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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이슈2] ‘기초학력은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수업이 시작하자마자 엎드리는 학생이 있다. 슬쩍 다가가서 등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많이 피곤하니?” 쑥스럽게 얼굴을 든다. 깨우는 방식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는지 다행히 짜증스러운 표정은 아니었다. 쉬는 시간에 따로 불러 물었다. 


“왜 엎드렸어?” “어젯밤에 늦게 잤어요.” 
“왜 늦게 잤는데?” “게임하느라….” 
“그랬구나. 왜 늦게까지 게임을 하게 되었을까?” “기분이 나빠서요. 기분 좀 좋아지라고….” 
“무슨 일 때문에 기분이 나빴는데?” “혼났거든요.” 
“왜 혼났는데?” “게임 많이 한다고….”

 

배움이 느린 학생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마다 종종 꺼내는 일화다. 학생들은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인지하지 못한다. 사실 성인도 때로는 문제의 시작이 무엇인지, 변화를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인지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아직 어린 학생이니 오죽할까. 그래서 이번에는 이렇게 물어봤다.


“그럼 네가 수업시간에 엎드릴 때, 선생님이 어떻게 해주면 좋겠어?”
“음…. 깨워주셨으면 좋겠어요.”
(“깨워달라고? 네가 엎드리지를 말아야지!”) 이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것을 꾹 누르고 다시 물었다. “그래? 왜 깨워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그래도 깨우는 선생님은 관심은 있는 거잖아요.”

 

배움이 느린 학생들을 돕기 위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이 일화를 꺼내는 이유는 이 짧은 이야기 안에 되짚어 봐야 할 많은 것들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첫째, 이 학생에게는 배움이 즐거웠던 기억이 있을까? 
누구나 학습과정에서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배움이 느린 학생들의 학습과정을 분석하다 보면 초기 학습에서부터 성공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배움 자체가 즐겁지 않았다. 자신이 성공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니 다음 과제는 시작하기도 전에 주눅이 들었고, 주변의 친구들과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난 잘 못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받게 되는 피드백이 좋았을 리 없다. 받아 보고 싶은 칭찬을 말해보라 하니 ‘착하다, 성격 좋다, 공부 잘한다, 완벽하다, 뭐든지 다 잘한다, 친절하다’라고 한다. 하지만 사실 칭찬은 뭔가 하나라도 잘해야 나오는 것이고, 실패했는데도 칭찬을 하려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가장 쉬운 방법은 과제의 수준을 바꿔서 어떻게든 성공을 경험하게끔 하는 것이다. 


배움이 느린 중학생들과 면담을 하면서 굉장히 미안한 마음으로 초등학생용 어휘 검사지를 꺼낸 적이 있었다. “너한테 많이 쉬울 것 같아서 선생님이 좀 미안한데, 그래도 한 번 해볼까?” 검사를 마치고 나서 예상치 못한 반응을 나타냈다. “선생님~ 이거 재밌어요. 계속해보면 안 돼요?” 이 학생을 만나는 동안 뭔가 해보겠다는 의지를 보인 적이 처음이라 당황했고, 몇 명의 학생들이 동일한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 쉬우니까 재밌었구나. 어쩌면 당연한 그걸 놓치고 있었구나.’ 이처럼 정답은 종종 아이들과 나누는 이야기 속에 있었다. 


즐거우려면 쉬워야 한다. 배움이 느린 학생들에게는 쉬워서 즐거웠던 경험이 부족했다. 작은 성공을 경험하고 그에 대해 칭찬을 받고, 이렇게 작으나마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유능감이 생기고, 다음 단계의 학습에 기대하게 된다. 무엇보다 배움이 느린 이 학생이 해낼 수 있도록 학습내용을 잘게 쪼개주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학생 혼자 힘으로 무기력을 끊어낼 수 있을까?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무기력을 배우는 것’이다. 1교시에 엎드렸으면 2교시에도 엎드리게 된다. 하루 종일 엎드려있어도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엎드린다. 이런 날이 1년에 200일가량 되어버리면 멀쩡한 성인이라도 무기력을 학습할 수밖에 없다. 설마 1년에 200일을 그러겠느냐 생각하겠지만, 학습부진학생들의 성장을 관찰하는 4년 동안 1년이 아니라 3년을 무기력하게 버티는 모습도 보았다. 이렇게 쌓인 무기력은 앞에서 언급한 일화처럼 악순환의 고리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버린다.

 

학생 스스로 무기력에서 벗어 나기란 쉽지 않다. 배움이 느린 학생들은 더욱 그러하다. 무기력함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제동을 걸어주는 성인의 도움과 손길이 필요하지만, 무기력한 학생들을 돕는 데에는 많은 에너지를 들여야 하고, 때로는 다른 아이들에게 가야 할 손길을 덜어내야 가능해진다.

 

그래서 가끔씩은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가 그 학생을 돕겠지’의 상황이 펼쳐지기도 한다. 학생의 무기력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적극적인 제동을 걸어주어야 한다. 한 번의 제동으로 크게 변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래도 학생의 기억에 자신의 무기력함을 걱정해주고 도우려고 했던 성인이 있었다는 기억을 남길 필요가 있다. 


2017년부터 2020년까지 4년간 만났던 배움이 느린 어떤 학생이 새해 아침 문자를 보내왔다. 그동안 이것저것 얘기해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서 고맙다며 최근 하고 싶은 것이 생겼으며 심지어 성적도 올랐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아이들의 성장은 내가 피드백을 주는 그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으며,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셋째, 우리는 학생이 보낸 신호를 읽었을까?
학생들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싶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다음은 배움이 느린 학생들이 했던 말들이다.


“기초반에서는 천천히 알려줘요”라는 말에는 ‘천천히’라도 배우고 싶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수학은 배워도, 다른 걸 배워요”는 천천히 배우고 싶은데 숨이 차다는 뜻이다. 많이 노력해서 이제야 나눗셈을 좀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또 배워야 하고, 매번 따라가야 하는 상황이 힘들다는 표현이다. 
“제가 이해할 때까지 설명해주셨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에는 기본적으로 알고 싶다는 뜻이 담겨 있다. 
“수업내용이 이해되는 아이들은 미리 배우고 온 거 아니에요?”라는 말은 자신도 미리 배웠으면 수업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고,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합리화이며, 스스로에 대한 위로이다. 
“새로 옮긴 학원은 잘해 줘요. 못해도…”라는 말은 내가 비록 못하지만, 격려와 위로를 받고 싶다는 마음이다.


배움이 느린 학생들은 스스로 무기력을 끊어내지는 못하지만, 종종 이렇게 신호를 보내온다. 이러한 신호는 듀이가 말한1 미성숙한 존재의 성장에 필수적인 ‘의존성’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신호를 얼마나 민감하게 읽어내는가이다. 배움이 느린 학생의 말과 행동을 유심히 살피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민하고 고민해봐야 한다. 번거롭지 않을 수가 없다. 


학생에 대한 많은 고민을 통해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개입을 제공하면 대상 학생은 갸우뚱하면서 역주행을 잠시 멈춘다. 한 번의 개입으로 방향을 전환할 순 없겠지만, 잠시 멈추고 생각하게 했다는 것이 갖는 의미는 상당하다. 자신에게 관심을 주는 성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깨워달라고 하지 않았는가? 결국 원하는 것은 관심이다.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을 뿐, ‘안 되는 아이’는 아니다
필자는 지난 4년간(2017년~2020년) 학습부진학생의 성장과정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바 있고, 앞서 언급한 일화들은 모두 해당 연구를 통해 마주한 것들이다. 질적 종단 연구로 진행한 이 연구의 핵심질문은 ‘학습부진학생은 어떻게 성장하는가?’였으며, 44명의 학습부진학생들을 4년 동안 관찰하고 면담했다. 여기까지 언급했을 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연구의 결론이 무엇이라고 예측하는지가 궁금해서 질문하고 싶어진다. 4년이 지난 지금 44명 중 몇 명의 학생들이 더 이상 학습부진이 아닐 것이라고 예상하는가?


사실 이 연구는 학생들의 성장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결론으로 연결된다. 어제와 달리 오늘 좀 더 알았고, 좀 더 발전했다는 것이 성장이라면, 44명 중에 11명이 꾸준히 성장했고, 16명은 느리지만 그래도 꾸준히 성장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학습부진이 아닌가?’라는 시각으로 해석하면 다른 결론이 된다. 소위 제 학년의 진도를 따라갈 수 있어서 더 이상 학습이 부진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는 학생은 44명 중 6명에 불과했다. 그럼 나머지 38명을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대할 수 있을까? 


이 연구를 수행하는 지난 4년간은 매 순간 번민의 시간이었다.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들, 이 정도면 아이들이 성장할 것이라 기대했던 오만한 생각들, 도대체 왜 이러고 있느냐며 아이들을 다그쳤던 모습들, 쉽게 변하지 않는 모습을 매일 보면 어쩔 수 없이 무뎌질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들(매일 아픈 환자들을 마주하는 의료진이 매 순간 감정이입할 수도, 해서도 안 되듯이)과 그래도 내가 마주하는 이 학생이 지금은 여전히 학습부진이고 제자리에 있어 보이지만 느리게 배워도 제대로 배우면 잘 성장할 수 있다는 신념과의 싸움이었다.

 

배움이 느린 학생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성인의 손길(사람)이 필수적이었으며, 빠르게 변하지 않는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효율성을 논하기보다는 묵직한 기다림(시간)이 중요했고, 어떻게 도와주어야 성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계속되는 고민(번민)이 필요했다. 

 

배움이 느린 학생들은 꺾인 꽃 같았다. 스스로를 꺾는 꽃은 없다. 이 학생들은 모두 처한 상황의 문제일 뿐이거나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을 뿐, 성장하고 싶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었으며, ‘안 되는 아이’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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