 너무 옹색하지 않은가. 그래서 이에 대한 적절한 보상책으로 우대 방안을 마련한 것은 늦은 감을 탓해야 할 일이지 비난한 일은 아닌 것 같다. 동아일보의 지적대로 선도의 일차적 책임이 학교에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에서 밝힌 것처럼 이런 사회구조 속에서 학교 탓만으로 돌리는 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주체로서 책임 회피에 다름 아니다. 학교폭력 근절은 국가적 과제이고, 국민적 합의에 기초하여야 적절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교사의 감화가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여전히 제도적 한계에 부딪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생활지도의 현실이다. 그런 만큼 학교폭력 근절의 절대적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토대로 몇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학교에 엄격한 법치 구조를 도입해야 한다. 미국의 ‘무관용 원칙’처럼 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철저하게 책임지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사람에게만이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의무나 책임은 없고 권리만 강조되는 사회에서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있을 수 없다. 학교 공동체가 머리를 맞대고 법을 만들고 이해 대한 철저한 이행을 촉구해야 한다. 위반자에 대한 철저한 법치의 원칙을 도입해야 한다. 둘째, 학생 학부모의 공동책임제를 도입하여야 한다. 최근 맞벌이 가정이 늘어나면서 아이들 교육이 소홀이 되고 있다. 학교에서만 책임지는 생활지도로서는 한계가 있다. 음식점에서 제멋대로 뛰어 다니는 아이들이 많은 한 학교에서 교사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학생이 많기 마련이다. 공공의 이익과 안녕에 부합되는 교육이 가정에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지도 잘못에 대하여 교사의 징계를 말하고, 교장의 전보를 말하면서 늘 부모의 책임과 사회의 책임은 외면하는지 모르겠다. 부모가 책임지고 가정에서부터 자녀교육에 최선을 다하는 풍토를 만들어 가야 한다. 셋째, 교사의 권위 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 교사 스스로의 전문성을 신장하여 권위를 갖도록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학생 지도에 대한 상응한 권한을 주어야 한다. 실제로 학교폭력으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생겨 사법기관에 이첩되면 교사는 어떤 역할도 할 수 없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사법적 판단을 받아서 학교에 돌아오기까지에는 진행과정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교사가 해결과정에 적극적으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교사가 할 수 일은 제한적이면서 늘 책임만 지라는 식의 논리는 맞지 않다. 동아일보의 사설대로 학교를 구경꾼으로 만들지 말고 적극적 해결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학교폭력이 일어나면 가·피해자로 나뉘어 민형사상의 판단을 기대하는 학부모와 많은 한 교사의 역할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의 불안한 환경을 개선하는 데 모두가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야 한다. 학교 선생님이 책임을 가지고 지도할 수 있도록 지원하여야 한다. 학교 폭력이 학교 현장의 교육력을 현저하게 약화시키는 주요 요인임을 감안한다면 누구의 책임으로 서로 탓할 일은 아니다. 모두가 손을 맞잡고 제도적, 법적 미흡함을 보완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교육부가 16일 확정 발표한 교육공무원승진규정 개정안은 불공정한 승진경쟁을 조장하고 도벽지․ 농어촌 지역의 교육격차를 악화시키는 개악으로 즉각 철회돼야 한다. 지난해 12월 27일 입법예고 후 근평 10년 확대 등 문제점이 지적됐음에도 교육부는 오불관언 했다. 이는 지난 해 교육혁신위원회가 마련한 방안을 토대로 교육부가 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을 번복할 수 없다는 ‘눈치보기․ 오기식’ 행정의 전형이다. 한국교총은 여러 차례의 교원 설문조사와 승진제도 개선 특별위원회 운영을 통해 시대흐름에 부합하는 대안을 거듭 제시해왔다. 하지만 교육부는 경력기간 및 점수 비중 축소 등 교총의 대안 중 일부만 받아들이고 가장 큰 문제인 근평기간 10년 확대 방안을 고수해 교원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이처럼 근평기간을 늘리면 학교규모에 따른 근평 등급 간의 누적 점수 차이로 불공평한 승진 인사가 될 수밖에 없고 여기에 도벽지나 농어촌학교의 점수마저 축소되면 교육격차가 더욱 벌어질 수밖에 없는 사정이 예견됨에도 앞으로는 신규교사들이 지원하는 풍토가 조성될 것이라며 탁상공론의 황당한 변론들만 내세우고 있다. 이번 승진규정 개정안은 정책 취지와 실천 방안이 완전히 따로 논다. 교육소외 지역의 교육격차를 해소한다면서 교육격차를 더욱 심화시키고, 교원의 전문성을 심화해야 한다면서 연구점수 만점 취득을 용이하게 하고, 지나친 승진경쟁 풍토를 완화해야 한다면서 승진경쟁을 젊은 나이부터 부추기는 자가당착의 혼란상을 연출하고 있다. 벌써 각 교육청별로 도벽지나 농어촌 지역학교로의 전보 희망이 현격히 줄은 데 이어 농림부가 반대의견서를 내고, 소규모학교에 배정된 교원들의 항의가 분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확정 발표된 마당인데도 이 반발이 수그러들지 않고 확산되고 있다. 교육현장의 혼란과 파행, 선의의 피해자 발생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교육부에 있다.
격렬한 논란 끝에 교육부가 교육과정 개정안을 확정했다. 이번 개정안은 2009학년도 초등학교 1, 2학년부터 연차적으로 적용해 2013년에는 모든 초·중·고등학생에게 적용된다. 가장 논란이 됐던 고등학교 선택과목군은 2012년부터 현행 5개에서 6개로 늘어나 체육을 음악ㆍ미술과 분리한다. 또한 주당 1시간만 편성된 수업의 경우 한 학기 또는 한 학년에 집중 이수토록 하는 ‘교과 집중 이수제’가 도입되고 과학과 역사교육도 강화된다. 이번 개정안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교육과정은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것인데 주5일 수업제 전면실시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아 핵심을 빗겨간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교육부는 납득할 만한 설명과 향후 입장을 밝혀야 할 것이다. 또한 고등학교 선택과목군이 당초 7개 군으로의 확대방안 대신 6개 교과 군으로 확대·결정한 것은 절충안으로 볼 수 있지만 학생들의 학습부담 문제가 제기된 만큼 이에 대한 후속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번 교육과정의 개정과정은 교육부총리가 ‘권력투쟁’이라고 말할 정도로 교과목 관련자는 물론 사회 각계가 나서 첨예한 논란을 빚었다. 이는 밀실 협의로 진행해 온 교육부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앞으로도 교육과정 논란은 계속될 것이다. 특히 교육과정이 수시 개정체제로 변화된 만큼 논란이 지속되고 확산될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정부는 교육과정 개정 방식과 원칙에 대한 근본적인 개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국가교육과정의 결정이 이해관계자들의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져서도 곤란하지만, 교육부의 일부 관료나 청와대, 국회의 정치적인 영향 하에서 이루어져서도 안 된다. 교육과정 심의과정의 문제점을 철저히 보완하고 각계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의사결정구조를 조속히 마련할 것을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