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3일 한국교육의원협의회가 지방교육자치 자동일몰제를 폐지하라고 주장하면서 지방교육자치의 바람직한 미래에 대한 논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교육자치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 가치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31조 제4항은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보장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지방교육자치는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주어진 명제이다. 교육자치가 보장하고자 하는 기본 가치인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 차원에서 볼 때 지방교육자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일까? 교육의 자주성 의미는 학자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데 헌법재판소는 ‘교육이 정치권력이나 기타의 간섭 없이 그 전문성과 특수성에 따라 독자적으로 교육 본래의 목적에 따라 조직·운영·실시돼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교육의 자유와 독립을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교육 자주성의 차원에서 보면 교육자치가 구현되기 위해서는 지방교육자치단체와 중앙정부와의 관계가 명확해져야 하고, 동시에 단위학교의 자치 보장을 위한 제도적 보완이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현행 법령상으로는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모두가 유·초·중등학교의 교육에 관한 권한을 갖고 있어 충돌할 수밖에 없게 되
올 해로 스승의 날이 30주년을 맞는다. 해가 거듭될수록 학교 선생님들은 우리 사회의 스승 존경 풍토가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탄하고, 사회인들은 과거와 달리 학교에 교사는 있으되 스승은 찾아보기가 힘들어져 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 이야기 속에는 스승 존경 풍토와 전통적 사제지간 부활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다.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우리 교육계가 나아갈 방향은 어디일까? 스승에 대해 정의해놓은 가장 오래된 글 중의 하나인 한유의 ‘사설(師說)’에 보면 스승은 도를 전하고, 도를 익히는 데 필요한 공부를 시키며, 의혹을 풀어주는(傳道授業解惑) 사람이라고 정리되어 있다. 즉, 스승은 어느 특정 분야의 지식이나 기능만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삶의 자세와 함께 필요한 제반 능력을 길러주고 이를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는 스승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요새 유행하는 ‘멘토’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으며 더 넓고 깊은 뜻을 가진 우리말이 바로 ‘스승’임을 알 수 있다. 그 뜻에 비추어볼 때 직업을 기준으로 학교 선생님은 모두 스승이고 학원 강사는 스승이 아니라는 식으로 구분
최근 좀 독특한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한국 청소년들이 시민의식 관련 ‘지식’은 38개국 중 3위인데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관계를 맺는 사회적 상호작용 ‘능력’, 즉 더불어 살기 능력은 35위라는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의 ‘2010 한국 청소년 핵심역량 진단조사’ 보고서가 그것이다. 더불어 살기와 관련된 지식은 많이 가지고 있는데 실행 능력은 최하위라는 것이다. 머리로는 알지만 몸으로는 그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핵심 이유 중의 하나는 더불어 살기라는 것이 체험을 통해 몸으로 익히고, 그 역량을 기름으로써 몸에 배야 하는 능력이지 지식을 배운다고 해서 저절로 발휘되는 능력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능력 중의 하나가 바로 더불어 사는 능력임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학교나 학부모 모두 아이들에게 이러한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도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데, 과거 아이들에 비해 어울리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뭔가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아이들의 사회적 상호작용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혹시 길러준다고 하면서 그러한 능력이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
외형상으로 보면 지난 한 해 사회 다른 분야의 이념적 갈등이 교육계에까지 투영되어 더욱 혼란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희망의 씨앗도 보인다. 희망의 씨앗은 적절한 조건이 만들어져야만 싹을 틔울 수 있다. 갈등이라는 무성한 잡초 안에서 희망의 씨앗을 찾아내고 가꾸어가는 것은 교육계가 해야 할 중요한 역할이다. 인간 삶을 들여다보면 경제 분야에서는 더 많은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상호경쟁이 치열하다. 정치 분야에서는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반영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크게 충돌하기도 한다. 이렇게 경쟁과 갈등이 심한 사회가 그래도 조화를 이루며 소위 말하는 발전이라는 것을 이루도록 돕는 분야가 바로 교육이다. 교육은 개인과 사회의 본질과 한계를 이해하고, 나아가 지식의 지평을 넓히고 깊이를 더함으로써 개인과 사회의 발전 및 조화를 이루도록 돕는 분야이다. 교육에서마저 조화와 발전의 가능성을 찾을 수 없을 때 그 사회는 수명을 다 하게 될 것이다. 교육이 인간과 인간사회를 조화와 발전으로 이끄는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해 교육계가 해야 하며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교육계가 우선 받아들여야 할 것은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상대방도 교육
어리석으며 부지런한 ‘최악’의 지도자 안돼야 매일매일 나를 돌아보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 날마다 반복되는 하루인데 일 년이라는 단위를 만들어 연말이 되면 한 해를 돌이켜보며 스스로를 반성하게 하고, 하룻밤이 지나 새해가 되면 다시 희망 속에서 일 년을 설계하도록 기회를 준 인류의 조상께 고마움을 느끼는 시점이 되었다. 초등학교 때에는 늘 선생님을 존경했었는데, 중학교 때 선생님으로부터 입었던 마음의 상처가 커서 교사는 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소년이 교사가 되어 평생을 살아가면서 연말이면 나를 돌아다본다. 만일 내가 아니었더라면 더 나은 선생님이 내 대신 학생들 앞에 서서 아이들이 더 행복하게 성장하도록 돕지는 않았을까? 그러한 반성이 나를 더욱 작게 만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끝없이 노력하게 하는 원동력도 되었던 것 같다. 최근 마주친 말 중에 100세에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일본 성누가 국제병원의 히노하라 시게아키 이사장 말이 생각난다. “매년 1년 후에 죽는다고 생각한 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을 정해서 행동해 보세요. 오히려 몸과 마음이 건강해집니다. 죽음이 찾아왔을 때 후회하지 말고 미리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2년전 별 준비
상대방 설득시키는 것은 소통이 아냐 가장 이야기를 잘 하는 것은 듣는 것 최근 들어 소통에 대한 교육계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소통의 연속인데 소통이라는 것이 뭔가 특별한 것인 양 받아들여지는 것 같기도 하다. 날마다 소통이라는 바다 속에서 살고 있는 선생님들과 함께 소통에 대한 생각을 나누어보고자 한다. 소통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소통의 목적이 내 밖의 세상을 나에 맞추어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소통의 궁극적인 목적은 내 밖의 세상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나아가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나와 나 아닌 것의 구분을 떠나 나와 또 다른 내가 하나가 되어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상이 바로 소통이 추구하는 아름다운 세상이다. 소통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떠올리는 순간 소통은 보다 원활해지고 소통과 관련된 많은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내가 네가 되기 위한 첫걸음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이다. 자신이 교사임에도 불구하고 첫 아이의 담임을 만나려고 하니 어찌나 떨리고 당황스럽던지 깊은 이야기도 나누지 못한 채 서둘러 교문을 빠져나왔다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