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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불행은 겹쳐서 온다고 했던가? 얼마 전 가을의 문턱까지 잦은 태풍이 불어와 온 나라를 할퀴고 지나간 뒤 곳곳에 상흔을 남겼다. 정부에 의해서 특별 재난지역으로 선포된 곳이 전국적으로 상당수에 이른다. 하루아침에 공들인 노력이 물거품이 된 농민들의 이마에는 주름이 펴질 날이 없다. 그뿐이랴. 도시에선 코로나19로 인해 상당수의 직장인들이 휴업 상태로 힘겨워하는 가운데 영세 자영업자들도 생계의 현장에서 하루하루 버거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2~3단계 사이를 오가며 생계를 압박하니 차라리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자조 섞인 말이 현실의 무게감을 가증시키고 있다.

 

삶은 원래 힘든 일이라고 문학에서는 두루 밝히고 있다. 일본의 저명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쿠사마쿠라》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산길을 오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치를 따지면 모가 나고, 정에 치우치면 휩쓸리고, 고집을 피우면 옹색해진다. 이래저래, 사람의 세상은 살기 어렵다.” 사람의 세상은 이처럼 살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뿐이랴. 단테의 《신곡》 첫 부분 “인생을 절반쯤 살았을 무렵, 길을 잃고 어두운 숲에 서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그 거칠고, 기혹하고, 준엄한 숲이 어떠했는지는 입에 담는 것조차 괴롭고 생각만 해도 몸서리친다. 죽음도 그보다는 덜 쓸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이처럼 삶 자체는 버거움의 연속이고 괴로움의 집합체이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인생은 고해(苦海)와 같다”고 하지 않았나.

 

인간이 불행한 것은 불확실한 미래 때문이라 한다. 이를 증명하듯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와의 처절한 싸움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이제는 모두가 지치고 피폐해진 삶은 인간의 평범한 일상이 아닌 차라리 예술에 가깝다. 왜 예술이라 불러야 할까? 단순한 고통의 창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은 통상 고뇌와 번민, 고통의 시간을 거쳐 한 단계 승화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자연의 원리도 그렇다. 마치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를 시인은 단지 멋스러운 언어로 표현했을 뿐이다. 지금 우리의 삶이 바로 그렇다.

 

“산다는 것, 그것이 예술입니다”라고 했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 1926)는 한때 삶에 대한 회의가 깊었던 시인이다. 그러다 그는 삶을 사랑하는 길로 접어들며 존재 탐구의 시인이 되었다. ‘피렌체 일기’에서 그는 “이제 나는 어찌 되었든 삶을 사랑할 것이다. 그 삶이 풍요롭건 가난하건, 광활하건 협소하건 내게 주어진 양만큼 삶을 부드럽게 사랑하고 내가 가진 모든 가능성이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 성숙하도록 만들 것이다”라고 적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런 행복이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목적의식이 있는 일을 통해 스스로 일하기 시작하는 힘을 일깨울 때 느껴지는 고단한 행복’을 발견하고 거기서 삶의 의미와 의지를 작동시켰다. 원래 삶 자체가 힘든 것이기에, 더 힘든 일도 덜 힘든 일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힘든 일을 사랑하는 것이 삶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버거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도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를 찾음으로써 역동적으로 전환할 수 있다. 단적인 실례로 삶의 의미를 찾으며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아 기적같이 세상의 밝은 빛을 온몸으로 맞이한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수기인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적나라하게 적었다. 그는 유대인 수용소에서 3년 동안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하루하루 지옥 같은 삶을 살았지만 그 속에서도 왜 자기가 살아야 하는지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생환(生還)하여 세상에 삶을 증거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또 망치를 든 철학자 또는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철학자라 불리는 독일의 F. W.니체는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외쳤다. 이는 곧, 운명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운명적인 순간이 연속되는 삶 속에서 어떻게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니체는 ‘온몸으로 맞이하고 온몸으로 껴안아라(운명애)’라고 하였다. 도덕적인 잣대나 신(神)적인 기준이 아니라, ‘긍정의 철학’으로 순간을 넘으라고 한 것이다. 순간이 모여 영원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 니체는 매 순간을 긍정으로 사랑스럽게 채워나가는 방법을 선택하길 피력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매번 이렇게 살 수 있을까? 그렇기에 삶의 의미를 찾아 삶을 사랑하며 산다는 것, 그것은 이 시대를 사는 진정한 주인공이자 니체가 말한 또 다른 초인(超人)이 아닌가 한다. 영국 문학의 거장 세익스피어는 “한 마리의 참새가 떨어지는 것에도 특별한 신의 뜻이 있다”고 말했다. ‘햄릿’의 이 구절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오랫동안 의미 지향의 존재였다. 우리가 어떤 사태나 사물 앞에서 멈춰 서게 된다면 그것은 그 안에 깃든 의미 때문이다. 꽃이 피어나도 그 앞에 멈춰 서 바라보고 발견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가을 단풍의 황홀함도 마찬가지다. 의미를 발견하고 심화하기 위해 멈춰 성찰하는 것, 그 의미에의 의지가 곧 삶이라고 여겨진다. 그것을 통해 삶과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을 발견하기도 하고 목적이 이끄는 삶의 희망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그것을 일찍이 세익스피어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설파했던 것이다.

 

그저 앞으로 한 방향만을 보고 달리기엔 주변의 우리의 삶은 너무나 다양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인생에는 숙제가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은 의미가 있고 의지가 있을 때 더욱 고귀하게 빛난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겠다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삶의 곳곳에서 만나는 고통과 역경을 극복하고 보람찬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이처럼 살아있기에 우리는 존재하고 그 존재는 예술처럼 고통을 안고 극복해야 한다. 청소년들의 영원한 교과서인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말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그렇다. 알을 깨고 태어나는 것, 그것이 바로 고통 속에서 창작하는 예술이고 우리에게 주어진 고결한 인생 숙제다. 누구든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고귀하게 살아갈 가치가 있다. 그것은 예술이란 궁극적인 창작의 과정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삶은 예술이라 감히 부르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