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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앙부일구와 새해

 

[박광일 여행작가·(주)여행이야기] 경복궁 사정전 앞, 광화문 광장, 여주 영릉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세종대왕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유물로 한정해서 본다면 앙부일구(仰釜日晷) 모형이 있다. 앙부일구는 솥 모양의 해시계다. 그런데 자주 본 탓인지 대개는 앙부일구에 대해 감동을 느끼지 못하고 가볍게 지나치곤 한다. 조선 시대 과학 유물의 하나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유물과 유적이 놀라운 이야기를 품고 있듯 앙부일구도 그러한 이야기가 있다.
 

앙부일구를 만든 사람은 장영실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장영실의 단독작품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순지로 대표되는 집현전의 천문과 역법을 담당하는 학자들이 고안한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천문과 역법은 고도의 학문적 깊이와 함께 복잡한 수학 계산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실제로 이순지의 <졸기>를 보면 앙부일구의 제작에 공이 큰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왜 이 시기에 세종은 앙부일구, 곧 해시계를 만들었을까. 제도와 악기처럼 중국에서 수입해서 쓰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는, 그리고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것이 제도이든, 물건이든 대부분 외국에서 수입해서 그대로 쓸 수 없다. 나라마다 상황이 다르고 또 시대에 따라서도 상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그런 사례를 잘 보여준다. 세종4년 1월1일의 기록이다.

 

“일식이 있으므로, 임금이 소복(素服)을 입고 인정전의 월대(月臺) 위에 나아가 일식을 구(救)하였다. 시신(侍臣)이 시위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백관들도 또한 소복을 입고 조방(朝房)에 모여서 일식을 구하니 해가 다시 빛이 났다. 임금이 섬돌로 내려와서 해를 향하여 네 번 절하였다. 추보(推步) 하면서 1각(刻)을 앞당긴 이유로 술자(術者) 이천봉(李天奉)에게 곤장을 쳤다.”
 

위 기록을 정리해 보면 일식을 예측하고 의식을 치르려고 했는데 1각, 그러니까 15분 정도의 오차가 나서 해당 담당자인 이천봉에게 죄를 물어 곤장을 쳤다는 것이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이천봉으로 볼 때는 억울한 면이 있다. 이때 쓰던 천문역법이 잘 맞지 않았다. 세종 때만 하더라도 일식에 대한 기록은 모두 22회인데, 지금 추산해보면 실제로 일어난 일식은 12번이었다. 그 가운데 한 번은 기록의 문제로 보이는데 그렇더라도 9번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식을 예측했던 셈이다. 그리고 다행히 일어난 일식이라고 하더라도 시간의 오차가 있었다. 
 

 

조선 시대에 일식을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유는 왕권이 하늘의 뜻으로 결정된다는 생각, 하늘의 천문현상이 지상에 영향을 끼친다고 봤던 것과 관련이 있다. 제왕의 능력 가운데 하나가 바로 관상수시(觀象授時), 곧 하늘의 모습을 살펴 시간을 읽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하늘의 태양이 사라지는 일식은 중차대한 일이었으니 일식이 일어나면 구식례를 치른다. 왕 이하 백관들이 소복을 입고 북을 치며 재앙을 막기 위해 치르는 의식이 구식례다. 당시 일식 예보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왜 역법에 오차가 생겼을까. 이유 가운데 하나는 조선이 중국의 역법을 썼는데 우리나라랑 관측 위치가 달랐다는 점이다. 중국 명의 수도는 남경(영락제 때 북경으로 천도)인데 서울과 경도, 위도 차이가 크게 난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당시 조선에서 받아들인 중국의 역법인 대통력이 이미 오차가 많이 나는 편이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수시력, 그리고 이들 역법을 보정하는 자료까지 활용했지만 잘 맞지 않았다. 역법이 이와 같으니 지구상 해의 위치(정확히는 위도)가 다른 외국에서 해시계를 수입해서 쓸 수 없었다. 
 

그렇다면, 해시계를 만들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먼저 한양의 위치,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위도를 재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당시 북극의 높이를 재는 것으로 표현했는데, 지금 남아있는 해시계를 보면 큰 앙부일구 표면에 ‘한양북극고삼십칠도이십분(漢陽北極高三十七度二十分)’이 적혀 있고, 작은 앙부일구에는 ‘북극고삼십칠도삼십구분일십오초(北極高三十七度三十九分一十五秒)’의 설명문이 적혀 있다. 
 

곧 한양의 위도(경복궁 근정전 기준 북위 37도35분)를 뜻하는 것인데 조금 더 정확한 뒤의 수치는 숙종 39년(1713)에 잰 것이다. 이러한 측정치를 바탕으로 그림자를 만드는 영침의 높이를 제작한다. 조선은 이렇게 자신만의 시계, 앙부일구를 갖게 된 것이다.
 

해시계는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먼저 시간이다.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과정을 통해 하루의 시간을 표시할 수 있다. 지금 남아있는 해시계는 1시간을 4등분으로 나눠 표시하고 있으니 해당 시간을 15분 간격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계절에 따라서도 해의 위치가 달라진다.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높이가 달라진다. 이에 따라 여름의 해는 남중 고도가 높고 이에 따라 낮은 길며, 겨울의 해는 남중고도가 낮아지며 낮의 길이가 짧아진다. 이를 바탕으로 1년 중 기준 날짜를 표시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전통 역법에서 24절기의 역할이니 한쪽은 여름에서 겨울로, 다른 쪽은 겨울에서 여름으로 가는 절기가 적혀 있다. 하루의 시간과 함께 1년 중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놀랍게도 앙부일구는 시계이며 달력인 셈이다. 
 

 

그런데 막상 이 내용을 바탕으로 해시계를 읽으면 맞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태양이 정한 시간을 쓰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위치가 아닌 동경 135도를 쓰니 시간의 격차가 난다. 만약 우리나라를 지나는 동경 127도의 시간을 쓴다면 거의 맞아떨어질 것이다. 
 

무엇보다 앙부일구의 미덕은 하늘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바닥이다. 이는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긴 하지만 당시 천문관에 따라 둥근 하늘을 지나가는 태양의 그림자가 그대로 나타나도록 표시한 것이다. 그래서 다른 모양의 해시계에서 나타나는 일반적 문제인 그림자가 흐릿해지거나 지나치게 길어지는 것을 볼 수 없다. 앙부일구의 그림자 길이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두 같다. 기록상으로 중국 원나라의 곽수경이 앙의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실물과 그 구체적 내용이 전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의 독자적인 발명품이라고 보는 편이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 해시계를 만든 이유는 많은 사람이 시간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세종은 앙부일구를 만들어 혜정교를 비롯해 궁궐과 관청, 시내 곳곳에 설치했다. 과학의 이로움을 세상과 함께 나누려는 뜻이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백성들이 글자를 모르는 것이 문제다. 시간도 한자로 읽어야 했던 시대였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시간을 알려주는 신(神), 곧 12지신을 상징하는 동물의 존재다. 예를 들어 한낮을 가리키는 정오(丁午)의 오(午)는 말을 뜻하니 거기에는 말을 그려 넣은 것이다. 과학은 다시 인문학적 정책을 만나 그 효과가 조금 더 커졌다.
 

하루의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시계라면 1년의 시기를 밝히는 것이 역법이다. 조선의 시계를 만들 듯 조선의 역법을 만들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일식 예보가 틀리며 낭패를 본 세종은 그 일이 일어난 지 10년 뒤인 1432년, 드디어 역법 정리를 위한 사업에 착수한다. 정인지를 중심으로 정초, 이순지, 김담 등이 투입돼 연구하기를 10년, 1442년에 마침내 『칠청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을 완성한다. 
 

『내편』은 원나라의 수시력(授時曆)과 명나라의 대통력(大統曆)을 서울의 위도에 맞게 수정, 보완한 것이고, 『외편』은 당시로는 최신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아라비아 천문학을 참고해 만든 것이다. 『내편』은 1년을 365.2425일, 1달을 29.530593일로 정하고 있는데, 이 수치는 현재의 값과 유효 숫자 여섯 자리까지 일치하는 정확한 것이다. 더 쉽게 표현하면 지금과 40초 정도 차이가 난다. 당시의 천문 관측기구의 상황을 생각하면 엄청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역법을 왜 『칠정산(七政算)』이라고 불렀을까. 칠정(七政)이란 글자 그대로 ‘일곱 가지의 정치’가 아니라 해와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과 토성이라는 일곱 개의 별을 이르는 말이다. 원래 정치란 하늘의 뜻을 이 땅 위에 실현하는 일이고, 따라서 하늘의 별들이 이 세상의 정치 현상을 반영한다고 생각했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역사 속 시간과 역법의 의미를 살펴보며 새해를 맞이한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공간의 이해도 동반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니 시간을 읽고 해가 바뀌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주가 움직이는 질서를 새삼스럽게 되새기는 것이기도 하다. 더불어 우리 동네, 우리 지역을 떠나 우주 차원의 생각을 하게 되는데 자연스럽게 인간이 작은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인간을 귀하게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새해를 맞아 세상 앞에서 겸손해져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어쩌면 새해가 주는 선물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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