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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2만 권의 책을 읽고 100권의 책을 쓴 선비

독서와 글쓰기가 금란지교를 이룬 이덕무

메마른 삶의 온도를 바꾸는 보통의 문장들


"어진 사람은 흥망과 성쇠로 절개를 고치지 않고, 의로운 사람은 보존과 멸망으로 마음을 바꾸지 읺는다. 가장 좋을 때 지닌 마음을 가장 나쁠 때도 잃지 않는다. 가장 나쁠 때 가진 마음을 가장 좋을 때도 잃지 않는다. -75쪽


독서와 글쓰기의 금란지교를 이룬 사람, 이덕무


좋은 문장을 만나면 체온이 변한다. 따뜻해지거나 시원해지거나 차가워진다. 왜 좋은 글인지 설명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 달라진 온도를 느끼며 우리 몸은 본능적으로 좋은 문장을 알아차린다. 이덕무는 이런 좋은 문장의 비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소하고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관찰해 그 안에 숨은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가득한 이 책이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역자 서문에서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나의 청춘 시절 소망은 이덕무처럼 책만 읽는 바보(간서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어찌 선생을 하고 먹고 살만해지니 책은 어쩌다 의무적으로 읽어야 하는 숙제 같은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다시 눈은 어둡고 일을 내려놓을 때가 가까워지니 이제야 비로소 잊혔던 옛 꿈이 되살아납니다. 책을 사서 볼 수도 읽을 시간도 없이 그저 생계에 끄달려 외줄타기에 바빴던 젊은 날의 꿈을 이루고 싶어졌습니다.


이덕무의 글은 사소하고 세밀한 관찰, 작은 것들에 대한 애착,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는 사물에 대한 애정으로 넘칩니다. 사색일기, 관찰일기를 넘어 구도자처럼 독서와 글쓰기가 금란지교를 이룬 조선 지식인의 일상이 곁에서 본 듯 그려진 책입니다. 배고픔 속에서도 책을 놓지 않으며 선비의 기상을 굳세게 지켜낸 그의 삶의 온도가 치열하게 그려진 책입니다. 폭설한파에도 그 향기를 팔지 않은 한 떨기 매화꽃처럼 살다간 가난한 선비가 남긴 어록들이 고전인문학자인 한정주의 손을 거치며 금박을 두른 둣 곱게 단장했습니다.


이덕무라는 옛사람과 한정주라는 지금사람이 시간을 넘어 한 지점에서 만나 펼치는 금란지교(단단하기가 황금 같고 아름답기가 난초 향기 같은 사귐이라는 말로 지극히 친한 사이라는 뜻)로 아름다운 문장의 가교를 만들었습니다. 저자 한정주의 박학다식이 이덕무가 쓴 원문을 먹기 좋게 갈무리하여 더욱 빛나는 글맺음이 행간마다 넘쳐납니다. 원문을 해석함이 이덕무의 친구가 아니고서는 꿰뚫지 못할 문장의 수려함이 압권입니다.


자연은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다. 특별하지 않은 것에서 특별한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일상의 재발견이다. "--니체


널리 알면서도 편찬하거나 저슬하지 못하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이나 다름없다. 이미 떨어진 버린 꽃이 아니겠는가. 편찬하거나 저술하면서도 널리 알리 못하는 것ㅇㄴ 근원이 없는 샘물이나 다름없다. 이미 말라 버린 샘물이 아니겟는가.  -열매 맺지 못한 꽃 -80쪽


필자는 이덕무의 원문에 친절하게 주석을 달아준 작가 한정주의 해석에 밑줄을 더 많이 치며 이 책을 완독했습니다. 묘한 것은 끝으로 갈수록 더 진국이 넘쳐난다는 점이 이 책의 매력입니다. 다음 책으로 이어져야 할 것만 같은 아쉬움을 안고 책장을 덮으며 작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사람도 다음에 더 만나고 싶은 여백을 남길 수 있는 만남이어야 좋은 만남이듯 문장도 사람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한 책입니다. 그만큼 서둘러 끝내려하거나 에둘러 넘어가지 않은 깊이 있는 편집의 힘이 이 책이 가진 무게를 짐작케합니다.


하루 종일 고요히 앉아 있다가 입을 열면 올바른 말이다. 나는 이러한 사람을 공경하고 두려워한다. 혹 고요히 앉아서 올바른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미 이 등급으로 떨어진다. 또한 다른 사람을 따라서 웃음이나 흘리는 사람은 즉시 삼 등급으로 떨어진다. 일 등급의 사람이 좋은 사람이겠는가, 삼 등급의 사람이 좋은 사람이겠는가? -세 등급의 사람 179쪽


최상의 사람은 가난을 편안하게 여긴다. 그다음 사람은 가난을 잊어버린다. 최하등의 사람은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해 감추거나 숨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난을 호소하다가 가난에 짖눌려 끝내 가난의 노예가 되고 만다. 또한 최하등보다 못난 사람은 가난을 원수처럼 여기다가 그 가난 속에서 죽어 간다. -가난의 품격 243쪽


가난의 품격을 논한 이 대목을 읽으며 참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난을 편안하게 여기지 못했고 그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낸 내 청춘의 시간들은 이덕무의 시각에서 보면 몇 등급일지! 그가 말한 가난의 품격은 인간의 품격으로 대치해 봐도 맞는 말일 것 같습니다. 불굴의 문장은 어느 한 대목을 바꾸어도 그 가치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입니다. 그것도 고전에 더욱 인색한 작금의 출판시장입니다. 선비의 나라 조선에는 책을 소장하고 아끼는 풍조가 현재를 사는 우리보다 더 드높았음에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배고픔 속에도 좋은 책을 만나면 베끼기를 즐기고 책 속에서 무릉도원의 신선처럼 훨훨 날며 기뻐했을 이덕무의 도포자락이 눈에 선합니다.  일상의 사소한 것을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묘사하고 관찰하여 기록으로 남긴 이덕무의 치열한 독서와 글쓰기 모습은 그가 조선의 니체였다는 생각까지 들게합니다. 이덕무의 숨결을 따라 저도 살아 숨쉬는 동안 읽음을 사랑하렵니다. 그리하여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합니다!" 를 자신 있게 외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