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과학자들을 위하여 새로운 도전 “무슨 일이지?” 선생님은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서 등 뒤로 다가선 아이를 바라봅니다. 조심스럽게 다가선 욱이는 오늘 따라 쭈뼛거리면서 말을 망설입니다. “왜? 웬일인데 욱이가 다 망설이고 있을까?” 항상 선생님에게 매달리다 시피하면서 애교도 떨고 별아별 얘기도 다하던 욱이가 망설인다는 것은 참으로 보기 드문 일입니다. 선생님은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닌가 싶지만, 모른척하고서 일부러 딴청을 부립니다. “욱이가 선생님한테 말 못할 잘못 이라도 저질렀는가? 왜 그렇게 말을 못하고 그러시나?” 하고 못 본 척 하시던 일을 계속하십니다. “선생님, 저를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으응? 무슨 말인지? 알아야 돕든지 말든지 하지?” “선생님을 귀찮게 할 거 같아서 말씀드리기가 좀 어려웠어요.” 욱이는 늘 하던 밝은 모습이 아니고, 조금은 쑥스러운 듯 하는 모습을 보이고 서 있습니다. “무슨 일인지 일단 들어보자. 말씀해 보시지?” 쭈뼛거리던 욱이가 다가들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선생님 사실은 요즘 우리가 여러 가지 실험을 하지 않아요? 그런데 여러 가지 실험들을 학교에서 하고나면 다시 한 번 해
겨울방학을 하는 날. 우리 학교의 방학 계획서에는“눈이 내린 날은 가까운 마을의 어린이들과 선생님들이 모두 학교에 나와서 운동장의 눈을 쓸기로 한다“고 되어 있었기 때문에 눈이 흠뻑 내린 오늘 아침에 우리는 바쁘게 자기 집 앞의 눈을 쓸고 서둘러서 학교를 향해 나서야 헸다.집에서 학교까지 미끄러운 눈길을 달리는 버스는 엉기면서 40여분 거리를 두 시간이 너머 걸려서 겨우 도착하였고, 버스 종점에서 학교까지 약 1km의 거리를 걷기는 무척 힘이 들었다. 1980년대 초엽에는 모든 사회가 군대식으로 움직이고 있던 시절이었다.마치 군대에서 눈이 내리면 별로 쓰지도 않는 연병장일지라도 제설작업을 하여야 하듯이 각급학교에도 눈이 오면 무조건 운동장의 축구장 정도 또는 운동장 트랙을 활용 할 수 있을 정도로 반드시 눈을 치우도록 지시가 내렸다. 그러니까 선생님들의 손만으로 운동장을 치울 수가 없으니까 학교 인군의 마을 어린이들도 나오라고 하여서 함께 눈치우기 작업을 해야 했다. 요즘은 눈을 치우는 눈삽이나 밀개 등의 도구가 많이 나와 있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게 어디 있었던가? 학교에서는 좀 두꺼운 베니어판을 각목에 붙여서 만든 커다란 밀삽약 60 x90cm 정도으로
“우리 나라의 옛날 종교 생활은 어떠했을까요 ?” “옛날에는 미신을 믿고 살다가 우리나라에 종교 생활을 시작 한것은 고구려시대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부터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럼 그 뒤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미신을 믿지 않게 되었나요?" “아니요 ! 아직도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럼, 미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 “교회를 나가는 사람 등 종교활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과연 그런 종교 활동을 하는 사람들만이 미신을 믿지 않을까요?”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미신을 믿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라고 생각하지요 ?” “교회나 성당엘 나가서도 자기 자신에게만 복을 내려 달라고 비는 사람들은 미신을 믿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민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길이가 벌떡 일어서면서 “아니, 뭐라고? 교회에 나가서 기도하는 것이 미신을 믿는 것과 같다고?” 하며, 따지고 덤볐습니다. 그러자 영민이는 차분하게 “그럼 뭐가 다르단 말이야? 정말 훌륭한 종교인이 되려면 나에게만 복을 내려 달라고 빌어서야 되겠어?” “그럼 기도란 뭐야 ? 자기의 소원을 비는 것이 기도가 아니겠어?” “소원도 소원 나
고양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은 신임교사 20여 명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남자교사는 총경력 21년차인 K선생님 이었다. 이 학교가 고양시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학교이기도 하지만, 신도시쪽이 아니라 옛날의 전통을 지켜온 동네에 있기에 비교적 조용한 생활을 바라는 아이든 교사들이 모여들기 때문이었다. K선생님은 평생토록 별로 해보지도 못한 체육주임에 도 체육선수들을 지도하는 코치로 활동을 하여야 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K선생님이 교직생활을 시작한 것이 64년이니까 만 21년이 되는 해이지만, K선생님은 체육을 담당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다만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주어진 책임인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985년은 우리나라가 88올림픽은 유치한 이래로 가장 체육에 대한 열성이 왕성하고, 온 국민이 체육에 미쳐가고 있을 때이었으니 각종 체육행사가 봇물 터지듯 정신없이 추진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전국적인 체육행사는 물론이고, 시도별 체육행사와 시군별 체육행사가 맞물려서 가장 바쁜 사람이 체육주임이었다. 지금처럼 체육전담이나 체육주임은 학급 담임이나 다른 업무를 맞지 않는 그런 배려 같은 것도 없던 시절이었다. 5학년 45명의
“김배운외 48명 !” 담임선생님의 호명에 따라 우리 졸업생 48명은 소리도 내지 않고 스르르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교장선생님의 손에서 졸업장을 받아든 우리들은 엄숙하고, 조용한 속에서 졸업식을 마쳤습니다. 어쩐지 쓸쓸한 생각이 들고, 특히 정들은 우리들이 이제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듯만 합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졸업식을 맞으면서 쓸쓸해 하는 것은 우리가 정말 형제처럼 살아왔기 때문인가 봅니다. 우리는 이 조그만 학교에 입학을 하여서부터 졸업을 하기까지 같은 반에서 공부를 해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학교가 작고 학생수가 적어서 각 학년이 한 반씩 밖에 없는 이 학교에서 다른 반에 가려고 해도 갈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린 일학년에 입학을 해서 졸업을 맞는 오늘까지 학급에서 일어난 일들을 같이 겪고, 같이 아파하고 기뻐해 왔었습니다. 그렇게 형제 같은 우리들을 더욱 한 묶음으로 잘 묶어준 것은 바로 지금 우리들의 이름을 부르고 계시는 6학년 담임선생님이십니다. 6학년이 되자, 우리들은 이제 이 학교의 최고 학년답게 잘 지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런 우리를 더욱 채찍질을 해주셨습니다. 첫째로, 우리들의 정답고, 지
“얘,얘, 너 말야. 이제 앞으로는 경재하고 놀지 마라라.” “그건 왜 ?” “넌 아직 모르고 있었구나 ?” “뭔데 ? 난 몰라.” “그런 것 같아서 일러주는 거야.” “그게 뭔데 ?” “사실은 말야. 경재가.....” “왜 ?” “마침 저기 경재가 오고 있잖아. 이따가 얘기하자.” “그래. 그게 뭘까 ?” 공부도 잘하지만 아이들의 대장 노릇을 하기로 소문이 난 명숙의 말을 들으며 승희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승희는 공부도 잘하지만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고 결코 누구를 푸대접하거나 차별해서 따돌리는 일 같은 짓을 하지 않는 아이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학급의 대표를 선출할 때는 당연히 승희를 따라 잡을 사람이 없습니다. 지난 9월 2학기 반장 선거에서 “저는 지금까지 반장을 많이 하였고, 다른 친구들이 하고 싶은 아이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다른 아이들을 반장으로 뽑아 주십시오.” 하고, 반장이 되는 것을 사양하였지만 투표의 결과는 2등을 한 명숙이보다 배나 많은 표를 얻어서 다시 반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명숙는 여전히 다른 아이들의 대장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버릇 때문에 아이들이 싫어 한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항
“오늘도 잊지 말고 꼭 지킬 일은 무엇이지?” “예. 수로에서 목욕하지 말자. 길에서 놀지 말자입니다.” “좋았어. 꼭 지키는 거지?” “예.” 우리들은 힘차게 대답을 하였고 선생님은 흐뭇한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보면서 “그래, 다 너희들을 안전하게 지켜주기 위한 것이니까 잘 지키도록 알겠나?” “예.” 우리는 마치 군대에서 하듯이 힘차게 대답을 하였다. 국민학교 지금은 초등학교이지만 6학년이나 되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매일 이렇게 우리에게 주의를 주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학교 앞의 울타리와 나란히 지나가는 도로 바로 아래에 이 고장의 들판을 적셔주기 위해 한강에서 퍼 올린 물이 지나는 수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란 없다. 우리는 도도히 흐르는 수로의 물줄기를 보면서 등줄기에 흐르는 땀을 씻지 않고서 집에까지 갈 수는 없었다. 더구나 집에 가보았자 이처럼 시원한 물줄기는 구경도 할 수 없다. 아무리 말려도 물 속에 풍덩 몸을 담글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었다. 다만 이 물줄기가 흐름이 빠르기도 하지만 학교 앞에 있는 곳은 시내와 만나는 자리에서 시내물의 밑으로 물이 흐르게 수로가 땅 속을 지나느라고 땅굴 속
“너희들 선생님이 네 잎 클로버를 잘 찾는다고 그랬지? 그럼 이제부터 너희들 열 명과 나 혼자서 어느 쪽이 더 많은 네잎 클로버를 찾는지 한 번 내기를 해 볼까?” 모내기가 끝나 벼들이 푸른빛을 더해가기 시작한 들판은 이제 예비 군복처럼 벼들의 초록빛깔이 약간씩 달라 알록달록한 연초록을 띄우고 있었습니다. 멀리 건너다보이는 한강 하구의 둑이 강 건너 김포군의 산들과 맞닿아 있어서 한 폭의 동양화처럼 한가한 풍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학교 뒤쪽의 산골 논 뙤기는 비가 적게 내려서 물이 모자라 아직 모를 심지 않은 채 논바닥에는 봄에 난 독새기 풀들이 이삭을 맺어 노랗게 익어가기 시작했지만, 물이 없는 논은 논둑도 베지 않아 풀이 수북하게 자라 있어서 클로버가 여기저기 파란 무늬를 그리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 아이들은 합창을 하듯이 “정말요? 지면 뭘 사주실거예요?” 하고, 선생님을 에어 쌉니다. 6학년이라서 제법 키가 큰 아이들이 있어서 선생님이 아이들 속에 묻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빙긋이 웃으면서 “너희들이 좋아하는 빙과를 사주기로 하지.” 하시자, 아이들은 너무 좋아 손뼉을 치기도 하고 깡충깡충 뛰기도 하면서 “정말이죠? 우리 열 명을
멀리 바라보이는 한강 둑이 아슴푸레하게 가물거리고 질펀한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마저도 게으름에 지친 듯 불 듯 말 듯한 오후 2시 30분입니다. 하지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올 여름은 더위가 이리도 극성인지 싱싱하게 뻗쳐 오른 볏잎 마저도 축 늘어지고 뒷산의 매미 소리도 나른한 눈꺼풀을 주체치 못하고 턱을 괴고 있는 손바닥에 흥건히 고여 오는 침마저 느끼지 못한 채로 부드러운 꿈나라의 안락의자를 타고 서서히 여행을 떠나고 있습니다. 두어 사람 건너편의 현일이도 공부시간마다 맡아 놓은 꾸지람 둥이 짝인 광선이가 슬금슬금 꿈나라로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흘끔흘끔 눈치를 해 보았지만 반응이 없자 심심하고 따분하여 덩달아 스르르 졸음 속으로 빠져듭니다. 언제나 처럼 이 시간이 체육이나 음악시간이었다면 떠들고 뛰노라고 졸음쯤은 멀리 달아나고 없겠지만, 오늘처럼 사회 시간에 선생님의 얘기가 계속 되는 시간은 어김없이 졸음에게 지고 맙니다. 꾸벅꾸벅 때 아닌 인사치레에 아이들의 한바탕 웃음보따리가 터지거나 선생님의 정확한 솜씨가 분필토막을 이마에 ‘스트라익’을 맞고서야 씨익 염치없는 웃음을 웃으며 정신을 가다듬곤 했습니다. 오늘도 꾸러기 짝꿍은 어김없이 선생님의 불
우리 교실은 미니교실입니다. 조그만 농촌 학교이긴 하지만 남양만을 막아서 마련된 간척지가 수십만 평이나 생겨서 새로운 들이 생겨난 이곳에 경상도의 안동댐과 충청도의 충주댐을 막을 때 생긴 수몰지역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수몰민 이주지역 1,2,3,4지구라는 야릇한 이름의 부락이 네 개나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이들이 갑자기 늘어나는 바람에 그만 교실이 모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교장실을 반 칸으로 만들고, 나머지 반 칸의 교실에서 우리 반이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반은 전체 학생수가 32명뿐이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농촌학교의 모든 학급이 30명 안팎밖에 되지 않지만 우리가 공부하던 시절(80년)만 하여도 한 학급에 50명에서 55명씩이나 공부를 하던 시절이었는데, 우리 반은 참으로 오붓한 교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교실에 아이들이 작으니까 넉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6학년이니까 제법 덩치들이 자란 우리들이 32명씩이나 들어간 교실이 반쪽이니 넉넉할 리가 없었습니다. 반쪽짜리 교실에 칠판도 반쪽이고, 딴 아이들과 달리 복도를 향하여 앉아서 출입문도 하나뿐인 교실이었습니다. 가끔은 교장실에서 하시는 얘기 소
“따르릉 따르릉..........” 잇따라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운동회 연습을 끝내고 교실과 교실 사이의 통로에서 잠시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기고 쉬고 있던 강선생님이 달려 들어갔다.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면서 가쁜 숨을 몰아 쉬어 진정을 하면서 “감사합니다. 홍원초등학교입니다.” 했더니, 50대쯤으로 짐작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보세요. 홍원초등학교지요?” “네, 그렇습니다만.....” “여기 석정리에 있는 00교회의 *목사인데요. 교장선생님과 좀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전화를 했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마침 교장선생님은 교육청에 출장 중이시고, 교감선생님도 출타중이 신데요. 어떻게 해드릴까요?” “다름이 아니라, 운동회 안내장을 받았는데요. 그 날이 주일이 되어서 곤란하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전화 한 것입니다.” “아 그러십니까? 저희도 추석 연휴 인데다가 일요일이 되어서 다른 날로 받아서 하자고 하였지만, 이 고장의 전통이 그렇게 되어 있어서 부득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학부모님들의 주장 때문에 부득이 그 날로 잡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주일은 곤란합니다. 주일 예배에 어린이들이 빠질 수밖에 없다면 우리
남양만이 가물거리는 자오개의 산기슭에 영진이네는 있었습니다. 자오개산은 높이가 불과 600m도 되지 않지만 이 고장에선 가장 우뚝 선 산입니다. 5년전 까지만 해도 영진이네 동네의 앞쪽에는 질펀한 갯벌이었습니다. 그 갯벌을 막아서 소금을 만드는 염전이 있었습니다. 바닷물을 끌어 들여서 햇볕에 물기를 말려 진한 소금물이 됩니다. 그 진한 소금물을 더 많은 햇볕을 받게 하면 소금 알갱이가 생겨나는 것이었습니다. 영진이는 어려서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날마다 아빠를 따라서 염전에 가서 일하시는 모습을 구경하며 자랐습니다. 물레방아 같은 물 자세를 하루 종일 돌리시는 아버지는 다람쥐처럼 물레방아의 물바가지 부분에서 끊임없이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걸어도 늘 그 자리에서 발걸음만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올라가는 걸음을 걷는데도 아빠는 한 걸음도 더 올라가지도 못하고,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셨습니다. 옆에 세운 장대를 붙잡고 걸음만 걸어가는 아빠의 모습은 어쩜 그렇게도 처량한지 몰랐습니다. 마치 쟁기를 끄는 소처럼 말 한마디 없이 온 몸 중에서 오직 발과 다리만 변함없는 발걸음을 계속할 뿐이었습니다. 마치 물레방아가 돌려서 방아를 찧는 디딜
산으로 빙 둘러 싸여 있는 전남 보성군 율어면 이동리와 유신리, 장동리, 칠음리를 품은 상도들은 유난히 날씨가 추운 듯 이웃면에 비하여 벌써 1 주일은 늦게야 진달래가 피어나고 있었다. 4학년짜리 나미는 이제 며칠이 지나면 이곳에서 천리 길도 더 되는 멀리 경기도로 이사를 가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웃에 사는 정다운 친구들과 어울려서 봄동산으로 봄나들이를 가기로 한 것입니다. 이 고장은 들판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시내가 흐르고 빙 둘러 친 산에서 내리 뻗은 산줄기들이 들판을 향하여 마주 내려오다가 시내에 이르러 얼굴 맞이를 하듯 멈추곤 하여서 마치 야구 선수 중에 포수가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쓰는 얼굴가리개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만 같습니다. 이런 들판의 동편 기슭에 자리 잡은 율어동초등학교는 12학급짜리 아담한 시골 학교이지만 학교 안에 이런 저런 시설들이 어찌나 아담하게 잘 꾸며져 있는지 이 고장에 오는 사람들은 공원 삼아 학교에 들어와서 기념사진들을 찍곤 하는 곳입니다. 나미가 1학년 입학을 하여서 다니던 읍내 학교는 군내에서 가장 잘 꾸며진 학교로 소문이 난 곳이었습니다. 이 학교에서 나미 아버지는 가장 앞장을 서서 학교 공원화 사업이라는 것을
어린이 그림이 종북 몰이용? 그림 소동을 보면서 3공시절에 글 때문에 겪었던 일들이 떠올라 어린이가 안타까워 정말 세상이 무섭다. 어린이들의 통일염원을 그린 그림을 가지고 종북몰이를 하면서 그 그림을 카렌다에 담았다고 우리 은행을 압박하고 있는 국회의원들에게 정말 그렇게도 하실 일이 없는가라고 묻고 싶다. 이 그림은 우리은행에서 그린 그림도 아니고, 의도적으로 만든 그림은 더더구나 아니다. 은행에서 주최한 그림공모전에서 당선작들을 그림으로 사용하였을 뿐이다. 뽑은 교수님들조차 전혀 [종북]이나 [좌빨]이라고 보지 않았기에 뽑은 작품이다. 아니 오히려 어린이의 천진난만한 통일염원을 잘 표현하였다고 생각하여 뽑은 작품이다. 그런 어린이들이 그림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더구나 남북이 통일을 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그려라는 주제를 받아서 그려진 그림이다. 남과 북이 통일을 하여야 한다는 우리의 소망을 담은 것이다. 그래서 남과 북의 깃발이 그려진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상에 남과 북이 통일을 하자는데 그럼 남과 북의 깃발을 그리지 않고 무엇으로 남과 북을 나타내고 어떻게 표현하라는 말인가? '백두산과 한라산?' '김정은과 박근혜?'당시 대통령은 박근
우리는 또 다시 들판으로 나섰다. 날마다 이 들판 저 들판으로 다니면서 모내기를 하였다. 어떤 논에는 아직 물이 들어가지 않아서 모를 낼 수가 없어서, 호미를 들고 가서 모를 호미를 일일이 심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힘든 일을 하여도 우리는 기뻤다. 못자리에서 모가 타들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들판을 지나는 시냇가에서 물을 퍼 나르던 때를 생각하면 모내기를 항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절로 났다. 우리는 일주일을 날마다 논으로 나가서 모내기를 돕는 일을 하였다. 물론 우리는 모내기를 해주면서도 조금씩 돈을 받아서 우리들의 수학여행비를 마련하는데 보탬이 되게 모았다. 모내기 일주일 동안에 우린 매일 6,000원씩을 벌어 들였다. 모내기는 한 마지기에 300원씩을 주셨다. 보리 베기와는 달리 모내기는 우리가 조금만 잘못하면 농사를 망칠 수 있으니까, 일을 많이 하기보다는 정신을 쏟아서 모를 잘 심는 것이 더 중요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정성껏 모를 심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심는다고 농사 망친다고 안 된다고 했더니, 어찌나 꼼꼼하게 심었는지, 어른들이 심은 것보다 더 잘 심었어 !” 하는 칭찬을 들었을 때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우선 우리가 모두 농촌에서 자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