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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연구

문맹퇴치·학교보급… 한국 여성 보편교육에 헌신

⑯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Lilias Horton Underwood, 1851~1921)

의료선교사로 부임해 결혼 후 남편 도와 ‘부인’으로 활동
교육·의료·사회봉사 등 여성과 아동에 적극적으로 다가가
명성왕후와 돈독한 우정으로 결혼 때 100만 냥 하사받아
KMF 편집장으로 일하며 여성 차별에 비판적 목소리 내

 

 

[이윤미 홍익대 교육학과 교수]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는 구한말과 일제시기 대표적 선교사 가문인 언더우드가의 인물로 활발한 활동을 했던 여성 선교사다.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인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원두우)의 부인이자 호레이스 호튼 언더우드(원한경)의 어머니로도 잘 알려져 있다. 기혼 여성 선교사로서, 언더우드의 부인으로 주로 알려졌지만 1888년 한국에 처음 오던 당시만 해도 의료 선교사로 부임했다. 그러다 호레이스 언더우드와 사랑에 빠지면서 1889년에 결혼을 했고 선교사 부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1851년 6월 21일 미국 뉴욕주 알바니에서 태어나 철강 자재업을 하는 부모 밑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16세 이후에는 부친의 사업을 따라 시카고로 이주해 이재민 구호활동 등에 참여했고 시카고 여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19세기 당시 미국이 국내 선교에서 해외 선교로 관심이 강하게 옮겨가는 분위기에서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그는 해외선교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가 해외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어머니의 영향도 컸다. 릴리어스의 어머니는 본인 스스로 선교의 뜻을 이루지 못한 회한이 있어 딸이 그 길을 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 
 

어머니보다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사람은 페이지니터(Fagerneather)라는 선교사다. 이 선교사는 의학을 공부하기 어려웠던 영국에서 미국 시카고로 이주한 여성으로, 릴리어스에게 의사가 돼 인도에서 전도활동을 하고자 하는 결심을 갖게 했다. 릴리어스는 1887년에 의학대학을 졸업하고 1888년에 한국에 부임하게 되는데, 인도가 아닌 조선에 오게 된 것은 북장로교 해외선교회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고 알려진다. 이렇게 1888년 독신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왔으나 1889년 3월 호레이스 언더우드와 결혼한 후 자신의 전문성보다는 남편의 사역을 돕는 선교사 부인으로 활동했다. 
 

릴리어스 호튼을 비롯한 여성 선교사들의 활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현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07년 개신교 선교공의회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기혼여성을 포함한 여성 선교사의 총수는 190명 중 110명으로 전체의 58%에 달했다. 세부적으로는 남성 80명, 기혼여성 66명, 미혼여성 44명으로 나타난다. 이 비율은 일제 후반까지도 이어져 소위 선교사 내 여초(女超) 현상이 더 심화된다. 1920년대 말의 통계를 봐도, 선교사 총수 456명 중 남성이 155명, 여성이 301명으로 66%를 차지했다. 여성 중 133명이 기혼여성(가사와 함께 복음, 교육활동을 주로 하고 소수가 의료)이었고 나머지 168명은 미혼여성이었다. 이들 미혼여성 중 69명이 복음, 55명이 교육, 36명이 의료(대부분 간호사)에 종사했다. 
 

그들의 지위를 볼 때,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여성 선교사들의 역할은 공식적으로 보조 선교사로 규정돼 있었다. 한국에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견한 미국의 방침에 따라 여성 선교사의 역할은 남성 선교사를 보조하는 것이었으며 주로 아내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돼 있었다. 19세기 전반까지 미국의 해외선교위원회(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 ABCFM)의 방침을 봐도 선교지에 파견되는 여성은 남성 선교사의 아내로 규정됐다.

 

특히 루푸스 앤더슨(Rufus Anderson)의 임기(1832~1866) 동안 ‘문명화가 아니라 복음화(Evangelize, not to Civilize)’라는 원칙이 강조돼 남성의 경우 복음화에 주력하도록 요청됐다. 교육 등 문명화 사업보다는 교회를 세우는 일이 강조됐고, 이보다 부차적 활동이었던 문명화 사업은 여성들이 보조적으로 했다. 또 여성 선교사는 남성의 보조역할 뿐 아니라 안정적 가정이라는 모범을 형성하기 위해 파견됐다. 1881년에는 미혼남성은 파견하지 않고 가정이 있는 자만 파견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1860년대 이후 여성 선교단이 만들어지면서 미혼여성들이 파견되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버어마나 인도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기혼 여선교사들이 여성 및 아동에 대한 선교를 담당해 줄 수 있는 미혼여성을 파견해주기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끝난 후 지역적, 전국적 단위로 교파를 초월한 여성선교조직이 만들어지면서 미혼여성에 대한 선교지 투입이 체계적으로 이뤄졌다. 이때 작용한 철학은 ‘여성을 위한 여성의 사업(Woman's work for Woman)’이었다. 여성선교조직들은 자체 기금을 모으고 자체 사업을 하며 기관지 등을 운영하는 형태로 선교지 여성을 위한 사업을 수행했다.
 

 

여성 선교사들의 활동은 목회업무가 아닌 교육, 의료, 사회봉사 등이었다는 점에서 선교의 본령보다는 다소 보조적이고 부차적 업무였던 측면이 있고 선교의 대상도 여성과 아동이었다. 순회선교를 하면서 주일학교, 주간학교, 사경회(Bible class) 등을 조직하고 의료 등과 연계된 구호활동이나 절제운동(금주, 금연) 등을 관장했다. 이런 ‘보조적’ 역할에도 불구하고, 여성 선교사의 활동이 두드러졌던 것은 기독교가 한국 여성에게 큰 영향을 줬기 때문이다. 이들은 권서활동을 하는 전도부인(Bible women)을 고용해 한국여성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고 문맹퇴치, 학교보급 등에 기여했다.
 

릴리어스 호튼의 경우도 이런 보편적 흐름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1888년에 입국했던 그녀는 명성황후의 시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고 명성황후가 시해될 때까지 상당한 정도 ‘우정’을 쌓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릴리어스 호튼의 파견은 당시 선교부 입장에서는 조선 왕실 병원을 확장하고 여성전용 병원으로서의 기능을 확보하고자 하는 전망과 관련돼 있었다고 한다. 릴리어스는 명성황후를 매우 기품 있는 인물로 평가했고, 명성황후도 그녀를 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89년 언더우드와 결혼하게 되자 많은 선물과 함께 당시로서 거금인 현금 100만 냥을 하사하고 병조판서이자 척족인 민영환을 결혼식에 참석시키기도 했다. 릴리어스 호튼은 명성황후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나는 그녀가 정신수준이 매우 높은 사람임을 곧 알아차렸다. 그녀는 세계의 여러 강대국들과 그 정부에 대해 썩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질문을 많이 했고 자기가 들은 것은 모두 기억했다. 그녀는 숨어 있는 유능한 외교관이었고 자기에게 몹시 반대하는 사람들의 허술한 데를 찌르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녀는 진보적인 정책을 널리 펴는 실력자였고 애국자였으며 자기 나라에 이익이 되는 것을 위해 몸을 바치고 있었고 백성의 복지를 찾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동양의 왕비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왕비는 외국의 궁전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조선 사람이었으나 완벽한 귀부인이었다.”(김철역,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 견문록, 서울: 이숲, 2008) 
 

결혼 이후 릴리어스는 한국 내 선교 활동에서 상당히 비중 있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주목할 수 있는 것은 당시 한국 내 선교공의회의 기관지였던 ‘The Korea Mission Field(KMF)’의 편집장으로 1906년에서 1914년까지 활동했던 점이다. KMF는 36년간 출간된 월간지다. 개신교선교사 연합체인 재한복음주의선교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의 결성과 함께 창간된 것으로 당시 한국 내 유일의 영문 간행물이기도 했다. 이 선교공의회는 1905년 9월 15일 미국북장로회, 미국남장로회, 캐나다장로회, 오스트레일리아장로회, 미국북감리회, 미국남감리회 등 장로교 4개 선교회와 감리교 2개 선교회의 연합으로 이뤄진 것으로 초대의장이 호레이스 언더우드였다. 
 

기존에 있던 두 개 영문 잡지인 ‘The Korea Field’와 ‘The Korea Methodist’를 합친 것이기도 해서 초기에는 이 두 잡지의 편집장들이 편집을 맡았다가 1906년부터 릴리어스가 맡게 된 것이다. 이 잡지는 전체 개신교 교파와 지역을 포괄하고 다양한 월례보고를 담고 있기 때문에 교회사적 가치뿐 아니라 사회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KMF에는 여성 선교사들도 필자로 다양하게 참여했으며 여성 관련 사역활동에 대한 보고들이 많이 있다. 교육용 자료 공유를 위한 고정란(Women's Exchange)을 두기도 하고, ‘여성 사역(Women's work)’이라는 제목으로 정기적 보고가 이뤄지기도 했다. 여성 선교사들은 기혼여성과 미혼여성을 불문하고 기본적인 선교활동의 일부를 수행했지만, 특히 기혼여성은 ‘선교활동’과 ‘부인’이라는 정체성 사이에서 역할 갈등이 있었다. 특히 가사와 선교를 병행하는 과정에서 부담을 갖기도 하고 현지 활동을 위한 언어공부(한국어)를 제대로 하기 어려운 점 등이 지속적으로 논란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릴리어스는 기혼여성들이 가사와 선교를 병행하느라 온전한 활동을 하기 어려운 조건이 있지만, 이들에 대한 차별은 부당하다는 입장이었다. 1912년 11월호에서 그는 장로교 연례회의에서 제기된 기혼여성의 투표권 문제에 대해 매우 비판적으로 서술했다. 장로회 선교부가 기혼여성들의 의견이 남편(선교사)의 의사와 결국 같기 때문에 불공정한 다수표를 양산할 우려가 있다고 보고 이제까지 투표권을 주지 않다가 기혼여성도 3년차 언어시험(한국어)을 통과한 경우에는 투표권을 주자고 제안한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릴리어스는 만일 기혼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주려면 미혼여성들처럼 1년차 시험에서 통과한 후에 부여해야지 3년차 시험을 보도록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봤다. 극소수의 기혼여성만이 한국어를 익히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할뿐 대부분의 여성이 가사와 선교를 병행하며 열심히 지내는데 차별적 취급을 하는 것은 불쾌하다고 본 것이다. 만일 기혼여성이 투표권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언어시험 준비를 하느라 선교 일을 성공적으로 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더 문제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에서 선교의 성과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한국 여성들과 밀착된 생활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조선 국권상실의 과정을 목도한 그는 조선이 독립국가로 다시 설수 있기를 기대했고 한국에 대한 왜곡된 시각에 비판적이었다. 기독교가 한국인 스스로 자주적으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기를 바랐다. 특히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 공교육을 실시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가난과 조혼 관습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다양한 교육기회를 제공하고자 노력했다.

 

이는 북감리회의 메리 스크랜튼 등이 이화전문을 중심으로 추진했던 여성고등교육 활동에 비해서는 가부장적 경향이 더 강하고 여성교육에 대한 체계적 관점이 부족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정규 여학교 교육과 함께 극빈층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실용적 교육이 교회를 통해 제공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위한 사역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릴리어스는 남편 언더우드가 1916년에 사망한 이후 아들 호레이스 호튼 언더우드와 함께 한국에 살면서 번역, 문서 발간 등의 작업을 하다가 1921년 10월 29일 70세의 나이로 별세, 양화진 외국 선교사 묘역에 안치됐다.