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니메이션 〈주토피아〉의 세계에는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이 함께 산다. 토끼 경찰 주디 홉스와 여우 닉 와일드는 ‘다르지만, 함께 살 수 있다’는 도시의 이상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도시 역시 편견과 낙인, 두려움과 혐오가 촘촘히 스며 있다. 특히 육식동물과 초식동물, 즉 포유류끼리의 ‘차별’을 다룬 <주토피아1>과 다르게 <주토피아2>는 은신처 ‘습지 마켓’에 사는 파충류와 반수생동물을 등장시키면서 차별을 넘어선 ‘혐오’의 문제를 드러낸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배제되지 않는다. ‘위생 문제’, ‘안전을 위한 관리’, ‘합리적인 예방’이라는 말로 포장된다.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가 말한 ‘신성-오염 가치체계’가 작동하는 순간이다.
이 장면은 낯설지 않다. 우리가 사는 사회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혐오를 합리화해 왔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나 혐오는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유난히 혐오에 취약하다고 평가된다. 왜일까? 그 이유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구조에 있다. 이번 호에서는 우리 사회 구조 속에 숨어 있는 혐오의 심리학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 사회는 왜 혐오에 취약할까?
● ‘빨리빨리’ 문화 위에 세워진, ‘공감’에 인색한 사회
한국 사회는 공감에 인색하다. 심리학에서 공감은 단순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그 감정이 왜 생겼는지를 이해하며, 그 사람의 옆에서 잠시 머무를 수 있는 매우 느린 감정이다. 하지만 ‘빨리빨리’ 문화 위에 세워진 우리 사회는 이 느린 감정을 연습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빠른 사회에선 감정 역시 ‘빠르게’ 반응해야 한다. 그 결과 우리는 감정을 충분히 숙성시키는 법보다 타인을 즉각적으로 판단하고, 빠르게 분류하는 법에 익숙해졌다. 설명이 길어지면 답답해하고, 상대의 사정을 끝까지 듣기보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를 먼저 묻는다. 공감이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이다.
속도가 중요한 사회에서 가장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는 누구일까. 느린 사람, 설명이 필요한 사람, 예외적인 상황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시스템을 멈추게 하는 방해꾼으로 인식된다. 혐오는 이때 작동한다. 집단에 손해를 끼친 그들을 공감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으로 바꾸는 가장 효과적인 정당성이기 때문이다. 공감이 사라진 사회는 겉보기에는 매우 효율적인 듯 보이지만, 그 내부는 서서히 무너진다. 갈등을 ‘말로 다룰 수 있는’ 기회, 즉 회복 타이밍을 놓치기 때문이다. 결국 공감이 사라지면 상황이 설명되지 않고, 억울함이 풀리지 않으면서 분노·혐오와 같은 더 큰 충돌로 돌아온다.
● 압축성장과 경쟁 사회가 만든, ‘실패에 가혹한’ 사회
한국 사회는 ‘실패’에 가혹하다. 압축성장을 한 우리 사회는 짧은 시간 안에 성과를 내야 했고, 경쟁에서 뒤처지면 살아남지 못했다. 성공과 실패, 정상과 낙오, 유능함과 무능함이라는 이분법적 사회에서는 아직 배우는 중이라는 ‘과정’, 실패해도 다시 시도할 수 있다는 ‘가능성’, 최고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여유’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경쟁과 속도가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누가 더 낫고, 누가 뒤처졌는지 빠르게 가려내야 한다. 누군가를 깎아내리는 순간, 나는 상대적으로 안전해지기 때문이다. 혐오는 이때 작동한다. 실패를 과정이나 경험이 아닌 개인의 결함, ‘정체성’으로 바꿔버린다. 실패한 개인은 ‘집단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 능력이 부족한 사람, 함께 가기 어려운 사람’으로 재정의한다. 시험·승진·결혼 등에서의 실수·실패에 대해 “이번에만 못한 거야”가 아니라 “그럴 줄 알았어. 쟤는 원래 그래”라는 말로 변화와 회복의 가능성은 차단되고, 한 번 씌워진 평가는 좀처럼 갱신되지 않는다.
● 집단 정체성이 강한, ‘어느 편’이 중요한 사회
한국 사회는 유독 집단 소속감이 강하다. 자신을 설명할 때 개인의 취향이나 생각보다 어느 학교, 어느 지역, 어느 세대, 어느 조직에 속해 있는지를 먼저 말한다. ‘나’가 아니라 ‘우리’가 앞서고, ‘우리’가 분명해질수록 ‘우리 아닌 존재(그들)’와의 경계는 뚜렷해진다.
문화심리학자 미셸 글래드웰은 위협이 잦은 사회일수록 집단 규범을 엄격하게 유지하고, 타인에 대한 적대감 수준이 강해진다고 설명한다. 일제강점기·전쟁·분단 그리고 치열한 경쟁을 거치며 ‘어느 편’에 서야 살아남고, ‘다른 편’이었을 때 어떤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지를 반복적으로 경험한 우리 사회가 집단 결속력과 집단 정체성이 강한 이유이다. 이런 구조는 경제적 불안과 사회적 위기감이 높아질수록 ‘우리’ 집단은 결속하고, ‘우리 아닌’ 집단은 배척하는 도구로 작동한다.
오늘날 노동시장에서 ‘기성세대 때문에 기회가 없다’는 청년층과 ‘요즘 젊은것들은 사회 시스템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중장년층의 세대 갈등, ‘젠더 정책 때문에 역차별받는다’는 남성층과 ‘사회구조는 여전히 불평등한데 왜 이를 부정하느냐’는 성별 갈등, 보수와 진보의 정치적 대립 역시 개인의 악의라기보다 ‘우리가 위협받고 있다’는 집단적 불안의 표현에 가깝다. 이때 불안을 배출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우리 집단이 똘똘 뭉쳐 다른 집단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 비교와 서열에 익숙한 교육, 혐오를 연습하는 사회
이런 낙인 구조는 성인이 된 후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성취와 경쟁 중심으로 설계된 학교에서 아이들은 시험 성적이 낮으면 ‘공부 못하는 아이’, 한 번 문제행동을 보이면 ‘원래 그런 아이’, 또래관계에 어려움을 보이면 ‘사회성 없는 아이’가 된다. 한부모가정·다문화가정 아이들은 ‘아, 어쩐지’라는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성적표는 아이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요약본이 되고, 생활기록부의 한 문장은 아이의 1년, 혹은 그 이상을 규정한다.
아이들은 혐오를 ‘가르침’으로 배우지 않는다. 환경으로 학습한다. 실수한 아이를 어른들이 어떻게 대하는지, 실수한 친구가 또래에게 어떻게 취급되는지, 한 번 문제를 일으킨 학생이 얼마나 오래 그 이름으로 불리는지, 댓글이 어떤 언어로 채워지는지, 사과한 사람이 다시 설 자리가 있는지를 보며 배운다. 틀려보고, 다시 시도하면서배워가는 ‘실패를 연습해야 하는 공간’인 학교가 ‘낙인에 익숙해지는 연습’을 시키는 공간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 결과 아이들은 공감보다 거리 두기를 먼저 선택한다.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라며 연민보다 안도감을 느낀다. 동시에 ‘내가 되지 않기 위해’ 남보다 먼저 낙인찍는 법을 배우고, 이기는 편에 서려 한다. 아이들에게 혐오는 자기 보호의 전략이 된다. 공감보다 안전하고, 이해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디지털 환경을 만나며 완성된 ‘빠른 혐오’, 중단 버튼이 없다
이 모든 조건 위에 인터넷과 SNS 알고리즘이 얹히면서 혐오는 개인의 감정을 넘어 사회적 시스템이 되었다. 짧은 영상, 자극적인 제목, 즉각적인 분노와 조롱은 클릭과 ‘좋아요’라는 보상을 받으며 폭발적으로 증폭되고, ‘멈출 수 없는 감정’이 된다.
SNS 알고리즘의 핵심은 반응이다. 이 시스템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다. 혐오 표현이 사실인지, 차별적인지,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사람들의 반응만이 기준이다. 오래 머무르고 많이 반응할수록 유사한 콘텐츠를 반복 노출한다. 그 결과 SNS와 플랫폼 알고리즘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만든다. 비슷한 분노와 대상을 공유하는 사람끼리 모여 ‘다들 이렇게 생각하잖아’, ‘우리가 틀린 게 아니라, 저들이 문제지’라며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상식’이나 ‘다수의 판단’처럼 굳어진다.
여기에 확증편향1이 결합하면 혐오의 범위는 개인에서 점차 집단 전체로 일반화되고, 나의 확신은 ‘내가 속한 집단의 정체성’이 된다. 그래서 누군가 내 생각·믿음·판단과 반대되는 근거를 제시하면, 그것은 단순한 반대의견이 아니라 우리 집단 정체성에 대한 공격처럼 인식된다. 그 결과 믿음을 수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하게 확신하면서 저항하는 ‘역반동 효과(backfire effect)’가 나타난다. 상대방에 대한 혐오는 ‘용기 있는 발언’으로 재포장되어 집단의 힘을 업고, 경쟁하듯 과격해진다. 자신을 피해자로 인식하는 순간, 상대는 자동으로 가해자가 되고 혐오는 더 대담해진다.
디지털 환경은 확증편향을 시스템적으로 증폭시킨다. SNS와 플랫폼 알고리즘은 역반동 효과를 강화한다. 반대 의견은 공격적으로 보이도록 노출되고, 내 생각과 같은 의견은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그 결과 사람들은 ‘내 생각을 반박하는 사람은 소수’이고 ‘우리는 깨어 있고, 저들은 틀렸다’는 인식을 강화한다. 이 구조 안에서 설득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대립과 갈등만 불거질 뿐이다.
혐오를 감정이 아닌 기술로 배우는 아이들
문제는 이 시스템을 아이들이 너무 이른 나이에 접한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혐오를 ‘잘못된 감정’으로 배우기 전에, 반응을 얻는 기술로 먼저 학습한다. 댓글, 밈, 숏폼 영상, 단톡방 농담, 게임 채팅에서 왜 웃긴지, 왜 싫은지, 왜 배제되는지, 왜 상처가 되는지 설명받을 기회 없이 따라 한다. 조롱하면 웃음이 나오고, 혐오하면 조회수가 오르며, 누군가를 깎아내리면 주목받는 환경에서 아이들은 중요한 착각 하나를 배운다.
‘이건 잘못된 행동이 아니라, 인기 있는 행동이다.’
혐오는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전략의 문제가 된다. 어떻게 말해야 주목받는지, 누구를 공격해야 안전한지, 어느 선까지 가야 웃음을 얻는지를 놀이처럼 익힌다. 반복되는 혐오 노출은 감정을 무디게 만든다. 처음에는 불편했던 표현이 어느 순간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고, 타인의 고통은 스크롤 한 번으로 지나간다. 너무 많은 자극 속에서 아이들의 뇌는 가장 강한 감정만을 선택하고, 그 자리는 혐오가 차지한다. 내가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너무나 끔찍한 일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어쩔수가 없다>의 만수처럼 내가 살기 위해 상대방을 제거하는 것은 생존전략이 된다.
정리하며 _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아이들은 우리가 만드는 사회에서 자란다. 빠른 속도, 실패에 가혹한 문화, 비교 중심의 교육, 강한 집단 정체성, 그리고 이를 증폭시키는 SNS 환경이 겹치며 혐오는 일상이 되었다. 한국 사회가 혐오에 취약한 이유는 사람들이 유난히 나빠서가 아니다. 혐오를 가장 빠르고 쉬운 감정으로 선택하게 만드는 구조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주토피아〉가 보여주었듯, 문제는 ‘누가 나쁜가’가 아니라 ‘어떤 구조가 두려움을 키우는가’이다. 그리고 그 구조를 바꾸는 일은 아이들보다 어른의 몫이다. 그래서 교육이 중요하다. 아이들을 혐오로부터 지키는 일은 혐오 표현을 금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다려도 되는 수업, 실패해도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경험, 설명이 필요한 갈등, 서사를 끝까지 들어주는 어른….
“천천히 해도 괜찮아,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는 거야.”
“넌 생각이 많아서 로딩속도가 걸릴 뿐, 시작하면 끝을 보잖니?”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혐오 예방 교육은 거창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조금 느려도, 덜 공격적이어도, 실수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회를 어른들이 먼저 보여주는 일일지 모른다.
혐오의 반대는 단순한 선의가 아니다. 시간과 여유, 그리고 다시 이해하려는 태도다. 빨리빨리 사회가 만든 감정의 습관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아이들만큼은, 누군가를 빠르게 판단하지 않아도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은 혐오가 자라기 쉬운 환경이 아니라 혐오를 딛고 함께 어우러지는 사회에서 살 수 있다. 혐오는 빠르다. 교육은 느리다. 그러나 아이들을 지키는 일은 언제나 느린 쪽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