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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가능성을 여는 서울청담고등학교

한때 힘든 시절도 있었다. 고교 진학을 앞둔 학생들은 3~4지망 학교로 꼽았고, 교사들은 전보 연한이 차기도 전에 떠나려던 학교다. SKY 대학엔 명함도 못 내밀었다. 게다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의 중심인물과 연관되다 보니 학교를 보는 시선은 싸늘했다.

 

그러던 학교가 달라졌다. 학생들의 학교 만족도가 80%를 넘어서고, 교사들은 대기라도 좋으니 전보유예 대상에 넣어달라고 조른다. 지난해 대학입시에서는 60여 명이 소위 말하는 ‘인서울’에 성공했다. 의대 등 최상위권 진학자도 3명이나 된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위치한 청담고등학교 이야기다. ‘모두의 가능성을 여는 교육’을 목표로 학생 맞춤형 교육과정을 실현하면서 머물고 싶은 학교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운동장에 잔설이 희끗희끗한 지난 1월, 남부호 교장을 만난 곳은 교장실이 아닌 교내 커피숍 ‘청담나루’였다. 교실 반 칸 크기의 청담나루는 이 학교 교직원들의 휴게공간이다. 푹신한 소파와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그리고 커피향이 물씬하다. 특히 통창 너머 보이는 자그마한 나무숲은 계절의 변화를 한눈에 느낄 수 있어 일품이다. 청담나루는 남 교장의 호주머니로 운영된다.

 

그는 업무추진비의 절반을 커피 원두 등 청담나루에 필요한 재료 구입 등에 쓴다. 이른 아침 출근한 교사들은 이곳에서 원두를 갈아 만든 커피 한 잔으로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한다. 덕분에 기자도 독특한 맛과 풍미로 유명한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커피를 공짜로 맛보는 기회를 얻었다. 

 

청담고 만남의 광장 청담나루 
사실 청담나루가 탄생한 데에는 말 못 할 속사정이 있다. 4년 전 남 교장이 부임했을 때만 해도 지금과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대통령 탄핵의 여진이 남은 탓인지 학교구성원 모두가 예민하고 흉흉했다. 반목도 심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교직원들끼리 감싸주고 안아주는 화합의 공간이 필요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유휴 공간을 활용한 교내 커피숍. 예상은 적중했다. 자그마한 공간이지만 만남과 나눔의 장이 됐고, 파급력은 컸다. 마음의 문이 열리자 학교구성원들이 조금씩 하나가 되어갔다.


그 뒤 학교가 달라졌다. 단적인 예가 부장교사 임명이다. 신학기를 앞두고 학교마다 부장교사 모시기에 몸살을 앓지만, 청담고는 예외다. 이 학교는 부장교사 자원이 넘친다. 게다가 부장교사도 경력이 많은 원로교사들이 맡는다. 전체 11명의 부장교사 중 원로교사가 8~9명에 이른다. 갓 임용된 2급 정교사를 부장교사로 임명해 논란이 된 세태와는 딴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비결은 확실한 인센티브다. 이 학교는 부장교사에게 성과급 S를 준다. 교문지도와 급식지도를 면제한다. 대신 부장업무에 충실하도록 했다. 권한도 부여했다. 웬만한 업무는 부장을 중심으로 부원들과 상의해 결정한다. 교사가 교장에게 직접 기안을 올리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반드시 부장을 거치도록 했다. 청담고는 부장중심학교인 셈이다. 이 모든 과정은 교직원들의 동의를 거쳐 진행됐다.

 

처음엔 다소 볼멘소리가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나이 든 선배 교사들이 직접 어렵고 힘든 업무를 수행하자 저연차 교사들도 따라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선배들에게 배울 점이 많아 좋다”며 적극 호응한다는 게 학교 측의 귀띔이다. 청담고의 부장교사 성공사례는 인근 학교에 벤치마킹 돼 확산 중이다.

        

입시 강자로 떠오른 청담고
‘한번 해보자’는 분위기는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전달됐다. 그 결과 청담고는 지난해 대학입시에서 괄목할 성적을 거뒀다. 무려 60여 명의 학생이 서울대를 비롯해 서울 시내 4년제 대학에 진학했다. 의대와 약대를 비롯한 최상위권 대학 합격자도 배출했다. 인근의 학교들에 비해 약세를 면치 못하던 몇 년 전과는 격세지감이다. 


이런 결실은 교사들의 열정이 결정적 원동력이 됐다. 교사들은 학생 한 명 한 명에 최선을 다한다. 생활기록부만 보더라도 풍부하기 이를 데 없다. 학생들이 발전하는 모습을 꼼꼼히 기록했다가 생기부에 반영하니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포트폴리오가 됐다. 대학들이 청담고 학생들을 눈여겨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강남에 위치해 학생들이 무작정 학원으로 몰려갈 것 같지만 실제론 학교 측이 마련한 야간 자율학습에 30% 정도의 학생들이 빠짐없이 참여한다. 학교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교사들이 변하니까 아이들한테 눈을 돌리더군요. 그러면서 학력도 올라가고 입시성적이 좋아지고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오는 시너지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남 교장은 “한 학년이 150~200여 명에 불과한 작은 학교지만 이를 기회로 삼아 학생들에게 더 많은 정성을 쏟다 보니 대입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강한 학교로 거듭났다”라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학생들 입에서 “우리 선생님 너무 자상해요. 열정적이세요. 학교가 너무 좋아요”라는 말이 스스럼없이 나온다고 한다.

 

 

고교학점제 선도학교 … 공유 캠퍼스 운영 
고교학점제 등 새로운 교육시스템에서도 앞서간다. 청담고는 고교학점제 공동교육과정 운영 선도학교다. 인근 경기고·영동고 등과 연합해 공동으로 공유 캠퍼스를 운영한다. 청담고가 담당한 분야는 IT 교육. 이를 위해 올해 정보교과를 신설하고, 인공지능과 피지컬 컴퓨팅 등 소수 과목을 개설해 학생들이 첨단 과학 기술의 기초를 다지도록 하고 있다.


아울러 학생 중심의 교육과정 구현을 위해 기초교과와 탐구교과 내에서 다양한 과목을 개설하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소수의 학생이 선택하는 물리학2·경제와 같은 과목을 개설해 운영하고 있다. 또 체육·예술, 생활·교양교과의 진로선택과목을 개설하고 교과 간 교육과정을 균형 있게 편성했다. 심화영어1, 세계 문제와 미래사회와 같은 전문1 교과 등을 통해 학생들의 심도 있는 학습을 이끌어간다.


독서·토론교육 등 다양한 교육활동은 청담고의 강점이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1교사 1권장 도서제’이다. 모든 교사가 읽고 싶은 책 한 권씩을 정해 통독한 뒤 이를 독서·토론수업과 연계하는 방식이다. 라우라 에스키벨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부터 베스 사피로가 쓴 <쥬라기 공원의 과학>까지 교사 55명이 모두 한 권씩 선정했다. 


인문소양을 키우기 위한 노력은 또 있다. 연간 2회 실시되는 인문 아카데미와 북스테이 캠프, 책 드림 행사 등이다. 청담토론 캠프, 우리 역사 한마당, 경제 한마당 등 창의적 사고력과 분석력을 신장하는 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다. 수학·과학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여 자연과학 특강, 과학캠프, 수학 사고력 세미나, 골드버그 장치 탐구 등을 운영하고 있다.

 

자기주도 교육 실천 … 상벌점 항목 학생들이 정해
학생들의 자치활동 역시 눈여겨볼 대목이다. 상벌점제를 운영하는 이 학교는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상벌점 항목을 정한다. 자율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어려서부터 익히도록 하려는 배려다. 학생과 교사들이 행복한 학교, 믿음과 신뢰가 단단한 학교 청담고이지만 남모르는 어려움도 있다. 이 학교는 오는 2026년 인근 잠원지구로 이전한다.

 

문제는 이전 예정학교의 경우 환경개선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서울교육청의 방침에 따라 학교시설 노후화가 심각한데도 이렇다 할 지원이 없다는 점이다. 이전할 학교에 시설 개선비를 지원하는 것이 예산 낭비라고 여긴 탓인지 몰라도 학생들은 낡은 시설에서 공부하는 불이익을 받고 있다. 시설이나 물품 구입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학교 측은 폐교 예정학교를 찾아 책장이나 냉·난방기를 가져와 사용하는 고육책을 쓰고 있다.

 

교장은 기다리는 사람 … 선생님과 학생을 믿는다
학교 관계자는 “자원재활용을 통해 지난해 6천여만 원의 예산을 절감하는 효과를 거뒀지만, 교육환경 개선을 위한 교육청의 예산지원이 아쉬운 것은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남 교장은 교육부에서 교육과정 담당국장을 역임하고 대전부교육감을 지낸 엘리트 관료이다. 대전부교육감을 지낼 때만 해도 교원 출신으로는 전국 17개 시·도교육청 중 그가 유일했다. 그만큼 역량을 인정받은 인물이다. 


지난 2021년 9월 청담고 교장으로 부임해 올해 4년째를 맞는다. “교육부에서 근무할 때는 모든 업무에서 인풋과 아웃풋이 분명하고, 퍼즐이 딱딱 맞아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학교는 다르더군요. 교직원들에게 베풀고 믿고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남 교장은 “교사들이 마음껏 교육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장을 만들어주고, 믿고 기다리니 학교가 변하더라”며 “교장의 리더십은 기다림의 미학 같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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