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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칼럼

어정칠월, 건들팔월

입추를 앞두고 있지만 작열하는 팔월의 태양은 땅 위의 모든 것을 불사를 기세이다. 마스크를 쓰고 한 걸음 옮기면 등줄기를 타고 탐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숨쉬기가 힘들다. 그래도 계절의 흐름은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듯 해넘이가 지나자 산과 들을 스친 녹색 바람이 서늘함을 풀어 놓고 귀뚜라미 우는소리 청아하게 깔린다.

 

입추는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다. 한 해 24절기 중 열세 번째 절기로 올해는 양력 8월 7일이다. 이날부터 겨울에 드는 양력 11월 7일 입동 절기까지를 가을이라고 한다. 농촌의 입추 무렵은 ‘발등에 오줌 싼다’할 만큼 바빴던 농삿일들이 끝나고 잠시 한가해지는 시간이다. 벼가 한창 무르익어 가는 이때 고려사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며 흰 이슬이 내리고 쓰르라미가 운다는 입추 절기 이후의 계절변화가 기록돼 있다. 또한 앞전에는 한창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대서 절기가, 뒷전에는 더위가 물러가고 해가 진 밤에는 서늘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다는 처서 절기가 있다. 옛사람들은 이렇게 입추와 처서, 백로로 이어지는 가을맞이 절기의 흐름을 '어정칠월 건들팔월' 이라고 했다. 이는 칠월과 팔월이 어정어정, 건들건들하는 사이에 지나가 버린다는 뜻으로 농촌에서는 김매기도 끝나 호미씻이를 한 뒤여서 잠깐의 망중한을 누리는 휴식의 시간이기도 하다. 이 무렵 농촌의 대표적인 전경은 땡볕에 고추를 말리는 풍경으로 수채화처럼 곱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을 타고 온다는 처서(處暑)이다.

 

처서는 24절기 가운데 열넷째 절기로 여름은 가고 본격적으로 가을 기운이 자리 잡는 때이다. 처서라는 한자를 풀이하면 ‘더위를 처분한다’라는 뜻이다. 이 시기에 예전에 부인들은 여름 동안 장마에 눅눅해진 옷을 말리고, 선비들은 책을 말렸는데 그늘에서 말리면 음건(陰乾), 햇볕에 말리면 포쇄라 했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에서는 포쇄별감의 지휘 아래 실록을 말리는 것이 큰 행사였다고 한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 입이 비뚤어진다는 속담도 있다. 이 이야기는 처서에 창을 든 모기와 톱을 든 귀뚜라미가 오다가다 길에서 만났다. 모기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란 귀뚜라미가 그 사연을 묻자 ‘사람들이 날 잡는다고 제가 제 허벅지 제 볼때기 치는 걸 보고 너무 우스워서 입이 이렇게 찢어졌다네.’라고 대답한다. 그런 다음 모기는 귀뚜라미에게 자네는 뭐에 쓰려고 톱을 가져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귀뚜라미는 ‘긴긴 가을밤 독수공방에서 임 기다리는 처자, 낭군의 애(창자) 끊으려 가져가네.’라고 말한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다. 이처럼 한여름을 거쳐 입추와 처서, 백로로 이어지는 가을맞이 절기의 흐름을 옛사람들은 어정칠월 건들팔월로 불러왔지만, 지금의 농촌 현실과는 꼭 맞지 않다.

 

처서 무렵에는 날씨도 중요하였다. 벼 이삭이 패는 때이기에 한 해 농사의 풍흉을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하였다. 무엇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을 견주어 이를 때 처서에 장벼(이삭이 팰 정도로 다 자란 벼) 패듯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처서 무렵의 벼가 얼마나 쑥쑥 익어가는지 잘 보여주는 속담이다. 그리고 처서에 오는 비를 처서비라고 하는데, ‘처서비 십 리에 천 석 감한다.’라고 하거나 ‘처서에 비가 오면 독 안의 든 쌀이 줄어든다.’라는 말이 있다. 올해 처서에는 처서비가 내리지 않아 풍년이 들었으면 좋겠다.

 

처서 무렵이 되면 세상의 나무들은 여름내 부지런히 길어 올렸던 물들을 내리기 시작하고 한해살이풀들은 서서히 생을 마무리할 채비를 시작한다. 때를 알고 스스로를 비울 줄 아는 순한 초록 목숨들의 지혜로움을 생각하면 탐욕에 눈먼 욕망에는 한계가 없는 인간이란 사실이 못내 부끄러워진다.

 

아침저녁 더위가 가시면서 찬바람이 인다. 여름을 주름잡았던 애절한 능소화는 꽃 덩어리로 채 무너져 내린다. 가을이 파란 하늘 저편으로 번져오고 있다. 여름은 떠날 채비에 마음이 바쁘고, 가을은 지상 가까이 내려오느라 몸이 분주하다. 처서엔 대지가 가을을 느끼고, 다시 보름 지나 백로엔 사람이 가을을 느낀다 하였다.

 

가을엔 모든 존재들이 어떤 형식으로든 결실을 맺는다. 나는 올가을에 어떤 결실을 맺을지 며칠 남지 않은 팔월의 여름에 생각해본다. 어정칠월, 건들팔월이란 말처럼 시간 보내기를 하지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시간은 언제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코로나19 변이 바이러스 유행중에도 가을은 오고 있고 내일의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 그러나 2021년을 사는 지금의 팔월은 사는 동안 영원히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각자에게 주어진 남아 있는 시간을 어떻게 끝을 맺을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모두의 숙제이다. 모두가 남은 날들을 결실을 위한 시간들로 채워 나가고, 한 두 번 찾아올 태풍과 더불어 코로나19도 밀어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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