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30일, 광주시 퇴촌면 원당리에 있는 `나눔의 집’을 찾았다. 학교에서 연말연시를 맞이하여 불우이웃돕기로 모든 교직원 및 학생들이 성금을 모았는데 12월 한달 모은 금액이 48만9780원이었다.
모은 성금이 얼마 되지는 않지만 학생회에서 의논한 결과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이 있는 `나눔의 집’을 돕기로 결정했다. 역사 현장을 견학하는 것이 산 교육과 교훈의 장으로 큰 의미가 있을 듯해서였다.
사무실을 찾았더니 여직원과 관리소장이 반갑게 맞이했다. 학교장이 직접 오는 경우는 드문데 오셨다면서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역사관 영상실로 가서 비디오를 봤는데 일제가 1940년대 진주만 공격을 감행하면서 마지막 발악을 하는 장면을 배경으로 나이 어린 우리나라 여성들을 위안부라는 명목으로 전쟁터로 끌고 가는 내용이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칼로 협박하고 찌르기까지 하는 만행을 15분 정도 보았다.
누가 그런 잔인한 발상을 했을까. 우리는 광복 60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60여년이 지난 오늘, 늦은 감은 있지만 더 많은 세월이 흐르기 전에 그 죄를 물어야 한다. 당시 20여만명이나 동원된 위안부들 가운데 대부분 학살이나 전쟁의 총성, 포탄으로 사망하고 206명의 위안부들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들 중 중국에서 거주하다 일본군 때문에 피해를 입은 할머니 몇 사람 만나볼 수 있었다.
할머니들은 1939년경 열두세살 어린 나이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일본 이름으로 남경, 의창, 장사 등을 돌아야 했다고 한다. 해방 후 가족들 앞에 떳떳하게 나타나지 못하고 숨어 울면서 외롭고 쓸쓸하게 혼자 살다가 이곳 나눔의 집으로 들어와 살고 있는 분들.
역사관에서는 할머니들이 그린 그림들이 눈에 띄었다. 특히 김순옥 할머니의 `못다 핀 꽃’은 자기의 한 맺힌 삶을 그린 그림이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돌아가신 분들이 남겨놓은 유물은 염주가 대부분이었다. 내세에서나마 참된 인간적인 삶을 얼마나 빌고 빌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할머니들을 직접 다 뵙고 말씀을 들어보고 싶었지만 다른 분들은 다 집회 참석을 위해 나가셨고 김군자 할머니만 갑상선 수술 후 요양 때문에 계셨다. 성금 모금함을 드리자 학생들이 푼푼이 모은 어느 돈보다 값진 것이라며 직접 뜯어보셨다. 만원권부터 10원짜리 동전까지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눈시울을 적시면서 감격해 하셨다.
할머니는 사는 동안 어렵게 모은 조그만 돈이지만 베트남 진실위원회에 기탁했고, 또 다른 할머니께서는 아름다운 재단에 오천만원이란 상당히 많은 돈을 모아 기부하기도 했다고 사무장이 소개했다. 어려운 삶을 사는 사람들일수록 힘든 이웃을 도우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같아 코끝이 찡했다.
몸이 불편한 할머니기에 너무 오래 있는 것도 위로보다 오히려 불편을 드릴까 걱정되었다. 다음 만남의 기회를 약속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학교를 향해 엑셀을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