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서는 1980년부터 1992년까지 유아교육과 초·중등교육 분야에서 국가가 교육의 책임을 확대하며 교육국가의 제도적 기반을 구축해 나간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같은 시기 추진된 고등교육정책을 중심으로 한국 고등교육이 어떠한 변화를 거쳤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980년 신군부는 7·30 교육개혁조치를 발표하며 과외금지, 대학 본고사 폐지, 고등학교 내신 반영 의무화, 졸업정원제, 대학 장학금 확대, 방송통신대학의 학사학위기관 전환,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설립, 대학평가제도 도입 등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출발점은 과열된 입시와 사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대학입시와 대학 운영, 평생학습과 교원양성까지 아우르는 종합적인 고등교육 개혁으로 발전하였다.
이 시기 한국 고등교육의 가장 큰 변화는 고등교육의 대중화였다. 고등교육 취학률은 1979년 약 10% 수준에서 1985년 30% 수준으로 높아졌으며, 이후 1990년대 초에는 40%에 근접하였다. 한국 고등교육은 이 시기를 거치며 소수 엘리트를 위한 교육단계에서 국민 다수가 참여하는 대중교육 단계로 전환되었다. 국가는 대학정원을 대폭 확대하는 동시에 대학입시와 장학금 정책에도 적극 개입하여 확대된 교육기회가 특정 지역이나 계층에 집중되지 않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적지 않은 갈등도 동반하였다. 급격한 학생 증가에 비해 대학의 시설과 교수 확보는 충분하지 못했고, 졸업정원제는 대학 내 경쟁과 갈등을 심화시켰다. 또한 민주화 요구가 커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확대된 대학생 집단은 이후 한국 사회의 정치·사회적 변화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7·30 교육개혁조치과 고등교육 체제의 재설계
신군부가 지시한 7·30 교육개혁조치의 직접적인 출발점은 과외금지였다. 그러나 한국교육개발원과 문교부가 준비해 오던 교육개혁안이 함께 반영되면서, 대학입시와 대학제도 전반을 재편하는 종합개혁으로 확대되었다(정태수, 1991).
당시 대학입시는 대학입학예비고사를 통과한 학생을 대상으로 각 대학이 자체적으로 실시하는 본고사가 중심이었다. 본고사의 난이도는 매우 높았고 대부분의 대학은 고등학교 내신을 거의 반영하지 않았다. 학교교육보다 과외가 입시를 좌우하는 구조가 형성되면서 과도한 사교육 경쟁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정부는 대학 본고사를 폐지하고 국가학력평가와 고등학교 내신을 대학입시에 반영하도록 하는 한편, 졸업정원제, 초·중등교육 여건 개선, 방송통신대학의 학사학위기관 전환, 교육대학 개편 등을 함께 추진하였다. 이후 1980년대 추진된 대부분의 고등교육정책은 이 개혁조치를 출발점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교육세 신설을 둘러싼 관계 부처의 반발과 고교 내신 성적의 대입 반영에 대한 교육계 내부의 이견에도 불구하고 이들 정책은 전격 추진되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교육 전문가 집단이 신흥 정치 세력을 끌어들여 단행한 교육개혁적 성격을 띠는 것으로도 평가된다(서남수 외, 2022). 즉 통상적인 여건에서는 추진되기 힘들었던 과제들이 권위주의 체제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단기간에 제도화로 이어진 사례라 할 수 있다.
졸업정원제의 도입과 폐지
한국은 오랫동안 국가가 대학정원을 강하게 통제해 왔다. 제3·4공화국 시기에는 국가 기간산업에 필요한 일부 공학계열을 제외하면 대학 정원 증원이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그러나 중등교육 취학률이 1980년 80% 수준에 이르렀음에도 고등교육 취학률은 10% 수준에 머물면서 입시 경쟁과 과외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81년부터 졸업정원제를 도입하였다. 대학은 입학 단계에서 정원의 130~150%까지 학생을 선발할 수 있도록 하고, 졸업 시에는 정원만큼만 학위를 수여하도록 한 제도였다.
그 결과 1981학년도 대학 입학인원은 전년도보다 10만 1,045명이 증가한 30만 6,880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서울대학교는 1980년 입학정원 3,315명에서 1981년 6,530명, 고려대학교는 2,505명에서 5,590명으로 확대되는 등 주요 대학의 입학 규모는 거의 두 배 가까이 증가하였다. 이는 한국 고등교육 역사에서 가장 급격한 정원 확대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졸업정원제는 대학 진학 기회를 획기적으로 확대하였지만, 급증한 학생 수에 비해 시설과 교수 확보가 뒤따르지 못하면서 교육여건이 악화되었다(김종서, 1986). 또한 일정 비율을 반드시 탈락시켜야 하는 제도는 학생들을 과도한 성적 경쟁으로 내몰았고, 특히 군 복무를 통해 졸업을 연기할 수 없는 여학생과 의과대학 학생들을 중심으로 제도의 불합리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정부는 일부 대학부터 입학정원과 탈락률을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제도를 보완해 나가다 결국 1987년 졸업정원제를 폐지하였다(조선일보 1987. 7.). 비록 제도 자체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지만 그 영향은 매우 컸다. 수도권 대학의 정원이 크게 늘어났고, 특히 시설 투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인문사회계열의 증원이 확대되면서 여학생의 대학 진학 비율도 26%에서 34%까지 높아졌다(김영화, 1993). 반면 국립대보다 사립대의 정원 증가 폭이 커지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사립 중심의 고등교육 구조가 더욱 강화되는 결과도 가져왔다.
한국형 대학입시의 도입
1980년대 고등교육정책의 또 다른 특징은 대학정원 확대와 함께 대학입시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가장 큰 변화는 대학 본고사의 폐지였다. 당시 본고사는 난이도가 매우 높아 별도의 과외를 받지 않은 학생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시험이었다. 정부는 본고사를 폐지하고 국가가 실시하는 학력평가 성적을 반영하도록 하였으며, 고등학교 내신 반영 비율도 단계적으로 20%, 30%, 50%까지 확대하였다. 당시 서울대학교의 내신 반영률은 2%에 불과했고,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는 내신을 사실상 반영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가 고교 내신 반영을 의무화한 것은 대학입시의 기준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조치였다. 학교 간 교육여건의 차이가 존재했지만, 정부는 전국 어느 학교에서든 성실하게 공부해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학생이 대학입시에서 인정받도록 하는 방향을 택하였다.
정원식 전 문교부 장관은 고교 내신 반영 정책이 서울대학교 입학생의 지역별 구성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고 평가하였다. 이전에는 서울을 포함한 10대 도시의 고등학교 출신 학생이 서울대학교 입학생의 88%를 차지하였으나, 내신 반영이 확대된 이후인 1984년에는 지방 군소도시 출신 학생이 45%를 차지하였다(정태수, 1991). 대도시와 상위계층에 집중되었던 상위권 대학 진학 기회가 지방으로 확산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확인되었다(한만길, 1993).
1980년부터 1992년까지의 한국 사회는 고도성장을 유지하면서도 사회적 불평등이 완화된 이례적인 시기로 국제적 평가를 받는다(Lee et al., 2018). 실제로 이 시기 소득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0.27 수준까지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이러한 성과의 배경에는 경제성장뿐만 아니라, 국가가 대학 정원 확대와 입시 개혁을 통해 교육 기회를 폭넓게 배분하고자 한 고등교육정책도 일정 부분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김신복, 1995).
특히 당시 대학에 재학했던 이른바 ‘과외금지 세대’를 대상으로 한 연구들은, 부모의 경제적 배경이 자녀의 사회적 성공에 미치는 영향이 이전이나 이후 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았음을 보여준다(여유진 외, 2011; 한국일보, 2011). 이는 대학입시 및 정원 정책이 단순한 대입 선발 방식을 넘어, 지역 간 계층 간 사회 이동성을 실질적으로 확장하는 기제로 작동했음을 유의미하게 시사한다.
과외금지 조치의 나비효과, 대학 장학금의 확대
과외금지 정책은 예상하지 못했던 또 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가정형편이 어려운 대학생은 입주과외나 개인교습을 통해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고 있었는데, 과외가 전면 금지되면서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운 학생들이 발생한 것이다. 정부는 1980년 과외를 통해 학업을 유지하던 학생들의 실태를 파악해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이어 1981년부터는 신입생의 20%까지 가정형편을 고려해 대학이 장학금을 지급하도록 하는 지침을 마련하였다(동아일보, 1980. 12.). 이는 성적 위주로 운영되던 장학제도에 학생의 경제적 여건을 본격적으로 반영한 조치였다(정태수, 1991).
등록금 감면을 받은 학생은 1975년 7만 5,183명에서 1980년 13만 729명으로 늘었고, 1985년에는 40만 5,192명으로 급증하였다. 장학생 수도 1975년 7,924명에서 1980년 2만 5,937명, 1985년 3만 6,995명, 1990년에는 5만 7,763명으로 꾸준히 증가하였다(교육부, 1998). 정부는 대학이 외부 장학금을 추가로 확보하고 이를 신입생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도록 하였다. 학자금 대여제도를 확대하고 지방 학생들의 대도시 거주를 지원하기 위한 대학 기숙사 확충도 추진하였다. 사립대학의 비중이 80%를 넘는 상황에서 등록금 인상을 억제하는 정책도 병행하였다.
대학입시 개혁이 진학의 문을 넓혔다면, 장학금과 학자금 지원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이 그 문을 실제로 통과하도록 지원한 정책이었다. 정원 확대와 입시 개혁만으로는 보장하기 어려운 교육기회의 실질적 형평성을 재정정책으로 뒷받침한 것이다.
한국방송통신대학의 학사학위기관 전환과 개방대학 설립
한국방송통신대학은 1972년 서울대학교 부설 초급대학으로 설립되었다. 아시아 최초의 원격 고등교육기관이었으며, 세계적으로도 영국의 오픈대학교에 이어 두 번째로 설립된 개방형 대학이었다. 정부는 졸업정원제의 시행과 맞추어 1981년 2월 방송통신대학을 5년제 학사학위 수여기관으로 급작스럽게 전환하였다(남신동, 2002). 졸업정원제로 대학에서 중도 탈락하는 학생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이들에게 계속교육의 기회를 제공할 별도의 학사학위기관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생각된다.
정부는 재직자의 계속교육을 지원하기 위해 국립 개방대학도 설립하였다. 직장인이 야간과 학점제를 활용해 학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한 개방대학은 이후 산업대학으로 발전하였다. 방송통신대학교와 개방대학은 대학입시에 실패한 학생뿐 아니라 직장인과 성인학습자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한국 평생학습체제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교육대학의 4년제 전환과 교원양성체제 개편
1980년대에는 초등교원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교원양성체제 개혁도 추진되었다. 정부는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교육대학을 2년제에서 4년제로 전환하고 정원도 함께 확대하였다(교육부, 1995).
광복 이후 초등교원 양성은 사범학교에서 시작하여 2년제 초급대학과 교육대학을 거쳐 발전해 왔다. 그러나 국민교육의 확대와 사회 변화에 따라 초등교사에게 요구되는 전문성이 높아지면서 기존의 2년제 과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1982년 교육대학을 4년제 대학으로 개편하였다. 교육대학의 4년제 전환은 교사교육의 전문성을 강화하고 교직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며, 우수한 인재를 교원으로 유입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후 교원의 보수와 처우 개선이 함께 이루어지면서 우수한 학생들이 교직을 선택할 수 있는 기반도 마련되었다.
한국이 열악한 교육환경 속에서도 비교적 짧은 기간에 높은 교육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그 가운데 우수한 인재를 교직으로 유입하고 체계적으로 양성한 정책은 한국 초등교육의 질을 뒷받침한 중요한 기반이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설립과 대학평가제도의 도입
졸업정원제는 고등교육 기회를 대폭 확대하는 데 기여했으나, 획일적인 학사 관리와 교육 여건 저하라는 구조적 부작용을 낳았다. 정부는 직접적인 국가 통제 방식만으로는 교육의 질을 높이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대학 스스로 교육 품질을 관리하는 체제로의 전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중앙일보, 1984). 결국 과도한 학사 통제는 대학 자율성 논쟁을 촉발시켰으며, 이는 고등교육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을 이끌어냈다.
이러한 배경에서 1982년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설립되었고, 대학평가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는 대학 간 협력과 정책 협의를 위한 대표기구로 설립되었지만, 정부와 대학을 연결하는 소통 창구의 역할도 함께 수행하였다. 권위주의 체제 아래에서 정부의 간접적인 관리 기능을 수행한 측면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학들이 공동으로 발전 방향을 논의하고 자율성을 확대해 나가는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대학평가 역시 중요한 전환이었다. 이전에는 졸업정원제를 통해 일정 비율의 학생을 일률적으로 탈락시키는 방식으로 교육의 질을 관리하였다면, 대학평가제도는 대학 스스로 교육과 연구의 수준을 점검하고 개선하도록 유도하는 방향으로 정책의 중심을 옮겼다.
전문대학 확대와 산업계 수요에 대응한 인재양성
1980년대 고등교육정책은 교육기회의 확대와 함께 산업화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방향으로도 추진되었다. 다만 정책의 중심은 특정 산업 육성이 아니라 고등교육의 양적 확대였으며, 산업정책과의 연계는 이러한 큰 틀 속에서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변화는 전문대학의 성장이다. 정부는 중견 기술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전문대학의 정원을 대폭 확대하고 교육과정 개발과 교원 연수 등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 결과 전문대학 재학생 수는 1979년 7만 5,205명에서 1985년 24만 2,114명으로 약 3.2배 증가하였다. 같은 기간 학과 수는 51%, 전공 분야는 44% 확대되어 산업현장의 다양한 인력 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박동열, 2016).
한편 1982년 시행된 해외유학 자유화조치는 해외 대학의 석·박사과정으로 진학하는 학생을 크게 늘리는 계기가 되었다(정태수, 1991). 이는 이후 국내 기업과 대학의 연구역량을 높이고 글로벌 기술개발을 추진하는 인재 기반으로 이어졌다. 정부는 해외에 있는 한국인 공학자를 국내 대학으로 초빙하는 정책도 병행하였다. 1981년부터 1983년까지 매년 50명씩 총 150명의 공학자를 유치하여 국내 대학과 산업계의 연구역량을 강화하고자 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또한 1983년 「수도권정비계획법」 시행 이후 수도권 대학 정원은 다시 엄격히 관리되었지만, 국가 경쟁력과 직결되는 일부 공학계열은 예외적으로 증원이 허용되었다. 당시 전략산업으로 육성되던 전기·전자와 반도체 분야의 정원 확대는 이러한 산업정책과 고등교육정책의 연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1980년대의 인재양성정책은 특정 산업에 필요한 인력을 공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후 한국의 과학기술 경쟁력과 산업발전을 뒷받침하는 인적자본을 축적하는 기반이 되었다.
결론
1980년대 고등교육정책은 권위주의 정치체제 아래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대학 자율성의 제약과 국가의 과도한 통제라는 시대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대학입시와 학사 운영에 대한 강력한 규제, 졸업정원제의 획일적 운영 등은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분명한 한계를 지닌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고등교육정책을 정치적 통제나 정권의 의도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정치적 맥락과는 별개로 교육정책의 내용과 그 결과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당시 정책은 의도하지 않았던 역설적 결과를 낳으며 한국 고등교육의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학생운동을 억제하고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려던 강력한 통제 정책은 역설적으로 대학생 수의 급격한 증가를 가져왔다. 통제의 대상이었던 대학은 정원 확대를 거치며 다양한 계층의 청년들이 성장하는 공간으로 변화했고, 이후 민주사회를 이끌 시민세력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국가는 대학을 통제하려 했지만, 확대된 고등교육은 결과적으로 국가의 의도를 넘어서는 사회적 변화와 민주화의 동력을 만들어냈다.
한편 이 시기의 가장 큰 교육적 성과는 고등교육의 문호를 국민 다수에게 개방했다는 점이다. 대학 정원 확대와 입시제도 개편은 지역과 계층 간 교육기회를 넓혔고, 등록금 및 장학금 정책은 경제적 장벽을 완화하여 교육을 통한 사회 이동의 가능성을 확대하였다. 또한 방송통신대학교와 개방대학을 통한 평생학습 기반 구축, 교육대학교의 4년제 개편,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설립과 대학평가제도 도입은 오늘날 한국 고등교육 체제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이처럼 1980년대 고등교육정책은 권위주의라는 시대적 제약 속에서도 고등교육의 대중화와 형평성 제고, 제도적 기반 구축을 통해 이후 한국 사회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의미 있는 유산을 남겼다.
결론적으로 1980년대 고등교육정책은 당시 권위주의 정치체제에 대한 평가와는 일정 부분 구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학의 자율성을 제약하고 국가 통제를 강화한 한계는 분명했지만, 정책이 낳은 결과는 설계자의 의도를 넘어섰다. 확대된 고등교육은 산업화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했을 뿐 아니라 민주사회의 시민적 기반을 넓히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따라서 1980년대는 권위주의라는 시대적 제약 속에서도 한국 고등교육의 발전 방향을 바꾸어 놓은 중요한 전환기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