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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연구

가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민족교육’과 ‘독립’

⑰호암 문일평(湖巖 文一平 1888~1939)

아동과 여성의 교육을 주장한 교육자이자 언론인
독립청원서 작성‧낭독 후 총독부 제출…재판 받아
전당포서 시계, 금가락지 팔면서 가족‧교육에 헌신
교사 순환근무제, 정치‧군사에 치중된 교과서 비판

 

 

[이길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문일평만큼 그 이름 앞에 부르는 명칭이 다양한 인물도 많지 않다.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민족주의 사학자, 반아카데미즘적 대중 저술가, 조선학 운동의 선구자, 한국 차문화(茶文化)사의 시조 등이 그것이다. 필자는 거기에 하나를 덧붙이고 싶다. 아동과 여성의 교육권을 주장한 참교육자.
 

문일평은 고종 25년인 1888년 5월 15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오랜 무관 전통을 지닌 가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은 꽤 부유했었다. 부친 문천두는 ‘천석꾼’으로 불렸을 정도였다. 문일평은 만11세가 되던 1899년 3살 연상의 김 씨와 결혼해 김 씨로부터 한글을 배웠다. 이후 1904년 열 여섯 살이 될 때까지 고향 의주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문일평은 단발을 하고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에 출석하면서 서양문명에 대한 동경심이 커져만 갔다. 실제로 1905년에는 용암포에서 증기선을 타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지만 마침 발발한 러일전쟁으로 미국행이 좌절됐다. 실제로는 여행권과 여권 등의 문제로 인천항에 내리게 됐다는 주장도 있다.
 

인천을 통해 경성에 도착한 문일평은 미국 대신 일본 유학을 계획했다. 러일전쟁이 끝나자 1905년 봄 경성에서 경부선 열차를 타고 부산과 고베를 거쳐 도쿄에 도착한 것을 보면 그의 외국 문명에 대한 동경심과 이를 배우고자 하는 학구열은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나이 만 17세였다.
 

일본어 능력 없이 도착한 도쿄에서 그는 미국인 선교사의 소개로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에 청강생으로 입학했고 이후 세이소쿠학교(正則學校)로 옮겼다. 이곳에서 유학 중 네 살 아래인 이광수와 동갑내기 홍명희를 만나 평생 동지가 됐다. 세이소쿠학교를 거쳐 최종적으로는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를 졸업한 것이 1908년이었다.
 

졸업 후 귀국해 안창호가 평양에 세운 대성학교, 고향 의주에 유여대가 세운 양실학교, 경성에 언더우드가 세운 경신학교 등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언더우드 교장, 김규식 교감이 운영하던 경신학교 재직 중에는 최남선의 광문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상동청년회에서 운영하는 토요학교에서 이만규 등과 함께 지리를 가르치는 등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이 당시 부인 김 씨를 정신여학교에 입학시켜 신식 교육을 받게 하는 등 여성 교육에 대한 평소의 관심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문일평이 22세가 되던 1910년 국권을 상실하자 그는 다시 미국 유학을 추진했지만 이룰 수 없었다. 22세 청년 문일평은 불법적 한일병합에 반대해 광화문 네거리에서 항일 연설을 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조선총독부에 한국침탈의 부당함을 항의하는 투서를 해 투옥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이런 전력으로 미국 여행권을 얻는 데 실패했고 문일평은 다시 일본 유학을 떠났다. 1911년 와세다대학교 고등예과를 거쳐 정치과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안재홍과 김성수를 만나 교류했다. 당시 안재홍과의 만남은 문일평이 역사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그러나 여러 이유로 공부를 마치지 못한 문일평은 1912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대공화보사라는 신문사에서 일하며 박은식, 김규식, 신채호, 조소앙, 홍명희, 정인보 등과 사귀었다. 그가 쓴 논설이 호응을 얻은 것이 후일 언론사 활동에 큰 바탕이 됐다. 당시 남경과 상해를 오가며 지속하던 독립운동과 언론 활동을 위해 고향에 남겨 뒀던 가산을 대부분 처분했기에 1914년 귀국한 후에는 궁핍한 생활이 그를 기다렸다. 고향에서 3.1운동을 맞이한 문일평은 경성으로 올라와 3월 12일 종로 보신각 앞 사거리에서 애원서라는 형식의 독립청원서를 작성해 낭독한 후 총독부에 제출한 행동으로 재판을 받았다. 
 

8개월 복역 후 출소한 1920년경부터 그는 언론활동과 교육활동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1920년대 초반은 일본이 문화정치로 방향을 선회한 직후로 보통학교를 비롯한 근대식 교육기관의 증설을 통한 식민통치의 기반 조성에 총력을 기울이던 때였다. 조선인들의 근대 교육을 향한 열정이 조성되기 시작한 즈음이기도 하다. 병합 직후 반일 감정으로 증가일로에 있던 서당의 숫자가 감소하고, 총독부 인가의 공사립 보통학교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문일평은 경성의 중동학교(1922년), 송도의 송도중(1923~1925년)에서 교사로 근무했고 여기에서 최규동, 이만규 등과 친분을 쌓았다. 
 

일평이 세 번째 일본 유학에 오른 것은 1925년 8월이었다. 동경제국대학의 문학부 사학과 동양사부에서의 청강생 생활은 1년을 넘기지 못했다. 귀국한 그는 1927년에 중외일보 논설부 기자로 일하며 경성여자상업학교 교사직을 겸했다. 신간회가 출범하자 발기인으로도 참여했다. 이후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기면서도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사를 겸직하는 등 지속적으로 교육과 언론활동을 겸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1931년 즈음에는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신문사 운영이 어려워지자 사임하고 중앙고등보통학교 임시 교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 시기 그의 활동 중 훗날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식민사학자들 주도의 청구학회와 진단학회 참여였다. 참여 이유나 탈퇴 이유는 명료하지 않으나 그의 민족주의 역사관을 설명하는 대부분의 글에서 언급되고 있을 정도로 눈에 띄는 이력으로 남아 있다.
 

1932년 평북 정주 출신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자 문일평은 1933년에 편집고문으로 들어갔다. 당시 조선일보에서 이광수는 부사장이었고, 홍명희는 소설 임꺽정을 연재하고 있었다. 이후 문일평이 타계하는 1939년까지 일본 유학을 함께 했던 이들 3인은 조선일보에서 함께 글을 썼다.
 

문일평의 인간미를 가장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자료는 바로 조선일보 편집고문으로 입사한 이듬해인 1934년에 그가 쓴 일기다. <문일평 1934년; 식민지 시대 한 지식인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2008년에 번역 출판된 그의 한문체 일기는 그가 언론인이기 이전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살아내야 했던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고민과 일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일기에서 보이는 문일평의 모습은 몇 가지가 특히 인상적이다. 
 

첫 번째는 그의 가난이다. 일기 곳곳에 묻어있는 그의 생활고는 애처롭기까지 하다. 전당포 출입이 잦았고 회사에서의 가불(임금 당겨쓰기)도 반복됐다. 1월 28일 일기에는 “돌아오는 길에 질옥(필자: 전당포)에 가서 손목시계 맡긴 것을 찾아 왔다”고 썼고, 2월 27일 일기에는 “오늘 며느리가 금가락지를 35원에 팔아 경도에 있는 동표에게 돈을 부쳤다”고 했다. 3월 16일 일기에는 손녀 “혜경이가 부민의원 7호실에 입원했다. 30원을 가불해 먼저 열흘 치 병원비 14원 50전을 냈다”는 모습이 보인다. 
 

가족들 교육비와 병원비 때문에 스스로는 통증을 참아야 했다. 3월 31일 일기를 보자. “오늘부터는 손목 통증이 점차 전체 팔뚝까지 펴져 때때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그치지 않는다. 진료를 받으려고 하나 돈을 마련할 수 없으니 스스로 연민을 느낄 뿐이다.” 헤어날 길이 없는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가난이었다. 결국 8월 30일 일기에는 “출근해서 대미관계 50년사를 썼다. 외상값 독촉이 매우 심하다. 처리할 방법을 모르겠다”고 토로하고 있다. 그래도 그가 포기 못한 것은 술과 역사자료였다. 숱한 나날 술을 마셨고, 대학도서관을 찾아 자료를 찾고 베껴 쓰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4월 30일에 임시 교사직에 지원했던 며느리의 사령장이 나왔고, 5월 2일 부임했다. 어린 아이를 두고 멀리 양천까지 출퇴근해야 하는 힘든 일이었지만 가난에서 조금 벗어날 기대 때문에 기쁜 모습이 역력했다. 그날도 30원을 빌렸다. 아마도 술을 마시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일기가 보여주는 두 번째 모습은 그의 가족 사랑과 자녀 교육열이다. 8월 18일 일기는 일하는 며느리에 대한 애정이 보인다. “잉어 두 마리를 1원 20전에 사서 어항에 풀어놓았다. 며느리에게 먹이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 신문사에 가사 2원을 빌려 남대문시장에 갔다. 장어 몇 마리를 사가지고 와서 며느리에게 먹였다. 매우 허약하기 때문이다.” 그의 일기 곳곳에는 일본에 유학 중이던 아들 동표의 학비 걱정과 학업 중단 염려가 넘친다. 
 

그런 가난과 궁핍 속에서도 그가 보인 또 다른 모습은 민족 교육에 대한 헌신이다. 아들 동표의 학비 요구로 가장 힘들던 시절인 4월 12일 일기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오산 가족이 이제 불을 때지도 못할 지경이라고 하기에 한때의 곤란이라도 펴도록 춘원에게 말하여 나와 함께 10원을 마련하여 보냈다.” 가불이 반복되는 가난 속에서도 오산학교 학생들의 난방비를 후원했다. 며칠 후인 4월 26일 그는 “월급이 빚을 갚을 만큼 되지 않는다. 지난달 혜경이의 병원비와 동욱이의 신학년 학교 용품 등에 돈을 많이 썼기 때문이다”라고 낙담하고 있다.
 

문일평의 교육자로서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그의 아동, 여성교육, 교사, 교과서를 보는 관점이다. 조선일보 주최 경성 유치원연합원유회에 즈음한 글에서 그는 “오늘날까지 조선 습속의 그릇된 점으로 말하면 첫째 어린이를 어른의 소유로 알았었고, 둘째 어린이를 어른과 같이 만들려고 하였었고, 셋째, 어린이를 어른이 압박하였었다. 그러나 어린이의 인격적 존재를 인정하야 아무쪼록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기르되 좀 더 높이 대우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으니 이는 실로 신시대의 도덕적 요구로서 우리 조선인이 신생활을 함에 있어서 마땅히 먼저 어린이에 대한 대우부터 철저하게 고쳐야만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그는 어린이의 최고 두통거리인 보통학교 입학시험제를 폐지할 것을 제안했다.
 

문일평은 교육에서의 남녀 기회균등을 주장했다. 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을 위한 기성운동을 지지하며 쓴 글에서 그는 남자의학전문학교가 4개이고, 경성제대 의과까지 합치면 5개에 이르지만 여자의학전문학교가 1개교도 없는 것은 일대 모순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적어도 1~2개의 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이 긴요함을 역설했다.
 

문일평의 교육을 보는 시각이 시대에 맞고 교육학 이론에 부합함을 보여주는 또 다른 주장은 교과서와 교원 인사에 대한 소견이다. 그는 교육에서 교사와 교과서가 지닌 중요성에 주목했다. 교과서 문제에서는 내용이 지나치게 정치군사 방면에 치중하는 경향의 문제점을 지적한 후 문화방면에 좀 더 치중하는 것이 시대에 적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개선이 필요한 과제라는 점에서 그의 교육자적 시각의 훌륭함을 보여준다.  
 

교원 문제에서 그가 특히 주목한 것은 교사들에 대한 순환 근무의 문제였다. 사상적화(思想赤化)나 부패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시행하던 기계적 순환근무제를 그는 비판했다. 무릇 교원이 한 지방에 오래 근무할수록 피교육자에게 이익을 줌이 많을지언정 폐해를 끼칠 일은 적을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 근거였다. 피교육자 개인과 그 환경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교육의 근본이라는 그의 주장은 당시뿐 아니라 현재의 교육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문일평은 1939년 4월 3일 일본어 신문 ‘국민신보’가 창간되던 날 지병이던 화농성염증(急性丹毒)으로 종로구 내자동에서 사망했다. 위대한 역사학자이며 교육자가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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