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04 (목)

  • 맑음동두천 -10.1℃
  • 맑음강릉 -1.3℃
  • 맑음서울 -8.0℃
  • 맑음대전 -5.2℃
  • 맑음대구 -2.0℃
  • 맑음울산 -0.6℃
  • 구름조금광주 0.0℃
  • 맑음부산 -0.6℃
  • 구름많음고창 -2.3℃
  • 구름많음제주 7.7℃
  • 맑음강화 -8.1℃
  • 맑음보은 -6.6℃
  • 구름많음금산 -5.2℃
  • 흐림강진군 0.3℃
  • 맑음경주시 -1.5℃
  • 맑음거제 1.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라이프

[알쓸심] 선의의 폭력, 사랑과 통제 사이의 심리적 경계 “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야!”

 

“나는 네가 잘되길 바라서 그런 거야.”
“다 너를 사랑하니까 하는 말이야.”
“내 말 들어. 지금은 듣기 싫어도, 나중에 분명히 나한테 고맙다고 하게 될 거야”

 

‘살아보니 중요한 건 ○○이더라’, ‘문과보다는 이과가 네 미래에 더 도움이 돼’, ‘△△랑 어울리지 마. 네가 상처받을 거야’, ‘공부할 시간도 없는데 그림 그리는 건 대학 가서 해도 늦지 않아’…. ‘너를 위해’ 건네는 선의의 조언은 차고 넘친다. 분명 의도는 선했고, 판단은 옳았으며, 상대방을 아끼고 걱정하는 마음 역시 진심이다. 하지만 상대방은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낀다. 기껏 조언해 줬더니 퉁명스러운 얼굴이다. 고마워는 못할망정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라며 거절한다. 아니, 오히려 화를 낼 때도 있다.


엄마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데, 왜 아이들은 말을 안 듣는 걸까? 도대체 어떤 심리적 기제가 작동하길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나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통제, ‘선의의 폭력’ 
누군가의 인생을 걱정하며 건네는 ‘너를 위해 하는 말이야’라는 말 속에는 사실 ‘너의 생각·선택보다 내 말이 맞아’라는 확신과 ‘그러니 너는 내 방식대로 해’라는 은근한 강요(통제)가 숨어 있다. 그래서 “나는 네가 잘되길 바라서 그런 거야”라는 말이 상대방에겐 이렇게 들린다. 

 

“네 생각은 틀렸어. 내 말이 맞으니, 잔말 말고 내 말대로 해”


내 생각과 선택이 부정당하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상황이 고마울 리 없다. 만약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라면, 고맙기는커녕 때에 따라서는 불쾌할 수도, 반항심이 일어날 수도, 깊은 상처가 될 수도 있다. 


부모·교사·친구들은 언제나 ‘선의’의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 부모가 자녀의 꿈을 ‘현실적’으로 바꾸어줄 때도, 교사가 학생의 생활태도를 ‘지도’하기 위해 모진 말을 쏟아낼 때도, 친구가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비밀을 폭로할 때도, 동료가 ‘더 효율적’‘인 방법이라며 다른 방법을 제안할 때도, 그 모든 순간 그들은 ‘너를 위한’ 선의라고 믿는다. 하지만 ‘선의’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을 통제하려고 하는 순간, 선의는 조용히 폭력으로 변한다. 이것이 바로 심리학에서 말하는 ‘선의의 폭력(benevolent harm)’이다.


이들은 분명 선의였고, 상대방을 위한 조언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선의’는 상대방의 내면을 다치게 했고, 그들의 조언은 타인의 세계를 대신 결정했다. 결국 선의가 통제로 변하는 지점은 선택을 대신 결정하고, 자율성을 제한하고, 감정을 멋대로 이해하려는 순간이다. 부모가 자녀의 꿈을 대신 선택하고 결정해 주는 것, 교사가 학생이 사회에 나가서 제 몫을 하려면 생활태도를 고쳐야 한다는 ‘교육적 신념’으로 학생의 자율성을 제한하는 것, 친구를 돕기 위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사적인 이야기를 옮기고 다니는 것, 내 방식이 훨씬 효율적이니 내 말대로 하라고 강요하는 것…. 악의가 없어도, 통제의 방식이 옳다고 믿는 순간, 상대방에겐 폭력이 된다. 


‘선의의 폭력’은 왜 더 아픈가 
사랑·선의·배려라는 이름으로 조언을 던지는 사람은 자신의 조언이 타인에게 어떤 감정적 부담을 주는지, 조언이 상대방에겐 폭력이 되는지 상상조차 못 한다. 오히려 ‘넌 나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믿음이 바로 ‘선의의 폭력’의 핵심이다. 


악의적 폭력은 분명하다. 분노하고, 맞서 싸울 수 있다. 하지만 선의로 포장된 폭력은 다르다. 타인을 ‘고마워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해서 하는 말이고, 나 잘되라고 하는 말임을 알기에, 서운하고 불편감을 느끼더라도 싫은 티를 낼 수도, 단칼에 거절할 수도 없다. 미안하기 때문이다. 많은 아이가 상담실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고백한다. 

 

“엄마·아빠가 저를 위해서 고생하시고,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시는데, 제가 능력이 안 되니까 너무 죄송하죠. 저를 위해 해주시는 말인 거 아는데, 저는 너무 힘들어요. 그런데 말을 못 하겠어요. 실망하실 테니까.”

 

아이들의 선택지는 둘 중 하나이다. 자율성을 빼앗긴 채 상대방의 말을 따르며 살던가, 빼앗긴 선택권을 되찾기 위해 싸워야 한다. 어떤 것을 선택하든 심리적 부담은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선의의 폭력은 더 아프다. 사람은 악의보다 선의로 더 망가진다. 악의는 맘껏 미워할 수 있지만, 선의는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악의는 힘껏 싸우며 극복하려 노력하지만, 선의는 자율성과 선택권을 포기하게 한다. 선의로 내면이 무너진 아이는 ‘말 잘 듣는 착한 아이’,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의존적 아이’, ‘타인의 기대에 반응하며 타율적으로 살아가는 수동적 아이’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사랑하는 자녀가 이런 모습으로 성장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 1956)>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사랑은 타인의 성장을 위한 적극적 관심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사랑을 소유나 통제로 오해한다.”

 

프롬의 관점에서 보면 ‘선의의 폭력’은 ‘사랑의 오해’에서 비롯된다.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통제하려 하고, 교사는 학생을 위해서 자율성을 제한하며, 친구는 단짝으로 소유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성장과 자율성을 돕는 것이지, 타인의 선택을 대신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통제의 중단’이 아니라, 성장에 대한 신뢰다. 아이를 진심으로 성장시키고 싶다면 통제가 아니라 자율성을 자극해야 한다. 즉 “내 말대로 해”가 아니라 “네 생각(계획)은 뭐야? 무엇부터 어떻게 해 볼 생각(계획)이야”라고 물어봐야 한다. 
 
교실 속 선의의 폭력 
교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한다. 공동체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학생들의 선택과 행동을 제한하고, 시시비비를 가려줘야 한다. 아이의 상황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규칙상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사라는 직업 특성상 뭔가 도움을 줘야 한다는 선한 마음이,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줘야 한다는 교육적 신념이 올라온다. 그래서 공감보다는 문제 해결 중심으로 아이를 만난다. 그저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보다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아이에게 더 옳은 일이라고, 도움이 되는 방향이라고 믿는다. 선한 의도를 가진 교사가 종종 공감과 판단을 혼동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진짜 사랑은 옳음이 아니라 이해에서 자란다. 에리히 프롬이 말했듯 ‘사랑은 타인의 자유를 존중할 때’ 시작된다. 아이를 위한 교육도, 타인을 위한 배려도, 그 출발점은 선의가 아니라 공감이다. 만약 학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 그랬구나. 많이 힘들었겠네”라는 감정 대신 “아, 네가 요즘 그래서 그런 행동을 보인 거구나. 그럴수록 힘을 내야지. 지나가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거야. 이럴 땐 이렇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될 거야”라고 말한다면, 그 순간 우리는 감정을 이해·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의 관점’으로 분석·해석·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선의가 폭력을 멈추는 방법, 공감과 존중
그렇다면 선의의 폭력을 피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 답은 거창하지 않다. 대신 선택하거나 판단·결정하지 않는 것이다. 왜 그런 선택과 결정을 했는지 잘 듣고, 존중·공감하며, 함께 고민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좋은 선택을 하며 성장할 수 있도록 지켜보는 것이다. ‘너를 위한 말’이 진짜 사랑이 되려면, 출발점은 ‘선의’가 아니라 공감과 존중이어야 한다. 


공감은 마음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느끼는 것이다. 누군가 문지방에 발가락을 찧는 모습을 볼 때, 내가 다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 아프다겠다’하고 함께 아픔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판단은 타인의 마음을 ‘추측’하면서 ‘해석’한 후, 옳고 그름과 합리적·이성적·현실적 결정을 내리는 과정이다. 문지방에 발을 찧는 장면을 보고, “그러니까 조심했어야지! 다음부터는 뛰어다니지 마!”라며 시시비비를 가리고, 충고하듯 말이다. 공감과 판단은 서로 다른 언어로 ‘선의’를 말한다. 함께 아픔을 느끼는 공감도 선의이고, 또다시 다치지 않도록 훈육하는 것도 선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교는 ‘너를 위한’ 조언을 멈출 수 없는 공간이다. 교육은 ‘하고 싶지만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것’, 즉 자율성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해줘야 하며, 안전한 학교라는 공간에서 맘껏 연습하고, 몸에 익혀 사회에 내보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의의 폭력은 판단과 통제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의도를 의심하는 용기이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을 때, 선의는 통제가 아니라 관계의 언어로 변한다. 

 

“이 말은 정말 아이를 위한 것일까,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일까?”
 
진짜 너를 위한 조언은 통제하지 않는 용기  
사랑은 본래 보호의 감정이다. 하지만 보호가 과잉되면 통제가 된다. 통제가 길어지면 폭력이 된다. 진짜 사랑은 통제하지 않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상대가 나 없이도 설 수 있도록 지켜보는 인내, 그의 선택이 내 뜻과 달라도 존중하는 신뢰. 사랑의 본질은 ‘옳음’이 아니라 ‘관계의 자유’다. 그리고 그 자유는 우리가 ‘선의의 폭력’을 멈출 때 비로소 생겨난다.

 

“나는 너를 위해 하는 말이야.” 

그 문장이 진심이 되려면, 그 뒤에 이렇게 덧붙여야 한다.

“하지만 네가 다르게 생각해도 괜찮아.”

배너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