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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강마을에서 책읽기-한 글자로 가늠하는 생의 감촉

김소연의 '한 글자 사전'

들판이 확 달라진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여문 벼들은 수확의 시기를 알리는 듯 노르스름한 빛깔을 하고. 그 위로 메뚜기며 여치가 뛰노는 가을 초입입니다. 어느새 벌레들은 옥타브 높은 맑은 소리를 냅니다. 긴 우기를 보낸 탓에 까슬하고 맑은 바람과 청량한 햇살이 더 기분 좋게 느껴집니다. 옷걸이에 걸린 옷에 거의 하얀 곰팡이가 조금씩 피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탁기에 돌려 옷들을 베란다에 널어 가을 햇살에 말렸습니다.

 

빨래가 말라가는 동안 베란다에 앉아 저를 위해 한 권의 기분 좋은 책을 읽습니다. 김소연 작가의 『한 글자 사전』입니다. 작가는 읽는 이가 자신만의 사전을 만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쓴 글이라고 합니다. 어떤 말에 대해 작가는 누구나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제가 책에서 찾은 한 글자로 가늠하는 생의 감촉을 표현한 멋진 말들입니다.

 

귀/ 토론할 때는 닫혀 있다가 칭찬할 때는 잘 열리는 우리들의 신체 기관.

밤/ 노동자가 비로소 온전히 오금을 펴고 눕는 시간. 창가의 식물들이 면적을 오므리는 시간. 농구공을 받아내는 텅 빈 운동장처럼 누군가의 성정을 울리는 시간. 그렇기 때문에 시인에겐 밥물을 재는 시간

싹/ 마음속에 낙담밖에 남아 있지 않을 때, 더 이상 손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을 때, 화장솜을 꺼내고 상추씨를 한 줌 뿌려본다. 그리고 물을 적셔둔다. 사흘이면 싹이 나고, 나는 저절로 신이 난다. 낙담밖에 없던 사흘 전의 나를 간단하게 잊을 수 있다.

씨/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쪼개어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심고 물을 주어 키워가며 알아내는 것.

차/ 마실 때보다 우릴 때 더 그윽하다.

 

무시무시한 바이러스가 세상을 쥐락펴락해도 가을은 왔습니다. 들판에 곡식은 익어가고 대추나무에 단맛이 깃들었습니다. 푸른 밤송이에는 젊은 밤이 꿋꿋하게 익었고, 어린 도토리들이 옹기종기 매달린 신갈나무의 잎은 아직은 푸른 기가 많을 때입니다. 커다란 호박잎을 걷어보면 누렁 호박이 ‘어흥’ 하며 놀라게 합니다. 이렇게 좋은 시절이지만 우리는 조금 더 조심해야겠지요.

 

‘놓치면 깨지고 품고 있으면 아프다.’ 한 글자로 무엇일까요? 작가는 이것이 ‘병’이라고 합니다.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가을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한 글자 사전』, 김소연 지음, 마음산책,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