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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이슈2] 한국 교육에서 진보교육감의 시대란?

 

지난달 세종시교육청이 관내 학교들에 보급하고 수업에 활용하도록 한 책 <촛불혁명>은 교육계에 분명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교육계 안에서의 소란’ 즉,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는 듯한 모습이다. 물론 논란이 일어난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오히려 역사를 전공하는 직업상 ‘모든 사회적 사건은 많든 적든 논쟁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는 기본인식으로 사안을 바라보는 편이다.

 

‘논쟁’ 능력을 잃어버린 한국의 진보세력

한국 현대사는 ‘논쟁’보다는 ‘시위’로 점철된 역사였다. 해방 이후 군정 치하의 크고 작은 시위는 말할 것도 없고 전쟁 이후에도 자유당 부정선거 반대, 한일협정 반대, 유신헌법 반대, 계엄령 선포 반대, 5공 헌법 반대 그리고 소위 문민정부 이후에는 WTO 반대, 신자유주의 반대, 기업의 노동착취 반대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반대 시위가 있었다.

 

굵직굵직한 정치·경제적 사안에는 찬성과 반대의 목소리가 대립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80년대를 지나고 한국인들의 역사관이 바뀌면서 일련의 반대 시위들은 ‘구악(舊惡)’을 내몰고 ‘정의를 외친 선(善)한 역사적 시도’로 새로이 자리매김하게 되었다(물론 이러한 역사관의 변화는 그냥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같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국 진보세력은 한 번도 창의적인 적이 없었다. 아마도 우리나라 진보세력의 사고가 유럽의 68혁명과 비슷한 시기에 형성되어 아시아에서 대표적인 신좌파 물결을 쏟아낸, 일본의 ‘전투적 좌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진보세력은 사상 서적들의 대부분을 일본 번역서로 탐독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고, 의식했든 못했든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사고체계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19세기 변증법적 세계관에 입각한 경직된 사고는 이후 치열한 학문 시장에서 제대로 경쟁한 적 없이 스스로 편향된 시각에 매달려 독선화되어 갔다.

 

또한 한국의 진보세력들은 한 번도 현실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소위 586 진보진영의 사고는 사상적 핵심이념이라 할 수 있는 민주주의(democracy)와 민족주의(nationalism)에 깊이 세뇌되어 있다. 이 두 이념은 한국 사회에서 매우 신성시되고 있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민주주의와 민족주의가 합쳐질 때 나오는 것이 바로 ‘전체주의적 대중독재’이다. 가령 1차 세계대전 전야의 독일이 엘리트적 민족주의에 심취해 있었다면, 2차 세계대전 전야의 독일은 바로 민주주의적 민족주의에 심취해 있었다. 독일이 이 같은 지루한 관념론적 집단주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두 차례의 패전을 통해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대표하는 영미권 사회의 장점에 눈뜨기 시작하면서였다.

 

“우리만 옳다” … 타협엔 무관심한 배타적 집단주의

이런 점에 비춰볼 때 진보교육감은 사회를 보는 시각이 독선적·관념론적 성격을 강하게 띨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지식 시장에서 한 번도 제대로 경쟁에 노출되어 본 적도 없고, 현실적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작동하는 시장원리에 대해서도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말이다. 최근 자사고 지정 취소, 한국유치원총연합회 법인설립 취소 처분 패소, 학부모 반대로 혁신학교 지정 취소 등 일련의 사건은 소위 진보교육감들이 보여준 평등주의적·집단주의적 가치들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거부 대상이 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물론 정부와 민간 사이의 대립 혹은 긴장 자체가 부정적인 현상은 아니다. 문제는 이들 진보교육감의 사고체계가 다원주의적이고 상대적인 이해관계의 상충을 합리적으로 해소해 나가기 힘들다는 데에 있다. 다원주의와 상대성을 근간으로 하는 개인주의적 사고와 타협하기에는 공동체주의 이념이 너무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들은 자신들의 이념에 거스르는 이해집단과의 타협엔 무관심하다. 그렇다고 사회적인 논쟁을 주도해 나갈 논리의 기반이나 철학적 깊이를 가진 것도 아니다. 즉, 광장을 가득 메운 민중의 열망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상향에 매료된 사회관은 스스로 사회적 저항집단에 맞서 논쟁할 능력을 잃게 했다.

 

지난달 <촛불혁명> 서적 배포 사건 때 세종시교육청은 <촛불혁명> 서적과 관련한 답변에서 독일의 보이텔스바흐 협약을 인용했다. 하지만 이는 진보교육감이 이끄는 교육기관들의 비논리적인 이율배반성을 잘 보여준 사례다. 알다시피 보이텔스바흐 협약은 다양한 시각이 교실수업에 소개되어야 한다는 진보교육계 주장의 ‘유용하고 권위 있는 근거’로 흔히 활용되어 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정체성 정치를 추구하는 진보사상은 자신들의 평등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 이상에 거슬리는 가치는 철저히 배척해왔다. 이러한 배타적 집단주의 시각으로 교육내용을 독점해온 편향성과 배타성은 지난 4년 동안 진보정권과 진보교육감의 협력 속에 더욱 강화되어 왔다. 혁신학교는 바로 그러한 협력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한 장치이자 공간이었다.

 

편향성, 그건 우리 사회가 가야 할 길이 아니다

교사들이 그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했던 말 중의 하나가 민주시민교육이다. 그런데 이들 진보교육감의 사고 속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라기보다 민족주의·반자본주의와 같은 강한 집단감성을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에 가깝다. 진보교육계는 예전부터 구체적인 학생 개인의 지성(학력)과 도덕성(인성)보다는 공감과 소통 등의 모호한 구호들로 버무려진 공동체적 감성을 고취하고자 해온 것이 사실이다. 특히 ‘브레이크 고장 난 폭주기관차’처럼 제어 없이 이뤄지고 있는 혁신학교나 민주시민교육은 대표적인 교육과 학교의 예산 낭비 정책이다. 예산의 방만한 집행은 단순히 혁신학교나 특정 사업에 드는 예산뿐 아니라 학생들의 의식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포퓰리즘을 연상케 하는 각종 지원금은 정말 어려운 형편의 학생을 돕기보다 교사가 학생을 쫓아다니며 지원금을 받도록 독려하는 상황이다. 심지어 어떤 학부모는 지원을 받기 위해 필요한 서류 양식 설명조차 듣기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파야 하는데 우물물을 가지고 아쉬운 사람을 쫓아다니고 있다. 학생들 역시 책걸상·에어컨·히터·화장실 휴지·청소도구… 등을 아까운 줄 모른다. 아무도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절약의 필요성을 가르치지 않는다. 이제는 제때 지급되지 않거나 공급되지 않으면 불평불만을 터뜨리는 학생들만 늘어날 뿐이다.

 

그런데 학생들도 안다. 자기 돈을 털어 떡볶이라도 사 먹을 때는 조금이라도 저렴하고, 입맛에 맞는 가게를 신중히 고르며, 자신의 소중한 돈을 경제적으로 사용한다. 그런데 무상교육과 학생 복지, 학교 민주화가 마냥 강조되는 교실상황에서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다.

 

이제는 학교에서 근면·자조·성실 따위는 아무도 강조하지 않는다. 민주시민교육의 이름 아래 공감·소통·협력이 그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선택에는 비용이 지불된다’는 것과 ‘효율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필요가 있다’는 기본적 삶의 태도를 강조하면, 마치 무슨 삭막한 인간관을 설파하는 교사로 낙인찍힐 지경이다. 이렇듯 개인의 자립과 책임의식을 침식하는 교육관 역시 그 해악성은 배타적 집단주의 교육관에 비해 덜하지 않다.

 

진보교육감들은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신념에 충실하게 일해 온 셈이다. 진보정책들의 결과가 대부분 그렇듯 ‘입시지옥에 반대한다’고 외쳐왔다. 하지만 엄연히 존재1하는 학력시장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정책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개인이 집단 속에 숨는 법을 가르치는 학교교육, 그리고 그런 학교에서 점점 자신의 인격성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과 무게를 회피하려는 학생들.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고 있는가에 대해 이제는 더욱 활발하고 자유로운 논쟁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진보교육감의 ‘질주하는 편향성’에 맞서 당당하게 ‘그건 우리 사회가 가야 할 길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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