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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창가에서] 키 큰 쌤의 첫 학교

‘처음’이란 단어에는 설렘이 묻어납니다. 첫눈의 새하얀 모습, 첫사랑의 두근거림, 첫 여행의 기대는 순수한 떨림과 마주하게 합니다. 어느 학교에 가도 ‘첫 학교’인 서울한강초에서의 기억만큼 가슴 설레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얼마 전 방을 정리하다 대학 때 쓰던 수첩을 발견했습니다. 공부 계획을 적는 칸에 ‘선생님이 되고 나서 할 일’이라는 버킷 리스트가 적혀 있었습니다. 임용고시 준비로 하루에 10시간씩 공부하던 때 기운을 얻고자 적은 것들입니다. ‘혼자 영화 보기’와 같은 작은 것부터 ‘다이어트 하기’처럼 큰(?) 소원까지 빼곡히 적혀 있었는데 생각보다 이루어진 것들이 많아 놀랐습니다.

 

그중 눈에 띄는 소망 하나가 있었으니 바로 ‘내 교실 갖기’였습니다. 교생실습을 할 때 자신의 교실에서 교실의 또 다른 주인인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담임 선생님이 얼마나 멋지고 부럽던지요. ‘내 교실에서 내 아이들과 수업을 할 수 있다면 너무 행복해서 월급을 안 받아도 좋을 것 같아!’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런 제가 서울한강초에 발령받아 내 교실이 생겼으니 얼마나 기뻤을지 상상이 되나요? 주말에도 학교에 와 교실 한 번 둘러보고, 엄마까지 대동해 쓸고 닦고 정리해도 힘들 줄 몰랐습니다. 작은 학교에 배정받은 자의 특권으로 한 교실을 여러 해 쓰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한강초에서의 첫 교실은 올해도 우리 6학년 1반의 교실이 되었습니다. 둘러보니 작은 장소 구석구석 추억이 담기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교실 문을 보니 도헌이가 생각납니다. 하루는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도헌이의 손에 나뭇가지가 들려 있었습니다. ‘웬 나뭇가지를 들고 왔어. 위험하게’ 하려는데 나뭇가지 끝에 연둣빛 사마귀가 고개를 내밉니다. 버려진 나뭇가지에 사마귀가 매달린 모습이 신기해 친구들이랑 선생님에게 보여주려고 들고 왔답니다. 날아갈까, 떨어질까, 살금살금 교실까지 올라왔을 생각을 하니 너무 귀여워 웃고 말았습니다. 
 

교실 창문은 또 어떤가요. 언젠가 영어 시간에 영어실로 간 우민이가 창문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겁니다. ‘너 왜 영어 시간에 교실로 올라왔니? 또 뭐 까먹고 갔구나!’ 잔소리 폭탄이 떨어지려는 순간 우민이가 100점 맞은 영어 시험지를 교실 창문에 턱 갖다 댑니다. 전날 우민이와 영어 시험 점수 올리기로 손가락 걸고 약속한 게 생각납니다. 선생님한테 자랑하려고 영어 선생님께 화장실 간다고 하고 올라왔다는데 깜찍한 거짓말이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 있는지, 그때 깨달았습니다. 
 

청소함에는 창문을 닦다가 창밖으로 떨어진 걸레를 소중하게 주워오며 머쓱한 얼굴로 헤헤 웃던 상우가, 책상에는 지우개 가루를 모아 윤정 쌤 얼굴을 만들어 자랑하던 주영이가, 칠판에는 어떤 칠판도 새것처럼 깔끔히 만드는 솜씨 좋은 담이가 있는데 이런 아이들을, 이런 서울한강초를 어찌 설레어 맞이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첫 부임지에서 어느덧 여섯 번째 가을을, 서울한강초는 60번째 가을을 맞이했습니다. ‘키 큰 쌤’으로 주로 불리는 저는 이곳에서 종종 실수했고, 자주 웃으며 조금씩 둥글어졌습니다. 어떤 교사가 좋은 교사인지, 학교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아직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서울한강초에서의 기억은 늘 첫사랑 같은 소중함으로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학교 위로 시원스레 지나가는, 빛나는 60번째 가을 하늘을 반갑게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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