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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성, 충렬을 말하다


읍성의 관아건물

지난 호에 이어 읍성을 찾아갑니다. 우선 읍성에 있었던 관아(官衙)건물의 종류부터 알아볼까요? 관아건물은 고을의 격에 따라서 규모와 종류가 달랐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건물들이 있었습니다.

동헌(東軒)은 지방관이 행정업무를 보던 집무실입니다. 주로 ‘선화당(宣化堂)’이나 ‘안회당(安懷堂)’과 같이 백성들을 잘 다스리겠노라는 의지가 담긴 현판이 붙습니다. 지방관, 즉 도를 총괄하는 감사나 한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들의 살림집은 내아(內衙)입니다. 동헌과 내아는 가까이 있습니다.

객사(客舍)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나 궐패(闕牌)를 모신 건물로 각 지방에까지 왕권이 미치고 있음을 말합니다. 지방관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이곳을 참배하여 어진 정치와 충성을 다짐하였습니다. 객사는 또 관찰사나 관리들의 숙박 장소로 활용되었습니다. 대개 객사 건물은 가운데가 높고 도드라져 있는데 그 건물[正堂]에는 전패를 모시고, 좌우[翼室] 건물은 숙소였지요. 객사에는 주로 동경관(東京館-경주)이나 학성관(鶴城館-울산)처럼 그 고을의 옛 지명이 들어간 현판이 많습니다.

동헌과 객사 입구에는 삼문(三門)이 있습니다. 나주읍성의 경우 동헌의 정문인 정수루, 객사의 정문인 망화루가 삼문의 역할을 해내고 있고 고창읍성의 경우는 빈풍루와 풍화루가 삼문의 역할을 했습니다.

지방관을 돕는 아전(衙前), 즉 향리(鄕吏)들이 머물던 곳은 작청(作廳)이었습니다. 이방을 중심으로 6방이 모여 소관 업무를 처리하던 사무실이었지요. 이들은 출퇴근하는 입장이라 주로 읍성 내에 집이 있었습니다. 향청(鄕廳)은 수령을 보좌하고 견제하는 고을 양반들의 자치기구로서 향리를 규찰하고 향풍을 바르게 하는 등 향촌교화(鄕村敎化)를 담당하였습니다.

관청(官廳)은 각종 세금과 곡물을 저장하고 반출하는 업무를 보는 곳으로 관주(官廚)라고도 하였습니다. 수령과 그 가족들의 식생활을 비롯한 빈객(賓客)의 접대와 각종 잔치에 필요한 물품의 조달 및 회계 사무를 관장하였기에 제일 분주한 곳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관청이란 말도 여기서 유래된 것이죠.

집사청(執事廳)은 경찰 사무를 담당하던 포도리(捕盜吏)들이 업무를 보던 곳입니다. 경찰청의 마스코트가 바로 포돌이와 포순이입니다. 이 명칭 또한 집사청 치안 담당관이었던 포도리에서 유래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읍성 내에는 군무를 보살피던 장청(將廳), 무기를 보관하던 군기청(軍器廳), 죄수를 감금하던 옥(獄), 고을의 수호신을 모신 사당인 성황사(城隍祠) 등이 있었습니다. 한 때 빽빽하게 들어섰던 관아건물들은 오늘날 객사나 동헌 혹은 삼문 정도만이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격이 다른 읍성이야
조선 8도에는 각각 감사(관찰사)가 파견되었습니다. 이들이 머물렀던 감영(監營)을 둔 읍성은 수령이 다스리는 읍성에 비해 격이 한층 높았겠지요? 주인장이 누구냐에 따라서 읍성의 규모가 달라지는 셈이죠. ‘평양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남아 있는 걸 보면 감사 자리가 좋긴 좋았나 봅니다.

경상감영이 있었던 대구로 떠나볼까요? 대구 한복판 노른자위에 있는 경상감영공원에는 동헌인 선화당과 내아였던 징청각, 하마비, 관찰사의 치적이 담긴 선정비 등이 남아 있습니다. 선화당과 징청각은 선조 34년(1601) 이곳에 세워졌는데 큰 화재로 인해 불타버리고 지금의 것은 순조 7년(1807)에 새로 지어 1970년에 중수하였다고 합니다.

공원 앞에는 병무청 건물이 있어 옛날 관찰사가 도의 병권을 맡았음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병무청 자리에는 원래 관풍루가 있었는데 지금은 달성공원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1906년 당시 관찰사 박중양이 대구읍성을 헐어낼 때 건물만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그 관풍루 앞에는 하마비가 서 있었습니다. 이곳에 남아있는 하마비도 다른 지역의 것보다는 격이 높습니다. ‘절도사이하개하마비’니까 종2품이었던 병마절도사 및 수군절도사 이하의 모든 사람은 이 비가 있는 곳에서부터는 말에서 내려야한다는 주문을 하고 있죠. 대개 관찰사가 절도사를 겸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경상감영을 둘러싸고 있는 대구읍성은 선조 23년(1590) 처음 토성으로 축조되었다가 영조 12년(1736)에 다시 석성으로 축성하여 진동문, 달서문, 영남제일관, 공북문의 4대문을 두었습니다. 현재 남문이었던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전라감영의 흔적은 보물 제583호로 지정된 전주객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판에는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 쓰여 있는데 ‘풍패’는 중국 한나라 고조가 태어난 지명으로 조선왕조의 발원지가 바로 이곳 전주임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비록 객사만 남아 있고 다른 관아건물들은 찾아볼 수 없다지만 이곳을 중심으로 차이나타운, 차 없는 거리, 극장가, 관공서, 음식점, 패션가 등이 즐비해 있어 과거로부터 이곳이 전라도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줍니다.

이 전라감영을 둘러싼 전주읍성의 흔적은 남문이었던 풍남문(豊南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풍남문은 고려시대에 처음 세웠으나, 정유재란 때 화재로 불타버렸고, 영조 44년(1768)에 전라감사 홍락인이 다시 세우면서 풍패(豊沛)의 남쪽이란 뜻으로 풍남문이라 불렀답니다.

강원도의 감영이 있었던 원주에는 포정루와 선화당이 남아 있습니다. 이렇듯 감영의 흔적은 조금씩 남아 있으나 읍성의 흔적은 많이 남아 있지 않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하지만 옛 모습은 잃었어도 주변 지역이 최대 번화가로 사랑받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명성에 대한 대가는 충분한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의 발발 - 부산진성, 동래읍성

전쟁의 비극을 혹독하게 겪은 읍성도 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1592년으로 돌아가 봅니다. 일본과의 첫 전투는 4월 14일 부산진에서 펼쳐졌습니다. 부산진순절도에 당시 상황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굳게 닫혀있는 성문이 보이고 그 위에서 정발 장군이 전투를 지휘하고 있습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았습니다.

왜적의 배가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덮어오는데 바라보아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부산 첨사 정발이 절영도에 나가서 사냥을 하다가 급히 성으로 돌아오자 왜병이 뒤따라 와서 육지에 올라 사면에서 구름같이 모이니 삽시간에 성이 함락되었다.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일본은 다음날 2만여 명을 이끌고 동래읍성을 향해 진격합니다. 당시 동래읍성에서 벌어진 전투를 묘사한 동래부사순절도 아랫부분에는 ‘길을 빌리자(假我途)’는 팻말을 든 일본과 ‘길을 빌려줄 수 없다(假途難)’는 팻말을 성 밖으로 던지고 최후의 결전을 벌이는 조선군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싸워서 죽는 것은 쉽지만 길을 빌려주는 것은 어렵다는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의 정신이 그림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동쪽 성벽을 통해 침입한 일본군은 칼과 창으로 무장한 채 성 안을 유린하고 있습니다. 관군과의 백병전도 시작되었습니다. 성의 한가운데에 객사건물 아래 붉은 관복을 입고 의연하게 앉아있는 송상현 부사의 모습이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임금님께 예를 올리는 그 모습이 비장하기 그지없습니다. ‘임금님,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중과부적이옵나이다. 이 성을 지키지 못한 저를 용서해 주옵소서….’

객사문 아래쪽으로는 여인 두 사람과 남자 한 사람이 지붕 위에서 깨진 기왓장을 던지며 최후의 항거를 하고 있습니다. 동래에 살던 일반 백성이던 김상이라는 사람과 그의 처와 딸로 보입니다. 왜적이 물러간 뒤 김상의 어머니가 그 현장에 가 보니,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녀가 같이 죽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한편 북문을 통해서 달아나는 아군이 보이는데 이는 일본군의 위세에 놀란 경상좌병사 이각으로 그는 구원병을 보내리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야밤에 도주하여 밀양으로 달아났습니다. 그후 적이 밀양에 가까이 접근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도망을 거듭하다 임진강에서 도원수 김명원에게 붙잡혀 군율에 따라 참형을 받아 일생을 마쳤습니다. 죽음으로써 성을 지킨 송상현과 도망으로 목숨을 부지하려 한 이각, 두 사람의 행동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징비록>에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5일에 왜병이 동래에 몰려와 송상현이 성의 남문에 올라가서 반나절 동안이나 싸움을 독려하였으나, 성이 함락되자 상현은 꿋꿋하게 버티고 앉아서 적의 칼날을 받고 죽으니 왜인들도 그가 목숨을 걸고 성을 지킨 것을 가상하게 여겼다.

동래읍성은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추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었던 성을 영조 7년(1731)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훨씬 규모가 큰 성을 쌓았으며 현재까지도 복원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성벽, 북문과 옹성,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 치성, 여장 등이 부분적으로 복원 보수되었습니다. 또 동래부의 동헌이었던 충신당, 송상현을 비롯해 동래성 전투에서 순절한 분들을 모신 송공단, 조선후기 군장관들의 집무소였던 장관청 등이 남아 있습니다.

곡창지대를 지켜라-진주읍성, 남원읍성
진주읍성은 남강을 천연 해자로 둔 절벽 위에 세워져 뾰족한 바위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서 촉성성(矗石城)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은 두 차례에 걸친 일본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습니다. 1592년 10월 1차 공격 당시에는 목사 김시민을 비롯한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성을 사수했는데 이것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입니다. 하지만 이듬해 6월 2차 공격을 받았을 때는 큰 비로 성벽이 무너지는 바람에 성을 사수하지 못하고 엄청난 희생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의기(義妓) 논개가 등장한 것도 바로 2차 공격으로 성이 점령된 후였습니다. 성내에는 창열사라는 사당이 있어 진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김시민 등 39위를 모시고 있습니다. 진주성 싸움은 곡창지대인 전라도로 진격하려는 왜군을 물리쳤다는 데 의의가 있겠습니다.


정유재란 때 왜군은 집중적으로 전라도를 공략하기로 작정합니다. 보급통로를 끊겠다는 의도였습니다. 그래서 호남 곡창의 관문이자 서울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남원읍성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남원읍성은 언양읍성과 함께 읍성 중에서 평지에 자로 잰 듯 네모난 형태로 쌓았습니다. 정유재란 당시 정기원과 이복남이 지휘하는 조선 측 군사들과 명나라 장수 양원의 지휘 아래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명나라 군사들이 지키던 동서남문이 뚫리자 결국 성은 함락되었고 북문을 지키던 이복남을 비롯한 만 명에 가까운 희생자가 발생하였습니다. 광해군은 그 때 희생된 사람들을 한곳에 묻고 그들을 추모하는 사당을 지어 충렬사라 불렀습니다. 근래에는 ‘만인의총’이라 해서 대대적으로 정비하였습니다.

전시관에는 왜군 남원성 침공 작전도를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정유재란 당시 1597년 남원성 전투에 참전했던 왜군 ‘가와가미 후사구니’가 자필로 그렸던 것으로 그간 일본 가고시마현 도서관에 있던 것을 복사해 온 것입니다. 작전도에는 성의 형상과 규모, 성내의 건물과 통로, 성문과 성벽, 성호 등은 물론 왜군의 포진과 병력의 배치도가 상세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일본이 남원읍성을 치기 위해서 얼마나 치밀한 준비를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때 남원성을 공략한 왜장 중 시마즈는 도공 70여 명을 포로로 잡아 가 일본 큐슈 남단 가고시마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가운데 심수관가의 초대 심당길도 있었습니다. 1995년에 남원문화원에서 건립한 노래비를 만인의총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낯선 일본으로 끌려간 남원의 도공들은 고향을 그리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오늘이 오늘이소서
매일같이 오늘이소서
저물지도 새지도 말고
날이 샐지라도
매일같이 오늘이소서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 매일 오늘 같은 오늘을 사십니까? 내일은 오늘의 연장이요, 어제는 오늘이 있기 위한 과거일 뿐입니다. 이 시각, 촌음이라도 잘 활용해서 멋진 방학 보내시길 바랍니다. 다음 호까지 읍성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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