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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6> 中 “한글은 ‘조선어와 중국어의 결합’이다”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정치·문화교류) 조선·中·日 간 외교정책 핵심은 ‘사대·교린’ 中·日 모두 자국 우위입장에서 교과서 서술 日 조선통신사를 ‘장군 축하사절단’으로 왜곡     ◈ 조공 외교의 성격 ◈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질서는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특징을 반영하는 시스템이다. 그것은 주로 조공(주변 국가들이 정기적으로 중국에 공물을 보내는 일)과 책봉이라는 의례적 외교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에 중국이 주변국의 내정에 관여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는 지배와 복속이라는 힘의 논리보다는 문화적·경제적 교류의 의미가 강하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과 일본의 조공체제는 경제적 관계가 주였고 양국 간 상하 지배질서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지정학적 조건상 한국이 감당해야 할 국제정치적 상황이 과거나 현재나 유사하다는 점에서, 조선 시대 生存 外交를 다시 한 번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가 크다.    ▲ 朝鮮通信使(詳說日本史)
◈ 명과의 관계 ◈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명과의 친선관계를 유지하여 정권과 국가의 안전을 보장받고, 중국 이외의 주변 민족과는 교린 정책을 취하였다. 이러한 교린 정책은 상대 국가가 달라지더라도 조선 전 시기에 걸쳐 일관되게 추진된 외교 정책이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외교 행위로 중국에 조천사(朝天使)와 연행사(燕行使)를, 그리고 일본에는 通信使를 파견했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조선은 명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사대 정책을 유지하였으나 명의 구체적인 내정 간섭은 없었다. 매년 정기적 부정기적으로 사절은 교환하였고 그 때 문화적 경제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사절 교환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것이었지만, 이를 통하여 중국의 앞선 문화의 수입과 물품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결국 명에 대한 사대 외교는 왕권의 안정과 국제적 지위 확보를 위한 자주적인 실리 외교였고, 선진 문물을 흡수하기 위한 문화 외교인 동시에 일종의 공무역이었다.”라고 하여 조선의 자주성을 강조하고 있다.

영향력을 강조하는 중국의 문화교류 중국 교과서에는 한·중관계사 중 주로 전쟁사를 많이 다루고 문화적인 교류를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다. 초급중학교 '중국역사'교과서에는 수·당 시기의 신라와의 교류에 대해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데, “7세기 후반 신라와 당조의 내왕이 더욱 빈번하였다. 당 나라에 온 유학생들 중에는 신라의 유학생들이 제일 많았는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최치원(崔致遠)이였다.

당 나라의 長安과 沿海의 많은 도시들에서는 ‘신라방’, ‘신라관’ 등을 설치하고 신라상인들을 접대하였다. 신라는 건국 시에 당 나라의 제도를 참조하였으며 국학을 설립하고 유학을 가르쳤다.…신라인들은 唐詩를 좋아하였으며 많은 문인들이 당시를 지을 줄 알았다. 그밖에 성씨, 복장, 명절, 풍속 등 면에서 농후한 중화문화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 최치원의 시문집 계원필경은 중국문화계의 중시를 받았다. 신라학자들도 그들의 한문학은 최치원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당나라 말을 하며 당나라의 과거에 급제한 신라 유학생들은 귀국한 후 대부분이 유교문화를 전파하는데 진력하였다.”라고 우호적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역시 중국의 영향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
한편 송·원대 고려와의 경제교류에 대해서도 “南宋과의 내왕이 가장 밀접한 나라들로는 고려, 일본 등 隣國들이였다. 남송이 明州로부터 수입한 고려물건은 40종에 달하였다. ……遼, 金은 고려와 使節에 의한 무역을 통하여 경제적 연계를 유지하였으며……元朝는 고려, 일본과 밀접한 무역관계를 갖고 있었다. 고려의 인삼 등 토산물은 우리나라 內地에서 환영을 받았다. 우리나라의 면방직기술은 원조시기에 고려에 전해졌다.”라고 하여 고려와 밀접한 경제교류를 맺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주목되는 내용은 면방직기술이 원대에 고려에 전해졌다고 서술한 점이다. 이는 1364년 문익점에 의한 목화의 전래를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목화의 전래를 언급하고 있지만, 이 때 면방직 기술이 함께 수용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초급중학교 ‘세계역사’교과서에는 조선 시대의 문화 발달에 대하여 “조선왕조시기, 문화가 진일보하게 발전하였다. 15세기 조선은 특히 문자방면에서 커다란 성과를 얻었다. 많은 학자들은 조선어를 연구하여 중국어와 결합시키면서 28개의 자모를 제정하였다. 이러한 문자는 계속해서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다.”라고 하여 한글이 조선어와 중국어를 결합시켜 만든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국사 교과서에는 “한글 즉 훈민정음은 1446년에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에 의하여 제정·반포되었는데, 한글은 배우기 쉽고 조직적이며 어떤 발음이든지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매우 과학적인 표음문자”라고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한글이 ‘조선어와 중국어의 결합’이라는 서술은 한글의 독창성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 통신사의 행로(고등학교 국사)
다만 초중 상해교육출판사 ‘역사’(9학년 1학기) 교과서에는 조선의 과학기술, 인쇄술의 상호 교류를 언급하면서 금속활자(연활자)를 세계 최초로 사용한 국가로 서술한 것은 최근 한·중·일 간의 주요 쟁점임에도 불구하고 주목되는 서술이다.

◈  일본과의 관계 ◈

조선시대 대일외교의 기본틀인 교린체제가 성립하게 된 것은 조선과 일본 모두가 명나라의 책봉을 받으면서부터이다. 즉 조선이 1403년 4월, 명의 성조로부터 책봉을 받고, 일본도 1403년 11월 책봉을 받자, 양국의 외교체제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난다. 그 단적인 예가 일본 막부 장군을 ‘일본국왕’이라고 했고, 장군의 사신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칭한 것이다. 조선은 일본을 우호 상대의 인국(隣國)으로서 상대했던 것이고 비로소 국가 대 국가간에 ’대등한 외교관계‘가 성립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침략을 받은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쓰시마 섬 도주를 통하여 조선에 국교를 재개하자고 요청해왔다. 조선은 막부의 사정을 알아보고 전쟁 때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기 위하여 유정(사명당)을 파견하여 강화하고 조선인 포로 7000여 명을 데려왔다. 곧이어 일본과 기유약조를 맺어 부산포에 다시 왜관을 설치하고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섭을 허용하였다.(1609)

한편, 일본은 조선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고,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이 바뀔 때마다 그 권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조선에 사절의 파견을 요청해왔다. 이에 조선에서는 1607년부터 1811년 까지 12회에 걸쳐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사절을 파견하였다. 통신사 일행은 적을 때에는 300여명, 많을 때에는 400~500여 명이나 되었고 일본에서는 국빈으로 예우하였다. 일본은 이들을 통하여 조선의 선진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자 하였다. 따라서 통신사는 외교사절로서 뿐만 아니라 조선의 선진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 역할도 하였다.

대부분의 ‘일본사’ 교과서에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국교가 재개된 사실을 아주 평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국교 재개에 의지를 보였던 도쿠가와(德川)의 적극성과 조선 조정과 막부 사이에 중개자의 역할을 했던 대마도주, 국교 재개 이래 장군 교체기에 축하 사절로 파견된 통신사 등이 전형적인 서술의 예이다. 東京書籍 ‘일본사’교과서에 의하면 “조선과는 대마의 宗氏를 통해서 국교회복을 꾀하고, 장군이 바뀔 때마다 慶賀의 사절이 일본에 오게 되었다. 宗氏는 그 때까지의 관계를 인정받아 1609년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매년 무역선을 보내는 것이 허락되었다.”라고 하여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통신사가 일본에 끼친 문화적·경제적 영향은 생략한 채, 마치 막부의 권위가 높기 때문에 조선이 자발적으로 통신사를 보낸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한편 實敎出版社 ‘일본사’ 교과서는 조선통신사를 파견하게 된 배경과 과정, 일본에 끼친 영향들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막부가 조선의 뛰어난 학문과 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해 통신사를 요청했다는 것과, 일본 문화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밝히고 있다.

◈  조선통신사의 성격 ◈

그런데 일본의 중학교 ‘사회(역사)’ 교과서(후쇼샤)에는 “…막부는 이에야스 시절, 히데요시의 출병으로 단절되어 있었던 조선과의 국교를 쓰시마의 宗씨를 통하여 회복하였다. 양국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조선에서는 장군이 바뀔 때마다 통신사로 불리우는 使節이 에도를 방문하여 각지에서 환영을 받았다.”라고 하여 국교 회복의 과정을 宗氏의 주도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기술함으로써 역사적 실상을 변질시키고 있다. 또한 통신사를 단순히 장군습직(將軍襲職) 축하 사절로 기술함으로써 일본 우위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통신사는 일본의 요청에 따라 파견하였으며 비용도 일본에서 부담하였으며, 통신사를 초빙함으로써 일본 내의 장군 권위의 고양과 국제적 지위향상이 필요했던 일본 내정 상의 이유 등을 은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에 일본에 파견한 국왕 사절단인 통신사행에 관한 양국 간의 인식 차이가 많다. 이 사행의 본질이 외교·문화 사절이냐 정치 사절이냐 하는 점이고, 이와 연관되는 문제이면서 현재도 본?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朝貢使節觀의 타당성 여부 등이다.



 

  ◈  조·중간의 문화 교류 ◈

조선 시대 중국에서 나타나는 정치적·군사적 변화는 당시에 분명히 주변국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조선은 명(明)과 친선관계를 유지하였고, 사신을 자주 파견하였다. 조선은 실질적으로 명의 내정간섭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명과의 조공관계를 통해서 경제적, 문화적 실리를 취하였다. 하지만 중국은 전통적으로 문화대국주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일방적으로 문화를 전파해 주었고 조선은 그것의 일방적인 수혜자였다는 관점에 입각해 우리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찬희 한국교육개발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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