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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대조선’ 아악부터 ‘대한민국’ ICT까지

[부산엑스포 새 시대 연다] <6> 130년간 이어진 한국관 역사

 

우리나라와 엑스포의 인연은 생각보다 오래됐다. 1893년 ‘대조선(Korea)’이라는 국호로 미국 시카고박람회에 처음 참가했다. 배경에는 근현대사의 굴곡이 있다. 일본의 압박과 청나라의 속방론, 러시아의 남하로 어지럽던 19세기 말 조선은 나라의 독립성을 확보하는 통로로 미국에 눈을 돌렸다.

 

외세 압박 속 독립성 확보
 

고종의 칙지를 받은 정삼품 참의내무부사 정경원은 사무원, 통역원, 장악원 악공 등 12명을 이끌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개막식 날 장악원 악공들은 스티브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선 아악을 연주했다. 우리 가락이 이역만리 미국 땅에 울려 퍼지는 순간이었다. 코리아 전시실은 박람회장에서 가장 큰 공산품전시관 안에 마련됐다. 43.3㎡ 개방형 직사각 전시실 전면과 측면에 한옥 형태로 현지에서 직접 구운 기와를 올렸다. 정면에 가마와 유리 진열장을 놓고 관복, 갓, 짚신 등 의복류와 생활용품, 군용품을 전시했다. 동양에서 온 이국적 풍모의 생활용품은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전시물에 관한 질문이 끊이지 않자 이름과 용도를 영어로 써 붙였다.
 

이어 1900년 파리박람회에 참가했다. 명성황후의 척신 민영찬이 참가단장으로 파견됐다. 대한제국은 프랑스 건축가 페레가 경복궁 근정전을 본떠 지은 한옥 전시관을 할당받았다. 전시관 중앙에 고종 어진을 걸고 각종 생활용품과 민속품을 전시했다. 현지 언론 <르 프티 주르날>은 대한제국관에 대해 “극동의 미를 한껏 살려 가장자리가 살짝 들린 지붕을 덮은 화려한 색상의 목재건물이 큰 관심을 끌었다”고 소개했다.
 

우리나라는 1904년 세인트루이스박람회에도 초청됐으나 외세 침범 등 급박한 정세로 참가하지 못했다. 이후 국권 침탈과 전쟁 등으로 엑스포 참가는 중단됐다.
 

전후 부흥기를 거친 대한민국은 1962년 시애틀박람회를 통해 엑스포 무대에 복귀했다. 그 해는 고도성장의 시동을 건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원년이었다. 한국은 326㎡ 규모의 단독 전시관을 짓고 다른 참가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식민 통치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신흥공업국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전시관이었다. 전시물은 재봉틀·피아노·라디오·타이어·고무신·치약 등 공산품과 왕골·나전칠기·도자기 공예품 등 1608점이었다. 시애틀박람회는 한국이 임금경쟁력을 기반으로 수출을 타진하는 무역의 장이 됐다. 

 

62년 만 복귀 후 ‘단골손님’
 

한국은 이후 개최된 엑스포에 빠짐없이 참가했다. ‘아시아의 시대’를 연 1970년 오사카엑스포는 국내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다루면서 대중의 관심을 고조시켰다. 한국은 4150㎡ 규모의 역대 최대 전시관을 짓고 각종 공업제품과 분청사기·바가지·키 등 전통용품을 전시했다. 오사카엑스포 참가 경비는 총 40만 달러(약 1억800만 원)에 달했다. 1970년 정부 예산이 62억 원인 점에 견줘 대규모 투자였다.
 

1998년 리스본엑스포 한국관은 해양 주제에 집중했다. 조선산업과 남극 세종과학기지, 제주도 해녀와 바다환경, 장보고 영상물 등의 전시 콘텐츠를 담았다. 2020년 두바이엑스포 한국관은 돋보이는 디자인과 최첨단 ICT를 활용한 ‘이동성’ 테마를 선보였다. 특히 회전큐브 디스플레이, 내외부를 잇는 나선형 통로 등의 디자인이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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