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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교육방송(EBS)이 생겨나던 초창기에 있었던 일이다. ‘교육방송’을 어떤 악센트로 발음하느냐에 따라, 교육방송에 대한 인식의 결이 묻어났다. ‘교육’에 강세를 두어 ‘교육방송’으로 발음하면, 교육방송(EBS)이 교육기관임을 강조하려는 인식이 있었다. ‘방송’에 강세를 두고 ‘교육방송’으로 발음하면, 교육방송(EBS)이 방송사임을 강조하려는 인식이 있었다. 구성원 중 교육연구원들은 대개 ‘교육방송’으로 읽으려 했고, 방송원(PD)들은 ‘교육방송’으로 읽으려 했다. 그러나 ‘교육’과 ‘방송’이 그 본질에서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이런 모습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이 일을 생각하노라니 ‘비판적 이해’라는 말이 떠오른다. ‘비판적 이해’는 ‘비판’에 방점이 있는가, ‘이해’에 방점이 있는가. 학교 교육에서 ‘비판적 이해(critical comprehension)’니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니 하는 걸 가르친다. 이를 가르칠 때 이런 고민을 해 보기도 했었다. 비판하는 일과 이해하는 일은 서로 맞서는 일인가, 아니면 서로 통하는 일인가. ‘비판적 이해’라고 해 놓고서는, 비판이 이해를 다 장악해 버리도록 가르치지는 않았는가. 그 반대로 이해가 비판을 노글노글하게 만들도록 지도하지는 않았는가. 정답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리라. 상황 문맥에 따라 다를 것이다.

 

우리는 비판하기 위해서 이해하는가, 아니면 이해하기 위해서 비판하는가. 먼저 비판하기 위해서 이해에 집중하는 경우를 보자. 비판을 제대로 하자면 비판 대상의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상에 대해서 모르면서 비판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먼저 충분한 이해가 있어야 제대로 비판할 수 있다. 요컨대 이런 이해는 ‘비판을 잘하기 위한 이해’이다. 이해가 비판에 복속한다. 비판이 목적이고 이해는 수단이 된다. 신문 기자나 수사관이나, 야당의 대변인이나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식의 ‘비판적 이해’에 골몰하는 생활을 하는 셈이다.

 

비판으로만 수렴되는 ‘비판적 이해’는 위험하다. 이해는 사라지고 비판만 남고, 비판만을 능사로 알기 때문이다. 이는 비판을 위한 비판의 수렁에 빠지기 쉽다. 더 큰 문제는 비판하는 주체가 그 비판에서 자신은 제외한다는 데에 있다. 오로지 남을 비판하는 데에만 꽂혀 있기 때문이다. ‘내로남불’의 작태들이 이를 입증한다. 비판은 자기비판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된다.

 

이해하기 위해서 비판한다는 건 무슨 뜻인가. 어떤 대상이나 현상을 총체적으로 온전하게 이해하는 과정에서는 ‘이해하기 위해서 비판하기’가 필요하다. 하늘 아래 모든 대상(현상)은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지선지미(至善至美)의 대상은 없는 법이다. “그저 좋은 게 좋다”라는 식으로 대상을 이해한다면 즉, 비판 없는 이해는, 부실한 이해가 될 수밖에 없다. 대상(현상)의 부정적 측면까지도 냉정하게 이해함으로써, 마침내 그 대상의 전체적인 모습을 편견이나 왜곡 없이 이해하는 데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만장일치 찬성은 가장 나쁜 찬성이라는 말이 이를 대변한다.

 

02

어떤 인물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동시에 그를 지지할 수 있는가. 어떤 현상에 대해서 비판을 하면서, 동시에 그 현상을 이해할 수도 있는가. 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 전, 후보로 있던 시절에, 이른바 그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표명하는 정치인 그룹이 있었다. 이들은 김대중 대통령을 충심으로 받들며 정치적 역정을 함께 해 온, 이른바 ‘가신(家臣) 그룹’의 정치인들이 아님은 물론이다. 비판은 비판대로 하면서도, 지지를 철회하지는 않는다는 그룹이다.

 

그는 비판적 지지자들을 포용함으로써 현실 정치의 선거 국면에서 이득을 얻었다. 이들의 지지표가 도움이 되었다는 단선적 계산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비판적 지지를 포용함으로써 지도자로서 정치력의 확장과 지지세의 확산을 기할 수 있었다. 비판의 포용이 비판이 순기능으로 작용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형식 논리의 세계에서는, 비판과 동시에 지지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현실 삶의 현상에서는 ‘비판’과 ‘지지’가 함께 갈 수도 있음을 본다.

 

다시 ‘비판적 이해’로 돌아와 본다. 비판적 이해는 ‘비판’에 방점이 있는가, ‘이해’에 방점이 있는가. 나로서는 ‘이해’에 방점을 두는 편이다(이 방식이 반드시 타당하다는 뜻은 아니다). 학생들에게 ‘비판적 이해’의 역량을 길러 주어야 하는 교육자로서는, ‘이해’에 방점을 두고 싶다는 것이다. 교육의 자리에서 보면, 비판의 능력도,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기보다는, 궁극에는 어떤 전체를 이해하는 데에 수단으로 동원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달리 말하면 비판적 이해력도 이해력의 한 하위 분야임을 중시하자는 관점이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해 보아도 ‘비판적 이해’가 인간의 정신적 과정(mental process)으로 작동하는 구조는 흔쾌히 드러나지 않는다. 무언가 설명이 미진한 듯하다. ‘비판’과 ‘이해’를 지나치게 이원적으로 분리해서 보려는 데에 문제가 있는가. 아니면 ‘비판’과 ‘이해’의 관계를 선·후의 관계 또는 지배·종속의 관계로 지나치게 도식적 구조로 보는 데에 문제가 있는가. 실제의 비판적 이해는 그런 경직된 구조로 작동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복합적인 삶의 실제에서, 비판하기만 따로 분리해 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인간 정신 작용의 총체에서 비판하기의 정신 작용만 따로 분리해 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장사꾼 샤일록이 안토니오의 심장 부근에서 피를 흘리지 않고 살 한 근을 베어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것이다.

 

03

최근 들어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 교육’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이동통신으로 미디어 현상이 복잡해지고,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미디어 발전에 영향을 미침에 따라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더욱 복잡해졌다. 제4차 산업혁명이 운위되고 인공지능·코딩·알고리즘·데이터 등의 기술이 미디어 소통 기능에 영향력 있게 관여하게 됨으로써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그 핵심과 본질이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이들 기술을 경험하고 익히는 데 주안을 두기도 했고, 미디어 사용 기술 가르치는 것을 이 교육의 핵심으로 여기기도 했다.

 

이런 정황과 관련하여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분야의 중견 학자인 정현선 교수의 글을 읽었다. 나는 정교수의 글에서 ‘비판적 이해’라는 말이 참으로 적실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정교수가 사용한 문맥을 중시하여 읽다 보면, ‘비판적 이해’는 현상(대상)의 본질을 찾아가는, 그래서 그 현상(대상)을 평가하는 능력임을 알 수 있었다.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란 무엇이겠는가. 그 현상(대상)이 지닌 가치를 발견하는 능력이다. 긍정적 가치든 부정적 가치든 이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 이 모두가 비판적 이해에 드는 것이다. 정교수의 글을 인용해 본다.

 

미디어 리터러시의 핵심 중의 핵심은 미디어 ‘재현’입니다. 미디어가 중재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이해와 자신의 삶에서의 성찰, 그리고 시민으로서의 참여를 중심으로 하는 교육이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본질입니다. 뉴스든, 광고든, 유튜브 영상이든, 미디어를 만들어 보는 수업을 하는 것 자체는 미디어의 언어를 배우는 과정의 일부일 뿐, 본질 그 자체는 아닙니다. 글씨를 쓸 수 있다고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미디어가 재현하는 어떤 현실에 관심을 두고 제대로 읽고 목소리를 내는가, 이 점에 대해, 스스로를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자’라고 생각한다면 늘 되돌아봐야 합니다. 저도 부족하지만 늘 이 점에 대해 생각하고 반성하고자 노력합니다.(정현선 페이스북 2019.11.19.)

 

나는 ‘동의한다’는 댓글을 달았다. 그랬더니 정교수는 다시 내게 이런 SNS 메시지를 보내왔다. “핵심에 대한 이해 없이, 미디어 리터러시를 하나의 교육 트렌드로 유행처럼 소비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서, 저 스스로도 본질을 되새기고 싶었습니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현상에 대한 정교수 자신의 비판적 이해 또한 진지한 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정교수의 글에 힘입어 ‘비판적 이해’라는 화두를 마침내 다음 두 개의 문장으로 정리했다.

 

“나는 비판한다. 고로 이해한다.”

“나는 이해한다. 고로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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